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현대사와 소련의 역할(1945~1948) - ≪쉬띄꼬프일기≫를 중심으로
전현수(경북대학교 사학과 교수)
1. ≪쉬띄꼬프일기≫의 편집 및 역주
필자는 1995년 중앙일보사 현대사연구소의 지원을 받아 ≪쉬띄꼬프일기≫(이하 ≪일기≫로 약칭)를 발굴해서 그 내용의 일부를 ≪중앙일보≫ 지면을 통해 소개한 바 있다.001001 1) <발굴 스티코프비망록> (1)-(8), ≪중앙일보≫ 1995. 5. 9, 11, 16, 18, 23, 25 ; 6. 6, 13을 참조할 것. 닫기 ≪일기≫는 언론을 통해 그 내용의 일부가 알려지자마자 한국현대사 연구자들 사이에서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한국정치학회 1995년 하계학술대회에서는 발표자들 상당수가 ≪일기≫에 깊은 관심을 표명했다. 1995년 중앙일보사 현대사연구소가 주최한 모스크바국제학술포럼에서도 ≪일기≫는 발표자들과 토론자들의 열띤 논의의 대상이 되었다.
쉬띄꼬프가 한국현대사에 남긴 커다란 족적을 고려하면 연구자들이 그의 일기에 흥미를 느끼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연구자들이 ≪일기≫에 주목하는 것은 기록사료로서 ≪일기≫ 자체가 갖고 있는 사료적 경쟁력 때문이다. 북한정권의 형성에 관여한 소련 군인들이나 외교관들이 남긴 회상기들은 1960년대 이후 북한 역사학계에서 본격적으로 진행된 ‘자력에 의한 조국해방’과 ‘소련군정 없는 북한사회의 자주적 발전’이라는 주체적 역사해석을 비판하는데 일정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이 기록들은 그 자체로서 소련군의 해방자적 역할이라는
이데올로기를 재생산해 냈다. ≪일기≫는 신화적 이데올로기적 접근으로부터 해방되어 역사적 현장의 내막을 생생하게 전해줌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역사적 진실에 한층 더 가깝게 다가갈 수 있게 해 준다. 이 점이 우리가 ≪일기≫에 깊은 관심을 갖게 되는 이유인 것이다.
필자는 ≪쉬띄꼬프일기≫의 발굴과 사료적 복원 작업을 주도해 왔지만 ≪일기≫의 편집 및 역주 작업은 여러 사정으로 인해 지연되지 않을 수 없었다. ≪일기≫가 ≪중앙일보≫ 지면을 통해 국내에 소개될 당시 필자는 러시아과학원 동방학연구소 박사과정에서 유학중이었다. 당시로서는 언론의 보도 일정에 맞춰야 하는 시간적 촉박함 때문에 ≪일기≫의 주요 내용을 간추려 소개하는 수준을 벗어나지 못했다. 더구나 번역과 해석에서 오류를 범하기도 했다. 신문 연재가 끝나자 서중석 교수의 제안으로 ≪역사비평≫에 ≪일기≫의 전반적인 내용을 소개하는 연구논문을 발표하게 되었다.002002 2) 전현수, <‘쉬띄꼬프일기’가 말하는 북한정권의 성립과정> ≪역사비평≫ 1995년 가을호 참조.닫기 이 논문은 해방 직후 남북한 정치사의 전개를 소련군정과의 관련 속에서 정리한 것이다. 이 논문은 강규형 박사의 도움으로 미국의 우드로우 윌슨 센터가 발행하는 계간지 ≪국제냉전사프로젝트≫에도 소개되었다.003003 3) Hyun-soo Jeon with Gyoo Kahng, The Shitykov Diaries, COLD WAR INTERNATIONAL HISTORY PROJECT BULLETIN, Winter 1995/1996, The Cold War In Asia(Woodrow Wilson International Center for Scholars, Washington D.C.)닫기
신문과 학술지를 통해 ≪일기≫가 소개되자 미국, 일본, 러시아, 한국 및 심지어는 북한의 연구자들로부터 ≪일기≫를 공개해 달라는 요청이 이어졌다. 필자는 자신이 소장한 필사문서와 탈초자료를 연구자들에게 제공했지만 비러시아어권 연구자들에게는 언어적 장벽 때문에 ≪일기≫를 학술적으로 활용하는 것이 여러모로 어려웠다. ≪일기≫가 연구자들 사이에서 자유롭게 활용되려면 필사문서 원본에 대한 정밀한 탈초 및 교열 작업을 통해 텍스트 정본을 확정하고 이를 우리말로 번역하고 여기에 치밀한 주석을 첨가하는 편집 및 역주 작업이 필요했다.
그러나 필자는 1995년 가을 이후로는 박사학위 논문을 집필해야 했기 때문에≪일기≫의 편집 및 역주 작업을 진척시킬 수 없었다. 1998년 서울로 귀국한 이후에도 외환위기 상황에서 대학에 자리를 얻을 수 없어 2001년 2월까지 행정자치부 정부기록보존소에서 학예연구관으로 일해야 했기 때문에 ≪일기≫의 편집 및 역주 작업은 엄두도 내지 못했다. 2001년 3월 이후 경북대학교 사학과에서 근무하게 되면서 필자는 ≪일기≫의 편집 및 역주 작업에 집중할 수 있는 시간적 여유를 확보하게 되었다. 필자는 학술진흥재단 기초학문육성지원사업 소형과제로 이 작업을 추진할 결심을 하고 1년 이상 준비를 했지만 본의 아니게 소속 대학의 대형과제에 참여해야 하는 처지에 놓이게 되어 다시 2년의 시간을 지체하게 되었다. 가까스로 2003년 9월 단독으로 소형과제를 시작하면서 약 10년간 중단된 ≪일기≫의 편집 및 역주 작업을 다시 본궤도에 올릴 수 있게 되었다.
≪일기≫의 편집 및 역주 작업이 지체된 것은 필자의 개인적인 사정에만 기인하는 것은 아니다. 1995년 ≪일기≫를 발굴할 때 필자는 약 두 달간 뻬쩨르부르크에 거주하는 쉬띄꼬프의 아들 빅또르 집에 출입했다. 이후에도 수십 차례 ‘끄라스나야 스뜨렐라’(붉은 화살) 열차를 이용해서 주말에 뻬쩨르부르크에 다녀오곤 했다. 이 때 필자가 발굴한 일기는 4권이 전부였는데, 한국전쟁과 관련된 1949-50년 시기의 일기가 없었다. 이 점을 참으로 애석하게 여기고 있었는데 빅또르의 부인으로부터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빅또르의 부인 잉가 니깔라예브나에게는 당시 뻬쩨르부르크국립대학에서 신문방송학을 강의하는 친구가 있었는데, 필자가 쉬띄꼬프 부부에게 오기 1년 전쯤 이 친구가 1949-50년 시기 일기 4권을 가져갔다는 것이다. 이후 필자는 잉가의 친구에게 전화해서 일기를 가져간 사실을 확인했고 직접 만나서 이 일기 문제를 협의하자고 약속하고 약속장소에 나갔지만 상대방이 끝내 나타나지 않아 만나지 못했다. 이후에도 잉가를 통해 그 친구에게 계속 연락을 취하고 일기를 돌려줄 것을 요청했지만 이 친구는 곧 이사를 가고 자취를 감추었다. 1995년 가을 이후 2000년까지 매년 여러 차례 분실된 일기의 소재 파악에 나섰지만 끝내 찾지 못했다. 이처럼 분실된 일기를 찾아 전체 짝을 맞추려는 집착도 ≪일기≫의 편집 및 역주 작업을 지연시킨 요인이라 하겠다.
2003년 9월 학술진흥재단의 지원을 받아 ≪일기≫의 편집 및 역주 작업을 재개하면서 필자는 먼저 필사문서의 탈초작업을 전면적으로 새로 했다. 1995년 당시
필사문서의 탈초작업은 역사전문가가 아닌 미술사학도인 러시아 친구 박 에두아르드 박사의 도움을 받아 진행되었다. 이 때문에 인명, 단체명 등 고유명사의 정확한 판독에서 오류가 많았고 전문용어의 약어나 탈자를 복원하는데도 한계가 많았다. 무엇보다도 기록사료로서 일기의 편집 과정에서 통일된 기준을 확립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러시아연방기록관리청에서 작성한 ≪역사자료의 편찬 규정≫이 있었지만 이것을 어떻게 적용해야할지 막막했다.
구소련의 붕괴 이후 러시아과학원 러시아역사연구소에서 러시아 현대사, 농업사 관련 기록사료의 편찬 작업을 수행해 온 빅또르 다닐로프 교수의 문하에서 이 작업에 10년 이상 참여해 온 숙련된 역사전문가들의 도움을 받게 된 것은 필자로서는 커다란 행운이다. 다닐로프 교수의 비서로서 국제적인 사료편찬 프로젝트에서 편집 작업을 수행해 온 세르게이 먀낀꼬프 박사가 필사문서 원본에 대한 정밀한 탈초작업을 새로 해 주었다. 뻰자국립대학교 역사학부 교수인 빅또르 깐드라쉰 교수는 탈초작업의 결과를 필사문서 원본과 여러 차례 대조하여 오류를 바로잡고 ≪역사자료의 편찬 규정≫에 따라 편집 작업에 통일성을 부여했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인명, 단체명 등 고유명사를 정확히 판독하고, 전문용어의 약어를 복원하고 탈자와 문법적 오류도 바로잡을 수 있게 되었다. 한국인명의 경우 한국어 발음이 익숙하지 않아 동일한 인명이 다양하게 표기되었는데(예를 들면 홍명희의 경우에는 홍명히, 홍며희, 호명희 등으로 다양하게 표기되었다.) 이러한
오류를 탈초본에서는 그대로 살려두고 번역본에서는 매번 역주를 달아 오류를 바로잡았다. 한국지명은 일본식으로 발음한 것을 러시아어로 표기한 경우가 많았는데 이것도 탈초본에서는 그대로 살려 두었지만 번역본에서는 모두 역주를 달아 통일성을 부여했다.
일기에는 소련군 내의 사소한 인사문제라든가, 군기위반 사건이라든가, 개개인의 사생활과 같이 잡다한 기록이 많은데 편집 과정에서 한국 현대사와 관련이 없는 내용들은 가능한 한 배제하고 한국 현대사와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는 기록만을 최종적으로 텍스트 정본으로 확정하는 방침을 고수했다. ≪일기≫는 사료적 가치가 높은 것이 사실이지만 ≪일기≫가 전해주는 정보들을 사료적 원천으로 활용하기 위해서는 매우 세심한 주의가 요구된다. 그것은 ≪일기≫의 정보들이 대부분 단편적이고 압축적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정 때문에 필자는, 특히 번역과정에서, ≪일기≫의 단편적인 정보들을 그 전후맥락에서 가능한 한 정확히 독해하여 활용 가능한 사료로 복원하는데 노력을 집중했다.
이하에서는 먼저 쉬띄꼬프의 생애에 대해 살펴보고 ≪일기≫ 독해의 기술적인 문제들에 대해 검토하고, 계속해서 북한 주둔 소련군의 성격, 소련군정과 남북한의 좌파정치, 미소공동위원회와 소련의 한국임시정부 수립 구상 등의 문제들을 중심으로 ≪쉬띄꼬프일기≫의 주요 내용을 간략히 살펴보고자 한다.004004 4) ≪일기≫의 전반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주 2)의 논문과 전현수, <한국현대사와 소련의 역할(1945~1948), ≪쉬띄꼬프일기≫ 연구> ≪경북사학≫ 2004년을 참조할 것.닫기
 
2. 쉬띄꼬프의 생애와 ≪일기≫
쉬띄꼬프의 생애를 전체적으로 조망해 주고 있는 전기적인 저술은 아직 없다. 한국현대정치사와 관련된 쉬띄꼬프의 행적과 그의 사상적 면모를 전해주는 글도 존재하지 않는다. 쉬띄꼬프 자신도 자신의 생애를 되돌아보는 그 흔한 회상기조차 남기지 못했다. 그는 자신의 운명을 예감이나 한 듯 말년에 회상기 집필에 착수했지만 유년 시대의 편린을 추억하는 단계에서 집필을 중단해야 했다.005005 5) 빅또르 쩨렌찌예비치 쉬띄꼬프와의 인터뷰, 1995년, 레닌그라드. 빅또르는 쩨렌찌이 포미치 쉬띄꼬프의 장남이다.닫기 이것은 심장마비로 갑작스럽게 사망한 그의 운명에 연유하는 것이다.
이러한 사정 때문에 우리는 쉬띄꼬프의 생애에 관한 한 가장 공식적인 정보를 전해주는 ≪쏘비에트군사백과사전≫을 인용하는 것으로부터 그의 삶에 대한 추적을 시작하지 않을 수 없다.
“쉬띄꼬프 쩨렌찌이 포미치. 1907년 3월 13일 류쁘꼬에서 출생. 1964년 10월 25일 사망. 대장(1944년). 1929년 소련공산당 입당. 1927년 직업기술학교 졸업. 1938년 이래 레닌그라드주당위원회 제2비서, 1939-40년 소련·핀랜드전쟁 시기 제7군 군사평의회 위원. 제2차세계대전 시기 1942-43년 레닌그라드전선 군사평의회 위원, 1943-44년 볼호프스끼전선 군사평의회 위원, 1944년 까렐스끼이전선 군사평
의회 위원. 1945년 4월 이래 연해주군관구 군사평의회 위원. 전후 연해주군관구 군사평의회 위원(1945-47), 연해주군관구 정치담당 부사령관(1947-48). 1948-1951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주재 소련특명전권대사. 1951-1959년 당 사업에 종사, 소련공산당 노브고로드주위원회, 연해주변경위원회 제1비서 역임. 1959년 4월 이래 헝가리인민공화국 주재 소련특명전권대사. 1961년 이래 러시아사회주의공화국연방 내각 국가검열위원회 위원장. 1963년 2월 이래 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 당·국가검열위원회 부위원장. 1939-1952년 전연방공산당(볼) 중앙위원회 후보위원. 1956~1961년 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 위원. 제1·2·4·5대 소련최고회의 대의원. 레닌훈장 3회 수상, 적기훈장 수상, 1급 수보로프훈장 수상, 1급 꾸뚜조프훈장 3회 수상, 메달 수상.”006006 6) 소련국방성 군사연구소, ≪쏘비에트군사백과사전≫, 모스크바, 군사출판사, 1980, 제8권, 544쪽.닫기
공식적인 정보가 전해주는 바와 같이 쉬띄꼬프는 레닌그라드주당위원회의 제2비서와 소련군내의 정치활동가로 본격적인 정치적 인생을 시작했다. 그는 22살에 공산당에 입당하고 9년 후인 31살에 레닌그라드주당위원회 제2비서가 되었다. 파격적인 승진이 아닐 수 없다. 이러한 도약은 1934-37년 스탈린 대숙청 시기 고참 볼쉐비키 혁명가들이 대거 숙청된 이후 그 공백을 메우기 위해 스탈린 집권기에 정치적 세례를 받은 젊은 공산주의자들이 급속히 등용된 사정과 관계가 있다. 확실히 쉬띄꼬프는 스탈린 시대의 정치적 산물이었고 그만큼 스탈린주의의 열렬한 지
지자로 성장해 갔다고 볼 수 있다.
쉬띄꼬프의 정치입문 시기에 그의 삶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던 것이 쥐다노프와의 만남이었다. 그는 대독전선의 군사평의회 위원으로 있을 때 쥐다노프의 직접적인 지도 밑에 활동했다.007007 7) 뻬뚜호프, ≪조선의 통일독립을 위한 투쟁의 원점에서≫, 모스크바, 1987, 59쪽.닫기 쉬띄꼬프는 개인적으로도 쥐다노프와 친밀한 사이였다. 1948년 8월 31일 쥐다노프가 심장마비로 사망하자 쉬띄꼬프는 밤새 잠도 못자고 그의 죽음을 애통해 했다. 그는 “우리가 그렇게 사랑하던 안드레이 알렉산드로비치가 더 이상 우리와 함께 있지 않다는 사실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다”고 절규했다.008008 8) ≪일기≫ 1948.9.1.닫기 쥐다노프는 강성 이미지의 소유자로 잘 알려져 있다. 그는 전연방공산당(볼) 이데올로기사업부장으로 전쟁 기간 느슨해진 이데올로기적 긴장성을 회복시킨다는 구실로 전쟁의 종결과 함께 문학예술가들과 자연과학자들에 대한 광범위한 숙청을 주도했다.009009 9) 강인구, <1940년대 후반 북한-소련간 문화교류에 관한 연구>, 상뜨-뻬쩨르부르그대학교 박사학위 논문, 1995, 48쪽.닫기 쉬띄꼬프는 바로 이러한 인물과 함께 자신의 정치적 삶과 지향을 공유했다.
우리는 이미 쉬띄꼬프의 사상적 면모를 보여주는 몇 가지 일화를 잘 알고 있다. 쉬띄꼬프는 1946년 2월 말 평양을 방문하여 소련군사령부 지도자들과 대담하는 자리에서 조만식이 모스크바삼상회의 결정에 찬성하지 않는다는 소식을 듣고 “어찌 한국에 조만식 같은 사람이 한 사람 뿐이겠는가. 그들의 수는 100명 가까이 될 것이며 그들은 이번의 공격만으로 그치지 않을 것이다. … 조선 동지들에게 계급투쟁의 본질에 대해 보다 많은 설명을 해줄 필요가 있다”010010 10) 치스쨔꼬프, <25군의 전투행로> ≪조선해방≫, 모스크바, 1976, 56쪽.닫기고 조언했다. 쉬띄꼬프는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 개막식 연설에서 일제잔재를 완전히 숙청하고 국내의 반동적, 반민주적 분자들과 결정적으로 투쟁할 것을 요구하기도 했다.011011 11) 심지연, ≪미소공동위원회연구≫, 청계연구소, 1989, 191쪽.닫기 이처럼 쉬띄꼬프의 사상적 면모는 계급투쟁의 신봉자라는 과격한 이미지와 연결되어 있다.
그러나 쉬띄꼬프는 북한에 대해 비교적 공정한 태도를 견지하려고 노력했다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연해주군관구사령관 메레츠꼬프는 북한의 공업을 소련에 유리한 방향으로 발전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소련대외무역성 전권위원 슬라뜨꼬프스끼는 북한에서 목재와 비료를 소련으로 수출하는 무역협정을 체결하자고 제안했다. 쉬띄꼬프는 이들의 주장과 제안을 배격했다. 그는 조선인들을 속여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고, 비료와 목재는 북한 주민들이 사용하기에도 부족하다는 것을 들어 불공정한 무역협정에 반대했다.012012 12) ≪일기≫ 1946. 12. 18.닫기
쉬띄꼬프가 한국문제에 관여한 시기에 그의 정치적 위상은 어느 정도였을까? 1945년 9월 20일 스딸린이 연해주군관구와 25군 사령관에게 하달한 명령서에는 북한의 민간행정에 대한 지도는 연해주군관구 군사평의회에서 수행할 것을, 즉 쉬띄꼬프가 총괄할 것을 지시하고 있다.013013 13) 러시아연방 국방성중앙문서보관소 문서군 148, 목록 3763, 문서철 111, 92~93쪽.닫기 북한 주재 소련민정청장이었던 레베제프의 회고에 의하면, “해방 직후 북한에서 이루어진 일들 가운데 쉬띄꼬프가 관여하지 않은 일은 하나도 없을 정도였다.”014014 14) 레베제프, <수행해야 할 의무를 자각하고> ≪조선해방≫, 모스크바, 1976, 79쪽.닫기
쉬띄꼬프의 생애는 결코 순탄하지 않았다. 한국전쟁 시기 북한 주재 소련대사의 직을 맡고 있던 쉬띄꼬프는 1951년 초 갑자기 모스크바로 소환 당했다. 이후 그는 노브고로드주위원회, 연해주변경위원회를 전전하는 신세로 전락했다. 쉬띄꼬프의 부관이었던 끄라프초프의 회고에 의하면 쉬띄꼬프가 국방상 쉬쩨멘꼬에게 미군의 인천상륙 가능성을 여러 차례 보고하며 이에 대비할 것을 건의했지만 쉬쩨멘꼬는 이 사실을 당 중앙에 전달하지 않았고, 미군의 인천상륙작전으로 전세가 크게 불리해지자 당 중앙에서는 이것이 쉬띄꼬프의 직무태만에 기인한다고 하여 그에게 견책처분이 내려지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1950년대 말에 그의 정당함이 확인되어 1960년대에 들어서면 쉬띄꼬프는 이전의 지위를 회복하게 되었다고 한다.015015 15) 끄라프초프 바실리이 이바노비치와의 인터뷰, 1995년, 모스크바. 닫기 쥐다노프 사후 당 중앙에서 견고한 지반을 상실한 쉬띄꼬프에게 1950년대는 확실히 정치적 시련기였음에 틀림없다.
우리는 쉬띄꼬프의 전기 마지막 부분에 대해서도 언급할 필요가 있다. 그는 1964년 10월 25일 사망했다. 그는 1964년 여름휴가를 레닌그라드에서 보냈다. 평소 사진광이었던 그는 운명의 날에도 레닌그라드 시내에 있는 노일전쟁기념비를 촬영하러 갔다가 심장마비가 일어났다. 당시 그와 함께 있던 운전사의 말에 의하면 심한 증세는 아니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날은 일요일이어서 병원에 의사도 없었고 제대로 치료를 받을 수도 없었다고 한다.016016 16) 빅또르 쉬띄꼬프와의 인터뷰, 1995년, 레닌그라드.닫기
쉬띄꼬프는 맹렬한 정치활동가이자 타고난 기록광이었다. 그는 1938년 레닌그라드주당위원회 제2비서가 된 이래 1964년 생을 마감하는 순간까지 거의 매일 자신의 행적을 일기로 기록했다. 현재 그가 작성한 일기 60여권(각권 150~200쪽)이 남아 있다. 장성 급의 군인이 매일 업무일지를 작성한다는 것은 습관처럼 자연스러운 일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빈번한 정치적 박해 때문에 사적인 기록을 남기는 것을 극히 자제해 왔던, 1940-50년대를 살아 온 소련정치가들의 삶을 고려할 때 쉬띄꼬프의 경우는 매우 이례적이다.
그는 사적인 일기만를 작성하는데 그치지 않았다. 그는 한국문제에 관여한 시기에 무수한 보고서를 작성하여 스딸린, 당중앙위원회, 국방상, 외무상 앞으로 발송했다. 쉬띄꼬프는 이러한 사적 공적 기록행위와 함께 자신이 개입한 사건들과 관련된 자료도 광범위하게 수집했다. 그의 문서보관소에는 정치적 현장을 담은 수천 장의 기록사진이 수집되어 있다.
사진광이었던 그는 풍경사진도 많이 수집했다. 그는 자신이 썼거나 자신에게 발송된 편지, 전보, 엽서도 꼼꼼히 보존했다. 그는 신문들도 빈틈없이 스크랩했다. 그는 미소공동위원회가 진행되던 서울에서조차 남한의 좌우익 신문들을 수집했다.
쉬띄꼬프가 남긴 공식 비공식 기록은 쉬띄꼬프의 개인사뿐만 아니라 소련의 대한정책과 해방 직후 남북한의 정치경제 상황, 한국전쟁 등을 연구하는데 귀중한 사료적 원천이 되고 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쉬띄꼬프가 한국문제에 관여한 시기에 쓴 일기는 현재 일부만이 남아 있다. 그는 1945년 여름 연해주군관구 군사평의회 위원으로 부임한 이래 1951년 초까지 한국문제에 개입했는데, 이 시기 그가 쓴 일기는 모두 4권만이 남아 있다.
현재 발굴된 ≪일기≫의 집필시기와 그 분량은 다음과 같다. 제1권 1946년 9월 5일-1946년 11월 16일(149쪽), 제2권 1946년 12월 1일-1947년 2월 5일(141쪽), 제3권 1947년 7월 7일-1947년 8월 29일(193쪽), 제4권 1948년 7월 26일-1948년 9월 6일(72쪽). ≪일기≫는 외형상 1946년 9월에서 1948년 9월까지 2개년을 포괄하고 있지만, 1947년 2월에서 7월까지, 1947년 9월에서 1948년 7월까지 약 16개월의 기록은 누락되어 있다. 또한 1945년 8월에서 1946년 9월 초까지와 1948년 9월 이후의 기록도 빠져있다.
≪일기≫는 우선 순수한 군사적인 문제들에 적지 않은 지면을 할애하고 있다. ≪일기≫에는 연해주군관구 예하부대들의 군사훈련, 정치교육, 보급, 인사, 행정, 위생, 규율, 선거, 재정 등의 문제들이 자주 언급되고 있다. 그러나 ≪일기≫의 압도적인 부분은 해방 직후 남북한의 정치경제 상황에 대한 기록으로 가득 채워져 있다. 제1권에는 남한의 9월 총파업과 10월 인민항쟁 및 남한 좌익정당의 합당이, 제2권에는 북조선 도·시·군 인민위원회선거와 북조선 도·시·군 인민위원회대회가, 제3권에는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의 경과가, 제4권에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내각 구성이 집중적으로 조명되고 있다.
인상적인 것은 ≪일기≫가 쉬띄꼬프를 정점으로 하는 북한 주둔 소련군사령부가 북한뿐만 아니라 남한의 사태전개에도 깊게 개입하여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사실을 생생하게 전해주고 있는 점이다. 어쩌면 이 점이 ≪일기≫가 지닌 최대의 사료적 가치인지도 모른다. ≪일기≫는 해방 직후의 남한정치사, 특히 좌파정치사를 소련군정과의 상호연관 속에서 검토하지 않을 수 없게 강제하고 있다.
≪일기≫는 그 자체로서 사료적 원천으로 활용하기에 문제점들이 많다. ≪일기≫는 모두 필사본이어서 필체를 판독하기가 쉽지 않다. 기록자의 까다로운 필체는 서로 다른 판독을 가능하게 한다. ≪일기≫에는 필자에게만 의미가 분명한 약자들이 무수히 등장하며, 신원을 확인하기 어려운 인물들도 많이 등장한다. 문법적으로도 오류가 많아 해석상 다툼의 여지가 있다. 그리고 논지의 전개가 대단히 압축적이어서 전후맥락이 분명치 못한 곳도 많다. 서술자에게는 사태의 전개가 분명한 것이지만 제삼자에게는 사건들 간의 인과관계가 명확치 못한 경우가 허다하다.
≪일기≫의 서술시점과 관련해서도 일정한 주의가 요구된다. 대부분의 경우 일기에는 화자가 스토리의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화자는 늘 스토리 전개의 중심에 서있기 마련이고, 모든 사건의 시발과 종결이 화자의 의도대로 해석되고 기술된다. 이 점은 쉬띄꼬프의 일기도 예외가 아니다. ≪일기≫에서 쉬띄꼬프는 늘 사건의 중심에 위치한다. 그는 예외적으로만 극소수의 상급자들에게 지시를 받아 행동한다. 대부분의 경우 그는 지도자나 교사의 지위에서 주변 인물들에게 조성된 상황을 설명해 주고 이에 대처할 계획을 수립하여 구체적인 방침을 지시하는 특권을 누린다. 이러한 시점을 아무 비판 없이 받아들일 경우 남북한의 좌파지도자들은 쉬띄꼬프의 지시에 따라 단순하게 움직이는 자동인형이 되고 만다. 이것은 객관적 사실과는 거리가 멀다. 이 점이 ≪일기≫를 활용할 때 연구자들이 주의를 기울어야 하는 대목이다.
 
3. 북한 주둔 소련군의 성격
북한사 연구에 종사해 온 연구자들은 북한 주둔 소련군의 성격규명에 상당한 주의를 기울여 왔다. 북한사의 상(像)을 설정하는데 이 문제가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기존의 연구에서는 ‘점령군이다’, ‘해방군이다’, ‘점령군도 해방군도 아니다’라는 다소 혼란된 견해들이 제기되어 왔다. 아예 소련군의 존재사실 자체가 부정되기도 했다.017017 17) 김명섭, <해방 전후 북한현대사의 쟁점> ≪解放前後史의 認識≫ 6, 한길사, 1989를 참조할 것.닫기
이러한 상황이 조성된 것은 기존의 연구가 신화적 이데올로기적 방법에서 자유롭지 못했던 점에 기인하는 것이지만, 소련군의 통치방식 자체의 복잡함에도 연유하는 것이다. 북한에 진주한 소련군은 북한 주둔 소련군사령부를 설치하고 그 예하에 민정청도 조직했지만 이들 기구에 ‘군정’이라는 명칭을 씌우지 않았다. 소련군은 미군정과는 달리 북한의 정치세력에게 입법 행정의 통치 권력도 나누어주었다. 이러한 사실이 소련군은 군정을 실시하지 않았다거나, 북한의 정치세력은 완전한 자율성을 갖고 있었다거나 하는 혼란의 원천이 되어 온 것이다. 물론 오늘에 와서 이러한 혼란은 더 이상 용인되지 않고 있다. 소련군사령부와 민정청이 다름 아닌 군정기구이고 해방직후 북한사를 소련군정 시대로 이해해야 한다는 데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018018 18) Erik Van Ree, Socialism in One Zone:Stalin's Policy in Korea, 1945-1947, Oxford:Berg, 1989 ; 徐大肅, <蘇聯軍政 - 槪說> ≪아시아문화≫8호, 1992. 12, 한림대아시아문화연구소 ; Hak Soon Paik, “NORTH KOREAN STATE FORMATION, 1945-1950”, ph.D. dissertation, University of Pennsylvania, 1993 ; 徐東晩, ≪北朝鮮における社會主義體制の成立, 1945- 1961≫, 東京大學校博士學位論文, 1995 ; 전현수, ≪해방 직후 북한의 사회경제개혁(1945-1948년)≫, 모스크바, 모스크바국립대학교 아시아아프리카대학 출판부, 1997.닫기
≪쉬띄꼬프일기≫에는 1947년 2월 북조선 도·시·군 인민위원회대회의 준비과정이 구체적으로 기술되어 있다. 그런데 인민위원회대회를 전후한 정책결정 과정에 대한 기록은 소련군정의 통치형식과 소련군정과 북한 국가기구의 연결구조를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어 북한 주둔 소련군의 성격을 이해하는데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일기≫의 내용을 검토해 보자. 1946년 12월 19일 쉬띄꼬프는 연해주군관구 사령관 메레츠꼬프 및 25군 정치담당 부사령관 로마넨꼬와의 회의에서 북조선 도·시·군 인민위원회대회를 소집하여 북조선인민위원회를 수립할 것을 제기했다. 쉬띄꼬프는 이들의 동의를 얻자 로마넨꼬와 함께 대회진행과 의사일정에 대한 계획을 작성했다. 쉬띄꼬프와 로마넨꼬는 대회에 출석할 대의원들을 인민위원 3명당 1명의 비율로 비밀투표로 선출하여 1,153명의 대의원을 대회에 출석시킬 것을 결정했다. 또한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가 채택한 법령 승인, 1947년도 북조선인민경제발전계획, 1947년도 국가예산, 북조선인민위원회와 북조선인민회의 선거, 북조선인민위원회와 북조선인민회의에 대한 규정 승인 등을 내용으로 하는 의사일정과 보고자들도 확정했다.019019 19) ≪일기≫ 1946. 12. 19.닫기
북조선인민회의의 구성에 대해서는 대의원 5명당 1명의 인민위원을 선출하여 총 231명으로 구성하고, 북조선인민회의의 정당별 구성을 북로당 35%, 민주당 15%, 청우당 15%, 무소속 35%, 여성 15%로 배정하고, 사회성분별 구성을 노동자 40명, 농민 50명, 지식인 45명, 상인 10명, 기업가 7명, 종교인 10명, 수공업자 10명으로 할 것을 결정했다. 또한 각도인민위원회에서 24명, 각행정국에서 18명, 정당·사회단체에서 23명의 위원들을 인민회의에 파견하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의장, 부의장, 서기장의 선출, 북조선인민위원회 선거, 인민재판소 선거, 검사총장 선거, 인민재판소와 검찰소에 대한 규정 승인 등 북조선인민회의 의사일정도 확정했다. 쉬띄꼬프는 계획작성이 끝나자 끄라프초프를 호출하여 로마넨꼬와 함께 대회 관련 문서들을 작성하도록 지시했다.020020 20) 상동.닫기
이튿날 쉬띄꼬프는 인민위원회대회 소집과 북조선인민회의의 창설 문제에 대한 보고서를 모스크바로 발송했다. 김일성은 로마넨꼬를 통해 쉬띄꼬프의 계획을 전해듣고 이에 동의하면서 대회를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창립 1주년 기념일인 1947년 2월 8일에 소집할 수 있도록 허락해 줄 것을 요청했다. 쉬띄꼬프는 대회에서 낭독할 정치정세에 대한 보고서를 직접 작성했다.021021 21) ≪일기≫ 1946. 12. 20, 24, 27.닫기
1947년 1월 초 쉬띄꼬프, 치스쨔꼬프, 로마넨꼬, 김일성이 참석한 회의에서는 대회소집 문제가 집중 논의되었다. 김일성은 대회소집과 그 일정에 동의한다는 뜻을 전했고, 쉬띄꼬프는 그에게 대회에서 논의될 문제들과 대회가 북한의 민주개혁에서 차지하는 의의를 설명해 주었다. 김일성이 조선의 정치정세에 대해 보고하고, 김두봉이 인민경제발전계획 예정수자에 대해 보고하기로 결정되었다. 회의에서는 인민회의의 구성과 행정국장의 선출 및 면·리 인민위원회선거 계획도 검토되었다. 회의에서 김일성은 경험이 없기 때문에 1947년도 인민경제발전계획을 세우는데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토로했다. 쉬띄꼬프는 소련 경제전문가들을 배석시켜 인민경제발전계획 작성 방법에 대해 설명해 주고 계획 작성에서 고려해야 할 점에 대해 구체적으로 지시했다.022022 22) ≪일기≫ 1947. 1. 3~4.닫기
1947년 2월 4일 쉬띄꼬프는 북한 주재 소련민정청 주요 지도자들이 참석한 회의에서 대회소집과 관련한 자료들 - 대회소집에 대한 북민전의 결정서와 인민위원회 결정서, 대의원 선출규정, 의사일정, 보고들, 미소공동위원회 재개에 대하여 미소양국정부에 보내는 호소문, 북조선인민회의에 관한 규정, 북조선인민회의 1차회의 의사일정 등을 최종적으로 승인했다.023023 23) ≪일기≫ 1947. 2. 4.닫기
이처럼 쉬띄꼬프를 정점으로 하는 소련군사령부는 정책결정 과정에서 주도적이면서도 최종적인 권한을 행사했다. 북한의 정치드라마는 쉬띄꼬프의 책상에서 기획되어 연해주군관구와 소련군사령부 지도자들 회의에서 확정되면 모스크바의 재가를 얻은 후 북한 지도부에 전달된다. 소련군사령부는 북한 지도부를 독려하여 기획자의 의도에 충실하게 드라마의 대본과 조선인 출연자들을 준비하고 기획자의 최종적인 결재를 받아 드라마를 상연한다.
이러한 사실은 김일성을 수위로 하는 북한의 국가기구가 소련군사령부의 단순한 ‘괴뢰정부’는 아니었다하더라도, 소련군사령부의 ‘강력한 후견’하에 놓인 하위권력 범주였음을 의문의 여지없이 보여준다. 또한 소련군사령부의 북한 점령정책이 북한 국가기구의 구성원들을 최종적인 출연자로 등장시키는 간접통치의 외형을 취했지만, 정책결정 과정에 대한 소련군사령부의 개입은 전면적이고 직접적이었다. 이것은 소련군사령부가 사실상 군정기관이었음을 의문의 여지없이 증명하는 것이다. 이러한 복잡한 통치방식이 요구되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왜 미군정과 같이 직접적인 통치방식을 취하지 않았을까. 그것은 자신을 끊임없이 ‘해방자’ ‘원조자’로 선전하는 한 직접적인 통치형식을 취하는 것이 불가능하였기 때문이 아닐까. 그렇게 할 경우에 이데올로기와 현실의 모순이 누구에게나 투명해지기 때문이다.
 
4. 소련군정과 북한정권의 수립과정
1946년 11월 3일 실시된 북조선 도·시·군 인민위원회선거를 전후한 정치과정도 소련군정통치의 성격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준다. ≪일기≫는 선거에서도 소련군정이 정책결정의 주도자, 정책의 집행자로 등장하여 북한의 국가기구를 지도하여 계획을 관철시켜 나가는 구조를 잘 보여준다. 인상적인 것은 선거가 워낙 전국적인 규모의 정치행사였기 때문에 선거를 둘러싼 정치세력의 동향과 이에 대한 소련군정의 대책도 삽입되어 있는 점이다. 특히 선거는 기독교회의 적지 않은 반발을 불러일으켰는데 소련군정과 북한의 지도부가 이에 대처한 방식은 북한정권의 성립과정을 이해하는데 시사하는 바가 많다.
북한에서 지방인민위원회를 합법화하기 위해 선거를 실시하려는 계획이 공식화된 것은 1946년 9월 5일 소집된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제2차 확대위원회 회의에서였다. 그러나 선거 실시 계획은 이 보다 훨씬 앞선 시기, 즉 1946년 7월에 모스크바에서 있은 김일성과 박헌영의 스딸린 면담에서 확정된 것으로 보인다. 1946년 9월 9일자 일기에도 모스크바에서 논의된 일련의 사항들을 실행하는 조치들을 강구할 것이라는 기록 밑에 ‘선거’ 문제가 열거되고 있다.024024 24) ≪일기≫ 1946. 9. 9.닫기
선거규정이 발표되자 소련군정의 선거준비활동은 가시화되었다. 로마넨꼬는 북민전에서 공동후보를 추천하되 선거구마다 입후보자를 2명 혹은 1명으로 제한하는 조치를 실행에 옮겼고, 이그나찌예프는 선거준비대책을 마련하기 위해 민정청 정치지도부와 각도대표들 간의 협의회를 개최했으며, 쉬띄꼬프는 선거사업을 지원하기 위해 북한에 관련 전문가들을 파견하는 문제를 검토했다. 10월 1일 경에는 선거구들이 확정되고 각급선거위원회가 조직되었으며 선거서류들이 모두 발송되었다. 10월 7일 경에는 각급 인민위원의 입후보가 시작되었다.025025 25) ≪일기≫ 1946. 9. 11, 14, 16 ; 10.1, 7.닫기
그러나 선거준비사업은 만족할 만한 수준에 오르지 않았다. 농민들 사이에서는 “우리가 정권기관을 선거한다는 말이 무슨 말인가. 정권기관은 하느님이 내려주시거나 군주가 임명해야 된다”는 경향이 지배적이었다. 로마넨꼬는 여성들을 위한 별도의 선거구를 설정할 필요를 제기하기도 했다. 왜냐하면 유권자총회에서는 여성들을 입후보자로 선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선거철을 맞아 지주들은 토지를 다시 몰수할 것이라는 선전을 해대고 있었다. 쉬띄꼬프는 당선(黨線)을 통해 선전원들과 보고자들을 농촌과 기업소에 파견하여 선거선전활동을 강화할 것과 농촌이 움직이지 않고 있는 사정을 감안하여 정치학교의 모든 학생들을 선거해설사업에 내보낼 것을 지시했다.026026 26) ≪일기≫ 1946. 9. 24 ; 10. 4, 7.닫기
쉬띄꼬프는 1946년 10월 21-27일 평양을 직접 방문하여 선거준비사업을 현지에서 지도했다. 그는 우선 정당·사회단체 지도자들을 접견하여 선거준비사업을 독려했다. 그리고 실물선전자료 간행물의 준비상태, 각급인민위원 입후보자의 정당별, 사회성분별, 교육수준별 구성, 유권자수와 공민증 교부, 선거투표소 설치, 보안경계 등 소련군정의 선거대책을 점검했다. 쉬띄꼬프는 11월 1-5일 재차 평양을 방문하여 선거준비사업을 점검했다. 제2차 현지지도를 통해 그는 선거관련서류들의 발
송현황과 유권자수 통계를 점검하는 한편 각도에 선거사업을 감독할 전권위원들을 파견했다.027027 27) ≪일기≫ 1946. 10. 21~27; 11. 1~3.닫기
선거는 유권자 총 4,480,627명 중 4,423,383명이 투표에 참여하여 98.7%의 투표율을 기록하는 대성황을 이루었다. 그러나 선거를 앞둔 북한에서는 ‘사고’가 적지 않았다. 함흥에서는 조선민주당 당원들이 선거에 비협조적인 태도로 나왔고 선거반대 전단들이 배포되기도 했다. 천도교청우당 위원장 김달현은 쉬띄꼬프와의 회견에서 인민위원회선거가 일제시기 도지사선거 보다는 좋은 일이지만 통일에 방해가 되어서는 안된다는 견해를 표명했다. 기독교인들은 선거반대운동의 주력부대를 형성했다. 그것은 선거가 기독교의 종교적인 제일(祭日)인 일요일에 치러지도록 공포되었기 때문이다.028028 28) ≪일기≫ 1946.10, 24, 30 ; 11. 3, 4.닫기
1946년 10월 25일 목사들은 로마넨꼬를 방문하여 (1) 교회와 국가를 분리할 것, (2) 신자들을 정치활동과 시위에 동원하지 말 것, (3) 학교에서 반종교교육을 실시하지 말 것, (4) 선거일을 연기하든지 투표를 11월 4일에 실시할 것 등을 요구했다. 로마넨꼬는 목사들과의 대화를 거부했고 선거가 인민위원회의 사업이라고 언명했다. 이튿날에도 목사들이 김일성을 방문하여 인민위원회가 기독교 신자들을 전혀 배려하지 않고 있다고 불평했다. 그들은 기독교 신자들은 일요일을 마땅히 하나님께 바쳐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김일성은 “종교는 결코 민주개혁 사업에 방해가 되어서는 안된다. 우리 북조선에는 신자들도 많고 종교들도 많다. 그러나 기독교 신자들을 제외하고는 어느 누구도 민주개혁 사업을 방해하고 있지 않다”며 목사들을 질책했다.029029 29) ≪일기≫ 1946.10. 25, 26.닫기
그러나 김일성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목사들의 ‘불온한’ 행동은 계속되었다. 목사들의 ‘비합법적’ 집회들이 여러 군들에서 개최되었고, 천주교 신부들도 이에 가세했다. 목사들은 신자들에게 선거에 참여하지 말라고 설교했다. ‘선거를 파탄시키기 위해’ 서울에서 목사가 파견되기도 했다. 목사들은 전술을 수정하여 투표에는 참가하되 투표용지를 모두 검정함에 넣을 계획도 고려했다.030030 30) ≪일기≫ 1946.10. 29, 31.닫기
일요일선거는 소련의 반종교적인 사회주의 선거문화의 전통이 북한에 수입된 것이지만 북한에서는 기독교회의 분열과 탄압을 위해 의도적으로 활용된 측면이 있다. 기독교인들의 반발이 당연히 예견되는 일요일선거를 강행하려 한 것은 소련군정과 북한 지도부의 기독교회에 대한 정책방향을 선명하게 드러낸 것이다. 소련군정과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에 잠재적인 불만세력으로 존재해 온 기독교회를 분열시키고 반대세력을 배제하기 위한 수단으로 선거를 활용하고자 했던 것이다.
 
5. 소련군정과 남한의 좌파정치
해방 직후 남한의 좌파정치를 남한의 테두리 안에서만 탐구해 온 기존의 연구는 신전술의 등장, 좌익정당의 합당, 좌우합작운동의 좌절, 9월 총파업, 10월 인민항쟁 등 정국의 변화를 주도하는 ‘보이지 않는 손’의 정체를 파악할 수 없었다. ≪쉬띄꼬프일기≫는 ‘보이지 않는 손’이 바로 소련군정을 통한 소련의 정책개입이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일기≫는 해방 직후 남한의 좌파정치에 대한 소련군정의 개입의 실상을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 이 사실은 해방 직후 남한의 좌파정치는 남한의 테두리 안에서만 탐구해서는 그 실상을 파악할 수 없고, 반드시 소련군정과의 관계 속에서 탐구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지적해 주는 것이라 하겠다.
남한 좌익정당들의 합당문제가 논의되던 출발단계에서부터 소련군정과 북로당의 지도부는 여운형과 백남운 및 공산당 내 반대파를 합당반대세력으로 규정하고, 이들의 행동을 미군정과 연결된 것으로 인식했다. 더구나 합당반대세력을 각 당에서 축출한다는 과격한 대응책을 선호했다. 그러나 소련군정과 북로당의 압력에 의해 ‘반대파들의 기세는 현저히 위축되었지만’, 여운형과 백남운은 여전히 합당노선에 동의하지 않았다.031031 31) ≪일기≫ 1946. 9. 16, 19.닫기
합당이 지지부진하자 소련군정과 북로당은 남한의 좌익정파들을 북으로 불러 들 여 직접 설득에 나섰다. 1946년 9월 24일 고찬보가 이끄는 신민당 대표단이 방북하여 김일성과 회담했다. 그러나 합당지지자인 고찬보조차 당분간 통합을 중지할 것을 제기했다. 26-27일에는 신민당 대표단과 김일성, 김두봉, 최창익, 허가이 등 북로당 지도부의 확대회담이 개최되었다. 회담에서 인민당과 신민당은 합법성을 유지하는 것이 필요하지만, 공산당은 비합법투쟁을 전개해야 한다는 점이 확인되었다. 그러나 합당의 절차에 대해서는 합의가 도출되지 못했다.032032 32) ≪일기≫ 1946.9. 24, 26~27.닫기
신민당 대표단이 방북한 시기에 여운형도 평양에 와 있었다. 9월 25일 여운형과 김일성의 회담이 진행되었고, 28일에는 로마넨꼬와 여운형의 회담이 개최되었다. 쉬띄꼬프는 여운형과의 회담에서 소련군정 지도부가 취해야 할 입장을 로마넨꼬에게 하달했다. 쉬띄꼬프는 여운형에게 좌우합작을 추진하지 말 것과 입법기관 선거에 참여하지 말 것을 요구하도록 지시했다. 또한 여운형에게 남조선민전이 공산당 지도부의 체포령 취소와 감옥으로부터 좌파의 석방 및 테러중지를 미군정에 요구하도록 했다. 쉬띄꼬프는 이에 대한 반대급부로 공산당을 합법적으로 활동하게 할 것과 3당합당을 잠시 중단할 것을 약속해도 좋다고 했다.033033 33) ≪일기≫ 1946.9. 26.닫기
로마넨꼬는 여운형이 미·소공동위원회 사업을 신속히 재개할 것을 요청했고, 상호신뢰 관계를 구축하는 문제에서 소련군정과 북한 지도부에 대해 매우 좋은 인상 을 갖게 되었다고 보고했다. 그러나 로마넨꼬의 낙관적인 평가와는 달리 여운형은 서울로 돌아가서도 여전히 동요하는 입장을 보였다. 남조선민전 회의에서 남조선과도입법의원선거 참여 문제가 논의되었을 때 허헌은 반대의사를 분명히 했지만 여운형은 동요하는 태도를 보였다.034034 34) ≪일기≫ 1946.9. 28, 10.1.닫기
공산당과 신민당 내의 반대파의 활동도 여전히 수그러들지 않았다. 9월 28일 강진을 중심으로 하는 공산당 대회파는 170명의 당원들을 소집하여 당대회를 개최했다. 대회에서는 공산당 중앙위원회와 대회파의 통합문제가 제기되었고, 박헌영 이강국 강진 등을 성원으로 하는 중앙위원회를 선출했다. 백남운은 미군정과 경찰의 보호하에 당에서 제명당한 사람들을 출석시켜 당대회를 소집했다. 대회에서는 공산당 지지자들을 모두 당에서 축출하는 결정을 채택하고 백남운을 위원장으로 하는 중앙위원회를 선출했다. 10월 16일에는 사회로동당 준비위원회가 공식 발족되었다.035035 35) ≪일기≫ 1946. 10. 2, 21.닫기
사회로동당 준비위원회가 발족되자 10월 22일 김두봉은 백남운을 만나 “왜 좌우합작에 동조하고 북조선의 지시를 이행하지 않는가” 추궁했다. 김일성은 강진을 만나 합당이 결렬된 모든 책임이 그에게 있다고 비난했다. 김일성은 그가 “미제국주의의 주구인지 아닌지는 확인할 수 없지만 미국인들에게 커다란 도움을 주고 있다”고 위협했다. 백남운과 강진에 대한 각개격파가 일단락되자 합당문제에 대한 최종적인 결정이 내려졌다. 10월 22일 쉬띄꼬프, 김일성, 박헌영의 회담에서 남로당 결성이 공식화된 것이다. 회담에서는 허헌을 위원장으로 박헌영과 이기석을 부위원장으로 선출하고 7명의 성원으로 정치위원회를 구성하며 13개의 국을 설치하고 45명(공산당 20명, 인민당 8명, 신민당 7명, 사회단체 10명)의 성원으로 중앙위원회를 조직할 것이 결정되었다.036036 36) ≪일기≫ 1946. 10. 22.닫기 11월 23일 남로당 결성대회가 소집되었다.
소련군정과 북로당의 비난에 직면하자 백남운은 입법기관의 창설을 지지하고 파업을 비난하는 사회로동당의 선언이 자신과 무관한 일로 자신은 사회로동당의 입장에 동의하지 않는다고 성명했다. 남로당이 결성되자 여운형은 사회로동당의 지도적 지위에서 물러났다. 그는 “좌우합작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으나 결과적으로 아무런 성과도 거두지 못했다”고 평가하고, “나는 정치적으로 준비가 덜 된 사람이다. 나에 대한 좌익단체들의 비판은 전적으로 타당한 것”이라고 은퇴의 뜻을 밝혔다. 강진도 자신의 오류를 자기비판했다. 그는 한걸음 더 나가 사회로동당 해체의 주동자로 나섰다.037037 37) ≪일기≫ 1946. 11.12; 12.10, 17.닫기
남한 좌익정당의 통합과정에서 소련군정과 북로당은 남한 좌익정파들 사이의 이
견을 조정하는 중재자 역할을 했다. 그러나 엄밀한 의미에서 말하면 단순한 중재자가 아니라 통합의 주도자로 활약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소련군정과 북로당은 합당과정에서 시종일관 박헌영을 지지했다. 쉬띄꼬프는 ‘성공적으로 그러나 어렵게 성취된 합당’을 축하하는 전문을 박헌영에게 보낼 것을 로마넨꼬에게 지시할 정도였다.038038 38) ≪일기≫ 1946. 12. 2.닫기 소련군정과 북로당이 다른 정파들로부터 극심한 반발을 사고 있던 박헌영을 지지한 것은 박헌영이 남한내 좌익정파들 가운데 최대정파의 오너였다는 사실뿐만이 아니라 미·소공동위원회 결렬 이후 박헌영이 제출한 신전술이 소련군정의 대한정책방향과 일치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일기≫는 공산당 지도부가 소련군정과 협의하면서 9월총파업과 10월인민항쟁을 이끌어간 사실도 보여준다. 1946년 9월 9일 박헌영은 쉬띄꼬프에게 당이 사회단체들을 어떻게 지도해야 하는지를 문의했다. 확실히 9월 9일은 10월로 예정된 총파업이 9월로 앞당겨지는 시점이었기 때문에 박헌영의 문제제기가 예사롭지 않다. 쉬띄꼬프는 임금인상, 체포된 좌익활동가들의 석방, 미군정에 의해 정간된 좌익신문들의 속간, 공산당 지도자들에 대한 체포령 철회 등의 요구조건들이 받아들여질 때까지 파업투쟁을 계속하라고 주문했다. 그는 이 요구들이 충족될 때 파업투쟁을 중지할 것을 권고했다. 또한 파업투쟁의 조직자들과 참가자들에 대해 미군정이 탄압을 가하지 말도록 요구할 것도 충고했다. 그러나 그는 인민위원회로 권력을 이양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미군정과 계속 협상하겠다고 성명할 것’을 권고했다.039039 39) ≪일기≫ 1946. 9. 28.닫기 이 점은 매우 주목할 만한 사실이다. 이것은 ‘인민위원회로의 권력이양’을 총파업의 요구조건에서 사실상 배제하도록 권고한 것이다. 이것은 총파업을 미군정의 정책을 비판하는 수준으로 제한하고, 투쟁이 미군정타도의 직접적인 정권투쟁으로 전화할 가능성에 제동을 거는 것이다.
총파업이 폭동으로 전화하는 전혀 새로운 정세에 직면하여 공산당 지도부는 쉬띄꼬프에게 향후 투쟁방침에 대한 조언을 요청했다. 조두원은 빨치산부대들이 조직되어 ‘민주진영과 반민주진영 사이에 전투가 전개되고 있다’고 전하고 빨치산투쟁을 본격적으로 전개해야 할지 자제해야 할지를 문의했다. 박헌영은 빨치산부대에 보급할 식량과 탄약이 부족하다고 언급하고 향후 투쟁방침에 대해 조언을 구했다. 쉬띄꼬프는 북한이 무장투쟁의 배후기지로 전화될 가능성을 차단하고자 했다. 그는 남한에서 무장대오들이 탈주하여 북으로 넘어와 그들에게 일자리를 주선해 줄 것을 요청하자, 이들을 “무장해제시켜 조사하고 잠시 동안 붙잡아 두었다가 남한으로 귀환시키든지 혹은 억류하라”고 지시했다.040040 40) ≪일기≫ 1946. 10. 22.닫기
 
6. 미소공동위원회와 한국임시정부 수립 구상
미소공동위원회는 한국 임시정부 수립을 위한 미소 교섭의 주 무대로 기능했다. ≪쉬띄꼬프일기≫는 미소공동위원회의 사업에 대해서도 지금까지 공개되지 않은 많은 새로운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이미 위에서 지적한 것처럼 ≪일기≫ 3권은 거의 대부분이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와 관련된 기록으로 가득 채워져 있다. 특히 소련의 한국임시정부 수립 구상이 어떻게 변해갔는지 잘 드러나 있다.
≪일기≫에 의하면 쉬띄꼬프는 이미 1946년 9월 중순 미소공위의 재개를 고려하며 모스크바로 보고서를 보내고 있었고, 9월 말 여운형이 평양을 방문한 시점에 소련군정과 북로당은 미소공위를 신속히 재개한다는 방향에 서있었다.041041 41) ≪일기≫ 1946. 9. 6, 16, 26.닫기 미소공위 재개에 적극성을 보이는 것을 미국측에 대한 양보로 간주한 쉬띄꼬프가 공위재개를 고려한 것은 주목할 만한 변화다.
소련군정의 정책전환 동기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미소공위 결렬 이후 조성된 남한의 좌익운동정세에 주목해야 한다. 좌익진영의 강화정책은 북한에서는 비교적 쉽게 진척되었지만, 남한에서는 여운형 백남운 강진 등의 반발로 무수한 갈등을 야기하며 좌익진영의 분열로 귀결되었다. 여운형은 특히 좌익정당의 합당에 강하게 반발하며 좌우합작과 좌익의 입법의원 참여를 주장하고 나섰다. 소련군정은 좌우합작과 좌익의 입법의원 참여가 미군정의 지위를 강화시킬 것이라고 보고, 이를 저지하기 위해서는 미소공위를 신속히 재개시켜야 한다고 판단했다.042042 42) ≪일기≫ 1946. 9. 26.닫기
소련군정은 여운형을 설득하여 소련군정 주위에 묶어두기 위해 그를 평양으로 불러들였다. 9월 25일 방북한 여운형은 북로당 정치위원들 및 주북한소련민정청장 로마넨꼬와 회담을 갖고 미국의 대한정책, 삼당합당, 좌우합작, 입법의원 참여, 미소공위 재개 등에 대해 의견을 교환했다.043043 43) 이하 회담에 대한 정리는 국방성문서보관소 문서군 379, 목록 532092c, 문서철 2, 63-79쪽(로마넨꼬가 쉬띄꼬프에게, 여운형의 북한방문에 대한 보고, 여운형과의 대담, 1946. 9. 28)을 참조.닫기
여운형은 미군정이 좌익정당의 합당을 미군정에 반대하기 위한 것으로 보고 이에 완강히 반대하고 있어 합당이 이루어지면 로동당은 불법화될 것이기 때문에 합당을 추진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는 미소공위 재개가 요원한 일이라면 좌우합작을 추진하여 미소공위의 신속한 재개와 모스크바결정의 정확한 실천을 요구하고, 입법의원에 참여해서 우익의 고지선점을 막고 거기서 우익과 싸워야 한다고 역설했다. 여운형은 미소공위의 신속한 재개를 요청했다.
회담에서 로마넨꼬는 미군정의 지위를 강화시킬 좌우합작과 좌익의 입법의원 참여에 반대하고 좌익정당의 통합을 성사시켜 좌익진영을 강화하는데 커다란 관심을 보였다. 로마넨꼬는 여운형을 소련군정 주위에 묶어두기 위해 그에 대한 소련측의 신뢰와 소련군의 해방자적 역할을 강조하고 미소공위의 신속한 재개를 약속했다. 미군정의 지위를 강화시킬 좌우합작에 의한 입법의원 창설 기도를 저지하고 좌익진영을 강화하기 위해 미소공위 재개전술이 등장한 것이다.
소련군정은 미소공위 재개를 공론화하고 미국측의 의견을 타진해 보기 위해 10월 초 미국대표 번스를 평양으로 초청했다. 번스는 소련군정 정치고문 발라사노프와의 대담에서 소련측이 아무런 양보도 하지 않아 불만이라고 토로했다. 번스는 이승만과 김구에 여전히 호의적인 태도를 보였지만 서로 상의하여 여운형으로 타협보자고 제안했다. 번스는 미소공위 재개를 위해 하지와 치스쨔꼬프의 서한을 준비하지고 제안했다.044044 44) ≪일기≫1946. 10. 3, 7.닫기
번스의 평양방문을 계기로 미소공위 재개교섭의 물꼬가 트였지만 미소공위가 재개되기까지는 8개월에 가까운 적지 않은 시일이 소요되었다. 1947년 5월 21일 미소공위가 재개되었다. 미소양측은 6월 11일 협의 참가를 희망하는 단체들로 하여금 5호성명에 대한 서명과 임시법규 정부정강에 관한 답신서를 첨부한 신청서를 제출하도록 권고하는 공동성명 11호에 합의했다. 6월 하순 신청서 접수가 끝나는 시점까지 미소공위는 순조롭게 진행될 것처럼 보였다. 미소공위는 6월 말과 7월 초에 서울과 평양에서 협의신청 단체들과 회합을 갖고 협의절차에 대한 설명회를 가졌다. 그러나 7월 초 협의대상 명부작성 문제를 논의하는 단계에 들어서자 미소공위는 난항을 거듭했다.
소련측은 한국인민 앞에 반탁투위 및 전체적으로 우익진영과 미군정의 권위를 실추시키기 위해 끊임없이 조건을 제기했다. 미소공위는 1946년 5월에서 한 발자국도 더 나가지 못했다. 7월 말 이미 쉬띄꼬프는 정부수립을 한국인들 자신에게 맡기고 미소양군이 철수하는 내용의 ‘최후의 종국적인 성명’을 고려했다. 미소공위 결렬이 돌이킬 수 없는 사실로 인식된 것이다. 그러나 정부수립을 한국인들에게 맡길 경우 반탁세력의 참여를 배제할 수 없고, 좌익 보다 노련한 정치가들이 많은 우익이 정부수립을 주도하게 될 위험이 있었다.045045 45) ≪일기≫ 1947. 7. 23, 30.닫기
쉬띄꼬프는 미소공위를 결렬시키는 것이 소련측에 불리하다고 판단했다. 반탁투위에 가입한 단체들이 성명에 서명한 후 모스크바결정에 반대했다는 증거자료가 적어 작년처럼 이 문제로 미소공위를 결렬시키는 것은 설득력이 없었다. 미소공위 결렬은 남한의 좌익에 대한 탄압을 강화시켜 좌익에 커다란 타격이 될 것도 명확했다. 우익과 미군정은 정권기관들을 선거하고 부분적인 개혁조치들을 실시하고 미국의 경제원조를 현실화해 자신의 지위를 강화시킬 수 있었다.046046 46) ≪일기≫ 1947. 8. 2.닫기
소련대표단은 8월 5일 협의단체 명부작성 문제를 수석대표와 제1분과위원회에 위임하고, 임시법규 정부정강 임시정부구성 등에 대한 논의를 2,3분과위원회가 즉 각 개시하자고 제안했다. 미소공위를 결렬시키지 않고 협의를 계속하여 임시정
부 조직원칙과 구성에 대한 미국의 관점을 폭로하고, 소련대표단의 체류기간을 연장시켜 좌익의 입지를 강화하며, 정부수립에 대한 소련측의 지향을 과시할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047047 47) ≪일기≫ 1947. 7. 30.닫기
쉬띄꼬프는 이 제안이 거부되자 정당사회단체 대표들로 임시인민회의를 수립하거나 남북한총선에 의해 헌법제정회의를 수립하는 두 가지 방안을 놓고 다시 고민했다. 선거를 실시할 경우 미국대표들이 북한에 주재하게 되어 북한우익의 활동이 고무될 것이고, 남한우익이 북한에 대표파견을 요구할 것이며, 미국과 우익이 선거인단을 통한 다단계선거를 요구할 수 있다는 ‘부정적 측면과 난점’이 존재했다. 결국 훈령에 규정된 전한국임시인민회의 수립 제안을 제출하는 것으로 결정되었다.048048 48) ≪일기≫ 1947. 8. 6, 13.닫기
미소공위가 결렬되어 남북분단이 고착될 위기에 직면해 쉬띄꼬프는 남북한총선에 의해 통일정부를 수립하는 적극적인 방안을 모색했지만 소련대표들은 이에 동의하지 않았다. 레베제프는 ‘책임질 수 없다고 하면서 신경질적인 거부반응을 보였다’. 남북한총선 구상은 소련대표들의 반대로 소련정부에 제안되지 못했다. 그러나 소련정부 차원에서도 이 구상이 받아들여질 가능성은 희박했다. 소련의 정치경제적 이해를 보장해 줄 북한의 ‘민주기지’를 미국과 남한의 우익에 개방할 가능성은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註 001
1) <발굴 스티코프비망록> (1)-(8), ≪중앙일보≫ 1995. 5. 9, 11, 16, 18, 23, 25 ; 6. 6, 13을 참조할 것.
註 002
2) 전현수, <‘쉬띄꼬프일기’가 말하는 북한정권의 성립과정> ≪역사비평≫ 1995년 가을호 참조.
註 003
3) Hyun-soo Jeon with Gyoo Kahng, The Shitykov Diaries, COLD WAR INTERNATIONAL HISTORY PROJECT BULLETIN, Winter 1995/1996, The Cold War In Asia(Woodrow Wilson International Center for Scholars, Washington D.C.)
註 004
4) ≪일기≫의 전반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주 2)의 논문과 전현수, <한국현대사와 소련의 역할(1945~1948), ≪쉬띄꼬프일기≫ 연구> ≪경북사학≫ 2004년을 참조할 것.
註 005
5) 빅또르 쩨렌찌예비치 쉬띄꼬프와의 인터뷰, 1995년, 레닌그라드. 빅또르는 쩨렌찌이 포미치 쉬띄꼬프의 장남이다.
註 006
6) 소련국방성 군사연구소, ≪쏘비에트군사백과사전≫, 모스크바, 군사출판사, 1980, 제8권, 544쪽.
註 007
7) 뻬뚜호프, ≪조선의 통일독립을 위한 투쟁의 원점에서≫, 모스크바, 1987, 59쪽.
註 008
8) ≪일기≫ 1948.9.1.
註 009
9) 강인구, <1940년대 후반 북한-소련간 문화교류에 관한 연구>, 상뜨-뻬쩨르부르그대학교 박사학위 논문, 1995, 48쪽.
註 010
10) 치스쨔꼬프, <25군의 전투행로> ≪조선해방≫, 모스크바, 1976, 56쪽.
註 011
11) 심지연, ≪미소공동위원회연구≫, 청계연구소, 1989, 191쪽.
註 012
12) ≪일기≫ 1946. 12. 18.
註 013
13) 러시아연방 국방성중앙문서보관소 문서군 148, 목록 3763, 문서철 111, 92~93쪽.
註 014
14) 레베제프, <수행해야 할 의무를 자각하고> ≪조선해방≫, 모스크바, 1976, 79쪽.
註 015
15) 끄라프초프 바실리이 이바노비치와의 인터뷰, 1995년, 모스크바.
註 016
16) 빅또르 쉬띄꼬프와의 인터뷰, 1995년, 레닌그라드.
註 017
17) 김명섭, <해방 전후 북한현대사의 쟁점> ≪解放前後史의 認識≫ 6, 한길사, 1989를 참조할 것.
註 018
18) Erik Van Ree, Socialism in One Zone:Stalin's Policy in Korea, 1945-1947, Oxford:Berg, 1989 ; 徐大肅, <蘇聯軍政 - 槪說> ≪아시아문화≫8호, 1992. 12, 한림대아시아문화연구소 ; Hak Soon Paik, “NORTH KOREAN STATE FORMATION, 1945-1950”, ph.D. dissertation, University of Pennsylvania, 1993 ; 徐東晩, ≪北朝鮮における社會主義體制の成立, 1945- 1961≫, 東京大學校博士學位論文, 1995 ; 전현수, ≪해방 직후 북한의 사회경제개혁(1945-1948년)≫, 모스크바, 모스크바국립대학교 아시아아프리카대학 출판부, 1997.
註 019
19) ≪일기≫ 1946. 12. 19.
註 020
20) 상동.
註 021
21) ≪일기≫ 1946. 12. 20, 24, 27.
註 022
22) ≪일기≫ 1947. 1. 3~4.
註 023
23) ≪일기≫ 1947. 2. 4.
註 024
24) ≪일기≫ 1946. 9. 9.
註 025
25) ≪일기≫ 1946. 9. 11, 14, 16 ; 10.1, 7.
註 026
26) ≪일기≫ 1946. 9. 24 ; 10. 4, 7.
註 027
27) ≪일기≫ 1946. 10. 21~27; 11. 1~3.
註 028
28) ≪일기≫ 1946.10, 24, 30 ; 11. 3, 4.
註 029
29) ≪일기≫ 1946.10. 25, 26.
註 030
30) ≪일기≫ 1946.10. 29, 31.
註 031
31) ≪일기≫ 1946. 9. 16, 19.
註 032
32) ≪일기≫ 1946.9. 24, 26~27.
註 033
33) ≪일기≫ 1946.9. 26.
註 034
34) ≪일기≫ 1946.9. 28, 10.1.
註 035
35) ≪일기≫ 1946. 10. 2, 21.
註 036
36) ≪일기≫ 1946. 10. 22.
註 037
37) ≪일기≫ 1946. 11.12; 12.10, 17.
註 038
38) ≪일기≫ 1946. 12. 2.
註 039
39) ≪일기≫ 1946. 9. 28.
註 040
40) ≪일기≫ 1946. 10. 22.
註 041
41) ≪일기≫ 1946. 9. 6, 16, 26.
註 042
42) ≪일기≫ 1946. 9. 26.
註 043
43) 이하 회담에 대한 정리는 국방성문서보관소 문서군 379, 목록 532092c, 문서철 2, 63-79쪽(로마넨꼬가 쉬띄꼬프에게, 여운형의 북한방문에 대한 보고, 여운형과의 대담, 1946. 9. 28)을 참조.
註 044
44) ≪일기≫1946. 10. 3, 7.
註 045
45) ≪일기≫ 1947. 7. 23, 30.
註 046
46) ≪일기≫ 1947. 8. 2.
註 047
47) ≪일기≫ 1947. 7. 30.
註 048
48) ≪일기≫ 1947. 8. 6, 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