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된 때로부터 제2차 공동위원회가 열리기 전까지 미군정의 정책과 우리겨레의 대응

제1차 미소공위가 무기휴회로 들어가면서 미소관계는 매우 빨리 나빠갔다. 여기서 미군정은 좌우합작운동과 같은 새로운 길을 찾기 시작했으며, 이에 대응하여 우리겨레 사이에서는 크게 보아 네 갈래의 정치운동이 벌어지게 되었다. 첫째, 이승만이 중심이 되어 남한에 단독정부를 세우자는 운동이 그것이다. 둘째, 김구가 중심이 되어 반탁노선을 강화하자는 운동이 그것이다. 셋째, 미군정의 지원 아래 김규식과 여운형이 중심이 된 좌우합작운동이 그것이다. 넷째, 좌익의 남조선로등당(남로당)의 창당과 남로당을 바탕으로 한 반미 ‘인민항쟁’이 그것이다.

(1) 이승만세력과 남한 단정수립운동
제1차 미소공위가 결렬되자 이승만은 평소부터 마음 속에 지녔던 남한 단정수립론을 공개적으로 내놓았다. 그에 따르면 북한에서는 소련점령군이 독재적인 방법으로 모든 반대파를 숙청하고 자신의 ‘앞잡이’ 김일성을 내세워 소비에트 국가를 만들고 있으며, 이 소비에트 국가를 수단삼아 곧 남한마저 공산화하려고 하는 판이므로 이것을 막으려면 남한에서 지금이라도 단독정부를 세워야 한다는 것이다.
이승만이 남한 단정수립론을 공개적으로 말한 것은 6월 3일 전북 정 읍에서였다.040040 『서울신문』, 1946년 6월 4일 ;『中外新報』,1946년 6월 5일.닫기 그는 “남쪽만이라도 임시정부 또는 위원회 같은 것을 조직하자”고 제의했던 것이다. 이러한 목적을 관철하기 위하여 이승만은 6월 29일 민족통일총본부를 세우고 그 총재가 되었다. 이 기구에는 김구를 비롯한 임정계 인사들도 참여했는데, 그것은 단정노선을 지지해서가 아니라 우익의 두 기둥인 이승만과 김구가 손을 잡아 좌우합작운동을 경계해 보자는 것이었다. 어쨋든 이승만은 임정세력을 끌어들여 민족통일총본부를 결성하는데 성공하자, 9월 7일 단독정부수립을 위해 선거에 대비하라고까지 말했다.
그러나 이승만의 단독정부수립운동은 좌우합작운동이 어느 정도 열매를 맺어 10월 7일 좌우합작 7원칙이 발표되고 미군정이 이에 근거하여 10월 12일 입법기관 설치령을 공포하자 설 자리를 잃는 듯 하였다. 그래서 이승만은 미국으로 건너가 미국정부와 국제연합을 상대로 자신의 노선을 설득시키고자 하였다.
(2) 좌우합작운동의 출발과 실패
제1차 미소공위가 결렬된 상태에서도 미군정은 모스크바 협정이 실천 될 수 있다는 기대를 완전히 저버리지 않았다. 그리하여 남한에서 온건한 좌파와 온건한 우파로 하여금 좌우합작운동을 통해 좌우연합정부를 만들게 한 다음 모스크바협정을 지지하게끔 유도하고자 했다. 좌우연합 정부를 중심으로 토지개혁을 비롯한 진보적인 개혁정책들을 추구해 나가면 남한의 대다수 주민들이 이 정부를 지지해 줄 것이며, 그렇게 되면 극우세력과 극좌세력의 영향력이 크게 줄어들어 이 정부가 모스크바 협정을 지지함에 거의 아무런 어려움이 없으리라고 내다본 것이다. 이러한 구상은 그때 미군정청 안의 실력자였던 버취가 내놓았다.
또한 여운형과 김규식은 원래 좌우합작의 필요성을 강조하던 지도자 들이었다. 그들은 대체로 ① 모스크바 협정에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나 이것을 받아들임으로써 ‘조선인의 임시정부’ 수립을 앞당길 수 있고, ② 조선인의 임시정부를 세우기만 하면 신탁통치문제를 자주적으로 극복할 수 있다고 전제하면서, 그러한 길로 가기 위해서는 남한의 좌파와 우파가 합작해 미소공동위원회를 뒷받침해 주어야 한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이처럼 미군정의 발상에 남한의 정치지도자들의 주체적 판단이 결합되어 좌우합작운동은 전개됐다.041041 강만길,「좌우합작운동의 경위와 그 성격」,『한국민족운동사론』(한길사, 1985).닫기 이 운동의 전개과정은 ① 좌파와 우파의 합작조건의 제시와 그것을 바탕으로 한 합작위원회 7원칙의 성립 단계, ② 합작위원회의 활동이 남조선 과도입법의원의 성립으로 나아가는 단계, ③ 여운형이 암살됨으로써 좌우합작운동이 실패하자 김규식이 민족자주연맹을 결성해 활동하는 단계로 나누어 볼 수 있다.
1946년 5월 25일의 예비회담으로 시작된 좌우합작운동은 7월말 좌측이 합작의 5원칙을, 우측이 8원칙을 제시함으로 본격적으로 추진되었다. 그러나 양 입장의 사이에는 메우기 어려운 간격이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에 난관에 부딪히게 되었다. 결국 좌우합작운동은 좌파와 우파의 합작으로 이어지지 못하고 중도좌파와 중도우파의 합작에 머물고 말았다. 또 그렇게 되었기에 그나마 좌우합작 7원칙이란 타협안이 10월 7일 발표될 수 있었다. 이 7원칙에는 남한에 과도입법의원을 두어 여기서 친일파 문제를 다루며 토지개혁에 관해서는 몰수 또는 조건부 몰 수 또는 체감매상 등에 의해 얻은 토지를 농민에게 무상분배하기로 했다. 물론 미소공동위원회를 빨리 다시 열어 모스크바 협정에 따른 ‘조선인의 임시정부’를 세운다는 큰 원칙을 밝혔다. 그러나 이러한 좌우합작 7원칙에 대해 극좌와 극우으로부터 맹렬한 공격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미군정안의 군인세력 역시 매우 부정적인 입장을 취하였다.
좌우합작운동의 기반이 그만큼 취약함에도 불구하고 미군정은 원래의 구상대로 남조선 과도입법의원을 구성하였다. 과도입법의원은 간접선거 로 당선된 민선의원 45명과 관선의원 45명으로 구성되어 12월 12일에 개원되었다. 그러나 과도입법의원은 애초의 목적과는 다른 방향으로 움직여 나가고 있었다. 여기에는 우파인사가 다수를 차지하고 있었으며, 여운형을 비롯한 온건좌파들이 과도입법의원에 실망하여 관선의원 등록을 거부했다. 민전에서도 과도입법의원의 설치가 단독정부를 수립하려는 음모라고 비난하였고, 한민당에서도 좌우합작위원회의 해체를 주장하였다. 따라서 1946년말과 1947년초의 시점에서는 좌우합작위원회는 완전히 사면초가에 빠지게 되었다.
(3) 남로당의 결성과 ‘신전술’로의 전환
미군정이 좌우합작운동을 추진한 데에는 이 운동을 통하여 극좌세력을 약화시킨다는 계산을 갖고 있었다. 이와 병행하여 미군정은 조선공산당을 비롯한 극좌세력을 힘으로 억눌렸다. 그 계기는 조선공산당의 ‘정판사 위폐사건’이었다. 조선공산당이 2 백만 원의 지폐를 위조했다는 혐의로 미군정은 조선공산당 간부를 체포하거나 수배를 하고 조선공산당 기관지 『해방일보』를 정간시켰다. 이와 함께 7월 8일 서울에 있던 소련영사관을 폐쇄했다.
이러한 새로운 국면에서 조선공산당은 자신의 전술을 바꾸지 않을 수 없었다.042042 김남식, 앞 책 참조.닫기 초기에 조선공산당은 ‘국제 민주주의 노선’에 입각하여 미국을 민주주의국, 미군을 해방군으로 규정한 다음 “미군정에 협력하면서 부르조아 민주주의 혁명을 수행한다”는 노선을 취해 왔다. 그러나 더 이상 이 노선에 매달릴 수 없었으며, 그리하여 잠시 월북했다가 서울로 돌아온 박헌영은 7월 26일 ‘신전술’을 지시하였다. 즉 이 전술에 따르면 미국의 정책을 ‘제국주의적 반동정책’이라고 비판하고 반미운동을 펼칠 것을 주장하었다. 또한 남한정권이 미군정과 친일파 및 민족반역자의 손에 있다고 분석하고 따라서 정권을 인민위원회로 넘기게 하는 대중운동을 펼쳐야 하고 남한에서도 북한에서와 같이 개혁조처들이 무조건 취해져야 한다고 주장되었다.
박헌영은 자신의 새 전술을 관철시키기 위해 여운형의 조선인민당과 백남운(白南雲)의 남조선신민당 및 자신의 조선공산당을 통합하려고 노력하였다. 그리하여 통합을 찬성하는 세력들이 결집하여 9월 4일 남조선 로동당으로 합당에 합의하였다. 그리고 다음날 박헌영은 미군정의 체포령을 피해 월북했다. 그는 해주에 머물면서 남로당 안에 조직된 남조선파업공동투쟁위원회가 주도하는 ‘10월폭동’을 지휘하여 나갔다. 미군정의 성립 이후 가장 큰 시련을 안겨주었던 이 불행한 일이 가라앉게 된 시점인 11월 23일 서울에서 남로당은 정식으로 출범하였다. 남로당은 출범과 더불어 “10월 인민항쟁을 조선인민의 투쟁역량을 역사적으로 증명 했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그것이 끝났을 때 남한의 대다수 주민들은 남로당 주도 아래 펼쳐졌던 파업과 암살 및 폭등에 지쳐있었으며, 그리하여 그 때 남로당 간부였던 사람이 뒷날 시인했듯이, 남로당은 일반 사람들과 떨어지게 되었고, 그로 말미암아 고립상태에 빠졌다.
(4) 반탁독립투쟁위원회의 결성과 그 활동
한편 김구의 임정세력은 처음에는 이승만이 주도한 민족통일총본부에 참여하고 이승만의 도미(渡美)외교를 후원하는 등 이승만과 유대를 유지하였다. 그런가 하면 단정수립운동과 반대되는 김규식과 여운형의 좌우합작운동에 대해서도 성원을 보냈고, 미소공위를 빨리 다시 열게 하자는 운동에 대해서도 찬성하는 입장을 취했다.
이러한 임정세력의 태도가 다시 한번 의문의 여지없이 명백해진 때는 1946년 12월과 1947년 1월 사이였다. 이 무렵 미군정은 제2차 미소 공동위원회를 열어 새 국면을 조성할 생각을 갖고 소련과 교섭을 계속 했으며, 그 결과 미점령군과 소점령군은 “공동위원회에 참가하는 정당과 사회단체는 모스크바 결정을 반대할 수 없으며, 반대하는 경우 조선인의 임시정부수립을 위한 공동위원회의 협의대상에서 제외한다”는 선에 합의할 수 있었다. 즉 우익의 반탁투쟁을 처음부터 막아보자는 것이었다. 여기서 임정세력은 다시 한 번 반탁의 깃발을 높이 들고 미군정의 노선에 맞서게 되었다.
임정세력의 한독당은 우선 좌우합작위원회의 해체를 요구했으며, 한민당과 손잡고 1947년 1월 24일 김구를 위원장으로 하고 미국에서 활동중인 이승만을 고문으로 하는 반탁독립투쟁위원회를 결성했다. 반탁독립투쟁위원회는 1월 29일 반탁투쟁에 관한 통첩을 전국적으로 보내어 대대적인 반탁운동을 지령하였다. 이러한 운동은 날로 거세어 졌으며 3월에 들어서는 임정이 아예 정부를 자처하면서 미군정에 대들기도 하였다. 이에 따라 김구와 이승만의 사이에는 미묘한 경쟁관계가 다시 드러나기 시작했다. 4월에 귀국한 이승만은 임정이 법통을 내세우는 것을 삼가해야 한다고 발언하면서 김구를 견제한 것이다.
(5) 북한의 정치상황
남한의 정치가 여러 갈래의 서로 대립되는 운동 속에 빠져들어 있었음에 비해, 북한에서는 김일성을 중심한 단독정권의 기반이 더욱 더 굳어가고 있었다.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가 결열된 뒤인 7월 22일에는 북조선민주주의 민족통일전선이 결성됐다. 이어 이 기반위에서 8월 30일에는 김일성의 북조선공산당과 김두봉의 조선신민당이 합당하여 북조선로등당을 결성하였다.043043 김용복, 앞 글 참조.닫기
북한의 공산주의 세력이 이제 북로당 하나로 통합된 시점에서 남한의 공산주의 및 좌파세력 전반에 대한 북한의 영향력은 크게 늘어났다. 해방 직후 한반도 전체에서의 공산주의운동의 중심이 서울이었는데, 이 시점에 와서는 북로당이 남로당으로 통합된 남한공산주의자들은 물론 사로당으로 통합된 남한의 비공산좌파세력을 이끌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이 무렵인 11월 3일 북한에서는 도·시·군 인민위원회 선거가, 1947년 2월에는 면·리 인민위원회 선거가 실시되었다. 이를 토대로 하여 1947년 2월 21일에는 북조선인민회의가 소집되었다. 북조선인민회의는 그 상임위원장으로 김두봉을 선출했으며, 이어 종전의 북조선임시인 민위원회에서 임시라는 용어를 없앤 북조선인민위원회를 선출했다.
이 북조선인민위원회는 북한의 단독정부의 성격을 가진 기구로서 그 산하에 행정 각 부서를 갖췄다. 위원장에는 김일성이, 부위원장에는 김책(金策)과 홍기주(洪箕疇)가 선출되었다. 2월 19일 평양방송은 “북조선인민위원회는 북조선에 있어서 인민정부의 최고기관이다”라고 주장했다. 실제로 이 기구는 곧 내각이며 정부로서, 이 기구의 발족과 함께 북한에는 공산정권이 공식적으로 세워진 것과 마찬가지 였다.

註 040
: 『서울신문』, 1946년 6월 4일 ;『中外新報』,1946년 6월 5일.
註 041
: 강만길,「좌우합작운동의 경위와 그 성격」,『한국민족운동사론』(한길사, 1985).
註 042
: 김남식, 앞 책 참조.
註 043
: 김용복, 앞 글 참조.

※ 본서의 내용은 각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로,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는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