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촉성회와 협의회

1927년 8월에 개최된 정의부 제4회 중앙의회는 유일당촉성회의를 속히 진전시킬 것을 결의하였다. 그리하여 곧 시사연구회는 유일당조직촉성회의의 개최를 결의한 후 같은해 12월 반석(磐石)에서 남만혁명동지연석회의(南滿革命同志聯席會議)를 열고 이듬해 3월 1일을 기하여 촉성회의를 열 수 있게 재만 32개 단체에 대표를 파견하도록 통지장을 보냈다.012012 慶尙北道警察部, 앞 책, p. 125.닫기 당시 1927년 4월 상해에서 유일당상해촉성회가 조직되었고 이어 10월에는 청년운동을 통일할 목적으로 중국본부한인청년동맹(中國本部韓人靑年同盟)을 조직하여 적극적으로 재만 각 독립운동단체와 통일화동을 획책한 바 1928년 1월에는 연락대표로서 홍진·정원(鄭遠)을 만주에 파견하였다. 이 두 사람은 길림 방면에 도착하여 각 독립운동단화를 역방(歴訪)하면서 통일과 유일당조직 촉진을 종용하고 있었다.013013 주 11)과 같음.닫기
이 무렵인 1927년 12월부터 이듬해 1월로 들어서면서 유일당촉성운동에 앞장서던 정의부 간부 오동진과 신민부 간부 김혁(金赫)·유정근(兪政根) 등이 일본영사관 경찰에 체포되자 만주에서 활동하던 우리 독립운동단체들은 극도의 동요를 가져 오게 되므로 더욱 각 단체의 제휴 통일의 필요성을 통감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 해 2월 3일 정의부·신민부·참의부의 간부들은 영고탑(寧古塔)에 모여 회합을 갖고 4월 중에 3부연합회의를 개최하기로 결의함으로서014014 주 11)과 같음.닫기 정의부를 중심으로 한 전 만주독립운동 단체에서는 유일당운동이 활발히 전개되고 있었다.
특히 정의부의 수령 김동삼·김원식 등은 이 3부통일문제를 논의하기 위하여 신민부 본부를 찾아가

광복의 제1요(要)는 혈전인 바 혈전의 숭고한 사명 앞에서 각단의 의견과 고집을 버려야 할 것이며 독립군이 무장하고 입국하여 광복전(光復戰)을 감행하기 전에 3단체 군부가 합작하지 않으면 안된다. 합작은 지상명령이니 여하한 장해가 있더라도 합작하여야 한다.015015 蔡根植, 앞 책, p.147에 보면, 신민부 간부들은 金東三의 의견에 크게 찬성하고 1928년 5월 하순 3부대표가 吉長沿線 新安屯에서 회합을 가졌으나 金東三의 필사적인 노력에도 불구하고 자체의 주장만 앞세우는 토론으로 결렬되고 말았다.닫기

고 역설하였다.
그러나 신민부와 참의부가 참석하지 못한 채 시사연구회 등이 주가 되 어 1928년 5월 12일부터 5월 26일까지 15일 간에 걸쳐 길림성 화전(樺甸) 및 반석에서는 재만 독립운동단체로서 민족·공산주의를 망라한016016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편,『독립운동사』제5권(독립유공자사업기금운용위원회, 1973), p.575에 보면, 中國國民黨의 國·共合作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던 抗日獨立運動團體는 民族 共產을 막론하고 총집결을 목표로 하였다.닫기 18개 단체 대표 39명과 방청자 30명이 모인 가운데 열렸다.017017 國史編纂委員會編, 앞 책, p. 861 ; 慶尙北道警察部, 앞 책, p.125.닫기 즉 제1차 회의는 5월 12일(음력 3월 23일)부터 16일까지 5일 간에 걸쳐 화전현 화흥학교(華興學校)내에서 열고 개회사에 이어 각 단체대표자 격심사, 주석을 선거하고, 진행으로 이관일(李貫一 ; 李奎東)·이백산(李白山 ; 李靑天)·이희태(李羲太)·이광민·이도일(李道一)을 뽑았다. 곧 회의에 들어가서 ① 세계의 정세 및 일본제국주의 타도방안 등에 관한 연설 및 의견개진 ② 유일당조직에 관한 토의를 거쳐 이의 실현을 기할 것을 결정할 것 등을 결의하였다.018018 國史編纂委員會編, 앞 책, p.861.닫기 그 후 제2차 회의는 5월 17일부터 20일까지 반석현 호란창자(呼蘭廠子)의 한국인 사립학교로 옮겨 계속 회의를 열고 본회 즉 유일당 운동방침 등에 관한 구체적 방침을 토의한 결과 군사·정치·교육·노동 및 청년 등에 관한 분과를 설치할 것을 결정하였다.019019 주 17)과 같음.닫기 곧이어 제3차 회의는 21일부터 26일까지로 또 다시 반석현 남문(南門)밖에 있는 대동농장(大同農場)내로 옮겨 다시 속개하고 집행위원을 선거하여 김동삼·현정경·현익철(玄益喆)·고할신·김이대(金履大)·이웅·김상덕(金尙德)·최동욱·이희태·김만선(金萬善)·이도일·이철(李鐵)·황기찬(黄基賛)·김인(金仁)·윤평(尹平)·최봉(崔鳳)·이동림(李東林)·이청우(李靑雨)·김홍해(金洪海)·한상선(韓相善)·박청(朴靑) 등 21명을 선임하여 집행위원회를 구성하고020020 주 17)과 같음.닫기 회의를 진행하였다. 그리하여 먼저 본회의 헌장제정(憲章制定)에 대하여는 집행 위원회에 일임함과 동시에 재정(財政)에 대해서도 각 단체에서 부담할 것을 결정하였다. 이어 시국문제 등에 관하여 토의한 바 유일당에 대한 보다 구체적인 토의에 이어 본회의 명칭인 유일당 문제에 이르렀을 때 불행하게도 이론(異論)으로 대립되어 집행위원선거 결과에 대한 불만과 더불어 서로 주장이 일치하지 못하고, 결국 기성단체의 부정을 주장하는 전민족유일당조직촉성회파(全民族唯一黨組織促成會派)와 기성단체본위를 주장하는 전민족유일당조직협의회파(全民族唯一黨組織協議會派)로 분열되고 말았던 것이다. 여기에 참가한 각 단체의 상황을 보면 다음과 같다.021021 國史編纂委員會編, 앞 책, pp.861~862 ; 慶尙北道警察部, 앞 책, pp. 125 ~126.닫기
전민족유일당조직촉성회파
단체명근거지대표자
북만 청년 총동맹중동선(中東線)황기찬·이명도(李明道)
남만 청년 총동맹반석현이철·김만전(金萬全)
동만 청년 총동맹간도이희태
송강 청년 총동맹흑룡강성(黑龍江省)손경호(孫景鎬)
여족 공의희(麗族公議會)흑룡강성이광민
합장청년회(哈長靑年會)합장선(哈長線)윤정우(尹丁雨)·김문(金文)
재만농민동맹(在滿農民同盟)반석현박동초(朴東初)·이도일·김응섭
전민족유일당협의회파
단체명근거지대표자
낙산(樂山) 일꾼조합이통현(伊通縣)·고유수(孤楡樹)이종락(李宗洛)·박광(朴光)
납법(拉法) 청년회액목현(額穆縣)한상선
다-물단홍경(興京)지방이청우·이동림
정의부화전현이청천·이관일·이종건(李鍾乾)·고할신·양서봉(梁端鳳)·김문거(金文擧)·배낙산(裵洛山)·강제하(康濟河)·전중파(全中波)·이웅·이세창(李世昌)·오세진(吳世鎭)
신광(新光) 청년회유하(柳河)지방안윤식(安允植)·장성덕(張成德)
남만청년연맹홍경현윤평·최봉
농우회(農友會)회덕현(懷德縣)김세광(金世光)
무본(撫本) 청년회무순(撫順)지방김홍해·박영세(朴永世)
북만조선인청총중동현김인
동만조선인청총간도김무(金武)
이와 같이 전민족의 숙원이던 유일당운동은 촉성회와 협의회로 분열된 채 촉성회측은 모든 단체를 완전히 해체하고 새 단체로 유일당을 결성하자는 개인본위 조직론을 주장하면서 지방적 성격을 띤 기성단체를 모두 해체할 것을 내걸고 “일본제국주의를 박멸하고 정치적 경제적으로 일체의 생활이 평등한 새로운 국가를 건설할 민족유일당을 조직하자”022022 國史編纂委員會編, 앞 책, p.876.닫기는 의견을 내 세우고 민족유일당재만촉성회란 이름으로 반석현 세린하(細麟河)로 장소를 옮겨 그 해 6월부터 회의를 가졌는데 협의회에 대한 반발 이유를 보면023023 國史編纂委員會編, 앞 책, p.865.닫기

1. 송강청년총연맹 대표 손경호는 “협의회로서는 당의 조직이 불가능하다”
2. 북만청년총연맹 대표 황기찬은 “협의회는 중앙집권제가 아니기 때문에 당의 조직이 불가능하다”
3. 동만청년총동맹 대표 이희태는 “당을 조직한 협의회가 주최함은 혁명원리에 위반된다”
4. 재만농민동맹 대표 이도일·박동초와 합장청년회 대표 우성묵(禹聖默), 여족공의회 대표 이광민은 “협의회를 부인한다”
5. 남만청년총동맹 대표 이철·김만선은 “비중앙집권제인 협의희를 절대 부인한다”

는 것이다. 이상 촉성회측 7개 단체의 탈퇴성명과 동시에 개인으로는

6. 정의부 대표 이청천은 “혁명관을 달리하기 때문에 협의회에서는 성공이 불능하다고 자신하고 개인의 권리를 포기하였다”
7. 정의부 대표 배활산(裵活山)은 협의회의 상설을 부인하고 탈퇴하였다.
8. 무본청년회 대표 박영세는 대표 권리를 동 대표인 김홍해에게 위임하고 퇴석하였다.

이에 대하여 단체본위 및 단체중심조직론을 주장하는 정의부를 중심으로 한 단체들은 재만운동단체협의회를 결성하고

1. 민족유일당의 조직을 주비한다.
2. 혁명선열의 유업인 조선혁명의 완성을 위해 적극적으로 분투 노력한다.
3. 전 민족 각층에 공통하는 정치적 불평을 추출하여 민족유일당에 집중시킬 것024024 國史編纂委員會編, 앞 책, pp.864~865.닫기

등을 협의하여 민족적 해방을 최고목표로 하는 단일전선을 전개하고자 역설하였다. 그리고 협의회는 민족유일당이 완성될 때까지 존속할 것을 결정하고 본 회의 임무로

1. 민족유일당 조직을 주비할 것.
2. 분립된 단체를 통일하고 분산된 혁명역량을 총 집중할 것.
3. 대중적 정치투쟁을 전개 지도할 것025025 國史編纂委員會編, 앞 책, p.876.닫기

을 결정하였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재만독립운동단체로서 현실에 비추어 볼 때 불가피한 사명인 것은 어느 단체나 다 알고 있는 바였으나 촉성회측은 “비중앙집권제이기 때문에 당을 조직하기 불능하다”는 구실로 탈퇴 하여 별개의 단체를 조직하고 다음과 같이 결정하였다.026026 國史編纂委員會編, 앞 책, pp. 865~866.닫기

1. 혁명역량을 분리시키는 분파주의자들의 분열적 행동을 대중 앞에 폭로함
2. ‘헤게모니’의 전취욕(戰取慾)으로서 망동하고 운동선을 교란하는 새 청년 영웅주의자를 응징함.

등을 결정함과 동시에 당의 기초를 구성하기 위해 독립운동의 전위자들은 단결하되 당의 명칭을 민족유일당조직동맹이라 하고『전위(前衛)』라는 월간 리프레트식 기관지를 간행하여 선전할 것을 결정하였다.
이와 같은 회의의 결과로 다음과 같은 재만운동단체협의회 규약(規約)을 정하였다.027027 國史編纂委員會編, 앞 책, pp.869~870.닫기

제1조 본회는 재만운동단체협의회라 칭함.
제2조 본회는 만주에 있는 운동단체로써 조직함.
제3조 본회의 의무는 다음과 같다.
1. 민족유일당 조직의 주비
2. 분립단체 통일 및 분산된 혁명역량의 총 집중
3. 대중적 정치투쟁의 전개 지도
제4조 본회에 참가한 단체는 본회에서 결정한 사항을 준수할 것.
제5조 본회는 대표대회 및 집행위원회를 둠.
제6조 대표대회는 참가 단체대표로써 조직함.
제7조 대표대회의 대표는 집행위원회의 결정원 수에 의하여 해당 단체로 부터 선출함.
제8조 대표대회회의는 집행위원의 결의 또는 참가단체 2분의 1 이상의 요구가 있을 때 책임비서가 이를 소집함.
제9조 대표대회희의는 참가 단체의 3분의 2 이상의 출석이 없으면 개회할 수 없음.
제10조 집행위원회는 집행위원 전체로서 조직함.
제11조 본회 집행위원은 21인을 두되 집행위원의 결의에 의하여 증선(增選) 또는 보선(補選)할 수 있음.
제12조 집행위원회는 서무(庶務)·주비(籌備)·선전(宣傳)·경리(經理)의 4 부를 두고 집행위원의 호선(互選)에 의하여 상무 집행위원 약간을 선정하고 각부의 사무를 분담 집행하게 함.
제13조 상무집행위원은 상무집행위원회를 조직하여 책임비서 1인을 호선함
제14조 집행위원회는 필요할 때에 개최하되 상무집행위원회의 결의에 따라 책임비서가 이를 소집함.
제15조 집행위원회는 집행위원 총수의 과반수 출석이 없으면 개회할 수 없음. 제16조 본회 경비는 참가 단체 부담금 및 임시 수입금으로 충당함.
제17조 본회는 민족적 유일당이 조직될 때까지 존속함.
제18조 본 규약은 대표대회의 출석원의 3분의 2 이상의 결정이 없을 때는 수정할 수 없음.

이때 이 유일당운동에 참석했던 상해의 홍면희(洪冕憙)와 북경의 박건병(朴建秉)은 촉성회측에 가담하였지만 일부 단체는 비록 민족유일당회의에는 참가하지 않았지만 촉성회나 협의회에 가담한 단체도 있었고 한편으로는 이 양측의 주장에 동조하지 않은 채 오직 민족유일당기성회를 지지하면서 진출하려는 일파가 있었으므로 결국 만주에서의 유일당 조직문제는 협의회·촉성회·기성회의 3파로028028 國史編纂委員會編, 앞 책, p.876.닫기 분열되어 실행의 귀일을 보지 못했다.각주 28)
이렇게 만주일대를 중심으로 이 당공작으로써 독립운동을 완수하려고 전민족유일당조직을 꾀해 보았지만 그 먼저 다른 단체 보다도 월등한 조 직을 가진 참의부와 신민부가 참석하지 못했던 것이니 그 이유는 각 단 체에서 대표를 보냈으나 중국과 일본 관헌의 엄중한 취체로 참의부 대표 수 명은 중도에서 돌아 갔고 신민부 대표 신숙(申肅)은 회의가 끝난 후에야 도착하였던 것이니029029 國史編纂委員會編, 앞 책, p.862.닫기 어찌 보면 전민족유일당운동이라고 할 수 없었던 것이다.

註 012
: 慶尙北道警察部, 앞 책, p. 125.
註 013
: 주 11)과 같음.
註 014
: 주 11)과 같음.
註 015
: 蔡根植, 앞 책, p.147에 보면, 신민부 간부들은 金東三의 의견에 크게 찬성하고 1928년 5월 하순 3부대표가 吉長沿線 新安屯에서 회합을 가졌으나 金東三의 필사적인 노력에도 불구하고 자체의 주장만 앞세우는 토론으로 결렬되고 말았다.
註 016
: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편,『독립운동사』제5권(독립유공자사업기금운용위원회, 1973), p.575에 보면, 中國國民黨의 國·共合作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던 抗日獨立運動團體는 民族 共產을 막론하고 총집결을 목표로 하였다.
註 017
: 國史編纂委員會編, 앞 책, p. 861 ; 慶尙北道警察部, 앞 책, p.125.
註 018
: 國史編纂委員會編, 앞 책, p.861.
註 019
: 주 17)과 같음.
註 020
: 주 17)과 같음.
註 021
: 國史編纂委員會編, 앞 책, pp.861~862 ; 慶尙北道警察部, 앞 책, pp. 125 ~126.
註 022
: 國史編纂委員會編, 앞 책, p.876.
註 023
: 國史編纂委員會編, 앞 책, p.865.
註 024
: 國史編纂委員會編, 앞 책, pp.864~865.
註 025
: 國史編纂委員會編, 앞 책, p.876.
註 026
: 國史編纂委員會編, 앞 책, pp. 865~866.
註 027
: 國史編纂委員會編, 앞 책, pp.869~870.
註 028
: 國史編纂委員會編, 앞 책, p.876.
註 029
: 國史編纂委員會編, 앞 책, p.862.

※ 본서의 내용은 각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로,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는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