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한국독립군과 조선혁명군의 편성

(1) 한국독립군의 편성
1930년 7월 한족자치연합회(韓族自治聯合會)와 생육사(生育社)를 모체로 하여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이 창당되었다. 이 단체의 성격을 보면 당시 북만주(北滿洲) 교민들의 자치기관이던 한족자치연합회를 옹호하고 지도 육성하는 정당이었다. 이 한국독립당은 중앙당부에 6개 위원회를 두고 지방에는 지당부(支黨部)와 구당부(區黨部)를 두고 활약하였는데 중앙의 6개 위원회는 다음과 같다.001001 蔡根植, 『武裝獨立運動秘史』(大韓民國公報處, 1948), pp.156~157.닫기

중앙위원장홍진(洪震)
총무위원장신숙(申肅)
조직위원장남대관(南大觀)
선전위원장안훈(安勳)
군사위원장이청천(李靑天)
경리위원장최호(崔灝)
감찰위원장이장녕(李章寧)

한국독립당은 소속 무장부대인 한국독립군(韓國獨立軍)을 편성하였는데 1931년까지 북만주 중동철도를 중심으로 26개의 군구(軍區)를 설치하고 일제와 대전하였다.002002 國史編纂委員會, 『韓國獨立運動史』五(1969), pp.107~108.닫기

총사령관이청천
부사령관남대관
참모장신숙
재무 겸 외교관안야산(安也山)
의용군훈련대장이광운(李光雲)
의용군중대장오광선(吳光鮮)
암살대대장이출정(李出正)
의용군소대장이춘정(李春正)
별동대대장한광빈(韓光彬)
헌병대대장배성운(裵成雲)
통신부대 겸 검사역신원균(申元均)
구국후원회회장권수정(權秀貞)
서기장홍진
선전대(先戰隊)겸 결사대장심중근(沈重根)
고문 겸 대일구국회 회장서일봉(徐日鳳)

이와 같이 한국독립당과 한국독립군이 결성되었을 때 만주에 대한 일본군의 침략은 더욱 가열되었고 일본군과 만주군이 공동 연합하여 북만주까지 침공하여 왔다. 이에 한국독립당은 1931년 11월 오상현(五常縣) 대석하자(大石河子)에서 중앙회의를 개최하고 각 군구에 총동원령을 내리는 한편 당내의 일체 공작활동은 군사방면에 집중할 것과 그리고 한중연합작전을 중국당국과 협의할 것을 결정하였다.
(2) 조선혁명군의 편성
조선혁명군(朝鮮革命軍)은 처음에는 국민부(國民府) 산하의 독립군이었다. 그런데 1929년 9월 국민부 중앙의회에서 독립군을 당시 먼족유일당조직동맹(民族唯一黨組織同盟)의 소속으로 이관키로 결정함에 따라 지휘처가 변경되었다. 그리고 그해 12월 민족유일당조직동맹이 발전하여 조선혁명당(朝鮮革命黨)으로 개편되자 독립군은 그의 소속이 되었는데 이때 조선혁명당은 산하 독립군을 ‘조선혁명군’이라 하여 독립을 시켰던 것이다.
혁명군의 모체는 정의부(正義府) 소속 의용군 6개 부대였으며 여기에 새로이 20개 부대를 증가시킨 것이다. 처음에는 10개대로 편성되어 각 지방에 주둔시켰는데 그 후 조선혁명군으로 개편된 뒤에는 10개대를 7개대로 개편하였다. 처음 10개대로 편성되었을 당시의 부대 편성과 그 활동구역을 보면 다음과 같다.003003 國史編纂委員會, 앞 책, P.791.닫기

제1대장 이동훈(李東勳)관동(寬東)·관서(寬西)지방
제2대장 장철호(張喆鎬)화남(化南)·화동(化東)지방
제3대장 유광흘(柳光屹)집동(輯東)·집서(輯西)지방
제4대장 이윤환(李允煥)환인(桓仁)·무본(撫本)·흥경(興京)지방
제5대장 양세봉(梁世奉)집서의 일부 통남(通南)지방
제6대장 김문거(金文據)유하(柳河)·해원(海原)지방
제7대장 조웅걸(趙雄杰)화전(樺甸)·무송(撫松)·반석(磐石)지방
제8대장 권영조(權永祚)길액(吉額)·오상(五常)·안도(安圖)지방
제9대장 안붕(安鵬)길림(吉林)·길서(吉西)·회덕(懷德)지방
제10대장 김경근(金敬勤)장백(長白)·임강(臨江)지방

12월 조선혁명군으로 정비 독립되었을 때 혁명군의 지도기관으로써 각 대에서 대표자를 선출하여 군사위원회를 조직하였으며 군사위원회에서는 총사령관에 이진탁(李振卓), 부사령관에 양세봉, 참모장에 이웅(李雄)을 선임하였고 종래의 10개대를 7개대로 편성하였다.004004 이때 편성된 7個地方軍의 관할범위는 第1隊는 寬東·寬西地方, 第2隊는 桓仁·輯安地方, 第3隊는 通化·臨江地方, 第4隊는 柳河·興京地方, 第5隊는 海原·撫順地方, 第6隊는 開原·磐石·吉林地方, 第7隊는 東滿地方이다.닫기 그후 1930년 8월 8일에 중앙집행위원회는 조선혁명군을 중대제(中隊制)로 개편하고 다음과 같이 중대장을 임명하였다.005005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제5권, P.594.닫기

제1중대장김보안(金輔安)
제2중대장양세봉
제3중대장이윤환
제4중대장김문거
제5중대장이종락

그런데 조선혁명당과 조선혁명군 내부에 불행한 사태가 일어났다. 그것은 내부에 사회주의자가 많이 침투하여 있었는데 사회주의자들은 1930년 8월 조선혁명당대표회의 때 혁명당을 탈퇴하였으며 특히 조선혁명군의 제5중대장 이종락도 이들과 동조하여 혁명군을 이탈하여 길림과 흑룡강(黑龍江) 지방을 근거로 공산주의 혁명운동을 전개하면서 ‘조선혁명군 길강지휘부(朝鮮革命軍 吉江指揮部)’를 설치하였다. 이렇게 되자 조선혁명군은 흑룡강과 길림지방의 기반을 확보하기 위하여 ‘흑길별동대(黑吉別動隊)’를 편성하여 당지에 파견하였다. 이 별동대는 9월 5일 현지에 도착하여 활동을 개시하였는데 당시 별동대의 편성은 다음과 같다.006006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앞 책, P.595.닫기

별동대장문학빈(文學彬)
제1소대장문시현(文時鉉)
제2소대장김현우(金玄宇)
제3소대장현지근(玄智根)

2) 한중연합군의 편성과 전투
(1) 한국독립군의 한중연합작전
1931년 만주사변(滿洲事變)을 야기한 일본이 만주를 점령하고 괴뢰정부인 만주국을 수립하였다. 그 후 일본군은 만주군과 합동하여 우리 독립군에 대한 토벌작전을 본격화하였다. 이때 만주방면에는 반만항일의 기치를 든 수많은 중국군부대가 편성되어 일본군과 만주군에 항전하고 있었다. 이들 부대는 전의 장학량(張學良)군 일부와 보위단(保衛團) 또는 마적의 일부도 참가한 오합지중(烏合之衆)이었다. 그중 대표적인 부대로서 돈화(敦化)지방에 왕덕림(王德林)·풍점해(馮占海)부대가, 흑룡강지방에는 마점산(馬占山) 부대가, 하르빈〔哈爾賓〕에는 중국 호로군(護路軍) 사령관 정초(丁超)가 인솔하는 부대와 호로군 여단장 고봉림(考鳳林) 부대가 있어 일만군(日滿軍)과 싸우고 있었다. 중국인과 한국인의 공동의 적인 일본군을 대상으로 하는 이들 중국군의 활동을 우리 독립운동자가 볼 때 한중연합군의 성립이 박두하였음을 직감케 하는 것이었다.
1931 년 11월 2일 한국독립당은 긴급중앙회의를 개최하고 일제의 만주점령에 대처하여 새로운 활동목표를 설정하였다. 동 회의에서 독립당은 모든 역량을 항일전에 집중키로 하고 다음과 같은 삼개항을 결의하였다.007007 韓國光復軍總司令部編, 『光復』第2卷 第1期(重慶 : 大韓民國 24年 1月 20日), p.53.닫기

1. 각 군구에 총동원령을 하달하고 정개적(整個的) 군사행동을 개시한다.
2. 당내의 일체 공작은 군사활동에 집중한다.
3. 길림성 항일당국에 대표를 파견하여 연합작전을 협의한다.

이상과 같이 결의한 후 한국독립당은 동월 10일 각 군구에 총동원령을 내려 소집과 징모활동을 전개하였으며 12일에 당·군대표 신숙과 남대관 등을 중국의 길림자위군·호로군연합군총부에 파견하여 동 군사령관 정초 및 제이·제삼군장 양문휘(楊文揮)·고봉림 등과 한중연합작전을 협의케 하였다. 이 결과 동년 12월 11일 한국독립군 총사령관 이청천과 최악·오광선·심만호(沈萬浩)·김청농(金靑儂)·최관용(崔寬用)·최종원(崔種元) 등 간부가 중국군당국과 협의하여 다음과 같은 구체안을 마련하여 상호 협정을 체결하였다.008008 주 7)과 같음.닫기

1. 한중 양군은 어떤 불리한 환경에 처하더라도 상호 장기항전을 맹서한다.
2. 중동철도(中東鐵道)를 경계로 하여 서부전선은 중국군이 담당하고 동부전선은 한군이 담당한다.
3. 한·중연합전시 후방교련은 한군장교가 담당하고 한군에 수요되는 일체 물자는 중군이 공급한다.

이로써 만주에서의 한중연합군에 의한 항일전이 전개되게 되었다.
한국독립군은 앞서 발령된 총동원령에 의하여 소집된 병사의 훈련과 부대편성을 서두르던 중인 1932년 2월 12일에 일만군의 대공격을 받게 되는 불행을 겪게 되었다. 아직 부대를 재정비하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필요한 장비도 채 갖추지 않은 상태였다. 반면 일만군은 2월 5일 하르빈방면에서 중국군을 대파하고 그 여세를 몰아 공군의 엄호를 받으며 중동연선(中東沿線)을 따라 진공하고 있었다.
한중연합군은 위사하(葦沙河)·일면피(一面陂)·오길밀(烏吉密)·밀로참(密路站)·동빈방정(同賓方正)·의란(依蘭) 등지에서 일만군과 치열한 격전을 전개하였으나 식량과 탄약이 부족하여 참패를 당하고 사산되고 말았다.
즉 한국독립군 총사령 이청천은 참모장 신숙과 일지대군(一支隊軍)을 친솔하여 의란에서 격전을 벌였으나 세불리(勢不利)하여 흑룡강성 통하현(通河縣)으로 퇴각하여 부대를 수습하였다.
한편 별동부대장 안종선(安鍾宣)은 중국 제3호로군 고봉림부대와 공동작전으로 3월 3일 아성(阿城)을 일시 탈환하는 전과를 올렸으나 오래 수성(守城)하지 못하였고, 차철(車澈)·야상기(也相奇)·전북빈(全北賓)이 인솔하는 제3·제4·제5 대대는 중국 호로군 제3·제4여장 유지광(劉志光)·궁영무(宮英武) 등의 부대와 연합하여 한 달 남짓 고전하다가 일면피 이북지방으로 퇴각하고 말았다.009009 韓國光復軍總司令部編, 앞 책, pp.53~54.닫기
첫번째 한·중연합작전이 이와 같이 패전으로 끝난 뒤 잠시 동안 상호연락이 두절되었었다.
그러자 한국독립당은 쌍성현(雙城縣) 모아산(帽兒山)에서 비상회의를 개최하고 각지에 흩어진 독립군을 다시 집결시키는 한편 중국군 고봉림 부대에 사람을 파견하여 계속 연합작전을 전개할 것을 통고하였다.
이와 같은 한국독립당의 수습책은 성공하여 1개월 미만에 독립군이 재집결하였으며 김창환(金昌焕)을 총사령 대리로 임명 부대를 재편성하여 훈련에 임하였다. 전력을 재정비한 한중연합군은 1932년 8월 본격적인 연합작전을 개시하였다.
ㄱ. 쌍성보전투010010 蔡根植, 앞 책, pp.172~173 ;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앞 책, pp.625~629.닫기
즉 독립군 3천 명과 중국군 2만 5천 명으로 편성된 한중연합군은 쌍성보(雙城堡) 공격계획을 수립하였다. 쌍성보는 합장선(哈長線) 철도의 요지이며 북만주 중요 물산의 집산지이므로 전략적 가치가 매우 큰 곳이었다.
9월 3일 총사령 이청천 장군이 흑룡강지방에서 부대를 인솔하고 오자 독립군을 다시 편성하고 김창환이 부사령이 되어 19일 쌍성보를 향하여 진군하였다. 진군 도중 만주군의 저항을 물리치면서 3일 동안에 2백여 리를 진격하여 쌍성보 남쪽 5리 지점에 있는 소성자(小城子)에 도착하였다. 그곳에서 중국군 고봉림부대와 합세하여 치밀한 작전계획을 수립하였다.
중국군은 동문과 남문을 공격하고 독립군은 서문을 공격하기로 결정한 후 공격을 개시하였다. 성내에는 만주군 3개여단이 완강히 저항을 하였으나 우리 독립군의 맹렬한 공격으로 퇴로로 남겨두었던 북문으로 도주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북문 밖에는 미리 이와 같은 사태가 있을 것을 예상하여 매복시켜둔 연합군의 공격으로 대부분이 사살되었다. 이 격전은 연합군의 승리로 돌아갔으며 3만의 병력이 3개월 동안 유지할 수 있는 많은 물자를 노획하였다.
전투에서 승리하고 많은 물자를 노획한 연합군의 사기는 하늘을 찌를듯하였으나 일본군 대부대의 반격이 있을 것을 고려하여 연합군의 주력 부대를 쌍성보 5리 밖에 있는 우가둔(牛家屯)으로 옮기게 하고 쌍성에는 소수의 부대를 잔류시켰다. 잠시 후 예상하였던 대로 일본군 대부대가 쌍성보를 공격하여 왔다. 연합군은 이를 맞아 용감히 싸웠으나 불행히도 우군인 중국군 내부에 반란이 일어나 쌍성보를 일군에게 빼앗기고 말았다. 쌍성보의 격전으로 일시 흩어졌던 연합군은 다시 부대를 재정비한 후 11월 7일 재차 쌍성보 탈환작전을 전개하였다. 독립군과 중국군은 부대를 좌·우익으로 나누어 쌍성보 공격을 개시하였는데 독립군은 200명을 단위로 부대를 15개로 편성한 후 선봉에 서서 진격하였으며 중국군은 탄환과 식량을 담당하였다. 오후 6시 총공격을 개시하여 1개 부대는 정면으로, 1개 부대는 왼쪽으로, 1개 부대는 뒤편으로, 기관총대는 중앙으로 각각 돌격하였다. 적은 수류탄과 박격포로 완강하게 저항하였다. 수 시간에 걸친 격전 끝에 성안으로 돌입한 독립군은 적진을 교란시켰으며 쌍성보 뒷산을 점령한 독립군 포병대가 시가의 주요 건물에 포격을 가하였다. 치열한 전투 끝에 전황이 아군에게 유리하게 돌아감을 본 만주군들이 전원 항복을 하였으며 성문을 열어 연합군을 환영하였다. 이 전투에서 일본군 1개 중대가 전멸하였으며 수많은 부상자를 냈다.
두번째로 쌍성보를 탈환한 연합군은 입성 즉시 전리품을 정리하고 전장을 정돈한 후 주민들을 안심시켰다. 그리고는 적의 반격에 대비하였다.
11월 20일 일본군은 어김없이 보복전을 전개하였다. 하르빈과 장춘(長春)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 주력부대와 만주군의 대병력이 비행기의 엄호를 받으며 반격하여 온 것이었다. 이에 대하여 아군은 전병력을 7대로 나누어 각 요충지에 방어선을 구축하고 일본군의 반격을 맞았다. 1주야를 두고 치열한 공방전이 전개되었는데 피아에 사상자가 속출하여 성 내외에는 피바다를 이루었고 사체가 누적되었다. 21일 밤 일본군은 총공격을 감행하였다. 용전분투하던 우군의 방어선이 흔들리기 시작하였으며 적의 비행기 공격과 대포로 인하여 마침내 방어선이 적에게 돌파당하고 말았다. 그러나 독립군은 22일 새벽까지 무너져가는 전선을 독려하며 온갖 방법으로 항전을 계속하였으나 중국군의 사기가 점차 떨어짐으로써 부득이 성을 적에게 내주고 500여 리를 후퇴하여 오상현 충하진(冲河鎭)에 머무르게 되었다. 이 전투에서 독립군의 피해도 막대하였을 뿐 아니라 패전에 낙담한 고봉림부대가 적군과 단독으로 휴전회담을 개최하였다. 이에 독립군이 이를 극력 만류하였으나 본래 신념이 약하고 형세에 끌리기 쉬운 중국인 집단인지라 고봉림부대는 이익을 좇아 이념과 의리를 버리고 휴전협의를 계속하였다. 이에 독립군은 동월 27일 패전의 상처와 동지에게 배반당한 쓰라림과 분노를 되씹으며 결연히 중국군과 갈라져 독자적인 행동을 취하게 되었다.
한국독립당은 11월 29일 중앙회의를 개최하고 앞으로의 활동방침을 다음과 같이 결의하였다.011011 韓國光復軍總令部編, 앞 책, P.55.닫기

1. 군사활동 지점을 개정하여 동만주(延吉·汪清·東寧·琿春·寧安縣)에 한정하고 먼저 구국군(救國軍) 수뇌부에 대표를 파견하여 연합작전을 협의함.
2. 각 군구에 수훈장정(受訓壯丁)을 다시 징집할 것.
3. 황학수(黃學秀)를 부사령관으로 선정한다.

이와 같은 결정에 의하여 독립당은 3명의 대표를 중국구국군 총사령 왕덕림에게 파견하였으며 또한 남경(南京)에도 대표를 보내어 중국정부와 한중연합작전을 협의하였다.
12월 25일 한국독립군은 중국군과 연합하여 경박호(鏡泊湖)에서 만주군 유격대 2천 명과 격전을 벌여 이를 섬멸시켰다. 이날 전투는 연합군을 추격하여 오는 만주군을 경박호 양쪽에 매복하고 있다가 만주군이 호수입구에 들어서는 것을 기회로 양쪽에서 협공을 하여 섬멸시켰던 것이다.
ㄴ. 사도하자전투012012 蔡根植, 앞 책, pp.175~176 ;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앞 책, pp.629~630.닫기``
1933년 3월까지 독립군은 사도하자(四道河子)에 주둔하여 병력을 증강시키면서 훈련에 여념이 없었다. 그리하여 독립군은 날로 증강되어 갔는데 이와 같은 정보를 접수한 일본군은 독립군을 일거에 섬멸하려고 만주군과 연합하여 공격을 취하였다. 4월 14일 일만군 대부대가 공격하여 온다는 것을 안 독립군은 중국군과 같이 적을 포위 섬멸하기로 하고 전부대를 4개로 나누어 제1로군은 소부대로 적을 유인케 하고 제2·제3로군은 삼도하(三道河) 뒤에 있는 분수령과 사도하의 좌우 계곡에서 대기하도록 하였으며 제4로군은 이도하(二道河) 입구에 매복하였다가 적의 퇴로를 차단하는 동시에 적의 수송차량을 빼앗도록 하였다.
15일 새벽 적은 약 1개사단의 병력으로 황가둔(黃家屯)에서 이도하 방면을 거쳐 사도하자에 진격하여 왔다. 이것은 적이 아군의 작전에 빠져들어 온 것이었다. 때를 기다리던 아군이 일제히 포문을 열어 급습하니 적군은 미처 응전하지도 못한 채 쓰러져 갔다. 순식간에 적군 과반수가 쓰러졌으며 혼란에 빠진 적의 패잔병들은 어둠을 뚫고 도주하였다. 이 전투에서 아군의 손실은 극히 미약했으며 연도에는 적이 버리고 간 무기와 탄약이 부지기수였다.
16일 저녁 아군은 부대를 정돈하는 동시에 전리품을 수습하여 당당히 본대로 개선하였다. 그리고 5월 2일에 아군은 유격대를 각지에 파견하여 일만군을 기습공격하였는데 대소 20여 전투에서 적을 섬멸시켰다.
ㄷ. 동경성전투013013 蔡根植, 앞 책, pp.176~177.닫기
한중연합군은 승세를 몰아 이번에는 영안성(寧安城) 공격계획을 수립하고 먼저 동경성(東京城)을 공격하였다. 이 작전은 부대를 3개대로 편성하여 시행되었는데 제1로군은 기병대로 편성하고 동목단강(東牧丹江) 연안의 골짜기에 진출케 하여 적의 후원부대를 공격하게 하였고 제2로군은 1개 여단의 병력으로 영안성과 동경성의 중간지점에 배치하여 먼저 교량과 전선을 끊어서 적의 후원병을 저지케 하였으며 제3로군은 좌우익으로 나누어 직접 동경성을 공격하게 하였다.
6월 3일 밤 작전계획대로 동경성을 공격하였다. 3시간에 걸친 전투 끝에 일본군은 전세가 불리하여지자 북문으로 도주하다가 우군의 복병에게 전멸되었으며 만주군은 여단장 곽세재(霍世才)만이 호위병 몇 명을 데리고 도주하였을 뿐 전부대가 항복하였다. 이때 영안성에 있던 일본군은 두려워 감히 구원병을 보내지 못하고 공포를 쏘아낼 뿐이었다. 승전한 한중연합군은 성내로 들어가 주민들을 선무하여 안심시키는 한편 전리품을 수습하였는데 사도하자 전투 때 보다 더 많은 전리품을 노획하였다. 그러나 영안성을 점령하지 않고서는 동경성을 확보하기가 곤란하다고 판단되었다. 그렇다고 일군 대병력이 주둔하고 있는 영안성을 당장 공격하기에는 충분한 실력을 지니지 못하였으므로 부득이 주력부대를 왕청(旺淸)과 동녕 사이의 산간지대로 이동하여 주둔시켰다.
이와 같이 한중연합군은 전투에 이기고도 점령지를 오랫동안 확보할 실력이 없어 곤란한 경우에 놓여져 있었다.
ㄹ. 대전자령전투014014 蔡根植, 앞 책. pp.177~178 ;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앞 책, pp.631~632.닫기
동년 6월 28일 한중연합군 전부대는 노송령(老松嶺)을 거쳐 진군하였는데 이때 대전자(大甸子)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이 연합군을 공격하려고 연합군을 향하여 달려오고 있었다. 이와 같은 일본군의 행동은 연합군에게 즉각 탐지되었다. 연합군은 곧 일본군을 맞아 섬멸시키기로 하고 대전자에서 5리 지점에 있는 노모제하(老母諸河)에 부대를 주둔시켰다. 연합군은 일본군이 7월 3일 대전자령을 통과한다는 것을 알아내고 2일 오후 6시까지 대전자령의 요지에 병력을 배치 완료하였다.
이 대전자령의 지형은 2자로 된 험준한 고개인데 길이가 약 20리나 되는 골짜기가 있으며 그 양편에는 높이가 수백 미터가 되는 절벽이 솟아있는 심산의 밀림지대이다.
이곳에 배치된 우군 병력은 독립군이 2천 5백 명 중국군이 6천 명인데 독립군 전원과 중국군 2천이 전위부대로 편성되었으며 공격의 주동은 역시 독립군이 담당하게 되었다.
이때 일본군은 연합군이 매복하여 있는 지점으로 들어왔다. 일본군은 죽음이 눈앞에 닥쳐 온 것도 모르는 채 자연을 즐기며 소풍이라도 온 것 같이 꽃을 꺾어 들고 노래를 부르며 행진하였다. 적의 자동차에도 마차에도 한아름의 꽃뭉치였다. 어떤 병정들은 전투모를 벗어 없애고 수건을 질끈 동여매고 고개를 올라오기도 하였다.
일본군이 대전자령을 반쯤 넘어 행렬의 끝이 산중턱에 이르렀을 때 한중연합군은 일제히 공격을 개시하였다. 불의의 공격을 받은 일본군은 미처 응사도 제대로 하지 못한 채 사지에서 이리저리 도망다니다가 쓰러져 갔다. 4시간의 격전으로 일본군은 극소수를 제외하고는 전멸당하고 말았다.
이 대전자 전투에서의 승리는 한국독립군의 전무한 승리였으며 항일전투사상 특기할 만한 대승리였다. 이 전투에서 막대한 전리품을 획득하였는데 그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015015 蔡根植, 앞 책, p.179.닫기

군복 3천 벌
담요 3백 장
군량 문서 군용품 2백여 마차
박격포 10문
소총 1천 5백 정
대포 3문

이와 같은 많은 전리품은 독립군과 중국군이 분배하였는데 이 분배과정에서 양군사이에 감정을 해치는 일이 생겨나게 되었다.
약 2개월간 휴식을 취하며 전력을 정비 보강한 독립군은 9월 1일 동녕현에 있는 일본군을 단독으로 공격하였다. 이 작전은 원래 중국군이 곧 후속부대를 파견하여 주기로 약속한 전투였다. 약 3일에 걸쳐 독립군이 일본군과 치열한 교전을 전개하였는데도 불구하고 중국 후속부대는 오지 않았다. 시간이 흐를수록 독립군의 피해는 심하여 갔으며 끝내는 후퇴하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다. 이와 같이 중국구국군이 후속부대를 보내 주지 않은 이유는 첫째 중국구국군 제1사장 오의성(吳義成)이 부대내에 공산주의자를 침투시켜 한중연합군을 이간시켰으며 둘째는 전투에서 적으로부터 노획한 전리품의 분배과정에서 양군의 감정이 별로 좋지 않았던데 그 이유가 있었다. 그런데 동빈현 전투 이후 한중 양군의 불화는 더욱 심각하여졌으며 끝내는 독립군의 총사령 이하 수십 명의 간부를 중국군이 체포 구금하였으며 독립군의 무기를 압수하는 사태로까지 번졌다. 후에 양군사이에 화해가 성립되어 구속간부가 석방되었으나 한중연합군은 와해되고 말았다.
(2) 조선혁명군의 한중연합작전
북만주에서 한국독립군이 중국군과 연합하여 항일전투를 전개하고 있는 동안 남만주에서는 조선혁명당 소속 조선혁명군이 별도로 한·중연합군을 결성하여 항일전을 전개하였다.
즉 1931년 일제가 9·18사변을 일으켜 만주를 침공하자 조선혁명당은 이 난국을 타개할 방안으로 한·중연합전선 구축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김학규(金學奎)·김이대(金履大)를 당대표로 선출하여 중국당국과 협의케 하였다.
이들 양인은 심양(瀋陽)으로 가서 그곳의 중국국민외교협회(中國國民外交協會) 및 중국 민간지도자들과 접촉하여 협의하였다. 이 양측회담에서 주로 논의된 사항은 재만한인의 국적문제와 더불어 한·중 양민족의 연합항일문제였다.016016 韓國光復軍總司令部編, 『光復』第4卷 第1期, P.28.닫기
그 후 이 회담에서 논의된 것을 기초로 하여 조선혁명당 중앙집행위원장 현익철(玄益哲)이 구체화시켜 「동성한교정세(東省韓僑情勢)」와 「중한양민족합작의견서(中韓兩民族合作意見書)」를 만들어 중국당국에 보내었는데 그 내용에 대하여 중국측은 열렬히 찬동하였다. 그러나 이 연합작전 구축이 구체화되기 전에 현익철이 일경에게 체포됨으로써 중단되지 않을 수 없었다.017017 韓中聯合作戰이 추진되고 있다는 정보를 탐지한 奉天日領事館은 各地에 密偵를 배치하여 玄益哲 등 黨幹部를 추적하였는데 玄益哲은 密偵 劉得貞·鄭致坤에게 체포되었다.닫기 더우기 1931년 12월 조선혁명당과 혁명군 간부들이 신빈현(新賓縣)에서 간부회의를 개최할 때 일군경의 기습을 받아 회의장에 있던 30여 명의 간부 중 이호원(李浩源)·김관웅(金寬雄)·이종건(李鍾建)·장세용(張世湧)·박치화(朴致化)·이규성(李奎星) 등 중요간부 10여 명이 체포되는 비운을 맞이함으로써 치명적 타격을 받아 연합작전을 추진하지 못하였다.018018 주 16)과 같음.닫기
그러나 이 신빈사변에서 일제의 독아를 피할 수 있었던 양세봉(梁世鳳)·양기하(梁基假)·고이허(高而虛) 등 중견간부들은 이와 같은 불행에도 추호도 동요하지 않고 대원들을 규합하여 혈전태세를 적극 추진하여 갔다.
1932년 2월 조선혁명군은 또다시 지도자를 잃게 되는 비운을 맞이하였다. 관전현(寬甸縣)에 주둔중이던 양기하부대가 국내에서 침입하여 온 평복 초산(楚山)의 일본경찰대와 만주군 연합부대의 기습을 받고 격전 끝에 전사한 일이다.
이 사건 후 혁명군 총사령관에는 양세봉이 선임되어 부대를 지휘하여 나갔다.
ㄱ. 영통가전투019019 蔡根植, 앞 책, p.165.닫기
1932년 3월 11일 혁명군 총사령관 양세봉은 참모장 김학규와 중대장 조화선(趙化善)·최윤구(崔允龜)·정봉길(鄭鳳吉)이 지휘하는 3개 중대병력을 거느리고 중국의용군(中國義勇軍)·왕동헌(王彤軒)·양석복(梁錫福)부대와 합세하여 신빈 왕청문에서 무순(撫順) 천금채(千金寨)로 향하여 진군하다가 12일 신빈 남쪽의 두령지(陡嶺地)에 도착 야영하였다. 이때 이 정보를 탐지한 신빈현성을 수비하던 일본군이 총동원하여 중무기로 무장하고 주변 고지를 점령한 후 박격포 기관총 등으로 맹공을 하여 왔다. 그러나 혁명군의 전력을 과소평가하고 지리적으로 밝지 못한 일본군이 무리한 공격을 감행함으로써 혁명군의 반격에 격퇴되었다. 즉 주변지리에 능숙한 혁명군은 그 이점을 최대한으로 이용하며 교전 1시간 만에 일본군이 장악하였던 주변고지를 탈환하고 맹공격을 가함으로써 일본군을 격퇴하였다. 돌격전을 감행하는 혁명군의 기세에 일본군이 퇴각하자 혁명군은 계속 일군을 추격하였을 뿐만 아니라 30여 리에 위치한 신빈성 서쪽에 영릉가성(永陵街城)을 점령하였고 이에 만족하지 않고 다시 추격전을 감행하여 상협하(上夾河)를 점령하였다. 5일간 계속된 전투에서 일본군은 무수한 사상자와 말·무기를 버리고 패퇴하였다.
이 첫번째 한·중연합전투에서 연합군은 상당한 전과를 올렸으며 많은 전리품을 노획하였다. 그러나 이와 같은 것보다 더 큰 의의는 한중연합군이 협동작전을 벌여 획득한 이번 승리가 한중 양민족의 공동운명체라는 의식을 높여 주게 되었으며 정신적 유대가 공고하여 졌다는 점이다.
ㄴ. 요녕구국회와의 합작020020 韓國光復軍總司令部編, 『光復』第4卷 第一期 ; 蔡根植, 앞 책, pp.165~167.닫기
이와 같이 한·중연합작전의 승리는 더 본격적인 한중연합전선을 구축하는데 실마리가 되었다.
1932년 4월 20일 중국의 용군 당취오(唐聚五)·왕육문(王育文)·손수암(孫秀岩)·장종주(張宗周)·이춘윤(李春潤)·왕봉각(王鳳閣)·서대산(徐大山) 등이 항인성에 청천백일기(青天白日旗)를 높이 들고 요녕구국회(遼寧救國會)를 결성하여 항일전을 계획하였다. 동 구국회도 정치·군사 양위원회를 두고 상무위원회 위원장 겸 정치위원회 위원장은 왕육문이, 군사위원회 위 원장겸 요녕 민중자위군 총사령에는 당취오가 선임되었다.
반만항일무장군인 요녕민중자위군은 총사령부 아래 52개로 사령부를 두어 환인·통화(通化)·신빈·즙안(輯安)·임강·유하·본계(本溪)·휘남(輝南)·해룡(海龍)·동풍(東豊)·서풍(西豊)·안동(安東)·봉성(鳳城)·청원(淸原)·동강(蒙江)·장백·안도·금천(錦泉)·반석·서안(西安)·관전·개원(開原) 등 20여 현을 관장하며 20만 대군을 거느리는 재만 제1의 항일군단이었다.
조선혁명당에서는 이들과 연합전선구축을 계획하고 당·군대표에 김학규를 선임하여 구국회에 파견하였다. 김학규는 환인성으로 가서 왕육문·당취오와 협상하여 한·중연합전선을 결성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이 때 양측이 합의한 사항은 다음과 같다.021021 韓國光復軍總司令部編, 『光復』第4卷 第1期, p.29. 그 원문은 다음과 같다.
中韓兩國軍民切實聯合 來一致抗戰 人力物力須交互通用 在分工合作的原則下 不分國籍隨其能力 分任抗日工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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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한국 양국의 군민은 절실히 연합하여 일치항전하고, 인력과 물력(物力)은 서로 통용하며, 합작의 원칙하에 국적에 관계없이 그 능력에 따라 항일공작을 나누어 맡는다.

이상의 결의안에 의하여 자위군 내에 특수임무를 담당하는 특무대사령부와 선전임무를 담당하는 선전대대를 설치하고 이 두 가지를 조선혁명군이 담당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특무대사령부를 통화성(通化城)에 두고 양세봉이 사령관에 임명되었으며 김광옥(金光玉)이 선전대대장이 되었다. 또한 구국회 선전부내에 한인선전과를 두어 이곳에서 한글간행물과 신문 『합작(合作)』을 발간하였다.
특무대사령부는 8개 특무대를 두고 만주 각지와 국내에 특무공작을 전개하였으며 전투에 임하여는 선봉부대로 맹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리고 계속 대원의 충원을 위하여 통화 강전자(江甸子)에 조선혁명군속성군관학교(朝鮮革命軍速成軍官學校)를 설치 운영하였는데 2천 명이 교육을 받았다. 뿐만 아니라 각 특무대 소관 지역내에 노농강습소(勞農講習所)를 개설하여 한국의 농촌청년에게 군사훈련을 실시하였다. 약 5만 명이 수강한 강습소생은 혁명군의 후비병력(後備兵力)이었으며 2천 명의 군관학교수료생은 혁명군의 후보군관이있다.
ㄷ. 연합군의 연합작전022022 蔡根植, 앞 책, pp.168~170 ;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앞 책, pp.637~641.닫기
1933년 5월 8일 일본군과 만주군 1천 5백 명이 다시 영릉가를 공략하여 오자 연합군은 이를 역습하여 2일간의 격전 끝에 이를 격퇴시켰으나 연합군의 각 부대가 여러 곳에 분산되어 있던 관계로 부득이 후퇴하고 말았다. 일본군은 다시 임강·환인·신빈·유하·휘남지방을 공격하였으며 또 중국군의 본거지인 통화로 진격하여 왔다. 중국군은 무기의 부족과 훈련의 미숙으로 일본군에게 대항할 수 없어 격전 수 일 만에 통화를 버리고 몽강의 산림지대로 후퇴하고 말았다. 이와 같이 수차에 걸쳐 승리한 일본군은 의기양양하여 6월 15일에 대부대를 동원하여 양대령(楊臺嶺)을 넘어서 흥경 청원 등지로 공격하여 왔다. 이에 대하여 혁명군 1천 명은 양세봉 총사령관의 지휘하에 청원에서 수비하고, 중국군은 1만의 병력으로 흥경을 사수하도록 작전을 세웠다. 혁명군은 일본군에 기습 돌격작전을 감행하여 적군을 대량 소탕하였으나 일본군 비행기가 공중에서 폭격을 하는 데는 대항할 방법이 없었다. 따라서 이해천(李海天)·김일룡(金一龍)·박석원(朴錫源) 등 30여 명이 전사하였으며 수백 명의 비전투원이 희생당하는 비극을 겪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흥경을 사수하던 중국군마저 패전을 당함으로써 조선혁명군은 부득이 눈물을 머금고 남산성(南山城)으로 후퇴하고 말았다.
7월 7일 일본군은 또 다시 영릉가 석인구(石人溝)의 조선혁명군 사령부를 공격하여 왔다. 그러나 혁명군은 양세봉 총사령관의 영웅적 독전과 제3로군 조화선부대의 응원으로 일군 40여 명을 사살하고 중포 1문, 경기관총 3정, 소총 80여 정을 노획하였다. 그리고 7월 중순에는 한중연합군이 무순현 노구대(老溝臺)를 점령하고 있는 일본군 1개연대를 공격하였다. 2일간에 걸친 격전으로 일본군을 제압하였다.
그 후 일본군 1개대대가 통화현에 주둔하고 있는 제4로군의 최윤구부대를 습격하자 제4로군은 제3로군의 응원을 얻어 적을 격퇴시켰는데 이 전투에서 적은 80여 명의 희생자를 내고 도주하였다. 그러나 우세한 병력과 화력을 지닌 일본군의 공격은 집요하였다. 끊임없이 아군을 공격하였으며 더우기 비행기의 공격은 아군을 궁지에 몰아넣었다. 한중연합군의 병력은 일당백의 사기와 전투 경력을 지녔지만 화력의 열세와 항공기를 지니지 못한 약점으로 적을 제압하기 어려웠다.
더우기 사방으로 포위망을 압축하며 집요한 공격을 전개하는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점차 열세에 몰리게 되었으며 이와 비례하여 시간이 지날수록 연합군의 사기는 저하되기만 했다. 따라서 이와 같은 난국을 타개하는 방법은 어떤 기적이나 바라는 수밖에 없었다.
이와 같은 상황에 빠져들었을 때 조선혁명군으로서는 뜻하지 않은 큰 불행이 찾아 왔다. 즉 일본군의 밀정으로 있는 박창해(朴昌海)라는 자가 평소 양세봉 총사령관과 친면이 있고 혁명군에 대하여 직접 간접으로 후원하여 오고 있던 중국인 왕씨라는 자를 매수하여 중국군 사령관이 양세봉을 만나 군사문제를 협의하기를 요청한다고 유인하게 하였다. 양세봉 총사령관은 왕씨의 전갈을 받자 앞뒤 생각할 여유도 없이 부관 김광욱(金光旭)과 김성해(金星海)·최창해(崔蒼海)·김추상(金秋霜) 등의 대원을 데리고 왕씨를 따라갔다. 일행이 대랍자구(大拉子溝)로 가는 도중 돌연 좌우 수수밭에서 변장한 수십 명의 일본군이 뛰어 나와 일행을 포위하였다. 이때 왕씨는 태도를 일변하여 양세봉의 가슴에 총을 겨누고 “나는 지난날의 왕모가 아니다. 이 총알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일본군에 항복하라”고 소리쳤다.
이와 같은 갑작스런 사태에 양세봉 총사령관은 만사가 마지막이라고 각오하고 두 눈을 부릅뜨고 왕씨의 행동을 꾸짖었다. 어떠한 위협으로도 양세봉의 마음을 돌릴 수 없다고 판단한 일본군은 양세봉과 그 일행을 사살하였다. 이때가 1932년 8월 12일 밤이었다. 일생을 조국광복을 위하여 있는 힘을 다 바쳐 싸워왔던 양세봉 총사령관은 이렇게 최후를 마쳤던 것이다.
독립전쟁을 계속하기 극히 어려운 상황에 있던 조선혁명군에게 양세봉 총사령관의 피살은 치명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김호석(金浩石)이 총사령관에 임명되어 다시 군세를 만회하려고 노력하였는데 김호석은 조선혁명군을 개편하여 조선혁명군정부(朝鮮革命軍政府)라는 군사정부로 바꾸었다. 이 군사정부는 법무·민사·재무·외교·교양·특무·군사부 등 7개 부서를 두었으며 지방을 9개 군구로 나누었다. 군사부는 총사령 김호석이 부장에 임명되었는데 그 예하의 부대편성은 다음과 같다.023023 金俊燁·金昌順, 『韓國共產主義運動史』제4권(청계연구소, 1986), p.214.닫기
이 당시 병력은 양세봉이 총사령관으로 있었을 당시보다 훨씬 줄어들어 있었다. 1935년 일본군의 추계 대토벌 작전이 시작되자 조선혁명군은 이에 대항할 수 있는 세력이 못되어 다른 무장부대와 합세하여 전투력을 강화시키는 것이 무엇보다 긴요한 일이었다. 그리하여 그해 9월 제1사 사령 한검추는 중국자위대 사령관 왕봉각과 즙안현에서 회담을 갖고 한중항일동맹회(韓中抗日同盟會)를 조직하였다. 이 단체를 조직한 목적은 한국·중국의 동지들이 국권회복을 위하여 일치단결하여 싸우자는 데 있었으며 한·중 양국인은 누구나 회원이 될 수 있었다. 동맹회의 조직 구성은 정치위원회 위원장에 고이허를, 그리고 군사위원회 위원장에 왕봉각이, 군대 총사령에는 한검추가 임명되었는데 그 조직은 다음과 같다.024024 金俊燁·金昌順, 앞 책, p.217.닫기
이 조선혁명군의 활동은 실질적으로 1936년을 끝으로 막을 내렸는데 일부는 1938년까지 만주에 잔류하면서 항일전투를 계속하였다.

註 001
: 蔡根植, 『武裝獨立運動秘史』(大韓民國公報處, 1948), pp.156~157.
註 002
: 國史編纂委員會, 『韓國獨立運動史』五(1969), pp.107~108.
註 003
: 國史編纂委員會, 앞 책, P.791.
註 004
: 이때 편성된 7個地方軍의 관할범위는 第1隊는 寬東·寬西地方, 第2隊는 桓仁·輯安地方, 第3隊는 通化·臨江地方, 第4隊는 柳河·興京地方, 第5隊는 海原·撫順地方, 第6隊는 開原·磐石·吉林地方, 第7隊는 東滿地方이다.
註 005
: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제5권, P.594.
註 006
: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앞 책, P.595.
註 007
: 韓國光復軍總司令部編, 『光復』第2卷 第1期(重慶 : 大韓民國 24年 1月 20日), p.53.
註 008
: 주 7)과 같음.
註 009
: 韓國光復軍總司令部編, 앞 책, pp.53~54.
註 010
: 蔡根植, 앞 책, pp.172~173 ;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앞 책, pp.625~629.
註 011
: 韓國光復軍總令部編, 앞 책, P.55.
註 012
: 蔡根植, 앞 책, pp.175~176 ;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앞 책, pp.629~630.
註 013
: 蔡根植, 앞 책, pp.176~177.
註 014
: 蔡根植, 앞 책. pp.177~178 ;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앞 책, pp.631~632.
註 015
: 蔡根植, 앞 책, p.179.
註 016
: 韓國光復軍總司令部編, 『光復』第4卷 第1期, P.28.
註 017
: 韓中聯合作戰이 추진되고 있다는 정보를 탐지한 奉天日領事館은 各地에 密偵를 배치하여 玄益哲 등 黨幹部를 추적하였는데 玄益哲은 密偵 劉得貞·鄭致坤에게 체포되었다.
註 018
: 주 16)과 같음.
註 019
: 蔡根植, 앞 책, p.165.
註 020
: 韓國光復軍總司令部編, 『光復』第4卷 第一期 ; 蔡根植, 앞 책, pp.165~167.
註 021
: 韓國光復軍總司令部編, 『光復』第4卷 第1期, p.29. 그 원문은 다음과 같다.
中韓兩國軍民切實聯合 來一致抗戰 人力物力須交互通用 在分工合作的原則下 不分國籍隨其能力 分任抗日工作
註 022
: 蔡根植, 앞 책, pp.168~170 ;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앞 책, pp.637~641.
註 023
: 金俊燁·金昌順, 『韓國共產主義運動史』제4권(청계연구소, 1986), p.214.
註 024
: 金俊燁·金昌順, 앞 책, p.217.

※ 본서의 내용은 각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로,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는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