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료명 광개토왕릉비 (廣開土王陵碑)
소재지/출토지 中國 吉林省 集安縣 太王鄕 九華里 大碑街
연대 長壽王 三年(四一四)
크기 高6.39m、幅1~2m
서체 및 재질 隷書
주제분류 고구려|문화> 문화재> 금석문> 碑文
역주자 盧泰敦
解釋文
옛적 始祖 鄒牟王이001001 ‘鄒牟’는 기록에 따라서는 ‘朱蒙’, ‘中牟’, ‘都慕’라고 표기되었다.닫기 나라를 세웠는데 (王은) 北夫餘에서002002 『三國史記』에서는 東扶餘라고 하여 차이를 보인다. 「牟頭婁墓誌」에서도 北夫餘라고 하여, 적어도 5세기 초반까지 왕실의 공식적인 견해는 북부여였다.닫기 태어났으며, 天帝의 아들이었고 어머니는 河伯(水神)의 따님이었다. 알을 깨고 세상에 나왔는데, 태어나면서부터 聖스러운 …… 이 있었다(5字 不明).003003 朱蒙神話는 부여족이 공유하고 있던 東明神話를 바탕으로 한 것으로서, 그 구체적인 서술에 있어선 각 전승마다 약간의 차이를 보이고 있다. 주몽의 출생에 대한 부분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여기에서 하늘님(天帝)과 水神(河伯)을 대신하는 人格神의 모습을 띤 해모수와 유화가 등장하는 高句麗建國神話(b)는 (a)보다 후기에 형성된 것으로 여겨진다. 그리고 b型이 전면에 등장할 때에, 주몽의 출생지가 동부여라는 傳承과 동부여왕 解夫婁와 金蛙王에 관한 傳承도 덧붙여진 것으로 여겨진다(朴時亨, 1966 pp.93~114).
닫기
길을 떠나 남쪽으로 내려가는데, 부여의004004 이 夫餘는 「陵碑」에서 말하는 北夫餘의 어느 지역에 해당한다. 北夫餘는 원래 夫餘라고 하였는데, 그 뒤 4세기 이후 부여의 일부 세력이 두만강 유역에서 自立하니 고구려측에서 이를 東扶餘라 하고 原부여를 北夫餘라고 지칭하게 되었다(盧泰敦, 1989).닫기 奄利大水를005005 『論衡』과 『魏略』, 『後漢書』 등에선 부여 시조 東明이 물고기와 자라 등의 도움을 받아 건넜다는 강의 이름을 각각 엄호수(奄淲水), 시엄수(施掩水), 엄사수(淹㴲水) 등으로 기술하였다. 그리고 『梁書』에서는 엄체수(淹滯水)라 하였다. 이들 강이름은 글자형이 비슷하여 轉寫 과정에서 혼동되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魏書』에서는 ‘一大水’로만 기술하여 구체적인 강이름은 전하지 않는다. 『三國史記』에선 淹滯水라고 하였다.닫기 거쳐가게 되었다. 王이 나룻가에서 “나는 天帝의 아들이며 河伯의 따님을 어머니로 한 鄒牟王이다. 나를 위하여 갈대를 연결하고 거북이 무리를 짓게 하여라”라고 하였다. 말이 끝나자마자 곧 갈대가 연결되고 거북떼가 물위로 떠올랐다. 그리하여 강물을 건너가서, 沸流谷 忽本 서쪽006006 ‘沸流谷 忽本’은 沸流水 유역의 卒本, 즉 지금의 渾江(佟佳江) 이나 그 지류인 富爾河 유역의 桓仁縣 일대로 비정된다. 이 일대를 卒本扶餘라고도 했다고 『三國史記』에 전한다. 卒本은 고구려의 초기 도읍지로서 고구려 후기에도 王이 卒本에 있는 始祖廟에 親行하여 제사를 지냈다.닫기 山上에 城을007007 『魏書』와 『三國史記』에선 紇升骨城이라 하였다. 이 城을 현재 桓仁縣 소재지의 동북쪽 8km에 있는 五女山城으로 비정하는 설이 제기되고 있는데, 五女山城에 대한 구체적인 발굴은 아직 행한 바 없다.닫기 쌓고 都邑을 세웠다. 왕이 王位에 싫증을 내니, (하늘님이) 黃龍을 보내어 내려와서 왕을 맞이하였다. (이에) 王은 忽本 동쪽 언덕에서 龍의 머리를 디디고 서서 하늘로 올라갔다.008008 李奎報의 「東明王篇」에 인용된 『舊三國史』에선, “王이 升天한 후 다시 내려오지 않자, 태자가 왕이 남긴 옥으로 된 채찍을 龍山에 장사지냈다”고 하였다.닫기
遺命을 이어받은 世子 儒留王은009009 『三國史記』에선 이름을 類利 또는 孺留라 하였고, 王號는 琉璃明王이라 하였다. 『三國遺事』 王曆에선 累利라고도 하였다. 『魏書』에선 주몽의 아들이 閭達이고 손자가 如栗이라 하였으며, 如栗의 아들 莫來 때에 夫餘를 征伐하였다고 전한다. 『北史』에선 주몽의 아들로서 閭達과 如栗이 있었고, 주몽의 사후에 如栗이 왕위를 계승하였으며, 如栗의 아들인 莫來 때에 부여를 병탄했다고 하였다. 傳承 간에 차이를 보이는데, 陵碑의 系譜는 『三國史記』의 그것과 같다.닫기 道로서 나라를 잘 다스렸고, 大朱留王은010010 『三國史記』에선 大武神王(或云 大解朱留王)이라 하였고, 이름은 無恤로서 이 왕대에 부여를 정벌하였다고 한다. 『三國遺事』王曆에선 대무신왕 無恤의 다른 이름은 味留라고도 한다고 하였는데, 味留는 朱留의 와전으로 보아야겠다.닫기 王業을 계승하여 발전시키었다.
17世孫에011011 『三國史記』에 의하면, 동명왕 주몽으로부터 광개토왕은 자연적(혈연적) 代數는 13世밖에 되지 않는다. 陵碑에서 17世孫이라 했을 때, 어느 왕을 기점으로 과연 어떤 기준에 의해 계산한 것이냐가 문제로 될 수 있다. 이에 대해선 첫째, 大朱留王을 동명왕의 1세손으로 치고 그 다음 왕들을 차례로 계산하면 19대 광개토왕이 17세손이 된다는 설이 있다(朴時亨, pp.135~136). 둘째, 『三國史記』고구려본기에 기록된 王들의 자연적 代數는 13世밖에 되지 않아 陵碑의 그것과 차이가 나는데, 이는 고구려본기의 王代數에 약간의 누락이 있었다고 보는 설이 상정될 수 있다(채희국). 후자의 경우, 근래 고구려의 건국 기원을 『三國史記』의 그것보다 훨씬 소급하는 논거의 하나로 제시되기도 하였다(손영종, 1990「고구려 건국기년에 대한 재검토」『력사과학』1990―1). 그리고 大朱留王을 기준으로 하여 王代數를 世數로 치면, 광개토왕은 대주류왕의 17세손이 된다고 볼 수 있다.닫기 이르러 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이012012 國罡上은 國原으로 王陵의 소재지를 말하며, 廣開土境은 王의 治績을, 平安도 治績을 상징하는 표현이며, 好太王도 그러하다. 전체로 왕의 諡號에 해당한다. 광개토왕릉에 제사지낼 때의 祭器로 만든 것인 경주 출토 「壺杅」에는 ‘國罡上廣開土地好太王’으로 기술되어 있다. 그리고 같은 시기의 「牟頭婁墓誌」에선 ‘國罡上大開土地好太聖王’이라 하였다. 『三國史記』에선 왕의 시호를 광개토왕이라고 기록되어 있고, 『三國遺事』王曆에선 ‘開土王’이라고만 줄여서 서술되어 있기도 하다.닫기 18세에 왕위에 올라 칭호를 永樂大王이라 하였다. (王의) 恩澤이 하늘까지 미쳤고 威武는 四海에 떨쳤다. (나쁜 무리를) 쓸어없애니, 백성이 각기 그 생업에 힘쓰고 편안히 살게 되었다. 나라는 부강하고 백성은 유족해졌으며, 오곡이 풍성하게 익었다. (그런데) 하늘이 (이 백성을) 어여삐 여기지 아니하여013013 ‘昊天不弔’란 文句는 「牟頭婁墓誌」에서도 광개토왕의 죽음을 애도하는 표현으로 쓰고 있다.닫기 39세에 세상을 버리고 떠나시니, 甲寅年 9月 29日 乙酉에014014 甲寅年(414年) 9月 29日 乙酉는 晉曆과 日曆이 일치한다. 같은 시기에 쓰여진 덕흥리고분 前室 북벽에 쓰여져 있는 「幽州刺史鎭墓誌銘」에 ‘永樂十八年太歲在戊申十二月辛酉朔廿五日乙酉’는 晉曆보다 하루 늦어 차이를 나타낸다. 같은 무덤의 연도 서쪽벽에 다음해 이 무덤의 문을 폐쇄하였음을 기술한 墨書銘에서 ‘太歲在己酉 二月二日辛酉’는 晉曆과 일치한다. 이를 통해 볼 때, 「陵碑」와 「德興里古墳墓誌」에 쓰여진 당시 고구려의 曆은 晉曆과 기본적으로 일치함을 알 수 있다(武田幸男, 1989 p.105).닫기 山陵으로 모시었다. 이에 비를 세워 그 공훈을 기록하여 후세에 전한다. 그 말씀(詞)은 아래와 같다.
稗麗가015015 이를 『晉書』東夷傳에 ‘稗離國在肅愼西北 馬行可二百里 領戶三萬’이라고 한 稗離國으로 보고 그 위치를 치치하르 부근으로 비정하는 설(이병도, 1976 p.387; 천관우, p.521)이 있으나, 『魏書』契丹傳에서 전하는 거란족의 八部 중의 하나인 匹絜部를 지칭하는 것으로 여겨진다(朴時亨, p.154). 그것은 『通典』권200 契丹條에 나오는 匹絜部와 같은 실체이다.닫기 고구려인에 대한 (노략질을 그치지 않으므로), 永樂 5年 乙未에016016 永樂 5年 乙未는 395年인데, 『三國史記』고구려본기에 따르면 乙未年은 광개토왕 4년이 되어 양자간 紀年上에 一年의 차이가 난다.닫기 王이 친히 군사를 이끌고 가서 토벌하였다. 富山,017017 2세기말 고구려가 요동태수 公孫度와 협력하여 富山의 賊을 격파한 바 있다(『三國志』高句麗傳).닫기 負山을 지나 鹽水에018018 鹽水는 小遼水로 비정하는 설(朴時亨, p.158), 太子河 上流로 보는 설(王健群, p.300), 요하 상류 시라무렝하 유역에 있는 鹽湖인 廣濟湖 일대로 비정하는 설(徐榮洙, 1988) 등이 있다. 『三國史記』에 광개토왕 원년에 ‘北伐契丹’하였다고 했고, 그에 앞서 소수림왕 8년에 ‘契丹犯北邊’이라 하였다. 모두 그 방향이 북쪽이다. 이를 볼 때 開原·昌圖 방면의 遼河 상류 쪽으로 비정하는 것이 합리적이라고 여겨진다.닫기 이르러 그 3개 部洛 600~700營을019019 거란인들의 가옥인 천막(帳)들로 구성된 소규모 集落을 지칭한 것이다.닫기 격파하니, 노획한 소·말·양의 수가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었다.020020 『三國史記』에 이 무렵 고구려와 거란 간의 충돌을 전한 기록이 전해진다. 이중 광개토왕 원년의 것이 陵碑의 永樂 5年條의 기사와 같은 사건을 전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小獸林王 8年(378) 9月 “契丹犯北邊 陷八部落”
廣開土王 元年(392) 9月 “北伐契丹 虜男女五百口 又招諭本國陷沒民口一萬而歸”
닫기
이에 王이 행차를 돌려 襄平道를021021 遼陽의 옛 지명이 襄平이다. 양평도는 뒤의 北豊 등의 위치를 보아, 양평의 북쪽에서부터 서남쪽으로 요동반도를 따라 나있던 길로 여겨진다.닫기 지나 東으로 □城, 力城,022022 『晉書』地理志에 遼東國(郡과 같음)의 8개 속현 중의 하나로 전한다. 위치는 미상이다.닫기 北豊,023023 북풍의 위치를 『讀史方輿紀要』에선 奉天府 즉 지금의 沈陽 서북방으로 비정하였다. 그런데 북풍은 3세기 때 魏 요동군 속현의 하나였으며, 240년 요동군의 汶縣과 北豊縣의 流民이 발해만을 건너 산동반도로 건너감에 그곳에(齊郡) 新汶縣과 南豊縣을 설치한 일이 있었다. 汶縣이 지금의 蓋縣 지역으로 여겨지니, 이 汶縣의 流民과 함께 渡海해갔다 하면 北豊縣도 蓋縣에 인접한 요동반도 서쪽 斜面에 있었다고 보아야겠다.닫기 五備□로 오면서 영토를 시찰하고, 수렵을 한 후에 돌아왔다.024024 이 부분은 碑文의 판독과 그 해석에 있어서 가장 異論이 많은 부분이며, 비문 자체에 대한 조작 여부도 계속 논란이 되고 있다. 현재까지 알려진 原石拓本의 사진과 논의에 의거해 일단 위와 같이 판독과 해석을 해둔다. 비문 자체에 대한 보다 정밀한 현지 조사가 필요하다.닫기
百殘과 新羅는 옛적부터 (高句麗의) 屬民으로서 朝貢을 해왔다.025025 이 句節은 고구려측의 과장이다. 4세기 후반 이후 백제는 고구려와 대결상을 지속하였고, 371년에는 평양성전투에서 고국원왕을 죽이는 등 한때 고구려에 대하여 우세함을 보이기도 하였다. 한편, 신라가 371년과 382년 고구려측의 도움을 받아 前秦에 사신을 보내는 등, 이 무렵 백제에 대응해 고구려와 신라 간에 우호적인 관계가 맺어졌다. 이어 광개토왕대에 접어들어 고구려의 세력이 강해지자 신라의 내물왕이 實聖을 人質로 보내게 되었고, 이후 상당 기간 고구려에 종속적인 위치에 처하게 되었다.
이 구절에서 유의되는 사실은 백제와 신라가 ‘옛부터 臣民’으로서 마땅히 고구려의 세력권 내에 포괄되어야 한다는 인식을 담은 고구려 지배층의 天下觀을 나타내고 있다는 점이다. 이 점은 이은 귀절의 과장된 표현을 이해하는 데 하나의 전제가 되는 바이다.
닫기
그런데 왜가 辛卯年(391)에026026 ‘而倭辛卯年來’로 끊어읽어, ‘신묘년 이래로’라고 해석하는 설이 주장되어 오고 있다(鄭杜熙, 王健群, 三上次男 등). 그에 대해 ‘來渡海’를 하나의 단어로 보아야 한다는 反論이 또한 근래 제기되었다(王仲殊).닫기 건너와 百殘을 破하고 (2字缺) 新羅 …… 하여 臣民으로 삼았다.027027 이 句節을 이해하는 데는 크게 세 종류의 시각이 제기되어 왔다.
첫째(A)는 碑文을 위에서 제시한 字句로 판독하고(□5)를 ‘海’로 판독) 해석한 견해이다. 그 구체적인 해석에선 다시 네 가지 시각이 있었다. 즉 A-①은, “倭가 신묘년에 (또는 신묘년 이래로) 바다를 건너와 백제 □□ 신라를 쳐서 臣民으로 하였다”고 보았다(日本學界의 通說, 王健群 등). A-②는, “왜가 신묘년에 침입해오자, (고구려가) 바다를 건너 (왜를) 격파하였다. 그런데 백제가 (왜와 연결하여) 신라를 침략하여 그의 신민으로 삼았다”고 보았다(정인보, 박시형 등). A-③은, “왜가 신묘년에 건너왔다. (고구려가) 바다(또는 浿水)를 건너 백제, □□, 신라(또는 加羅)를 격파하여 臣民으로 삼았다”고 보았다(김석형, 佐伯有淸, 김영하 등). A-④는 “왜를 (고구려가) 신묘년 이래로 바다를 건너가 破하였다. (그런데) 백제가 (왜를 불러들여) 신라를 침공하여 臣民으로 삼았다”(鄭杜熙)고 보았다.
둘째는 비문의 위의 句節의 판독을 다르게 하여, 그 뜻을 새기는 견해들이다(千寬宇, 金永萬, 李亨求, 徐榮洙 등).
셋째는 ‘渡海破’부분 등이 일제의 육군참모본부에 의해 주도된 造作이라고 보는 견해이다(李進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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永樂 6년(396) 丙申에 왕이 친히 군을 이끌고 百殘國을 토벌하였다.028028 『三國史記』고구려본기 광개토왕기에 의하면, 원년 7월에 고구려군이 백제의 10개성을 공격하였고, 10월에는 백제 關彌城을 함락시켰으며, 2년 8월에는 백제군이 고구려 남부에 침입하였고, 3년 7월에는 來侵한 백제군을 광개토왕이 친히 정병 5천을 거느리고 출전해 격퇴한 후 8월에 남부 국경지대에 7개의 성을 쌓았으며, 4년 8월에 광개토왕이 浿水 가에서 백제군에 대승하여 8천여 명을 사로잡았다고 하였다. 백제본기 阿莘王紀에서도 그러한 사실들이 기술되어 있다. 『三國史記』에서 전하는 그러한 기사들은 그 紀年에 있어선 반드시 정확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陵碑에서 전하는 사실과 유관한 것이다.닫기 고구려군이 (3字 不明)하여 영팔성, 구모로성, 각모로성, 간저리성, □□성, 각미성,029029 閣彌城은 『三國史記』고구려본기 광개토왕 원년 10월에 고구려군이 함락시켰다는 백제의 북쪽 重鎭인 關彌城과 동일한 성이다. 백제본기에선 아신왕 2년(393년) 8월에 관미성을 탈환키 위해 백제 장수 眞武가 1만을 이끌고 공격했으나 성공치 못했다고 하였다. 관미성 즉 陵碑의 각미성은 대략 예성강 하구 지역에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박시형, pp174~176).닫기 모로성, 미사성, □사조성, 아단성,030030 阿旦城은 阿且城이라고도 표기되어졌는데, 서울의 광나루 북쪽 기슭에 있는 峨嵯山城으로 비정된다.닫기 고리성,031031 古利城은 고구려때의 古名이 骨衣奴인 豊壤城(楊州 屬縣)으로 비정되기도 한다(이병도, p.381).닫기 □리성, 잡진성, 오리성, 구모성,032032 勾牟城은 連川(古名 工木達)으로 비정하는 설이 있다(이병도, p.382).닫기 고모야라성, 혈□□□□성, □이야라성, 전성, 어리성, □□성, 두노성, 비□□리성, 미추성,033033 彌鄒城은 백제건국설화에서 온조의 형인 沸流가 자리잡았다는 彌鄒와 같은 곳으로서, 대개 仁川地域으로 비정되어 오고 있다(『三國史記』地理志2 漢州 邵城縣條).닫기 야리성,034034 也利城은 지금의 長湍의 고구려 때의 이름인 耶耶城 혹은 夜牙城에 해당하는 것으로 추측하기도 한다(박시형, p.178). 한편 勾牟耶羅城을 長湍으로 비정하기도 한다(이병도, p.382).닫기 태산한성, 소가성, 돈발성, □□□성, 루매성, 산나성, 나단성, 세성, 모루성, 우루성, 소회성, 연루성, 석지리성, 암문□성, 임성, □□□□□□□리성, 취추성, □발성, 고모루성,035035 古牟婁城은 「中原高句麗碑」에 나오는 ‘古牟婁城守事’의 古牟婁城과 동일지명이다. 그 위치는 확실하지 않다.닫기 윤노성, 관노성, 삼양성, 증□성, □□노성, 구천성 …… 등을 攻取하고, 그 首都를 …… 하였다. 百殘이 義에 복종치 않고 감히 나와 싸우니 왕이 크게 노하여 아리수를036036 阿利水는 『三國史記』백제본기 개로왕 21년에 보이는 郁里河와 통하는 것으로서, 한강을 가리킨다.닫기 건너 精兵을 보내어 그 首都에 육박하였다. (百殘軍이 퇴각하니 …… ) 곧 그 성을 포위하였다. 이에 (百)殘主가 困逼해져, 男女生口 1천 명과 細布 천 필을 바치면서 왕에게 항복하고, 이제부터 영구히 고구려왕의 奴客이037037 ‘奴客’은 원래는 私屬民이나 노예를 뜻하는 용어이다. 그런데 陵碑와 같은 시기에 쓰여진 「모두루묘지」에서 중급 귀족인 모두루가 스스로를 낮추어 奴客이라고 하였으며, 陵碑에서도 신라왕이 광개토왕에 대해 자신을 奴客이라고 표현한 것으로 볼 때, 이에서의 奴客은 임금에 대하여 신하를 낮추어 칭한 표현이다.닫기 되겠다고 맹세하였다. 태왕은 (百殘主가 저지른) 앞의 잘못을 은혜로서 용서하고 뒤에 순종해온 그 정성을 기특히 여겼다. 이에 58성 700촌을 획득하고 百殘主의 아우와 대신 10인을 데리고 수도로 개선하였다.
영락 8년(398) 戊戌에 한 부대의 군사를 파견하여 신출자愼(息愼, 肅愼)038038 이를 帛愼으로 판독하여 이 해의 작전을 백제의 북쪽 경계에 가까운 경기도 북부지역이나 강원도의 동예의 땅으로 비정하거나(津田左右吉, 王健群 등), 또는 신라 쪽의 지역으로 비정해 對新羅戰으로 보기도(今西龍, 徐榮洙) 하나, 수긍하는 데 문제가 있다. 비문의 字는 ‘帛’은 분명히 아니고, 前後 文脈으로 보아 對百濟戰은 아니다. 息愼 또는 肅愼을 나타내는 것으로 보는 通說이 타당하다고 여겨진다.닫기 土谷을 觀察,039039 여타의 정벌기사와는 달리 이번 작전에 대한 서술에선 ‘觀신출자愼土谷’이라 하였다. 이 때의 ‘觀’은 觀察使, 觀察處置使의 ‘觀’과 같은 의미로 보여지며, 이는 이미 이 지역이 國內의 일부로 간주될 만큼 半服屬 상태에 있었기 때문이며, 이번 작전은 그런 상태와 관계를 강화키 위한 것이라고 여겨진다(천관우, p538). 『三國史記』西川王 11年(280)條에 肅愼部落을 복속시킨 기사가 보인다.닫기 巡視하였으며 그 때에 (이 지역에 살던 저항적인) 莫□羅城 加太羅谷의 남녀 삼백여 인을 잡아왔다. 이 이후로 (신출자愼은 고구려 조정에) 朝貢을 하고 (그 내부의 일을) 보고하며 (고구려의) 命을 받았다.040040 ‘論事’를 판결을 내렸다는 뜻으로 보아, ‘朝貢論事’를 息愼이 조공을 바치도록 고구려가 결정해주었다는 의미로 보는 해석과(박시형, p.183), ‘論事’는 함께 사정을 토론한다는 뜻인데, 여기에서는 명령을 듣는다는 의미로서 朝貢聽命하게 되었다는 뜻으로 보는 견해(王健群, p.304), 그리고 ‘論事’를 政事와 軍事에 관한 보고를 하는 행위로 보아, 숙신이 고구려에 조공을 하고 그 내부의 일을 奏陳하였다고 풀이하는 견해(武田幸男, 1989 pp.117~119)가 있다.
‘論事’는 그 내부의 일을 보고하고 그에 따른 命을 듣는 것을 의미한다고 여겨진다.
닫기
永樂 9年(399) 己亥에 百殘이 맹서를 어기고 倭와 화통하였다.041041 『三國史記』백제본기에 의하면 阿莘王 6年(397) 5월에 “왕이 倭와 結好하여 太子 腆支를 人質로 보내었고 7월에 漢水 남쪽에서 크게 閱兵式을 거행하였다”고 하였다. 그리고 7년 8월에 고구려를 치기 위해 군대를 이끌고 漢山 北柵에 나아갔다고 하였다. 이러한 『三國史記』의 기사는 이 무렵 백제가 고구려를 공격하기 위해 倭와 연결하면서 군사를 일으켰음을 전해주어, 陵碑의 기사와 상통하는 바이다.닫기 (이에) 왕이 평양으로 행차하여 내려갔다. 그때 신라왕이 사신을 보내어 아뢰기를, “倭人이 그 國境에 가득차 城池를 부수고 奴客으로 하여금 倭의 民으로 삼으려 하니042042 ‘以奴客爲民’을 “신라왕인 저 奴客은 고구려왕인 당신의 백성이 되어있으므로”라는 뜻으로 흔히 해석하고 있으며(정인보; 박시형, p.387; 김석형, p.404; 천관우), 또는 奴客을 백제왕으로 보아 “(이전부터 고구려왕의) 奴客(이었던 백제왕)을 (왜의) 民으로 삼으려 한다”라는 뜻으로 풀이하는 견해도 있으나(武田幸男, p.142), 이 귀절은 신라측이 당면한 급박한 어려움을 고하는 내용으로서 노객은 고구려왕에 대한 신라인을 나타낸 표현이다. 즉 왜가 고구려왕 당신의 奴客인 신라왕을 왜의 民으로 만들려고 하고 있으니, 곧 왜가 쳐들어왔으니, 급히 구원해달라는 뜻이다.닫기 이에 왕께 歸依하여 구원을 요청합니다”라고 하였다. 太王이 은혜롭고 자애로워 신라왕의 충성을 갸륵히 여겨, 신라 사신을 보내면서 (고구려측의) 계책을 (알려주어) 돌아가서 고하게 하였다.
10년(400년) 庚子에 왕이 보병과 기병 도합 5만 명을 보내어 신라를 구원하게 하였다. (고구려군이) 男居城을 거쳐 新羅城(國都)에 이르니, 그곳에 왜군이 가득하였다.043043 이 句節을 신라 변경에 있는 男居城에서부터 신라 王都에 이르는 사이의 지역 공간에 왜가 가득하였다고 해석하는 견해도 제기된 바 있다(王健群, pp.307~309). 그러나 ‘從男居城 …’의 ‘從’은 ‘~으로 나아가(就)’라는 經由한다는 뜻으로 풀이하여야 한다.닫기 官軍이 막 도착하니 왜적이 퇴각하였다. (고구려군이) 그 뒤를 급히 추격하여 任那加羅의044044 任那加羅를 金海의 金官加耶로 보기도 하며(박시형, p.194), 高靈과 金海 둘 다 가능하다고 단정을 유보하는 입장을 취하기도 하였다(千寬宇, 1979). 아무튼 ‘任那’라는 말은 『三國史記』의 强首傳에서 그가 원래 ‘任那加良人’이었다고 하였고, 「眞鏡大師碑」에서 新金氏인 그의 祖先이 ‘任那王族’이었다고 하였는 데서 보여진다.닫기 從拔城에 이르니 城이 곧 항복하였다. 安羅人戍兵045045 이를 ‘安羅人의 戍兵’으로 보아 名詞로 여기는 설에 반대하고 ‘安’을 安置하다라는 동사로 보아 “(新)羅人을 배치하여 지키게(戍兵) 하였다”고 풀이하는 견해가 있다(王健群, pp.308~309). 安羅를 명사로 볼 경우에, 이는 가야의 여러 소국 중에 하나로서 阿羅 또는 阿耶라고도 표기되었는데, 경남 咸安地域에 있었다.닫기 …… 新羅城 □城 …… 하였고, 왜구가 크게 무너졌다. (이하 77字 중 거의 대부분이 不明. 대체로 고구려군의 원정에 따른 任那加羅地域에서의 전투와 정세변동을 서술하였을 것이다).046046 이 부분에 대한 王健群의 判讀은 3면 1행 하단 39, 40번째의 字를 ‘殘倭’라 하고 2행 첫째자를 ‘逃’라 하였다. 즉 ‘殘倭潰逃’가 되는데, 이를 王健群은 “倭의 잔여무리가 무너져 도망갔다”로 풀이하였다. 그런데 王健群의 판독에 따르면서 이때의 ‘殘’을 百殘으로 보아, 百殘과 倭가 潰逃하였다고 풀이하여 영락 10년의 작전에서 비문 제2면 10행 끝부분과 3면 1행에 왜와 함께 참가한 백제군과의 交戰相이 기술되어 있을 것이라는 추측이 제기된 바 있다(김유철, 延敏洙). 새로운 시각으로 주의되는데, 문제는 일차적으로 判讀 자체의 정확성의 확인에 있다.닫기 옛적에는 신라 寐錦이 몸소 고구려에 와서 보고를 하며 聽命을 한 일이 없었는데, 國岡上廣開土境好太王代에 이르러 (이번의 원정으로 신라를 도와 왜구를 격퇴하니) 신라 매금이 …… 하여 (스스로 와서) 朝貢하였다.
14년(404) 甲辰에 倭가 法度를 지키지 않고 帶方 지역에047047 ‘帶方界’ : 황해도 연안지역.닫기 침입하였다. …… 048048 이 부분에 대해 王健群은 비문을 ‘和通殘兵’으로 판독하여, 왜군과 백제군이 연합하여 작전한 것으로 보았다. 흥미로우나 이 역시 판독 자체가 문제로 남는다.닫기 石城(을 공격하고 …… ), 連船(水軍을 동원하였다는 뜻인 듯) …… (이에 왕이 군대를 끌고049049 ‘率’字가 확인됨으로 그 위의 不明한 두 자를 ‘王躬’으로 추측해볼 수 있겠다. 이 전투에 동원된 고구려군을 ‘王幢’이라고 표현함을 보아 그럴 가능성이 높다.닫기) 평양을 거쳐 ( …… 로 나아가) 서로 맞부딪치게 되었다. 왕의 군대가050050 ‘王幢’ : 幢은 깃발이라는 뜻인데, 군대의 단위를 나타내는 용어이다. 신라에서도 군대 단위의 명칭으로 사용했다. 당시 몽고고원의 柔然에서도 그러하였다(『魏書』柔然傳).닫기 적의 길을 끊고 막아 좌우로 공격하니,051051 ‘盪利’는 좌우에서 충돌 사살함을 뜻한다.닫기 왜구가 궤멸하였다. (왜구를) 참살한 것이 무수히 많았다.
17년(407) 丁未에 왕의 명령으로 보군과 마군 도합 5만 명을 파견하여 …… 合戰하여 모조리 살상하여 분쇄하였다.052052 이 해의 고구려군 작전의 대상과 성격을, 對後燕作戰(千寬宇), 倭兵討伐作戰(申采浩, 『朝鮮上古史』 p.210; 今西龍), 또는 加耶諸國과 이를 후원하는 倭兵討伐作戰(李丙燾) 등으로 보지만 대다수의 연구자들은 對百濟戰으로 보고 있다.닫기) 노획한 (적병의) 갑옷이 만여 벌이며, 그 밖에 군수물자는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또 沙溝城053053 沙溝城이 『三國史記』백제본기 전지왕 13년(417)에 東北 二部의 민을 동원해 쌓았다고 전하는 沙口城과 같은 城으로 보는 설이 있다(손영종, 1986; 延敏洙). 즉 이 해의 작전을 對百濟戰으로 보는 것이다.닫기 婁城 □住城 □城□□□□□□城을 破하였다.
20년(410) 庚戌 동부여는054054 동부여의 위치에 대해선, 강릉부근설, 영흥만일대설, 두만강하류지역설 등이 제기되었다. 그리고 동부여의 실체에 대해선, 이를 東濊로 보는 설과, 285년 모용씨의 공격으로 부여의 수도가 함락되자 부여의 일부세력이 동으로 두만강 유역에 피난을 가서 정착하다가 점차 독자적 세력을 구축한 것이라는 설이 제기되어 왔다. 陵碑의 동부여는 285년 이후 두만강 하류유역에 자리잡았던 부여족의 나라로 여겨진다.(盧泰敦, 1989)닫기 옛적에 추모왕의 屬民이었는데,055055 동부여가 추모왕의 예속민이었다는 것은 史實을 기술한 것이 아니다. 원래 부여족의 일파였던 동부여인이 부여출신의 고구려 시조 추모왕과 깊은 관계에 있었다는, 종족 出自의 同源性에 대한 인식에 바탕을 둔 修辭的 표현일 뿐이다.닫기 중간에 배반하여 (고구려에) 조공을 하지 않게 되었다. 왕이 친히 군대를 끌고가 토벌하였다. 고구려군이 餘城(동부여의 왕성)에056056 동부여의 수도인 (夫)餘城은 고구려에 병합된 뒤에 柵城으로 불리웠다. 435년 고구려를 방문하였던 북위의 사신이었던 李傲가 당시 고구려의 영토가 동으로 柵城에 이르렀다고 하였다. 이 柵城이 곧 陵碑에서 전하는 餘城이다. 柵城은 『三國志』北沃沮傳에서 나오는 置溝婁가 이에 해당하겠다. (夫)餘城이란, 마치 신라의 왕도를 新羅城이라고 하였듯이, 동부여의 王都라는 뜻으로 陵碑의 作者가 쓴 것이며, 그 당시의 실제 명칭은 置溝婁나 柵城이라 하였을 것이다(盧泰敦, 1989). 柵城은 오늘날의 훈춘시 외곽의 八連城으로 비정되어 왔으나, 八連城에선 발해시대의 유물만 출토되어 나오므로 이곳은 발해의 東京 龍原府(柵城府) 자리이고, 고구려시대의 柵城은 팔련성 부근 5里 지점에 있는 고구려성인 溫特赫部城으로 비정하기도 한다(엄장록·정영진, 1989「연변지구의 중요한 고구려성에 대한 고찰―고구려 柵城을 겸하여 논함」『연변대학조선학국제학술토론회 론문집』).닫기 도달하자, 동부여의 온나라가 놀라 두려워하여 (투항하였다). 왕의 은덕이 동부여의 모든 곳에 두루 미치게 되었다. 이에 개선을 하였다. 이때에 왕의 교화를 사모하여 凱旋軍을 따라 함께 온 자는 味仇婁057057 味仇婁는 지명이다. 味仇婁는 『三國志』毌丘儉傳에 나오는 북옥저의 買溝婁와 같은 것으로서 두만강 유역에 있었다고 여겨진다.닫기鴨盧,058058 鴨盧를 동부여의 각 지역을 대표하는 귀족과 같은 존재를 나타내는, 加나 干과 같은 의미를 지닌 칭호로 보는 설(박시형)과 이를 이동 가능한 취락으로 여기는 설이 있다(武田幸男, p.65).닫기 卑斯麻鴨盧, 椯社婁鴨盧, 肅斯舍鴨盧, □□□鴨盧였다. 무릇 攻破한 城이 64개, 村이 1,400이었다.059059 이 64城 1,400村을 광개토왕 一代에 걸쳐 攻破한 城村의 합계라는 견해를 다수의 연구자가 취하고 있으나, 이를 對東夫餘戰의 戰果를 나타낸 것으로 보는 입장도 견지되고 있다(朴時亨, p.207; 孔錫龜).닫기
(왕릉을 지키는) 守墓人060060 무덤을 지키고, 제사 등의 행사에 사역되어졌던 守墓戶는 고구려에서 일찍부터 있었다. 『三國史記』에 의하면, 神大王 15년(179) 國相 明臨答夫가 죽자 국가에서 그를 禮葬하고 守墓戶 20家를 두었다. 陵碑에 의하면 광개토왕 전의 왕들의 무덤에도 수묘호를 두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수묘인의 신분과 성격은 다음 귀절에서 논한다.닫기 烟戶(의 그 出身地와 戶數는 다음과 같이 한다.) 賣句余061061 賣句余를 『三國史記』 대무신왕 13년(30)조에 보이는 賣句谷과 같은 곳으로 비정하는 설이 있다(朴時亨, p.217).닫기 민은 國烟이 2家, 看烟이 3家. 東海賈는062062 『三國史記』고구려본기 太祖王 55년(107)조에 나오는 東海谷과 같은 지역으로 비정하는 설(朴時亨, p.217), 이를 동해안의 商賈集團 또는 賤民商戶를 지칭한다고 보는 설이 있다(武田幸男, p.79; 王健群, p.212).닫기 국연이 3가, 간연이 5가. 敦城의063063 敦城은 고구려 멸망 직전의 상황을 전하는 이른바 ‘鴨淥以北 未降十一城’ 중의 하나로 든 ‘新城州 本仇次忽 或云 敦城’에서 그 명칭이 보인다. 단 이 때의 ‘或云’이 當代의 註인지, 후대의 追記인지는 알 수 없다.닫기 民은 4家가 다 간연. 于城의 1가는 간연으로, 碑利城의064064 碑利城은 昌寧碑에 나오는 ‘碑利城軍主喙福登智沙尺干’의 碑利城과 같은 곳으로서 比列忽, 즉 현재의 함경남도 안변으로 비정된다.닫기 2가는 국연. 平穰城民은 국연 1가, 간연 10家. 訾連의 2家는 간연. 俳婁人은 국연 1가, 간연 43가. 梁谷 2가는 간연. 梁城065065 梁谷과 梁城은 梁水인 지금의 太子河의 상류지역에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닫기 2가는 간연. 安夫連의 22가는 간연. 改谷의 3가는 간연. 新城의066066 新城은 지금의 撫順 북쪽에 있는 高爾山城으로 비정된다.닫기 3가는 간연. 南蘇城의067067 南蘇城은 蘇子河와 渾河 합류지점의 살이호산성으로 비정하기도 한다(손영종, 1986). 『翰苑』에 인용된 『高麗記』에선 남소성이 ‘新城北十里山上也’라 하였다.닫기 1가는 국연. 새로 略取해온 韓과 穢(의 烟戶는 다음과 같다.) 沙水城은 국연 1가, 간연 1가. 牟婁城의 2가는 간연. 豆比鴨岑 韓의 5가는 간연. 勾牟客頭의 2가는 간연. 求底韓의 1가는 간연. 舍蔦城의 韓穢는068068 이 경우 사조성지역에 한족과 예족의 두 종족이 함께 거주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닫기 국연 3가, 간연 21가. 古模耶羅城의 1가는 간연. 炅古城은 국연 1가, 간연 3가. 客賢韓의 1가는 간연. 阿旦城과 雜珍城은 합하여 10가가 간연. 巴奴城 韓은 9가가 간연. 臼模盧城의 4가는 간연. 各模盧城의 2가는 간연. 牟水城의 3가는 간연. 幹氐利城은 국연 1가, 간연 3가. 彌鄒城은 국연 1가, 간연이 7가. 也利城은 3가가 간연. 豆奴城은 국연이 1가, 간연이 2가. 奧利城은 국연이 1가, 간연이 8가. 須鄒城은 국연이 2가, 간연이 5가. 百殘南居韓은069069 이에서의 ‘南居’를 영락 10년에 나오는 男居城과 동일한 音을 지닌, 같은 지명의 異寫로 보고 고구려성인 이것과 구별하기 위해 백제의 南居지역의 韓이라고 표현하였다는 설(朴時亨, p.221)과, 南居가 지명이 아니라는 뜻을 새긴 것이라고 보아 백제 수도 남쪽에 거주하였던 韓으로 보는 설(武田幸男, p.50)이 있다.닫기 국연이 1가, 간연이 5가. 太山韓城의 6가는 간연. 農賣城은 국연이 1가, 간연이 7가. 閏奴城은 국연이 2가, 간연이 22가. 古牟婁城은 국연이 2가, 간연이 8가. 瑑城은 국연이 1가, 간연이 8가. 味城은 6가가 간연. 就咨城은 5가가 간연. 彡穰城은 24가가 간연. 散那城은 1가가 국연. 那旦城은 1가가 看烟. 勾牟城은 1가가 간연. 於利城의 8가는 간연. 比利城의 3가는 간연. 細城의 3가는 간연.
國岡上廣開土境好太王이 살아 계실 때에 敎를 내려 말하기를, ‘先祖 王들이 다만 遠近에 사는 舊民들만을 데려다가 무덤을 지키며 소제를 맡게 하였는데, 나는 이들 구민들이 점점 몰락하게 될 것이 염려된다. 만일 내가 죽은 뒤 나의 무덤을 편안히 수묘하는 일에는, 내가 몸소 다니며 略取해 온 韓人과 穢人들만을 데려다가 무덤을 수호·소제하게 하라’고 하였다. 왕의 말씀이 이와 같았으므로 그에 따라 韓과 穢의 220家를 데려다가 수묘케 하였다. 그런데 그들 한인과 예인들이 수묘의 禮法을 잘 모를 것이 염려되어, 다시 舊民 110家를 더 데려왔다. 新·舊070070 新民은 광개토왕대에 공략하였던 지역의 民을 뜻하며, 능비에서 韓·穢가 이들이다. 舊民은 광개토왕 재위전에 고구려의 영역이 되었던 지역의 주민으로서 출신지를 살펴볼 때 原高句麗인 5部 지역 이외의 피복속지의 주민으로 여겨진다. 新民과 舊民의 비율은 2:1이다.닫기 수묘호를 합쳐, 國烟이 30家이고 看烟이 300家로서, 都合 330家이다.071071 國烟과 看烟의 비율이 1:10이다. 그래서 國烟 1戶와 看烟 10戶가 1組가 되어 守墓役을 하였을 것이라고 보는 설(박시형, p.226)과 舊民과 新民의 비율이 1:2이라는 점을 고려하여 舊民 1組와 新民 2組로 이루어진 33戶가 하나의 단위가 되어 공동으로 직역을 수행하였을 것이라고 보는 견해(趙仁成, 1988)가 있다. 그 숫자나 명칭에서 볼 때에, 이 직역수행 단위에서 國烟이 책임자의 위치에 있었다고 여겨진다.닫기
先祖 王들 이래로 능묘에 石碑를 세우지 않았기 때문에 수묘인 烟戶들이 섞갈리게 되었다. 오직 國岡上廣開土境好太王께서 先祖王들을 위해 墓上에072072 集安지역에 있는 王陵級의 큰 규모의 적석총에는 그 무덤 위에 어떠한 建築物을 세웠던 흔적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런데 이에서 말하는 ‘墓上立碑’의 의미가 그러한 건축물과 어떤 연관이 있는지는 확실치 않다. 또한 ‘墓上立碑’를 무덤 위에다 비를 세운다라는 의미보다 墓域上에 세운다는 뜻으로 풀이하기도 한다. 「광개토왕릉비」의 例가 그러한 점을 말해준다고 보는 것이다. 그리고 비는 先代王들의 묘역에 세운 것이 아니라, 광개토왕의 묘역에만 세웠다고 해석하기도 하였다(金賢淑, 1989). 한편 이와는 달리 墓上에 실제 비를 세웠는데, 「광개토왕릉비」의 경우는 워낙 비석이 크기 때문에 그 곁에 세웠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그런 견해에서 중시하는 점은 山城下 1411호묘와 禹山下 1080호묘 측면에서 石碑가 각각 발견되었다는 사실이다. 두 무덤은 중간 규모의 것이다. 이 두 개의 石碑에선 文字가 확인되지 않는데, 현재 발견된 위치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아마도 墓의 봉분상에 있던 것이 굴러 떨어진 것이라고 보았으며, 이를 통해 고구려의 무덤의 정상부에 비를 세웠음을 알 수 있다고 하였다(方起東·林至德, 「集安洞溝兩座樹立石碑的高句麗古墳」『考古與六物』 1983―2; 方起東, 1988 「千秋墓 太王陵 將軍塚」『好太王陵碑と高句麗遺跡』 pp.267~273). 그런데 집안지역의 왕릉급 고분에서 현재까지 알려진 바로서는 「광개토왕릉비」를 제외하고는 어떠한 문자가 있는 비석도 확인되고 있지 않다.닫기 碑를 세우고 그 烟戶를 새겨 기록하여 착오가 없게 하라고 명하였다. 또한 왕께서 규정을 제정하시어, ‘수묘인을 이제부터 다시 서로 팔아넘기지 못하며, 비록 부유한 자가 있을 지라도 또한 함부로 사들이지 못할 것이니, 만약 이 법령을 위반하는 자가 있으면, 판 자는 형벌을 받을 것이고, 산 자는 자신이 守墓하도록 하라’고 하였다.073073 守墓人의 신분 : 守墓人이 매매대상이 되고 전쟁포로였으므로 그 신분을 노예로 규정된다고 하는 설이 있다(白南雲, 1933 『朝鮮社會經濟史』 p.218; 王健群, p.209). 이에 대해, 守墓人이 家를 유지하며 일정 한도의 自己經理를 유지하고 있으므로 이를 노예로 보기 어렵다고 하면서, 이를 軍役을 면제받은 대신에 守墓役을 졌던 농민이라고 보는 설이 제기되었다(金錫亨, 「三國時代の良人農民」 『古代朝鮮の基本問題』 所收). 또한 수묘인은 일정 지역에 집단적으로 이주되어졌고, 耕地 등 그들에 대한 국가적 대책이 취해졌으며, 그들은 국역을 지는 비자유민이었지만 노예는 아니었고, 國烟과 看烟의 관계는 戶首와 奉足의 관계라고 보는 견해가 있다(朴時亨, p.226). 이 두 견해는 기본적으로 서로 통하는 시각으로서, 수묘인은 國罡上에 番上立役했다는 것이다. 한편 이에 대해 수묘인들은 국내성의 國罡上에 집단 거주하며 立役하였던, 노예는 아니나 일반 良人보다는 신분이 낮은 국가에 직접 예속된 집단예민과 같은 성격의 것으로 여겨진다는 주장이 있다(金賢淑, 1989). 國烟과 看烟의 차이성에 대해, 이들이 徙居되어지기 전의 원 거주지에서 국연은 지배층에 속했던 자였고, 간연은 피지배층 출신이라고 보는 설(金賢淑)과 국연은 부유한 戶로서 수묘역을 자력으로 감당할 수 있는 층이고 간연은 영세한 戶로서 10戶가 합해서 한몫을 감당할 수 있는 층이라고 보며, 그리고 신분상으로는 국연은 良人, 간연은 身良役賤層일 수도 있다는 주장이 있다(손영종, 1986).닫기

註 001
: ‘鄒牟’는 기록에 따라서는 ‘朱蒙’, ‘中牟’, ‘都慕’라고 표기되었다.
註 002
: 『三國史記』에서는 東扶餘라고 하여 차이를 보인다. 「牟頭婁墓誌」에서도 北夫餘라고 하여, 적어도 5세기 초반까지 왕실의 공식적인 견해는 북부여였다.
註 003
: 朱蒙神話는 부여족이 공유하고 있던 東明神話를 바탕으로 한 것으로서, 그 구체적인 서술에 있어선 각 전승마다 약간의 차이를 보이고 있다. 주몽의 출생에 대한 부분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여기에서 하늘님(天帝)과 水神(河伯)을 대신하는 人格神의 모습을 띤 해모수와 유화가 등장하는 高句麗建國神話(b)는 (a)보다 후기에 형성된 것으로 여겨진다. 그리고 b型이 전면에 등장할 때에, 주몽의 출생지가 동부여라는 傳承과 동부여왕 解夫婁와 金蛙王에 관한 傳承도 덧붙여진 것으로 여겨진다(朴時亨, 1966 pp.93~114).
註 004
: 이 夫餘는 「陵碑」에서 말하는 北夫餘의 어느 지역에 해당한다. 北夫餘는 원래 夫餘라고 하였는데, 그 뒤 4세기 이후 부여의 일부 세력이 두만강 유역에서 自立하니 고구려측에서 이를 東扶餘라 하고 原부여를 北夫餘라고 지칭하게 되었다(盧泰敦, 1989).
註 005
: 『論衡』과 『魏略』, 『後漢書』 등에선 부여 시조 東明이 물고기와 자라 등의 도움을 받아 건넜다는 강의 이름을 각각 엄호수(奄淲水), 시엄수(施掩水), 엄사수(淹㴲水) 등으로 기술하였다. 그리고 『梁書』에서는 엄체수(淹滯水)라 하였다. 이들 강이름은 글자형이 비슷하여 轉寫 과정에서 혼동되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魏書』에서는 ‘一大水’로만 기술하여 구체적인 강이름은 전하지 않는다. 『三國史記』에선 淹滯水라고 하였다.
註 006
: ‘沸流谷 忽本’은 沸流水 유역의 卒本, 즉 지금의 渾江(佟佳江) 이나 그 지류인 富爾河 유역의 桓仁縣 일대로 비정된다. 이 일대를 卒本扶餘라고도 했다고 『三國史記』에 전한다. 卒本은 고구려의 초기 도읍지로서 고구려 후기에도 王이 卒本에 있는 始祖廟에 親行하여 제사를 지냈다.
註 007
: 『魏書』와 『三國史記』에선 紇升骨城이라 하였다. 이 城을 현재 桓仁縣 소재지의 동북쪽 8km에 있는 五女山城으로 비정하는 설이 제기되고 있는데, 五女山城에 대한 구체적인 발굴은 아직 행한 바 없다.
註 008
: 李奎報의 「東明王篇」에 인용된 『舊三國史』에선, “王이 升天한 후 다시 내려오지 않자, 태자가 왕이 남긴 옥으로 된 채찍을 龍山에 장사지냈다”고 하였다.
註 009
: 『三國史記』에선 이름을 類利 또는 孺留라 하였고, 王號는 琉璃明王이라 하였다. 『三國遺事』 王曆에선 累利라고도 하였다. 『魏書』에선 주몽의 아들이 閭達이고 손자가 如栗이라 하였으며, 如栗의 아들 莫來 때에 夫餘를 征伐하였다고 전한다. 『北史』에선 주몽의 아들로서 閭達과 如栗이 있었고, 주몽의 사후에 如栗이 왕위를 계승하였으며, 如栗의 아들인 莫來 때에 부여를 병탄했다고 하였다. 傳承 간에 차이를 보이는데, 陵碑의 系譜는 『三國史記』의 그것과 같다.
註 010
: 『三國史記』에선 大武神王(或云 大解朱留王)이라 하였고, 이름은 無恤로서 이 왕대에 부여를 정벌하였다고 한다. 『三國遺事』王曆에선 대무신왕 無恤의 다른 이름은 味留라고도 한다고 하였는데, 味留는 朱留의 와전으로 보아야겠다.
註 011
: 『三國史記』에 의하면, 동명왕 주몽으로부터 광개토왕은 자연적(혈연적) 代數는 13世밖에 되지 않는다. 陵碑에서 17世孫이라 했을 때, 어느 왕을 기점으로 과연 어떤 기준에 의해 계산한 것이냐가 문제로 될 수 있다. 이에 대해선 첫째, 大朱留王을 동명왕의 1세손으로 치고 그 다음 왕들을 차례로 계산하면 19대 광개토왕이 17세손이 된다는 설이 있다(朴時亨, pp.135~136). 둘째, 『三國史記』고구려본기에 기록된 王들의 자연적 代數는 13世밖에 되지 않아 陵碑의 그것과 차이가 나는데, 이는 고구려본기의 王代數에 약간의 누락이 있었다고 보는 설이 상정될 수 있다(채희국). 후자의 경우, 근래 고구려의 건국 기원을 『三國史記』의 그것보다 훨씬 소급하는 논거의 하나로 제시되기도 하였다(손영종, 1990「고구려 건국기년에 대한 재검토」『력사과학』1990―1). 그리고 大朱留王을 기준으로 하여 王代數를 世數로 치면, 광개토왕은 대주류왕의 17세손이 된다고 볼 수 있다.
註 012
: 國罡上은 國原으로 王陵의 소재지를 말하며, 廣開土境은 王의 治績을, 平安도 治績을 상징하는 표현이며, 好太王도 그러하다. 전체로 왕의 諡號에 해당한다. 광개토왕릉에 제사지낼 때의 祭器로 만든 것인 경주 출토 「壺杅」에는 ‘國罡上廣開土地好太王’으로 기술되어 있다. 그리고 같은 시기의 「牟頭婁墓誌」에선 ‘國罡上大開土地好太聖王’이라 하였다. 『三國史記』에선 왕의 시호를 광개토왕이라고 기록되어 있고, 『三國遺事』王曆에선 ‘開土王’이라고만 줄여서 서술되어 있기도 하다.
註 013
: ‘昊天不弔’란 文句는 「牟頭婁墓誌」에서도 광개토왕의 죽음을 애도하는 표현으로 쓰고 있다.
註 014
: 甲寅年(414年) 9月 29日 乙酉는 晉曆과 日曆이 일치한다. 같은 시기에 쓰여진 덕흥리고분 前室 북벽에 쓰여져 있는 「幽州刺史鎭墓誌銘」에 ‘永樂十八年太歲在戊申十二月辛酉朔廿五日乙酉’는 晉曆보다 하루 늦어 차이를 나타낸다. 같은 무덤의 연도 서쪽벽에 다음해 이 무덤의 문을 폐쇄하였음을 기술한 墨書銘에서 ‘太歲在己酉 二月二日辛酉’는 晉曆과 일치한다. 이를 통해 볼 때, 「陵碑」와 「德興里古墳墓誌」에 쓰여진 당시 고구려의 曆은 晉曆과 기본적으로 일치함을 알 수 있다(武田幸男, 1989 p.105).
註 015
: 이를 『晉書』東夷傳에 ‘稗離國在肅愼西北 馬行可二百里 領戶三萬’이라고 한 稗離國으로 보고 그 위치를 치치하르 부근으로 비정하는 설(이병도, 1976 p.387; 천관우, p.521)이 있으나, 『魏書』契丹傳에서 전하는 거란족의 八部 중의 하나인 匹絜部를 지칭하는 것으로 여겨진다(朴時亨, p.154). 그것은 『通典』권200 契丹條에 나오는 匹絜部와 같은 실체이다.
註 016
: 永樂 5年 乙未는 395年인데, 『三國史記』고구려본기에 따르면 乙未年은 광개토왕 4년이 되어 양자간 紀年上에 一年의 차이가 난다.
註 017
: 2세기말 고구려가 요동태수 公孫度와 협력하여 富山의 賊을 격파한 바 있다(『三國志』高句麗傳).
註 018
: 鹽水는 小遼水로 비정하는 설(朴時亨, p.158), 太子河 上流로 보는 설(王健群, p.300), 요하 상류 시라무렝하 유역에 있는 鹽湖인 廣濟湖 일대로 비정하는 설(徐榮洙, 1988) 등이 있다. 『三國史記』에 광개토왕 원년에 ‘北伐契丹’하였다고 했고, 그에 앞서 소수림왕 8년에 ‘契丹犯北邊’이라 하였다. 모두 그 방향이 북쪽이다. 이를 볼 때 開原·昌圖 방면의 遼河 상류 쪽으로 비정하는 것이 합리적이라고 여겨진다.
註 019
: 거란인들의 가옥인 천막(帳)들로 구성된 소규모 集落을 지칭한 것이다.
註 020
: 『三國史記』에 이 무렵 고구려와 거란 간의 충돌을 전한 기록이 전해진다. 이중 광개토왕 원년의 것이 陵碑의 永樂 5年條의 기사와 같은 사건을 전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小獸林王 8年(378) 9月 “契丹犯北邊 陷八部落”
廣開土王 元年(392) 9月 “北伐契丹 虜男女五百口 又招諭本國陷沒民口一萬而歸”
註 021
: 遼陽의 옛 지명이 襄平이다. 양평도는 뒤의 北豊 등의 위치를 보아, 양평의 북쪽에서부터 서남쪽으로 요동반도를 따라 나있던 길로 여겨진다.
註 022
: 『晉書』地理志에 遼東國(郡과 같음)의 8개 속현 중의 하나로 전한다. 위치는 미상이다.
註 023
: 북풍의 위치를 『讀史方輿紀要』에선 奉天府 즉 지금의 沈陽 서북방으로 비정하였다. 그런데 북풍은 3세기 때 魏 요동군 속현의 하나였으며, 240년 요동군의 汶縣과 北豊縣의 流民이 발해만을 건너 산동반도로 건너감에 그곳에(齊郡) 新汶縣과 南豊縣을 설치한 일이 있었다. 汶縣이 지금의 蓋縣 지역으로 여겨지니, 이 汶縣의 流民과 함께 渡海해갔다 하면 北豊縣도 蓋縣에 인접한 요동반도 서쪽 斜面에 있었다고 보아야겠다.
註 024
: 이 부분은 碑文의 판독과 그 해석에 있어서 가장 異論이 많은 부분이며, 비문 자체에 대한 조작 여부도 계속 논란이 되고 있다. 현재까지 알려진 原石拓本의 사진과 논의에 의거해 일단 위와 같이 판독과 해석을 해둔다. 비문 자체에 대한 보다 정밀한 현지 조사가 필요하다.
註 025
: 이 句節은 고구려측의 과장이다. 4세기 후반 이후 백제는 고구려와 대결상을 지속하였고, 371년에는 평양성전투에서 고국원왕을 죽이는 등 한때 고구려에 대하여 우세함을 보이기도 하였다. 한편, 신라가 371년과 382년 고구려측의 도움을 받아 前秦에 사신을 보내는 등, 이 무렵 백제에 대응해 고구려와 신라 간에 우호적인 관계가 맺어졌다. 이어 광개토왕대에 접어들어 고구려의 세력이 강해지자 신라의 내물왕이 實聖을 人質로 보내게 되었고, 이후 상당 기간 고구려에 종속적인 위치에 처하게 되었다.
이 구절에서 유의되는 사실은 백제와 신라가 ‘옛부터 臣民’으로서 마땅히 고구려의 세력권 내에 포괄되어야 한다는 인식을 담은 고구려 지배층의 天下觀을 나타내고 있다는 점이다. 이 점은 이은 귀절의 과장된 표현을 이해하는 데 하나의 전제가 되는 바이다.
註 026
: ‘而倭辛卯年來’로 끊어읽어, ‘신묘년 이래로’라고 해석하는 설이 주장되어 오고 있다(鄭杜熙, 王健群, 三上次男 등). 그에 대해 ‘來渡海’를 하나의 단어로 보아야 한다는 反論이 또한 근래 제기되었다(王仲殊).
註 027
: 이 句節을 이해하는 데는 크게 세 종류의 시각이 제기되어 왔다.
첫째(A)는 碑文을 위에서 제시한 字句로 판독하고(□5)를 ‘海’로 판독) 해석한 견해이다. 그 구체적인 해석에선 다시 네 가지 시각이 있었다. 즉 A-①은, “倭가 신묘년에 (또는 신묘년 이래로) 바다를 건너와 백제 □□ 신라를 쳐서 臣民으로 하였다”고 보았다(日本學界의 通說, 王健群 등). A-②는, “왜가 신묘년에 침입해오자, (고구려가) 바다를 건너 (왜를) 격파하였다. 그런데 백제가 (왜와 연결하여) 신라를 침략하여 그의 신민으로 삼았다”고 보았다(정인보, 박시형 등). A-③은, “왜가 신묘년에 건너왔다. (고구려가) 바다(또는 浿水)를 건너 백제, □□, 신라(또는 加羅)를 격파하여 臣民으로 삼았다”고 보았다(김석형, 佐伯有淸, 김영하 등). A-④는 “왜를 (고구려가) 신묘년 이래로 바다를 건너가 破하였다. (그런데) 백제가 (왜를 불러들여) 신라를 침공하여 臣民으로 삼았다”(鄭杜熙)고 보았다.
둘째는 비문의 위의 句節의 판독을 다르게 하여, 그 뜻을 새기는 견해들이다(千寬宇, 金永萬, 李亨求, 徐榮洙 등).
셋째는 ‘渡海破’부분 등이 일제의 육군참모본부에 의해 주도된 造作이라고 보는 견해이다(李進熙).
註 028
: 『三國史記』고구려본기 광개토왕기에 의하면, 원년 7월에 고구려군이 백제의 10개성을 공격하였고, 10월에는 백제 關彌城을 함락시켰으며, 2년 8월에는 백제군이 고구려 남부에 침입하였고, 3년 7월에는 來侵한 백제군을 광개토왕이 친히 정병 5천을 거느리고 출전해 격퇴한 후 8월에 남부 국경지대에 7개의 성을 쌓았으며, 4년 8월에 광개토왕이 浿水 가에서 백제군에 대승하여 8천여 명을 사로잡았다고 하였다. 백제본기 阿莘王紀에서도 그러한 사실들이 기술되어 있다. 『三國史記』에서 전하는 그러한 기사들은 그 紀年에 있어선 반드시 정확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陵碑에서 전하는 사실과 유관한 것이다.
註 029
: 閣彌城은 『三國史記』고구려본기 광개토왕 원년 10월에 고구려군이 함락시켰다는 백제의 북쪽 重鎭인 關彌城과 동일한 성이다. 백제본기에선 아신왕 2년(393년) 8월에 관미성을 탈환키 위해 백제 장수 眞武가 1만을 이끌고 공격했으나 성공치 못했다고 하였다. 관미성 즉 陵碑의 각미성은 대략 예성강 하구 지역에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박시형, pp174~176).
註 030
: 阿旦城은 阿且城이라고도 표기되어졌는데, 서울의 광나루 북쪽 기슭에 있는 峨嵯山城으로 비정된다.
註 031
: 古利城은 고구려때의 古名이 骨衣奴인 豊壤城(楊州 屬縣)으로 비정되기도 한다(이병도, p.381).
註 032
: 勾牟城은 連川(古名 工木達)으로 비정하는 설이 있다(이병도, p.382).
註 033
: 彌鄒城은 백제건국설화에서 온조의 형인 沸流가 자리잡았다는 彌鄒와 같은 곳으로서, 대개 仁川地域으로 비정되어 오고 있다(『三國史記』地理志2 漢州 邵城縣條).
註 034
: 也利城은 지금의 長湍의 고구려 때의 이름인 耶耶城 혹은 夜牙城에 해당하는 것으로 추측하기도 한다(박시형, p.178). 한편 勾牟耶羅城을 長湍으로 비정하기도 한다(이병도, p.382).
註 035
: 古牟婁城은 「中原高句麗碑」에 나오는 ‘古牟婁城守事’의 古牟婁城과 동일지명이다. 그 위치는 확실하지 않다.
註 036
: 阿利水는 『三國史記』백제본기 개로왕 21년에 보이는 郁里河와 통하는 것으로서, 한강을 가리킨다.
註 037
: ‘奴客’은 원래는 私屬民이나 노예를 뜻하는 용어이다. 그런데 陵碑와 같은 시기에 쓰여진 「모두루묘지」에서 중급 귀족인 모두루가 스스로를 낮추어 奴客이라고 하였으며, 陵碑에서도 신라왕이 광개토왕에 대해 자신을 奴客이라고 표현한 것으로 볼 때, 이에서의 奴客은 임금에 대하여 신하를 낮추어 칭한 표현이다.
註 038
: 이를 帛愼으로 판독하여 이 해의 작전을 백제의 북쪽 경계에 가까운 경기도 북부지역이나 강원도의 동예의 땅으로 비정하거나(津田左右吉, 王健群 등), 또는 신라 쪽의 지역으로 비정해 對新羅戰으로 보기도(今西龍, 徐榮洙) 하나, 수긍하는 데 문제가 있다. 비문의 字는 ‘帛’은 분명히 아니고, 前後 文脈으로 보아 對百濟戰은 아니다. 息愼 또는 肅愼을 나타내는 것으로 보는 通說이 타당하다고 여겨진다.
註 039
: 여타의 정벌기사와는 달리 이번 작전에 대한 서술에선 ‘觀신출자愼土谷’이라 하였다. 이 때의 ‘觀’은 觀察使, 觀察處置使의 ‘觀’과 같은 의미로 보여지며, 이는 이미 이 지역이 國內의 일부로 간주될 만큼 半服屬 상태에 있었기 때문이며, 이번 작전은 그런 상태와 관계를 강화키 위한 것이라고 여겨진다(천관우, p538). 『三國史記』西川王 11年(280)條에 肅愼部落을 복속시킨 기사가 보인다.
註 040
: ‘論事’를 판결을 내렸다는 뜻으로 보아, ‘朝貢論事’를 息愼이 조공을 바치도록 고구려가 결정해주었다는 의미로 보는 해석과(박시형, p.183), ‘論事’는 함께 사정을 토론한다는 뜻인데, 여기에서는 명령을 듣는다는 의미로서 朝貢聽命하게 되었다는 뜻으로 보는 견해(王健群, p.304), 그리고 ‘論事’를 政事와 軍事에 관한 보고를 하는 행위로 보아, 숙신이 고구려에 조공을 하고 그 내부의 일을 奏陳하였다고 풀이하는 견해(武田幸男, 1989 pp.117~119)가 있다.
‘論事’는 그 내부의 일을 보고하고 그에 따른 命을 듣는 것을 의미한다고 여겨진다.
註 041
: 『三國史記』백제본기에 의하면 阿莘王 6年(397) 5월에 “왕이 倭와 結好하여 太子 腆支를 人質로 보내었고 7월에 漢水 남쪽에서 크게 閱兵式을 거행하였다”고 하였다. 그리고 7년 8월에 고구려를 치기 위해 군대를 이끌고 漢山 北柵에 나아갔다고 하였다. 이러한 『三國史記』의 기사는 이 무렵 백제가 고구려를 공격하기 위해 倭와 연결하면서 군사를 일으켰음을 전해주어, 陵碑의 기사와 상통하는 바이다.
註 042
: ‘以奴客爲民’을 “신라왕인 저 奴客은 고구려왕인 당신의 백성이 되어있으므로”라는 뜻으로 흔히 해석하고 있으며(정인보; 박시형, p.387; 김석형, p.404; 천관우), 또는 奴客을 백제왕으로 보아 “(이전부터 고구려왕의) 奴客(이었던 백제왕)을 (왜의) 民으로 삼으려 한다”라는 뜻으로 풀이하는 견해도 있으나(武田幸男, p.142), 이 귀절은 신라측이 당면한 급박한 어려움을 고하는 내용으로서 노객은 고구려왕에 대한 신라인을 나타낸 표현이다. 즉 왜가 고구려왕 당신의 奴客인 신라왕을 왜의 民으로 만들려고 하고 있으니, 곧 왜가 쳐들어왔으니, 급히 구원해달라는 뜻이다.
註 043
: 이 句節을 신라 변경에 있는 男居城에서부터 신라 王都에 이르는 사이의 지역 공간에 왜가 가득하였다고 해석하는 견해도 제기된 바 있다(王健群, pp.307~309). 그러나 ‘從男居城 …’의 ‘從’은 ‘~으로 나아가(就)’라는 經由한다는 뜻으로 풀이하여야 한다.
註 044
: 任那加羅를 金海의 金官加耶로 보기도 하며(박시형, p.194), 高靈과 金海 둘 다 가능하다고 단정을 유보하는 입장을 취하기도 하였다(千寬宇, 1979). 아무튼 ‘任那’라는 말은 『三國史記』의 强首傳에서 그가 원래 ‘任那加良人’이었다고 하였고, 「眞鏡大師碑」에서 新金氏인 그의 祖先이 ‘任那王族’이었다고 하였는 데서 보여진다.
註 045
: 이를 ‘安羅人의 戍兵’으로 보아 名詞로 여기는 설에 반대하고 ‘安’을 安置하다라는 동사로 보아 “(新)羅人을 배치하여 지키게(戍兵) 하였다”고 풀이하는 견해가 있다(王健群, pp.308~309). 安羅를 명사로 볼 경우에, 이는 가야의 여러 소국 중에 하나로서 阿羅 또는 阿耶라고도 표기되었는데, 경남 咸安地域에 있었다.
註 046
: 이 부분에 대한 王健群의 判讀은 3면 1행 하단 39, 40번째의 字를 ‘殘倭’라 하고 2행 첫째자를 ‘逃’라 하였다. 즉 ‘殘倭潰逃’가 되는데, 이를 王健群은 “倭의 잔여무리가 무너져 도망갔다”로 풀이하였다. 그런데 王健群의 판독에 따르면서 이때의 ‘殘’을 百殘으로 보아, 百殘과 倭가 潰逃하였다고 풀이하여 영락 10년의 작전에서 비문 제2면 10행 끝부분과 3면 1행에 왜와 함께 참가한 백제군과의 交戰相이 기술되어 있을 것이라는 추측이 제기된 바 있다(김유철, 延敏洙). 새로운 시각으로 주의되는데, 문제는 일차적으로 判讀 자체의 정확성의 확인에 있다.
註 047
: ‘帶方界’ : 황해도 연안지역.
註 048
: 이 부분에 대해 王健群은 비문을 ‘和通殘兵’으로 판독하여, 왜군과 백제군이 연합하여 작전한 것으로 보았다. 흥미로우나 이 역시 판독 자체가 문제로 남는다.
註 049
: ‘率’字가 확인됨으로 그 위의 不明한 두 자를 ‘王躬’으로 추측해볼 수 있겠다. 이 전투에 동원된 고구려군을 ‘王幢’이라고 표현함을 보아 그럴 가능성이 높다.
註 050
: ‘王幢’ : 幢은 깃발이라는 뜻인데, 군대의 단위를 나타내는 용어이다. 신라에서도 군대 단위의 명칭으로 사용했다. 당시 몽고고원의 柔然에서도 그러하였다(『魏書』柔然傳).
註 051
: ‘盪利’는 좌우에서 충돌 사살함을 뜻한다.
註 052
: 이 해의 고구려군 작전의 대상과 성격을, 對後燕作戰(千寬宇), 倭兵討伐作戰(申采浩, 『朝鮮上古史』 p.210; 今西龍), 또는 加耶諸國과 이를 후원하는 倭兵討伐作戰(李丙燾) 등으로 보지만 대다수의 연구자들은 對百濟戰으로 보고 있다.
註 053
: 沙溝城이 『三國史記』백제본기 전지왕 13년(417)에 東北 二部의 민을 동원해 쌓았다고 전하는 沙口城과 같은 城으로 보는 설이 있다(손영종, 1986; 延敏洙). 즉 이 해의 작전을 對百濟戰으로 보는 것이다.
註 054
: 동부여의 위치에 대해선, 강릉부근설, 영흥만일대설, 두만강하류지역설 등이 제기되었다. 그리고 동부여의 실체에 대해선, 이를 東濊로 보는 설과, 285년 모용씨의 공격으로 부여의 수도가 함락되자 부여의 일부세력이 동으로 두만강 유역에 피난을 가서 정착하다가 점차 독자적 세력을 구축한 것이라는 설이 제기되어 왔다. 陵碑의 동부여는 285년 이후 두만강 하류유역에 자리잡았던 부여족의 나라로 여겨진다.(盧泰敦, 1989)
註 055
: 동부여가 추모왕의 예속민이었다는 것은 史實을 기술한 것이 아니다. 원래 부여족의 일파였던 동부여인이 부여출신의 고구려 시조 추모왕과 깊은 관계에 있었다는, 종족 出自의 同源性에 대한 인식에 바탕을 둔 修辭的 표현일 뿐이다.
註 056
: 동부여의 수도인 (夫)餘城은 고구려에 병합된 뒤에 柵城으로 불리웠다. 435년 고구려를 방문하였던 북위의 사신이었던 李傲가 당시 고구려의 영토가 동으로 柵城에 이르렀다고 하였다. 이 柵城이 곧 陵碑에서 전하는 餘城이다. 柵城은 『三國志』北沃沮傳에서 나오는 置溝婁가 이에 해당하겠다. (夫)餘城이란, 마치 신라의 왕도를 新羅城이라고 하였듯이, 동부여의 王都라는 뜻으로 陵碑의 作者가 쓴 것이며, 그 당시의 실제 명칭은 置溝婁나 柵城이라 하였을 것이다(盧泰敦, 1989). 柵城은 오늘날의 훈춘시 외곽의 八連城으로 비정되어 왔으나, 八連城에선 발해시대의 유물만 출토되어 나오므로 이곳은 발해의 東京 龍原府(柵城府) 자리이고, 고구려시대의 柵城은 팔련성 부근 5里 지점에 있는 고구려성인 溫特赫部城으로 비정하기도 한다(엄장록·정영진, 1989「연변지구의 중요한 고구려성에 대한 고찰―고구려 柵城을 겸하여 논함」『연변대학조선학국제학술토론회 론문집』).
註 057
: 味仇婁는 지명이다. 味仇婁는 『三國志』毌丘儉傳에 나오는 북옥저의 買溝婁와 같은 것으로서 두만강 유역에 있었다고 여겨진다.
註 058
: 鴨盧를 동부여의 각 지역을 대표하는 귀족과 같은 존재를 나타내는, 加나 干과 같은 의미를 지닌 칭호로 보는 설(박시형)과 이를 이동 가능한 취락으로 여기는 설이 있다(武田幸男, p.65).
註 059
: 이 64城 1,400村을 광개토왕 一代에 걸쳐 攻破한 城村의 합계라는 견해를 다수의 연구자가 취하고 있으나, 이를 對東夫餘戰의 戰果를 나타낸 것으로 보는 입장도 견지되고 있다(朴時亨, p.207; 孔錫龜).
註 060
: 무덤을 지키고, 제사 등의 행사에 사역되어졌던 守墓戶는 고구려에서 일찍부터 있었다. 『三國史記』에 의하면, 神大王 15년(179) 國相 明臨答夫가 죽자 국가에서 그를 禮葬하고 守墓戶 20家를 두었다. 陵碑에 의하면 광개토왕 전의 왕들의 무덤에도 수묘호를 두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수묘인의 신분과 성격은 다음 귀절에서 논한다.
註 061
: 賣句余를 『三國史記』 대무신왕 13년(30)조에 보이는 賣句谷과 같은 곳으로 비정하는 설이 있다(朴時亨, p.217).
註 062
: 『三國史記』고구려본기 太祖王 55년(107)조에 나오는 東海谷과 같은 지역으로 비정하는 설(朴時亨, p.217), 이를 동해안의 商賈集團 또는 賤民商戶를 지칭한다고 보는 설이 있다(武田幸男, p.79; 王健群, p.212).
註 063
: 敦城은 고구려 멸망 직전의 상황을 전하는 이른바 ‘鴨淥以北 未降十一城’ 중의 하나로 든 ‘新城州 本仇次忽 或云 敦城’에서 그 명칭이 보인다. 단 이 때의 ‘或云’이 當代의 註인지, 후대의 追記인지는 알 수 없다.
註 064
: 碑利城은 昌寧碑에 나오는 ‘碑利城軍主喙福登智沙尺干’의 碑利城과 같은 곳으로서 比列忽, 즉 현재의 함경남도 안변으로 비정된다.
註 065
: 梁谷과 梁城은 梁水인 지금의 太子河의 상류지역에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註 066
: 新城은 지금의 撫順 북쪽에 있는 高爾山城으로 비정된다.
註 067
: 南蘇城은 蘇子河와 渾河 합류지점의 살이호산성으로 비정하기도 한다(손영종, 1986). 『翰苑』에 인용된 『高麗記』에선 남소성이 ‘新城北十里山上也’라 하였다.
註 068
: 이 경우 사조성지역에 한족과 예족의 두 종족이 함께 거주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註 069
: 이에서의 ‘南居’를 영락 10년에 나오는 男居城과 동일한 音을 지닌, 같은 지명의 異寫로 보고 고구려성인 이것과 구별하기 위해 백제의 南居지역의 韓이라고 표현하였다는 설(朴時亨, p.221)과, 南居가 지명이 아니라는 뜻을 새긴 것이라고 보아 백제 수도 남쪽에 거주하였던 韓으로 보는 설(武田幸男, p.50)이 있다.
註 070
: 新民은 광개토왕대에 공략하였던 지역의 民을 뜻하며, 능비에서 韓·穢가 이들이다. 舊民은 광개토왕 재위전에 고구려의 영역이 되었던 지역의 주민으로서 출신지를 살펴볼 때 原高句麗인 5部 지역 이외의 피복속지의 주민으로 여겨진다. 新民과 舊民의 비율은 2:1이다.
註 071
: 國烟과 看烟의 비율이 1:10이다. 그래서 國烟 1戶와 看烟 10戶가 1組가 되어 守墓役을 하였을 것이라고 보는 설(박시형, p.226)과 舊民과 新民의 비율이 1:2이라는 점을 고려하여 舊民 1組와 新民 2組로 이루어진 33戶가 하나의 단위가 되어 공동으로 직역을 수행하였을 것이라고 보는 견해(趙仁成, 1988)가 있다. 그 숫자나 명칭에서 볼 때에, 이 직역수행 단위에서 國烟이 책임자의 위치에 있었다고 여겨진다.
註 072
: 集安지역에 있는 王陵級의 큰 규모의 적석총에는 그 무덤 위에 어떠한 建築物을 세웠던 흔적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런데 이에서 말하는 ‘墓上立碑’의 의미가 그러한 건축물과 어떤 연관이 있는지는 확실치 않다. 또한 ‘墓上立碑’를 무덤 위에다 비를 세운다라는 의미보다 墓域上에 세운다는 뜻으로 풀이하기도 한다. 「광개토왕릉비」의 例가 그러한 점을 말해준다고 보는 것이다. 그리고 비는 先代王들의 묘역에 세운 것이 아니라, 광개토왕의 묘역에만 세웠다고 해석하기도 하였다(金賢淑, 1989). 한편 이와는 달리 墓上에 실제 비를 세웠는데, 「광개토왕릉비」의 경우는 워낙 비석이 크기 때문에 그 곁에 세웠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그런 견해에서 중시하는 점은 山城下 1411호묘와 禹山下 1080호묘 측면에서 石碑가 각각 발견되었다는 사실이다. 두 무덤은 중간 규모의 것이다. 이 두 개의 石碑에선 文字가 확인되지 않는데, 현재 발견된 위치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아마도 墓의 봉분상에 있던 것이 굴러 떨어진 것이라고 보았으며, 이를 통해 고구려의 무덤의 정상부에 비를 세웠음을 알 수 있다고 하였다(方起東·林至德, 「集安洞溝兩座樹立石碑的高句麗古墳」『考古與六物』 1983―2; 方起東, 1988 「千秋墓 太王陵 將軍塚」『好太王陵碑と高句麗遺跡』 pp.267~273). 그런데 집안지역의 왕릉급 고분에서 현재까지 알려진 바로서는 「광개토왕릉비」를 제외하고는 어떠한 문자가 있는 비석도 확인되고 있지 않다.
註 073
: 守墓人의 신분 : 守墓人이 매매대상이 되고 전쟁포로였으므로 그 신분을 노예로 규정된다고 하는 설이 있다(白南雲, 1933 『朝鮮社會經濟史』 p.218; 王健群, p.209). 이에 대해, 守墓人이 家를 유지하며 일정 한도의 自己經理를 유지하고 있으므로 이를 노예로 보기 어렵다고 하면서, 이를 軍役을 면제받은 대신에 守墓役을 졌던 농민이라고 보는 설이 제기되었다(金錫亨, 「三國時代の良人農民」 『古代朝鮮の基本問題』 所收). 또한 수묘인은 일정 지역에 집단적으로 이주되어졌고, 耕地 등 그들에 대한 국가적 대책이 취해졌으며, 그들은 국역을 지는 비자유민이었지만 노예는 아니었고, 國烟과 看烟의 관계는 戶首와 奉足의 관계라고 보는 견해가 있다(朴時亨, p.226). 이 두 견해는 기본적으로 서로 통하는 시각으로서, 수묘인은 國罡上에 番上立役했다는 것이다. 한편 이에 대해 수묘인들은 국내성의 國罡上에 집단 거주하며 立役하였던, 노예는 아니나 일반 良人보다는 신분이 낮은 국가에 직접 예속된 집단예민과 같은 성격의 것으로 여겨진다는 주장이 있다(金賢淑, 1989). 國烟과 看烟의 차이성에 대해, 이들이 徙居되어지기 전의 원 거주지에서 국연은 지배층에 속했던 자였고, 간연은 피지배층 출신이라고 보는 설(金賢淑)과 국연은 부유한 戶로서 수묘역을 자력으로 감당할 수 있는 층이고 간연은 영세한 戶로서 10戶가 합해서 한몫을 감당할 수 있는 층이라고 보며, 그리고 신분상으로는 국연은 良人, 간연은 身良役賤層일 수도 있다는 주장이 있다(손영종, 198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