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전국연합진선협회

(1) 양대전선의 연합
1937년 7월에 시작된 중일전쟁 직후, 8월과 12월에 광복진선과 민족전선이 결성되었다. 이 두 세력은 좌우파 각각의 연합체로서 이제 통합의 요구가 절실한 상황을 맞고 있었다. 그 필요에 맞추어 양대연합 전선이 통합하였으니 곧 ‘전국연합진선협회’(이하 진선협회)였다.
진선협회가 성립된 배경은 다음의 두 가지였다. 하나는 여러 정당과 단체로 나누어져 있던 독립운동단체들이 중일전쟁 직후에 좌우양대체제로 연합됨으로써 일단 전체 독립 운동단체들의 통합을 위한 발판이 마련된 것이었다. 둘째의 배경은 양대세력이 비록 주의와 사상에 차이를 갖고 있었지만 그 이론적인 전략은 항일독립을 위해 전민족의 역량을 결집한다라고 하는 동일한 것이었다는 점이다.
진선협회가 결성되는 계기는 중국정부가 양대세력의 통합을 요구하고 나선 일이었다.035035 진선협회가 결성되기 이전에 비록 실패하긴 했지만, 양대 세력의 통합 시도가 있기는 했었다. 그것은 1937년 11월에 김원봉이 민족전선을 결성하던 과정에서 김구의 광복진선에게 합류할 것을 권유했다가 거절당한 일이었다. 당시 김구는 김원봉 세력이 중국공산당에 접근해 있고 인민전선파적인 경향이 농후하다고 하여 합류에 반대했다(金正明, 앞 책, p.625).닫기 김구와 김원봉은 중일전쟁 이전부터 각각 다른 두 갈래의 길을 통해 중국의 지원을 받고 있었다.036036 1932년의 이봉창·윤봉길 양대 의거 이전에는 한국독립운동에 대한 중국의 지원이 거의 없었다. 그러나 양대 의거 이후에는 전과 달리 중국의 각처로부터 지원이 있게 되었다. 그렇더라도 중국정부의 적극적이고 공개 적인 지원은 앞에서 본 바와 같이 중일전쟁 이후에야 비로소 이루어졌다.닫기 김구는 중국국민당 중앙조직부의 진과부(陳果夫)를, 김원봉은 중국군사위원회의 등걸(滕傑)·강택(康澤) 등을 통해 각각 지원받았다.037037 진과부의 숙부인 陳其美는 손문(孫文 : 쑨원)과 더불어 신해혁명의 주역인데, 그는 申圭植이 1912년 상해에서 조직한 동제사(同濟社 ; 상해에서 조직된 최초의 한국독립운등 단체) 시절에 이미 한국독립운동을 지원했다 (金喜坤, 「同濟社의 結成과 活動」, 『韓國史硏究』48(1985), pp.180~182 참조).
김원봉은 1925년에 장개석(蔣介石 ; 장제스)이 교장으로 있던 황포군관학교에 4기로 입학하여 졸업했다. 그리하여 그는 중국군사위원회에 있던 동기생을 통해 지원을 받았다(胡春惠, 앞 책, pp.50~53 참조).
이러한 두 갈래의 지원은 앞에서도 본 것과 마찬가지로 1937년대 이후의 양대세력 형성에 영향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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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중국정부의 지원에 크게 의존해 있던 실정이기 때문에 중국의 양대세력에 대한 통합요구를 외면할 수는 없었다. 그 결과 중국정부는 1938년 11월에 장사(長沙)에서 진과부를 통하여 통합에 대한 김구의 동의를 얻게 되었으며, 1939년 1월에는 중경에서 김원봉의 동의를 얻게 되었다.038038 이정식, 『韓國民族主義의 政治學』(1982), pp.268~269.닫기
장개석의 주선에 의해 양대세력의 통합을 위한 몇 차례의 모임이 1939년 초에 열렸다. 그 결과 같은 해 5월에 김구·김원봉은 공동명의로 「동포와 동지에게 고하는 공개장」을 발표했다. 그 내용의 구성은 크게 세가지였다. 첫째는 지난날의 활동에 대한 반성과 현 정세분석이고, 둘째는 현 단계의 정치강령이며, 셋째는 전민족적 통일기구의 조직방법에 대한 의견이었다.039039 金正明, 앞 책, pp.637~640.닫기 양인은 서두에서 과거의 투쟁이 통일된 단결력을 보이지 못하고 아울러 민족혁명의 전략적 임무를 정확하게 파악하지도 못했다고 했다. 그래서 이제는 양인 모두가 조선민족의 해방이라는 대업을 완성하기 위해 협력할 것임을 밝혔다. 이어서 그들은 10개항목의 정치강령을 밝혔는데, 주요한 내용은 자주독립국가의 건설·민주공화제건설·국가적 위기에 기업의 국유화·농민에 대한 토지 분배와 매매금지·노동시간 감소와 보험제도 실시·기본권 보장·의무교육 등이었다.
끝으로 두 사람은 중국 안에서 전개되고 있는 독립운동단체의 통일체 의 조직방법에 대하여 견해를 밝혔다. 그들은 각 단체가 표방하는 주의는 다르지만 현 단계에서 조선혁명에 대한 정치적 강령과 항일전의 상태는 일치한다고 하면서 그러한 성격의 여러 단체들이 지금까지 취해온 연맹식 통일방법은 오히려 불통일 상태의 연장을 초래했고 아울러 무원칙한 파쟁의 합리화에 지나지 않았다고 했다. 따라서 그들은 당시의 상황으로 보아 각 단체의 분립된 활동을 정지하고 공동적 정강과 통일된 조직 하에 주의 와 당파를 초월하고 역량을 집중해야 한다고 했다. 이것은 곧 그들이 ‘연 맹조직론’이 아니라 ‘단일당조직론’을 주장했다는 의미였다.
양인의 합의에 따라 진선협회가 1939년 7월 17일에 중경에서 결성되었다. 진선협회의 성립은 1926년 이후에 성립된 한국유일당촉성회운동과 1935년의 조선민족혁명당을 통한 좌우합작운동이 미완에 그친 것을 극복하고 이루어진 통합체제였다. 때문에 독립운동사에 있어 하나의 획기적인 일이었다. 그러나 진선협회는 출범 직후 통합체의 조직방법을 둘러싸고 의견대립을 보여 암울한 모습을 하였다.
양인의 합의에 의해 광복진선의 3당(한국국민당·재건 한국독립당·조선 혁명당)과 민족전선의 4당(조선민족혁명당·조선민족해방동맹·조선혁명자연맹·조선청년전위동맹)의 7당이 단일당 결성을 위한 통일회의를 개최하였다. 김구·김원봉 양인은 앞에서 본 「공개장」의 내용에서처럼 연맹조직론의 단점을 들추면서 단일당 조직론을 주장했다. 그러나 민족전선에 소속된 조선민족해방동맹과 조선청년전위동맹이 진선협회 성립 2개월 뒤인 9월에 “주의 강령을 달리하는 각 단체의 단일합동에 반대하여 참가를 유보하고 합동형식에 있어서 각 단체에 자연스런 입장을 가지는 소위 연맹조직론을 주장”040040 秋憲樹, 『資料 韓國獨立運動』2, p. 69 ; 金正明, 앞 책, p.673.닫기 하고 민족주의와 결합할 수 없음을 밝혀 조직에 반대하고 결국 통일회의를 탈퇴함으로써 유회되고 말았다. 나머지 5당은 단일당 결성을 위해 통일회담을 개최했고, 단일당 조직을 위한 8개조항에 합의하였으나, 당원자격문제로 민혁이 탈퇴함으로써 단일당 조직은 결국 무산되었다.041041 國史編纂委員會, 『韓國獨立運動史』資料 3, p. 398.닫기
중일전쟁의 전개과정에서 좌우양대세력의 합작이 성립되었다가 순간적으로 결렬되고 말았다. 실패원인은 다음의 몇 가지로 정리된다. 첫째는 민족운동의 변화를 수용하지 못하고 단일당이 지향할 지도노선을 정립하지 못한 데 있다. 둘째의 원인은 독립운동 정당의 당원은 교민에 국한될 수 밖에 없었기 때문에 당세확장을 꾀하는 과정에서 빚어진 각 정당 간의 대립이 심화된 데 있다. 그리고 셋째 원인은 각 당이 단일당의 주도권에 강한 집착을 하였던 데 있다.042042 노경채, 앞 글, p.232닫기 이와 아울러 광복진선측 3당의 의견일치에 비해, 민족전선측은 시작 직후 2당이 이탈하고 결국 민혁까지 이탈하는 분열적인 모습을 보임으로써 김원봉을 비롯한 민족전선의 지도적 한계를 뚜렷이 보여 주었는데, 이 사실도 결렬의 중요 한 원인에 속하였다.

註 035
: 진선협회가 결성되기 이전에 비록 실패하긴 했지만, 양대 세력의 통합 시도가 있기는 했었다. 그것은 1937년 11월에 김원봉이 민족전선을 결성하던 과정에서 김구의 광복진선에게 합류할 것을 권유했다가 거절당한 일이었다. 당시 김구는 김원봉 세력이 중국공산당에 접근해 있고 인민전선파적인 경향이 농후하다고 하여 합류에 반대했다(金正明, 앞 책, p.625).
註 036
: 1932년의 이봉창·윤봉길 양대 의거 이전에는 한국독립운동에 대한 중국의 지원이 거의 없었다. 그러나 양대 의거 이후에는 전과 달리 중국의 각처로부터 지원이 있게 되었다. 그렇더라도 중국정부의 적극적이고 공개 적인 지원은 앞에서 본 바와 같이 중일전쟁 이후에야 비로소 이루어졌다.
註 037
: 진과부의 숙부인 陳其美는 손문(孫文 : 쑨원)과 더불어 신해혁명의 주역인데, 그는 申圭植이 1912년 상해에서 조직한 동제사(同濟社 ; 상해에서 조직된 최초의 한국독립운등 단체) 시절에 이미 한국독립운동을 지원했다 (金喜坤, 「同濟社의 結成과 活動」, 『韓國史硏究』48(1985), pp.180~182 참조).
김원봉은 1925년에 장개석(蔣介石 ; 장제스)이 교장으로 있던 황포군관학교에 4기로 입학하여 졸업했다. 그리하여 그는 중국군사위원회에 있던 동기생을 통해 지원을 받았다(胡春惠, 앞 책, pp.50~53 참조).
이러한 두 갈래의 지원은 앞에서도 본 것과 마찬가지로 1937년대 이후의 양대세력 형성에 영향을 주었다.
註 038
: 이정식, 『韓國民族主義의 政治學』(1982), pp.268~269.
註 039
: 金正明, 앞 책, pp.637~640.
註 040
: 秋憲樹, 『資料 韓國獨立運動』2, p. 69 ; 金正明, 앞 책, p.673.
註 041
: 國史編纂委員會, 『韓國獨立運動史』資料 3, p. 398.
註 042
: 노경채, 앞 글, p.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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