제목한민당수석총무 宋鎭禹 피살  
연월일1945년 12월 30일  
출전서울신문, 동아일보 1945년 12월 31일  
한민당수석총무 宋鎭禹 피살
한국민주당 수석총무 宋鎭禹는 30일 오전 6시10분경 시내 苑西町 74번지 자택에서 취침중 괴한 5,6명의 피습을 받고 권총으로 안면에 1발, 심장에 1발, 복부에 3발, 하관절에 1발의 被彈을 입고 즉시 서거하였다. 향년은 57세이다. 또 때마침 함께 취침중이던 內從 梁伸勳도 하관절에 被彈을 받어 목하 朴昌薰 외과병원에 입원가료중이다. 그런데 범인은 山亭뒤 철양벽을 뛰어 넘어 邸內에 침입한듯 하며 범행후 벽 밖에 계단이 있는 협로로 도주하였는데 아직 체포되지 못하였다.
(서울신문, 1945. 12. 31)
일생을 민족운동의 선두에 서서 일본군국주의의 毒牙밑에 꾸준히 항쟁한 古下 宋鎭禹 민중여론의 지도자요 우리 민족의 지도자로 진력하시던 선생은 가시었다. 이제 그의 약력을 적어 이 민족위에 남긴 그 거대한 족적을 보려 한다.
古下 宋鎭禹선생은 1889년 5월 8일 全南 潭陽郡 水北面 南山里에서 출생하였다. 선생은 어려서부터 매우 영특하여 6·7세때 벌써 國漢文을 읽을 수 있었고 12세때 고향에서 30리나 되는 창주月洞에서 영어선생을 모셔다가 공부하기 시작하였다. 그때부터 신문화를 호흡하여 새로운 문화를 이 땅위에 수립시키려는 밝은 관찰을 하였다. 그뒤 선생은 큰 포부로 동지 金性洙와 손을 잡고 도일하여 신학문을 배웠다.
1910년 4월에 明治大學豫科에 입학하였는데 同年 8월에 병합의 悲淚를 머금고도 귀국하지 않고 후일의 광복을 꿈꾸면서 1912년 동 大學法科에 입학하였다. 선생은 학창시대부터 신문에 뜻을 두고 언제나 신문을 예의 연구하다가 학업을 마침에 1915년에 귀국하여 동지 金性洙와 손을 맞잡고 畿湖學校를 설립하여 청년양성에 첫 걸음을 내디디었고 1917년에는 京城中央學校(畿湖學校의 後身)교장에 피임되어 준재를 기르다가 1919년 4월에는 전조선에 태풍같이 일어난 독립운동의 48인중 한 사람으로 내란죄에 연좌되어 1921년 2월까지 3년간 투옥되었다.
1921년 9월에는 주식회사 東亞日報社 사장에 취임하여 총독정치 아래에서 의지할 곳 없는 민중의 여론을 들어 權力에 항쟁하고 민중의 지도와 문화향상에 一意盡力하여 그의 언론 문화계에 바친 큰 공적은 자타가 공인하는 바다.
1925년 7월에 萬國基靑 주최로 美國布哇에서 개최된 汎太平洋會議에 조선대표로 출석하여 세계무대에 조선을 드러내어 이채를 나타냈고
귀국하여 다시 총독정치의 탄압하에 필화사건으로 1926년 9월부터 翌年 5월까지 투옥되었다.
출옥하여 다시 東亞日報社 사장으로 꾸준히 민족사상을 이 민족에게 넣어주고 지도의 任에 진력하였다.
1928년 日本 京都에서 개최된 汎太平洋會議에 조선대표로 출석하였다.
1936년 11월 일장기말살사건 이후 조선총독부의 탄압에 의하여 東亞日報社 사장의 任을 사직하고 翌年 6월부터 고문에 추대되어 1940년 동아일보 문을 닫는 날까지 총독정치와 항쟁하였다.
뒤이어 일어난 전쟁중에는 일관한 전쟁비협력자로 있다가 해방 즉시 한국민주당 당수로서 대한임시정부지지 국민대회의 旗를 들고 독립촉성의 일로로 매진하였다.
古下 宋鎭禹의 30년간 정치·경제·문교 기타 사회 각층 각방면의 지도육성에 盡瘁노력하여 조선사회에 공헌한 바 컸다.

서울신문, 동아일보 1945년 12월 3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