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중 투하
앞서 언급했듯이 공중에서 식량을 투하하거나, B-29기에서 수용소로 구호품을 투하하는 경우가 있었다. 이는 실제 포로 석방 전 준비단계를 의미했다. 조선에 있는 3곳의 수용소 모두에 구호품이 투하되었고, 일본이 항복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시작되었다. B-29기들은 서울과 인천의 포로수용소에 구호품을 투하할 때 너무 낮은 고도에서 진입했다. 또한 구호품에 달려있었던 낙하산 대부분은 펴지지 않았다. 결국, 구호품의 30∼50%는 사용할 수 없었고, 빠른 속도로 떨어지는 구호품들 때문에 피해를 입기도 했다. 서울에서 한 조선여성은 투하물에 맞아 사망했다. 인천에서는 투하물이 포로 병원의 지붕을 돌파하여, 포로 한 명이 다리가 부러지고, 조선인 한 명이 사망했으며, 일본인 8명이 부상당했다. 이렇게 심각한 사고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포로들은 비행기와 구호품을 통해서 육체적으로나 심적으로 아주 많은 편익을 얻었다. 비행기는 포로들의 사기를 높이는데 엄청난 영향을 끼쳤다.001001 1945년 9월 9일, 보엑 대위가 군단 의무참모에게 보낸 보고서, “Recovery of Allied Prisoners”; 보엑 대위 인터뷰, 1945년 9월 12일; HQ USAFIK, G-2 Section, Translation No. 92, 30 Oct. 1945 (제24군단정보참모부 파일).닫기
호남수용소에 투하된 구호물자에 관한 이야기는 조금 더 복잡하다. 서울과 인천수용소에 구호품이 투하된 것과 거의 비슷한 시기에 호남수용소에도 구호품이 투하되었는데, 당시 그 지역 일대에는 소련군 부대가 주둔하고 있었다. 소련인들의 설명에 의하면, 구호품 중 일부가 소련군 부대가 주둔한 건물을 내리쳤고, 소련군 대령을 아슬아슬하게 피해갔다고 한다. 이 사건으로 인해 현지 소련 사령관은 지시하기를, 더 이상의 사고가 발생하지 않도록 앞으로 구호품을 투하하기 위해서 날아오는 비행기는 중간에 차단될 것이며, 물품을 전달하기 전에 착륙해야 한다고 말했다.
8월 29일, 사이판 공군기지에서는 호남수용소에 더 많은 구호품을 투하하기 위해서 B-29기 한 대가 날아왔다. 비행기가 수용소 위에 도착해서 구호품을 투하하려고 했을 때, 갑자기 야크전투기 4개가 나타나 B-29기에게 신호를 보내기 시작했다. 때문에 B-29기는 함흥의 비행장에 착륙해야 했다. 그러나 그렇게 큰 비행기가 착륙하기에는 장소가 너무 협소했고, B-29기는 기지로 돌아가기 위해서 다시 바다 쪽으로 향했다. 이 같은 행동은 소련 전투기가 잘못 비행한 것으로 보였지만, 유럽 전투에서 연합군을 가장했던 독일군 전투기를 생각해보면, 그들은 자신들이 소련전투기로 위장한 일본군 비행기를 상대하고 있는 것이라고 추측해볼 수 있었다. 여하튼 그들은 먼 바다까지 B-29기를 쫓아가 발포하기 시작했다. B-29기는 포격을 멈추었고 곧 엔진이 고장 났다. 추락하는 비행기에서 비행사중 6명이 탈출했지만 곧 바다 한 가운데로 추락했다. 하지만 곧 그들은 조선인 어부들에게 구조되어 좋은 대접을 받았다. 나머지 7명은 비행기에 남아서 함흥 비행장에 긴급 착륙을 했다. 그제서야 사실을 알게 된 소련인들은 그들을 친절하게 대했다. 바다로 떨어진 다른 6명까지 13명의 비행사들 모두가 다른 연합국 포로들과 함께 수용소에 머물게 되었다. 항공병들은 원래 낙하산을 통해서 투하하려고 했던 구호품들을 직접 전달했다.002002 HQ USAFIK, Office of Asst. C. of S. 정보참모부 조셉 W. 퀸(Joseph W. Queen) 중위 인터뷰, 1945년 9월 14일(제24군단 정보참모부 파일). 또한 같은 날 아래 종군기자들이 보낸 특전 참고. 배레델 씨(호주 종군기자), 크럼플러(미국 합동통신사), 오맬레이 씨(미국 연합통신사), 베이세이 씨(Chicago Tribune), 존스톤 씨(New York Times).닫기
B-29기의 항공병들은 중위 4명, 소위 2명, 비행장교 1명, 하사 4명, 상등병 2명이었다. 이들은 C-46기를 타고 9월 14일 서울에 도착했고, 9월 15일 오키나와로 철수했다.003003 1945년 9월 14일 United Press의 Mr.Crumpler가 작성한 특전기사; Radio TFGAP 532, CG ⅩⅩⅣ Corps to CG CINCAFPAC Adv, 14 Sept. 1945.닫기 9월 10일 또 다른 B-29기는 아무런 사고 없이 구호품을 투하했다. 이 시기 다른 수용소에서는 구호물품 투하 요청이 모두 중단되었는데, 하지 장군은 호남수용소에 9월 20일까지 구호품을 투하할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이후 추가로 구호품 투하는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004004 Ibid.; Letter from Capt. Kinloch to Lt. Col. Elrington, 10 Sept. 1945.닫기

註 001
1945년 9월 9일, 보엑 대위가 군단 의무참모에게 보낸 보고서, “Recovery of Allied Prisoners”; 보엑 대위 인터뷰, 1945년 9월 12일; HQ USAFIK, G-2 Section, Translation No. 92, 30 Oct. 1945 (제24군단정보참모부 파일).
註 002
HQ USAFIK, Office of Asst. C. of S. 정보참모부 조셉 W. 퀸(Joseph W. Queen) 중위 인터뷰, 1945년 9월 14일(제24군단 정보참모부 파일). 또한 같은 날 아래 종군기자들이 보낸 특전 참고. 배레델 씨(호주 종군기자), 크럼플러(미국 합동통신사), 오맬레이 씨(미국 연합통신사), 베이세이 씨(Chicago Tribune), 존스톤 씨(New York Times).
註 003
1945년 9월 14일 United Press의 Mr.Crumpler가 작성한 특전기사; Radio TFGAP 532, CG ⅩⅩⅣ Corps to CG CINCAFPAC Adv, 14 Sept. 1945.
註 004
Ibid.; Letter from Capt. Kinloch to Lt. Col. Elrington, 10 Sept. 19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