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대구반란사건,<대구반군사건기>(1)~(2)  
연월일1948년 11월 06일  
출전경향신문 1948년 11월 06일  
대구반란사건,<대구반군사건기>(1)~(2)
[본사 대구지사 尹光宣기자 발] 전라남도 여수와 순천을 중심으로 하여 일어난 반란사건으로 몸서리쳐지는 동족상잔의 처참한 광경이 나날이 신문지상에 보도됨에 따라 겨레의 초조한 관심은 이 비통한 사건으로 총집중되어 있던 중, 시민들은 지난 2일 오후 2시 경 별안간 화급하게 연달아 울려 오는 비상소집 싸이렌 소리와 제6연대 내에서 일부 국군의 반란사건이 일어났다는 소문에 모두 얼굴이 질리었다. 시내 요소 요소마다 갑자기 교통이 차단되고 바리케이트가 구축되고 무장 경관과 국군 軍紀隊員의 동원으로 금시에 시가전이 벌어질 것 같은 어마어마한 초비상 경비진이 펴지며 상점·회사·시장 등은 전부 문을 굳게 닫아 철시상태로 들어갔다. 간간히 들리는 총소리와 더불어 일기조차 재작년 10월 1일과 똑같은 흐리고 음울한 날씨로서 10·1사건의 그 쓰라린 체험을 겪은 시민들은 공포와 긴장한 가운데 2일 밤을 꼬박 뜬 눈으로 세웠던 것이다.
공포의 밤이 밝아서 3일 다행히 일은 미연에 방지되었으나, 시민들은 그래도 믿지 못하고 불안에 쌓인 채 가슴을 떠는 정도이었다. 먼저 사건의 진상을 살펴보자. 4일 오전 10시 현재까지 발표된 것과 직접 보고 조사한 바에 의하면 사건의 경위는 대략 다음과 같다.
지난 2일 정오 경에 제6연대 군기대의 조장필 소위 외 2명의 장교가 모종 관계자(남로당)로 인정되는 6연대 인사계 근무 特務士 郭鍾振을 체포하려고 大德山 밑 제6연대로 가서 곽을 체포하려다가 곽에게 사살을 당한 것을 계기로 약450명으로 추산되는 국군이 반란을 일으켜 전투상태로 들어갔는데, 오후 0시 30분 경에는 동 반란군은 3명을 총살하고 통신망을 절단한 다음 무기와 탄약 등을 트럭에 가득 싣고 약 70여 명이 선두로 그리고 뒤를 이어 약 280여 명이 대구 시내를 향하여 들어오다가 對鳳洞에 있는 미군 제24부대 앞을 통과하다가 입초의 정지명령을 받자 불응하고 발포를 시작하여 이쪽에서도 응전한 결과 반란군의 트럭 차륜을 사격, 운행 불능케 한 후 선발대의 전원 약 70여 명이 포로가 되고 무기 등은 압수하였다. 검문한 결과 남대구경찰서를 습격하려고 진격 중인 것이 판명되었다. 그리고 제2차, 3차로 출동하는 280여 명도 체포 수용되어 2일 오후 6시 30분 경에 포로 330명에 달하였다. 한편 백여 명의 반란군 중 일부는 義城 방면으로 하여 新川洞 방면으로 향하고, 오후 3시경 嘉昌面 방면에서 대구시내로 들어오던 방화선전주간으로 선전을 갔던 대구소방 소속 소방차 3대가 新川橋 부근에서 반란군에 납치되었다고 하며, 또 한편 일부는 大德山을 大明洞 공동묘지 화장지를 지나 시내를 향하여 들어오던 시간이 오후 1시 30분 경 이었다. 한편 이 급보를 군기대측으로부터 들은 제5관구 경찰청에서는 시내와 관하 전역에 초비상 경비의 발령을 하는 동시에 시내 각 경찰기관은 반란군과 교전할 준비를 하고 3시 50분 경 무장을 완료한 일부 경찰대는 대명동 공동묘지 부근에 출동하여 반란군과 교전이 벌어졌다. (경향신문 1948. 11. 6)
[본사 대구지사 尹光善기자 발] 이에 앞서 일부 반란군은 이미 內唐洞을 거쳐 飛山洞과 達城洞 부근에까지 이르러 달성공원 앞을 통과하고 오후 4시 30분 경 北城路 厚生商店(대구경찰서에서 200미터 지점 앞까지 이르러 경찰대와 맹렬한 전투가 시작되어 동 지점과 대구농과대학) 뒤 도로에서 ‘게릴라전’이 벌어진 □□가운데 가장 격렬한 전투 시각은 5시 30분 경이었다. 수십 분 동안 쌍방의 총칼에서 토하는 불꽃은 치열하여 유탄은 사정없이 부근 일대에 떨어져서 부근 시민들은 극도에 공포감에 떨었던 것이다. 이 전투로 인하여 대구경찰서 뒤 소방 망루대에서 감시하고 있던 李泰坤(26) 씨가 즉사하고 순경 1명이 순직하였으며 공안주임 외 2명의 경관이 중상을 당하고 그 외 유탄으로 수 명의 남녀 학생이 즉사하였다. 반란군측은 2명이 사망하고 6시 10분 경 동 반란군의 주동세력은 대구서 부근에서 격전하였으나 수명 패자들의 게릴라전은 2시□□까지 계속 되었다. 또 한편 약 20명으로 추산되는 반란군은 대구역 5시 30분발 통근열차를 타고 枝川驛에서 하차하여 金烏山방면으로 이동중이었고 일부는 達城洞 부근에서 시내로 진격하려다 경찰부대의 반격으로 칠곡 방면으로 달아나면서 도중에 있는 칠곡·東明·架山 등 3지서를 습격하여 일시는 반란군에게 점령당하였으나 3일 오전 7시 경에는 탈환하였다. 그리고 이 방면의 반란군을 추격하여 대구 軍威· 善山·金泉 등 경찰부대의 포위 작전으로 3일 오전 4시 경 금천읍 약 1킬로 지점에서 반란군은 백기를 들고 항복하였음으로 전원 70여 명을 무장해제하고 체포하였다.
제5관구 경찰청 3일 오후 1시 발표에 의하면 3일 오전 7시경 시내 七星洞 부근에서 반군 20명과 교전한 경찰부대는 그 전원을 포로로 하(이하 1줄 누락) 압수하였다고 하며 일부 慶山·河陽·永川 방면으로 분산도주한 반군은 도중에 있는 경부선 경계중인 6연대 병사 약 40명을 규합하여 淸道署 부근에 집결하고 반란기세를 보임으로 경찰대는 즉시 전투태세에 들어가 그 중 7명을 체포하고 M1 4정과 실탄 백여 발을 압수하고 잔여병은 밀양 방면으로 도주하였음으로 현재 추격수사 중에 있다고 한다.
이번에 돌발한 사래로 말미암아 민간피해는 아직 자세히 알 수 없으나 鳳德洞·大明洞·北城路·西門路·新川洞 등 그 밖에 몇 군데에서 유탄에 남녀 학생과 어린이들이 십 수 명 사망하고 그 외에 부상자가 많다. 야간 통행금지 시간은 오후 7시부터 오전 8시까지로 연장되고 각 학교는 임시 휴학를 하고, 은행·회사 등은 4일 현재까지 사무를 개시하지 않았으며, 전 시내는 아직도 삼엄한 경비 중으로 간간이 들리는 총소리에 시민들의 가슴을 서늘케 하고 있다. 도대체 우리 민족은 누구의 죄로 이렇게 서로 싸우지 않으면 안되는가! 이 땅에 언제나 참된 평화의 봄바람이 불려는지? 애타고 슬픈 마음은 제주도, 여수나 대구 시민들만의 비원이 아니리라.
(경향신문 1948. 11. 7)

경향신문 1948년 11월 06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