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정판사위폐사건 언도공판  
연월일1946년 11월 12일  
출전동아일보, 조선일보 1946년 11월 29일  
정판사위폐사건 언도공판
정판사위폐사건 언도공판은 28일 오전 10시부터 서울재판소 4호법정에서 개정되었는데 梁재판장은 별항과 같은 訓諭와 主文판결문을 낭독한 후 피고들에게 다음과 같이 검사구형대로 언도하였다.
無期懲役:李觀述·朴洛鍾·宋彦弼·金昌善
15年懲役:辛光範·朴相根·鄭明煥
28일 서울재판소에서 열린 정판사위폐사건 언도가 끝나고 재판장 배석판사 검사 서기 등이 퇴장하자 피고 朴洛種의 ‘남조선 사법권은 이로써 자살하였다. 우리는 조상해야 한다’라는 말이 있어 이에 전피고는 대성통곡하였고 또 피고 辛光範은 일장 시국연설을 하였는데 끝으로 피고들은 적기가를 부르고 일시 정내를 혼란시켰다.
◊ 주문
被告 李觀述 同 朴洛種 同 宋彦弼 同 朴昌善을 各 징역무기에 同 辛光範 同 朴相根 同 鄭明煥을 各 징역 15년에 同 金商善 同 金遇鏞 同 洪啓壎을 各 징역 10년에 처함 피고인 전원에 대하여 압수한 조선은행권 100원권 33枚(證 第45號)을 몰수함 소송비용중 鑑定人 百麟濟에게 지급한 分은 피고인 宋彦弼 同 辛光範 同 金昌善 同 朴相根 同 鄭明煥의 연대부담으로 鑑定人 公炳禹에게 지급한 分은 피고인중 李觀述을 제외한 爾餘 9명의 연대부담으로 함
◊ 梁裁判長 訓諭
“이 사건은 변호인 기타로부터 국내적 뿐만아니라 국제적으로 문제화된 극히 중대한 사건이라고 강조할만큼 과연 큰사건이었다. 당 재판소는 본 사건을 담당 처리함에 있어서 사법관의 본분을 발휘함은 이때라고 각심하여 신속과 정확의 2대 목표밑에 최선의 노력을 해 온 것이다. 검사와 피고인과 그 가족과 계호하는 형무관리와 경찰관리도 시종 일관하게 열의를 다하여 본 사건의 진전에 많은 기여를 하였다고 본다. 또 변호인단과 언론계와 사회 각 방면에서 많이 협박과 경고와 결의와 조언 격려와 찬사를 주어서 많은 편달이 되었으며 감사히 생각하는 바이다. 그러면 만인이 주시하는 재판의 실적과 결과는 어떠한가? 첫째 재판의 신속에 있어서 세간에서는 지지하니 무용의 수속을 반복하니 매수를 당한 결과 그러한 것이지하는 등 별별 혹평이 많았으나 대사건인 본 사건을 약 4개월의 시일로써 종국시키게 되었음은 日政이면 예심에서 적어도 2년 이상의 일자를 소비하게 되었으리라 추측하는 만큼 좋은 성과를 더두었다고 자부하는 바이며 둘째 재판의 정확에 있어서는 재판소의 진지한 태도와 수집된 증거의 역사가 웅변으로 증명하여 줄 것이다.
5월 2일 紙幣原板 절취의 혐의로 정판사평판주임 金昌善을 本町署에서 체포하여 취조시에 정판사위조지폐사건의 단서를 얻게 된 경찰당국은 그후로 이 사건을 둘러싸고 불면불휴의 맹활동을 개시하고 약 60여일에 걸쳐 철저하고 세밀한 조사를 거듭한 결과 경찰당국은 범죄사실이 있다고 단정하여 검사로부터 7월 17일 공소로 제기하였으며 따라서 이 사건의 전모가 세상에 알려지자 구성된 사람이 의외에도 공산당간부 혹은 당원이었었다는 점과 또 범죄내용이 국민적으로 가장 악질 죄악시하는 위조지폐라는 점으로 세인의 이목은 자못 크게 충동된 바 있었는데 사건의 귀추에 비상한 관심과 주목을 끌어오게 된 것이다.
이제 이 사건에 관련된 인적 물적 관계를 알아보면 피고 10명 변호인 10명(그중 두명은 재판도중 정직처분을 당하여 출정을 금지 당하였다.)증인 27명(증인 가운데는 경무총감 장택상 미인경무부장 씨·아이·씨관계장교 공보부장 李啓源 본정서장 李九範 등이었다. 또 증인으로 나왔다 위증죄에 걸린 자가 2명 감정인 3명 피고 심문회수 37회 공판개정회수 30회 증거 133건 사건기록서류 10,000여 페이지 방청자 10,000여명 등으로 보아 이 사건이 얼마나 복잡하고 방대하였음을 알 수 있으며 실로 세기적 사건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사건이 중대시되며 문제화되는 것은 이 사건이 건국초창기에 미치는 경향이 크기 때문에 이로 말미암아 빚어내는 정계의 혼란은 자못 심각한 바 있으며 민족적인 비극으로 건국의 애화가 아닐 수 없다. 이제 역사적인 司直의 판결은 그 흑백과 시비를 가리어 천하에 드러나게 되었다.”

동아일보, 조선일보 1946년 11월 29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