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임정수립의 배경과 각처의 정부

(1) 임정수립의 배경
1910년 일제에게 나라를 빼앗긴 후 국내에서의 모든 사회활동이 억압되고 집회·결사가 강제로 해체되는 등 독립운동이 불가능하게 되자 많은 민족운동가들은 국내에서 비밀결사를 조직하여 항일투쟁을 전개하는가 하면 해외로 망명해서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국내에서는 독립운동가들이 비밀지하조직을 결성하여 민중을 계몽하는 등의 간접적인 방법으로 저항을 계속하는 한편 국내활동이 더욱 어려워지자 독립투사들은 해외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의 기지를 설치하고 광범위한 군사활동을 전개하여 무력으로 독립을 쟁취하고자 했다. 그러는가 하면 또 미국·중국으로 망명한 지사들은 외교적인 방법으로 우리의 독립을 성취하고자 했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일제는 재빨리 참전하여 중국에 대한 침략 야욕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이 무렵 1917년에는 제정러시아에서 혁명이 일어나 사회주의정권이 수립되어 약소민족을 동정하는 태도를 취하였다. 또한 1918년 전후 수습책으로서 미국 대통령 윌슨이 제시한 14개 조항의 내용에는 민족자결원칙이 포함되어 있었다. 당시 적극적으로 민족운동을 확산시키고 있던 약소민족들 사이에서는 이 민족자결원칙이 대단한 희소식으로 받아들여졌다. 이러한 민족자결의 원칙은 특히 일제의 헌병통치 하에서 신음하던 한민족에게 큰 자극을 주게 되었고, 지사들은 당시의 국제 정치적 상황을 충분히 활용코자 했다.
제1차 세계대전의 전후처리원칙으로 제시된 민족자결주의가 한반도에 적용되리라는 보장이 없더라도 국제정세의 변동을 능동적으로 포착하여 이용하려는 것이었다. 이리하여 국내에서도 민족 전체를 대상으로 하여 무력과 강압을 앞세운 무단통치로 약탈을 자행하고 있는 일제에 대항하기 위한 전민족적 반일투쟁이 통일 단결하게 되었다. 따라서 3·1운동은 특정 종교나 특정 계층을 초월하여 거의 모든 민족이 준비하고 참여하는 민족운동이 되었다.
3·1운동은 최초로 민족 전체가 참여하여 독립을 달성하고자 한 거족적 항쟁으로서 당시 국제정치의 조류에 자극받아 그동안 축적되었던 민족자주의식이 발흥한 민족 단위의 투쟁이었다. 이 운동으로 인해 비록 당장 독립을 쟁취한 것은 아니지만 정신적 측면에서 볼 때 한민족은 독립에 대한 의지를 일층 고무시킬 수 있었다. 이러한 독립을 향한 민족적 의지는 조직적 투쟁을 요구했고 따라서 효과적인 투쟁을 위한 최고 통치기관의 필요성이 대두되어 자주적 정부수립에 착수하게 되었던 것이다.
3·1운동을 일으키게 한 원동력은 우리 민족사 5천년의 개국이념이었던 홍익인간의 정신에서 그 원칙적 맥락을 찾을 수 있으며001001 李炫熙, 『三·一獨立運動과 臨時政府의 法統性』(東方圖書, 1987), p.31.닫기 가깝게는 1894년 동학혁명운동에서 나타난 성숙된 시민의식에서도 그 일단을 접근시킬 수 있겠다. 또한 3·1운동이 있게 한 외적인 조건의 하나는 1910년부터 1919년 3·1운동 때까지의 식민통치 형태의 핵심이었던 헌병경찰 통치의 극렬성이라고 지적할 수도 있다. 또 다른 조건은 세계정세의 변화이다. 제1차 세계대전이 종식되고 평화 분위기가 확산되자 우리민족은 새로운 용기와 희망과 의욕이 샘솟게 되었고 이 시기를 한국 독립운동의 좋은 기회로 인식하게 되었던 것이다.
한편 3·1운동을 있게 한 내적인 상황으로는 각 종교단체의 구국의지와 이를 위한 실천을 들 수 있는데, 3·1운동의 도화선 역할을 한 민족대표 33인의 선도적인 활약은 절대적이었다고 하겠다. 또한 이들이 역사적으로 평가받고 있는 점은 군주제와 결별하고 민주공화체제로의 과감한 이행과 실천을 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민족주의운동 과정에서 민주공화정부를 수립하려는 의지가 이미 팽배해 있었기 때문이며 그리하여 3·1운동 직후 바로 국내에서 임시정부가 세워질 수 있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내·외적으로 분위기가 무르익는 가운데 3·1운동을 위한 준비는 해외에서 먼저 시작되었다.002002 李炫熙, 앞 책, pp.13~21.닫기 동학혁명운동·의병운동·신민회 활동 등을 통해 항일투쟁을 이어오던 많은 세력들이 해외로 진출하여 독립의 꿈을 키워 가고 있었다. 또한 일제의 한반도 병탄 이후 소위 화폐정리, 토지조사 등으로 토지를 잃은 많은 농민들도 고향을 등지고 해외로 이주하면서 해외교민의 수가 더욱 늘어나게 됨에 따라 이들은 조직적인 항일운동을 전개할 수 있게 되었다.
먼저 중국에서는 1918년 8월 하순경에 여운형(呂運亨)·장덕수(張德秀)·김철(金澈)·조동호(趙東祜)·한진교(韓鎭敎) 등에 의해 ‘조선독립의 목적’을 달성하고자 결성된 상해 신한청년당의003003 李炫熙, 『韓國近代女性開化史』(三友出版社, 1978), pp.250~267.닫기 동태를 들 수 있다. 한편 역사·지리적으로 한반도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던 만주와 노령·연해주 지방에서도 한인들은 산업·교육우선주의에 바탕을 둔 군사교육을 병행하였다. 그리고 만주와 노령의 운동은 하와이와 미주의 운동세력과도 긴밀히 연락되고 있었다.
이러한 움직임을 전제로 하여 민족 전체가 참여하여 일어난 3·1운동은 한국독립운동사에서 하나의 분수령을 이루는 것이었다. 한국독립당에서는 “3·1운동은 한국 민족의 정당한 생존 발전을 위하여 국가 지상의 정신을 관철하며 공존공영의 신세계를 창조하기 위하여 정의와 인도를 제창한 반파시스트운동이니 그 조직은 자못 현대적이며 그 발동은 순전히 민족적 양심에 기인한 것이었다”004004 衛, 「三·一運動의 意義」, 『獨立評論』(重慶 : 韓國獨立黨, 1944. 3. 1.), 秋憲樹 編, 『資料韓國獨立運動』Ⅰ(延世大學校出版部, 1971), pp.294~296.닫기라고 3·1운동을 인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3·1운동은 한민족의 양심의 발로인 동시에 세계 인류의 양심을 일깨우려는 정의와 인도의 운동이었다.
그러나 보다 중요한 것은 3·1운동의 성과로 진정한 민족운동이 무엇인가를 보여주는 동시에 민주주의적 지도정신을 확립하여 이후의 독립운동을 더 높은 단계로 제고시켰으며 한국 민족해방운동의 귀감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물론 현상적으로 볼 때 3·1운동이 당장 정치적 성과를 거두지 못한 것은 사실이지만 1919년 말까지 전국 각지에서 계속된 만세운동은 그 과정에서 임시정부를 수립케 함으로써 독립운동의 새로운 전기를 마련해 주었던 것이다.
이상의 3·1운동이 있기까지의 전개과정과 의의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3·1운동은 군주제적 전체주의 의식의 소멸을 토대로 하여 국민 단합과 응집된 민족주의 의식이 성장된 민족운동이었다. 또 그것은 갑신개화혁신운동과 갑오동학혁명운동의 정신을 재현하는 입장과 전통적인 사상의 계승에 의해 국민의 힘을 바탕으로 하여 일어난 항일 자주 독립운동의 분수령이 되었다. 비록 뚜렷한 지도자가 없었더라도 ‘독립완수’라는 민족 전체의 숙원에 따라 모든 계층을 대동 합류시켜 일어났던 것이다. 그리고 3·1운동으로 인해서 실국적(失國的)인 무정부 상태에서 벗어나 대한민국임시정부라는 민주공화제의 전통정부 탄생을 내외에 천명하게 되었다. 이로서 비로소 민족운동의 본궤도를 형성하여 독립쟁취를 위한 민족진로의 3대 방향을 잡을 수 있게 하였다. 그것은 민족실력의 양성, 외교자립의 노력, 무장세력의 양성으로 독립전쟁을 해방되는 날까지 계속하는 것이다. 3·1운동은 이같이 국내외에서 새로운 형태의 민족운동을 촉진시켜 한국 민족운동의 가능성을 제시해 주었다. 이는 곧 이어 동년 4월 상해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을 위시하여 국내외 몇 갈래의 임시정부 수립으로 구체화되었다.
3·1운동 이전에도 만주와 노령·미주·하와이에서는 우리 교포들이 수 많은 단체를 이미 구성하고 있었다. 특히 간도와 노령의 각 단체들은 무장 조직을 갖추고 본토 회복을 끊임없이 염원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이 단체들은 군사사회(軍事社會)를 이루어 군사령부를 조직 하였다.
그 좋은 예로는 남만(南滿) 서간도(西間島)의 거대한 교포자치단체인 ‘한족회(韓族會)’가 독립운동의 구체적 수단으로 장정들에게 군사훈련을 시키며 그 의용군의 지휘기관으로 ‘군정부(軍政府)’를 둔 것을 들 수 있는 데, 한족회와 군정부는 서로 모자관계를 이루고 있었다. 동만 북간도에 있는 ‘동간도국민회(東間島國民會)’와 ‘대한독립군(大韓獨立軍)’ 또 ‘정의단(正義團)’과 ‘군정부(軍政府)’도 이러한 관계였다. 이들은 근본적으로 지방정부의 성격을 가진 것으로 중앙정부는 아니었으나, 뒤에 상해 임시정부에 충성을 맹세하여 그 지휘 하에 들어가 한족회의 군정부는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로, 정의단의 군정부는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로 각각 개편되었다.
중앙정부는 3·1운동을 계기로 수립되었는데,005005 1917년 신규식·조소앙 등 소장인사가 국민주권설을 이론적으로 정립하고 박은식·신채호·박용만 등 종래 신한청년당 선배들의 지도를 받으며 망명 정부 계획을 전환하여 임시정부 수립을 제창한 「大同團結宣言」을 발표하는 등 이미 3·1운동이전에 임시정부 수립을 위한 계획이 있었다. 이「宣言」의 계획은 당장 실현되지 못하였으나 임시정부 수립의 이론적 모체가 되어 1919년 8개의 임시정부를 탄생시키기에 이르렀다(趙東杰, 「臨時政府 樹立을 위한 1917년의 大同團結宣言」, 『韓國學論叢』第9輯(國民大學韓國學硏究所, 1987) 참조).닫기 이는 통합되지 않은 지방 각 단체의 상위에 최고기관을 둘 필요성과 외교상의 요구에 의해 이룩된 것이다. 즉 3·1운동이야말로 대한민국 수립의 주권적 의사표시를 과시하게 했던 것이다. 중앙정부급의 각 정부 수립운동은 다음의 8개를 들 수 있다(표 1참조).
(2) 각처의 정부
ㄱ. 노령정부(대한국민의회)
한국의 임시정부로서 가장 먼저 수립된 것은 노령의 블라디보스톡에서 ‘전로한족중앙총회(全露韓族中央總會)’가 자체 개편된 ‘대한국민의회(大韓國民議會)’였다. 1864년 이래 한국인은 두만강을 건너 러시아령 연해주 일대로 이주하기 시작했다.006006 1864년 이래 韓人들은 기근 때문에 황무지 개척을 위해 많이 이주했다.닫기 주로 함경도·평안도 일대의 우리나라 빈민들이 계속 월경하여 노령 각지에 정착하면서 연해주 일대의 개척을 시작하였다. 1884년 경흥개척조약 이후 이주자는 급속히 증가하여 합방 이후에는 농민·광부 외에 지식인도 상당수 이주하여 교포는 50만 명을 초과할 정도였다. 이들은 생활의 여유가 생기게 되자 세계 사조에 관심을 갖게 되고, 교육을 통해 독립사상·민족의식도 싹트게 되었다. 그리하여 1905년의 한족회(韓族會)를 비롯하여 대한청년교육회(大韓靑年敎育會)·공진회(共進會)·암살단(暗殺團)·공공회(公共會)·성명회(聲鳴會)·국민회(國民會)·권업회(勸業會) 등의 단체를 두어 독립정신과 애국사상을 고취하였다.007007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4(독립유공자사업기금운용위원회, 1972), p.55.닫기
그러나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과 동시에 러시아정부의 전시 단체활동 금지로 인하여 그 활동들이 중지될 수 밖에 없었다. 1917년 11월 러시아에 제2차 혁명이 일어나자 한국인들은 블라디보스톡에 ‘전로한족회중앙총회(全露韓族會中央總會)’를 결성하여008008 金俊燁·金昌順 共著, 『韓國共產主義運動史』Ⅰ(高麗大學校亞細亞問題硏究所, 1967), p.88.닫기 회장 문창범(文昌範), 간부에 김립(金立)·윤해(尹海) 등을 선출하고 각지에 분회를 두어 자치사상과 독립사상을 고취시켰다. 이들은 간도 지방의 교포들과 연락하고 볼셰비키와 제휴하여 항일 구국투쟁을 시작하였다. 특히 헤이그 특사파견과 안중근 의거에도 지방적으로 관련하였으며 의병대장 유인석(柳麟錫)·간도관리사 이범윤(李範允) 등의 오랜 영향력으로 유력한 세력을 갖고 있었다.
한편 이 무렵의 또 다른 독립운동단체로서 활약했던 것으로는 ‘노병회(勞兵會)’가 있었다. 노병회에는 구한국 참령 이동휘(李東輝)가 회장으로 있었는데, 1919년 2월에 이것을 ‘대한국민의회’라고 개칭하고는 파리강화회의에 윤해(尹海)·고창일(高昌一)을 파견키로 했었다.009009 임시정부파리위원회, 「歐洲의 우리 事業」, 『新東亞』(1987. 8)에 의하면 윤해·고창일은 2월 5일에 해삼위를 출발, 9월 26일 파리에 도착하여 파리위원부와 합동으로 집무했다고 한다.닫기 그러나 국내에서 3·1운동이 일어나자 3월 17일 국민의회에서 수천 명의 군중을 모아 독립선언식을 하고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뒤 시가행진도 전개하였다. 그리고는 선언서를 각국 영사관에 보내고, 3월 27일에는 한국의 독립과 정부의 승인을 요구하고 이것이 여의치 않을 때는 일본에 혈전을 포고할 것이라는 등 5개 항의 결의문을010010 金秉祚, 『韓國獨立運動史略』上篇(上海 : 宣言社, 1922), pp.55~60.닫기 채택하고 한족회중앙총회 회장이었던 문창범의 회장 추대 결의안과 정부 각료의 선임을 발표하였다.011011 김원용, 『재미한인 50년사』(California : 1959), p.452.닫기 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대한국민의회 정부각료
대통령:손병희
부통령:박영효
국무총리:이승만
총장:윤현진(度支) 이동휘(軍務)
   안창호(內務) 남형우(產業)
참모총장:류동열
강화대사:김규식
1. 대한국민의회는 조국통일의 달성을 기약하며, 세계 민족자결주의에 기인하여 한민족의 정당한 자유독립을 주장함.
2. 한일합방조약은 일본의 강압적 수단으로 성립된 것이고 우리민족의 의사가 아니므로 그 굴속을 부인하며 일본의 통치 철폐를 주장함.
3. 프랑스 파리에서 열리는 평화회의에 대표를 파견하여 우리의 독립운동과 정부건설의 승인을 요구하며 국제연맹에의 참가를 주장함.
4. 한국 독립운동의 실정을 세계에 선전하며 정부 건설의 사업을 각국 정부에 통지하여 우리의 주권을 주장함.
5. 이상의 목적이 인도·정의의 공정한 판결을 받지 못하면 일본에 대하여 혈전 포고를 주장함.

이상과 같은 발표를 했지만 대한국민의회정부는 상해의 대한민국임시정부나 한성정부가 약식이기는 해도 임시헌장이나 약헌을 제정·공포했던 것에 비해 그에 해당하는 어떠한 헌법도 제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러시아령에 거주하는 50만 교포를 배경으로 한 이같은 강경한 행동방침(제5장)은 한성정부의 일제에 대한 비협력이나 상해 임시정부의 외국인에 대한 생명·재산보호나 정치범의 특사 등을 규정한 6개 조항의 정강과 사뭇 대조를 이룬다. 또 특히 산업부의 설치나 군무총장과 별도로 참모총장제를 설치한 것은 공산혁명이 실시된 러시아의 실정과 무력항일전쟁을 주장하던 현지 독립운동자들의 열망이 반영된 때문이었다고 보여진다. 그 정체에 있어서도 공화제를 채택한 것은 다른 각지의 임시정부와 대체로 마찬가지지만, 구한국의 군주제의 부활이 아니라 새롭게 혁명적인 민주공화제라는 점에서 3·1운동에 나타난 민중의 의사를 정치적으로 잘 반영한 것이다.
동시에 정부기구나 인선문제에 있어서 대통령과 부통령 제도를 두고 천도교의 총수 손병희와 개화파 인물인 박영효를 각기 추대한 것은 국내 동포들과의 일체감을 갖고자 했던 의지의 일단이었다. 그러나 이 행정부가 특별한 기능을 발휘한 흔적은 없다. 다만 입법기관이었던 국민의회가 주체로서 실재하였지만 뒤에 수립된 상해 임시정부와 통합 교섭을 벌여 국민의회를 해산하고 상해 임시정부에 흡수되었다.
ㄴ. 대한민간정부
일반적으로 알려진 임시정부는 국내에 3개 처, 국외에 2개 처 등 모두 5개 처가 수립되었던 것이 기정사실로 되어 있었다.012012 趙東杰, 「大韓民國臨時政府」, 『한국사』21(국사편찬위원회, 1976), pp.200~207.닫기 그러나 이종일의 기록에 의하면 임시정부는 완전하지는 못하나 1 개 처가 더 추가되고 있다. 그것이 곧 1919년 4월 1일 기호지역에 수립하려 했던 천도교 중심의 ‘대한민간정부’였다.013013 李鍾一, 『默菴備忘錄』, 1925年 1月 15日字.닫기 대한민간정부는 조선민국임시정부와 함께 정부형태에서 보면 약간 벗어나고 있지만 몇 가지 주목할 만한 점을 갖고 있다. 다음은 대한민간정부의 각료 명단이다.

대한민간정부의 각료
대통령:손병희
부통령:오세창
국무총리:이승만
내무부장관:이동녕외무부장관:김윤식학무부장관:안창호
재정부장관:권동진군사부장관:노백린법제부장관:이시영
교통부장관:박용만노동부장관:문창범의정부장관:김규식
총무부장관:최린  

이상과 같이 조직된 대한민간정부의 특색을 보면 첫째, 이 정부의 주도체는 천도교로서 동학정신을 계승 발전하여 보국안민적 차원에서 3·1운동을 일으키는데 주도적 임무를 수행하였다. 사상적 맥락과 의식의 성장을 통해 근대지향적 구국민중종교로 승화하여 군주제의 폐지와 함께 민주사회를 지향했던 것 같다. 둘째, 이들은 위의 각료 명단에도 보이듯이 대통령을 주축으로 하는 체제 하에 10개 행정부처의 장을 ‘장관’이라고 하는 현대적인 명칭으로 불렀다. 셋째, 위의 부서와 각료 명단을 보면 근대적 정치용어를 쓰고 있으며 구성원도 천도교 교인에 치우치지 않고 국내외 인사를 망라하고 있었다. 넷째, 의정원 임무 수행을 위해 의정부라는 잠정적인 부처를 두어 당시 해외에서 활약하고 있던 김규식을 그 장관으로 선임했다는 사실은 행정과 입법 그리고 사법의 삼권분립 형태를 취하려 했던 민주정체적 성격의 민주정부로 발전할 소지를 드러내었다고 하겠다.
이러한 대한민간정부는 3·1운동 개시 1개월 뒤인 4월 1일을 기해 수립하려 했으나 3·1운동 당시 민족대표였던 33인이 자현피착(自顯被捉)됨으로써 그 출범이 여의치 못하게 되고 말았다.
ㄷ. 조선민국 임시정부014014 金正明, 『朝鮮獨立運動』Ⅱ(東京 : 原書房, 1967), pp.13~17.닫기
1919년 1월 21일 갑작스런 고종의 폭붕 소식에 접하여 손병희 등은 고종 독살의 진상을 규탄하는 국민대회 소집을 알리는 「고 국민대회」의 격고문을 인쇄·배포하였다. 고종의 사인이 독살설로 비등되자015015 李相玉, 「三·一運動 당시의 流言」, 『三·一運動 50周年紀念論集』(東亞日報社, 1969), p.381.닫기 천도교의 총수인 손병희는 격고문을 통해 고종 독살의 배경·경위 등을 알려 국민들에게 거국·거족적으로 일어날 것을 권유했던 것이다. 결국 3·1운동은 전종단이 중심이 되어 민중구국운동으로 발전하였다.
그에 앞서 이미 손병희와 일부 천도교인들은 1910년대 말에 벌써 민간정부 형태의 국민국가 구성의 필요성을 역설한 바 있다. 1919년 4월 9일 일본 경찰에 의해 압수된 소위 불온문서(不隱文書)에는016016 김원용, 앞 책, p.452.닫기 「조선민국임시정부 조직 포고문」과 「정부창립장정」(정부조직법에 해당) 33개 조가 조선민국대회와 조선자주당의 연합회 명의로 나타나 있었다. 당시 정부조직의 각료 명단은 다음과 같다.

조선민국 임시정부 각료
정도령:손병희
부도령:이승만
내각총무경:이승만
외무경:민찬호내무경:김윤식군무경:노백린
재무경:이상학무경:안창호법무경:윤익선
식산무경:오세창교통무경:조용은 

1910년대 말 이들이 민간정부 형태를 구상하고 실천하려 했던 내용을 보면 분명히 근대적 정치의식이 내포되어 있었다. 그리고 손병희를 정도령(正都令)으로 추대한 ‘조선민국임시정부’의 창립 장정의 성격을 보면 2인의 도령을 통해 통괄하는 민주적 정부형태로 국민국가를 지향하려 했던 것이 보인다. 이 때의 임시정부는 도령부와 내각의 양원체제로서 30명 규모의 입법위원을 구성하여 민국의 약법을 만들려고도 했다.
이 임시정부는 앞서 서술한 대로 4월 9일 경 일경에 압수당한 불온문서에서 그 수립의 전말을 알 수 있었다. 이 문서사건의 개요를 보면 박이근(朴理根)·권희목(權熙穆)·이임수(李林洙) 등 3인이 주동이 되어 천도교 재무부원 이모(李某)로 부터 같은 교도인 허익환(許益煥)이 인쇄기구와 용지 등을 얻어내어 박이근의 집에서 문서 약 400매를 인쇄하여 서울 시내에 배포했던 것이다.017017 洪淳鈺, 「漢城·上海·露領 臨時政府의 統合過程」, 『三·一運動 50周年紀念論集』, p.896.닫기
이 정부안은 국내에서 조직된 것으로 다음에 나올 신한민국정부(新韓民國政府)와 같은 ‘비라정부’라 할 수 있다. 어쨌든 이 정부안은 한성정부와 같은 입지조건이 없을 뿐만 아니라 그다지 홍보도 되지 않은 듯하여 실체가 구성되지 못한 채 다만 문서로서 끝난 듯하다.
ㄹ. 대한민국 임시정부(상해임시정부)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지리적인 이점을 안고 가장 유리한 조건에서 가장 큰 규모의 정부(의정부와 행정부)를 구성하여 의원정치의 본령을 발휘하였고, 행정부를 구성하여 정치적 위기에 처했을 경우 가장 유연하게 대처했던 정부였다. 즉 3·1운동 전후 각 처의 독립단체들이 모두 민간 임시정부 수립의 의욕을 가지고 있었으나 우선 적절한 거점이 필수적이었기 때문에 순조롭지 못하였다. 그런데 국내를 비롯하여 일본군이 주둔해 있는 중국 동삼성이나 러시아령 또는 본토와는 너무 떨어진 미주 일대보다는 상해가 비교적 안전한 지역이었다.018018 李延馥, 「大韓民國臨時政府의 成長過程」, 『慶熙史學』第1輯 (慶熙大史學會, 1967), pp.84~86 ; 朴殷植, 『韓國獨立運動之血史』下(上海 : 維新社, 1920), p.56.닫기
이같은 입지조건에서 1918년 8월 하순 경에 여운형(呂運亨)·장덕수·선우혁(鮮于爀)·김철·조동호·한진교 등이 조선 독립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결성한 150여 명 규모의 신한청년당(新韓靑年黨)이 탄생되었다. 신한청년당원들은 국내로 일본으로 러시아령으로 당원을 파견하여 독립운동 전개를 호소하고 미주·하와이·간도 지방에도 연락하여 종교계를 위시하여 각계·각층의 참여를 유도했다. 또 김규식을 파리강화회의에 파견하여 조국의 독립을 진정시켰다. 그러한 활동을 전개하는 가운데 2월 8일 동경 유학생이 독립선언을 하고 그 연락원인 이광수가 상해로 왔으며 이어 국내의 3·1운동 소식이 전해지자 이들의 활동은 더욱 박차를 가하게 되었다.
3월 하순에는 신한청년당의 파견원이 상해로 돌아오고 독립지사들이 속속 상해로 건너옴으로서 프랑스 조계 보창로(寶昌路) 329호에 ‘독립임시사무소’를 설치하였다. 이 곳에 현순(玄楯)을 총무로 삼아 본국으로부터 전달된 「독립선언서」를 홍보하여 3·1운동의 소식을 각국의 통신사와 신문사에 제공하였다. 이와 동시에 일찍이 개화운동과 언론활동에 활약해 오던 이동녕(李東寧) 등 30여 명의 지도급 인사들이 상해에 도착하였다.019019 洪淳鈺, 앞 글, pp.896~897.닫기 4월 8일에는 다시 서울에서 강대현(姜大鉉)이 파견되어 이동휘(李東輝)를 집정관으로 하는 한성정부의 명단과 임시헌법 초안을 가져왔으며, 또 이춘숙·이규갑 등도 상해로 왔다. 이리하여 상해에는 임시정부 수립의 기운이 점점 고조되어 갔다.
4월 9일 손정도·이광수의 건의로 말미암아 10일과 11일에는 프랑스 조계 김신부로(金神父路)에서 29명의 의원이 출석하여 임시의정원(의회)을 구성하여 이동녕을 의장으로 선출하였다. 또한 국호와 연호 및 관제를 결의하고 임시헌장 10개 조와 헌장 선포문을 결정하고는 이어서 선서문과 정강 6개 조를 통과시켰다. 4월 13일에는 이것들을 내외에 정식으로 공포하고 17일에 임시정부의 현판식을 거행하였다.
상해 임시정부가 위와 같이 보창로에서 독립임시사무소를 열고 비밀회담을 계속하는 과정에서 그 토의 내용은 주로 임시정부 조직을 중심으로 한 문제였는데 이에 관해서는 여러 가지 점에서 대립이 있었다.020020 金榮秀, 『大韓民國臨時政府憲法論』(三英社, 1980), pp.82~83.닫기 첫째, 임시정부의 주도권 문제로서 국내인사 측과 해외인사 측의 입장이 서로 달랐다. 둘째, 정부 수반의 결정에 있어서 신채호가 이승만 수반론을 격렬히 반대하였다. 셋째, 국호 문제로서 대한민국·조선공화국·고려공화국 등으로 의견이 서로 대립되었다. 마지막으로 구황실 우대문제에 대해서도 의견 대립이 있었다. 이런 문제를 토의한 결과 국호를 대한민국으로 정하고 1919년 4월 13일 드디어 독립운동의 구심단체로서 임시정부의 역사적인 출발을 보게 되었다.
의원내각제라고 할 수 있는 상해 임시정부의 정부형태를 살펴보면, 1919년 4월 10·11 양일 간의 제1차 대한민국 임시의정원회의에서 정부기구는 국무총리를 수반으로 하는 국무원 안에, 내무·외무·재무·법무·군무·교통의 6부를 두고 각 부에 총장·차장을 두도록 의결했다. 그리하여 국무총리인 이승만을 위시하여 각 부의 총장 차장을 투표로 선거하여 임시의정원과 정부의 각료를 구성하였다. 또한 특기할 만한 사항은 국무총리의 선거과정과 각료의 인선절차가 민주적 방법으로 진행됨으로서 우리 헌정사의 출발을 빛나게 하였다는 점이다.
이같이 열린 임시의정원 제1차 본회의를 통하여 이루어진 사항들은 독립운동사에 기록되는 역사적 사실로서 높이 평가되고 있다. 동시에 임정이 임시의정원에서 민주적이고 합법적인 절차에 따라 구성되었기 때문에 더욱 돋보이고 있다. 그런데도 안타까운 점은 세계 여러 국가들로부터 승인을 받지 못하였으며 더우기 광복 후 제헌국회에서도 사후 승인을 얻지 못했다는 것이다.
어쨌든 상해 임시정부는 7월에 분과위원회와 특별위원회를 구성하여 의회의 면모를 갖추게 됨으로써 의정원이 중심이 된 의원내각제의 형태를 취하게 되었다. 조소앙이 기초한 임시헌법안은 임시의정원에서 토의될 때 3인의 상임위원의 심의를 거쳐 본회의에 회부되었고 제 6조에 병역의무가 첨가되는 등의 수정을 거쳐 전문 10조의 임시헌장으로 통과되었다. 이렇게 제정된 임시헌장은 3·1운동이 언급된 헌장선포문과 본문 10개 조로 되어 간략하지만 민주주의 원칙에 입각한 한국 최초의 기본법적 성격을 갖는 헌법이었다. 그 자세한 내용들은 다음과 같다.

상해 임시정부 각료
임시의정원 의장:이동녕
임시정부 국무총리:이승만
내무총장:안창호내무차장:신익희법무총장:이시영
법무차장:남형우재무총장:최재형재무차장:이춘숙
외무총장:김규식외무차장:현순군무총장:이동휘
군무차장:조성환교통총장:문창범교통차장:선우혁
국무원비서:조소앙  
대한민국 임시헌장 선포문
신인일치로 중외협응하여 한성에서 기의한 지 30유여 일에 평화적 독립을 3백여 주에 광복하고 국민의 신임으로 완전히 다시 조직한 임시정부는 항구 완전한 자주독립의 복리로 아 자손 여민에 세전키 위하여 임시의정원의 결의로 임시헌장을 선포하노라.
대한민국 임시헌장021021 國會圖書館, 『大韓民國臨時政府 議政院文書』(1974), p.3.닫기
제1조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로 함.
제2조 대한민국은 임시정부가 임시의정원의 결의에 의하여 차를 통치함.
제3조 대한민국의 인민은 남녀 귀천 및 빈부의 계급이 무하고 일체 평등함.
제4조 대한민국의 인민은 종교·언론·저작·출판·결사·집회·신서·주소 이전·신체 및 소유의 자유를 향유함.
제5조 대한민국의 인민으로 공민자격이 유한 자는 선거권 및 피선거권이 유함.
제6조 대한민국의 인민은 교육·납세 및 병역의 의무가 유함.
제7조 대한민국은 신의 의사에 의하여 건국의 정신을 세계에 발휘하며 진하여 인류의 문화 및 평화에 공헌하기 위하여 국제연맹에 가입함.
제8조 대한민국은 구황실을 우대함.
제9조 생명형·신체형 및 공창제를 전폐함.
제10조 임시정부는 국토회복 후 만 1개년 내에 국회를 소집함.
대한민국 원년 4월 11일
임시의정원 의장 이동녕
임시정부 국무총리 이승만
내무총장 안창호
외무총장 김규식
법무총장 이시영
재무총장 최재형
군무총장 이동휘
교통총장 문창범

한편 대한민국임시정부 선서문과 6개 정강은 다음과 같다.

선서문
존경하고 열애하는 아 이천만 동포 국민이여, 민국 원년 3월 1일 아(我) 대한민족이 독립선언함으로부터 남과 여와 노와 소와 모든 계급과 모든 종파를 물론하고 일치하고 단결하여 동양의 독일인 일본의 비인도적 폭행 하에 극히 공명하게 극히 인욕(忍辱)하게 아(我) 민족의 독립과 자유를 갈망하는 실사와 정의와 인도를 애호하는 국민성을 표현한지라, 금에 세계의 동정이 합연(翕然)히 아(我) 국민에게 집중하였도다. 차시를 당하여 본 정부는 전국민의 위임을 수하여 조직되었나니, 본 정부는 전국민으로 더불어 전심하고 육력(戮力)하여 임시헌법과 국제도덕의 명하는 바를 준수하여 국토광복과 방기확고(邦基確固)의 대사명을 과하기를 차에 선언하노라. 국민 동포여 분기할지어다. 우리의 류(流)하는 일적(一滴)의 피가 자손만대의 자유와 복락의 값이요, 신(神)의 국의 건설의 귀한 기반이니라. 우리의 인도-마침내 일본의 야만을 교화할지요, 우리의 정의-마침내 일본의 폭력을 승할지니, 동포여 기(起)하여 최후의 일인까지 투쟁할지어다.
정강
1. 민족평등·국가평등 및 인류평등의 대를 선전함.
2. 외국인의 생명 재산을 보호함.
3. 일체 정치범인을 특사함.
4 외국에 대한 권리·의무는 민국정부와 체결하는 조약에 일의(一依)함.
5. 절대 독립을 서도(誓圖)함.
6. 임시정부의 법률을 위월하는 자는 적으로 인함.
대한민국 원년 4월 일
대한민국임시정부022022 金秉祚, 앞 책, pp.86~88.닫기

이상은 간략한 내용들이지만 헌법의 체제를 갖추었으며 국체와 정체를 민주공화제라고 한 것은 상당히 진보된 것으로 이는 3·1운동의 필연적 결과이며 혁명적 건국이라 할 수 있겠다. 그러면서도 구황실 우대 문제에023023 조완구 의원의 강력한 요구에 의해 초안에 빠졌던 것이 삽입되었다. 그러나 그 후의 헌법에서는 이 조항이 제외되었다.닫기 있어서는 정치사상적 측면에서 이론상 모순을 내포하고 있다. 이는 본국 국민들의 구황실에 대한 충성심 등으로 인해 반발될 수도 있는 불만을 해소하려는 정책적인 배려로 보인다.024024 孫世一, 「大韓民國臨時政府의 政治指導體系」, 『3·1運動 50周年紀念論集』, p.913.닫기
권력구조를 규정한 제2조를 볼 때 의회와 행정부의 구별을 두었는데 이는 여타 임시정부들과는 크게 다른 점으로서 사실상 임시의정원이 국정의 최고결정기관이 되고 있음이 그 후의 운영에서도 잘 나타난다. 제4조의 기본권 규정은 근대 헌법의 권리장전으로서 본 헌장의 핵심이 되며 선거권·피선거권, 국민의 3대 의무조항, 사형제도 폐지, 국제연맹 가입 등의 제 조항들은 진보된 민주정치의 사상적 표현이었다. 그리고 제10조의 규정은 당시 상해 임시의정원에 의해 성립된 임시정부가 전민족의 대표가 아닌 임시 의회에 의하여 구성되었기에 국권회복 후에 본국 국회에서 그 합법성을 찾으려는 노력의 소치이다.
결국 임시헌장 선포문은 3·1운동 정신을 계승하여 30여 일 후에 임시정부가 의정원의 결의로서 헌장을 선포하고 정부를 수립한다는 것이다. 또 헌장의 내용을 요약하면 간략하나마 헌법의 체제가 갖추어져 있는 민주주의 원리에 입각한 한국 최초의 기본 성문법이다. 이같은 민주공화제의 지도체제 하에서 언론인과 개화 민권운동가로 활약한 바 있는 이동녕이 초기에는 국무총리 대리로서 집무하였다. 4월 30일부터 5월 13일까지 개최된 제4회 의정원회의에는 수석국무위원 조완구가 시정방침을 피력하였다. 발전의 전기를 마련한 상해 임시정부는 청사도 처음의 장안리 460호에서 보강리의 3층 양옥으로 이전하여 집무를 계속하였다.
나라를 빼앗긴 지 10년 만에 중국 상해에서 수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는 비록 정식정부가 아닌 임시정부이지만 이는 당시 독립운동단체의 최고기관이었으며, 그 헌장은 우리의 독립을 위한 저항운동단체들에게 있어 최초의 실질적인 기본법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헌법체제상 임시헌법이라 하더라도 형식상에 있어 미비한 점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ㅁ. 신한민국 임시정부
1919년 4월 17일 철산·선천·의주·평양 지방에 살포된 비라를 일본 경찰이 수습, 조사하는 과정에서 밝혀진 정부형태가 신한민국임시정부이다.025025 金正明, 앞 책, p.22.닫기 이 문서의 제목은 「신한민국정부선언서(新韓民國政府宣言書)」로 되어 있는데 그 내용과 각료의 명단은 다음과 같다.

신한민국 정부 선언서
금일 오국(吾國)의 차거는 정당한 사명이요 필연의 요구이다. 이는 동양 영원의 평화를 유지하고 전화를 근절하기에 족한 원인의 발로이므로 이 책임이 중차대함은 물론 세계 평화상의 일대광명이다. 그러므로 정당하게 오인(吾人)의 중대한 책임을 신속히 진행키 위하여 차에 정부를 조직하고 약법 7개조를 규정하여 이를 세계에 선언 발포하는 것이다.
신한민국정부 각료026026 李鍾一, 앞 책, 1925년 1월 10일자.닫기
집정관:이동휘국방총리:이승만내무부장:(미정)
내무차장:조성환외무부장:박용만외무차장:김규식
재정부장:이시영재정차장:이춘숙교통부장:문창범
교통차장:이희경노동부장:안창호노동차장:민찬호

위와 같이 신한민국임시정부의 부서와 각료 명단에 나오는 대로 집정관·국방총리의 명칭이 한성정부의 집정관 총재·국무총리의 그것과 유사하다. 그러나 비라에 의해 비로서 밝혀진 조선민국임시정부에서는 각료의 절반이 국내인사였던 반면에 신한민국임시정부에 있어서는 집정관 이하 각 부의 부·차장을 모두 해외에 있는 인사로 구성하였다. 다만 한성정부와 다른 점이 있다면 신한민국임시정부에서는 집정관 총재가 집정관으로, 국무총리가 국방총리로 된 것으로 이승만과 이동휘가 서로 자리바꿈을 하는 데 지나지 않았다.
그리고 미정으로 되어 있는 내무부장 외에는 나머지 4개 부처의 장이 모두 동일하게 박용만·이시영·문창범·안창호 등이었다. 따라서 이 문서와 관련된 사람들은 한성정부 수립에 관련된 인물들 일 것이다. 이처럼 신한민국임시정부의 부서나 각료 명단이 한성정부와 유사하기는 하지만 누구에 의해서 입안되고 그 선언서를 누가 작성했는 지에 대해서는 분명치 않다. 결국 이 정부는 역시 실현되지 못한 채 끝난 단순한 지하정부였을 것으로 보인다.
ㅂ. 한성정부
한성정부는 비교적 늦게 그 성립이 발표된 정부이다. 3·1독립선언 이후 임시정부의 수립은 필연적이었다. 임시정부의 수립계획은 3월 초에 이교헌(李敎憲)·윤이병(尹履炳)·윤용주(尹龍周)·최현구(崔鉉九)·이용규(李容珪)·김규(金奎) 등이 이규갑(李奎甲)에게 임시정부의 수립 문제를 제의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027027 李奎甲, 「漢城臨時政府 樹立의 顚末」, 『新東亞』(1969. 4), p.176.닫기 이들의 권청(勸請)으로 각계의 대표로 추대된 자들은 4월 2일 인천 만국공원(현 자유공원)에 집합하여 임시정부의 수립을 선포할 것을 결의하였다. 여기에 참여한 이는 20여 명으로 천도교 대표 안상덕(安商悳)·야소교 대표 박용희(朴用熙)·장붕(張鵬)·이규갑과 유교대표 김규(金奎), 불교대표 이종욱(李鍾旭) 등이었다.028028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앞 책, p.134.닫기 그리하여 4월 중순에는 안상덕·현석칠(玄錫七) 등이 발기하여 국민대회를 소집하기로 했다. 13도 대표들은 서울 서린동 봉춘관에 모여 협의한 결과 간부 현석칠·안상덕 등과 학생 김사국(金思國)·장채극(張彩極) 등이 활약하여 국민대회를 서울에서 개최할 것을 의논하고 또 당일에 임시정부 각원(閣員)을 선거하기로 결의했다.
이어 4월 23일에는 봉춘관에 ‘국민대회’ 간판을 걸고029029 素石學人, 「己未年學生運動의 全貌」, 『朝鮮獨立運動秘史』第2輯(槿域出版社, 1946), pp.36~42 ; 張道斌, 『三·一獨立運動史』(國史院, 1960), p.83 참조.
일설에는 全協·崔益煥 등 大同團이 주체가 되어 정부를 수립하기로 하고 각원과 각도 대의사를 선거하였는데 조각이 된 곳은 서울 和泉町同和藥房閔橿의 집이었다고 한다(國史編纂委員會, 『資料大韓民國史』1, (探求堂 1968), p.455).
닫기
임시정부 포고문과 국민대회 취지서·결의사항을 발표했다. 또한 이승만을 집정관 총재로, 이동휘를 국무총리 총재로 하는 임시정부 각원과 파리평화회의 대표와 함께 약법(約法)과 임시정부령 제1호(납세를 거절하라는 내용)·제2호(적의 재판과 행정상 모든 명령을 거절하라는 내용) 등도 함께 발표하였다.030030 李延馥, 앞 글, pp.79~83 참조.닫기
약법의 내용을 보면 ① 국체는 민주제를 채용한다 ② 정체는 대의제를 채용한다 ③ 국시는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존중하고 세계평화의 행복을 증진하게 한다 ④ 임시정부는 일체내정(一切內政)·일체외교(一切外交)의 권한을 갖는다 ⑤ 조선 국민은 납세·병역의 의무가 있다 ⑥ 본 약법은 정식 국회를 소집하여 헌법을 반포할 때까지 적용한다는 것이었다. 이는 상해 임시정부의 임시헌장과 비교하면 다소 손색이 없지도 않지만 당시의 시대적 상황으로 보아 충분한 여유가 없었던 때문인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러한 한성정부는 연합통신(UP)에 보도됨으로써 국제적으로도 더욱 선전 효과를 갖게 되었다. 또한 한성정부가 서울에서 그것도 국민대회라는 국민적 절차에 의하여 조직되었다는 점은 후일 여러 정부의 통합과정에서 정통성을 확보하게 되는 중요한 구실을 하였다. 뿐만아니라 한성정부의 수립은 나아가서 상해임시정부의 조직을 촉구한 사실이다.031031 國會圖書館, 『大韓民國臨時政府 議政院文書』(1974), pp.401~402에 있는 민국 27년 4월 11일 제38차 의정원 개원식에서 신익희 내무부장이 행한 임시정부 성립 26주년 약사보고 내용 참조.닫기 상해임시정부의 성립과정을 자세히 살펴 보면 오히려 한성정부를 개조한 것 같은 인상이 짙기 때문이다. 한성정부의 각료명단은 다음과 같다.

한성임시정부 각료명단
집정관 총재:이승만
국무총리 총재:이동휘
외무총장:박용만내무총장:이동녕군무총장:노백린
재무총장:이시영법무총장:신규식학무총장:김규식
교통총장:문창범노동국총판:안창호참모부총장:류동열

전국 13도 대표로 구성되어 국민대회 명의로 구성된 이 한성정부의 조직을 보면 7부 1국과 평정관 18명을 두고 있다. 기구와 그 명단을 보면 집정관 총재·국무총리 총재 외에 7부 1국의 책임자인 총장·총판 등의 직명이 민주주의로 넘어가는 과도기적인 정체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군무부 외에 참모부를 설치하여 거기에 차장까지 선정한 것은 독립이라는 목적 달성을 위해 무장투쟁의 중요성을 부여한 때문일 것으로 생각된다.032032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앞 책, p.140.닫기
각료의 명단에서 특기할 만한 것은 한성정부가 국내에서 조직된 임시정부임에도 불구하고 집정관 총재를 비롯하여 행정 각부 총장·차장에 국내인사가 한 명도 포함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일제의 무단 통치로 인해 국내의 독립운동이 어려웠기 때문에 해외에서 활동이 이루어질 것으로 예측했기 때문인 것이다.033033 金榮秀, 앞 글, pp.89~90.닫기 다음은 한성정부의 국민대회 취지서 전문이다.

국민대회 취지서
아조선민족은 과반(過般) 손병희 씨 등 33인을 대표로 정의와 인도를 기초로 하여 조선 독립을 선언한지라. 이제 그 선언의 권위를 존중하고 독립의 기초를 공고케 하며 인간 필연의 요구에 수응(酬應)하게 하기 위하여 민족일치의 동작으로 대소(大小)의 단결과 각지방 대표들을 합하여 본회를 조직하고 차를 세계에 선포하노라, 세계평화를 위협하던 군국주의는 정의와 인도 아래 굴복하여 영원한 평화로 세계를 개조하려는 차제에 있어서도 일본만이 반성이 없을 것인가, 정의와 인도로 용진하는 우리 겨레 앞에 무슨 적이 있으리오, 다만 최대의 성의와 최선의 노력으로 국가적 독립과 민족적 자유를 세계에 주장하노라.
약법
1. 국체는 민주제를 채용
2. 정체는 대의제를 채용
3. 국시는 국민의 자유와 권리의 존중 및 세계평화에의 공헌
4. 정부의 권한은 일체 내정과 일체 외교
5. 국민의 의무는 납세 및 병역
6. 본 약법은 정식 국회를 소집하여 헌법을 반포할 때까지 적용할 것

위와 같은 한성정부의 약법은 대한국민의회 정부의 결의문보다는 진보된 헌법이지만 상해임시정부의 헌장에 비해서는 국가의 기본법으로서 미비하다. 국체는 민주제, 정체는 대의제라는 양 조항은 오늘날 민주정치의 본질이라 할 수 있는 인민의 기본권·권력분립·대의제 등과 비교하면 논리에 어긋나고 있다. 또 인민의 기본권으로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존중하고 세계평화와 행복을 증진하는 것이 국시라고 규정했으나 그 자유와 권리의 구체적 규정은 없이, 국민의 의무로서 납세와 병역을 명시하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정부의 권한은 정식 국회가 소집되어 헌법을 반포할 때까지 전권이 위임되어 있다. 이후 국민대회가 소집되지 않았으므로 이론상 1948년 제헌국회가 헌법을 제정하기까지 이승만 집정관 총재가 전권을 위임받은 셈이었다.034034 金榮秀, 「上海臨時政府의 憲法에 관한 硏究」, 『論文集』第2卷 第2號(忠南大 社會科學硏究所, 1975), p.6.닫기
이상 약법의 특징은 의회가 없다는 것과 국가 독립이 완성되어 정식 정부가 생길 때까지 이승만 독주의 길을 마련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비록 한성정부가 상해 임시정부와 노령 국민의회와는 달리 지하조직으로 구성된 것이고 그 약법이 상해임시정부의 임시헌장에 비해 기본법으로서 또한 미약하다고 해도 전국 13도 대표로 구성된 국민대회의 명의로 정부가 조직되고 그에 의해서 제정된 헌법이기 때문에 정통정부라는 점에서는 다른 임시정부보다 그 지위가 공고하였다.035035 金榮秀, 『大韓民國臨時政府憲法論』, p.92.닫기
ㅅ. 고려임시정부
고려임시정부는 1919년 4월 15일 『길림신공화보(吉林新共和報)』에 게재되어036036 金正明, 앞 책, p.805.닫기 총독부 등 일제의 각 기관에 보고됨으로써 알려진 정부이다. 여기에 의하면 도문강(圖們江) 방면에 고려임시정부를 조직하고 이동휘를 총통, 이승만을 국무총리, 안창호를 내무, 김규식을 외무, 이시영을 재무, 문창범을 교통에 각각 임명하였다는 것이다.
ㅇ. 임시대한공화정부
임시대한공화정부는 김영우의 『대한독립혈전기』에 나타나 있다.037037 國史編纂委員會, 『韓國獨立運動史 : 資料 4, 臨政篇 Ⅳ』(1968), pp.335~336.닫기 1919년 3월 29일 상해에 있는 현순으로부터 국민총회에 보낸 전보에 의하면 이 정부는 한·청·러 3국이 접계되는 간도에서 조직되었는데 대통령 에 손병희, 부통령에 박영효 그리고 국무급에 해당되는 외무총장에 이승만, 내무총장에 안창호, 탁지총장에 윤현진, 사법총장에 남형우, 군무총장에 이동휘, 참모총장에 류동열, 평화대사에 진정원을 선임하였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를 노령정부와 비교해 보면 이승만이 국무총리(노령정부)에서 국무급인 외무총장으로, 남형우가 산업총장에서 사법총장으로 된 것 외에 노령정부에서는 강화대사였던 김규식이 여기에서는 평화대사의 진정원으로 바뀌었을 뿐이다. 따라서 임시대한공화정부와 노령정부와의 관계도 어느 정도 연결지어 생각할 수 있을 것 같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3·1운동 이후 한민족의 의식구조는 군주제로부터 과감히 탈피하여 세계사적 조류에 따라 민주정부를 수립하려는 새로운 가치체계가 형성되고 있었다. 8개의 임시정부를 근간으로 하여 의회(임시의정원)와 정부(국무원)를 구성하는 민주의식이 팽배해 있었다. 또한 민주정부를 구성하는데 있어서도 헌법·정강·선언문·취지서·결의문·선포문 등을 통한 과감한 제도적 변혁을 기하고 있었다. 이러한 가치관은 곧 국민국가를 지향하는 개화의식의 성장을 뜻하며 이 시기에 이를 완수코자 하는 강렬한 움직임이 민주공화정부의 탄생을 현실화시키게 한 것이다.
국내외 각지에 성립된 8개의 임시정부 가운데 실질적으로 활동한 것은 대한국민의회·상해임시정부·한성정부 뿐이었다. 이들 임시정부의 성격은 각각 차이점도 있지만 다음과 같은 몇 가지의 공통점도 발견할 수 있다. 첫째, 민족지도자로서 저명인사라면 본인의 의사에 개의치 않고 능력과 전공분야에 따라 각원으로 추대되었다. 특히 이승만은 한성정부에서는 집정관 총재로 상해와 노령정부에서는 국무총리로 추대되어 행정 수반이 되었다. 둘째, 불완전하지만 한결같이 민주공화제라는 민간주도적 국민국가 즉 민주주의를 표방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실로 혁명적인 전환이라 할 수 있는 것으로 당시의 일반적 사조가 민주주의 이념이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즉 왕정(王政)을 복고하자는 정부형태는 하나도 출현하지 않았던 것이다. 셋째, 8개 처의 임시정부 가운데 5개 처의 정부에서는 파리강화회의에 큰 기대를 걸고 대표를 파견하여 독립을 청원하고자 했다. 더구나 상해임시정부의 임시헌장에는 국제연맹에 가입할 것 까지를 명시하고 있었다. 그러나 전승국들의 이익분배를 위한 회합인 파리강화회의에 관한 불확실한 정보와 지나친 기대는 민족독립 지도자들로 하여금 곧 실망과 환멸을 갖게 했을 뿐이다. 넷째, 각 임시정부는 각각의 정부 성립이 동양과 세계평화에 기여함이 적지 않을 것이며 이를 위해 지속적으로 노력할 것도 천명하였다. 우리 민족의 강인성과 자립의지를 표방하여 평화와 정의의 사도임을 알리고자 애썼다. 다섯째, 3·1운동 때의 독립선언서는 민족의 웅혼한 자주독립정신을 구현하면서 민족자존성·조국사상·자유주의·세계에의 의무·세계평화의 확립 등을 이상으로 한 국내에서의 독립투쟁의 행동지침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하여 3·1운동의 정신적 산물인 임시정부와 그들의 약법·헌장 또는 결의안들은 형식적으로 망명정부의 성격을 지닌 임시정부의 임시헌장으로 이해하기보다는 실질적으로 독립운동을 하기 위한 조직적인 저항운동 단체의 기본법으로서 독립운동의 행동강령이요, 투쟁지침이며 동시에 해외에 있는 독립운동단체를 위한 헌법률이었다고 볼 수 있다.
비록 임시정부 수립 초기에 있어 지사들이 지리적 여건과 일제의 감시·탄압·검거 등으로 민주주의를 표방하는 여러 가지 형태의 정부를 각 처에서 수립할 수 밖에 없었다고 하더라도 위와 같이 서로 유사점을 갖고 있었기에 후일 각 임시정부는 통합이 가능했던 것이다. 여러 갈래의 임시정부 수립은 항일투쟁에 있어서 분산과 혼란, 통일의 약화를 초래할 뿐더러 대외적으로도 통일된 정치역량에 의구심을 갖게 하는 것이므로 이들의 통합은 당연한 과제로 요청되었다.

註 001
: 李炫熙, 『三·一獨立運動과 臨時政府의 法統性』(東方圖書, 1987), p.31.
註 002
: 李炫熙, 앞 책, pp.13~21.
註 003
: 李炫熙, 『韓國近代女性開化史』(三友出版社, 1978), pp.250~267.
註 004
: 衛, 「三·一運動의 意義」, 『獨立評論』(重慶 : 韓國獨立黨, 1944. 3. 1.), 秋憲樹 編, 『資料韓國獨立運動』Ⅰ(延世大學校出版部, 1971), pp.294~296.
註 005
: 1917년 신규식·조소앙 등 소장인사가 국민주권설을 이론적으로 정립하고 박은식·신채호·박용만 등 종래 신한청년당 선배들의 지도를 받으며 망명 정부 계획을 전환하여 임시정부 수립을 제창한 「大同團結宣言」을 발표하는 등 이미 3·1운동이전에 임시정부 수립을 위한 계획이 있었다. 이「宣言」의 계획은 당장 실현되지 못하였으나 임시정부 수립의 이론적 모체가 되어 1919년 8개의 임시정부를 탄생시키기에 이르렀다(趙東杰, 「臨時政府 樹立을 위한 1917년의 大同團結宣言」, 『韓國學論叢』第9輯(國民大學韓國學硏究所, 1987) 참조).
註 006
: 1864년 이래 韓人들은 기근 때문에 황무지 개척을 위해 많이 이주했다.
註 007
: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4(독립유공자사업기금운용위원회, 1972), p.55.
註 008
: 金俊燁·金昌順 共著, 『韓國共產主義運動史』Ⅰ(高麗大學校亞細亞問題硏究所, 1967), p.88.
註 009
: 임시정부파리위원회, 「歐洲의 우리 事業」, 『新東亞』(1987. 8)에 의하면 윤해·고창일은 2월 5일에 해삼위를 출발, 9월 26일 파리에 도착하여 파리위원부와 합동으로 집무했다고 한다.
註 010
: 金秉祚, 『韓國獨立運動史略』上篇(上海 : 宣言社, 1922), pp.55~60.
註 011
: 김원용, 『재미한인 50년사』(California : 1959), p.452.
註 012
: 趙東杰, 「大韓民國臨時政府」, 『한국사』21(국사편찬위원회, 1976), pp.200~207.
註 013
: 李鍾一, 『默菴備忘錄』, 1925年 1月 15日字.
註 014
: 金正明, 『朝鮮獨立運動』Ⅱ(東京 : 原書房, 1967), pp.13~17.
註 015
: 李相玉, 「三·一運動 당시의 流言」, 『三·一運動 50周年紀念論集』(東亞日報社, 1969), p.381.
註 016
: 김원용, 앞 책, p.452.
註 017
: 洪淳鈺, 「漢城·上海·露領 臨時政府의 統合過程」, 『三·一運動 50周年紀念論集』, p.896.
註 018
: 李延馥, 「大韓民國臨時政府의 成長過程」, 『慶熙史學』第1輯 (慶熙大史學會, 1967), pp.84~86 ; 朴殷植, 『韓國獨立運動之血史』下(上海 : 維新社, 1920), p.56.
註 019
: 洪淳鈺, 앞 글, pp.896~897.
註 020
: 金榮秀, 『大韓民國臨時政府憲法論』(三英社, 1980), pp.82~83.
註 021
: 國會圖書館, 『大韓民國臨時政府 議政院文書』(1974), p.3.
註 022
: 金秉祚, 앞 책, pp.86~88.
註 023
: 조완구 의원의 강력한 요구에 의해 초안에 빠졌던 것이 삽입되었다. 그러나 그 후의 헌법에서는 이 조항이 제외되었다.
註 024
: 孫世一, 「大韓民國臨時政府의 政治指導體系」, 『3·1運動 50周年紀念論集』, p.913.
註 025
: 金正明, 앞 책, p.22.
註 026
: 李鍾一, 앞 책, 1925년 1월 10일자.
註 027
: 李奎甲, 「漢城臨時政府 樹立의 顚末」, 『新東亞』(1969. 4), p.176.
註 028
: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앞 책, p.134.
註 029
: 素石學人, 「己未年學生運動의 全貌」, 『朝鮮獨立運動秘史』第2輯(槿域出版社, 1946), pp.36~42 ; 張道斌, 『三·一獨立運動史』(國史院, 1960), p.83 참조.
일설에는 全協·崔益煥 등 大同團이 주체가 되어 정부를 수립하기로 하고 각원과 각도 대의사를 선거하였는데 조각이 된 곳은 서울 和泉町同和藥房閔橿의 집이었다고 한다(國史編纂委員會, 『資料大韓民國史』1, (探求堂 1968), p.455).
註 030
: 李延馥, 앞 글, pp.79~83 참조.
註 031
: 國會圖書館, 『大韓民國臨時政府 議政院文書』(1974), pp.401~402에 있는 민국 27년 4월 11일 제38차 의정원 개원식에서 신익희 내무부장이 행한 임시정부 성립 26주년 약사보고 내용 참조.
註 032
: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앞 책, p.140.
註 033
: 金榮秀, 앞 글, pp.89~90.
註 034
: 金榮秀, 「上海臨時政府의 憲法에 관한 硏究」, 『論文集』第2卷 第2號(忠南大 社會科學硏究所, 1975), p.6.
註 035
: 金榮秀, 『大韓民國臨時政府憲法論』, p.92.
註 036
: 金正明, 앞 책, p.805.
註 037
: 國史編纂委員會, 『韓國獨立運動史 : 資料 4, 臨政篇 Ⅳ』(1968), pp.335~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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