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폭풍
모스크바 삼상회의는 12월 26일에 종료됐으나 한국 문제에 관한 삼상합의문 전체를 접수하는 데는 며칠이 더 소요되었다. 그동안 불완전하고 진위를 파악하기 어려운 이야기들이 흘러들어왔다. 12월 28일 늦은 오후에 5년 기한의 신탁통치를 실시한다는 짧은 소식이 도착했다. 모스크바에서 회담이 열렸다는 사실이 대중에게 알려졌으며 자세한 소식이 곧 도착할 것으로 예상되었다. 12월 29일 오전 AP통신과 UP통신을 통해 한국인과 미국인에게 뉴스가 전달되었다. 이날 뉴스는 단지 미국과 소련 점령 하에서 한국에 5년간의 공동신탁통치를 실시한 뒤 독립 국가로 만든다는 내용만을 담고 있었다. 한국인들의 첫 번째 항의는 29일 뉴스를 근거로 한 것 이었다.001001 러치 장군의 고문 호레이스 언더우드(Horace H. Underwood) 박사와의 면담, 정보참모부 군사실 일지, 1945년 12월 30일.닫기 모든 한국인들이 신탁통치라는 단어를 확인했고 이것은 1910년 을사년에 일본이 한국에 압제와 착취를 시작했을 때 사용한 것과 같은 단어였다. 한국 전역에 분노의 물결이 넘쳤다.
모스크바 삼상회의가 끝나고 이틀이 지난 뒤에도 한국에서는 공식선언문을 확인할 수 없었다. 한편 12월 29일에 하지 장군은 주한미군 전체에 다음과 같은 지시를 하달했다.002002 주한미군 사령관이 제6보병사단장, 제7보병사단장, 제40보병사단장, 제24군수지원사령부 사령관, 미군정장관에게 보낸 전문 TFGSI 94, 291019/I, 1945년 12월 29일, 부관참모부 문서철.닫기

“한국 문제를 다루는 모스크바 삼상회의 소식을 언론이 일찍 공개함으로서 여러 가지 상충된 이야기가 나와 유언비어의 근거가 되고 있다. 대중들 사이에 불안이 조성될 위험이 있다. 주한미군사령부는 모스크바 삼상회의 결과를 담은 공식 성명서가 도착하는 대로 이를 공개할 것이다. 그때까지 주요 부대 지휘관들은 예하 장병들이 한국인들에게 공사구분 없이 이와 관련된 어떠한 논의나 소문도 퍼트리지 않도록 자제시켜야 한다. 또한 미국 점령군의 전 장병들은 현재는 물론 앞으로도 소련군에 관한 이야기나 한국인에 대한 공약으로 받아들여지거나 이해될 수 있는 어떠한 발언도 해서는 안된다. 주요 부대 지휘관들은 예하 장병들에게 한국의 대중 사이에 불안한 기류가 확산될 수 있다고 경고하고 미군 부대와 주요 시설을 보호하기 위해 필요한 조치들을 취해야 한다.”

그러나 같은 날 오후에 마침내 공식 성명서가 도착했다. 최대한 신속히 한국인들에게 이 내용이 방송되었으며 성명서의 사본도 배부되었다.003003 호레이스 언더우드 박사와의 면담, 정보참모부 군사실 일지, 1945년 12월 30일.닫기 소위 “모스크바 결정서”에서 한국 문제를 다룬 부분은 신탁통치 실시를 명확히 규정한 것이 아니라는 점을 언급할 필요가 있다.

“제3항- 한국

1. 한국을 독립 국가로 재건한다는 관점에서, 이 국가를 민주적인 원칙하에 발전시키고 장기간에 걸친 일본의 한국 지배로 초래된 재앙적인 결과들을 최대한 빨리 제거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기 위해서 한국의 공업과 교통, 농업, 그리고 한국의 민족문화를 발전시키기 위한 모든 필요한 조치를 취할 임시 한국 민주정부를 수립해야만 한다.

2. 임시 한국정부의 수립을 지원하고 필요한 조치를 사전에 마련하기 위하여 남한을 관할하는 미국과 북한을 관할하는 소련이 참여하는 공동위원회를 조직한다. 공동위원회는 제안서를 준비할 때 한국의 민주적 정당 및 사회단체들과 협의를 해야 한다. 공동위원회에서 작성한 제안은 미국과 소련, 중국 영국 정부에 제출되어 검토를 받은 뒤 마지막으로 공동위원회에 참여하는 미국과 소련의 최종 검토를 받아야 한다.

3. 공동위원회는 임시 한국 민주정부와 한국의 민주적 단체들의 참여하에 한국인민의 정치-경제-사회적 진보와 민주적인 주주 정부의 발전, 그리고 한국의 국가적 독립 달성을 촉진하고 지원하는 방안을 수립하는 임무를 담당해야 한다. 한국에 대한 5년 기한의 4개국 신탁통치에 관한 합의를 도출하기 위하여 공동위원회의 제안 사항은 임시 한국정부와의 협의를 거친 뒤 미국과 소련, 영국, 중국 정부에 제출되어 검토를 받아야 한다.

4. 남한과 북한에 영향을 끼치고 있는 시급한 문제를 고려하고, 남한의 미군사령부와 북한의 소련군 사령부 간에 행정-경제문제에 있어 지속적인 협력을 구축하기 위한 조치를 완성하기 위하여 양군 대표가 참여하는 회의를 2주 간격으로 열도록 한다.”

미 국무부는 격분한 한국인들을 달래기 위해서 공동성명에 있는 몇몇 구절을 강조하여 한국인들에게 자세히 설명하는 방안을 제안했다. 그것은 두 지역을 통합하기 위해 즉각적으로 조치하라는 조항, 민주적인 임시정부를 조기에 수립하기 위한 조항, 신탁통치의 조건은 공동위원회가 한국 임시정부와 협의하여 결정한다는 합의, 그리고 마지막으로 신탁통치 기간은 최대 5년으로 신탁통치가 끝나면 완전한 독립을 확실하게 약속한다는 내용 등이었다. 또한 국무부는 이러한 사항들을 샌프란시코에서 방송하는 한국어 프로그램을 통해 알리려 했음을 지적할 필요가 있다. 국무부는 이 한국어 방송을 한국의 방송국들을 통해서도 방송할 것을 제안했다. 국무부의 선전 전문가들은 신탁통치에 대해 해명하거나 정당화하려고 하기 보다는 앞서 언급한 내용들을 강조하는 쪽이 좋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동시에 미군정 요원들이 한국인들로부터 신탁 통치의 원인에 대해 질문을 받게 될 경우 완벽한 대답을 할 수 있도록 준비를 할 필요가 있을 것으로 보였다. 그와 같은 질문에 대한 대답은 정부가 수립되기 전 까지는 연합군이 일본 통치가 남긴 모든 사악한 유산을 제거하고 한국인들을 보호하고 조언을 할 것이며, 일본이 한국인들에게는 고도로 전문적인 행정직이나 기술직에 필요한 교육을 시키지 않았으므로 여기에 필요한 훈련을 받기 위해서 정부 수립에 걸리는 기간이 길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었다.004004 워싱턴에서 태평양미육군 사령관에게 보낸 전문, WX90802, 3005533/Z, 1945년 12월 30일, 부관참모부 문서철.닫기
한국인들에게 한국의 신탁통치에 관한 미국의 입장을 설명하는 첫 번째 방송에서는 국무부장관의 성명서를 발표했다.005005 전쟁부 부관참모처(WARTAG)가 태평양미육군 사령관에게 보낸 전문, 310345/Z, 1945년 12월 31일. 부관참모부 문서철.닫기

“한국을 통치하는 문제는 일본이 항복한 이래로 지속적인 문제였다. 한반도는 군사작전 목적에서 38도선을 기준으로 각각 소련과 미국의 점령지역으로 분할된 것이다. 일본이 항복한 이후 점령이 지속되면서 문제점이 드러났다. 분할점령은 사람과 물자의 이동 뿐 아니라 한국 전체의 공공 서비스가 기능하는 것을 방해하고 있다. 모스크바 회담에서 결정한 바에 따라 미소 양군의 사령관은 미소공동위원회를 열어 당면한 경제 및 행정 문제를 해결할 것이다. 미소공동위원회는 미국, 소련, 영국, 중국 정부에 한국 임시민주정부를 수립하는 문제에 대해 조언을 할 것이다. 또한 한국이 5년 내에 독립을 이룩할 수 있도록 4개국이 신탁통치 실시를 준비하도록 제안할 것이다. 미소공동위원회는 한국 임시민주정부와 협력하여 신탁통치를 생략할 방안을 도출할 수도 있다. 한국이 하루 빨리 국제사회에 독립국으로 참여하도록 만드는 게 미국과 소련의 목표이다. 모스크바 회담에서 여러 가지 사안에 대한 합의와 양해가 이루어졌으며, 중국의 이해관계에 관한 내용도 충분히 다루어졌다. 중국은 도쿄의 4대 연합국 이사회(Four Power Allied Council) 극동위원회(Far Eastern Commission)의 외무장관 회의(Council of Foreign Ministers), 저선 임시정부 조직, 그리고 한국에 대한 신탁통치 등에 참여할 것이다.”

하지 장군은 뒤에 국무부장관의 성명서를 방송하도록 한 조치는 한국인들의 체면을 조금이라도 세워줘서 도움을 받고자 한 것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신탁통치’라는 단어는 한국인들 에게 아주 나쁜 뜻으로 통용되고 있으니 앞으로는 이 단어의 사용을 피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신탁통치의 뜻을 설명해 봐야 소용이 없다. 한국인들은 단어가 무슨 뜻인지는 들으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006006 주한미군 사령관이 연합군최고사령부에 보낸 전문 TFGCI 212, 0215101, 1946년 1월 2일.닫기
그리고 모스크바 삼상회의 결정에 관한 소련 측의 논평 중 다수가 ‘신탁통치’라는 불쾌한 단어 대신 ‘후견제도(Guardianship)’를 사용하는 것이 드러났다. 이 때문에 모스크바 삼상회의 성명문의 러시아어판과 영어판이 신탁통치 문제에서 차이가 있는 것이 아니냐는 관측도 나왔다. 하지만 검증 결과 그런 차이는 없다고 밝혀졌다.007007 태평양미육군 사령관이 제24군단에 보낸 전문 ***16033/Z, 161336/Z, 171650/I, 1946년 1월 17일. 부관참모부 문서철.닫기 그렇지만 소련 측은 계속해서 ‘후견제도’라는 단어를 사용했다.008008 제24군단 로버츠(Rankin Roberts) 중령과의 면담. 1946년 3월 22일, 정보참모부 군사실 일지.닫기
모스크바 삼상회의 결정에 관한 최초의 비공식 보도가 있은 뒤 한국 전역이 혼란과 불안에 휩쓸리자, 하지 장군은 이 상황을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009009 주한미군 사령관이 연합군최고사령부에 보낸 전문 TFGCG 212, 0215101, 1946sus 1월 2일, 부관참모부 문서철.닫기

“언론보도에 대해 지방은 서울 지역 보다 좀 더 온건한 반응을 보이고 있지만, 점차 미군 점령지구 전역으로 불온한 기류가 확산되고 있다. 한국의 언론 보도가 지방에 전달되어 한국인들이 잘못된 판단을 하기 전에 본인이 공동성명서의 진짜 내용을 알렸기 때문에 지방의 반응이 서울 보다 온건하다고 판단한다. 한국 문제에 관한 UP와 AP 등의 통신사 보도와 장거리 무선통신 내용을 모두 알려주기 바란다. 이들은 한국의 정치 문제에 대해 큰 관심을 가지고 있으며 기민한 반응을 보이고 있다. 또한 한국에 관한 외교 및 기타 정세의 변동을 신속히 파악하는 것이 본인의 임무이다. 만약 본인이 모스크바 삼상회의의 결과를 일찍 전달받았다면 이 모든 불쾌한 사건이 일어나지 않았으리라 확신한다.”

한국의 일반 대중 뿐 아니라 주한미군 당국도 소련이 신탁통치를 실시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고 판단하고 있었다.010010 주한미군 사령관이 연합군최고사령부에 보낸 전문 TFGBI 96, 1945년 12월 29일, 부관참모부 문서철; 주한미군 사령관이 연합군최고사령부에 보낸 전문 TFGCG 272, 012319/I, 1946sus 2월 1일, 부관참모부 문서철.닫기 하지 장군과 랭던은 국무부에 신탁통치를 반대해야 한다는 입장을 거듭 전달했지만, 이 제안은 기껏해야 국무부 내에서 암묵적인 동의를 얻는데 그쳤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국무부가 방송을 통해 발표한 내용들을 보면 갈수록 신탁통치 구상에서 멀어지는 경향과 신탁통치를 회피할 수 있다는 전망을 드러내고 있었다. 한국에서는 모스크바 삼상회의 초기에 미국은 한국의 즉시 독립을 지지한 반면 소련은 신탁통치를 요구했다고 믿을 법 했다.
이런 잘못된 생각은 조선공산당이 신탁통치에 관한 공식 성명서를 확인하고 입장을 번복하자 더욱 확산되었다. 1946년 4월 초 월남을 시도하던 한 한국인에게서 「각계각층에 대한 모스크바 3상회의의 한국문제 결정 해설(Instruction to all levels and branches concerning the decisions on Korean problems made by the three power conference at Moscow)」이란 제목의 문서 사본을 압수했다. 이 문서는 1946년 1월 3일 작성되어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 평양시 위원회가 서명한 등사본이었다. 사실 이 지령은 1946년 1월 3일 남한에 전달되었다. 이날 남한의 조선공산당은 그동안의 신탁통치 반대 입장을 철회하고 전면적인 찬성으로 돌아섰다. 조선공산당의 기관지인 『조선인민보(朝鮮人民報)』 1945년 12월 29일자에는 “반동분자들이 신탁통치를 불러온 것이다. 신탁통치 소식은 삼천만 한국민족을 충격에 빠트렸으며, 신탁통치 철폐를 외치도록 했다.”는 기사가 실렸다.011011 주한미군 사령관이 태평양미육군 사령관에게 보낸 전문 TFGBI 157, 251000, (1946년 1월 25일, 부관참모부 문서철)에서 인용.닫기 남한의 공산당 지도자 박헌영은 1946년 1월 1일 하지 장군과의 회견에서 신탁통치를 강경하게 비판했다. 그러나 그는 이틀 뒤의 회견에서 입장을 완전히 바꿨다. 지령을 받았기 때문이다.012012 Ibid.닫기 같은날 경성에서는 공산당이 주도한 반탁 집회가 열렸다. 하지만 집회가 시작되기 직전 깃발과 구호가 갑작스럽게 바뀌었으며 신탁통치를 찬성하는 집단과 반대하는 집단이 뒤섞여 집회는 혼란에 빠졌다. 집회가 시작되기 직전에 지령을 받은 것이 확실했다. 4개월 뒤 위에서 언급한 문서를 38선에서 압류하고 나서야 사태의 본질을 파악할 수 있었다. 이 문서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모스크바 삼상회의에서 결정된 한국문제 해결책은 현재 한국의 정세를 고려할 때 최고의 결정이다. 우리 당은 이 결정을 승인한다. 이 결정에 동의하고 지지하는 동시에, 다음의 성명을 승인하도록 하라.

2. 모스크바에서 결정된 한국 문제의 해결책은 1943년 영국, 미국, 중국 외무장관들이 카이로 회담에서 결정한 것 보다 보다 진보적이고 신속했다. 모스크바 회의의 결정은 한국에 진정한 민주 정부를 수립하기 위해 채택된 것이다. 카이로 선언은 “한국은 적절한 시기에 독립한다”고 결정했다. 우리는 이것이 모호하다고 본다. 어째서인가? 왜냐하면 “적절한 시기”란 10년이 될 수도 있고 20년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 적절한 시기에 한국이 어떻게 될 것인지는 알 수도 없다. 하지만 소련이 모스크바 회의에 참가하여 한국이 제국주의 국가들의 노예가 되는 것에 반대했다. 그 결과 승인된 이 결정은 한국에 최대한 빨리 독립국가들 수립하도록 했다.

3. 3개국 회담에서 결정된 사안은 북한과 남한의 분단 상태를 해소할 것을 제안하고 한국에 통일된 정부를 수립해 모든 산업과 문화, 농업과 교통통신을 신속히 발전시켜 한국 인민의 삶과 복지를 향상하고 발전시키도록 하는 것이다.

4. 한국 인민의 경제적·정치적 그리고 사회적 진보를 돕고, 한국에 자유로운 통일 국가 수립을 지원하고 협력하기 위해, 4대 연합국은 한국에 최대 5년 기한의 후견제도를 실시하기로 했다. 후견제도는 신탁통치와 같은 것이 아니다. 신탁통치는 한국 인민이 독립 정부를 세울 수 없게 할 것이다. 우리 민족이 아직 통일을 이루지 못했고 삶도 안정적이지 못한 현실에서, 후견제는 한국에서 일본 제국주의를 몰아내고 독립국가를 건설해 한국 민족의 삶을 향상 시키는 것을 돕는 것이다.

5. 우리는 민주주의 국가들과 함께 투쟁해야 하며, 5년의 후견기간을 단축시키는 것이 우리의 의무이다.”

국무부의 해명에도 불구하고 이 글에서 ‘신탁통치’와 ‘후견제도’를 구분하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모스크바 삼상회의 성명의 원문은 두 단어를 구분하지 않았지만 한국에 전달되면서 의미가 변질됐다.
국부무가 이를 반박하는 설명을 하지 않는 이상 하지 장군은 모스크바 회담에서 소련은 신탁통치를 주장한 반면 미국은 반대로 한국의 즉시 독립을 주장했다고 믿을 수 밖에 없었다. 주한미군은 이를 통해 한국인들의 지지를 얻을 수 있었다. 조선공산당의 입장은 근거가 없다고 여겨졌다. 그리고 사태가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됐다.
잇따라 터진 사건들은 주한미군에게 매우 골치아픈 결과를 가져왔다.
1946년 1월 13일, 워싱턴은 전문을 보냈다. 그 내용은 “(모스크바 결정의) 성명서는 소련의 입장을 반영해 미소공위와 한국인들이 먼저 제안을 할 경우 신탁통치를 고려하는데 동의한 것이다.”013013 연합군최고사령부가 제24군단에 보낸 전문, 130207/I, 1946년 1월 13일, 부관참모부 문서철.닫기 1월 19일 국무부가 제작한 라디오 프로그램이 방송됐는데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대화가 있었다.014014 NBC방송, “Korea and Far East”. 참석자: 국무부 극동국장(Director of the Office of Far Eastern affairs) 존 카터 빈센트(John Carter Vincent), 일본-한국 경제과장(Chief of the Division of Japanese and Korean Economic Affairs) 에드윈 마틴(Edwin Martin), 전쟁부 민사처장(War Department Civil Affairs Division) 및 전 주한미군정청 민정관(Civil Administrator American Military Government in Korea) 프레스콧(Brainard E. Prescott) 대령, NBC University of the Air 감독 스털링 피셔(Sterling Fisher). 1946년 1월 19일 1900 방송. 이 방송은 “Our Foreign Policy”라는 방송의 49회로 국무부가 참여한 것으로는 여섯 번째 방송분이었다. ‘워싱턴에서 태평양미육군 사령관에게 보낸 전문, 232557, 1946년 1월 23일, 부관참모부 문서철’을 참고하라.닫기

“피셔(Fisher): 빈센트씨, 모스크바 회담에 번즈 국무장관과 동행하셨죠. 모스크바 회담에서 한국 문제에 대해 어떤 합의가 있었는지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빈센트(Vincent): 성명서 합의문의 초안은 소련이 제시한 것입니다. 다행스러웠던 점은 소련이 제시한 초안이 미국의 입장과 가까웠다는 겁니다. 우리는 소련과 영국 대표가 받아들일 만한 수정안을 조금 제시했을 뿐입니다.

피셔: 소련 측이 그들의 입장을 표명한 일이 있습니까? 소련 측도 신탁통치를 생략하는데 동의했습니까?

빈센트: 합의문 초안을 소련 측이 작성했다는 점은 이미 말씀드렸습니다. 이 합의문은 한국의 자주적 정부와 독립이 목적이며, 신탁통치는 생략할 수 도 있는 중간 절차에 불과하다는 점을 명확히 하고 있습니다.

피셔: 그러면 미국의 입장을 정리해 주시겠습니까?

빈센트: 미국은 한국에 대해 오직 한 가지 목적을 가지고 있습니다. 최대한 빠른 시일내에 한국에 자주 정부를 수립하고 독립시키는 것입니다. 모스크바 회의에서 소련과 영국도 미국과 같은 목표를 추구하는게 드러났습니다.”

이것은 서막에 불과했다. 1월 22일 소련의 타스 통신이 주한미군사령부가 ‘반동세력’이 모스크바 삼상회의 결정에 반대하도록 부추긴다고 비난하면서 사태가 본격적으로 전개됐다. 타스통신은 ”주한미군사령부의 태도는 믿을 수 없다. 주한미군은 반동세력이 모스크바 외무장관 회의 결정에 반대하는 시위를 하도록 부추기고 있다. 이 회의는 미국 정부도 참여했다.“015015 1946년 1월 22일 AP통신이 모스크바에서 한 보도.닫기
하지 장군은 타스통신 보도를 접하자마자 미국 언론의 경성 주재 특파원을 모두 초청해 간담회를 가졌다. 하지 장군은 기자들에게 타스통신의 내용을 모두 부인하고 단지 한국인들에게 삼상회의 결정의 진정한 의도와 가치를 설명하고자 노력했을 뿐이라고 밝혔다.016016 『조선인민보』, AP통신의 1946년 1월 25일자 특보에서 재인용.닫기
모스크바 삼상회의 결정에 따라 1월 16일부터 미소회담이 열리게 됐으며 소련 대표단이 경성을 방문했다. 1월 26일 소련 대표단장 슈티코프 상장은 사전에 미국측에 통보를 하지 않은 채 한국 언론과 처음으로 회견을 가졌다. 언론회견에는 슈티코프 상장, 세묜 콘스탄티노비치 차랍킨(Semeon Konstantinoitch Tsarapkin) 전권공사(Minister plenipotentiary), 빅토르 파블로비치 쿠투조프(Victor Pavlovich Kutuzov) 대령, 그리고 한국계 미국인 최(Choi) 대위가 참석했다. 슈티코프 장군은 간단한 인사말을 한 뒤 곧바로 새로운 타스통신 기사를 소개했다. 그는 타스통신 기사를 소개하면서 이 글이 “모스크바 삼상회의의 진실을 명확하게 설명해 줄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한국 언론들은 소련의 한국정책을 오해하여 잘못된 보도를 하고 있다. 그래서 본인은 타스통신의 기사를 여러분에게 직접 공개해야겠다고 결심했다. 소련의 정책은 해방된 모든 국가들에게 동정심을 가지고 이들이 최대한 빨리 독립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다. 이것을 구태여 기자 여러분에게 설명할 필요는 없으리라 생각한다. 타스통신의 기사는 한국 언론들의 오류를 바로잡을 수 있도록 할 것이다. 본인은 기자 여러분이 한국인민들에게 한국 문제에 대한 소련의 진정한 입장을 전달해 주리라 믿는다.”
타스통신 기사의 핵심은 미국이 모스크바 삼상회의에서 최대 10년 기한으로 4개국이 신탁통치를 실시하자고 제안했으며, 신탁통치 기간 중 한국에 정부를 세우는 문제는 언급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또한 소련의 입장은 미국과 달리 신탁통치를 최대 5년으로 제한하되 신탁통치를 연장해서는 안되며, 신탁통치 기간 중 한국인에 의한 정부를 수립할 수 있도록 하자는 것 이었다.017017 타스통신 보도를 코겐(R. K. Kogen)이 번역, 정보참모부 문서철.닫기 타스통신의 기사는 다음과 같다.

“모스크바 삼상회의에서 한국 문제를 먼저 제기한 것은 미국 대표단이었다. 미국 대표단은 한국문제에 관해 몇 가지 사안을 제기했다. 미국 안은 미소양군 사령관의 관할 하에 단일한 행정기구를 조직하여 통화, 교역, 교통 등과 같은 한국 문제를 함께 해결하자는 것이었다. 또한 한국인들은 미소 양군 지휘관의 관할하의 공무원, 자문위원, 고문 등으로 단일 행정기구에 참여하도록 제안하고 있었다.
또한 미국이 제시한 방안은 점령군 예하의 단일 행정기구를 넓은 범위에서 한국 독립 국가를 건설하기 위한 민간 행정기구로 넘어가는 과도기적 단계라고 지적하고 있었다. 그리고 4대 연합국에 의한 신탁통치가 한국에 독립 국가를 건설하는데 가장 적합한 수단이 될 것이라고 평가했다. 또한 한국 문제에 관여하는 국가들이 최대한 빨리 신탁통치를 전제로 한국에 단일 행정기구를 조직하는 방안을 연구할 것을 제안했다.

미국 측 안은 미국·영국·중국·소련이 참여하는 행정기구를 UN과 한국 인민을 대표하는 것으로 간주하도록 제안하고 있었다. 이 행정기구는 독립 국가가 건설되기 전 까지 한국을 효율적으로 통치하는데 필요한 행정, 입법, 사법권을 가지도록 했다. 행정기구의 권한과 기능은 참가국 대표들로 구성되는 고등판무관(High Commissar) 또는 집행위원회(executive Soviet)를 통해 행사하도록 했다. 또한 미국 측 안을 채택한다면, 고등판무관 또는 집행위원회가 5년 이내에 독립 국가를 건설한다는 목표 하에 최대한 빨리 한국 인민의 정치·경제·사회적 진보를 이루고, 한국인민이 선출한 입법기구를 조직하도록 했다. 만약 필요하다면 이 기간은 행정기구에 참여하는 국가의 대표들이 합의하여 5년 이상으로 늘릴 수 있도록 했다. 삼상회의에 참여한 소련 대표단도 소련이 연구한 안을 제출했다. 미국 대표단은 소련 측 안을 검토한 뒤 원래 제안했던 것을 철회하고 소련안을 약간 수정한 뒤 받아들였다. 영국 대표단도 이에 동의했다.
그 결과 소련이 제시한 방안이 모스크바 삼상회의에서 한국 문제를 논의하는 기초가 되었다. 한국 문제에 대한 3개국 외무장관의 회담결과는 1945년 12월 28일 공표되었으며 미국이 처음 제시한 안과 비교하면 다음과 같다.

1. 미국안에서는 미소양군 사령관의 아래에 신탁통치가 실시되기 전까지 한국을 통치하기 위해 단일한 행정기구를 창설할 것을 제안했다. 군사령관 예하의 행정기구에서 한국인의 역할은 공무원, 자문위원, 고문 정도로 제한되었다. 신탁통치 이전에 한국인에 의한 정부를 수립하는 것은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있었다. 3개국 외무장관의 회담 중에 소련측 제안에 따라 남한과 북한 모두에 영향을 끼치는 시급한 행정 및 경제 문제를 해결할 방법이 의제로 올라갔다. 여기서 결정된 사안을 이행하기 위해 경성에서 소련군과 미군 사령관이 회담이 열린 것이다. 또한 회담에서는 현재 한국인들의 민족적 요구에 부응하고 장기간의 일본 통치가 초래한 파괴적인 잔재들을 신속히 제거하는 것을 돕기 위한 임시민주정부의 수립이 시급하다는 점도 인정했다.
2. 미국안은 미국·소련·영국·중국 등 4개국의 행정 기구로서 신탁통치를 실시하고, 그 책임과 기능을 수행하기 위해 신탁통치 참가국들의 대표로 구성되는 고등판무관 또는 집행위원회를 두도록 했다. 미국이 제안한 행정기구는 한국에 신탁통치를 실시하는 동안 입법, 행정, 그리고 사법 기능을 담당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미국 측 안에서는 신탁통치를 실시하는 동안 한국인으로 정부를 구성하는 것은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 소련 정부가 제시하여 통과된 안은 이것과 완전히 다르다.
삼상회의 결정사항은 한국 민족 정부 수립의 지연을 막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소련과 미국 대표들이 임시 한국 정부를 수립하는 것을 지원하는 것을 고려하고 있었다. 미소공동위원회는 한국 임시정부를 수립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미소공동위원회는 한국의 민주 정당 및 사회단체들과 협의해 하루 빨리 한국에 정부를 수립하도록 협력할 것이다. 4대 연합국의 한국에 대한 신탁통치는 한국인민의 민족적 이익을 보장할 한국 임시정부와 부속 기구에 의해 실시될 것이다.
3. 미국안은 한국에 5년간 신탁통치를 실시하고, 그 기간을 5년 더 연장할 수 있도록 했다. 소련 정부가 제안한 방안에 따라 결정된 안은 신탁통치를 최대 5년간 실시하고 그 이상 연장하지 못하게 했다.

소련의 행동은 모순투성이였다. 소련은 한국에 신탁통치를 실시하자고 주장한 것이 미국이라고 주장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신탁통치에 반대하는 세력을 반동으로 규정하고 있다. 이것은 그들의 본심을 숨기려는 의도로 보였다.
소련 대표단이 타스통신 보도를 가지고 맹공을 퍼붓자 하지 장군은 다시 전쟁부에 연락해 정확한 정보를 전달해 줄 것과 미국 정부에서 결정하는 것들을 사전에 통지해 달라고 요청했다.018018 주한미군 사령관이 연합군최고사령부에 보낸 전문, TFCGC 255, 260926/I, 1946년 1월 26일, 부관참모부 문서철.닫기 1월 30일 국무부는 소련 주재 미국대사관에서 보고한 한국 문제 관련 정보를 주한미군 사령부에 전달했다.019019 국무부(번즈)가 연합군최고사령부 정치고문, 주한미군사령부 정치고문에게 보낸 전문, 271512/Z, STATE 90. 302305/I, 1946년 1월 30일, 부관참모부 문서철.닫기

“오늘자 소련 언론에서 보도한 타스통신의 한국 문제에 대한 논평과 관련해서, 지난 1월 12일의 대사관 전문 124호에서 언급한 이즈베스티야(Izvestia)의 사설을 다시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판단한다. 대사관은 이즈베스티야의 사설이 나왔을 때 논평을 준비했지만, 해리먼(Harriman) 대사가 모스크바로 돌아오는 것이 앞당겨 질 것으로 판단해 이 글을 따로 전송하지는 않았다. 비록 해리먼 대사가 모스크바에 잠시 체류하는 동안 이즈베스티야 사설에 대한 논평을 전달하지는 못했으나 ... 이 글은 타스통신의 기사가 작성된 배경을 설명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해당 논평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소련은 샌프란시스코 회담 때부터 신탁통치의 개념에 대해 미국 및 영국과 이견을 보이고 있었다. 특히 한국 문제에 관해서는 즉시 독립시키는 방안을 선호했다. 즉 모스크바 삼상회의 결정에서 한국에 특혜를 베풀기로 한 것은 일종의 타협이었다. 영국과 미국이 제안한 신탁통치의 원칙은 받아들이되 한국의 ‘민주적’ 정당단체와 임시정부의 존재를 강조한 것이다. 소련이 한국 문제에 사용하는 ‘민주적’이라는 단어의 뜻이 이제 명확해 졌다. 이즈베스티야의 사설은 이승만, 김구 일파를 공격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승만과 김구 일파는 실력이 부족하고 조직도 형편없지만 친미적인 입장에서 소련의 후원을 받는 ‘민주적’ 정당단체에 맞서고 있다. 소련이 향후 임시정부를 장악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음을 고려한다면, 앞으로 미소공동위원회와 신탁통치 단계에서도 이즈베스티야지를 통해 계속해서 우익 반대파를 반동분자나 친일파로 비난할 것이다. 대중의 지지, 그리고 발칸 반도 지역에서 있었던 소련에 대한 저항을 감안한다면 매우 잘 조직된 소련의 정치 공세 앞에 한국인들은 오래 버티지 못할 것이다. 소련 언론의 논조를 보면 저항 세력의 평판을 떨어트리고 임시정부를 소련의 후원 하에 둔 뒤에는 다른 국가들이 임시정부에 영향을 끼치지 못하게 만들 것이다. 소련의 계획이 예정대로 진행된다면 임시정부는 큰 혼란에 빠져 민주적인 가치에 반하고 무능해 질 것으로 예상된다. 이 같은 상황에서 소련 이외의 다른 세력이 임시정부의 활동을 이끌거나 감시하려고 한다면 반동분자의 개입이라거나 친일파와 결탁했다는 비난을 받을 것이다. 최근 타스통신의 보도는 거의 대부분 한국인들을 직접 겨냥한 것으로 판단된다. 그럴 경우 분명히 그런 암시가 없을 리 없다. 한국의 ‘반동세력’들은 신탁통치의 책임을 소련에게 돌려서 소련의 진정한 의도를 완전히 드러냈다. 소련의 의도가 (한국에서) 다른 강대국들의 영향력을 최대한 빨리 제거하는 것임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모스크바 삼상회담에서 소련이 제시한 문서는 바로 이 목표를 달성하려는 것이었다. 모든 외부세력이 조기에 완전히 철수하는 방안을 소련이 공식적으로 요구하려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다른 외국 세력이 사라진다면 그들은 다른 나라들과 달리 이미 가지고 있는 수단과 조직을 통해 한국에 세력을 투사할 수 있으며, 괴뢰정부를 가지고 이웃 국가들을 장악하는 방식을 한국에도 적용할 수 있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소련이 언제든지 한국인 정권을 수립할 수 있는 소수의 강력한 집단을 준비해 두었다고 판단하는 것은 합리적이다. 여기에는 민병대와 소련의 지령에 복종하는 소련군 출신의 한국인 부대가 포함된다.”

이 전문은 본질적으로 모스크바 삼상회의에 대한 타스통신의 보도를 거의 완전히 인정하는 내용이었다. 하지 장군이 기존의 국무부 보고서를 바탕으로 한국 언론에 모스크바 삼상회의에 관해 설명한 내용은 주한미군사령부의 입지를 불리하게 흔들어 놓았다. 한국의 언론과 대중의 여론은 상황을 충분히 파악하고 있었다. 1월 29일, 미군정의 특별정치고문은 “경성 시민의 대다수는 1월 26일 언론이 보도한 슈티코프 장군의 발언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이고 있다. 그 결과 지금은 미국이 신탁통치를 적용하려 했지만 소련이 반대했다는 믿음이 확산되고 있다. 이로 인해 미국의 진실성에 대한 신뢰가 약해지고 있다.”020020 미군정 여론국 공보과(Department of Public Information, Office of Public Opinion, USAMGIK) ******가 글렌 뉴먼(Glenn Newman) 대령에게 제출한 조사보고서, 1946년 1월 29일, 정보참모부 군사실 문서철.닫기
하지 장군은 이 무렵 국무부에 미국의 이중성이 한미관계에 끼친 영향을 보고하는 신랄한 내용의 전문을 보냈다. 이 전문은 중요하기 때문에 전체를 인용한다.021021 하지 장군이 맥아더 장군에게 보낸 전문 TG*** 272, 012319/I, 1946년 2월 1일, 부관참모부 문서철.닫기

“(앞쪽에 인용한) 전문에 담긴 정보들은 본 사령부의 기획, 정책수립, 비상사태 대응의 지침에 사용하기 위해 국무부가 몇 주 전에 보내줬어야 하는 내용들이다. 국무부는 이곳에서 한국인들과 소통하면서 힘들여 마련해 보낸 정보는 물론 주한미군사령관과 국무부가 파견한 정치고문이 거듭해서 보낸 시급한 요청에 거의 신경쓰지 않았다는 뜻이다. 특히 본인이 10월부터 긴급하게 제안한 방안과, 최근 국무부가 신탁통치 방안에 대한 언급을 회피하고 신탁통치를 하지 않을 수 있다는 희망적인 입장을 취하고 그러한 내용의 방송을 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타스통신이 보도한 내용이 모두 사실이라는 점은 본인에게 완전히 새로운 소식이 아닐 수 없다. 신탁통치 소식이 알려진 후 일어난 폭동을 진압하고 난 뒤 한국에서 미국의 입지는 미군이 진주한 이래 가장 좋아졌다. 한국인들은 최근 슈티코프 장군을 통해 알게 된 타스통신 기사의 중요성을 이해하고 있으며, 미국인들이 또다시 자신들을 배신할 것이고 이번에는 일본이 아니라 소련에게 한국을 넘기려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미국 정부가 이를 공식적으로 부인하지 않는 한 주한미군사령부는 어떠한 발표도 할 수 없으며, 최근 증대되고 있는 미국에 대한 불신도 해소할 수 없을 것이다. 타스통신의 보도는 한국인들에게 모스크바 삼상회의에서 소련은 최대한 이른 시일에 한국을 완전 독립시키는 등 그들이 원하는 모든 것을 주려 했으나, 미국이 10년간의 신탁통치를 강력하게 주장해 독립의 소망이 좌절되었다고 명확하게 주장하고 있다. 한국인들은 지금까지 소련이 38선 이북에서 저지른 일 때문에 소련을 증오하고 두려워했지만, 미국은 해방된 한국인들의 소망을 염두에 두고 있다고 믿었기에 미국의 도움을 받으려 했다. 소련은 38선 이북에서 취하는 태도를 크게 개선하고, 교활한 선전활동을 전개하면서 ‘삼천만 한국 인민의’ 구원자로서 위상을 높여가고 있다. 공산주의자들의 활동은 1월 15일까지 거의 한달 간 감소하고 있었는데 이제 몇몇 지역에서는 다시 증가세로 돌아섰으며 그 대담함과 효율성도 증대되었다. 교육수준이 높은 한국인들은 그들의 자유와 독립을 위해 다시 한번 투쟁에 나설 때라는 생각을 하고 있다. 소련인들의 행동을 볼 때, 아직까지는 미군이 주둔하는 상황에서 한국을 통일하려는 의도를 찾아볼 수 없다. 지금까지 소련과 한 논의에서는 항상 38도선의 검문소를 통해 우편에서 사람에 이르는 모든 것의 이동 규모를 조정하는 문제를 다뤘다. 본인은 이제 소련 측에서 모든 것이 충분히 공산화 됐다고 판단하기 전에는 남북의 통일이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최근의 추세를 감안하면, 소련의 선전선동과 잘 조율된 정치적 움직임을 우리가 막아낼 수 있을지 회의적이다.
본인은 한국 문제에 관한 전문가가 누구인지, 누가 본인의 제안을 무시하고 국무부에 조언을 하고 방침을 정하는지 모른다. 아마 미국에 거주하는 교육수준이 높은 한국인들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들 중에서 전쟁이 끝난 뒤 한국에 와 봤거나 한국의 실상을 아는 이는 없는게 분명하다. 우리가 한국에서 상대하는 존재는 부유하고 교육수준이 높은 한국계 미국인이 아니라, 지난 40여년 간 일본의 지배에 영향을 받은 저속하고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한 동양인들 이다. 이들은 호불호가 너무 확고해 완강하기 그지없고, 노골적인 선전선동에 그대로 휩쓸리며, 논리적으로 설득하는 게 불가능한 존재들이란 점을 국무부가 명심했으면 한다. 우리가 상대하고 있는 존재는 위에서 언급한 수백만의 사람들을 선동하기 위해 강력하게 조직된 무자비한 정치 조직이다.
지금까지 주한미군사령부가 거듭해서 요청한 바와 같이 국무부가 정보를 지속적으로 전달해 주고, 또한 우리가 한국의 현실에 근거해 제공하는 정보와 조언을 국무부가 진지하게 고려해야 한다는 본인의 생각을 국무부에 전달해 납득시킬 수 있기를 희망한다.
본인은 국무부에 크게 실망한 것과는 별개로, 국무부가 결정했거나, 추진하고자 하는 정책을 모든 권한을 동원해 이행할 것이며 지금의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최선을 다할 것이다.”

하지 장군은 애버럴 해리먼(W. Averell Harriman) 주소 미국대사가 곧 경성을 방문할 것이라는 소식을 접한 뒤 맥아더 장군에게 다음과 같은 전문을 보냈다.022022 하지 장군이 맥아더 장군에게 보낸 전문 TFGCG 262, 281320/I, 1946년 1월 28일, 부관참모부 문서철.닫기

“해리먼 대사가 경성에 도착하면 그와 면담을 한 뒤 미국 정부의 정책기조에 맞춰 발언하고 행동하기 위해 모스크바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충분한 정보를 얻고자 한다. 본인은 앞서 이에 관한 정보를 요청한 바 있다.
지난번 전문에서 밝힌 것처럼 한국이라는 수렁에서 미국 정부가 소련 또는 한국인들에게 체면을 살리기 위한 희생양으로 본인의 사임을 요구하더라도 기꺼이 받아들일 것이다. 이것은 진심이다. 본인은 불리한 환경 속에서 미국이 성공을 거둬야 한다는 점과 한국의 미래에 대해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다.”

이렇게 해서 1946년 1월 16일 경성에서 열릴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의 무대가 마련됐다.

註 001
러치 장군의 고문 호레이스 언더우드(Horace H. Underwood) 박사와의 면담, 정보참모부 군사실 일지, 1945년 12월 30일.
註 002
주한미군 사령관이 제6보병사단장, 제7보병사단장, 제40보병사단장, 제24군수지원사령부 사령관, 미군정장관에게 보낸 전문 TFGSI 94, 291019/I, 1945년 12월 29일, 부관참모부 문서철.
註 003
호레이스 언더우드 박사와의 면담, 정보참모부 군사실 일지, 1945년 12월 30일.
註 004
워싱턴에서 태평양미육군 사령관에게 보낸 전문, WX90802, 3005533/Z, 1945년 12월 30일, 부관참모부 문서철.
註 005
전쟁부 부관참모처(WARTAG)가 태평양미육군 사령관에게 보낸 전문, 310345/Z, 1945년 12월 31일. 부관참모부 문서철.
註 006
주한미군 사령관이 연합군최고사령부에 보낸 전문 TFGCI 212, 0215101, 1946년 1월 2일.
註 007
태평양미육군 사령관이 제24군단에 보낸 전문 ***16033/Z, 161336/Z, 171650/I, 1946년 1월 17일. 부관참모부 문서철.
註 008
제24군단 로버츠(Rankin Roberts) 중령과의 면담. 1946년 3월 22일, 정보참모부 군사실 일지.
註 009
주한미군 사령관이 연합군최고사령부에 보낸 전문 TFGCG 212, 0215101, 1946sus 1월 2일, 부관참모부 문서철.
註 010
주한미군 사령관이 연합군최고사령부에 보낸 전문 TFGBI 96, 1945년 12월 29일, 부관참모부 문서철; 주한미군 사령관이 연합군최고사령부에 보낸 전문 TFGCG 272, 012319/I, 1946sus 2월 1일, 부관참모부 문서철.
註 011
주한미군 사령관이 태평양미육군 사령관에게 보낸 전문 TFGBI 157, 251000, (1946년 1월 25일, 부관참모부 문서철)에서 인용.
註 012
Ibid.
註 013
연합군최고사령부가 제24군단에 보낸 전문, 130207/I, 1946년 1월 13일, 부관참모부 문서철.
註 014
NBC방송, “Korea and Far East”. 참석자: 국무부 극동국장(Director of the Office of Far Eastern affairs) 존 카터 빈센트(John Carter Vincent), 일본-한국 경제과장(Chief of the Division of Japanese and Korean Economic Affairs) 에드윈 마틴(Edwin Martin), 전쟁부 민사처장(War Department Civil Affairs Division) 및 전 주한미군정청 민정관(Civil Administrator American Military Government in Korea) 프레스콧(Brainard E. Prescott) 대령, NBC University of the Air 감독 스털링 피셔(Sterling Fisher). 1946년 1월 19일 1900 방송. 이 방송은 “Our Foreign Policy”라는 방송의 49회로 국무부가 참여한 것으로는 여섯 번째 방송분이었다. ‘워싱턴에서 태평양미육군 사령관에게 보낸 전문, 232557, 1946년 1월 23일, 부관참모부 문서철’을 참고하라.
註 015
1946년 1월 22일 AP통신이 모스크바에서 한 보도.
註 016
『조선인민보』, AP통신의 1946년 1월 25일자 특보에서 재인용.
註 017
타스통신 보도를 코겐(R. K. Kogen)이 번역, 정보참모부 문서철.
註 018
주한미군 사령관이 연합군최고사령부에 보낸 전문, TFCGC 255, 260926/I, 1946년 1월 26일, 부관참모부 문서철.
註 019
국무부(번즈)가 연합군최고사령부 정치고문, 주한미군사령부 정치고문에게 보낸 전문, 271512/Z, STATE 90. 302305/I, 1946년 1월 30일, 부관참모부 문서철.
註 020
미군정 여론국 공보과(Department of Public Information, Office of Public Opinion, USAMGIK) ******가 글렌 뉴먼(Glenn Newman) 대령에게 제출한 조사보고서, 1946년 1월 29일, 정보참모부 군사실 문서철.
註 021
하지 장군이 맥아더 장군에게 보낸 전문 TG*** 272, 012319/I, 1946년 2월 1일, 부관참모부 문서철.
註 022
하지 장군이 맥아더 장군에게 보낸 전문 TFGCG 262, 281320/I, 1946년 1월 28일, 부관참모부 문서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