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박헌영에 대한 평정서
박헌영은 1900년 5월 1일 충청남도 예산군 신양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소작농이었고 1934년 돌아가셨다. 아내와 딸은 모스크바에 거주하였다. 지금 그는 그들이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지 못한다. 왜냐하면 1932년 이래 그들과 연락을 취하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15세까지 박헌영은 초등학교에서 공부하였고, 그 이후 19세까지는 중학교에서 공부하였다. 이 밖에도 박헌영은 17세에서 20세까지 서울에 있는 영어강습소에서 공부하였다.
1919년 3·1운동에 참여하였고 1920년 말 상해로 가 그곳에서 공산주의 단체에 가입하였다. 이 조직의 지도자는 김만겸이었다. 상해에서 국제공산청년동맹 대표자인 조훈과 알게 되었는데, 조훈은 상해에 공산청년동맹 중앙본부를 조직하였다. 박헌영은 이 공청 중앙본부의 비서로 임명되었다.
박헌영은 상해에서 조선으로 파견되었는데, 신의주 국경을 월경하는 과정에서 일제 경찰에 체포되어 평양의 감옥에서 2년간 영어의 생활을 하였다. 최고재판소 검사국 조사자료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1922년 4월 서울로 잠입하던 고려공산당 당원 박헌영, 김태연, 임원근은 조선으로 입국하는 과정에서 경찰에 체포되었다. 이들은 상해 소재 고려공산당 지도자 가운데 하나인 여운형으로부터 서울에 고려공산당을 조직하라는 지령을 받고 있었다.”(≪최고재판소 검사국 조사자료≫№ 11, 1937년 6월, 61쪽)
1924년 감옥에서 출옥한 이후 박헌영은 서울로 가서 당시만 해도 반(半)합법적으로 전개되고 있던 노동운동과 청년운동에 참여하였다. 1924년 3월 박헌영은 다시 국제공산청년동맹의 대표자인 조훈과 만나 그로부터 다시 고려공산청년동맹 중앙본부를 지도하라는 지령을 받았다. 이 시기 박헌영은≪동아일보≫직원 자격으로 합법적으로 일했으며, 이후 이 신문의 기자로 활동하였다.
1925년 4월 조선공산당이 조직되었다. 박헌영은 이 시기 고려공산청년동맹을 조직하고 그 지도자가 되었다. 이에 대해서도≪고등경찰사전≫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1925년 4월 17일 최초로 조선공산당이 조직되었다. 4월 18일 서울의 종로구 관철동 박헌영의 집에서 박헌영, 김찬, 김태연, 임원근 외 16명이 모여 조선공산당을 돕기 위해 고려공산청년동맹을 조직하였다.”(≪고등경찰사전≫1935, 102쪽)
1925년 11월 조선공산당에 대한 검거가 실시되었다. 경찰에서는 이 검속이 조선공산당에 대한 제1차 검거사건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 때 박헌영도 체포되었다.≪검사국 조사자료≫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1925년 11월 27일 서울에서 고려공산청년동맹 맹원들인 박헌영, 김경소 등이 체포되었다.”(≪최고재판소 검사국 조사자료≫№ 11, 1937년 6월, 70쪽)
1927년 9월과 10월에 조선공산당과 고려공산청년동맹을 조직한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공개적인 재판이 진행되었다. 박헌영은 이 재판에서 일본 제국주의자들에 의해 조선 인민의 민주적인 제권리가 제약당하고 있는 것을 반박하는 연설을 하였다. 이 일로 박헌영은 일본 경찰들로부터 고문과 조롱을 당하였다. 이 결과 박헌영은 정신이상 상태에 빠졌고 이 이유로 1928년 7월 감옥에서 석방되었다.
같은 해에 박헌영은 블라지보스톡으로 달아나 여기서 다시 국제혁명운동자구원회의 도움으로 건강을 회복하기 위해 세바스또뽈로 갔다.
1929년 1월 박헌영은 모스크바에 도착하여 국제레닌대학에 입학하였고 1931년 말 이 대학을 졸업하였다.
1929년 2월 박헌영은 전연방공산당(볼)에 입당하였다. 1930년 말 코민테른 산하 조선문제 3인 소위원회 위원이 되었다. 1932년 1월 박헌영은 상해에서 조선공산당 재건을 위한 준비 활동을 전개하기 위해 코민테른에 의해 그곳으로 파견되었다.
박헌영은 김단야와 함께 상해에서≪코뮤니스트≫잡지를 조선어로 발간하였다. 이 잡지는 1933년 7월까지 발간되었다.
1933년 박헌영은 다시 일제 경찰에 체포되어 1939년 7월까지 형무소에 갇혀있어야 했다.
1939년 9월 박헌영은 이관술이 지도하는 지하조직인 경성콤그룹과 연계를 맺었다. 이 시기 헌병경찰 체제는 한층 강화되어 민족해방운동의 많은 지도자들은 공산주의자들로 포함하여 혁명운동을 포기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관술이 지도했던 경성콤그룹은 박헌영의 말에 의하면 “공산주의 운동에 충실하고 혁명운동을 계속하고 있던 유일한 그룹이었다.”
박헌영은 이 그룹에 가담하여 이 그룹을 지도하기 시작하였다. 이 그룹은 서울, 인천, 청진의 노동자들 사이에서 주로 자신의 활동을 전개하였다.
박헌영은 이 그룹에 의해 발간되는 잡지≪코뮤니스트≫를 지도하였고 조선공산당 재건 활동을 전개하였다. 1939년 박헌영은 비합법적인 상황으로 전환하였다.
1941년 1월 이 조직에 대한 검거가 실시되었다. 이관술, 이현상, 김삼룡 등이 체포되었다. 박헌영은 남조선의 대구로 도피하는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경찰의 추적 때문에 그는 한 곳에서 또 다른 곳으로 수시로 거처를 옮기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러한 상황은 일본이 항복하기 직전까지 지속되었다. 이 시기 그는 대부분 광주에서 거주하였고 그곳에서 벽돌공장 노동자로 일하였다.
박헌영의 도피에도 불구하고 경성콤그룹의 활동은 계속되었다. 1945년까지 이 그룹은 4차례나 검거를 당해야 했다.
1945년 8월 18일 박헌영은 광주를 떠나 서울로 올라와서 이 때까지 감옥에서 석방된 경성콤그룹의 지도자들과 성원들을 소집하였다. 이 회의에서 정치노선에 대한 잠정적인 테제가 작성되었고 조선공산당 재건준비위원회가 조직되었다. 그리고 이 위원회의 기관지로≪해방일보≫라는 기관지를 발행한다는 결정이 채택되었다.
1945년 9월 11일 조선공산당 재건준비위원회에 기초하여 조선공산당이 재건되었고 중앙위원회가 선출되었다. 중앙위원회는 평양에 위치한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과 관계를 확립하였다.
박헌영은 남조선에서 당면 과제의 완수를 위해 공산당의 방향을 바르게 인도하고 있다. 남조선에서 공산당은 모스크바 삼상회의 결정을 지지하는 올바른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이 점에서 특히 공산당의 지도자로서의 박헌영의 공이 크다.
박헌영은 조선 인민 대중들 사이에서 공산당의 지도자로서 커다란 권위를 누리고 있다.
【출전】러시아국방성중앙문서보관소 문서군 172, 목록 614631, 문서철 17, 1~5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