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미군정의 방송정책과 방송 편성

미군정은 가능한 한 많은 한국인들에게 미군정의 활동에 관한 정확한 정보를 전달하고, 민주주의의 원칙과 실제에 대한 다양한 정보를 확산하는 것을 공보 업무의 가장 중요한 목적으로 규정하고 있었다.047047 United States Army Forces In Korea, Department of Public Information, History of the Department of Public Information(DPI), Record Group No. 332, Box No. 39(이하 History of the DPI로 약칭), pp.18~~19.닫기 물론 여기에서 거론된 공보(public information)란 미군정의 점령정책 수행에 필요한 활동이라는 점에서 사실상 선전을 가리키는 것에 다름 아니었다.048048 장영민, 앞의 글, 117쪽.
본 논문에서는 미군정이 점령정책의 효율적 수행을 위해 기획, 제작한 프로그램을 전체적으로 가리킬 때는 공보프로그램이라고 하고, 그중에서도 반소반공이라는 명확한 목적을 지닌 프로그램을 가리킬 때는 선전프로그램이라고 구분해 부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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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미군정은 미디어 종사자들에게 미국식 제작방식을 훈련 및 경험시키는 것도 공보활동의 중요한 목적 중 하나로 거론했다. 이와 같은 공보활동의 목적들은 방송에 그대로 적용되었다. 방송을 점령정책의 효율적 수단으로 활용하기 위한 공보프로그램들을 제작하도록 하는 한편 미국식 프로그램 편성 및 제작 방식을 도입하도록 하기도 했다.
미군정은 방송국을 접수한 직후 “방송 내용과 편성에 대한 일체”를 군정청 정보부장 헤이워드 중령이 주관하게 되었다고 밝혔고,049049 『매일신보』 1945년 9월 17일, 18일(『언론연표』 Ⅱ, 806쪽).닫기 곧 방송국에 미군 감독관을 파견하였다.050050 노정팔, 앞의 책, 1995, 39~43쪽.닫기 미군정이 파견한 감독관들은 프로그램의 편성과 제작을 감독하였고, 특히 방송현업이 공보부로 이관된 뒤에는 각과마다 감독관을 배치하여 프로그램 내용에 대해 구체적인 통제를 가했다. 물론 일제하에서와 같이 철저하게 사전검열을 한 것은 아니었지만, 점령정책의 효율적 수행을 위해 필요한 부분에 대해서만큼은 비교적 철저한 통제를 가했다.051051 한국방송개발원, 『광복 50년 한국방송의 평가와 전망』, 1995, 6~26쪽.닫기 특히 1948년에 들어서서는 미군 민정처가 직접 방송에 관여해 선전프로그램 제작을 주도하기도 했다.052052 United States Army Forces In Korea, Office of Civil Information, Public Relations, Relations with Koreans, Record Group No. 332, Box No. 42(이하 Relations with Koreans 으로 약칭), p.26.닫기 그러면서도 미군정은 적어도 방송에 관한 한 공정성을 강조했다. 이와 같은 입장은 군정장관 러치가 “방송원고는 어떠한 기준으로써 검열하며 중요한 금지사항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답한 내용에서 잘 드러난다.053053 『중외신보』 1947년 2월 28일(『기사모음』, 225~226쪽).닫기

공보부에서 좌우익을 막론하고 공평하게 취급하고 있다. 원고는 허위보도와 선동언사와 상호비방을 삭제하기 위하여 신중히 검열한다. 그리고 인신공격을 방지하고 방송도덕을 준수하기 위하여 가끔 원고의 일부를 정정 혹은 삭제도 하나 이것은 부득이한 일이다.

미국인 고문들은 특히 뉴스나 선전프로그램에 대해 강력한 통제를 가했다. 미군정은 뉴스에 대해서는 처음에 ‘사전심사’를 했지만, 그 뒤에 “어느 정도 자리”가 잡히면서부터는 ‘사후심사’로 바꾸고 뉴스항목만 사전에 알려주도록 했다.054054 노정팔, 앞의 책, 1995, 28~29쪽.닫기 또한 정치적 색채가 확실하게 드러나는 “강연방송 같은 것은 아예 군정청 공보부에 강연과를 두어, 원고의 사전 검열을 거친 후 방송국에 보내 와 원고대로만 방송을 하도록 하였다”고 한다. 한편 미군정은 점령정책에 필요한 공보프로그램을 대거 방송하도록 하기도 했는데, 이는 특히 방송현업이 공보부로 이관된 뒤에 더욱 체계적으로 이루어졌다.055055 차재영, 앞의 글, 29~52쪽.닫기 공보프로그램으로는 ‘군정청뉴스’와 같이 미군정의 활동을 알리는 프로그램뿐만 아니라 미국의 소리 방송, 정치 강연 등도 포함되었다. 미군정은 필요하다고 판단되면 미국의 소리 방송이나 특정 정치인의 강연을 이용해 여론 조작을 시도하기도 했다.056056 『뉴욕 타임즈』 존스톤 기자의 박헌영 기자 회견 결과가 국내에 널리 보도된 것은, 1946년 1월 15일의 미국의 소리 방송 때문이었다. 사실 여부조차 논란이 되었고, 정작 『뉴욕 타임즈』에는 실리지도 않았던 내용이 미국의 소리 방송에서 다루어진 것은 미군정의 공작 때문이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미국의 소리 방송은 1945년 12월부터 고정 편성되어 30분 동안 방송되었다. 정용욱, 『해방 전후 미국의 대한정책』(서울대학교 출판부, 2003), 174~176쪽.닫기 1946년 4월에 당시 방송국장 이혜구는 “비록 프로 편성에 있어서 미군 감독관의 허가를 받고 있으나 완전히 우리 손으로 운영되고 있습니다”라고 하면서, 다만 “방송 푸로 중 정치 강연에 대해여는 체결권이 공보국에 있으며 우리 국에 없다는 것을 이 기회에 말하고 싶습니다”라고 주장했다.057057 『한성일보』 1946년 4월 4일(『기사모음』, 214~216쪽).닫기 1년여가 지난 1947년 7월에 당시 편성과장 송영호는 “본 방송국은 전 권한이 군정부의 감독 하에 있음으로 우리 한인 직원들은 오직 기계적인 활동을 하고 있을 뿐입니다”라는 자조적 표현을 하기도 했다.058058 『가정신문』 1947년 7월 10일(『언론연표』 Ⅱ, 837쪽).닫기 이런 주장들을 통해 미군정이 일부 프로그램에 대해서만큼은 매우 강력한 통제를 가했음을 알 수 있다.059059 미군정 초기 편성계장을 지낸 이덕근은 당시의 방송이 ‘미군정청 한국말 방송’에 불과했었다고 회고했다. 이덕근, 「사단도 많고 사연도 긴 3년」 (『신문과 방송』 1986년 8월호), 11쪽.닫기 이런 주장들은 미군정이 정치적 색채가 명확히 드러나는 정당의 강연을 직접 관장하고, 신탁통치 등 정치적 사안에 대한 보도와 관련해 강력한 통제를 가한 것에 대한 반응으로서 나타난 것이었다.
한편 미군정의 영향으로 미국식 제작시스템이 도입되고, 편성방식이 근대화 되는 등 방송체제에 긍정적인 변화가 나타나기도 했다.060060 노정팔, 앞의 책, 1995, 43~45·83~86쪽.닫기 먼저 미군정은 1946년 3월말에 방송국이 공보부 소속이 되면서 미국식 제작 체제를 도입하여, 종래의 편성, 방송의 두 과를 기획과, 연출과, 방송과 세 과 체제로 개편하였다. 또한 미군 감독관들의 제안으로 1946년 10월에 고정 편성제가 도입하고, 15분 단위제가 채택되었다. 주간 기본편성표를 작성해 운용하고, 15분 단위로 프로그램을 편성하는 근대적 편성방식이 도입되었던 것이다. 방송의 연속성을 위해 프로그램과 프로그램 사이에 간주곡을 사용하도록 했고, 다양한 프로그램들을 가능한 한 극화해 방송하도록 했다. 이런 시도는 기존 체제에 익숙해 있던 방송인들로부터 일시적인 반발을 사기도 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곧 정착되었다. 이런 시도들은 방송의 형식적, 내용적 근대화가 크게 진전되는 계기가 되었다.061061 임종수, 앞의 글, 378쪽.닫기 편성방식의 변화에 대한 기존 방송인들의 인식은 대담 중 나온 윤길구의 다음과 같은 발언에서 잘 드러난다.062062 이규일 외, 앞의 글, 81~83쪽.닫기

예전에는 창의성이란 게 없었구, 그저 무난하게 하기만 하면 됐죠. 아나운서라는 게 맘대로 떠들지 못했어요. 그런데 사람이 습관이란 게 참 이상하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제가 그때 주임이었거든요. 그런데 미국 사람이 와서 하는 말이 “이런 엉터리 방송이 어디 있느냐? 시간마다 짤라서 15분 방송으로 해라”이거예요. 그래 모두 반대를 했죠. “그런 법이 어디 있느냐? 좀 넘을 때도 있고 또 모자랄 때도 있지, 또 뭐 한 때는 좀 쉬었다고 가고 하지 사람이 하는 건데 어찌 그럴 수가 있느냐. 정말에요. 일제 시대에는 이런 것도 없었어요. 일본군이 ‘앗쓰’ 섬에서 전멸했는데, “우리도 여기 따라서 조의를 표하기 위해서 한 시간 동안 쉽니다. 이런 생활에 젖었었다 이거예요. 한 5분 동안 쉬기도 하고 신이 나면 행진곡을 떵떵 걸고, 신정언씨의 야담이 그담에 있어도, “좀 기다리슈”, “시간이 모자라니 20분으로 줄여서 하슈”하기도 하고. 그러던 것을 15분마다 짤라라 이거예요. “그런 법이 어디 있느냐” 했더니 미군 말이 그게 나쁘다는 거냐. “왜 넌 해보지도 않고 나쁘다고 그러느냐. 한 번 해봐라.” 이거예요. 그 얘길 한 번 들어보니까 참 그럴 듯한 말이거든, 해보지도 않고 말야 …

또한 미군정은 드라마, 퀴즈 등 다양한 오락프로그램 양식을 도입하도록 했다. 일제 때에는 없던 새로운 프로그램 양식들이 등장하게 되었다. 상당수의 프로그램은 미군 감독관이 직접 극본을 쓰고 이것을 번역해 방송을 하기도 했다.063063 1947년 10월에 방송원고의 30% 가량을 미국인이 집필했고, 이후 점차로 줄어들었다고 한다. History of the DPI, p.31.닫기 이와 관련해 당시 편성과장을 지냈던 송영호는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064064 송영호, 「방송 13년 이면사」2 (『방송』 1956년 12월호, 『방송사료집』 2집), 132~133쪽.닫기

미인 고문(미국인 감독관:필자)은 미국 방송에서 호평을 받았다는 극본을 많이 내놓으며 그 형식과 수법을 제시했다. 원고가 타이프라이타로 찍히고 몇 분 몇 초의 시간 표시가 있고 구체적으로 기입한 효과(음향, 음악) 등의 형식 또는 스테이숀, 부렉, 팀송, 팀뮤직, 부리쥐뮤직, FI FO 등등의 새로운 낯 설은 용어에 접할 때 우리는 과연 놀랍고 감탄했고 또한 배운 것이 많았다.

미군정은 점령정책의 수행을 위해 방송을 통제하거나 활용하면서도, 한편에서는 다양한 오락 프로그램 양식을 도입시키는 등 방송에 커다란 변화를 불러일으켰다.065065 미군정 공보부는 모든 사람들의 관심과 욕구를 충족시켜 줄 수 있는 완성도가 높은 정보, 교육, 오락 프로그램을 제공하는 공공서비스(public service)로서 방송국을 발전시키는 것이 자신들의 정책이었다고 정리하고 있다. History of the DPI, p.29.닫기 공보프로그램들이 주로 점령정책의 효율적 수행을 위한 것들이었다면, 미국식 오락프로그램들은 미국 문화의 전 세계적 패권 구축의 일환이라는 성격을 어느 정도 지니고 있었다. 미국식 대중문화 유입을 가져 왔던066066 김균, 앞의 글, 62쪽.닫기 오락 프로그램의 도입은 결국 라디오의 오락매체로서의 성격을 강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註 047
United States Army Forces In Korea, Department of Public Information, History of the Department of Public Information(DPI), Record Group No. 332, Box No. 39(이하 History of the DPI로 약칭), pp.18~~19.
註 048
장영민, 앞의 글, 117쪽.
본 논문에서는 미군정이 점령정책의 효율적 수행을 위해 기획, 제작한 프로그램을 전체적으로 가리킬 때는 공보프로그램이라고 하고, 그중에서도 반소반공이라는 명확한 목적을 지닌 프로그램을 가리킬 때는 선전프로그램이라고 구분해 부르고자 한다.
註 049
『매일신보』 1945년 9월 17일, 18일(『언론연표』 Ⅱ, 806쪽).
註 050
노정팔, 앞의 책, 1995, 39~43쪽.
註 051
한국방송개발원, 『광복 50년 한국방송의 평가와 전망』, 1995, 6~26쪽.
註 052
United States Army Forces In Korea, Office of Civil Information, Public Relations, Relations with Koreans, Record Group No. 332, Box No. 42(이하 Relations with Koreans 으로 약칭), p.26.
註 053
『중외신보』 1947년 2월 28일(『기사모음』, 225~226쪽).
註 054
노정팔, 앞의 책, 1995, 28~29쪽.
註 055
차재영, 앞의 글, 29~52쪽.
註 056
『뉴욕 타임즈』 존스톤 기자의 박헌영 기자 회견 결과가 국내에 널리 보도된 것은, 1946년 1월 15일의 미국의 소리 방송 때문이었다. 사실 여부조차 논란이 되었고, 정작 『뉴욕 타임즈』에는 실리지도 않았던 내용이 미국의 소리 방송에서 다루어진 것은 미군정의 공작 때문이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미국의 소리 방송은 1945년 12월부터 고정 편성되어 30분 동안 방송되었다. 정용욱, 『해방 전후 미국의 대한정책』(서울대학교 출판부, 2003), 174~176쪽.
註 057
『한성일보』 1946년 4월 4일(『기사모음』, 214~216쪽).
註 058
『가정신문』 1947년 7월 10일(『언론연표』 Ⅱ, 837쪽).
註 059
미군정 초기 편성계장을 지낸 이덕근은 당시의 방송이 ‘미군정청 한국말 방송’에 불과했었다고 회고했다. 이덕근, 「사단도 많고 사연도 긴 3년」 (『신문과 방송』 1986년 8월호), 11쪽.
註 060
노정팔, 앞의 책, 1995, 43~45·83~86쪽.
註 061
임종수, 앞의 글, 378쪽.
註 062
이규일 외, 앞의 글, 81~83쪽.
註 063
1947년 10월에 방송원고의 30% 가량을 미국인이 집필했고, 이후 점차로 줄어들었다고 한다. History of the DPI, p.31.
註 064
송영호, 「방송 13년 이면사」2 (『방송』 1956년 12월호, 『방송사료집』 2집), 132~133쪽.
註 065
미군정 공보부는 모든 사람들의 관심과 욕구를 충족시켜 줄 수 있는 완성도가 높은 정보, 교육, 오락 프로그램을 제공하는 공공서비스(public service)로서 방송국을 발전시키는 것이 자신들의 정책이었다고 정리하고 있다. History of the DPI, p.29.
註 066
김균, 앞의 글, 6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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