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대구 제6연대 사건의 전개 상황  
연월일1948년 11월 05일  
출전국제신문 1948년 11월 06일  
대구 제6연대 사건의 전개 상황
[대구에서 본사특파원 文濟安 5일발 특전] 기보한 바 대구의 국군 제6연대 반란사건은 4일 오전 10시 현재로 대부분이 진압되었는데 기자가 현지국군경찰과 민중에게서 수집한 정보로써 미루어본 이번 대구반란사건의 전말은 대강 다음과 같다.
지난 2일 오후 1시 20분경 軍紀隊 조장필 소위가 군기대원 수명과 함께 좌익세포책임자로 지목되는 郭鍾振 특무사를 체포하려 하매 곽은 미리 준비해둔 권총으로 조소위를 사살하고 연대 동쪽 산으로 도주했다. 이에 군기대원이 곽을 향해 사격을 개시했는데 이 총성을 계기로 미리 편성되어 있던 20여 명 병사는 李正澤상사의 지휘로 봉기해서 군기대원을 사격하는 한편 “대구시 동편에 순천방면에서 봉기한 반란군이 내습해 왔으니 곧 무장하고 출동하라”는 모략으로써 연대병사를 움직여 무기고를 풀어 무기를 2백여 병사에게 내어주고, 또 트럭 2대에 총기·탄환식량 등 다수를 만재하고 트럭 다섯 대에 분승해서 대구시를 향해 출동했다.
◊ 시가 돌입 직전에 미군부대와 충돌 : 그러나 시가지에 이르기 전에 종로에 있는 美軍兵舍 앞에서 제6연대 내의 총성으로 말미암아 긴장한 미군에게 문초 받았다. 이에 이정택상사가 탄 첫 트럭과 둘째 트럭은 틈을 타서 시내로 도주했는데, 미군의 총격으로 트럭의 타이어가 못 쓰게 되어 반란군 약 70여 명은 도보로 대구경찰서가 있는 서북쪽으로 질주했다. 이 급보를 접한 대구경찰서에서는 제5관구 경찰청의 응원으로 종로에서 경계망을 펴고 대기하고 있다가 반란군이 접근하자 격전을 전개하였다.
◊ 유탄에 무참히도 학생 10여 명 희생 : 이 때는 2일 오후 6시 20분경 이 격전에서 경찰관 전사자 4명이란 존귀한 희생이 있었으며 반란군 피살 5명, 유탄으로 소방대 망루에서 쓰러진 희생자 1명, 역시 유탄으로 희생된 학생 10여명(미확인)이 있었다. 이에 반란군은 진로를 변경해서 대구시 서북쪽 변두리를 돌아 金泉을 향해서 북행 도중 두 대로 분리되어 약 50명은 종로에서 화재현장에 갔다오는 소방차 차를 습격해서 집어타고 또다시 북행하고 나머지 20여 명은 때마침 대구역을 떠난 통근열차를 중간에서 정지시켜 편승해서 枝川까지 북행 지천에서 내린 반란군은 도보로 북행하였다. 한편 연대와 미군부대 앞에서 도주한 병사와 반란군은 연대서 북쪽에 있는 通稱 水道山 밑에서 집결하여 북행하다가 도중에서 이탈하고 연대에 돌아오고 해서 30여 명 반란군만이 북행했다.
◊ 무장해제된 반군 각 병사에 대감금 : 한편 미군은 도중에서 포위하고 무장을 해제시킨 약 150명의 병사를 연대까지 후퇴시켜 연대에 잔류해 있던 반란군이 아닌 殘留병사와 군속과 출입 상인 등 약 350명 가량을 각 병사에 감금해 두고 3일 오전 10시까지 감시하고 있었다. 이때 소방차로 북행한 50명은 통근차로 온 20여 명과 도보로 도주해온 10여 명과 도합 80여 명이 집결해서 동민 다수를 총기로 협박해서 지방 반란민을 가장시킨 다음 漆谷 架山등 수개 경찰지서 앞을 약간의 사격전을 하여가며 일로 김천으로 급행했다.
◊ 김천 근방 부락서 70여 명을 포로 : 이에 김천에 있는 제6연대 파견군과 경찰과 긴급동원한 경찰응원대 등 수백명이 김천 근방에서 이를 완전히 포위하매 협박으로 따라왔던 민중 전부와 반도 약간 명은 도주해버리고 반도 70여 명만이 포위망에 완전히 걸렸는데 포위망을 주린 경찰과 국군은 대표를 파견해서 무조건 항복을 권고했던 바 반란군도 형세 불리를 깨달았음인지 자진해서 무장을 해제하고 경찰에 체포되었다. 경찰은 이 포로 70여명을 곧 金泉刑務所에 수용했다. 미확인 정보에 의하면 이정택도 이때 체포되었다 한다. 이같이 2일 오후 1시 반 경에 돌발한 제6연대내 반란사건은 그대부분이 미군에게 감금당하고 70여 명이 김천에서 사로잡히고 20여 명이 대구시내 香村洞 三光旅館을 비롯한 시내 각처와 漆谷지서, 花園지서 등지에서 10여 명이 체포되어 결국은 사건의 발단이 된 郭鍾振을 비롯한 20여 명 반도만이 기관총 한 대와 엠완 총 수정을 가지고 삼삼오오 분산해서 대구 인근지방 촌락과 산간지대를 방황하고 있는 모양으로 그 체포는 2, 3일 내에 끝나리라는 바 이로써 반란사건은 완전히 진압된 셈이다.
일방 서울에서 이 급보를 접하고 聯隊長 회의 도중에 특별군용차로 2일 오후 7시 15분에 龍山을 떠난 제3旅團長 蔡元凱 대령은 도중에서 충청북도 淸州주둔의 제7연대 병사 약 5백 명을 거느리고 대구로 직행 3일 오전 6시 40분에 대구역에 도착하였다.
◊ 무고한 민중 석방 반군은 형무소에 : 장교와 회견해서 오전 10시경에는 미군이 감금한 2백여 명을 인수해서 반란군 150여 명을 대구형무소에 수용하도록 하는 한편 무고한 군속과 출입상인은 엄밀히 조사해서 석방하고 잔류병도 복귀시켰다. 그리고 3일 오전 3시 경 여단장 도착 전에 釜山에서 대구로 급파된 제5연대병사 약 4백 명은 4일 오후에 부산으로 돌리고 청주에서 온 병대로서 경찰과 미군과 상호협조하여 대구의 치안을 완전히 확보하고 있다.
◊ 騷優는 일단락, 계엄상태만 依然 : 이로써 대구 시내는 완전히 평온해졌는데, 이번 사건으로 2일부터 야간 통행금지 시간이 오후 7시부터 오전 8시까지로 연장되어 계엄상태와 같이 경계가 삼엄하다. 이번 반란사건으로 말미암아 일어난 피아의 손해는 다음과 같다.(4일 오전 10시 후까지 판명된 것) 국군 전사자 9명, 경찰 전사자 4명, 소방대원 희생자 1명, 남녀 중학생 10여 명(미확인), 반군 사망 5명, 대구에서 잡은 포로 약 150명, 김천에서 잡은 포로 약70명, 기타 각지에서 경찰이 잡은 포로 약 20명

국제신문 1948년 11월 06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