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유엔군 철수 직후의 평양 전경  
연월일1950년 12월 5일  
출전조선일보 1950년 12월 13일  
유엔군 철수 직후의 평양 전경
[본사 특파원 全東天 記] 12월 5일 유엔군 및 국군의 전략적 철수로 적의 손에 떨어지기 직전의 최후의 평양은 폭음과 화염 그리고 그 충천하는 흑연 속에서 도강하여 남하하려는 시민들의 아우성으로 뒤덮여 있었다. 일반시민에 대한 피난 권고는 12월 3일에 내려져서 대부분의 시민은 4일까지 피난을 하였으나, 4일 저녁 대동강의 가교가 최후 철수부대의 손으로 끊긴 다음에도 이 가교로 모여드는 남하 피난민의 수는 무수하였는바 그들은 파괴된 가교를 드럼통과 부서진 가교의 木片 등으로 얽어매가지고 건너는 것이었다.
이렇게 피난민들이 건너는 동안 하오 3시가 되자 유엔군 전투기들은 모란봉 근처의 중공군 게릴라부대를 기총 소사한 다음, 도강하는 시민들을 중공군 게릴라부대로 오인하고 다시 기총탄을 내려 부어서 도강 중도에 쓰러지는 시민도 있었으나 쓰러지는 사람의 시체를 넘으면서도 도강하는 시민들의 광경은 대한민국의 자유와 평등을 이들 평양시민들이 죽음으로써 찾는 광경이기도 하였고, 괴뢰집단의 행악이 그들에게 얼마나 심독하였는가를 실증하는 광경이기도 하였다.
전투기들은 계속하여 시내의 군사시설 비행장 등을 폭격하여 피난민들이 寺洞 근방의 언덕에 올랐을 때는 맹렬한 화염이 평양을 뒤덮었는데 때마침 저녁노을이 화염에 반사하여 그 처절한 평양의 최후는 평양을 떠나는 시민들의 발을 몇 번이고 멈추게 하고 눈물을 뿌리게 하였다. 허나 이렇게 평양을 바라보며 눈물 뿌리는 시민들도 국군과 유엔군의 최후의 승리를 믿어 의심치 않는 것은 지극히 마음 든든한 점이었다. 대동강의 가교가 끊길 때까지 강을 건너지 못한 피난민들은 강서·용강쪽으로 흘러내려갔는데 그들의 대부분은 진남포·광량만을 경유해서 해로로 인천에 상륙할 것을 희망하고 있었다.
평양에서 남쪽으로 40리 떨어진 중화에서부터 신막에 이르는 300리 길의 연도는 약 50만으로 추측되는 피난민으로 덮여 있었는데 이들 일렬종대의 피난민의 대군은 하루 60리 내지 70리의 평균속도로 남하하고 있었으며, 이 피난민의 수는 그들이 한 마을 한 시정을 지날수록 늘어만 가고 있었다. 그들의 이동속도로 추측하여 오는 15일이면 그 선두부대는 서울에 들어올 것으로 보이는 바 불에 뒤덮인 자기 집을 돌보지 않고 최후의 평양에서 죽음으로써 대한민국을 찾아 남하하는 그들의 피난행렬은 정의의 승리를 시위하는 인민의 행렬 같기도 하였다.

조선일보 1950년 12월 13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