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30년대초 제 정당의 성립과 활동

(1) 한국독립당
좌파세력이 촉성회를 일방적으로 해체하고 유호동맹을 결성하게 되자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하는 민족주의 세력은 새로운 방향을 모색해야만 했다. 이러한 필요에 따라 1930년에 들면서 민족주의세력은 독립운동와 전개와 임시정부의 여당적인 성격을 지닌 정당을 조직코자 했고 이로 인해 결성된 것이 한국독립당이었으니, 이 당의 결성은 곧 유일당운동이 낳은 산물인 셈이었다.037037 韓國獨立黨의 당명이 韓國國民黨으로 기록된 경우로 있다(國會圖書館, 앞 책, p.645, p.945). 이것은 한국독립당이 처음에 비밀단체로 출발했기 때문에 생긴 착오로 보인다. 독립운동사에 나타나는 한국독립당과 동일한 명칭의 정당은 4개가 있었다. 상해에서 조직된 당(1930), 만주에서 조직된 당(1930), 조선민족혁명당에서 이탈하여 재건한 당(1935), 이 재건된 당과 조선혁명당 및 한국국민당이 통합하여 조직한 당(1940) 등이 그것이다.닫기
한국독립당의 결성시기는 명확하지 않다.038038 한국독립당의 결성시기에 대한 자료는 다음과 같이 8개의 설이나 된다.
① 1928설 : 秋憲樹, 『資料韓國獨立運動』1(延世大出版部, 1975), p.68.
② 1929설 : 葛赤峰, 「朝鮮革命記」, 『독립운동사』자료집 7 (독립유공자사업기금운용위원회, 1974) p. 202 ; 秋憲樹, 『資料韓國獨立運動』4(下), p.1601 ;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별집 2, p. 401.
③ 1929년 3월 1일설 : 秋憲樹, 『資料韓國獨立運動』2, p. 86.
④ 1929~1930년설 : 秋憲樹, 『資料韓國獨立運動』1, p. 172.
⑤ 1930년 1월설 : 國史編纂委員會, 『韓國獨立運動史』4, (探求堂, 1968), p. 22.
⑥ 1930년 1월 25일설 : 金正明, 『朝鮮獨立運動』Ⅱ (東京 : 原書房, 1967), p. 511; 金正柱, 『朝鮮統治史料』10(東京 : 韓國史料硏究所, 1975), p. 697.
⑦ 1930년 3월 1일설 : 金九, 『白凡逸志』(光明出版社, 1947); 秋憲樹, 『資料韓國獨立運動』2, p. 89; 國史編纂委員會, 『韓國獨立運動史』資料 3 (探求堂, 1972), p.560.
⑧ 1931년 3월 1일설 : 金正明, 『朝鮮獨立運動』Ⅱ, p.464.
이러한 결성시기에 대한 자료상의 심한 차이는 이 당이 처음에 비밀단체로 결성되었고(金正柱, 『朝鮮統治資料』10(東京 : 韓國史料硏究所, 1975), p.699), 또 같은 이름의 당이 1930년에 만주에서 조직되도록 했기 때문에 나타난 현상으로 보인다. 한국독립당이 표면화된 것은 1931년 4월경이었다(金正明, 앞 책, p.1967). 이것은 임시정부 국무위원회가 「在南京中國國民黨會議에 대한 선언서」에서 비롯되었고 그 후 여러 번 사용되었다. 하지만 일제관헌의 자료 가운데에는 이미 1930년 12월 8일자 보고에 한국독립당이 등장했다(國會圖書館, 앞 책, p.6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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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 결성시기는 대체로 1930년 1월 25일로 판단되는데, 그 이유는 다음의 두가지에 기인한다.039039 결성시기에 대한 연구자들의 견해도 차이가 많다. 趙凡來는 1929년 11월과 12월 사이로(조범래, 앞 글, p.147), 姜萬吉은 1929년으로 (강만길, 「朝鮮民族革命黨 成立의 背景」, 『韓國史硏究』 61·62 (1988), p.346), 노경채와 韓詩俊은 1930년 1월 25일로(노경채, 앞 글, p.210; 한시준, 앞 글 p.603) 각각 주장하고 있다. 필자는 세 번째와 같은 견해를 갖고 있다.닫기 먼저 1929년 10월 26일에 좌파세력이 한국유일독립당촉성회를 일방적으로 해체하고 유호동맹을 조직했다. 민족주의세력이 이에 대응하고자 임시정부를 옹호하기 위해 한국독립당을 창당했으므로 일단 결성시기가 1929년 11월이후임이 분명하다. 다음으로, 1929년 11월 광주학생의거의 영향으로 1930년 1월 11일에 상해한인단체연합회가 조직되어040040 國會圖書館, 앞 책, p.642. 이와 같은 이름의 단체가 1931년 7월 10일에 조직되었다. 이것은 안창호가 중심이 된 민족주의계열의 조직으로 만보산 사건의 진상을 규명하고 이에 대한 대응책을 마련하기 위해 조직된 것이었다(國史編纂委員會, 『韓國獨立運動史』資料 3 (探求堂, 1972), p.469).닫기 선언서를 발표하고 시위 운동을 전개하는 과정에서 유호동맹이 이를 주도하게 되자, 민족주의 계열에서 이동녕·안창호 등이 “1929년말 이래 논의하여 오던 민족통일운동의 타개책을 실현하고자 종래의 지방적·파벌적 감정을 버리고 민족주의의 입장에서 신기치하(新旗熾下)에 전선의 통일을 기도”하고자 했다.041041 주 40)과 같음.닫기 따라서 창당일자가 1930년초임이 분명한데, 특히 결당식의 장소와 일자가 뚜렷이 제시된 자료로 보아 1930년 1월 중순 또는 1월 25일인 듯하다.042042 주 38)의 ⑥항의 金正柱 자료는 1930년 1월 25일에 佛租界馬浪路普慶里 第四號의 임시정부 판공처에서 창당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닫기 그리고 임시정부가 3·1절 기념일에 “한국독립운동을 중심으로하는 사명을 논술하고 대독립당의 출현을 대망(待望)”하는 뜻의 선언을 발표했고, 또 안창호는 기념일의 연설을 통해 “한국독립운동을 위해 최고기관의 설립”을 강조했던 일043043 國會圖書館, 앞 책, p.645.닫기은 이미 한국독립당이 비밀리에 조직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한국독립당 결성의 주역은 이동녕을 비롯한 임시정부의 핵심세력과 흥사단의 안창호였다. 이동녕 등의 임시정부 핵심세력은 임시정부의 기능강화와 이에 따른 독립 운동의 활성화를 도모코자 했고, 안창호는 임시정부를 해체하고 독립운동의 최고기관을 수립코자 했다. 그러나 임시정부를 어렵게 고수해 온 이동녕·김철을 비롯한 임시정부의 간부들은 과거 10여년이란 역사를 가진 정부를 해산함은 불가하며, 설령 새로운 기관을 설립한다고 하더라도 반드시 이보다 유리하다고는 할 수 없다고 했다.044044 주 43) 과 같음.닫기 이러한 상반된 견해가 조정되어 한국독립당이 결성되었다. 따라서 한국독립당은 촉성회운동이 결렬되면서 민족주의세력 이 임시정부를 강화하고 이를 중심으로 독립운동의 주도권을 장악하고자 조직한 것으로 임시정부의 여당이 되었다.
한국독립당은 1930년을 전후하여 결성된 제 정당과는 다소 그 성격을 달리했다. 즉, 이 당은 정착된 정당조직의 모습을 갖추었는데 그 이유는 정부와의 관계와 성숙성 및 정강·정책의 완성 때문이다. 한국독립당은 이당치국의 체제를 갖춘 소위 ‘중국국민당정부’ 처럼 ‘한국독립당정부’를 구성하게 되었다. 1930년에 조직되어 1932년 5월 항주로 옮겨간 이 당은 1940년 중경(重慶)에서 조직된 같은 이름의 한국독립당과 달리 임시정부의 여당이라기 보다 임시정부 그 자체였다.045045 1930년대의 한국독립당이 임시정부의 여당임은 분명하지만 인적구성으로 볼 때 임시정부 그 자체와 동일한 조직이었다. 그러나 1940년대에 조직된 한국독립당은 이와 성격을 전혀 달리했다. 즉 1940년 5월에 한국독립당·조선혁명당·(재건) 한국독립당이 통합하여 우파세력의 연합체인 한국독립당을 결성했는데, 이때 金元鳳의 조선민족혁명당과 좌우합작을 하게 되었고 이어서 신한민주당·조선민족해방동맹·조선혁명자연맹 등이 조직되어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집결했다. 이 당시 임시정부 주도권을 가진 정당은 한국독립당이었고, 따라서 이 당시의 한국독립당은 여러 야당을 주변에 둔 임시정부의 진정한 여당이었다. 그러므로 1930년대의 한국독립당이 임시 정부와 동일한 구성체로 이루어진 것과는 내용상 크게 달랐다고 하겠다.닫기
당의 중심인물은 모두 임시정부의 주요 직책을 갖고 있었다. 1927년 8월에 조직된 국무위원은 이동녕(국무회의주석 겸 법무장)·김구(내무장)·오영선(외무장)·김철(군무장)·김갑(재무장) 등이었고 1930년 6월에 오영선의 사직으로 조소앙이 외무장으로 선출되었다. 그리고 같은 해 11월 8일 의정원 회의에서 임기(3년) 만료로 인한 국무위원 개선에 따라 선출된 국무위원은 이동녕(법무장·주석)·김구(재무장)·조완구(내무장)·조소앙(외무장)·김철(군무장) 등이었다. 그 외 주요직은 군사위원회위원장 윤기섭, 외교위원회와 경제위원회 위원장에 안창호, 임시의장에 이동녕, 부의장에 차이석이었다.046046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4 pp. 575~576.닫기
한국독립당은 그 이전에 전혀 볼 수 없던 성숙된 정강·정책을 마련했다. 한국독립당의 정강·정책을 입안한 자는 조소앙이었고, 따라서 그의 삼균주의가 당 이념의 기본구조가 되었다. 이 내용의 골격은 결국 민주독립국가의 수립과 균등제도의 실현을 목표로 한다는 것이었다. 소앙의 삼균주의를 기본골격으로 한 한국독립당의 이념을 살펴볼 때 세가지의 특성으로 구분해 볼 수 있다. 첫째, 민족주의·민주주의의 성격 둘째, 대일투쟁 방법으로 민중적 항일투쟁과 무력적 파괴의 두가지를 제시 셋째, 토지와 대생산기관을 국유로 한다는 사회주의적 성격이 그것이다. 한국독립당의 정강·정책은 1930·40년대에 조직된 대다수 정당의 본보기가 되었다는 사실에서 큰 의미를 가진다.
한국독립당은 투쟁방략으로 대일투쟁방법을 민중적 반항과 무력적 파괴를 제시했다. 이것은 만주의 한국독립당과 조선혁명당처럼 군사조직을 갖추지 못한 상황에서 요인암살이나 적기관의 파괴와 같은 소규모의, 그러면서도 효과있는 투쟁을 전개할 수 밖에 없었던 데에 기인한 것이다. 그러므로 1930년대 초 한국독립당의 항일투쟁활동은 이러한 무력적 파괴·요인암살 등이 주된 흐름이었고, 당시의 상황으로서는 최선의 방법 이었다.047047 소규모의 국부적인 무력적 파괴만으로 독립운동의 궁극적인 목표인 복국은 불가능했다. 따라서 윤봉길의거 이후 장개석과 면담했던 김구는 한국 청년의 조직적 훈련와 군사력 양성을 위해 중국군관학교에 한국청년을 입교시켜 달라고 요청했고, 이 자리에서 양자 합의에 의해 중국군관학교 낙양분교에 한인특별반이 만들어졌다.닫기 그리고 이 투쟁 방략은 한국노병회의 독립전쟁준비방략과 병인의용대의 의열투쟁방략을 계승한 것이었다.
한국독립당은 산하 각 부문단체를 통해 활동을 전개하기도 했다. 그 산하 부문단체로는 비밀결사인 한인애국단을 비롯하여 상해한인청년당·상해애국부인회·상해한인여자청년동맹 등이 있었다. 한국독립당의 활동 가운데 중요한 것이 중국국민당의 지원 획득이었다. 1930년 5월 초에 남경에서 개최된 제4차 중국국민당중앙집행위원회의 개회와 장학량(張學良)이 남경을 방문한 기회를 맞아 중국 거주 한인 문제에 관해 청원하기 위해 조소앙과 박찬익이 대표로 파견되었다. 이들은 남경에서 장개석·장학량을 비롯한 중국국민당의 요인을 방문하고 한국독립당의 주의·강령 등을 극력 주장했다.048048 國史編纂委員會, 『한민족독립운동사』3, p.676.닫기
1931년 5월에 조완구·조소앙·이동녕·김철·김구 등 국무위원 명의로 선언서를 발표했다.049049 주 48)과 같음.닫기 이 선언은 남경에서 개최되고 있던 중국국민회의에 임시정부와 한국독립당의 방침과 정책을 알리기 위한 것으로 이 선언에서 임시정부와 한국독립당이 요구하는 것은 두 가지로 요약된다. 그 하나는 옛 한국영토에 민주독립국가를 확립하는 것이며, 또 하나는 역시 그 땅에 균등제도를 실현하는 것이었다. 전자는 과거의 시기로서 첫걸음의 공동목표이며, 후자는 건설시기의 궁극적인 목적이라고 했다.050050 國史編纂委員會, 앞 책, pp. 673~675.닫기
한국독립당의 성립은 한국독립운동사에서 큰 의의를 가진다. 왜냐하면 그것은 “민족유일독립당이라는 민족운동상의 요구를 구현하기 위해 시도된 중국관내에서 최초로 이루어진 본격적인 정당 활동이었다”051051 秋憲樹, 「日帝下 國內外 政黨活動」, 『韓國現代史의 諸問題』Ⅱ (1987), p.352.닫기는 이유 때문이다. 그리고 한국독립당이 조직된 뒤에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하거나 또는 그 범주를 벗어난 위치에서 여러 정당이 조직되었고, 이어서 점차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하는 정당정치가 이루어지게 되었던 사실 도 그러하다. 끝으로 한국독립당의 결성이 가지는 또 하나의 의의는 이 당이 좌파세력의 침투와 도전으로부터 임시정부를 고수했다는 사실이다. 뿐만 아니라 이것이 바탕이 되어 그 이후의 좌우합작에 있어서도 민족주의 세력이 좌파를 선도하게 되었으니, 1942년 이후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한 좌우합작이 곧 대표적인 예이다.
(2) 신한독립당
신한독립당은 만주의 한국독립당(상해의 것과 이름이 같음)과 남경의 한국혁명당이 1932년에 통합되어 조직되었다. 만주의 한국독립당은 1928년 12월에 조직된 혁신의회를 기반으로 하여 1930년 7월에 홍진·이청천(李靑天)·민무(閔武)·안훈(安勳)·황학수(黃學秀)·신숙(申肅)·이장녕(李章寧) 등에 의해 결성되었다.052052 蔡根植, 『武裝獨立運動秘史』(大韓民國公報處, 1949), pp. 156~157.닫기 만주의 한국독립당은 중앙에 6개 위원회를 두고 지방에는 지당부(支黨部)와 구당부(區黨部)를 두었다. 그리고 이 당은 동북 만주의 의병·유림·대종교 등의 집단을 망라하였다. 당의 간부를 보면 홍진이 중앙위원장이었으며, 신숙(총무)·남대관(南大觀 ; 조직)·안훈(선전)·이청천(군사)·최호(崔灝; 경리)·이장녕(감찰) 등이 각각 6개 위원회의 위원장을 담당했고, 한국독립군 총사령은 이청천이 맡았다.053053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5 (독립유공자사업기금운용위원회, 1973), pp. 598~599.닫기
이 당은 소속 당군으로 한국독립군을 조직했다. 따라서 한국독립당은 자치기관으로서의 한족자치연합회와 군사기관으로서의 한국독립군을 정치적으로 지도하는 관계에 섰던 것이다.054054 秋憲樹, 앞 책, p.343.닫기 이리하여 한국독립당은 한족자치연합회와 한국독립군을 주도·육성하면서 항일운동을 전개해 나갔다. 1931년 일제에 의한 만주사변으로 만주침공이 본격화되자 한국독립당은 1932년 11월 한국독립당 중앙의회의 결의를 통하여 한국독립군의 항일전선에 대한 총동원령을 내리는 한편, 중국의 길림성(吉林省) 당국과 연합항일전쟁 방안을 협의하였다.055055 洪永道, 『韓國獨立運動史』 (愛國同志援護會, 1956), p.281.닫기
이후 일제의 침공이 더욱 격화되자, 한국독립군 부대는 중국관내로 이전하게 되었다. 이 때 임시정부가 이청천을 초대하게 되어 이청천·조경한(趙擎韓)·오광선(吳光宣)·공진원(公震遠) 등이 상해로 가는 동시에 독립군 가운데 군관학교 입학지원자를 선발하여 상해에 보내기로 하였다.056056 洪永道, 앞 책, p.279.닫기 이것은 1932년 1월 29일의 윤봉길의거를 계기로 장개석(張介石)이 김구에게 면담을 요청했고, 그 자리에서 김구의 요청과 장개석의 찬성에 의해 중국군관학교 낙양분교에 한인특별반을 설치하도록 되었는데, 중국관내로 이동한 만주 한국독립군들의 대다수가 여기에 입교하였다.057057 國會圖書館, 앞 책, pp. 824~825.닫기
한편 한국혁명당은 윤기섭(尹琦燮)·신익희(申翼熙)·연병호(延秉昊)·성주식(成周寔)·민병길(閔丙吉) 등이 1929년에 남경에서 조직한 정당이었다. 구성원은 임시정부에서 주류를 이루지 못했던 인물들이었는데, 근거지를 남경으로 옮겨 별도의 정당을 조직했다. 이 당의 목적은 사상의 정화와 독립운동 진영의 단결을 피하는 것으로 동시에 산하에 철혈단을 두어 무력 행동대로 삼았는데, 그 주요 인물은 안재환(安在桓)·김창화(金昌華)·나월환(羅月焕) 등이었다. 이 당은 기관지로 『우리 길』을 발간하여 독립 사상을 고취하고 단원훈련과 교양에 이바지하였다. 그리고 1932년 현재의 당원은 40명 정도였으며, 간부는 이사장에 윤기섭, 총무 정태희(鄭泰熙), 외무 신익희 등이었다.058058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4, p.727.닫기 이 당의 세력은 그리 확대되지 못했다. 이런 상황에서 만주의 한국독립당이 만주사변으로 북평(오늘의 북경)으로 남하하게 되면서 합당의 교섭을 벌이게 되었다. 이것은 만주 한국독립당의 당세만희와 한국혁명당의 세력확대 추구라는 목적이 합쳐져 이루어진 것이었다.
1934년 2월 25일에 만주 한국독립당의 대표 홍진·김원식과 한국혁명당 대표 윤기섭·연병호가 남경에서 협의한 결과 각 당을 해체하고 ‘신한독립당’을 조직했다. 이어서 3월에 대표회의를 열어 간부선임과 운동방침을 결정했는데, 당수에 홍진·당무위원에 김상덕·신익희·윤기섭 등이 각각 선임 되었다.059059 金正柱, 『朝鮮統治史料』10, (東京 : 韓國史料硏究所, 1975), p. 701.닫기 신한독립당은 당의로 “민족주의를 기초로한 정권, 생계문화의 독립과 민주적 신건설 완성, 전세계 인류의 평등 행복의 촉진”을 채택하고, 강령으로는 민주공화국·대의제·토지와 대생산기구의 국유제 등을 채택 하여 한국독립당을 비롯한 다른 정당의 그것과 유사했다.060060 金正柱, 앞 책,p.702.닫기
(3) 조선혁명당
조선혁명당은 1929년 12월에 국민부가 기존의 민족유일당조직동맹을 개편함에 따라 조직된 것이다. 이에 따라 조선혁명당은 국민부의 독립운동에 관한 사항을 관장하였고, 국민부의 무장조직을 조선혁명군의 산하에 편성하기로 했다.061061 國史編纂委員會, 『韓國獨立史』5 (探求堂, 1969), p.736.닫기 이것은 이당(以黨)공작·이당통치라는 시대조류에 호응한 것으로서 국민부는 한인사회의 자치행정기관으로, 조선 혁명군은 독립운동에 대한 군사적 임무를 담당하는 기관으로 활동하면서, 그 조직과 운영은 유일정당인 조선혁명당의 정치적 지도 아래 놓이게 되는 체제를 갖추었던 것이다.062062 秋憲樹, 앞 책, p.338.닫기 조선혁명당의 중심인물은 최동오(崔東旿)·유동열(柳東說)·고활신(高豁信)·이웅(李雄) 등이었다.063063 金正柱, 앞 책, p.703.닫기 구성간부들의 내용을 보면 현익철(玄益哲)이 중앙책임비서였고, 7부 위원장에 현정경(玄正卿 ; 정치부)·고이허 (高而虛 ; 조직부)·김보안(金輔安 ; 교육부)·장승언(張承彥 ; 체육부)·최동오(외교부)·고활신(선전부)·이웅(군사부) 등이 각각 선임되었다.064064 洪永道, 앞 책, p.281.닫기 이들은 대다수 민족주의자들이었고, 또 이 당도 민족주의세력의 결집체였다.
그러나 이들은 창당시 발표했던 선언에서 혁명 제1목표가 사회주의 혁명으로 향하는 노농민주주의혁명이어야 한다고 규정했고, 또 복국을 달성한 뒤에는 노농민주정권을 확립해야 한다고 했다.065065 國會圖書館, 앞 책, pp.669~672.닫기 이렇게 이들이 ‘민족주의자들의 결사체’임에도 불구하고 이와 같이 선언에서 좌파의 논리가 주류를 이루고 있는 것은 당시 러시아 혁명의 성공에 따라 공산주의나 사회주의사상이 민족운동 내에 광범위하게 수용되고 있었으며, 또한 만주 한인사회의 대다수는 농민으로 구성되어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좌파논리의 수용이 선전적 차원에서 보다 유리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066066 秋憲樹, 앞 책, p.339.닫기 조선혁명당은 실제 민족·사회의 양파대립이 극심하여 그 결과, 민족주의세력의 현익철이 사회주의세력인 현하죽(玄河竹) 일파를 몰아내고 실권을 장악하였고,067067 秋憲樹, 『資料 韓國獨立運動』2, (延世大出版部, 1975), p.67.닫기 1935년 조선민족혁명당에 참가함으로 써 해체되었다.
조선혁명당은 만주의 한국독립당과 함께 1930년대 초 만주에서 정당 활동을 전개했다. 이들은 모두 당에 소속된 독자적인 군사력을 가짐으로 해서 활동의 주안점을 정책제시 및 조직화의 측면에 두는 다른 정당과 달리, 오히려 항일전투활동의 정치적 지도를 위한 정당조직의 유지를 강조했다는 점을 그 특성으로 가졌다. 그러나 이들이 만주사변 이후 1931~1933년 사이에 중국관내로 이동하게 됨으로써 이후 만주지방에서의 민족주의계열의 정당활동은 종료하게 되었던 것이다.068068 秋憲樹, 「日帝下 國內外 政黨活動」, 앞 책, p.345.닫기
(4) 의열단
의열단은 1919년 11월에 길림성에서 창단된 뒤 상해로 이동하여 활약하다가 1929년 12월에 해체선언을 할 때까지 10년 동안 파괴·암살 등의 의열투쟁을 전개했다. 의열단은 20년대 초에 무정부주의 이념을 표방하고 의열투쟁을 벌였으나 그것만으로 일제를 축출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1925년부터 활동방향을 바꾸었다. 의열단의 대표인 김원봉(金元鳳)은 여러 단원들과 함께 황포군관학교(黃浦軍官學校) 제4기에 입학하였다. 당시 이 학교의 교장은 장개석이었으나 북벌에 참가하고 있었고, 교장대리를 맡고 있던 등연달(鄧演達)이 공산주의자였기 때문에 김원봉을 비롯한 의열단원들이 공산주의에 심취하게 되었다. 이들은 졸업후 중국공산당과 함께 활동하다가 1927년 5월에 촉성회운동에 대한 지지선언을 발표하기도 했다. 그후 약화된 모습을 보이던 의열단은 조선 피압박 대중의 요구가 대중적 협동전선형태라고 주장하면서 해체성명을 발표했다. 이 무렵 김원봉은 북경에서 조선공산당 ML파 간부인 안광천(安光泉)과 제휴했다. 그들은 조선공산당재건동맹을 조직하고 전위투사의 양성을 위해 레닌주의 정치학교를 설립하고 청년들을 교육했다.069069 金正柱, 앞 책, p.704.닫기
1931년 9월에 만주사변이 일어나자, 김원봉은 의열단을 부활시켰다. 의열단은 중국의 항일의식이 높아지자 「중한합작항일운동에 관한 건의 서」와 「한국혁명의 과거의 정세와 의열단의 책략」등을 동북의용군후원회·동북피난민구제회 등의 중국 항일단체에 배포하고 이들로부터 자금지원을 획득했다.070070 金正柱, 앞 책, p.705.닫기 1932년에는 중국군사위원회의 승인과 중국국민당의 지원을 받아 ‘간부훈련반 제6대’를 설치하고 각 지역으로부터 학생을 모집하여 3기에 걸쳐 116명을 교육했다. 의열단은 이 청년들을 국내와 만주 및 중국전선에 파견하거나 다시 중국군관학교에 입학시켜 정예요원을 양성했다. 김원봉은 1933년부터 김구·이청천과 함께 중국 국민당의 지원을 얻어 중국군관학교 낙양분교에 훈련된 요원을 입학시켰고 1935년에는 62명을 배출했다.071071 金正明, 『韓國獨立運動』 Ⅱ, p.504닫기
의열단은 1932년 10월에 한국독립당·한국혁명당·조선혁명당·한족동맹회 등과 함께 대일전선통일동맹의 결성에 참가하였고, 1935년 7월에 유일대당으로 결성된 민족혁명당에 참가하기 위해 해산되었다. 이 당시의 의열단 대표들은 김원봉을 위시하여 박건병(朴建秉)·이춘암(李春岩)·신악(申岳)·이집중(李集中)·김용기(金龍基)·김영준(金英駿)·한위송(韓韋松)·김용재(金容宰) 등이었다.072072 주 71)과 같음.닫기

註 037
: 韓國獨立黨의 당명이 韓國國民黨으로 기록된 경우로 있다(國會圖書館, 앞 책, p.645, p.945). 이것은 한국독립당이 처음에 비밀단체로 출발했기 때문에 생긴 착오로 보인다. 독립운동사에 나타나는 한국독립당과 동일한 명칭의 정당은 4개가 있었다. 상해에서 조직된 당(1930), 만주에서 조직된 당(1930), 조선민족혁명당에서 이탈하여 재건한 당(1935), 이 재건된 당과 조선혁명당 및 한국국민당이 통합하여 조직한 당(1940) 등이 그것이다.
註 038
: 한국독립당의 결성시기에 대한 자료는 다음과 같이 8개의 설이나 된다.
① 1928설 : 秋憲樹, 『資料韓國獨立運動』1(延世大出版部, 1975), p.68.
② 1929설 : 葛赤峰, 「朝鮮革命記」, 『독립운동사』자료집 7 (독립유공자사업기금운용위원회, 1974) p. 202 ; 秋憲樹, 『資料韓國獨立運動』4(下), p.1601 ;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별집 2, p. 401.
③ 1929년 3월 1일설 : 秋憲樹, 『資料韓國獨立運動』2, p. 86.
④ 1929~1930년설 : 秋憲樹, 『資料韓國獨立運動』1, p. 172.
⑤ 1930년 1월설 : 國史編纂委員會, 『韓國獨立運動史』4, (探求堂, 1968), p. 22.
⑥ 1930년 1월 25일설 : 金正明, 『朝鮮獨立運動』Ⅱ (東京 : 原書房, 1967), p. 511; 金正柱, 『朝鮮統治史料』10(東京 : 韓國史料硏究所, 1975), p. 697.
⑦ 1930년 3월 1일설 : 金九, 『白凡逸志』(光明出版社, 1947); 秋憲樹, 『資料韓國獨立運動』2, p. 89; 國史編纂委員會, 『韓國獨立運動史』資料 3 (探求堂, 1972), p.560.
⑧ 1931년 3월 1일설 : 金正明, 『朝鮮獨立運動』Ⅱ, p.464.
이러한 결성시기에 대한 자료상의 심한 차이는 이 당이 처음에 비밀단체로 결성되었고(金正柱, 『朝鮮統治資料』10(東京 : 韓國史料硏究所, 1975), p.699), 또 같은 이름의 당이 1930년에 만주에서 조직되도록 했기 때문에 나타난 현상으로 보인다. 한국독립당이 표면화된 것은 1931년 4월경이었다(金正明, 앞 책, p.1967). 이것은 임시정부 국무위원회가 「在南京中國國民黨會議에 대한 선언서」에서 비롯되었고 그 후 여러 번 사용되었다. 하지만 일제관헌의 자료 가운데에는 이미 1930년 12월 8일자 보고에 한국독립당이 등장했다(國會圖書館, 앞 책, p.660).
註 039
: 결성시기에 대한 연구자들의 견해도 차이가 많다. 趙凡來는 1929년 11월과 12월 사이로(조범래, 앞 글, p.147), 姜萬吉은 1929년으로 (강만길, 「朝鮮民族革命黨 成立의 背景」, 『韓國史硏究』 61·62 (1988), p.346), 노경채와 韓詩俊은 1930년 1월 25일로(노경채, 앞 글, p.210; 한시준, 앞 글 p.603) 각각 주장하고 있다. 필자는 세 번째와 같은 견해를 갖고 있다.
註 040
: 國會圖書館, 앞 책, p.642. 이와 같은 이름의 단체가 1931년 7월 10일에 조직되었다. 이것은 안창호가 중심이 된 민족주의계열의 조직으로 만보산 사건의 진상을 규명하고 이에 대한 대응책을 마련하기 위해 조직된 것이었다(國史編纂委員會, 『韓國獨立運動史』資料 3 (探求堂, 1972), p.469).
註 041
: 주 40)과 같음.
註 042
: 주 38)의 ⑥항의 金正柱 자료는 1930년 1월 25일에 佛租界馬浪路普慶里 第四號의 임시정부 판공처에서 창당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註 043
: 國會圖書館, 앞 책, p.645.
註 044
: 주 43) 과 같음.
註 045
: 1930년대의 한국독립당이 임시정부의 여당임은 분명하지만 인적구성으로 볼 때 임시정부 그 자체와 동일한 조직이었다. 그러나 1940년대에 조직된 한국독립당은 이와 성격을 전혀 달리했다. 즉 1940년 5월에 한국독립당·조선혁명당·(재건) 한국독립당이 통합하여 우파세력의 연합체인 한국독립당을 결성했는데, 이때 金元鳳의 조선민족혁명당과 좌우합작을 하게 되었고 이어서 신한민주당·조선민족해방동맹·조선혁명자연맹 등이 조직되어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집결했다. 이 당시 임시정부 주도권을 가진 정당은 한국독립당이었고, 따라서 이 당시의 한국독립당은 여러 야당을 주변에 둔 임시정부의 진정한 여당이었다. 그러므로 1930년대의 한국독립당이 임시 정부와 동일한 구성체로 이루어진 것과는 내용상 크게 달랐다고 하겠다.
註 046
: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4 pp. 575~576.
註 047
: 소규모의 국부적인 무력적 파괴만으로 독립운동의 궁극적인 목표인 복국은 불가능했다. 따라서 윤봉길의거 이후 장개석과 면담했던 김구는 한국 청년의 조직적 훈련와 군사력 양성을 위해 중국군관학교에 한국청년을 입교시켜 달라고 요청했고, 이 자리에서 양자 합의에 의해 중국군관학교 낙양분교에 한인특별반이 만들어졌다.
註 048
: 國史編纂委員會, 『한민족독립운동사』3, p.676.
註 049
: 주 48)과 같음.
註 050
: 國史編纂委員會, 앞 책, pp. 673~675.
註 051
: 秋憲樹, 「日帝下 國內外 政黨活動」, 『韓國現代史의 諸問題』Ⅱ (1987), p.352.
註 052
: 蔡根植, 『武裝獨立運動秘史』(大韓民國公報處, 1949), pp. 156~157.
註 053
: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5 (독립유공자사업기금운용위원회, 1973), pp. 598~599.
註 054
: 秋憲樹, 앞 책, p.343.
註 055
: 洪永道, 『韓國獨立運動史』 (愛國同志援護會, 1956), p.281.
註 056
: 洪永道, 앞 책, p.279.
註 057
: 國會圖書館, 앞 책, pp. 824~825.
註 058
: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4, p.727.
註 059
: 金正柱, 『朝鮮統治史料』10, (東京 : 韓國史料硏究所, 1975), p. 701.
註 060
: 金正柱, 앞 책,p.702.
註 061
: 國史編纂委員會, 『韓國獨立史』5 (探求堂, 1969), p.736.
註 062
: 秋憲樹, 앞 책, p.338.
註 063
: 金正柱, 앞 책, p.703.
註 064
: 洪永道, 앞 책, p.281.
註 065
: 國會圖書館, 앞 책, pp.669~672.
註 066
: 秋憲樹, 앞 책, p.339.
註 067
: 秋憲樹, 『資料 韓國獨立運動』2, (延世大出版部, 1975), p.67.
註 068
: 秋憲樹, 「日帝下 國內外 政黨活動」, 앞 책, p.345.
註 069
: 金正柱, 앞 책, p.704.
註 070
: 金正柱, 앞 책, p.705.
註 071
: 金正明, 『韓國獨立運動』 Ⅱ, p.504
註 072
: 주 71)과 같음.

※ 본서의 내용은 각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로,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는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