Ⅲ. 사이토의 식민통치 특성과 지방 순시
사이토 총독의 식민통치 방침 중 중요한 특징은 對內 정치선전의 강화라 할 수 있다. 일본 식민통치의 정당성을 홍보하고 그를 통해 조선인들의 협력을 이끌어내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조선인들의 생활에 보다 밀착하여 민중의 ‘험악한’ 반일 경향을 살피고, 아울러 독립운동에 대한 감시도 강화하려는 의도가 있었다. 이를 위해 민간유식자와의 회합을 마련하고, 민정시찰사무관을 설치했다. 사이토 총독은 부임한 후 일주일 간 조선의 각도 유력자·명망가·신지식인 등 51명을 경성으로 불러 시정방침에 관한 설명 및 강연회를 열었고, 동시에 민정과 조선통치에 대한 의견을 청취했다.007007 7) 財團法人齋藤子爵紀念會, 『子爵齋藤實傳』 第2卷, 1941, 539∼541쪽.닫기
또한 3·1운동 이후 하세가와 총독은 총독부 직원을 지방에 파견하여 민정을 시찰했는데, 사이토는 이를 더욱 강화하여 1920년 2월 ‘민정시찰관’을 상설기관으로 두고 조선인 사무관 중 친일적이고 “견실한 사상과 행정적 수완을 함께 가진 자” 5명을 추려 임명했다. 이들 총독부사무관을 각 도에 파견하여 지방유력자·고로(古老)·유식자 등을 직접 만나 종래 통치에 대한 비평, 감상 및 장래 통치에 대한 희망 등 의견을 수집토록 했다. 이들에게는 같은 조선인이라는 점을 이용하여 “항상 지방을 돌아다니며 소상히 민정을 살피고 온건한 사상을 선전하며 지방청년을 선도” 시키면서 민중의 동향을 파악하고 정치선전을 하는 임무가 주어졌다.
총독부 단위뿐만 아니라 지방 단위에서도 이러한 민정시찰은 이루어졌다. 그러나 그 효과는 제대로 나타나지 않았다. 일례로 평안남도 도지사 시노다 지사쿠(篠田治策)는 “8명의 기민한 도청근무 조선인 서기”를 변장시켜 도내를 살피게 했는데 당국의 정치선전에 대해 ‘악평을 하는 자’가 많고 그 효과가 저조했다고 총독에게 보고했다.008008 8) 강동진, 『일제의 한국침략정책사-1920년대를 중심으로』, 한길사, 1980, 28쪽.닫기
이처럼 사이토는 총독부로 조선인 관민 유지나 외국인 선교사 등을 직접 초치하여 식민통치에 대한 구상을 설명하거나 그들의 의견을 듣는 자리를 마련하거나 관리를 파견하여 민중의 동향을 파악하고 정치선전을 하게 하였다. 그러나 일제에 대해 반감과 저항이 커지며, 일본 통치에 순응하지 않는 조선인들을 통합시켜내기 위해 사이토 총독이 심혈을 기울인 것이 바로 지방 순시였다.
초대총독 데라우치마사타케(寺內正毅)도 지방 순시를 하였지만, 그 횟수도 적고, 대상이나 수법도 관료적인 관청 순시, 헌병대 사열이 고작이었다.
<데라우치마사타케의 지방순시>
1. 1915년 3월 경상남북도 일원 순시
2. 1915년 8월 원산 축항 기공식에 참석한 후 금강산 주변인 강원도 일대
3. 1916년 5월 경기도·충청남북도·경상북도 일대를 순시009009 9) 위의 책, 36쪽.닫기
이에 비해 사이토의 지방순시는 관공서 순시가 중심이 아닌 대민접촉을 통한 정치선전을 위한 것이었다. 그는 제1기 총독재임 중(1919년 9월∼1927년 12월) 지방순시 총 회수는 42회, 총 일수도 222일에 이른다. (자세한 내용은 별첨1. 「齋藤實 年譜」 참고)
근대 국가 성립과정에서 ‘국민 형성’을 위한 여러 가지 장치 중 최고통치자의 전국 巡幸은 중요한 기제였다. 일본의 경우 1868년 메이지 유신으로 천황제 근대국민국가를 수립하면서 지방분권적 막부체제를 극복하고 단일한 영토국가에 속한 천황의 ‘臣民’ 의식을 심어주기 위한 여러 가지 국가 의례를 마련했다. 그 중 가장 신경을 쓴 것은 황실 패전트(pageant)였다. 1880년대 말까지 지배적인 형태의 공적인 황실 패전트는 바로 순행으로서 천황이 지방 구석구석을 순회하고 ‘일본인’이 될 사람들이 그를 구경하는 의례의 한 양식이었다.010010 10) 다카시 후지타니(한석정 옮김), 『화려한 군주-근대일본의 권력과 국가의례』, 이산, 2003, 36쪽. 닫기
출전:財團法人齋藤子爵紀念會, 『子爵齋藤實傳』 第4卷, 1941, 555∼628쪽의 「子爵齋藤實 略年譜」
연 도횟 수기 간
1920년 2회 18일
1921년 7회 35일
1922년 6회 33일
1923년10회 46일
1924년 7회 49일
1925년 5회 18일
1926년 5회22일
42회222일
조선시대 국왕들도 궁궐 밖으로 거동하는 行幸이 있었지만, 이것은 백성들을 직접 만나 민정을 살피기 위한 것 보다는 선대왕들의 왕릉을 참배하거나 행궁에서 요양하거나 휴식하기 위한 것이 대부분이었다. 왕이 일반 백성을 직접 대면하여 그들의 이야기를 들은 것은 대한제국 성립 이후였다. 고종이 경운궁(덕수궁)의 남문인 돈례문 앞에서 각 대신과 각국 공사·영사를 불러 모아 놓고 만민공동회 회원들을 ‘타이르고’ 그들의 의견을 들은 적이 있다. 만민공동회 회원들은 “지척의 거리에서 폐하를 뵈었는데, 이것은 우리나라 4천 년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라고 했다.011011 11) 鄭喬(조광편, 이상식 역주), 『대한계년사』4, 소명출판, 2004, 141∼149쪽.닫기 지방 순시는 대한제국이 일본의 보호국으로 전락한 뒤인 1909년 순종에 의해서 이뤄졌다. 순종은 순시에 대해 다음과 같은 詔令을 발표했다.

“짐은 생각건대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다 근본이 견고하지 못하면 나라가 편안할 수 없다. 돌이켜보면 부덕한 몸으로 父皇陛下의 밝은 명령을 받들어 임금 자리에 오른 뒤에 밤낮으로 위태로운 나라의 형편을 안정시키고 도탄에 빠진 백성들의 생활을 구원할 일념뿐이었다. 그래서 정사를 개선하자는 큰 결심으로 원년에 종묘 사직에 공경히 맹세하고 감히 조금도 게을리 하지 않았는데, 지방의 소란은 아직도 안정되지 않고 백성들의 곤란은 끝이 없으니 말을 하고 보니 다친 듯 가슴이 아프다. 더구나 이런 혹한을 만나 백성들의 곤궁히 더 심하여질 것은 뻔한 일이니 어찌 한시인들 모르는 체하고 나 혼자 편안히 지낼 수가 있겠는가. 그래서 단연 분발하고 확고하게 결단하여 새해부터 우선 여러 有司들을 인솔하고 직접 국내를 순시하면서 지방의 형편을 시찰하고 백성들의 고통을 알아보려고 한다. 짐의 太子太師이며 統監인 公爵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는 짐의 나라에 성의를 다하면서 짐을 보좌하고 인도해 주고, 지난 무더운 여름철에는 우리 태자의 학식을 넓히기 위하여 그토록 늙은 나이에 병든 몸도 아랑곳하지 않고 일본국 각지로 데리고 다닌 수고에 대해서는 짐이 언제나 깊이 감탄하고 있는 바이다. 그래서 이번 짐의 행차에 특별히 배종할 것을 명하여 짐의 지방의 급한 일을 많이 돕게 해서 근본을 공고하게 하고 나라를 편안하게 하여 난국을 빨리 수습하도록 기대하는 바이다. 너희 대소 신민들은 다같이 그리 알도록 하라.”012012 12) 『조선왕조실록(국역)』 순종3권. 2년(1909 己酉, 大韓 隆熙3년) 1월 4일 양력 1번째 기사 ‘국내를 직접 돌아보겠다는 조서를 내리다’닫기

1905년 을사늑약과 1907년 정미7조약, 고종의 퇴위 등 일제의 조선에 대한 식민지화가 진행되는 속에 1907년 군대 해산 이후 의병활동이 보다 조직적이고 무장투쟁화하자 일제는 1909년 8월 이후 남한대토벌작전을 통해 의병을 무자비하게 탄압했다. 이에 앞서 일제는 이토 히로부미를 앞세워 순종의 전국 순시를 계획했다. 1909년 1월 6일부터 경상도지역 순시가 이루어졌고(南巡),013013 13) 1909년 1월 6일 황제가 경상도를 순시하여 대구·부산·마산포에 이르렀다. 궁내부 대신 민병석, 군부대신 이병무 등 여러 신하와 이토히로부미가 황제를 모시고 따라갔다. (정교(조광 편, 김우철 역주), 『대한계년사』9, 소명출판, 2004, 34쪽.닫기 1909년 1월 27일부터 평안도 지역 순시가 이루어졌다(西巡).014014 14) 1월 27일 황제가 평안도를 순시하여 의주에 이르렀다. 2월 4일 대궐로 돌아왔다(위의 책, 35쪽).닫기 이 순시에서는 일흔 이상의 노인이나 효자·열녀에 대한 포상이 있었고, 부산에서는 김굉필, 정여창, 이언적, 이황 등 양반·유림층의 정신적 스승이라 할 수 있는 인물에 대해 제사를 지냈다. 이것은 의병활동에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양반·유림층을 회유하기 위해 순종을 앞세운 일제의 이벤트였던 것이다.
이러한 이벤트는 합방 이후 식민통치에서도 유효했다. 일제의 조선 식민통치가 실시된 지 10여년이 되는 상황에서 일어난 3·1 운동은 여전히 조선의 인민들은 일제의 식민통치를 수용하지 못하고, 일제의 식민통치가 강압적이며 겉돌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사이토는 총독으로 부임하면서 조선통치의 기본으로 ‘一視同仁’ ‘日鮮同治’ ‘日鮮融和’ ‘공존공영’을 제시했으나 이를 어떻게 실현할 것인가는 어려운 문제였다. 사이토는 부임시부터 통치자의 위압감 보다는 친근감을 보이기 위해 노력했다. 1919년 9월 1일 총독 부임을 위해 부산항에 도착한 사이토의 모습에 대해 <東京日日新聞>은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1일 아침 부산에 도착한 齋藤 신총독 일행의 조선인은 그 제1보에서 內, 鮮人에게 매우 좋은 인상을 주었던 것 같다. 아침부터 부산 棧橋에 출영 나온 수천 內, 鮮人은 제복을 갖춰 입은 해군대장의 신총독을 생각했으나, 총독·정무총감 모두 산뜻한 프록코트를 입고 新羅丸 갑판 위에서 출영 나온 관민에게 인사하면서 끝까지 평민의 모습을 발휘함에 응접하고 있던 當地의 유력 선인들은 자못 감격하는 태도로서 충심으로 경의를 표하였다.”015015 15) 齋藤實元子爵銅像復元會, 『齋藤實 追想錄』, 1986. 180쪽.닫기

일본 신문 보도이기에 과도하게 묘사된 점은 있지만, 사이토 총독이 보인 제스처와 이벤트는 조선인들에게 의외의 모습으로 비춰지기 시작하였다. 이것은 이후 지방 순시에서 군림하는 총독이 아닌 조선인들과의 직접 대면할 수 있는 ‘친근한’ 총독으로 이미지를 바꿔가는 것으로 이어졌다.
사이토 총독 부임 1기의 (1919∼1927) 주요 지방순시 일정을 <사이토일기>를 통해 살펴보자.
사이토 지방순시의 제1보는 총독 취임 다음해인 1920년 4월이었다. 1920년 1월 23일 동경으로 가 의회에 참석하는 등 일정을 보내고 1920년 4월 7일 오전 8시 45분 부산부두에 도착했다. 경성으로 가는 길에 남부 지방에 대한 사이토의 첫 번째 지방 순시가 시작되었다. 일정은 부산 → 진해 → 마산 → 진주 → 사천 → 삼천포 → 목포 → 광주 → 전주 → 군산 → 인천 → 경성이었다. 자세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1920년 4월 7일 (수)
경남 지사 등 출영. 신문기자 회견. 구축함을 타고 진해로 향함. 11시 진해 착. 요항사령부에 들어감. 동소에서 오찬. 오후 要港部內 및 市街 ·面役場 등 순시. 사령관사에서 관민 22명과 만찬.
-1920년 4월 8일 (목)
오전 8시 45분 출발하여 마산 도착. 부청에서 관민 접견. 오찬 후 진주로 향함. 오후 3시 진주 도착. 도청에서 고등관 접견. 수도정수지공사 및 彰烈祠를 보다.
-1920년 4월 9일 (금)
오전 도청에서 관민 접견. 농학교·소학교 및 보통학교 시찰. 정오 지사관사에서 관민, 선교사 알렌 초대하여 오찬. 오후 진주신사에서 참배. 물품진열소 및 순사강습소·촉석루(임야조사사업)를 보고, 의기 논개 사당을 보다.
-1920년 4월 10일 (토)
오전 6시 지사관사를 나와 사천에서 관민환영자 면회 통과, 7시15분 삼천포 도착. 구축함 타고 목포로 출발. 오후 3시 45분 목포 도착. 지사 관민 22명 만찬.
-1920년 4월 11일 (일)
오전 9시 목포부청에서 관민 접견 순시. 남북제면·조선제유 양 회사 공장 순시, 정오 목포 발 3시 송정리에서 기차에 내려 자동차로 광주에 오후 3시 45분 도착. 도청에서 고등관 이상 접견. 廳內 순시 물산진열장을 본 후 지사관사에서 만찬.
-1920년 4월 12일 (월)
오전 長野虎太郞 來談. 9시부터 보통학교 및 소학교를 보고, 도청에서 지사 보고 듣고, 관민의 주요한 자 접견. 끝내고 관사에 들어가 사진, 오찬, 관민 23명 來會.
오후 2시부터 公(光)州 농업학교·원잠종제조소·묘종시험소 및 임업시험소를 순시. 광주군청·자혜의원 및 육군파견대대 본부 및 중대영소를 보고, 5시 지사관사로 돌아와 재향군인과 함께 사진 촬영.
-1920년 4월 14일 (화[‘수’의 오기])
오전 8시부터 군(전주)청·소학교·보통학교·자혜의원·경기전·농학교·측후소·종묘장 등 순시. 전주신사 참배. 11시부터 관민 29명 초대하여 오찬.
오후 1시 전주발(자동차로), 이리에서 (2시반 출발) 3시15분 군산도착. 관민 출향. 부청·미곡검사소 및 세관 등 순시. 곡구 여관에서 유숙. 밤 전북지사 이하 각부장·군산 관민 24명 만찬 초대.
-1920년 4월 15일 (수[‘목’의 오기])
오전 6시 30분 군산 곡구여관에서 출발. 구축함 白雪에 乘組하여 7시 출항. 오전 2시 30분 인천세관 船渠에 입항. 수행원 외에 藤井寬太郞에게 干潟地 및 수리사업의 설명을 듣고, 세관·측후소 및 부청 순시. 오후 5시30분 인천 발 6시 30분 남대문 도착.016016 16) 財團法人齋藤子爵紀念會, 『子爵齋藤實傳』 제4권, 1941, 799∼803쪽.닫기
다음은 1921년 1월 30일부터 2월 3일에 걸친 평안남도 순시이다. 평안도 지역은 중국과의 국경지대로서 조선시대 이래 중앙권력의 차별에 대해 반발을 가지고 있어 지역적으로 ‘반골’ 성향이 강한 지역이라 여겨지는 곳이었다. 일제에 대해서도 역시 반일감정이 다른 지역에 비해 높았던 곳이다. 이러한 점은 당시 평안남도 지사였던 시노다 지사쿠의 다음과 같은 발언에서도 알 수 있다.

“당시 나는 평남도지사였는데, 전선을 風靡한 조선독립운동의 여진이 아직 종식되지 않았고, 불령배는 상해방면에서 잠입하여 치안을 교란하고 혹은 각지에서 우리 순사를 살상하고 혹은 폭탄을 투척하여 도청 파괴를 기도하여 인심이 극도로 동요되고 있던 때였다. 특히 평양지방은 종전부터 배일사상의 온양지로서 해외에 蠢動된 불령도는 이 지역에서 많이 배출하였고 거주민 중 또한 표면은 양민을 가장하고 이면에는 은밀히 상해가정부 등에 통하는 자가 많았다 … 총독은 도청에서 내선 유지자를 견했다 … 그 중 宮川五郞三씨와 나일봉씨의 의견이 가장 극단적이었다 … 초도 순시 총독에 대해 이 같이 격렬한 의견을 토로하는 것에 대해 나도 의외로 지방관으로서 큰 책임을 느낄 정도였다. 그러나 자작(사이토)은 시종 溫顔으로 열심히 경청했을 뿐만 아니라 후에 나에게 그들의 태도에 대해 일언도 언급하지 않았다.”017017 17) 위의 책, 803∼804쪽.닫기

평안도 순시 일정은 평양 → 신의주 → 안동현(중국) → 평양 → 경성이었다. 이 순시에서는 신의주에서 국경을 넘어 안동현으로 건너가 지나동변도윤을 만났다. 중국지역에 있는 독립운동 세력이나 조선인들에 대한 감시와 통제를 요청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또한 평양은 조선의 예루살렘이라 불릴 정도로 기독교 세력이 강한 지역이었다. 특히 외국인 선교사들이 반일적 감정으로 조선인들과 결합되면 총독부로서도 매우 곤란할 수 밖에 없었다. 선교사들에 대한 탄압은 바로 일제 식민통치에 대한 국제적 비난과 압력으로 이어질 소지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에 평양에서는 외국인 선교사를 초대하여 茶話會를 여는 등 이들에 대한 선전과 회유 조치가 이루어졌다. 자세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1921년 1월 30일 (일)
오전 10시 남대문 출발, 북행. 평양 거쳐 오후 9시 35분 신의주 도착. 스테이션호텔에 묵다.
-1921년 1월 31일 (월)
오전 7시 의주 출발, 신의주 도착. 도청에서 지사 보고. 청내 순시 … 오전 11시 반 의주 출발, 안동현에 도착. 영사관에서 오찬. 지나동변도윤 등 22명 열석. 오후 3시 안동현 출발, 신의주로 들어오다. 제지회사 공장 및 영림창 제재공장 순시. 스테이션호텔에서 관민 주도로 30명 초대 만찬.
-1921년 2월 1일 (화)
오전 7시 20분 신의주 출발, 정오 지나 평양 도착. 기차 바꿔 타고 寺洞에 이르러 광업소 보고, 오후 4시 평안남도청에서 외국인 주로 선교사 40여명을 초대, 茶會 열다.
-1921년 2월 2일 (수)
오전 9시부터 여러 학교 순시, 부청(평양)에서 지방유력자 회견. 도시락 먹고 세관출장소에 이르러 架橋 위치 등을 보다. 현청에서 지방의 주요한 자 50여명을 불러 다화회 개최. 저녁 만찬에는 평남·황해 양지사, 각부장 등 11명 초대.
-1921년 2월 3일 (목)
오전면회 宮川五郞三, 9시 반부터 자혜원 및 재판소(법원) 순시. 고등여학교(공립)에 이르러 순시, 도시락을 먹고 낮 12시 40분 평양 출발, 오후 7시 남대문 도착.018018 18) 위의 책, 803∼807쪽.닫기
1922년 11월 충청도· 경상도 지방 순시에서는 양반과 유림층의 영향력이 강한 지역 특성을 반영하여 이들과의 만남이나 고적 시찰 등이 이루어졌다. 일정은 조치원 → 청주 → 음성 → 충주 → 제천 → 단양 → 충주 → 문경 → 예천 → 안동 → 음성·제천 → 의성·군위 → 대구 → 해인사 → 대구 → 경성이었다. 자세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1922년 11월 7일 (화)
오전 10시 남대문 출발, 충북으로 향함. 낮 12시 40분 조치원 도착. 米田지사 외 수명 출영. 중앙철도로 바꿔 타고 오후 1시 23분 청주 도착. 북일면 초정리 탄산수제조소를 보고, 오후 4시 음성에 도착. 오후 5시 충주 도착. 관민다수 출영.
-1922년 11월 8일 (수)
지방인 면회. 오전 8시 30분 충주 출발, 제천군청에서 관광리 및 학교생도 등 회견. 낮 12시 10분 매포면에서 승선 … 오후 4시 단양 도착. 학교· 郡衙 등을 거쳐 경찰서장 회의 참석.
-1922년 11월 9일 (목)
오전 8시 단양 출발, 오후 2시 청풍 도착. 자동차로 제천 거쳐 오후 5시 충주 도착.
-1922년 11월 10일 (금)
오전 9시부터 군청 및 전매국출장소 제 설비 시찰. 10시 충주 출발. 문경에서 오찬. 조령 관문 보고, 오후 3시 지나 예천에 3군 공진회 보고, 오후 5시 안동에 도착.
-1922년 11월 11일 (토)
안동군청에 관공리 기타 민간유력자와 접견. 재판소·감옥·사립동흥학술강습소·고려조시대 고탑·수비대·보통학교 및 소학교를 보다. 오찬 후 안동 출발, 의성·군위 양군읍내에서 관공리·학교생도 등의 환영을 받고, 5시 전 대구 도착. 대구은행 두취 등의 진정 듣다.
-1922년 11월 12일 (일)
오전 6시 50분 대구여관을 나와 해인사로 향하여 11시 30분 도착. 오후 1시20분 해인사 출발, 오후 5시 반 대구여관에 도착. 만찬 경남북, 충남북 지사 등 10명.
오전 9시부터 중학교·고등보통학교·재판소(건축 중)·전매국 연초공장 등 순시. 낮 12시45분 대구 출발, 7시 10분 남대문 도착.019019 19) 위의 책, 807∼811쪽.닫기
1923년 11월 대동강의 대동교가 가설되었다. 대동교는 거리 344칸으로 당시 동양 제일의 人道鐵橋였다. 사이토는 이 대동교 渡初式에 참석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1923년 11월 29일 (목)
오전 8시 50분 경성 출발, 오후 3시경 평양 도착. 정거장에 관민다수 출영. 여관에 지사부인 등 10명 정도 방문 면회. 만찬 30명 참석.
-1923년 11월 30일 (금)
오전 10시 대동교 渡始式. 渡橋 후 상품진열소 낙성식 참석. 직후 연회 참석. 만찬.
-1923년 12월 1일 (토)
면회. 지사 등 오전 10시 30분부터 도청에서 관민 주요자 십 수 명 및 외국인 접견.
오후 3시 지나 대동교를 지나 제방공사를 보고, 4시경 평양 출발. 오후 10시 경성 도착.020020 20) 위의 책, 816∼819쪽.닫기
1924년은 사이토 총독의 지방 순시가 많았던 해이다. 총 7회 순시가 있었고, 체류일정은 49일로 가장 길었다. 먼저 1924년 4월 진해를 순시했다. 일본이 군항으로 개척한 진해에는 재조일본인이 많이 거주했는데, 이들을 위한 수도 건설사업을 추진하여 1924년 4월 장복수도가 관통되었던 것이다. 일정은 경성 → 삼랑진 → 마산 → 진해 → 방어진 → 감포 → 구룡포항 → 포항 → 경주 불국사 → 석굴암 → 대구 → 경성이었다. 이 때 석굴암 수선사업이 완성되고, 불국사도 수선사업이 진행 중이어서 이에 대한 시찰도 이루어졌다. 자세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1924년 4월 12일 (토)
오전 10시 경성 출발, 오후 6시 50분 삼랑진 도착. 7시25분 삼랑진을 떠나 9시 10분 마산 도착. 관민 다수 출영. 신·구 마산유지자의 진정을 듣다.
-1924년 4월 13일 (일)
오전 8시 여관을 떠나 구마산을 보다. 공립상업학교에 이르러 신마산 元露國영사관을 고녀학교기숙사로 삼은 것을 보고 9시 40분 마산 출발, 11시경 진해 도착. 오후에 창원으로 가 문묘를 봄. 돌아올 때 3월 관통한 수도를 통과. 오후 4시 지나 水交社에서 다화회.
-1924년 4월 14일 (월)
오전 9시 齋藤灣에서 滊艇으로 웅천방면을 거쳐 수원지에 이름. 제언에는 사쿠라(벚꽃)가 만발. 그 아래서 점심을 먹다. 이 행차에는 요항부사령관부부 이하 수십 명 동행. 오후 4시 귀관. 만찬. 관민 주요자 합쳐 20명.
-1924년 4월 15일 (화)
오전 8시 진해 출발, 구축함에 편승하여 방어진을 향함. 정오 방어진 도착, 방파제건설사무소에서 설명을 들음. 도중에 재향군인·학교생도 등 출영. 오후 2시 방어진 출발, 오후 3시 지나 감포항 바깥에서 漂泊 시찰, 4시 구룡포항 바깥에서 표박 시찰. 오후 5시 45분 포강항(포항-인용자)에 도착 상륙.
-1924년 4월 16일 (수)
오전 8시 여관 출발, 수산시험장을 보고 불국사 향함. 11시 불국사 도착. 오후 석굴암에 올라 석굴암 수선이 이루어진 것을 봄. 동행 14인 만찬.
-1924년 4월 17일 (목)
오전 8시 불국사 출발, 자동차로 대구로 이동. 도중 東村에 들러 扶植農園을 보고 정오 지나 대구에 도착. 오후 2시 전매지국 및 법원을 보다. 4시 여관으로 향함. 7시 지방관민 주요자 29명 초대.
-1924년 4월 18일 (금)
朝市場을 보다. 오전 10시 여관 출발하여 연성공원 대구신사 참배. 武德殿 및 도서관을 보다. 11시 55분 대구 출발, 오후 6시 50분 경성 도착. 밤에 정무총감과 회담.021021 21) 위의 책, 821∼824쪽. 닫기
1924년 5월에는 함경남북도, 평안남북도의 국경지역을 순시하였는데, 만포진에서 위원·초산으로 이동하다가 독립군의 총격을 받았다.022022 22) 사이토 총독을 저격한 독립운동세력은 參議府였다. 참의부(대한민국임시정부 陸軍駐滿參議府)는 1924년 대한민국임시정부 직할군단으로 조직되었다. 참의부원인 金昌均은 李義俊 등 대원 10여명을 이끌고 1924년 5월 사이토 총독의 국경순시 때 강계군 고산면 남상동 對岸 절벽(마시탄강변)에서 사이토 총독을 저격했으나 실패했다. 이후에도 1924년 8월 위원군 주재소를 습격하는 등 꾸준히 무장독립투쟁을 전개하다 1926년 9월 위원경찰서에 체포되었다. 김창균·이의준은 1928년 11월 평양복심법원에서 사형을 선고받았고, 이후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으나 복역하다 옥사했다(『東亞日報』 1928년 9월 22일, 27일, 11월 8일자). 닫기 사이토는 부임하던 날 경성 남대문 역에서 강우규의사의 총격을 받았었는데, 이번 순시에서 다시 총격을 받은 것이다. 인명이 살상되지는 않았지만, 조선인들의 강한 반일의식을 느끼는 계기가 되었다. 자세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1924년 5월 8일 (목)
오전8시 5분 경성역 출발 (관민 諸氏의 환송), 오후 2시 25분 평양 도착, 柳屋호텔에 묵다. 면회자 수십명.
-1924년 5월 9일 (금)
오전 8시 평양여관 출발, 자동차 7대로 平元도로를 달리다. 11시가 지나 成川에 도착. 군청 경찰서 순시. 양덕군청에서 잠깐 쉬고 양덕온천에서 유숙.
-1924년 5월 10일 (토)
오전 5시 온천 출발. 양덕경찰서 앞에서 집합, 6시 출발. 마식령 넘어 11시 30분 원산 도착. 다수 관민 및 학교 생도 환영. 道界에서 함남지사·경찰부장 등 영접. 오후 5시 넘어 함흥 도착. 도청에서 관민 접견. 일출여관에서 묵다. 만찬. 지사관사에서 관민 32명 초대.
-1924년 5월 11일 (일)
면회. 오전 8시 30분 여관 출발. 자혜의원, 상품진열소, 고등보통학교 시찰. 9시 15분 함흥 출발. 11시가 지나 홍원군역소에서 관공리 지방유지 접견. 바로 신포로 향해 12시 45분에 도착. 오후 1시 지나 신포 출발 오후 4시 북청 도착. 군청에서 관공리 지방유지 접견, 농업학교 시찰. 5시 여관에서 묵다.
(함흥. 홍원. 용원, 신포, 양화, 후창, 북청에서 학교 생도 및 지방민이 堵列 送迎)
-1924년 5월 12일 (월)
면회. 오전 9시 북청 출발, 10시 이곡, 11시 지나 直洞. 후치령 넘어 오후 3시 풍산 도착. 군청에서 관공리 지방유지 접견, 풍산 여관에서 묵다.
-1924년 5월 13일 (화)
오전 8시 풍산 출발. 관민 다수 送見. 풍산, 창평리, 상리 등 학교 생도 출영. 11시 갑산 도착. 군청에서 관민 유지 등 접견. 정오 12시 갑산 출발. 오후 2시반 혜산진 도착. 자혜병원 및 수비대 시찰. 혜산진 및 對岸 장백의 전경을 보다. 오후 7시 지방관민 유력자 및 장백현지사 이하 초빙 향응, 34명 참석.
-1924년 5월 14일 (수)
우천으로 혜산진에 체류. 오전 장백부 시찰. 면회. 장백현지사 동영삼으로부터 중국요리 대접받음.
-1924년 5월 15일 (목)
오전 6시 혜산진 출발. 하강. 好仁에 상륙. 오후 6시 신갈파에 상륙. 관공리 유지 접견. 수비대, 영림창지청 시찰.
-1924년 5월 16일 (금)
배를 타고 송전, 후창, 주재소 상륙 시찰, 동흥경찰서 및 나죽주재소, 응성, 무창은 지나침. 오후 4시 부창에 도착.
-1924년 5월 17일 (토)
오전 8시 부창 출발. 10시 15분 장흥경찰관주재소 상류 시찰, 12시 10분 중강진 도착. 오후 소학교, 영림창지청, 측후소, 보통학교, 면사무소 순시. 7시 만찬회 개최. 중국측 임강현 지사 이하 7명, 지방 유지를 아울러 약 40명 來會.
-1924년 5월 18일 (일)
오후 8시 중강진 출발. 도중 토성, 자성, 운봉 경찰서 상륙 시찰. 오후 4시 5분 만포진에 도착. 관민 영접. 문흥경찰서 주민 접견. 만포관에 유숙. 오후 7시 만흥경찰서에서 집안현 지사 이하 중국인 5명 관민 합쳐 36명 초청 향응.
-1924년 5월 19일 (월)
오전 7시 만포진 출발. 8시 반 고산진에 상륙. 오전9시 5분 從流島의 상류 巖崖 위에서 先導船 飛鳥丸에 2-3발의 총화가 쏟아짐. 該船의 경위순사가 응사 7-8발. 산상의 도적은 숨음. 10시 위원 구읍에 상륙. 12시 楚山央土에 상륙. 오후 5시 벽동 도착, 관민다수 영접.
-1924년 5월 20일 (화)
오전 6시30분 출발. 7시 45분 봉곡 통과. 관민 학교생도 등 다수 강안 정렬.(서행)
9시 창주 도착. 11시 10분 배의 기계파손으로 구영포에 도착. 오후 12시 50분 창성진 도착. 보통학교에서 안동현 등 중국 측 관리 등 주객 30여명 오찬. 오후 3시 중국 창성진 출발. 의주에 도착. 관민 출영. 7시 신의주에 도착.
-1924년 5월 21일 (수)
면회. 오전 8시부터 경비정으로 다사도 시찰. 용암포에서 관민 환영. 오전 11시 40분 용암포 출발 1시 지나 다사도 도착. 오후 5시 45분 신의주 세관 부두 상륙.
오후 7시 평안북도청에서 중국 동변도윤 이하 7인 기타 안동, 신의주 관민 70여명 초대.
-1924년 5월 22일 (목)
오전 9시 15분 신의주 출발. 오후 9시 20분 경성 도착.023023 23) 앞의 책, 506∼516쪽.닫기
국경 순시에서 돌아와 다시 1924년 6월 15일 충청남도·전라북도 지역을 순시했다. 일제는 자국의 자본주의 발전을 위해 조선을 식량공급지로 만들고자 합방 이후부터 적극적인 농업정책을 시행했다. 특히 조선의 곡창지대인 전라도 지역에 대한 개발에 박차를 가했다. 대규모 일본인 자본이 투입되어 농장을 설치하고 안정적인 쌀 생산량 증대를 위해 수리시설 설치에 주력했다. 이것은 1920년대 산미증식계획으로 본격화되었다. 1920년 전북 이리·옥구 지역에 익옥수리조합을 결성하였고, 그 水源으로서 대아리 저수지를 건설하여 1924년 준공되었다. 사이토는 대아리저수지 준공식에 참석차 충청·전라 지역을 순시했다. 순시 일정 중 백제 문화권인 부여·익산지역 고적 시찰도 이루어졌다. 자세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1924년 6월 15일 (금)
오전 10시 경성 출발, 충남으로 향함. 오후 1시 반 대전 도착. 호남선으로 갈아타고 논산 도착. 자동차로 부여 見物.
-1924년 6월 16일 (토)
오전 7시 부여 발, 논산, 여산, 금마면, 왕궁면, 삼례, 동봉면, 고산 등을 거쳐 11시 대아리 저수지 도착. 오후 1시 반 대아리 저수지를 출발하여 삼례를 거쳐 東山에 이르러 동산농사회사에서 휴식(오후 3시반). 오산리 탑천, 잠간 등을 거쳐 오후 6시 군산 도착.
-1924년 6월 17일 (일)
오전 8시 여관 출발 구읍면, 저수지, 舊城址에서 휴식. 익옥수리공사 간척지 경영의 실제를 보고 귀로에 갈원냉장공장을 시찰. 12시 30분 군산 출발 오후 1시 13분 이리 도착. 익옥수리조합 대아리저수지 및 수리공사 준공식장에 이름. 연회 및 여흥을 보고 오후 5시 회장을 떠남. 5시 반 농림학교를 보고 동소에서 이리시민의 환영회 출석. 7시 명치여관에 투숙. 여관 마당에서 활동사진을 보다.
-1924년 6월 18일 (월)
오전 9시 이리 출발, 자동차로 황등에 이르러 임익수리조합 저수지 및 사무소를 보다. 오찬 후 오후 2시 동소 출발. 대전에서 바꿔 타고 오후 8시 경성 도착.024024 24) 위의 책, 811∼813쪽.닫기
충남 백제 古都 및 전북 관개사업 시찰 후 다도해 순시가 이루어졌다. 이 해 사이토는 북으로는 평안북도, 함경남북도의 국경지방까지, 남으로는 다도해의 섬지역까지 전 조선을 순시하였다. 이는 일본의 메이지 유신 이후 천황의 순행과 같이 식민지 인민들에 대한 통합 의례를 꾀한 것이라 할 수 있다.
-1924년 6월 20일 (수)
오전 10시 경성발 남행. 오후 1시 반 대전에서 호남선을 타고 오후 8시 목포 도착. 관민다수 출영.
-1924년 6월 21일 (목)
종일 여관에 머뭄.
-1924년 6월 22일 (금)
오전 9시 금강환을 타고 오후 3시 대흑산도에 도착. 통조림공장, 면사무소 및 보통학교를 돌아보고 귀선. 5시 대흑산도 출발. 오후 8시 지나 八口浦 바깥에 假泊.
-1924년 6월 23일 (토)
오전 6시 출발, 오전 11시 반 완도에 도착. 군청에서 관민 접견. 보통학교·소학교·경찰서 등 순시. 오후 2시 완도 출발 후 오후 6시 지나 羅老島에 도착. 보통학교, 면사무소 시찰.
-1924년 6월 24일 (일)
오전 4시 반 나노도 출발. 10시 반 港門島 假泊. 등대 보고 출발, 오후 5시 반 목포 도착. 어업조합사무소에서 해초 견본을 봄.
-1924년 6월 25일 (월)
오전 6시 10분 목포 출발, 11시 40분 강경 도착. 미곡조합, 조선식산은행 지점, 소학교, 보통학교 등 순시. 보통학교에서 관민 주요자 접견. 오후 2시 10분 강경 출발, 3시 40분 대전 도착. 바로 유성온천에 감.
-1924년 6월 26일 (화)
면회. 유성면장 신달수 외 지방유력자 4명. 오후 1시반 유성온천 출발. 3시 지나 대전 동척지점에 도착. 관민주요자 접견. 오후 4시반 대전 출발, 오후 8시 지나 경성 도착.025025 25) 위의 책, 813∼816쪽.닫기
다도해 순시에 이어 의회 출석차 동경으로 갔다가 1924년 7월 25일 다시 귀임하는 도중에 28일 시모노세키에서 부산에 도착, 다음날 구축함을 타고 울릉도 순시에 나섰다. 울릉도 순시 이후 경주로 가서 고분 발굴을 시찰했다. 자세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1924년 7월 29일 (화)
오후 7시 구축함으로 울릉도 향함.
-1924년 7월 30일 (수)
오전 5시 울릉도 도동 앞에 정박. 6시 30분 경 상륙. 島廳에서 관민 주요자 접견. 소학교 및 보통학교 시찰하고 國美신사 참배. 오전 10시 울릉도 일주 후 포항으로 향함. 오후 5시 포항 도착. 오후 8시 반 불국사 여관에 투숙.
-1924년 7월 31일 (목)
오전 8시 불국사여관 출발. 경주에서 발굴 고분을 보고 11시 대구 도착. 도청에서 잠시 휴식 후 11시 50분 대구 출발. 오후 7시 경성 도착.026026 26) 위의 책, 824∼826쪽. 닫기
1924년 5월 국경순시에 이어 다시 사이토 총독은 함경도 지역 순시에 나섰다. 함경도는 석탄과 삼림 등 일제가 필요로 하는 원료 자원이 무진장한 곳이었다. 또한 일본 본토와 중국대륙을 연결할 수 있는 최단 루트를 형성할 수 있는 곳으로 일제는 1920년대부터 이 지역에 대한 개발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027027 27) 麻生音波, 『咸鏡北道の大富源-豆滿江炭鑛鐵道の使命』, 朝鮮印刷株式會社, 1924, 41∼43쪽:芳井硏一, 『環日本海地域社會の變容-滿蒙·間島と裏日本』, 靑木書店, 2000,의 제4부 「‘裏日本’と環日本海」 참조.닫기 이에 원산에서 회령에 이르는 함경선이 부분 개통되면서 1924년 10월 사이토는 함경선을 따라 순시에 나섰다. 특히 회령에서는 도문열차로 연결되어 간도 용정으로 이어졌다. 용정은 조선인들의 간도 이주 이후 중심지로 성장하면서 조선인들이 가장 많이 거주하는 상업중심지였다. 이에 용정 순시는 국경 넘어 조선인들에 대한 감시와 통제를 위해서도 중요한 일정이었다. 사이토 총독은 1924년 10월 10일 원산에서 국경의 회령에 이르기까지 392리의 함경선을, 101리의 未成線을 자동차로 연락하여 개통식에 참석했다. 이후 국경 대안의 간도를 시찰하기 위해 13일부터 회령에서 도문열차로 간도로 건너가 간도 제1일의 상업지 용정촌에 이르렀다. 자세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1924년 10월 8일 (수)
오전 8시 관민 제씨 來送. 8시 40분 온정리 호텔 출발. 도계에서 함남 지사 및 수십인 來會. 오후 12시 10분 원산 도착. 오후 4시 12분 원산 출발, 오후 7시 함흥 도착.
-1924년 10월 9일 (목)
오전 6시 함흥기차 시승, 10시 5분 양화 도착. 10시 15분 양화 출발, 자동차로 11시 반 북청 도착, 군청에서 점심. 낮 12시 30분 북청 출발, 2시 45분 이원군청에서 휴식. 수천 민중 來迎. 3시반 이원 출발. 오후 6시 단천발 기차 시승, 8시 성진 도착.
-1924년 10월 10일 (금)
면회. 함북·함남지사, 경찰부장.
오전 10시 군청에 이르러 관민 주요자 20여명 접견. 정오 정거장에서 만철 주최 함경선시승식 회장 출석. 종료 후 1시 기차로 길주로 향함. 2시 21분 길주 착. 3시 자동차로 길주 출발. 명천 거쳐 5시 45분 水南 도착. 바로 기차타고 오후 7시 반 주을 도착. 자동차로 온천에 오후 8시 도착.
-1924년 10월 12일 (일)
면회. 오전 10시 주을온천 출발, 자동차로 鏡城에 이름. 고등보통학교·농업학교 및 군청 시찰, 관민주요자 접견, 나남에서 함북도청의 과장 이상 접견. 점심 식사 후 청진 공진회 보다. 저녁에 나남으로 돌아가 여관 투숙.
-1924년 10월 13일 (월)
오전 8시 회령 출발. 도문철도를 타고 上三峰江岸에 이르러 두만강교를 건너 天圖철도에 탑승. 천도철도사 중역 안내로 오후 2시 지나 용정에 도착. 중앙학교·공회당·자혜원·광명회 및 소학교 등 시찰. 총영사관에서 관민 접견. 陶 道尹 방문. 商埠公署 답방. 간도여관 숙박. 만찬.
-1924년 10월 14일 (화)
오전 8시 용정정거장 출발. 日中 관민 다수 견송. 영목총영사 청진까지 동행. 10시 두만강안에서 중국관헌 대표와 고별. 도문철도 탑승 중 점심식사.
오후 1시 회령 도착. 1시 55분 회령출발, 5시 청진 도착. 5시 30분 광제환에 乘組. 6시 원산 향함.
-1924년 10월 15일 (수)
오후 2시 반 원산에 정박. 경비정으로 상륙. 오후 3시경부터 풍우 강해짐. 오전 7시 원산발 자동차로 석왕사에 감. 오전 11시 기차로 경성을 향함. 오후 5시 청량리에 하차.028028 28) 위의 책, 826∼831쪽.닫기
함경도 순시에 이어 1924년 10월 24일 충북지역을 순시했다. 속리산 법주사와 화양구곡, 주변 온천 휴양 등의 일정이었다. 자세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1924년 10월 24일 (금)
오전 7시 15분 경성 출발, 조치원을 거쳐 낮 12시 10분 옥천에서 하차. 오후 1시 옥천 출발, 법주사에 4시 지나 도착. 寺內 순시. 온천 숙박.
-1924년 10월 25일 (토)
복천암 보고 오전 10시 반 법주사에 돌아옴. 정오 법주사 출발. 미원을 거쳐 화양동에 이름. 제1곡에서 자동차에 내림, 제4곡까지 순시. 5시 반 청주 도착. 만찬.
-1924년 10월 26일 (일)
오전 9시 청주 출발, 초정 온천에 이름. 오후 1시 지나 고보학교 가교사 순시, 종묘장 및 잠업강습소 시찰. 농학교 및 보통학교에 이르러 운동회 참석. 오후 2시 청주 출발. 조치원 4시 5분 기차 발. 오후 7시 경성 도착.029029 29) 위의 책, 831쪽.닫기
이상은 사이토 총독 재임 1기 동안의 주요 지방순시 일정이다. 순시에서는 가는 곳 마다 “관민 다수가 出迎” 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엄선된 출영객이었지만 군수 정도의 행정관료도 쉽게 접하기 힘든 벽지까지 말로만 듣던 무시무시한 일본인 최고통치자인 총독이 직접 온다는 사실만으로도 매우 흥미로운 일이었을 것이다. 많은 조선인들은 호기심과 두려움에 총독 일행을 맞이하였을 것이고, 의외로 ‘평범한’ 총독은 식민통치에 대한 저항이나 불안감을 약화시킬 수 있는 요인이 될 수 있었다.
사이토의 지방 순시는 경주·부여·공주 등의 고적 견학, 금강산 유람, 유성온천 휴양 등의 일정도 있었으나, 정치 선전의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한 일정을 마련했다. 사이토는 가는 곳마다 관리 외에도 지방의 지주·유생·촌로·자본가 등 지방 유지를 불러내든지 외국인 선교사를 만났다. 더구나 반일운동이 거센 지방이나 봉건적 유습이 짙게 남아있는 지방, 외국인 선교사 포교지구에는 이들 대상자들을 직접 불러 접견하고 다회·만찬·오찬·招宴 등을 베풀었다. 이것은 총독의 권위를 빌어 친일세력의 포섭을 꾀하는 한편 외국인 선교사의 회유를 통해 대외관계의 호전을 노린 정치적 행위였다.
일본의 메이지 천황 역시 이러한 巡幸을 했다. 그는 순행 중에 후일 공식적인 ‘국가의 성역’이 될 장소, 즉 이세 및 아쓰타 신궁, 어릉, 메이지 유신 희생자 유적지 등을 참배하기도 했다. 그는 동시에 자애로운 고대의 군주들처럼 일하는 사람들을 만났고, 노인과 이재민에게 선물과 상을 내렸으며 소학교 학생들과 유공자들을 표창했다. 마지막 범주에는 1876년 순행에서 내무성이 지방관리들에게 하달했듯이 “효자·忠僕·열녀”가 포함되었다. 또한 천황은 다른 종교·문화·산업·군사·정부기관도 방문하여 그의 권위로 위무하고 이들을 자신이 중심이 될 질서 안에 통합시키고자 했다.030030 30) 다카시 후지타니, 앞의 책, 80쪽.닫기
메이지 국가의 최대순행인 1878년 호쿠리쿠-도카이도 순행 때 해당지역 관리들에게 보낸 공문을 보면, 관리들은 관할 지역에 대한 각종 보고서를 만들어 “천황께서 보시도록 올려야” 했다. 여기에는 “효자, 열녀, 충복, 선행으로 표창 받은 자들” “경찰서, 지서, 경관의 수” “산업육성방법” “축산농가의 위치와 가축의 수” “황무지의 위치와 개간지” “특산물” 등에 관한 것이 포함되었다. 또한 1876년 도호쿠 순행 관련 공문에 따르면 지역관리들은 “관할지의 일람표 견본”과 “古器物 목록, 그림, 서예, 각종 토산품과 골동품”을 제시해야 했다.031031 31) 위의 책, 87쪽.닫기
사이토 역시 각급 학교, 공장 및 주요 산업시설을 시찰 대상에 포함시켰다. 또한 ‘자애로운’ 총독으로서 어린 학생들을 만나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억울한 인민의 이야기를 들어주었으며, 각지의 자혜원 등의 병원을 방문하여 환자들을 위로하였고, 소록도의 나환자촌을 방문하기도 했다. 주요 산업시설이나 기반시설이 완공되면 준공식에 참석하였으며, 지역에서 개최되는 각종 전시회·품평회, 공진회 등도 참석했다. 이는 식민지배의 가시적 성과로서 식민지배를 통해 조선을 개량·발전시키고 근대화시키고 있다는 것을 선전하기 위한 장으로 적극 활용되었다. 또한 조선인들의 관습이나 문화에도 관심을 갖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러한 사이토의 지방 순시는 상당한 효과를 보이는 듯 했다. 그러나 1924년 5월 국경 순시에서의 총격 등 결코 마음 놓고 다닐 수 없는 조선의 실정 역시 체험하는 기회이기도 했다. 결국 그가 만날 수 있는 사람들은 이미 검증된 ‘친일적’ 조선인에 국한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한편 사이토총독의 사진 속에서는 조선인 일본 시찰단·관광단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사이토 총독시절 잦은 시찰단·관광단의 일본 파견 또한 대내 정치선전의 강화라는 차원에서 이해할 수 있다. 일본 시찰단을 본격적으로 파견하기 시작한 것은 1920년대 전반기였다. 관광단의 파견 목적은 조선인이 일본의 문화가 앞질러 있는 상황을 알게 됨에 따라 이번 새 시정에 대해서도 미더움을 높여올 것이라는 관점에서 되도록 관공리 교원들에게 일본을 시찰시키는데 있었다.
관광단은 처음에 주로 친일관료·교원을 대상으로 삼았는데, 점차 유림·지주·중소기업가들도 참가시켰다. 관광단 파견은 1920년만 해도 3월에 조선인 도참여관·군수로 된 32명의 여행단, 10월에 여교원단 16명, 11월에는 중추원 찬의·부찬의 12명, 친일관료 4명이 이끄는 경북 유림대표단 등 10여개 단체가 있었다. 사이토는 동경출장 중에 이러한 시찰단을 가끔 초대했다. 유림단에 대해서는 일본지배층의 주역도 불러서 총독부 동경출장소가 초연을 베풀고(1920.11) “서로 시문을 주고 받으며 또 유학의 진흥에 관해 의견을 나누었다”고 한다. 이러한 시찰·관광은 조선인을 일본으로 초대해 회유하는 정치선전으로 십분 활용했다. 그러나 과정에서 일부 일본인의 모멸적 태도나 조선 문화에 대한 무시는 오히려 역효과를 불러일으키기도 했다.032032 32) 강동진, 앞의 책, 49∼50쪽.닫기
외국인 선교사에 대한 회유 또한 집요하게 전개되었다. 3·1운동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다수의 교회와 신도, 선교사가 많은 피해를 입자, 구미 각국의 여론은 일본에 대해 부정적이었다. 일본은 이를 타개하기 위해 외교적인 노력과 함께 조선 내 선교사에 대한 회유책도 적극적으로 시행했다. 사이토는 총독취임 전까지는 선교사를 ‘조선통치에서 거추장스러운 존재’로 여겼지만, 부임 후 일본 정부의 방침에 따라 전향적으로 변하며 회유책을 갖게 된 것이다.
사이토는 선교단의 건의와 하라(原敬) 수상의 방침을 바탕으로 외국인 선교사에 대한 일련의 새로운 정책을 제시했다. 포교규칙 개정으로 선교를 허가제에서 신고제로, 사립학교 규칙 개정으로 미션계 사립학교에서 성서 교육을 공인하는 등의 조치를 취해 외국인 선교사의 호감을 얻어냈다. 또한 종교단체가 소유한 부동산을 내국법인으로 허가해 줌으로써 경제적, 재정적 뒷받침을 해주었다. 이런 선교사에 대한 일본정부의 정책 전환을 알아차린 선교단은 사이토총독 부임과 때를 맞추어 경성에서 선교사의 정례연차대회를 열고 선교사업에 대한 총독부 당국의 정책전환을 요구하는 [연합종교회 건백서]를 제출했다.
일본인 유지와 외국인 선교사의 간담회 개최, 대외선전과 친선을 위한 단체 구성, 총독이나 정무총감 주최의 연회 개최, 외국인 선교사 회합에 총독부 고관을 출석시키는 등 일련의 접근책을 썼다. 사이토는 부임한 이후 많은 외국인 사절 및 선교사를 만났다. 사이토 일기에도 외국인 면회자의 이름과 만남에 대해 상세히 기술하고 있다.033033 33) 財團法人齋藤子爵紀念會, 『子爵齋藤實傳』, 1941, 566∼572쪽. 일례로 1919년 9월 27일 “… 선교사 백여 명을 다과회에 초대했다(감리교 및 장로교 年會를 위한 합동위원).” 등 1919년 15회, 1920년 24회의 외국인과의 면회를 가졌다.닫기
한편 사이토는 지방순시에 즈음해서는 꼭 지방주재 선교사를 접견하고 다과회·오찬회를 베풀었다. 특히 평양지방이나 황해도 재령지방에서는 그 빈도가 높았다. 총독의 외국인 접촉과 회유솜씨가 너무 유명해 총독을 ‘선교사 담당’이라 불렀을 정도다. 이러한 점은 사이토의 개인적 이력으로부터 나온 것이라 할 수 있다. 20대 중반인 1884년 해군중위로 미국공사관에 파견된 것을 시작으로 해외 근무 경험이 많았고, 외국 순방에 나선 고위관료를 수행하며 서구 각국을 돌아보았다. 서구문화에 대한 경험이 많았고, 이것은 외국인선교사를 접할 때 매우 유용한 바탕이었다고 할 수 있다.

註 007
7) 財團法人齋藤子爵紀念會, 『子爵齋藤實傳』 第2卷, 1941, 539∼541쪽.
註 008
8) 강동진, 『일제의 한국침략정책사-1920년대를 중심으로』, 한길사, 1980, 28쪽.
註 009
9) 위의 책, 36쪽.
註 010
10) 다카시 후지타니(한석정 옮김), 『화려한 군주-근대일본의 권력과 국가의례』, 이산, 2003, 36쪽.
註 011
11) 鄭喬(조광편, 이상식 역주), 『대한계년사』4, 소명출판, 2004, 141∼149쪽.
註 012
12) 『조선왕조실록(국역)』 순종3권. 2년(1909 己酉, 大韓 隆熙3년) 1월 4일 양력 1번째 기사 ‘국내를 직접 돌아보겠다는 조서를 내리다’
註 013
13) 1909년 1월 6일 황제가 경상도를 순시하여 대구·부산·마산포에 이르렀다. 궁내부 대신 민병석, 군부대신 이병무 등 여러 신하와 이토히로부미가 황제를 모시고 따라갔다. (정교(조광 편, 김우철 역주), 『대한계년사』9, 소명출판, 2004, 34쪽.
註 014
14) 1월 27일 황제가 평안도를 순시하여 의주에 이르렀다. 2월 4일 대궐로 돌아왔다(위의 책, 35쪽).
註 015
15) 齋藤實元子爵銅像復元會, 『齋藤實 追想錄』, 1986. 180쪽.
註 016
16) 財團法人齋藤子爵紀念會, 『子爵齋藤實傳』 제4권, 1941, 799∼803쪽.
註 017
17) 위의 책, 803∼804쪽.
註 018
18) 위의 책, 803∼807쪽.
註 019
19) 위의 책, 807∼811쪽.
註 020
20) 위의 책, 816∼819쪽.
註 021
21) 위의 책, 821∼824쪽.
註 022
22) 사이토 총독을 저격한 독립운동세력은 參議府였다. 참의부(대한민국임시정부 陸軍駐滿參議府)는 1924년 대한민국임시정부 직할군단으로 조직되었다. 참의부원인 金昌均은 李義俊 등 대원 10여명을 이끌고 1924년 5월 사이토 총독의 국경순시 때 강계군 고산면 남상동 對岸 절벽(마시탄강변)에서 사이토 총독을 저격했으나 실패했다. 이후에도 1924년 8월 위원군 주재소를 습격하는 등 꾸준히 무장독립투쟁을 전개하다 1926년 9월 위원경찰서에 체포되었다. 김창균·이의준은 1928년 11월 평양복심법원에서 사형을 선고받았고, 이후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으나 복역하다 옥사했다(『東亞日報』 1928년 9월 22일, 27일, 11월 8일자).
註 023
23) 앞의 책, 506∼516쪽.
註 024
24) 위의 책, 811∼813쪽.
註 025
25) 위의 책, 813∼816쪽.
註 026
26) 위의 책, 824∼826쪽.
註 027
27) 麻生音波, 『咸鏡北道の大富源-豆滿江炭鑛鐵道の使命』, 朝鮮印刷株式會社, 1924, 41∼43쪽:芳井硏一, 『環日本海地域社會の變容-滿蒙·間島と裏日本』, 靑木書店, 2000,의 제4부 「‘裏日本’と環日本海」 참조.
註 028
28) 위의 책, 826∼831쪽.
註 029
29) 위의 책, 831쪽.
註 030
30) 다카시 후지타니, 앞의 책, 80쪽.
註 031
31) 위의 책, 87쪽.
註 032
32) 강동진, 앞의 책, 49∼50쪽.
註 033
33) 財團法人齋藤子爵紀念會, 『子爵齋藤實傳』, 1941, 566∼572쪽. 일례로 1919년 9월 27일 “… 선교사 백여 명을 다과회에 초대했다(감리교 및 장로교 年會를 위한 합동위원).” 등 1919년 15회, 1920년 24회의 외국인과의 면회를 가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