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3부통일회의

전 민족의 숙원이던 민족유일당운동이 협의회와 촉성회로 분열된 후, 협의회의 중핵인 정의부는 또 다시 유일당조직을 위하여 서둘렀다. 즉 만주에서는 유력한 독립운동단체인 신민부와 참의부의 통일을 도모하여 촉성회측에 앞서서 유일당을 완성하고 자파에 의하여 재만운동단체의 영도권을 파악하고자 기도하여 1928년 7월 신민부와 참의부에 3부통일회의의 개최를 제의하고 대표의 참가를 권유하였다. 이에 8월 중 참의부는 곧 동의하고 김희산(金希山)·김소하(金篠廈)·김강(金剛) 등을 대표로 파견하였으나 신민부는 이 제의에는 동의하면서도 군정·민정 양파의 대립으로 대표를 파견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때 정의부와 참의부에서는 이백파(李白波)를 신민부에 파견하여 교섭케 하였더니 군정·민정 양파는 다같이 대표 파견만은 수락했지만 대표권 문제로 다시 양파는 서로 획책배격하고 있었다.030030 慶尙北道警察部, 앞 책, p.126.닫기
한편 정의부는 1928년 8월 24일부터 9월 4일까지 12일 간에 걸쳐 그 근거지인 길림성 동향수하자(東珦水河子)에서 제5회 정기중앙의회를 개최하였다. 즉 정의부 중앙간부 및 대의원 29명과 소수의 방청자가 모인 가운데 개회되어 의안을 심의 결정한 후 민족유일당조직에 대한 협의회와 촉성회 문제에 관하여 논의한 결과 협의회측에 동조할 것을 결정한 정의부는 촉성회를 부인하고 협의회를 지지할 것을 가결하자 이에 집행위원 이청천 등은 직무를 포기한다는 성명을 내고 탈퇴하였다.031031 慶尙北道警察部, 앞 책, p.124에 보면 正義府 간부로 促成會에 가담한 사람은 李靑天·金東三·金元植·金尙德·裵活山이었다.닫기
그렇지만 정의부가 제의하여 추진된 3부통일회의는 1928년 9월 길림에서 개최되었다. 본 대표들은 초당파적 입장에서 민족의 숙원인 민족 유일당의 조직과 3부통일 등의 안건을 밤을 새우면서 숙의한 후 조직에 들어갔는데 여기서 각 대표들은 자체의 주장만을 강력히 주장하므로서 의견이 충돌되어 혼란만 거듭된 채 본 회의는 제대로 개최해 보지도 못하고 시일만 놓치고 말았다. 그 원인을 보면 첫째는 정의부의 지나친 주도권에 반발한 신민부와 참의부가 본 회의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의견으로 임했다.032032 주 27)과 같음.닫기

1. 신민부·참의부·정의부를 완전히 해체할 것.
2. 과정조직으로서 잠시 그 잔무를 정리 청산할 것.
3. 촉성회 대 협의회 분규를 타파하고 전 만주 일반의 대당주비(大黨籌備)를 실행할 것.
4. 이주민의 귀화를 장려하고 특수한 자치권을 획득할 것.

이와 같이 새로이 유일당을 조직하자고 주장한 데 반하여 정의부는 현재의 각 단체를 그대로 촉진하기로 하는 단체중심조직론을 주장하므로 정면으로 충돌하였다.
둘째는 신민부의 대표권 항쟁문제였다. 신민부에서는 이 3부통일회의에 응답하기는 했으나 민정파와 군정파의 내분으로033033 國史編纂委員會編, 앞 책, pp.877~878에 보면 1927년 5월 25일 賓州에서 部民 50명이 회합하여 自衛策을 협의 중 金佐鎭은 이를 反對運動의 謀議라 하고 武裝隊를 파견하여 黃赫 등 수 명을 사살하고 다수의 중경상자를 냈다.닫기 대표가 결정되지 못하고 끝내는 민정파에서는 신숙·김돈(金墩) 등이, 군정파에서는 김좌진·정신(鄭信) 등이 파견되었다. 이에 군정파의 김좌진 등은 민정파의 대표는 신민부의 반동주의자이기 때문에 이를 인정할 수 없다는 이론을 제기하므로서 양파는 대표자격을 놓고 그 일방을 부인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이 회의의 주최인 정의부측에서는 이를 해결하기 위하여 다음의 조건으로 조정에 노력하였다.034034 國史編纂委員會編, 앞 책, pp.876~877.닫기

1. 대표문제를 무조건 타협할 것.
2. 타협이 불능할 때에는 쌍방이 공동으로 출석할 것.
3. 이 두 항목이 함께 실행이 곤란할 때는 심사기관에서 정할 것.

이에 대하여 민정파는 1·2항에는 반대하였지만 3항만은 찬성한 데 반하여 군정파는 전부를 반대하여 해결이 불능하였다. 그 이유는 민정파 대표 송상하(宋尙夏) 등은 신민부에 대한 반동주의자이므로 신민부의 정당한 대표로서 이들과 같이 동석하여 자격을 심사함은 체면상 일대 치욕이니 이들을 우선 제외하고 군정파측 대표를 승인한 후에 심사기관을 조직하여 각부 대표의 자격을 심사하자고 주장하였다.
세째는 참의부 대표의 소환문제였다. 참의부에서는 그 대표의 1인인 김소하를 적탐의 죄명으로 사형할 것을 판결하고 정의부로 하여금 집행해줄 것을 위탁하였다. 정의부에서는 이에 대한 진실을 알기 위해 참의부 간부 김승학(金承學)에게 사실을 물었으나 절대 부인함과 아울러 먼저 김소하 자신이 자진하여 대표권을 포기한다는 성명서를 냄으로서 우선 해결은 되었지만 한편으로 참의부에서는 김승학 등 대표 전부를 소환하게 되었으나 정의부의 무마책으로 일단 무사하였다.
이상은 3부통일회의가 정돈(停頓)된 주요 원인이 되었던 것이지만 그래도 정의부측은 3부대표를 초월한 재길운동자간담회(在言運動者墾談會)를 알선하여 수습하려고 노력도 해보았지만 이루지 못하고 말았다. 왜냐하면 이 회의가 성립되지 못한 주인(主因)은 첫째 신민부의 대표권항쟁이요, 둘째 신민부와 참의부가 서로 정의부의 영도권 장악의 야심을 충족시키는 요인이 되었다고 책임을 전가하고 있었던 것이다.035035 國史編纂委員會編, 앞 책, p.877.닫기
이후 신민부 내의 민정·군정 양파의 내분은 3부통일회의를 중지시켰던 가장 큰 원인으로 그 후에도 양파의 알력은 더욱 치열하게 되었는데 이때 민정파는 재빨리 정의부측에 가담함으로서 대표권을 획득하게 되자 결국 군정파는 자격이 없는 것으로 배제되어 여기서 이탈하고 참의부를 포섭하기에 이르렀다.036036 주 34)와 같음.닫기 특히 이와 때를 같이하여 11월 하순에는 북만주민대회(北滿住民大會)가 영안에서 6현16처 대표인 임시집행부 간부 최경한(崔京漢) 등이 참석한 가운데 열렸는데 여기서 빈주(賓州) 문제를037037 주 34)와 같음.닫기 들어 군정파의 김좌진 등을 사형할 것을 선고하는가 하면 민정파에 가까운 고려국민당(高麗國民黨)은 김좌진 등은 반혁명의 주구이니 매장하라고 성토하였다. 이에 군정파에서는 재중국한인청년동맹 등을 가담시켜 반박의 선전을 남발하게 함으로서 양파의 대립은 더욱 노골화되어038038 주 34)와 같음.닫기 끝내 그해 11월 민족의 염원이던 3부통일의 제2차회의도 결렬되고 말았다. 이 회의를 계기로 신민부·참의부는 물론 정의부까지도 자체 내의 분열이 표면화하여 그해 연말부터는 다시 독립운동단체의 정비 작업이 추진됨으로 3부는 해체하게 되었다.

註 030
: 慶尙北道警察部, 앞 책, p.126.
註 031
: 慶尙北道警察部, 앞 책, p.124에 보면 正義府 간부로 促成會에 가담한 사람은 李靑天·金東三·金元植·金尙德·裵活山이었다.
註 032
: 주 27)과 같음.
註 033
: 國史編纂委員會編, 앞 책, pp.877~878에 보면 1927년 5월 25일 賓州에서 部民 50명이 회합하여 自衛策을 협의 중 金佐鎭은 이를 反對運動의 謀議라 하고 武裝隊를 파견하여 黃赫 등 수 명을 사살하고 다수의 중경상자를 냈다.
註 034
: 國史編纂委員會編, 앞 책, pp.876~877.
註 035
: 國史編纂委員會編, 앞 책, p.877.
註 036
: 주 34)와 같음.
註 037
: 주 34)와 같음.
註 038
: 주 34)와 같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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