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民衆運動으로서의 獨立協會와 萬民共同會에 대한 연구는 日帝治下에서는 전혀 없었고, 모두가 解放後에 이루어진 것들이다.
獨立協會의 創立에 대해서는 愼鏞廈 「獨立協會의 創立과 組織」(「獨立協會의 社會思想硏究」 所收, 1973)이 있다. 이 논문은 독립 협회의 創立過程과 그 系譜를 밝히고 독립 협회가 創立 당초의 高級官僚主導期부터 民衆進出期, 民衆主導期, 民衆鬪爭期로 발전하면서 어떻게 組織이 변화하게 되는 가를 밝히고 地方支會와 姉妹團體와 支持層을 분석하였다.
獨立協會의 思想에 대해서는 朴成根 「獨立協會의 思想的 硏究」(「李弘植博士回甲紀念韓國史論叢」, 1969), 柳永烈 「獨立協會의 民權思想硏究」(「史學硏究」 第22號, 1973), 愼鏞廈 「獨立協會의 社會思想」(「韓國史硏究」 第9輯, 1973), 田鳳德 「徐載弼의 法律思想」(「韓國史硏究」 第10輯, 197), 愼鏞廈 「獨立協會의 社會思想의 社會學的 解釋」(「獨立協會硏究」, 1976)등이 있다.
朴性根씨의 논문은 독립협회의 사상을 民權思想, 民族主義思想, 政治思想, 外交思想, 經濟思想 등으로 나누어 그 특징을 구명하였다.
柳永烈씨의 논문은 독립협회의 사상을 民權保障思想(平等權意識·自由權意識)과 人民參政思想(國家觀·政治觀·政體觀·議會觀·革命觀)등으로 나누어 잘 분석하였다.
愼鏞廈의 논문은 독립협회의 사상의 社會的 背景을 지적하고 그것이 西歐市民社會思想의 單線的인 흐름이 아니라 國內에서 實學의 傳統을 계승 발전 시킨 進步的 思想이 합쳐서 형성된 사상임을 지적하고 이를 自主獨立思想, 自由民權思想, 自强改革思想의 3면으로부터 분석하였다.
田鳳德씨의 논문은 원래 政治家를 지망했던 徐載弼의 法律에 대한 사상을 人權思想과 人民主權論의 측면으로 구명한 것이었다. 위의 논문들은 거의 모두가 長文의 實證的 연구논문으로서 이들을 종합하면 독립협회의 思想의 특징은 대체로 밝혀졌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獨立協會의 運動에 대해서는, 韓興洙 「獨立協會의 政治集團化過程」(「社會科學論集」), 姜在彥 「獨立新聞·獨立協會·萬民共同會―1890年代後半期いおけるブルジヨア的 變革運動」(「朝鮮史硏究會論文集」 第9輯, 1972), 千寬宇 「獨立協會의 國會開設運動」(「韓國史의 再發見」 所收, 1975), 朴宗烈 「獨立協會의 民衆啓發活動에 대한 考察」(「春川敎育大學論文集」 第11輯, 1972), 柳永烈 「獨立協會의 民權運動展開過程」(「史叢」 第17,18合輯, 1973), 愼鏞廈 「獨立協會의 獨立門建立과 討論會의 啓蒙活動」(「獨立協會의 民族運動硏究」 所收, 1974), 同 「獨立協會의 自主民權自强運動(同, 1974), 同 「1898年의 官民共同會」(同, 1974)등이 있다.
이 논문들은 모두 實證的인 연구논문들로써 獨立協會가 창립된 후, ① 獨立門을 建立하는 과정, ② 討論會를 열어 市民을 啓蒙하는 과정과 그 主題의 내용, ③ 독립협회가 政治集團化 되어가는 과정, 救國宣言上疏運動, ④ 러시아의 釜山絕影島石炭庫基址要求저지운동, ⑤ 日本의 絕影島石炭基址回收운동, ⑥ 露韓銀行撤去운동, ⑦ 러시아財政顧問 및 軍事敎官撤去 운동, ⑧ 徐載弼在留運動, ⑨ 生命·財產의 自由權守護運動, ⑩ 러시아의 木浦·鎭南浦租界賣渡저지운동, ⑪ 프랑스의 鑛山利權要求 반대운동, ⑫ 獨逸의 金鑛利權要求 반대운동, ⑬ 各國의 利權調查와 利權譲與 반대운동, ⑭ 馨學校設立운동, ⑮ 皇宅護衛外人部隊創設저지운동, ⑯ 孥戮法 및 連坐法復活 저지운동, ⑰ 七大臣糾彈과 自强改革內閣樹立요구운동, ⑱ 議會設立運動, ⑲ 官民共同會 운동등을 매우 자세히 實證的으로 밝히었다.
위의 논문들의 공동의 成果에 의하여 이제 獨立協會運動의 구체적 내용과 그 근대사에서의 공헌이 비교적 소상히 밝혀진 셈이라고 볼 수 있다.
특히 이 논문들은 모두 함께 종래 학계의 일부에서 獨立協會를 低評廣해오던 先入見을 불식하고 近代史에서 독립협회의 운동이 이룩한 공헌을 정당히 평가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고 볼 수 있다.
이 논문들이 밝힌 獨立協會와 萬民共同會 운동의 본질은 韓國을 둘러싸고 있는 列强사이에 勢力均衡을 만들어서 이 勢力均衡이 維持되는 동안에 自主富强한 國民國家와 市民社會를 건설함으로써 勢力均衡이 깨어져도 자기의 힘으로 自主獨立을 지키려고 한 것에 있다고 지적되었다. 이 운동은 우선 俄館播遷 이후 본격적으로 시작된 列强의 利權侵奪을 저지했으며, 1898년 3월에는 萬民共同會鬪爭에 의하여 釜山影島에까지 진출하려던 帝政러시아를 遼東半島로 후퇴시키고 日本勢力을 半島에서 크게 후퇴시켜 韓國을 둘러싼 國際勢力均衡을 형성·강화시켜서 이 勢力均衡이 1904년까지 6년간 지속되었으므로 이것은 韓國民族이 獨立을 지킬 自强體制를 수립하기 위한 또 한번의 絕好의 機會를 만든 것이었다고 한다.
獨立協會와 萬民共同會라는 結社體에 집결한 한국의 開化勢力은 國際勢力均衡의 結果 생긴 眞空의 범위를 점차 擴大해 가면서 市民的 富國强兵體制를 만들기 위하여 여러가지 노력을 유지 강화하기 위해서는 「國民主權」의 원리에 기초하여 國民을 政治에 참여시켜서 國民이 나라의 防衛를 담당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國民自由權論, 國民平等權論, 國民主權論, 國民參政權論등 民權의 伸張을 주장하였으며, 立憲代議政體의 樹立, 行政改革, 財政改革, 新敎育실시와 新式學校설립, 產業開發, 近代國防體制의 수립, 社會慣習改革, 自主中立外交, 民族文化의 發展등을 주장하고 앞서 든 바와 같은 운동을 전개하였다는 사실이다.
특히 주목할 것은 이 기간에 改革派政府를 수립하여 國政全般에 걸쳐서 民族을 防衛할 수 있는 大更張改革을 단행하려 했을 뿐 아니라 〈國會〉를 개설하여 民權을 가진 國民의 힘으로 自主獨立을 지킬 國民動員體制를 수립하려고 한 사실이다.
특히 獨立協會의 國會開設運動은 모든 연구자에 의하여 크게 강조되었다. 당시 改革派들은 國王의 專制權에 의하여 귀중한 利權들이 열강에게 讓與되고 侵奪당하는 것을 보고 列强으로부터 협박당하는 경우에 守舊派들이 國權마저 허약하게 外國에 넘겨주지 않을까 염려하고 두려워하였다. 獨立協會는 國會를 개설하여 國民의 意思를 國權에 反映·實現시킬 뿐만 아니라 外國과의 條約을 비롯한 모든 國權의 중요사항을 國會를 통과하지 않으면 시행되지 못하게 함으로써 당장 利權侵奪을 중지시킬 뿐 아니라 언제 닥쳐올지 모르는 어느 一列强의 國權侵奪 시도에 對備하여 獨立協會의 開化勢力과 愛國的 國民의 團結된 힘으로 自主獨立을 지킬 應戰體制를 갖추려 하였다. 당시 列强의 侵略은 國王과 몇大臣들의 힘으로 막을 수 있는 성격의 것이 아니었으므로 이것은 적절한 對應策이었다고 지적되었다.
近代史에서 독립협회 운동이 이룩한 공헌을 정당히 평가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고 볼 수 있다.
위와는 약간 특수한 문제로 愼鏞廈 「19世紀末의 韓國對外貿易의 展開와 商權問題―獨立協會와 皇國中央總商會의 商權守護運動」(「亞細亞硏究」 通卷 第52號, 1974)이 있다. 이 논문은 서울에서 市廛商人들이 조직한 최초의 서울 商業會議所로서의 皇國中央總商會와 獨立協會가 合同하여 外國商人들의 漢城開棧에 의한 서울에의 商權侵奪에 대하여 商權守護를 전개하는 과정을 다룬 논문이다. 이 논문에서 獨立協會는 그의 자매단체인 皇國協會가 民族的 權益인 商權守護는 적극 지지하나 그들의 獨占的 特權維持에 대해서는 냉철한 비판을 가하였다. 이에 中央總商會는 商業獨占을 포기하고 商業自由化를 지지하면서 獨立協會의 孥戮法·連坐法復活沮止運動과 自强改革內閣 수립요구 운동을 지지함으로 民族商權 보호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려고 노력하였음을 밝히고 있다.
萬民共同會의 운동에 대해서는 愼鏞廈 「萬民共同會의 自主民權自强運動」(「韓國史硏究」 第11輯, 1975)이 있다. 이 논문은 萬民共同會의 두가지 종류로서 독립협회가 주최하고 조직하는 獨立協會의 民衆動員 集會로서의 만민공동회와, 독립협회와는 관계없이 民衆들이 수시로 자발적으로 조직하는 萬民共同會를 구분하여 분석하고, 전자의 만민공동회가 1898년 3월 러시아의 釜山影島租借要求를 저지하고 露韓銀行의 撤廢와 러시아 財政顧問 및 軍事敎官을 撤收케 하고 러시아의 積極干涉政策을 저지하여 釜山 影島까지 진출하려던 러시아의 세력을 滿州로 후퇴시켰고, 후자의 만민공동회가 1898년 11월부터 ① 17名指導者釋放運動 ② 獨立協會復設運動 ③ 五大臣糾彈과 自强改革內閣樹立 요구운동 ④ 獻議六條實行 요구운동 ⑤ 皇國協會의 攻撃沮止 ⑥ 中樞院의 議會로의 活用 요구운동 ⑦ 更選賢良 요구 운동 등을 전개하였음을 자세히 밝히었다.
독립신문에 대한 연구로는 李光麟 「徐載弼의 독립신문 刊行에 대하여」(「震檀學報」 第39輯, 1975)와 愼鏞廈 「독립신문의 創刊과 그 啓蒙的 役割」(「韓國史論」 第2輯, 1975)이 동시에 나왔다. 李光麟교수의 논문은 徐載弼이 開化派同志들의 권고로 歸國하여 尹致昊의 도움을 받고 그와 함께 「독립신문」을 간행하였으며, 「독립신문」이 利用한 印刷施設도 「헐버트」가 경영하고 있던 培材學堂의 三文出版社였다고 밝히었다.
한편 愼鏞廈의 논문은 「독립신문」의 創刊이 徐載弼 개인의 업적이 아니라 國內의 穩健開化派가 國民啓蒙을 위하여 資金 및 建物과 人物을 공급하고 徐載弼의 頭腦와 知識을 빌리려 創刊한 國內開化派와 徐載弼의 合作의 產物이며, 獨立新聞社는 政府資金으로 구입한 獨自의 印刷施設을 갖고 있었음을 논증하고, 「독립신문」이 報道的 機能보다 啓蒙的 役割을 수행한 점과 輿論과 公論을 형성하여 社會政治運動을 전개한 경위를 밝히었다. 지금까지 발표된 논문들은 獨立協會와 萬民共同會가 國會設立과 改革內閣樹立과 愛國的 國民大衆의 團結에 의거하여 列强의 侵略으로부터 나라를 구하려고 시도한 운동은 1905년 소위 〈乙巳條約〉에 의하여 國權을 박탈당하기 이전에 있어서의 自主獨立의 維持와 守護를 위하여 노력한 한국인 最後의 大規模運動이라는 사실에 견해가 합치되었다.
獨立協會·萬民共同會 運動이 실패했음에도 불구하고 이 운동의 영향이 큰 歷史的 意義를 갖는 것은 무엇보다도 開化思想과 民衆이 결합하였다는 사실에 의거한 것이라고 지적되었다. 이 때 독립협회에 의하여 開化思想이 民衆과 結合하여 民衆의 思想으로 실천되기 시작하였다는 사실은 그 후의 한국의 民族運動과 國權恢復運動에 큰 전환점을 만든 것이었다.
1898년 전후에 列强의 利權侵奪과 植民地化政策은 中國과 韓國에 모두 자행되었는데, 그에 응전하는 救國運動으로서 中國에서 전개된 것이 康有爲 등의 戊戌政變이었고, 韓國에서 전개된 것이 獨立協會·萬民共同會運動이었다. 즉 이 두개의 운동은 두 나라의 상대가 대는 운동이었다. 그러나 이 두개의 運動 중에서 獨立協會·萬民共同會運動이 보다 발전된 운동이었다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당시 東洋諸國의 救國運動이 方向에서 중요한 課題의 하나는 救國할 수 있으며 時代問題해결에 가장 적합한 사상의 하나이었던 開化獨立思想(變法自强思想)과 救國運動이 성공할 수 있는 主體勢力인 國民·民衆이 結合하는 것이었는데, 中國의 戊戌政變은 아직도 變法自强思想을 民衆과 結合시키지 못하였는데 비하여 獨立協會·萬民共同會運動은 開化獨立思想과 民衆을 結合시키는데 성공하였기 때문이었다.
이 사실은 長期動態的으로 볼 때는 매우 중요한 것이다. 이 때 開化獨立思想과 民衆이 結合하였기 때문에 이 이후에는 民衆에 의해서 民族運動의 方向과 推進力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歷史發展의 大勢에 合致되어 전개된 것이었다. 또한 바로 이 때문에 1905년 〈乙巳條約〉에 의하여 國權을 박탈당하자 民衆의 분발에 의하여 愛國啓蒙運動이 일어나게 된 것이었다.
獨立協會·萬民共同會運動에 대한 硏究에서 앞으로의 문제점은 이 運動의 失敗의 原因을 더욱 깊이 구명하고, 이 운동이 韓國近代史에 갖는 의의를 더욱 역사적 사회적으로 구명하는 일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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