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李承晩 대통령 조문 등 金九 국민장에 대한 각계의 반응  
연월일1949년 07월 04일  
출전조선중앙일보 1949년 07월 05일  
李承晩 대통령 조문 등 金九 국민장에 대한 각계의 반응
李대통령 부처는 작 4일 상오 9시 40분 김구 선생 서거 후 처음으로 경교장에 조문하였다. 그리고 영결식을 앞둔 4일 정오 현재로 경교장에 조문한 弔客延數는 110만으로 추산하고 있다.
서울시는 물론 각 지방에서까지 모여든 조객은 매일같이 인산인해를 이루었으며 이 날도 조객들은 열을 지어 그칠 줄을 몰랐다. 장례를 하루 앞둔 경교장은 빈소에서는 통곡 소리가 낭자하고 학생연합합창단(藝大·梨大·淑大·延大·女醫大)의 弔歌 연습 소리는 조객의 창자를 끊는 듯 하였고 한편 韓獨黨 청년 70명의 靈柩運柩의 연습 광경도 한결 애처로왔다.
상해에서 白川 등의 왜적에 폭탄세례를 준 故 尹奉吉 의사 및 東京 이중교사건을 일으킨 李奉昌 의사의 유가족은 3일 경교장에서 다음과 같은 소감을 말하였다.
◊ 尹南義씨 談(尹의사 令弟):너나 할 것 없이 똑같은 감정인 줄로 믿는다. 복잡다단한 정국하에 우리가 크게 기대하던 거인을 흉변으로 보내게 된 치욕과 분노는 무엇으로 형언할 수 없다. 진정으로 우리가 기대하는 남북통일을 누가 성취할지 크게 우려된다.
◊ 李의사 질녀 李銀任씨 談:나는 삼촌 손에 자라 삼촌의 혁명가로서의 죽음을 목격했다. 그러나 나는 삼촌이 갔을 때도 과히 슬퍼 안했다. 이제 3천만의 태양인 백범 선생을 잃게 되었으니 이 나라의 앞길이 어떻게 될지 캄캄하다. 나는 절망에 빠졌다.
◊ 國民葬 學生會議:백범 선생 국민장 전국대학·중등학생대표자회의는 3일 하오 5시부터 시내 서울중학 강당에서 각 남녀대학·중등학생 대표 100여명이 참집한 가운데 개최되었는데 경과보고가 있은 다음 葬日에 대한 준비 及 각종 사무분담에 대한 토의를 계속하고 동 회의 명의의 조문을 채택하였다.
◊ 趙炳玉씨 弔電:방금 미국에 체류중에 있는 조병옥 박사는 김구 선생 遭難의 소식을 듣고 지난 1일 金信씨에게 다음과 같은 조전을 보내왔다.
“귀하의 위대하신 父親의 참변에 대하여 심심한 애도의 뜻을 표하나이다.”
◊ <기관 岩學院금:시내 마포에 있는 창암학원에 희사금이 들어왔다. 2일 정체 모를 청년이 동 학원에 찾아와 ‘고 백범 선생의 유지를 계승할 만한 인재를 길러주시오’하며 5,000원을 희사하였다 하는데 동 청년은 자기의 이름을 말하지 않았다 한다.
◊ 韓獨 柳東鵬씨 단식:한독당 중앙상무위원 유동붕(64)씨는 김구옹 급서에 상심한 나머지 지난 6월 30일부터 단식을 계속중에 있는데 몸이 극도로 쇠약하여 위독상태에 있다.
◊ 血書接踵:3일 현재로 고 백범 선생 영전에 전해 온 혈서는 무려 22통에 달하는데 4일 상오 2시에는 建實출신 林宗模씨가 ‘남북통일’이라고 쓴 혈서를 전달하여 왔고 또 동일 상오10시에는 개성에 있는 全元基라는 청년이 역시 ‘남북통일’이라고 쓴 혈서를 전달하여 왔다 한다.
◊ 國民葬委員會서 조위금 모집 부정:고 백범 선생 국민장 장의위원회에서는 동 위원회 명의로 조위금을 모집한 일은 없다고 3일 오후 다음과 같이 발표하였다.
“장의위원회라 하며 시내 및 지방에서 조위금 모집을 한다 하나 본 위원회에서는 그러한 모집을 한 일이 없으니 일반은 속지 않도록 하여 주기를 바란다. 조위금을 제출하려는 인사는 반드시 본 위원회 접수소에 보내어 영수증을 받기를 바란다. 어떤 개인이나 단체를 막론하고 조위금을 받은 것이 있다면 본 위원회의 영수증을 받아야 할 것이요, 영수증이 없는 것에 대하여는 책임을 질 수 없다.”
◊ 金화백은 초상화
시내 아현동에 사는 金柱亨 화백은 2일 상오 고 백범 선생 장의위원회에 백범 선생의 초상화를 그려 왔다는데 동 초상화의 크기는 20호 정도라 한다.
◊ 백범 묘소 山役에 청소년단체 봉사
고 백범 선생이 고요히 잠잘 효창공원 안 3열사 묘지선편 산록 묘소의 산역은 지난 6월 29일부터 시작되었는데 효창동 민보단을 비롯한 청파동 동민, 韓靑 麻浦區團·大韓少年團 단원 등 약 500여 명은 첫날부터 이에 호응하여 분묘 방충공사 및 도로개수공사에 무보수로 노력을 제공하고 있어 장의위원회측을 감격케 하고 있다.

조선중앙일보 1949년 07월 0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