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료명 흑치상지 묘지명 (黑齒常之 墓誌銘)
소재지/출토지 中國 河南省 洛陽(現 南京博物院藏)
연대 唐 聖曆二年(六九九)
크기 72×71cm
서체 및 재질 楷書
주제분류 백제|문화> 문화재> 금석문> 墓誌·墨書
역주자 宋基豪
판독문 일람
판독문
일람

解釋文
大周의 故人 左武威衛大將軍 檢校左羽林軍 贈左玉鈐衛大將軍 燕國公 黑齒府君 墓誌文 및 序文
하늘을 위로 이고 있으면서 天道에 순응하는 것은 땅이고, 높은 지위에 있지 않은 자라도 쓰여질 수 있는 것은 軍律에 의한 것이다. 그러나 세상에 뛰어난 인재가 아니라면 어찌 이러한 운수에 따를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아름다운 옥을 구하고자 하는 사람은 반드시 密山 위에서 노닐어야 하고, 지혜와 덕을 쌓은 사람이 공자의 문하에 들어가면 한탄하지 않을 것이다.
府君은 이름이 常之이고 字는 恒元으로 百濟人이다. 그 조상은 扶餘氏로부터 나왔는데 黑齒에 봉해졌기 때문에 자손들이 이를 氏로 삼았다. 그 가문은 대대로 達率을 역임하였으니, 달솔이란 직책은 지금의 兵部尙書와 같으며, 본국에서는 2품 관등에 해당한다. 증조부는 이름이 文大이고, 할아버지는 德顯이며, 아버지는 沙次로서, 모두 관등이 달솔에 이르렀다.
부군은 어려서부터 고상하였고, 기질과 정기가 민첩하고 뛰어났으니, 가벼이 여기는 것은 기호와 욕망이었고, 중하게 여기는 것은 명예와 가르침이었다. 가슴 속에는 깊은 마음을 가졌으니 그 끝을 알 수 없을 정도로 맑았고, 정감의 폭은 너무나 넓었으니 그 거리를 알 수 없을 정도로 원대하였다. 여기에 신중함과 성실함을 더하였고, 온화함과 선량함을 포개었다. 이런 까닭으로 친족들이 그를 존경하였으며, 스승과 어른들이 그를 두려워하였다. 나이 어려 小學에서 공부할 적에 『春秋左氏傳』및 班固의『漢書』와 司馬遷의『史記』를 읽었다. 이에 탄식하여 “左丘明이 이를 부끄럽다고 하였고, 공자도 역시 부끄럽다 하였으니, 진실로 나의 스승들이다. 이보다 더한 사람들이 이 세상에 어찌 많을 것인가?”라고 말하였다. 20세가 안되어 家門의 신분에 따라 達率을 받았다. 唐 顯慶(656~660) 중에 당나라에서 邢國公 蘇定方을 보내어 그 나라를 평정하자, 그 임금(실제는 태자) 扶餘隆과 함께 천자를 알현하였으니, 당에서는 이들을 萬年縣人에 소속시켰다.
麟德(664~665) 초년에 人望을 얻어 折衝都尉를 제수받고 熊津城에 鎭守하니 수많은 사람들이 크게 기뻐하였다. 咸亨 3년(672)에는 공적에 따라 忠武將軍, 行帶方州長史를 더하였다. 얼마 안 있어 使持節, 沙泮州諸軍事, 沙泮州刺史로 관직을 옮기고 上柱國을 제수받았다. 이에 지극히 공평한 것을 자기의 소임으로 삼았고, 사사로움을 잊어버리는 것을 커다란 강령으로 삼았다. 천자가 이를 가상히 여겨 左領軍將軍 겸 熊津都督府司馬로 직책을 옮기게 하였고, 浮陽郡 開國公과 食邑 2천 戶를 더하여 봉하였다. 이 때에 좋은 평판으로 物望에 오르내렸고, 조정의 인망이 날로 높아졌다. 마침 蒲海에서 재앙이 일어나고 蘭河에서 사변이 벌어져 부군으로 하여금 洮河道經略副使로 삼았으니, 실로 그에게 의지하는 바가 컸다. 부군은 품성이 빼어나고 굳셌으며, 자질이 뛰어나 사리에 통달하였다. 힘으로는 능히 무거운 문 빗장을 들어올릴 수 있었으나 힘센 것을 자랑하지 않았고, 지혜로는 능히 외적을 방비할 수 있었으나 지혜있는 것을 떠벌리지 않았다. 매번 자신을 드러내지 않음으로써 오히려 드러나게 하였고, 어리석은 듯이 함으로써 인격을 도야하였다. 그러므로 그 때에 행실이 산처럼 똑바로 서게 되어 모든 사람들이 그를 우러러보게 되었다. 어질되 간사함을 기르지 않았고, 위엄을 갖추되 다른 사람을 해치지 않았으니, 상주고 벌주는 것은 반드시 원칙에 따랐고, 선을 권하고 악을 말리는 데에는 어긋남이 없었다. 또한 5倫의 커다란 본보기를 이루었고, 3軍의 크나큰 복이 되었으니, 이에 병사들은 감히 그 명령을 어기지 못하였고, 아랫 사람들은 그 잘못을 용납받을 수 없었다. 高宗이 매번 그의 선함을 칭찬하여 그를 지조와 학식있는 士君子로서 대우하였다. 西道(靑海 지방)에 있을 때에는 크게 공훈을 세웠다. 이 때에 中書令 李敬玄이 河源道經略大使가 되자 군사들이 그의 지휘권을 빼앗았고, 역시 水軍大使, 尙書 劉審禮가 이미 패하여 죽자 장수들 중에 근심하고 두려워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그런 중에 부군이 홀로 높은 산마루와 같은 공훈을 세우면서 그 곤경을 극복함에 따라, 左武衛將軍으로 직책을 옮기고 이경현을 대신하여 大使가 되었으니, 이것은 그에 대한 풍문에 따른 것이다. 부군은 곁에 음악과 女色을 두지 않았고, 평상시에 노리개를 가지고 즐기지 않았다. 經書를 베개삼았으니 祭遵과 같이 예의를 중시하였고, 뛰어난 지략을 품었으니 杜預가 깃발을 많이 세워 적을 혼란에 빠뜨린 것과 같은 꾀를 지녔다. 오랑캐의 티끌이 깨끗하게 치워지니 변방의 말이 살찌고, 중원의 달이 훤하게 비치게 되니 하늘의 여우 기운이 사라졌다. 전쟁터에 출정하면 칭송이 뒤따랐고, 전쟁터에서 개선하면 노래가 절로 나왔다. 이리하여 左鷹揚衛大將軍 燕然道副大摠管으로 벼슬을 옮겼다. 垂拱(685~688) 말년에 天命이 장차 바뀌려 하였는데, 突厥의 骨卒祿은 미친 도적으로 이미 자신의 미미함을 살피지 못하였고, 徐敬業은 반역자로서 또한 자신의 역량을 헤아리지 못하였다. 남쪽으로 淮陰과 海陵을 평정하고 북쪽으로 오랑캐 군사를 섬멸하는 데에 모두 큰 힘이 되었으니, 그의 위세와 명성이 크게 떨치게 되었다. 이에 천자가 制를 내려 이르기를 “재간과 도량이 온화하고 우아하며, 기질과 정기가 고상하고 밝았으며, 일찍부터 어질고 의로운 길을 밟았고, 마침내 깨끗하고 곧은 곳을 밟았구나. 말한 것은 분명히 행하고 배운 것으로 자신을 윤택하게 하였으며, 여러 차례 군사를 통솔하여 매번 충성스러움을 드러냈도다. 그러므로 兼國公(燕國公)과 食邑 3천 호를 봉할 만하다. 그리고 다시 右武威衛大將軍 神武道經略大使를 내리고 나머지는 그 전대로 하노라.”고 하였다. 이리하여 그는 이곳의 포효하는 용감한 병사들을 통솔하여 저곳의 흉악하고 미친 무리들을 전멸시킴으로써, 오랑캐의 말이 남쪽에서 목축될 기회를 얻지 못하였고, 중국의 사신들이 북쪽으로 가는 원망이 사라지게 되었다. 靈州와 夏州는 요충지로서 요사스런 오랑캐들이 가득하였으나, 부군의 위세와 명성은 이를 대신할 자가 없었다. 다시 懷遠軍經略大使로 자리를 옮겨 떠도는 요기를 막기도 하였다. 마침 재앙이 악한 무리로부터 흘러나와 고고한 품격을 가진 부군에게 거듭 미치니, 의심이 마치 명백한 사실인 양 되어버려 옥과 돌이 섞여 구분하지 못하기에 이르렀다. 이미 옥에 갇혀 이윽고 하늘을 등지게 되니, 의로움은 목을 끊어 죽는 것과 같았고, 애처러움은 독약을 마셔 자살하는 것과 같았다. 이 때 나이 60세였다.
맏아들 俊은 어려서 집안이 재난을 당하자 아버지의 분함을 풀어드리려는 뜻을 세웠다. 오랑캐의 조정에서 목숨바칠 것을 맹세하다가 천자가 보낸 사신에게 몸을 맡기니, 여러 차례 충성스러움을 드러냈고 누차 공명을 떨쳤다. 聖曆 원년(698)에 원한이 쌓여 풀지 못함을 천자가 바르게 살피시고 制를 내려 이르기를, “고인이 된 左武威衛大將軍 檢校左羽林衛 上柱國 燕國公 黑齒常之는 일찍이 가문의 지위에 따라 벼슬을 이어받아 軍陳에서의 영예를 두루 거쳤으며, 누차 軍律을 담당하여 공훈을 받들어 떨쳤도다. 지난 번에 사실 무근의 유언비어에 연루되어 옥에 갇혀 심문을 받았더니, 분함을 품고서 세상을 떠났지만 의심받았던 죄는 판별되지 못하였었다. 근래에 이를 검토하여 살펴보니 일찍이 모반하였던 증거가 없고, 오로지 그런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되니 실로 한탄스럽기 그지 없도다. 마땅히 분함을 씻고 죄를 면하게 하여 무덤 속의 영혼을 위로할 수 있기를 바라노니, 총애하는 표시로 관작을 더하여 삼가 죽은 이를 영광스럽게 만드노라. 따라서 左玉鈐衛大將軍으로 추증할 수 있을 것이다. 아울러 勳封은 옛날 그대로 복구하노라. 그 아들 游擊將軍 行蘭州廣武鎭將 上柱國 俊은 어려서부터 집안에서 명성을 날렸고(?), 누차 진실된 정성을 드러냈으며, 아주 위급한 상황에도 이를 피하지 않았고, 몸을 던져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쳤도다. 마땅히 이를 포상하여 기록해둠으로써 크게 칭송함을 보이고자 하노니, 右豹韜衛翊府左郞將에 봉할 만하다. 勳封은 옛날 그대로 하노라.”고 하였다. 아아, 聖曆 2년(699) 1월 22일에 천자가 칙을 내려 이르기를, “燕國公의 아들 俊이 아버지를 移葬하겠다고 요청하였으니, 물건 100 가지를 내리고, 그 장례 일에 필요한 휘장, 일꾼 등 일체를 관청에서 공급하라. 그리고 6품에 해당하는 京官 1명으로 하여금 가서 살피도록 하라.”고 하였다. 그런즉 그 해 2월 17일에 邙山의 남쪽, 官道의 북쪽에 해당하는 곳에 받들어 이장하였으니, 이것은 예에 맞는 것이다.
생각건대, 부군은 외따로 우뚝 솟은 산봉우리처럼 뛰어나기 이를 데 없었으니 재간있는 사람들 사이에 표상이 되었고, 거울을 걸어 놓은 것처럼 허상과 융화되었으니 선인의 도리와 합치되는 사람들 사이에 우러름의 대상이 되었다. 말은 곧고 뜻은 넓었으니 지엽적인 일들이 근본적인 것을 가리는 일이 없었고, 계획을 세우면 일이 이루어졌으니 처음의 일들이 마지막과 일치하는 진정한 아름다움을 지녔다. 밤낮으로 나태하지 않았고 마음은 항상 윗사람을 섬기는 데에 두었으며, 곤경에 처하여도 지조를 바꾸지 않았고 뜻은 항상 아랫사람을 생각하는 데에 두었다. 군자가 관여할 바가 아니면 그 생각은 아예 고려도 하지 않았고, 선왕이 물려준 바가 아니면 그 교훈은 아예 마음 속에 두지 않았다. 軍門에서 스스로 수레를 밀어 변방에서 절개를 이루었다. 그러니 남을 헐뜯기 좋아하는 사람이라도 더 이상 나쁜 말을 하지 못하였고, 아무리 칭찬을 잘 하는 사람이라도 더 이상 좋은 말을 찾지 못하였다. 지혜있는 사람이 그를 보면 지혜롭다 하였고, 어진 사람이 그를 보면 어질다 하였다. 재물을 멀리하고 자신을 잊어버렸으며, 의를 중시하고 다른 사람을 우선으로 생각하였다. 그러므로 비록 목이 달아날지라도 이해를 따지지 않았고, 몸이 위태롭게 될지라도 올바른 길을 버리지 않았다. 이런 까닭으로 겁많은 사람도 그로 인해 용감하게 되었고, 탐욕스런 사람도 그로 인해 청렴하게 되었다. 이것은 굳이 저울을 논하지 않아도 잘못된 무게를 바로잡는 것과 같았고, 준족을 가진 빠른 말로 인하여 느린 말이 원대함을 알게 되는 것과 같았다. 관리로서 마음이 곧고 재간이 있었으니, 글을 쓰매 쌍벽을 이룰 정도로 재주가 뛰어난 사람들이 스스로 자책하였고, 인륜의 옳고 그름을 판별할 능력을 갖추었으니, 잠자코 있더라도 천금이 그 값어치를 발휘하였다. 진실로 지금의 시대에만 본받을 바가 아니었고, 대체로 뭇사람으로부터 우뚝 솟은 인물의 표준이 되었다. 영예와 굴욕은 반드시 있게 마련이고 삶과 죽음은 타고난 것인데, 어차피 귀착하는 바가 동일하다면 어찌 부인의 손 안에서 목숨을 마치겠는가? 내가 일찍이 군대에 있을 때 參義所에 있었는데, 그의 도리에 감복하였고 그의 공훈을 칭송하였었다. 이에 다음과 같이 명문을 짓는다.
5嶽을 말하는 사람은 天台山이 병풍처럼 첩첩이 서 있는 모습을 알지 못하고, 4瀆을 바라보는 사람은 雲洲에 핀 붉은 꽃을 깨닫지 못하네. 삼가 듣건대 金日磾는 한나라의 칼집이 되었고, 百里奚는 진나라의 사다리가 되었도다. 참으로 사리에 밝다 말할 수 있으니 뭇사람을 즐겁게 할 정도로 뛰어났고, 가는 곳마다 보배가 되었으니 어디에 간들 명석하다 아니할 것인가. 공이 동쪽으로부터 왔도다, 마치 봄바람 불어 오듯이. 禮樂 제도가 그로 인해 본색을 드러냈고, 소리와 광채가 그를 기다려 뜻을 이루었도다. 끝이 없구나 군사들의 깃발이여, 가지런하구나 수레들의 덮개여. 커다란 종을 치니 북이 울고 퉁소가 화답하는구나. 이는 누구의 영화인가 나를 두고 덕이 있다 하는 소리도다. 사방에 걸쳐 오랑캐의 근심을 없앴고, 천 리에 걸쳐 公과 侯들의 성을 지켰도다. 공훈을 이미 펼치니 충성과 의로움이 벌써 드러났도다. 그러나 만물에는 곧고 굳건한 것을 꺼리는 일도 있고, 행실이 높으면 도리어 해를 당하는 일도 있구나. 가운데 높은 봉우리가 그 높이를 잃게 되었고, 어두운 무덤 속에는 빛이 사라지게 되었구나. 천하가 그를 위해 애통해 하였고, 4海가 그의 賢良함을 애처롭게 여겼도다. 천자가 이를 깊이 헤아리니, 살아있을 때만 아니라 죽은 뒤에도 포상이 미쳤도다. 내가 실로 감모하여 그를 기리는 글을 짓노라. 그에게 바쳐진 말들이 영원할 것이며, 그의 명성은 끝이 없을 것이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