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한인 애국단의 의열투쟁

(1) 이봉창의 도쿄의거
전술한 바와 같이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여러 가지 원인으로 인하여 활동이 침체되어 있을 때인 1932년 1월 8일에 한인애국단의 이봉창이 도쿄에서 일제 천황에게 폭탄을 투척하였다. 비록 천황을 폭살하지는 못했다 하더라도 그 파급효과가 대단히 커서 사실상 침체된 독립운동의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게 되었다.
『도왜실기』에 의하면 이봉창은 한인애국단의 최선봉으로 김구가 의열활동을 구상하고 인물을 찾고 있을 때 상해에 나타나 제일 먼저 애국단에 가입한 사람이었는데, 그의 성장과정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061061 嚴恒燮, 앞 책, pp.36~41 ; 森川哲郞, 『朝鮮獨立運動暗殺史』(東京 : 三一書房, 1976), pp.248~249 ; 金九, 앞 책, pp.232~234 ; 백범김구기념사업회, 앞 책, pp.161~164.닫기

이봉창의 아버지 이진규(李鎭奎)는 본래 수원군(水原郡)에서 살고 있었다. 그가 소유한 땅이 철도 부근에 있다는 이유로 왜적에게 빼앗기고 서울 용산(龍山)으로 이주하였다. 그리하여 이봉창은 1900년에 용산에서 태어났다. 가정이 빈한하여 10세 이후에야 4년제 사립 문창소학교(文昌小學校)에 입학하여 졸업하였다. 그러나 가정형편으로 공부를 더하지 못하고 용산에서 일인이 경영하는 제과점에서 고용살이를 하게 되었다. 19세에는 용산정거장에서 기차운전 견습생으로 일하기도 했는데, 이때부터 가난과 싸우며 전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고 있었다. 그러다가 4년 후인 24세에 일본 오오사까(大阪)로 떠났다. 이러한 과정에서 일본인에게서 뼈저린 굴욕을 느끼면서 3.1운동을 용산에서 직접 목격하였고, 이에 크게 자극을 받아 큰 뜻을 품고 일본으로 향했던 것이다.
이봉창은 일본생활에서 끝끝내 독신을 지키며 6년 동안 가족과 연락을 끊은 채 각지를 전전하였다. 판신(阪神)·도쿄·요꼬하마(横浜) 등지에서 직공·인부·점원으로 전전하면서 조산창일(朝山昌一)·松井一夫·松原一夫·木下昌一·木下昌藏 등의 가명을 사용하였다. 그동안 언동이나 교우관계에서 별로 이상한 점이 없는 단순한 노동자로서 상당한 신용을 얻었다. 일본인의 습속을 익혀 후에 일인으로 행세해도 아무도 몰라 볼 정도였다. 그리하여 일인의 사위가 되기를 권유받을 정도였으나 이러한 생활에 만족을 얻지 못하고 일본을 떠나 상해로 가게 되었다.
1931년 1월 상해에 도착하여 여러 곳을 방황하다가 임시정부 통신처의 주소를 알아내어 곧장 찾아갔다. 그런데 일본인 같은 언동으로 인하여 임정의 인사들로부터 의심을 받게 되었으나, 김구는 그의 언동에서 비범한 바가 있음을 알고, 일단 부근의 여관에 머물게 하였다. 그 후로부터 김구는 이봉창을 때때로 만나면서 그의 정체를 간파하려고 노력했다. 이봉창은 가끔 임시정부 통신처에 내왕하였는데, 그의 정체를 모르는 사람들은 계속 의심을 품고 그를 기피하였다. 그러던 중 어느날 김구가 마련한 주석(酒席)에서 이봉창은 취중에 천황을 암살할 뜻을 가지고 있음을 말하게 되었다. 이봉창의 의도를 간파한 김구는 수일 후 여관으로 찾아가 그의 뜻을 다시 한 번 확인하고 그 자리에서 천황의 암살계획을 밀의하였다. 마침내 김구는 이봉창에게 홍구(紅口)방면에 가서 준비가 될 때까지 일인행세를 하여 이목을 피하면서 기다리게 하였다. 이봉창은 인쇄공장·악기점 등에서 일하면서 신임을 얻었고 가끔 김구를 찾았다. 그때까지도 일인 같은 언동을 하여 여전히 의심이나 비웃음을 사면서도 전혀 개의치 않았다. 그는 교제에 능하여 홍구로 간 지 1년이 못되어 일본 경관을 사귀고 영사관을 자유로 드나들게 되어서, 그가 상해를 떠날 때에는 다수의 일인들이 부두에까지 나와 전송할 정도가 되었다.
김구와 이봉창이 의거를 약속하고 준비가 다 될 때까지는 약 1년이 소요되었다. 이봉창이 홍구지역에서 일인으로 행세하며 일인들과 긴밀히 사귀고 있을 동안 김구는 자금과 폭탄을 준비하였다. 김구에 의하면 폭탄 한 개는 왕웅(王雄:金弘臺)을 시켜 상해병공창에서, 한 개는 김현(金鉉)을 하남성(河南省) 유치(劉峙)에게 보내어 얻어 온 것인데 하나는 일황 폭살용이고 하나는 이봉창의 자결용이었다고 한다.062062 金九, 앞 책, p.235.닫기

당시 중국군의 병기(兵器)를 관리하는 책임장교로 왕웅이라 불리던 김홍일에 의하면, 김구는 이봉창과 거사를 약속한 뒤 맨 처음 김홍일을 찾았고, 장시간 동안 구체적인 방법과 대책을 논의한 결과 폭탄의 종류를 결정했는데 관례로 보아 일황(日皇)이 타고 가는 마차와 군중들이 도열한 곳과는 최소한 100미터 이상이 될 것이라고 판단하고, 구식이어서 폭발력이 약하기는 하지만 가벼워서 멀리까지 던질 수 있고 불발탄이 없으며 휴대하기 간편한 마미(麻尾)수류탄으로 결정했다고 한다.063063 金弘壹, 『大陸의 憤怒』(文潮社, 1972), pp.272~273.닫기 어쨌든 김홍일이 여기에 깊이 간여한 것은 틀림없다.
폭탄과 자금이 준비된064064 주 58) 참조.닫기 12월 6일 밤에 프랑스조계 마랑로보경리4호(馬浪路普慶里四號) 임시정부 판공처(辨公處)에서 임정 요인들이 참석한 가운데 개최된 국무원회의에서 김구는 거사계획을 보고했다. 군무장(軍務張) 김철과 외무장(外務長) 조소앙이 경비만 소요되고 성공할 가망이 적다고 반대했으나, 이에 1년 동안 준비한 계획이기에 결국 승인하였다. 그해 12월 12일 프랑스조계 중흥여사(中興旅舍)에서 김구와 이봉창은 거사에 필요한 구체적인 사항을 최종적으로 점검하였다. 그리고 다음날 13일 안공근의 집에서 김구에게 수류탄 2개와 거사자금 300원을 건네받은 이봉창은 양손에 수류탄을 들고 애국단에 입단하면서 다음과 같은 선서를 하였다.

나는 적성(赤誠)으로서 조국의 독립과 자유를 회복하기 위하여 한인애국단의 일원이 되어 적국의 수괴를 도륙하기로 맹세하나이다.
대한민국 13년 12월 13일 선서인 이봉창.
한인애국단 앞

이렇게 선서문을 읽는 동안 안공근의 아들 안락생(安樂生)이 기념사진을 촬영하였다.065065 李炫熙, 앞 책, pp.270~271.닫기
홍구로 돌아온 이봉창은 상해를 떠나기 전에 상해주재 일인 경찰서장에게서 나가사끼(長崎) 경찰서장 앞으로 소개장을 받았다. 그리하여 신변의 안전에 별 문제 없이 일본에 도착할 수 있었다.066066 金弘壹, 앞 책, p.274.닫기
이봉창은 12월 17일 상해를 출발하는 우편선 빙천환(氷川丸)에 일인을 가장하여 3등 선객으로 승선하여 12월 19일 오후에 코베(神戶)에 입항하였다. 그 후 도쿄에 도착하여 기회를 엿보던 중 구랍 28일 『도꾜아사히신문(東京朝日新聞)』의 보도를 통하여 1월 8일 관병식이 거행됨을 알고 상해의 김구에게 ‘물품은 1월 8일 방매하겠음’이라는 암호전문을 보냄으로써 거사계획을 알렸다. 1월 6일에는 대대목(代代木) 연병장에서 벌어지는 예행연습을 구경하기 위해 외출하여 어느 버스운전사에게서 관병식에 배관(拜觀)할 수 있는 방법을 물었는데, 그로부터 ‘동경헌병대본부육군헌병조장 대장전규(曹長 大場全奎)’라는 명함을 얻어서 검문·검색을 여러 번 피할 수 있었다고 한다.067067 森川哲郞, 앞 책, p.250.닫기
1월 8일 아침 도쿄의 앵전문(櫻田門) 앞에서 시민을 가장하고 도열해 있다가 관병식을 마치고 마차를 타고 돌아가는 일황을 향해 수류탄을 던졌으나, 거리가 너무 멀었고 폭탄의 위력이 크지 못해 천황을 폭살하지는 못했다. 실패한 이유는 거리도 거리거니와 천황이 탄 마차를 잘못 알고 던졌기 때문이었다.068068 森川哲郞, 앞 책, p.247.닫기
이봉창은 곧 체포되어 가혹한 고문을 받았고, 그 결과 배후인물이 김구라는 것을 알게 된 일제 검찰당국은 고전(古田 ; 후루다)·구산(龜山 ; 가메야마) 검사와 경시청의 특고검사(特高檢事) 2명을 김구를 체포하기 위해 상해로 급파했다.069069 森川哲郎, 앞 책, p.248.닫기 프랑스조계 당국은 1월 9일 아침 일찍 김구에게 비밀리에 통지를 보내왔다. 이번 사건의 중대성으로 보아 일본당국이 김구의 체포·인도를 요구해 온다면 거절할 수 없으니, 스스로 불행한 경우를 당하지 않도록 하라는 내용이었다.070070 백범김구기념사업회, 앞 책, p.167.닫기 그리하여 임정은 프랑스조계 거뢰달로(巨賴達路)의 모처로 판공처를 잠시 이치하여 김구·조소앙·이동녕·조완구(趙琬九)·김철 등이 은거하고 있었다.071071 李炫熙, 『한국일보』, 1987년 7월 29일자 참조.닫기
그 후 김구는 2월 25일자 상해교민단기관지 『상해한보(上海韓報)』에 ‘병으로 요양 중’이라는 기사를 내고 피해 다녔다. 임시정부도 한 때 위치를 이동하였으나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고, 김구는 중국인 여관이나 주택가를 수시로 왕래하면서 실패원인 분석과 실수 방지를 위한 구상을 하면서 또 다른 거사를 진행시키고 있었다. 2월 26일에는 김홍일을 만나 중식을 하면서 고성능 폭탄의 제작과 그 실험까지 부탁하여 두었다.072072 李炫熙, 앞 책, p.277 ; 李炫熙, 앞 신문.닫기
이봉창의 도쿄의거에 대하여 내외의 반응은 즉시 신문기사에 나타났다. 중국국민당 기관지 청도(靑島)의 『국민일보(國民日報)』는 특호활자로 ‘한인이봉창저격일황불행부중(韓人李奉昌狙撃日皇不幸不中)’이라는 기사를 실었다가 일본 군경의 습격을 받아 신문사가 파괴되었다. 그 외 장사(長沙)·상해 등지의 신문들도 ‘불행부중(不幸不中)’의 문구를 썼다가 일본의 항의로 폐간당하기도 했다. 이와 같이 이봉창의 의거는 비록 일황을 폭살하지는 못했으나 그 영향은 무척 컸다. 특히 만보산사건으로 악화된 중국인의 한국인에 대한 감정이 서서히 호전되고 있었고, 각지의 교포들로부터 많은 격려의 편지와 자금을 지원하겠다는 제의가 오기도 하였다073073 李康勳, 앞 책, p.187 ; 정정화, 앞 책, p.82.닫기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이러한 반향을 보이자 일제는 이미 각본을 세워두었던 중국침략을 서둘러 20일 후 ‘상해사변’을 일으켰다.
이봉창은 체포되어 인곡형무소(印谷刑務所)에 수감된 후 9개월이 지나도록 예심조차 거치지 않은 채, 9월 30일의 비공개 재판정에서 사형선고를 받았고, 10월 10일 동 형무소에서 전격적으로 사형이 집행되었다.074074 森川哲郞, 앞 책, p.256 ; 李炫熙, 앞 신문 등 다른 곳에서는 사형선고 일자가 조금 다르게 나와 있으나 이는 공식문서를 인용한 일본측 기록이 정확한 것으로 보여 그것을 따랐다.닫기 사형이 집행되던 날 상해에서는 김구의 지시에 따라 전 애국단원이 단식으로서 이의사의 대의를 기념하고 조국광복에의 염원을 가일층 굳게 하였다. 다음날 김구는 ‘도쿄 폭탄사건의 진상’이라는 제목으로 의거의 전모를 만천하에 공개하였다. 이것은 그간의 애국단 의거에 대해 억측·와전이 심하여 임정이나 애국단으로서는 진상을 공개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진상이 ‘의운회무중(疑雲晦霧中)’에 싸임으로써 그의 장렬한 지기(志氣)까지 매몰되어 버리는 것은 순국하는 애국지사에 대한 예우가 아니었고, 더구나 중국인들이 진상을 알고자 하였기 때문이었다.075075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앞 책, p.242 ; 嚴恒燮, 앞 책, p.35 참조.닫기
요컨대 내외에 큰 파문을 일으킨 이봉창의 도쿄의거는 여러 가지 역사적 의미를 갖는다. 첫째, 중국 신문의 보도 태도에 당황한 일제가 결국 상해사변을 일으켜 중국인의 반일감정을 불러 일으켰다고 볼 수 있다. 둘째, 이후부터 항일독립투쟁의 방법을 온건한 방법보다 격렬한 공포작전이 그 첩경이라고 믿고 실천에 옮긴 것이다. 세째, 침체국면에 들어간 임정의 광복 투쟁에 활기를 주는 계기가 되었다. 네째, 중국정부가 한국독립투사의 민족적 역량을 이해하게 되어 이후 한중간의 협력과 합작·동맹이 순조롭게 이루어지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076076 李炫熙, 앞 책, pp.273~274.닫기 그 외에 윤봉길의 상해의거의 성공도 이봉창의 도쿄의거의 영향에서 연유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김구가 도쿄의거의 승인을 요청했을 때만 해도 임정에서는 애국단의 활동에 미온적 인 태도를 보였으나, 도쿄의거가 전세계를 진동시켰고 독립운동에 새로운 생기를 불어 넣자 누구도 애국단의 활동에 소극적인 반응을 보이는 사람이 없게 되어, 김구는 임정 소속 한인애국단의 이름으로 활동자금을 수합하면서 국내외의 활동을 계속 확대하여 나갈 수 있었다.077077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앞 책, p.744닫기
(2) 윤봉길의 상해의거
1·8도쿄의거가 직접적인 계기가 되어 상해사변이 일어나자 김구는 피신생활을 하면서도 국내외에서 애국단의 작탄활동을 추진하였으나 모두 실패로 돌아갔다(후술). 그리하여 인물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상황에서 윤봉길이 나타나 김구와 함께 상해의거를 숙의하여 마침내 1932년 4월 29일 홍구공원에서 상해침략의 원흉들을 폭살하여 다시 한 번 한국민족이 살아있음을 만천하에 알렸다. 더구나 상해사변의 정전회담 중에 일어난 일이라 국제적으로 파급된 영향도 무척 컸고, 도쿄의거가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한 데에 비해 상해의거는 명실공히 목적을 달성했던 것이었기에 독립운동사상 중요한 전기를 마련해 준 쾌거였다.
당시는 전술한 바와 같이 도쿄의거로 인하여 입장이 곤란해진 프랑스조계 당국은 할 수 없이 일제에게 협조하게 되었고, 일경은 프랑스의 묵인하에 김구의 체포를 위해 혈안이 되어 임정의 안전이 위험한 상황이었다. 일제는 상해사변을 일으켜 상해를 점령하고 정전회담을 추진하는 한편, 저들의 승리를 내외에 선전하기 위해 ‘천장절(天長節)’의 기념식을 성대히 준비하고 있었다. 이것이야말로 폭탄의거의 절호한 기회였던 것이다. 김구는 도쿄의거 후 2월 말부터 그 준비를 하였다. 2월 29일 경에는 김홍일을 만나 고성능 폭탄 제작에 대해 상의하기도 했다.078078 주 72) 참조.닫기
상해의거의 영웅 윤봉길에 대해서는 그간 많이 연구되어 잘 알려져 있는 편이다. 여기서는 그가 의거를 앞둔 4월 27일 자신의 신상에 대해 후세에 알리기 위해 자술한 유서079079 『나라사랑』제25집(외솔회, 1976), pp.170~172, 자필이력서(독립기념관문서).닫기를 중심으로 그의 짧은 생애를 더듬어 보고자 한다.
윤봉길은 1918년 6월 21일 충남 예산군 덕산면 시량리(忠南禮山郡 德山面柿梁里)에서 파평(坡平) 윤씨(尹氏) 황(璜)과 김원상(金元祥)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본명은 우의(禹儀), 별명이 봉길(奉吉), 아호를 매헌(梅軒)이라 했다.
7세에 사숙(私塾)에 취학할 때부터 총명하였고 별명이 살가지〔狸〕라고 불릴 정도로 성질이 사나와서 싸움에 지는 법이 없고 반항기질이 다분하였다. 11세에 덕산공립보통학교에 입학했으나 1년 후 그만두었다. 3·1운동을 목격하고 난 후 식민지교육을 거부했던 것이다. 서당에서 한학을 시작하였고 한시(漢詩)에 특별한 재능을 보였다. 15세에 해주(海州) 배(裵)씨 용순(用順)과 결혼하였다.
19세부터는 신학문을 독학하였다. 잡지와 교양서적을 독파하여 농촌 구제에 뜻을 두고 야학회 활동을 시작했다. 20세에는 『농민독본(農民讀本)』을 저술하여 야학교재로 사용하였으며 월진회(月進會)를 조직하여 농촌계몽활동을 강화하였다. 그러다가 23세 되던 30년 4월에 웅지를 품고 장부출가불생환(丈夫出家不生還)이란 글을 남기고 상해를 향하여 망명길에 올랐다.
간신히 청도까지 와서 일인의 세탁소에 1년간 고용살이를 하면서 돈을 모아 여비로 잠시 사용한 월진회비를 환상(還償)하였다. 24세(1931년) 5월 8일에 마침내 상해에 상륙하여 7월경에 이유필(李裕弼)의 소개로 한국독립당에 가입하였다. 그러나 경제적 곤란으로 교포 박진(朴晋)이 경영하는 발품공사(髮品公司)에 들어가 직공이 되었다. 이때에 한인 공우(工友) 17명의 친목회인 공우회(工友會)의 회장으로 있었는데 박진과 사소한 감정이 있어서 3월경에 해고당하고080080 森川哲郞, 앞 책, p.255.닫기 계춘건(桂春建)과 홍구에서 소채상을 하고 있었다. 이즈음에 김구선생을 찾았던 것이다.
그 당시 김구는 상해의 일본군 비행기격납고와 군수품창고를 폭파하려는 계획을 세웠으나 상해사변이 정전되는 바람에 실행에 옮기지 못하고 다른 거사를 위해 인물을 물색중이었다. 이미 이덕주·유진식(兪鎭軾)을 총독암살의 명을 내려 국내로 파견했고, 유상근(柳相根)·최흥식(崔興植)을 관동군사령관 본장번(本庄繁:혼죠 시게루)의 암살을 명하여 만주로 보내려고 할 즈음에 윤봉길이 나타났다.081081 金九, 앞 책, pp.238~239 ; 홍순옥, 앞 글, p.65.닫기
김구는 얼마 전부터 윤봉길을 알고 있었는데 박진의 집에서 처음 만나게 되었다.082082 백범김구기념사업회, 앞 책, p.173; 金弘壹, 앞 책에서는 폭탄창고 폭파시도에 이미 윤봉길이 인부로 가담하였다고 한 것으로 보아 김구와 윤봉길은 서로를 알고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백범일지에는 언급이 없다.닫기 김구를 찾는 윤봉길은 이봉창의거와 같은 계획이 있거든 자신을 써달라고 부탁하였다. 그런데 이보다 앞서 한국군인회(韓國軍人會)의 수령 이웅(李雄)이란 인물이 그다음 거사 담당자로 등장하였으나, 정보가 누설되어 김구와의 접촉이 여의치 못하던 때라 윤봉길은 그를 대신할 적합한 인물로 인정되었던 것이다.083083 李炫熙, 앞 책, p.280.닫기 그리하여 윤봉길의 요구는 쉽게 실현될 수 있었다.
이 당시 중국정부는 가급적 대전쟁을 피하려는 정책이었으나, 국민의 분노는 극에 달했고 19로군의 사기도 높아 완강히 버티었지만 일군의 증파로 부득이 후퇴하여 정전협상 중이었다. 따라서 한국의 독립운동자들에게는 무슨 수로든 중일전쟁을 다시 일으키는 것이 필요했다. 그러기 위해서 중국인을 가장하여 거사를 하기로 하였다.084084 金弘壹, 앞 책, p.287.닫기
4월 20일에 일본신문인 『상해일일신문(上海日日新聞)』에 그들의 소위 ‘천장절’인 4월 29일에 전승기념행사를 겸하여 한다는 보도와 함께, 식장에는 매점을 마련하지 않기 때문에 참여하는 사람은 각자 도시락 1개, 물통 1개, 일장기 1개만을 휴대할 수 있다고 하는 기사가 났다. 이를 본 김구는 곧 준비를 서둘렀다.085085 백범김구기념사업회, 앞 책, p.175; 金弘壹, 앞 책에서는 자기가 윤봉길에게 정보를 제공했다고 하고 김구를 언급하지 않았다.닫기
김구는 윤봉길을 만나 천장절날 목적을 달성할 계획을 말하고 윤봉길이 쾌히 응하자086086 김홍일에 의하면 윤봉길이 먼저 제의하자 김구가 동의했다고 한다(孫世一, 『李承晚과 金九』(一潮閣, 1970), p.107 참조).닫기 곧바로 김홍일을 찾아가서 상해 병공창장 송식표(宋式驫)에게 교섭하여 도시락형과 물통형 폭탄제조를 부탁하게 하였다. 김홍일이 병공창에 다녀온 후 다시 백범과 함께 병공창으로 가서 성능 실험까지 마쳤는데, 매우 흡족한 결과가 나왔다. 20여 개의 폭탄을 무료로 만들어 자동차로 김홍일의 집에 실어다준 것을 김구는 하나씩 교포들 집에 분산 보관했었다.087087 金九, 앞 책, p.288에서는 이미 무기창고 폭파계획때 만들어 놓은 것이라 하나 의심이 가는 것이 많다. 이현희, 앞 책, p.278에는 1.8사건후 피해다니던 2월 26일 김홍일을 만나 폭탄제조를 의뢰해 두었던 것이라 한다.닫기
그 후 윤봉길은 날마다 홍구공원에 가서 식장설비하는 것을 살피면서 적당한 방법을 연구했다. 즉 기념식이 끝날 무렵 경비원들의 긴장이 풀릴 즈음을 이용해 식당 후면으로 가서 제1탄을 던지고 제2탄으로 자폭하여 범인의 인상을 알아보지 못하게 하여 중국인으로 오인시킴으로써 중일전쟁이 일어나도록 하자는 것이었다.088088 金弘壹, 앞 책, p.287.닫기 그리하여 폭탄의 종류도 당시 중국군이 사용하던 독일 및 러시아식으로 입구부분에 신관을 장치하고 발화용의 끈을 부착시킨 것이라고 한다.089089 윤병석, 앞 글, pp.43~44.닫기
이렇게 거사를 준비하고 있는 동안 4월 24·25일 경에 프랑스조계의 공무국(公務局:경찰)에서 교민단에 대하여 ‘일본 총영사의 요청으로 김구·김철·이동녕·조완구·조소앙 등과 김석(金晳)외 8명에 대한 체포 영장의 집행을 허가했으니 각자 경계하라’는 통보를 받았다. 그리하여 26일경에는 피난비용으로 국무위원들에게 각각 미화 60불, 기타 인사들에게는 10~15불씩 지급하여 급히 피난을 시켰다.090090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제4권, p.610.닫기 이후로 임정은 중경(重慶)에 정착할 때까지 유랑의 길로 접어들었다.
대부분의 논자들은 일본측 기록을 인용하여 4월 26일 국무회의에서 특무공작 책임자인 김구가 계획을 보고했는데 조완구·조소앙 등이 상해에서 독립운동의 근거지를 잃을 것을 우려하여 반대했으나, 윤봉길이 자폭하기로 되어 있다는 김구의 말에 모두 동의했다고 한다. 그러나 임정이 25일경에 급하게 피난길에 오른 것으로 보나 김구 자신이 쓴 “순전히 내가 혼자 한 일이므로 이동녕선생에게도 이날(거사일) 처음 자세한 보고를 하고 소식을 기다리고 있었다”라는 것으로 보면 정말로 국무회의에 보고가 되었는지 의심스럽다. 또 김구는 이동녕·이시영·조완구 같은 몇 사람이나 짐작하고 있었을 것이라고 하여091091 백범김구기념사업회, 앞 책, p.179.닫기 비밀스럽게 추진된 것을 강조하고 있다. 그런데 김홍일의 생질 왕영재(王英哉)가 “김구가 누차 왕웅을 방문하고 폭탄의 위력에 대하여 논담하였으므로 자기는 알고 있었다”라고 한 것이나, 무정부주의자 계열의 남화한인청년연맹과 상해의거를 경쟁적으로 추진하는 과정에서 피차 서로의 계획을 알고 있었다는 것으로 보면 상해의 독립운동계에서는 어느 정도 알려져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092092 鄭華岩, 앞 책, pp.137~141.닫기 그러나 이것만 가지고 국무회의 개최와 승인의 여부는 단정적으로 말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다만 4월 26일 무렵까지는 비교적 비밀리에 추진된 것은 분명하다고 할 것이다.
4월 26일 윤봉길은 안공근의 집에서 김홍일이 동석한 가운데 애국단에 입단하고 선서식과 함께 기념사진을 찍었다.

선서문
나는 적성으로서 조국의 독립과 자유를 위하여
한인애국단의 일원이 되어 중국을 침략하는 적
의 장교를 도륙하기로 맹세하나이다.
대한민국 14년 4월 26일
선서인 윤봉길093093 백범김구기념사업회, 앞 책, p.176.닫기

이는 거사를 앞둔 의사들이 조국에 대하여 고별을 뜻하는 것이었다.094094 尹南儀, 앞 책, p.170.닫기 27일에는 약 2시간 반에 걸쳐 동방공우(東方公禹)란 곳에서 윤봉길은 김구에게 유언을 써 주었다. 자서(自書) 이력서와 김구에게 주는 유시(遺詩), 홍구공원을 답사할 때의 감상을 읊은 시, 두 아들에게 남긴 유시 등이 그 내용이다.095095 嚴恒燮, 앞 책 참조.닫기 28일에는 공원을 다시 답사하며 주요인물의 사진을 입수하여 얼굴을 익혀두기도 하였다.096096 윤병석, 앞 글, p.40.닫기
29일 아침에 김구는 폭탄 2개를 가지고 김해산(金海山)의 집에서 윤봉길과 최후의 아침을 들었다. 그리고 김구와 시계를 바꿔차고 남은 돈을 내놓은 채로 태연히 자동차에 올라 떠나가는 윤봉길에게 김구는 후일 지하에서 만날 것을 약속하고 헤어졌다. 김구는 그 길로 안창호(安昌浩)에게 피신할 것을 알리고 이동녕에게 비로소 보고를 하였다. 이 자리에는 조완구도 함께 있었는데, 김의한(金議漢)의 집에서 점심을 먹으면서 소식을 기다렸다고 한다.097097 백범김구기념사업회, 앞 책, pp.177~178 ; 정정화, 앞 책, p.85.닫기
홍구공원에 무사히 입장한 윤봉길은 열병식이 끝나고 11시 40분경 일본국가가 거의 끝날 무렵에 폭탄을 사열대에 명중시키고 그 자리에서 대한민국 만세를 불렀으나 자폭에는 실패하고 체포되고 말았다.098098 윤병석, 앞 글, pp.39~43에 그 당시 실황이 상세히 기술되어 있다.닫기
의거는 대성공이었다. 단상에 있던 백천의칙(白川義則 ; 시라까와 요시노리)대장은 중상을 입고 5월 24일 결국 사망했고, 해군중장 야촌(野村 ; 노무라)은 실명, 육군중장 식전(植田 ; 우에다)은 다리가 절단되었고, 주중공사 중광(重光 ; 시게미쯔)은 다리불구가 되었으며 민단장 하단(河端 ; 가와바다)은 그 자리에서 즉사하였다. 이외에 총영사 촌정(村井 ; 무라이)과 민단의 간부들도 다수가 부상하였다.099099 윤병석, 앞 글, p.42.닫기 일본측에서도 “천장절을 택한 것은 확실히 효과적이었다”100100 森川哲郞, 앞 책, p.251.닫기라고 할 만큼 상해의거는 통쾌한 대성공을 거두었다.
백범은 김의한의 집에서 점심을 먹으면서 신문을 사오게 하여, 범인이 중국청년이라는 기사가 난 것을 보고 이동녕·조완구와 성공의 축배를 들었다. 그러나 몇 시간 후에 범인이 한인 윤봉길임이 밝혀졌다는 호외가 돌자,101101 정정화, 앞 책, p.85.닫기 김덕근(金德根)·이규홍(李奎洪)을 시켜 자전거로 조계내의 교민에게 피난할 것을 알리게 하였다. 그 후 김구는 YMCA 주간(主幹)인 미국인 피취(S.A. Fitch)씨의 집 2층에 은신하여 있으면서 전화를 이용하여 교포들의 피난이나 잡혀 간 동지들 가족을 구제하는 일을 계속하였다.102102 백범김구기념사업회, 앞 책, p.182.닫기
도산(島山) 안창호는 김구의 연락을 받고 숙소를 나왔으나 이유필의 집에 갔다가 체포되었다. 윤봉길은 이유필을 주모자 같이 보이게 했던지 일경은 즉일 이유필의 집을 급습했으나, 이유필은 피난하고 마침 그 곳에 왔던 안창호가 체포된 것이다. 도산은 테러 투쟁을 찬성하지 않았던 사람으로 이 사건에 대하여 전혀 아는 바가 없었다.103103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제4권, p.615 ; 정정화, 앞 책, p.86.닫기
프랑스조계 당국은 사태의 중대함에 어쩔 수 없이 미리 통보하지 않고, 일경의 수색을 허용하였다. 일제 형사들은 중국 복색을 하고 프랑스 경관과 함께 수색을 개시하여 제1착으로 이유필의 집에서 안창호를 체포했다. 그 후 일경은 30일 김구 외 14명의 검거계획을 세우고 일본 영사관 경찰관 44명, 사복헌병 22명, 계 66명과 조계경찰·외인형사 12명, 중국인 형사 48명의 협조를 얻어 대수색을 벌였다. 그리하여 사건에 무관한 11명을 검거하였을 뿐 사건과 관계있는 인물은 하나도 체포하지 못했다.104104 백범김구기념사업회, 앞 책, pp.181~182.닫기
김구는 무고한 교민들이 체포되는 것을 보고 사건의 전모를 밝혀 피해를 적게 하려고 했으나 안공근이 말려서 미루던 중에 도쿄의거나 상해의거나 주모자는 자기라는 성명을 엄항섭에게 기록케 하고 피취부인에게 번역을 부탁하여 5월 10일 각국 통신사에 발표하였다. 그러자 일본 경찰은 김구를 체포하기 위해 현상금을 걸었다. 1차로 20만원, 2차로 60만원을 걸고 검거에 총력을 기울였으나 피취씨의 도움으로 김구는 상해를 빠져나갈 수 있었다.105105 李炫熙, 앞 책, p.287.닫기 윤봉길은 자폭할 시간을 놓쳐 체포되어 혹독한 고문을 당하면서도 끝내 배후가 김구인 것을 밝히지 않았다. 일본은 김구의 성명이 발표된 후에야 사실을 알게 되었던 것이다.106106 森川哲郞, 앞 책, pp.253~254.닫기
김구가 주모자임이 밝혀지자 중국의 명사들인 은주부(殷鑄夫)·주경란(朱慶瀾) 같은 사람들이 김구의 면회를 요청해오기도 하였다. 일제는 혈안이 되어 김구의 체포에 나섰으나, 5월 14일경 박찬익(朴賛翊)이 주선하여 가흥(嘉興)으로 탈출하였다.107107 백범김구기념사업회, 앞 책, pp.182~183.닫기 상해의거 이전에 이미 피난 준비를 했던 임시정부도 마침내 항주(杭州)·가흥·진강(鎭江)·장사·광동·유주(柳州)·기강(綦江)·중경으로 위치를 이동하지 않으면 안되었다.108108 李延馥,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과 그 변천」, 『慶熙史學』제9·10집(慶熙大史學會, 1982), p.155.닫기 이 과정에서 잠시 임정계 인사들이 분열되기도 하였다. 이유필을 중심으로 하는 상해파와 조소앙·김철을 중심으로 하는 항주파, 김구를 중심으로 하는 가흥파로 크게 나뉘어져 당분간 대립상을 보였던 것이다.109109 李康勳, 앞 책, p.198 ; 胡春惠著, 辛勝夏譯, 앞 책, pp.76~77.닫기
의거가 보도되자 중국측은 비상한 관심을 보였다. 임정이 가흥으로 옮긴 후에 금전의 지원이 답지했다. 중국진재위원회(中國愼災委員會)위원장 주경란이 1만원, 장개석의 부인 송미령(宋美齡)이 10만원, 제19로군에서 1만원 기타 사회단체 등에서 지원금을 보내왔다.110110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앞 책, p.759.닫기 그러나 그들은 비공식적 차원에서 지원하려 하였다. 이봉창의 도쿄의거에 대한 호의의 대가가 너무 컸기에 신중할 수밖에 없었다. 언론도 일제를 자극하는 표현을 삼갔다.111111 백범김구기념사업회, 앞 책, pp.185~186.닫기 따라서 일반적으로 알려진 김구와 장개석의 면담도 1년이 지난 33년 5월의 일이었고, 이것도 중국이 요구한 것이 아니라 중국통인 박찬익의 활약으로 이루어진 것이었다.112112 홍순옥, 앞 글, p.70.
이 결과로 낙양군관학교 안에 한국인교육반을 두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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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일항전에 자신이 없는 중국은 눈에 띄지는 않아도 다각적으로 임정을 원조하여 임정이 기사회생하여 명맥을 유지할 수 있게 해주었다.113113 李康勳, 앞 책, pp.198~199.닫기 이러한 중국의 입장은 언론에서 잘 나타나 있다. 이봉창의 도쿄의거 때와는 달리 중국언론이 보여준 태도는 신중한 것이었다. 그것은 이봉창의거에 대한 호의가 결국 일제의 발악적인 보복과 상해사변 같은 엄청난 대가를 치룬 경험의 소산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가능한 한 일본을 자극하는 표현을 삼가고 은근히 침략자에 대한 적개심과 한국에 대한 동정심을 나타내면서 상해의거의 통쾌한 심정을 표현하려고 애썼다. 그러나 중국내에서 발행되는 신문이라도 외국인에 의해 발행되는 것이거나 세계의 유수한 신문들은 간악한 통치에 대항하는 한국민의 입장을 정당한 것으로 이해하고 오히려 의거 이후에 일제가 취할 보복행위에 대하여 경계하는 논설을 실었다. 『대륙보(大陸報)』의 32년 5월 3일자에서는 프랑스조계 내의 한국인을 보호할 것을 촉구했고, 『대미만보(大美晚報)』는 일본은 신중히 처신할 것을 촉구했으며, 『뉴욕타임즈』는 5월 7일자 논평에서 ‘상해사건은 일본에 대한 정치적 암살이다’ ‘한국인은 일본통치에 반항하는 민의를 가지고 있으며 아직도 동화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라고 했다. 그 외 ‘폭탄사건을 한국인에게만 전가하지 말 것’이라 하는 등 상해사변 중의 일본에 의한 무차별 양민학살과 비교하여 평가함으로써 은근히 한국의 입장을 변호하였다. 이처럼 상해 및 중국 내 각 신문에서 연일 윤봉길의 의거를 다루었던 것은 물론 영국의 『런던타임즈』등 세계 유력지에서도 모두 논설로 취급하였고, 상해의거는 한국인의 일본통치에 반항하는 민족적 의지라고 경탄하면서 한국인에 대하여 동정을 보였다.114114 백범김구기념사업회, 앞 책, pp.185~186 ; 嚴恒燮, 앞 책, pp.82~92 참조.닫기
윤봉길은 자폭에 실패하고 현장에서 체포되어 상해 일본헌병대에서 취조를 받았다. 끝까지 배후를 밝히지 않다가 김구가 성명을 발표한 후에야 그 사실을 시인하였다. 그 후 5월 25일 상해파견군 군법회의에서 사형이 선고되었고, 11월 18일에 대양환(大洋丸)에 실려 오오사까에 있는 육군위수형무소(陸軍衛戍刑務所)에 수감되었다가 12월 18일 금택(金澤)으로 이송되어, 다음날 오전 7시 30분에 총살이 집행되어 25세를 일기로 순국하였다.115115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앞 책, pp.748~749.닫기
윤봉길의 상해의거는 ‘테러로서는 최대급의 성과’116116 森川哲郞, 앞 책, p.254닫기를 거두었다. 특히 상해사변의 정전회담이 진행중인 시기였기에 중국의 조야에 끼친 영향은 무척 컸다. 중국에의 영향은 중국정부와 중국국민의 한인에 대한 감정의 변화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이 일이 있기 전에는 한·중혁명기관 및 개인 사이에 접촉이 냉담했다. 왜냐하면 중국혁명의 원조(元祖) 손문의 재세(在世)시에는 한·중 상호관계가 퍽 친밀하여 중국임시정부는 한국임시정부를 ‘사실승인’도 해 주었으며, 한국의 애국청년들을 중국의 군사교육기관 및 기타 교육기관에 무료입학을 허여하였고 심지어는 도미유학의 편의까지 알선해 주었다. 그러다가 손문이 별세하고 장개석(蔣介石)이 계승하자 한인청년을 자기가 경영하는 ‘황포군관학교(黃浦軍官學校)’에 입학케 하여 많은 인재를 양성시켜 주었다. 그러나 국공(國共) 대립 중에 한국인 황포군관학교 학생 중에 많은 무리가 중공에 가담함으로써 장개석에게 반동을 일으켰다. 이로부터 장개석은 한국기관과 인사에 대해 경원·냉담해 왔었던 것이 사실이었다. 그러다가 이번 윤의사 의거가 있은 후부터 한인에 대한 냉담과 반목이 일시에 걷혀지고 물심양면의 원조를 아끼지 않았는데, 박찬익의 알선으로 윤봉길의 후원자인 김구는 장개석을 만날 수 있었고117117 조경한, 「푸른피가 천추를 거슬러」, 『나라사랑』제25집(외솔회, 1976), pp.141~142.닫기 그 결과 중앙군관학교 낙양분교에 한국인특별반을 설치하고 군간부를 양성하도록 하였는데, 이들이 한국광복군의 기간요원이 되어 활약하게 되었다.118118 국사편찬위원회, 『한국독립운동사』5(탐구당, 1979), p.170.닫기
그리고 중국의 지도자들은 개인적 입장에서 한국인들의 독립운동에 대한 평가를 새롭게 하게 되었다. 장개석이 “중국의 백만대군이 하지 못한 일을 한국의 한 용사가 능히 하였으니 장하도다”라고 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119119 1988.1.30 백범김구기념사업회에서 실시한 강연회에서 행한 朴英俊(박찬익의 子)의 증언에 의하면 장개석은 3000여명의 사관생도를 모아 놓고 ‘중국군 20~30만이 못한 것을 한국인 1인이 수행했으니 너희도 분발하라’라는 요지로 4시간 동안 연설을 했다고 한다. 또 당시 중국인들은 가가호호 폭죽을 터뜨리면서 거사를 대대적으로 환영했다고 한다.닫기 이는 사실상 중국군 제19로군이 못한 적의 수뇌부를 폭살할 수 있었다는 데서 과장이 아닌 정당한 평가였던 것이다.
민간인들도 상해의거를 대대적으로 환영하였다. 그들에게 상해의거는 상해사변에서의 패배의식을 승리감으로 전환시켜 주었다.120120 주 119)와 같음.닫기 이와 같은 중국인들의 지지는 그간 만보산사건 이래 악화된 한·중 양국민의 반감을 일시에 호전시키는 위대한 힘을 발휘하여 수많은 교포의 생명과 재산을 구한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리고 중국이 한국의 독립지원계획을 적극 추진하게 되어 민간단체 차원의 지원에서 점차 중국 국민정부의 전국적인 성격의 정책으로 바뀌게 되었다.121121 胡春惠著, 辛勝夏譯, 앞 책, p.47에서 저자는 중국정부의 한국독립운동 지원정책에 대해서도 자세히 언급하였다.닫기
이리하여 자연히 독립운동에 활기를 불어 넣게 되었다. 그 구체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첫째, 임시정부가 근근히 법통을 지킬 뿐, 쇠퇴하고 있을 때, 그를 침체의 함정에서 구출해 준 것이었다. 그리하여 임시정부는 독립운동의 구심체로서의 자기 위치를 회복하여 끝내 역사의 광채를 받을 수 있게 되었으니, 독립운동·임시정부·한인애국단의 상해의거 이 셋은 불가분의 관계가 되었다.122122 趙東杰, 앞 글, p.72.닫기 둘째, 다른 독립 운동단체나 인사들에게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계열이 다른 단체에서도 윤봉길의 의거로 무언의 교훈을 얻을 수 있게 되었다.123123 李康勳, 「윤봉길 의거의 영향」, 『나라사랑』제25집(외솔회, 1976), pp.155~156. 이강훈도 윤봉길의거에 깊은 감동을 받고 자주독립을 위해 보람있는 일을 하고 죽기를 결심했다고 한다.닫기 세째, 단결된 민족의 역량을 보여야 할 상황에서 민족유일당 결성이 실패로 돌아가자 새로운 계기가 필요하게 되었는데 윤봉길의 의거는 이러한 역할을 충분히 해낸 것으로 독립운동사상의 분수령이 되었다.124124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앞 책, p.760.닫기 네째, 한·중연합항일운동의 체제가 강화되었다. 즉 중국 장개석 정권의 한국독립운동의 지지와 성원이 카이로회담까지 계속되어 장개석이 한국의 독립을 제안하고 선언에 명문화시킨 것도 윤봉길의거의 영향이라고 볼 수 있다.125125 李承晚, 『屠倭實記』序文 참조.닫기 다섯째, 김구의 정치적 비중이 높아진 것이다. 한국의 독립운동 단체들도 그를 칭찬하고 중국신문이나 국민당 중앙당부에서도 지원을 아끼지 않았으며, 결국 임정은 사실상 김구에 의해 운영되기 시작하였다.126126 胡春惠著, 辛勝夏譯, 앞 책, p.78 참조.닫기
이 외에 상해의거의 세계사적 의의로 지적될 수 있는 것은 침략자는 온전히 살아남을 수 없다는 교훈을 전 인류 앞에 제시했고, 나약한 민족으로 여겨졌던 한국의 민중이 결코 그렇지 않으며 광복할 의지와 자격이 흘러넘침을 세계에 떨쳤으며, 우리 민족 스스로도 불투명한 광복에의 전망에서 탈피하여 재기할 수 있는 신념·용기·가능성을 제고시켜 주었다.127127 李炫熙, 앞 책, pp.292~293.닫기

註 061
: 嚴恒燮, 앞 책, pp.36~41 ; 森川哲郞, 『朝鮮獨立運動暗殺史』(東京 : 三一書房, 1976), pp.248~249 ; 金九, 앞 책, pp.232~234 ; 백범김구기념사업회, 앞 책, pp.161~164.
註 062
: 金九, 앞 책, p.235.
註 063
: 金弘壹, 『大陸의 憤怒』(文潮社, 1972), pp.272~273.
註 064
: 주 58) 참조.
註 065
: 李炫熙, 앞 책, pp.270~271.
註 066
: 金弘壹, 앞 책, p.274.
註 067
: 森川哲郞, 앞 책, p.250.
註 068
: 森川哲郞, 앞 책, p.247.
註 069
: 森川哲郎, 앞 책, p.248.
註 070
: 백범김구기념사업회, 앞 책, p.167.
註 071
: 李炫熙, 『한국일보』, 1987년 7월 29일자 참조.
註 072
: 李炫熙, 앞 책, p.277 ; 李炫熙, 앞 신문.
註 073
: 李康勳, 앞 책, p.187 ; 정정화, 앞 책, p.82.
註 074
: 森川哲郞, 앞 책, p.256 ; 李炫熙, 앞 신문 등 다른 곳에서는 사형선고 일자가 조금 다르게 나와 있으나 이는 공식문서를 인용한 일본측 기록이 정확한 것으로 보여 그것을 따랐다.
註 075
: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앞 책, p.242 ; 嚴恒燮, 앞 책, p.35 참조.
註 076
: 李炫熙, 앞 책, pp.273~274.
註 077
: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앞 책, p.744
註 078
: 주 72) 참조.
註 079
: 『나라사랑』제25집(외솔회, 1976), pp.170~172, 자필이력서(독립기념관문서).
註 080
: 森川哲郞, 앞 책, p.255.
註 081
: 金九, 앞 책, pp.238~239 ; 홍순옥, 앞 글, p.65.
註 082
: 백범김구기념사업회, 앞 책, p.173; 金弘壹, 앞 책에서는 폭탄창고 폭파시도에 이미 윤봉길이 인부로 가담하였다고 한 것으로 보아 김구와 윤봉길은 서로를 알고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백범일지에는 언급이 없다.
註 083
: 李炫熙, 앞 책, p.280.
註 084
: 金弘壹, 앞 책, p.287.
註 085
: 백범김구기념사업회, 앞 책, p.175; 金弘壹, 앞 책에서는 자기가 윤봉길에게 정보를 제공했다고 하고 김구를 언급하지 않았다.
註 086
: 김홍일에 의하면 윤봉길이 먼저 제의하자 김구가 동의했다고 한다(孫世一, 『李承晚과 金九』(一潮閣, 1970), p.107 참조).
註 087
: 金九, 앞 책, p.288에서는 이미 무기창고 폭파계획때 만들어 놓은 것이라 하나 의심이 가는 것이 많다. 이현희, 앞 책, p.278에는 1.8사건후 피해다니던 2월 26일 김홍일을 만나 폭탄제조를 의뢰해 두었던 것이라 한다.
註 088
: 金弘壹, 앞 책, p.287.
註 089
: 윤병석, 앞 글, pp.43~44.
註 090
: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제4권, p.610.
註 091
: 백범김구기념사업회, 앞 책, p.179.
註 092
: 鄭華岩, 앞 책, pp.137~141.
註 093
: 백범김구기념사업회, 앞 책, p.176.
註 094
: 尹南儀, 앞 책, p.170.
註 095
: 嚴恒燮, 앞 책 참조.
註 096
: 윤병석, 앞 글, p.40.
註 097
: 백범김구기념사업회, 앞 책, pp.177~178 ; 정정화, 앞 책, p.85.
註 098
: 윤병석, 앞 글, pp.39~43에 그 당시 실황이 상세히 기술되어 있다.
註 099
: 윤병석, 앞 글, p.42.
註 100
: 森川哲郞, 앞 책, p.251.
註 101
: 정정화, 앞 책, p.85.
註 102
: 백범김구기념사업회, 앞 책, p.182.
註 103
: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제4권, p.615 ; 정정화, 앞 책, p.86.
註 104
: 백범김구기념사업회, 앞 책, pp.181~182.
註 105
: 李炫熙, 앞 책, p.287.
註 106
: 森川哲郞, 앞 책, pp.253~254.
註 107
: 백범김구기념사업회, 앞 책, pp.182~183.
註 108
: 李延馥,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과 그 변천」, 『慶熙史學』제9·10집(慶熙大史學會, 1982), p.155.
註 109
: 李康勳, 앞 책, p.198 ; 胡春惠著, 辛勝夏譯, 앞 책, pp.76~77.
註 110
: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앞 책, p.759.
註 111
: 백범김구기념사업회, 앞 책, pp.185~186.
註 112
: 홍순옥, 앞 글, p.70.
이 결과로 낙양군관학교 안에 한국인교육반을 두게 되었다.
註 113
: 李康勳, 앞 책, pp.198~199.
註 114
: 백범김구기념사업회, 앞 책, pp.185~186 ; 嚴恒燮, 앞 책, pp.82~92 참조.
註 115
: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앞 책, pp.748~749.
註 116
: 森川哲郞, 앞 책, p.254
註 117
: 조경한, 「푸른피가 천추를 거슬러」, 『나라사랑』제25집(외솔회, 1976), pp.141~142.
註 118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독립운동사』5(탐구당, 1979), p.170.
註 119
: 1988.1.30 백범김구기념사업회에서 실시한 강연회에서 행한 朴英俊(박찬익의 子)의 증언에 의하면 장개석은 3000여명의 사관생도를 모아 놓고 ‘중국군 20~30만이 못한 것을 한국인 1인이 수행했으니 너희도 분발하라’라는 요지로 4시간 동안 연설을 했다고 한다. 또 당시 중국인들은 가가호호 폭죽을 터뜨리면서 거사를 대대적으로 환영했다고 한다.
註 120
: 주 119)와 같음.
註 121
: 胡春惠著, 辛勝夏譯, 앞 책, p.47에서 저자는 중국정부의 한국독립운동 지원정책에 대해서도 자세히 언급하였다.
註 122
: 趙東杰, 앞 글, p.72.
註 123
: 李康勳, 「윤봉길 의거의 영향」, 『나라사랑』제25집(외솔회, 1976), pp.155~156. 이강훈도 윤봉길의거에 깊은 감동을 받고 자주독립을 위해 보람있는 일을 하고 죽기를 결심했다고 한다.
註 124
: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앞 책, p.760.
註 125
: 李承晚, 『屠倭實記』序文 참조.
註 126
: 胡春惠著, 辛勝夏譯, 앞 책, p.78 참조.
註 127
: 李炫熙, 앞 책, pp.292~2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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