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통합정부의 수립

3·1운동을 전후로 하여 국내외에는 앞에서 살펴본 대로 8개 처에서 임시정부가 국가적 형태를 갖고 수립되거나 준비단계에 있었다. 그 가운데서도 중심을 이루는 정부는 노령의 대한국민의회정부·상해의 대한민국임시정부·한성임시정부 등 3개 처였다.038038 金榮秀, 『大韓民國臨時政府憲法論』, p.92.닫기 그러나 문제는 이들 3개 처의 임시정부가 대동단결해서 단일 민주정부를 수립하여 대외적으로 새로운 광복운동의 구심체로서의 역할을 수행하는 데 있었다.
분산보다는 통일이 항일독립투쟁에 효과가 있고 정부차원으로 이어지기 때문에 3개 임시정부 요인들 사이에는 통합된 단일정부가 적극적으로 논의되었다. 더우기 3개의 독립기구로서의 임시정부 형태가 노출되고 인적 교류가 확대·심화되면서부터는 어차피 통일되지 않고서는 민족의 힘의 과시가 이루어지지 못하리라는 현실을 절감했던 것이다.
(1)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노령정부의 통합
1919년 3월 하순부터 상해에서 임시정부 수립문제가 논의되기 시작할 무렵에 노령의 이동녕·조완구·조성환과 서간도·길림의 김동삼·이시영·조소앙 등 30여 명이 상해에 도착하였다. 이들은 이미 여운형이 노령·만주로 갔던 당시에 상해에 오기로 약속했거나 그 후에 서신 연락으로 집결하게 된 것이다. 4월 8일에는 서울에 있는 독립단 본부에서 파견된 강대현(姜大鉉)이 이동휘를 집정관으로 하는 각료 명단과 임정 헌법 초안을 가져 왔다. 이리하여 4월 10일에 임시의정원을 개회하고 의장에 이동녕, 부의장에 손정도를 선출한 후 11일에는 관제를 집정관제에서 총리제로 바꿔서 임시정부를 조직했다. 그리고 13일에 상해임시정부의 수립을 내외에 선포했다.
〈표 1〉 각 임시정부 각료 및 요인 명단
정부 (공표일자) (장소)/직명대한국민의회(1919. 3. 21 노령)조선민국임시정부(1919. 4. 10 서울)대한민국임시정부 (1919. 4. 13 상해)신한민국정부(1919. 4. 17 평안)한성정부(세칭)(1919. 4. 23 서울)대한민간정부(1919. 4. 1 기호)임시대한공화정부(1919. 3. 29 간도)고려임시정부(1919. 4. 간도)
대통령손병희손병희(정도령) 이동휘(집정관)이승만(집정관총재)손병희손병희이동휘(총통)
부통령박영효이승만(부도령)   오세창박영효 
국무총리이승만이승만(내각총무)이승만이승만(국방총리)이동휘(국무총리총재)이승만이승만(국무급 외무총장)이승만
외무 민찬호김규식박용만박용만김윤식 김규식
내무안창호김윤식안창호(미정)이동녕이동녕안창호안창호
군무이동휘노백린이동휘 노백린노백린이동휘 
재무 이상최재형이시영이시영권동진  
법무 윤익선이시영 신규식이시영남형우(사법총장)이시영
학무 안창호  김규식안창호  
교통 조용은문창범(전임-신석우)문창범문창범박용만 문창범
산업남형우오세창      
탁지윤현진     윤현진 
노동   안창호안창호문창범  
참모류동열   류동열 류동열 
의정     김규식  
총무     최린  
강화대사김규식 (윤해·고창일)이승만 민찬호  이승만 민찬호 안창호 박용만 이동휘 김규식 노백린 진정원 (평화대사) 
   〈의정원의원〉
현순 손정도 신익희 조성환 이광 이광수 최근우 백남칠 조소앙 김대지 남형우 이회영 이시영 이동녕 조완구 신채호 김철 선우혁 한진교 진희창 신철 이영근 신석우 조동진 조동우 여운형 여운홍 현창운 김동삼
 〈평정관〉
조정구 박은식 현상건 한남수 손진형 신채호 정양필 현순 손정도 정현식 김진용 조성환 이규풍 박경종 박찬익 이범윤 이규갑 윤해
〈13도 대표〉
조(이)만식 이용규 강훈 김유 최전구 이내수 류식 김명선 기식 김탁 박한영 이종욱 류근 주익 김현준 박장호 송지헌 강지형 홍성욱 정담교 이용준 이동욱 장성 장근 박탁
   
자료:김원용, 『재미한인 50년사』, p.452 ; 金正明, 『朝鮮獨立運動』Ⅱ, p.16, pp.19~20, p.22, p.805;『朝鮮民族運動年鑑』, pp.3~4 ; 『默菴備忘錄』, 1925年 1月 10日字 ; 『韓國獨立史 資料 臨政篇』, pp.375참조.
대한국민의회의 원세훈(元世勳)은 4월 15일 대한국민의회와 임시의정원을 병합하고 정부의 위치를 노령으로 하자고 제의하였다.039039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자료집』7(독립유공자사업기금운용위원회, 1973), p.1140.닫기 뒤이어 5월 초, 원세훈은 다시 노령 방면의 특사로 와서 외교부와 교통부만 상해에 남기고 나머지는 모두 길림 또는 시베리아로 옮기자고 제안하였으나 상해 측에서는 의논 끝에 결국 정부는 상해에 두기로 결정했다. 이 까닭은 노령에는 많은 교포가 살고 있다고 하나 일본 관헌의 세력범위가 미치므로 그 해를 입을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이어 5월 13일, 임시의정원에서는 국민의회를 의정원에 통합할 것을 결정하고040040 在上海日本總領事館警察部 編, 『朝鮮民族運動年鑑』, 1919년 5월 13일.닫기 임시정부로 하여금 국민의회측에 파원 조사한 후 안건을 의정원에 제출하도록 가결하였다. 이것이 제4회 임시의정원에서의 결정사항들이었다.
7월 10일 제5회 의정원회의에서는 정부 측의 제의로 첫째, 임시정부의 위치를 상해에 두되 단 정부의 의사 및 거류민의 여론에 따라 위치 변경할 수도 있음 둘째, 임시의정원과 국민의회를 통합하여 의회를 조직하되 노령 측에서 이 의회의 위치를 노령에 둘 것을 절대 주장할 때에는 이를 허용함 셋째, 의원은 단순한 의사기관만 될 것 -노령국민의회가 이 셋째 성질을 지녔으므로- 등의 내용을 가결시켰다.041041 在上海日本總領事館警察部 編, 앞 책, 1919년 7월 11일.닫기 이 통합안은 의회의 위치 문제를 제외하고는 이후 상해임시정부의 기본입장이 되었다. 즉 당시 임정 관계자들은 노령국민의회와의 통합에 상당히 융통성있는 태도를 보였다.
한편 임시정부의 위치에 대한 상해 측과 노령 측의 대립은 독립운동의 최고지도부를 어디에 설치하느냐의 문제로 이는 양측의 독립운동 노선의 차이를 말해주는 것이었다. 상해 측이 임시정부의 존속을 위한 안전 문제와 각지와의 연락을 강조하여 대한국민의회에 속한 함경도 출신의 편중성을 비판했던 반면, 노령 측은 임시정부의 안전문제를 무시하는 것은 아니지만, 노령·중국과 국내 한인과의 직접적인 연락을 중시하여 상해는 프랑스 조계로서 유명무실하다고 반박하였다.
대한국민의회와 상해임시정부의 통합에 박차를 가한 것은 5월 25일 미국에서 도착한 안창호였다. 그는 상해임시정부의 내무총장으로 취임하면서 각지의 수령들을 한 자리에 모으는 일을 적극 추진하였고 특히 대한국민의회와의 통합에 노력하였다.042042 주요한, 『安島山全書』(三中堂, 1963), pp.196~197.닫기
이와 같이 노령 국민의회와 상해 임시의정원의 통합문제가 진행되고 있는 동안, 상해 정가에서는 안창호를 중심으로 한 정부 관계자들은 각 지방 출신 인사들의 의견을 타진한 후 노령·중국 지역에 대표를 파견해서 의견 차이를 조정한 결과 타협안으로서 다음과 같은 의결사항이 나왔다.043043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자료집』8(1973), p.858.닫기

1. ‘상해’와 ‘노령’에서 설립한 정부들을 일제 작소하고 오직 국내에서 13도 대표가 창설한 ‘한성정부’를 계승할 것이니 국내의 13도 대표가 민족 전체의 대표인 것을 인정한다.
2. 정부의 위원은 아직 ‘상해’에 둘 것이니 각지에 연락이 비교적 편리한 까닭이다.
3. 상해에서 설립한 정부의 제도와 인선을 작소한 후에 한성정부의 집정관 총재 제도와 그 인선을 채용하되 ‘상해’에서 정부 설립 이래 실시한 행정은 그대로 유효로 인정할 것이다.
4. 정부의 명칭은 대한민국임시정부라 할 것이니 독립선언 이후에 각지를 원만히 대표하여 설립된 정부의 역사적 사실을 살리기 위함이다.
5. 현임 정부 각원은 일제히 퇴직하고 ‘한성정부’가 택선한 각원들이 정부를 인계할 것이다.

안창호는 노령 대표로 상해에 와 있던 원세훈으로부터 위 통일안에 대한 국무회의의 의결에서 동의를 얻었다. 위 통일안이 최종 마무리된 시기는 현순·김성겸이 노령으로 파견된 8월 20일 전후로 여겨진다.044044 在上海日本總領事館警察部, 앞 책, p.26.닫기 결국 교섭을 받은 이동휘가 국민의회 의원의 4/5가 상해 의정원 의원에 흡수된다고 국민의회에서 설명하고 나서야 비로소 국민의회가 해산되었다고 한다.045045 주요한, 『安島山全書』, p.214.닫기 상해 측의 그러한 태도를 노령 측에서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은 상해에서 조직된 대한민국임시정부가 노령 국민의회의 정부명단에도 있는 이승만·안창호·이동휘 등 세거두를 모두 포함했을 뿐 아니라 동시에 노령 방면 지도자 가운데 최재형·문창범을 재무총장과 교통총장으로 흡수하고 있었기에 의회 통합에 비교적 융통성을 보일 수 있었다고 생각된다. 결국 9월 8일 노령의 실력자이며 독립운동의 선구자인 이동휘가 통합정부의 국무총리에 취임하기 위해 상해에 도착함으로써 노령정부와의 통합이 성사되었다.
그런데 노령에서는 그 후 상해정부가 한성정부를 승인치 않고 개조하여 약속을 어겼다고 하면서 국민의회를 부활하고 다음 해 4월에 다시 문창범이 단체를 활성화시키려고 했으나, 곧 그 세력이 축소되고 존재도 사라졌다.046046 大韓國民議會는 그 후 1920년 2월 15일 復元을 선언하고 브라고웨시첸스크로 이전하여 共產主義的 조직으로 변모하였으며 1921년 6월에 자연 해소되었다(潘炳律, 「大韓國民議會의 組織과 活動」(漢陽大 碩士學位論文, 1986), 참조).닫기 이렇게 하여 상해 임시의정원은 독립운동 과정에서 유일한 권위를 가지는 명실상부한 최고의정기관이 되는 길을 마련했다.
(2)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한성정부의 통합
정부가 복수로 존재한다는 것은 대내·대외적으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러한 까닭에 노령의 대한국민의회와의 통합 교섭이 진행되어 대한국민의회가 해산되었다. 그러나 아직도 통일적이고 구체적인 항일투쟁을 전개하기에는 여러 가지 어려움과 혼란이 중첩되어 있었다. 여기에 미주의 교포들이 한성정부를 중시하여 이른바 정통론을 들고 나오게 되자 통일적인 개조가 불가피하였다.047047 國史編纂委員會, 『韓國獨立運動史』三(1967), p.22.닫기
상해정부를 개조한다는 것은 행동성이 없는, 즉 의회가 없는 한성정부와 행동성이 있는 즉 의회가 있는 상해정부 측이 일체화를 위하여 행하는 기술적인 수단에 불과한 것이다. 명분상으로 아무리 활동적이고 정열적인 활동인물이 상해에 많이 모여 세운 정부라 하더라도 이국에 유랑하는 신세로서는 지하에서나마 조국내지(祖國內地)의 수도에서 전국 13도민 대표대회가 수립한 정부에 대하여 권위의 압박을 느끼지 않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국내에서 선포되었던 국민대회정부와 상해임시정부와의 통합문제는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국내에서 정부조직을 주도하던 인사들과 상해 방면과는 일찍이 연락이 있었으며, 도중에 국내의 많은 인사들이 상해로 나가 그 곳 임시의정원이나 정부조직에도 참여했기 때문에 실제 상해의 대한민국임시정부 조직 내에서는 국내인사들의 의사가 많이 반영되었고 또한 4월 8일에는 서울에서 강대현을 파견하여 이동휘를 집정관으로 하는 각원 명단과 임시헌법안을 가져온 바 있기 때문이다.048048 이 각료 명단과 임시헌법 초안은 최종적인 명단은 아니었다.닫기 실제 서울에서 정부를 조직함에 있어서도 처음부터 정부는 해외에 있어야 한다는 뜻에서 해외인사를 망라하여 내각을 구성하였기에 정부의 위치를 상해에 둔다는 점에서는 이견이 없었다. 처음부터 서울에서 정부조직을 한 것은 결코 상해에 있는 대한민국임시정부와의 대립을 위해서가 아니라 단지 일찍이 대표자들 사이에 비밀리 진행되어 오던 정부수립 계획이 구체화되어 현실로 나타난 것일 뿐이었다.
양정부를 일체화하는 구체적 작업은 제6회 임시의정원회의에 정부가 제출한 헌법개정안과 정부개조안에서 시작되었다. 8월 28일 정부 제안으로 임시헌법개정안과 임시정부개조안을 상정하였는데 그 특징은 대통령만 의정원에서 선출하고 각 국무원은 대통령이 임명하는 동시에 주권행사도 대통령에게 위임하는 것이었다. 국민의회와 함께 상해정부를 폐쇄하여 한성정부를 계승할 것과 현재의 정부 각원은 일체 퇴직하고 한성정부의 각원들이 정부를 인계한다는 타협안은 기술적으로는 상해정부를 개조하고 그 법적인 뒷받침으로는 헌법의 행정부 편제를 한성정부 식으로 확정하여 이승만을 수반으로 선출하는 방법을 취하게 한 것이다.
제6차 임시의정원은 공석이었던 부의장에 정인과(鄭仁果)를 선출하고 상임위원회를 조직하는 등의 자체 정비를 끝내고 정부 제출의 개헌안과 정부개조안을 토의하였다.049049 『獨立新聞』제4호(1919년 9월 2일)와 『大韓民國臨時政府議政院文書』, p.60에 의하면 이러한 개헌안과 정부개조안의 제안 이유에 대해,
…4월 23일 한성에서 조직 발표한 일 정부 名이 거연히 海內外에 선전되는 기관이 생하여 聞者無奈로 그 정부의 존재를 疑치 아니치 못하게 되었으며 以하여 내치외교의 제정무 더욱 因苦를 극하는 경우에 陷한지라. …기응의 도를 취하여 능히 화를 전하여 복을 위하는 計를 득하고저 한다고 하였다… 라고 설명하고 있다.
닫기
그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1. 제도를 변경하여 총리제를 대통령제로 하고 현 국무총리 이승만 박사를 대통령으로 선거할 일
2. 조직을 확장하여 행정 6부를 7부1국으로 하고 좌와 여히 총리·총장 및 총판을 선임할 일
국무총리:이동휘내무총장:이동녕외무총장:박용만
군무총장:노백린재무총장:이시영법무총장:신규식
학무총장:김규식교통총장:문창범노동총판:안창호

이 안건은 8월 28일 의정원 회의에서 부의되어 안창호의 간곡한 설명 연설이 있었고, 9월 6일 정부 원안대로 임시헌법 개정안을 만장일치로 통과시켰으며,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선임하였다.050050 『獨立新聞』제4호(1919년 9월 2일), 제7호(1919년 9월 9일).닫기 그리고 이어 9월 11일 새 헌법과 함께 국무원의 명단이 발표되고,051051
상해정부와 한성정부의 일체화(정부개조)
職名\政府名上海政府漢城政府統合政府
執政官總裁(大統領) 李承晚(執政官總裁)李承晚(大統領)
國務總理(總裁)李承晚李東輝李東輝
內務總長安昌浩李東寧李東寧
外務總長金奎植朴容萬朴容萬
軍務總長李東輝盧伯麟盧伯麟
財務總長崔在亨李始榮李始榮
法務總長李始榮申圭植申圭植
學務總長 金奎植金奎序
交通總長文昌範文昌範文昌範
勞動局總辨 安昌浩安昌浩
參謀部總長 柳東說 
李延馥, 『大韓民國臨時政府(1919~1948)硏究 : 그 組織과 活動을 중심으로』 (慶熙大, 1982), p.21.
닫기
9월 15일을 신(통합)임시정부의 시정일(始政日)로 발표(공보 호외)하였다.052052 『獨立新聞』제10호(1919년 9월 18일).닫기
상해정부가 한성정부와 일체화되기 위해서는 정부의 설명대로 최소한 행정 각부 편제와 각료 명단이 일치해야 했다. 그러나 일체화를 위하여 상해정부를 개조하면서 제안자 대표였던 안창호가 내무총장에서 노동국총판으로 격하되었기에 일어날 동요를 우려한 나머지 노동국을 농무부로 고치자는 안건이 나와 혼란이 있기도 했다. 그러나 결국 한성정부의 집정관 총재를 대통령으로 고치는 외에는 일체 고칠 수 없다는 원칙이 노동국 개편론에서도 엄격히 지켜지게 되었다. 이것은 한편으로 한성정부를 이끄는 이승만이 미국에서 자신의 칭호를 ‘프레즈던트’로 사용하였는데 이를 시정하라는 상해정부의 권고에도 불구하고 고칠 수 없다는 이승만의 태도를 정당화시켜 주는 데 그 의도가 있었을 뿐이었다. 개헌과 정부개조의 최대난점은 오히려 이 호칭 문제에 있었던 것이다. 어쨌든 개헌으로 인해 한성정부와 상해정부가 일체화되고 이승만의 대외적인 칭호 문제를 해결하여 정치적인 잡음을 해소시킴에 따라 이승만이 곧 상해정부의 대통령으로 취임하게 되는 길을 열게 된 것이다. 이리하여 3·1운동으로부터 6개월 여의 진통을 겪고 우리의 유일한 정통 정부가 수립되었다. 박은식의 『한국독립운동지혈사』에 의하면 이미 1918년 10월 서울에서 독립운동의 본부가 탄생되었다고 했는데 이로부터 보면 11개월 만에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출범하게 된 것이다.
우리의 3·1운동정신에 들어 있는 핵심은 건국정신이다. 유생이나 유교의식을 바탕으로 한 군인들에 의한 의병시대에는 조선왕조를 지주로 삼고자 하는 정신이 있었다. 그러나 3·1운동 이후에는 그것과는 다른 국면으로서 대중에게 전파되어 갔던 천도교나 기독교를 매개로 하여 민족주의 정신이 발로되었다. 왕이나 재상이나 장군에 의한 시대가 아니고 국민들·민중들에 의해 역사가 창조되는 시대가 열린 것이다. 즉 3·1운동의 정신은 ‘주권재민’의 이념을 확실히 드러내 주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3·1정신을 계승하여 상해에 수립된 임시정부는 노령의 국민의회를 흡수하고 또한 자신을 개조하여 한성정부와 일체화함으로써 국내외에서 독립운동을 지도하는 최고기관으로서 계속 존속하게 되었다. 그렇게 된 데에는 다음과 같은 점에서 이유를 찾을 수 있겠다.053053 金榮秀, 『大韓民國臨時政府憲法論』, pp.103~104.닫기 즉 첫째, 상해는 지정학상의 이점이 있으며 둘째, 상해는 독립운동이 자유로운 보장을 받을 수 있었기에 많은 인재들이 모여 민족주의운동의 전략중심이 되었으며054054 胡春惠 著, 辛勝夏 譯, 『中國안의 韓國獨立運動』(檀國大學校出版部, 1978), p.21.닫기 셋째, 당시 중국이 우리와 같은 정치적 운명으로서 일제의 침략을 당하고 있었기에 한국의 독립운동과는 밀접한 관계에 놓여 있었으며 넷째, 정부기구 상에 있어서의 장점으로 우리정부는 중국에 위치했던 만큼 중국 혁명정부의 제도를 많이 모방했고 러시아의 영향도 중국국민당을 통해 받았을 것이다. 이에 비해 중국정부는 의정원을 갖지 못했다. 이로써 보면 비록 정식국가는 아니었지만 행정부 외에 의회를 가졌다는 것은 우리가 중국에 비해 진일보해 있었다는 것이다.
이상과 같은 경로를 통하여 상해정부는 유일한 한국의 임시정부로 존재하게 되어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기까지 독립운동의 최고기관의 역할을 수행하고 외교의 주체가 되었으며 한민족의 불멸의 표상이 되었다. 다만 소위 ‘북경정부’ ‘국민대표회의 창조파’ 등으로부터 얼마간의 도전을 받기도 했지만 그 정통성은 이후 30년을 이어나갈 수 있었던 것이다.

註 038
: 金榮秀, 『大韓民國臨時政府憲法論』, p.92.
註 039
: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자료집』7(독립유공자사업기금운용위원회, 1973), p.1140.
註 040
: 在上海日本總領事館警察部 編, 『朝鮮民族運動年鑑』, 1919년 5월 13일.
註 041
: 在上海日本總領事館警察部 編, 앞 책, 1919년 7월 11일.
註 042
: 주요한, 『安島山全書』(三中堂, 1963), pp.196~197.
註 043
: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자료집』8(1973), p.858.
註 044
: 在上海日本總領事館警察部, 앞 책, p.26.
註 045
: 주요한, 『安島山全書』, p.214.
註 046
: 大韓國民議會는 그 후 1920년 2월 15일 復元을 선언하고 브라고웨시첸스크로 이전하여 共產主義的 조직으로 변모하였으며 1921년 6월에 자연 해소되었다(潘炳律, 「大韓國民議會의 組織과 活動」(漢陽大 碩士學位論文, 1986), 참조).
註 047
: 國史編纂委員會, 『韓國獨立運動史』三(1967), p.22.
註 048
: 이 각료 명단과 임시헌법 초안은 최종적인 명단은 아니었다.
註 049
: 『獨立新聞』제4호(1919년 9월 2일)와 『大韓民國臨時政府議政院文書』, p.60에 의하면 이러한 개헌안과 정부개조안의 제안 이유에 대해,
…4월 23일 한성에서 조직 발표한 일 정부 名이 거연히 海內外에 선전되는 기관이 생하여 聞者無奈로 그 정부의 존재를 疑치 아니치 못하게 되었으며 以하여 내치외교의 제정무 더욱 因苦를 극하는 경우에 陷한지라. …기응의 도를 취하여 능히 화를 전하여 복을 위하는 計를 득하고저 한다고 하였다… 라고 설명하고 있다.
註 050
: 『獨立新聞』제4호(1919년 9월 2일), 제7호(1919년 9월 9일).
註 051
:
상해정부와 한성정부의 일체화(정부개조)
職名\政府名上海政府漢城政府統合政府
執政官總裁(大統領) 李承晚(執政官總裁)李承晚(大統領)
國務總理(總裁)李承晚李東輝李東輝
內務總長安昌浩李東寧李東寧
外務總長金奎植朴容萬朴容萬
軍務總長李東輝盧伯麟盧伯麟
財務總長崔在亨李始榮李始榮
法務總長李始榮申圭植申圭植
學務總長 金奎植金奎序
交通總長文昌範文昌範文昌範
勞動局總辨 安昌浩安昌浩
參謀部總長 柳東說 
李延馥, 『大韓民國臨時政府(1919~1948)硏究 : 그 組織과 活動을 중심으로』 (慶熙大, 1982), p.21.
註 052
: 『獨立新聞』제10호(1919년 9월 18일).
註 053
: 金榮秀, 『大韓民國臨時政府憲法論』, pp.103~104.
註 054
: 胡春惠 著, 辛勝夏 譯, 『中國안의 韓國獨立運動』(檀國大學校出版部, 1978), p.21.

※ 본서의 내용은 각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로,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는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