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원회 회담
1946년 3월 20일 오후 1시, 덕수궁에서 대대적인 환영행사와 함께 미소공동위원회의 막이 열렸다. “대표단은 한국인 인파가 줄지어선 거리를 차로 이동해 색깔 제복을 입은 한국 경찰과 기마경찰대, 미군 의장병의 도열을 지나 덕수궁에 도착했다. 미 군악대의 환영 음악이 대표단을 맞이했다. 회담장에 들어서기 전, 하지(Hodge), 슈티코프(Shtikov), 아놀드(Arnold) 장군은 궁에서 미군 경비대를 사열했다.”001001 특별 보도 자료, 사령부. 주한미군정청, 공보부, 1946년 3월 31일.닫기
초기 회의에서 언론과 제한된 미국 참관인들에게 공개된 첫 부분은 주로 양측 대표단의 예식 모습과 환영 연설이었다. 그러나 전 분야에 대한 미국과 소련의 관점을 제기한 중요한 연설들이었다. 하지 장군은 먼저 일어나 말했는데 일부를 옮기면 다음과 같다.
“오늘은 한국 역사에서 중요한 날이다. 큰 희망을 품고 나라의 미래를 기대한 모든 한국인들에게 중요한 날이며 미래 한국인들이 한국 역사의 새 시대의 시작이라고 축하할 날이 될 것이다. 한국인들 뿐 아니라 전세계가 여기 우리를 지켜보고 있을 것이다. 이 위원회 회담 결과, 미국과 소련 두 강대국이 억압과 폭정에 대항한 승리를 기회로 삼아 서로 충분히 협력하고 불행히도 긴 압제에 시달린 나라를 자유국가군의 주권을 가진 독립국가로 회복시킬 능력이 있음을 증명할 것이다. 우리가 이 위원회 회의를 성공적으로 이끈다면 한국의 미래 뿐 아니라 세계 평화와 행복을 지속시킬 것이다.”
“나는 미국의 대표로써, 우리의 노력을 통해 정치, 경제, 행정 무엇이든 한국이 당면한 모든 문제를 평화적이고 정의롭게 풀 수 있게 될 것이라는 바람과 자신감을 표한다.”
슈티코프 장군은 소련의 답변을 읽었다. 중요 부분은 다음과 같다.
“....그들의 피와 셀 수 없는 고통으로, 한국인들은 독립과 삶의 자유를 향유할 권리를 얻었다.”
“소련인들은 한국인들의 이러한 권리를 열렬히 지지했다. 소련은 예외 없이 어느 나라라도 민족 자결과 독립을 이루도록 언제나 싸워왔고 또 싸울 것이다.”
“한국인들이 연합국의 도움을 받으면서 자유를 사랑하는 모든 나라에 우호적이며 독립적인 민주정부를 건설하려는 굳은 의지를 이미 보였다는 점을 우리 모두는 확신하고 있다.”
“그러나, 한국인들이 삶 속에서 지속적인 민주화를 이루는 과정에는 심각한 문제들이 있다. 반동분자들의 맹렬한 저항, 한국에서 민주주의 체계를 확고히 건설하려는 노력을 오로지 약화시키려는 반민주적 그룹과 몇몇 분자들이 그런 문제를 일으켰다.”
“미소공동위원회의 임무는 한국인들이 한국의 민주화와 재건 임무를 실행할 수 있는 민주적인 임시정부를 만들도록 돕는 것이다.”
“오직 이러한 정부만이 한국의 정치, 경제에서 일본 지배의 잔재를 완전히 없애고, 한국 내의 반동분자와 반민주 인사들과의 싸움에 결단력 있게 착수하며, 경제 재건에 철저한 대책을 세우고 수행하며, 한국인들에게 정치적 자유를 부여하고, 극동의 평화를 위해 싸울 수 있을 것이다.”
“소련은 한국이 진정으로 민주적이고 독립적이며 소련에 우호적인 국가가 되는 일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 그리하여 미래에 소련을 공격하는 기지가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모스크바 3상회의의 결정에서 나온 미소공동위원회의 임무는 한국의 임시민주정부의 참가와 한국의 민주주의 조직들의 지원, 한국인들의 정치, 경제, 사회적 진보에 있어 신탁통치 결정에 대해 존중하는 한에서의 원조와 지원 방안, 민주적인 자치 정부의 발전과 한국의 자주 독립 건설을 또한 진행하는 것이다. 빨리 국가를 재건하고 민주적인 토대 위에서 독립국가 한국을 회복해야한다는 조건을 보장한다면, 이러한 임시 신탁통치는 한국인들의 근본적인 관심과도 부합한다.”
슈티코프 장군의 이러한 초기 언급에는 두 가지 매우 중대한 관점이 드러났다. (a)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이 한국에 신탁통치를 시행할 의무를 상정했다고 보는 점과 (b) 소련에 우호적이지 않으면 한국 정부를 승인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이다.
이러한 행사 후 바로 이어서, 상업 분야 회의 시작을 회담장이 정리된 후, 공동위원회 위원들은 사진사와 기자들 앞에서 포즈를 취했다.002002 위와 같음.닫기 이 분야 회의는 3월 20일과 5월 6일 사이에 진행된 회의 중 24회 진행되었다. 그 중 발표된 성명은 해당 기간 동안 발표된 7개의 공동성명을 제외하고는 임시 비밀로 간주되었다.
위원회 회담의 운영 구조를 합의하는 형식적인 절차는 별다른 사건 없이 빠르게 진행되었다. 엄밀한 의미의 위원장직과 분과위원회 위원장직은 매주 번갈아 맡았고, 양 측 위원장이 결정하는 대로 회의를 제안할 수 있으며, 권한을 가진 사람이 공지하고 긴급회의를 제안할 수 있었다. 입회는 공동 합의 하에 가능했고, 회의록은 승인 후에 공식화되었다.003003 첫 번째 회기의 보고서, 1946년 3월 20일, A.N. 버치(Bertech) 소위, 참모장 파일.닫기
뒤이은 회의 동안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에 반대하는, 더 정확히는 신탁통치에 적대적인 한국의 정당․단체와의 교섭을 소련이 거부할 것임이 분명해졌다. 비슷하게, 소련이 정당들의 대표와만 상의하고 싶어 한다는 점도 명백해졌다. 최근 북한 조선민주당의 총재 조만식을 성급하게 제거하고 정치적으로 소련에 더 우호적인 사람으로 대체하면서 그 이유는 확실해졌다.004004 위와 같음.닫기
첫 날의 주된 논의는 새로운 발표나 성명에 관한 문제였다. 만약 위원회가 실패했을 때 미국이 별개로 공표할 가능성을 미연에 방지하려는 소련측의 의도가 포착되었다. 소련측은 성명을 자주 발표하지 말아야 하며, 문제가 발생했을 때 발표해야 한다고 먼저 주장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1주일에 한 번 성명을 발표하고 공표할 결정사항이 있을 때에는 더 자주 하는 절충안으로 합의되었다. 다음으로, 소련측은 일방이 단독으로 성명을 발표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미국측은 양국이 모두 이러한 성명을 발표할 권리를 인정하게끔 시도했다. 하지만, 소련측은 그런 방침은 회담의 성공적 진행을 위태롭게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아놀드 장군은 결국 이 요구를 철회했고, 이 부분에 대해서는 잠정적으로 합의가 이루어졌다.005005 위와 같음.닫기
“임시 정부 건설을 돕기 위한” 방법과 “이러한 정부 건설을 위한 조건 창출”(안건 중 제4항목)의 방법을 도입하는 문제에서 예상 밖의 심각한 문제들이 발생해 전체 회기에 걸쳐 위원회를 괴롭혔다. 미국은 초기에 한국자문연합(Korean Consultative Union)을 제안했다. 인구에 비례하여 남북한 민주 정당들과 단체의 대표로 구성하고 위원회가 그 외의 주요 인사를 제안할 수도 있는 형태였다. 이 단체의 기능은 후보자들의 명단을 준비하고 임시 정부의 헌법 초안을 작성하는 것이었다. 단체의 활동은 위원회의 승인과 수정을 거쳐야 했다. 덧붙여, 앞서 언급한 제안을 용이하게 실행하기 위해 남북한 간 교류에서 현재 발효 중인 모든 제한을 제거하려고 했다.
이 제안에 대한 대응으로 소련은 모스크바 선언(Moscow Declaration)의 제2항과 3항을 끈질기게 제시했다. 즉, (a) 개인 추천과 임시 민주정부의 구성 협의, (b) 한국인들의 정치, 경제, 사회적인 진보와 자치 정부의 발전, 독립주권국가의 건설을 위한 원조와 지원(신탁통치) 방안 협의이다.006006 정보참모부 정보요약, 북한 9번, 1946년 4월 5일, 2쪽.닫기
구체적으로 소련측은 모스크바 선언에 반대를 표한 어떠한 단체라도 위원회와의 협의에서 배제할 것과 오직 “공식적으로 인정받은” 단체와만 협의를 수용할 것을 요구했다. 뿐만 아니라, 위원회는 남한의 민주 정당들과의 이러한 협의 후 북한의 민주주의 정당들과도 비슷한 협의를 하기 위해 평양으로 자리를 옮겨야 한다고 제안했다. 임시 정부 건설 이전에 한국을 통일해야 한다는 제안은 분명 없었다. 또한 소련의 제안은 위원회가 개인들을 선택하여 임시 정부의 구조를 결정하자는 것이었다.007007 위와 같음.닫기 소련 대표단이 진실로 현재 한국의 분단 상황을 끝내려는 의지가 있는지에 대해 미국 입장에서는 이미 의구심이 들고 있었다.008008 위와 같음.닫기
두 번째 회의에서 성명에 관한 논의가 진행되었다. 미국대표단도 공지나 협의 없이 어떠한 단독성명도 발표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며 소련측도 이러한 정책을 준수하기를 바란다는 점을 아놀드 장군이 소련측에 확인해주고서야 논의가 마무리되었다. 소련측의 대표단 중 한 명이 즉석에서 한 “단지 일반 국민들을 만족시키기 위해 회담의 세부사항을 발표하는 일은 적절치 않다”는 발언에서 소련측의 관점을 알 수 있다.009009 두 번째 회기 보고서, 1946년 3월 22일, L.M 버치(Bertsch) 소위, 참모장 파일.닫기
또한 소련 대표단은 미국이 제안한 한국자문연합에 대해 이의를 제기했다. 소련측은 이러한 협의 기구보다는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에서는 자문 기구를 상정하지 않았으며, 민주 정당·단체들과 협의하는 것이 결정사항 이행에 더 가깝다.”는 점을 강조했다.010010 위와 같음.닫기 또 다른 소련측의 의도는 이렇게 해서 매번 미국 대표단을 자극해 화나게 하는 것이었다. 모스크바 결정에 대해 좁고 융통성 없는 해석을 제시했고 모스크바 결정을 시행하기 위해 결정사항에 표현된 어구 해석을 확장해야할 때에도 많은 경우에 이를 거부했다.
구체적으로 이 경우에 있어서 소련측이 논의를 이행하기 위해 제안한 방법에 대해서 미국 대표단은 분명한 언급을 듣기 위해 노력했다. 구체적인 질문 중 일부는, ‘누가 협의할 정당과 단체들의 명단을 작성할 것인가?’, ‘소련측이 언급한 “공식적으로 인정받은” 정당과 단체의 정확한 의미는 무엇인가?’ 등이다. 협의에 관해서 슈티코프 장군은 “인민을 대표하는 중앙 조직들과만” 협의해야 한다고 답변했다. 또한, “공식적으로 인정받은”의 의미는 “그동안의 업적으로 한국인과 미군·소련군 사령부에 잘 알려져있는”이라고 말했다.011011 위와 같음.닫기 여기에 해당하는 조직이 남한에만 100에서 500개가 있다고 지적하자, 소련측은 그런 숫자는 불가능하다고 답변했다. 소련측은 북한지역에 그러한 조직이 천 여 개를 헤아린다고는 인정하면서도, 그 많은 조직은 하부 단위들의 의지와 노력을 반영하는 중앙 조직이 있고 이러한 중앙 조직의 숫자는 30개 정도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하지만, 미국측이 ‘공식적인 인정’의 유일한 기준이 중앙 조직의 유무냐고 되묻자, "아니다”는 단호한 답변이 돌아왔다. 24사단 특별 정치 참사관인 레너드 버치(Leonard M. Bertsch) 소위에 따르면, “어떤 조직들”이냐는 질문에 대한 답변은 여전히 모호했다고 한다.012012 위와 같음.닫기 버치 소위는 이 부분에 관해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013013 위와 같음.닫기
“소련 대표단의 의도는 명백하다. 그들은 마음속으로는 남북한 모든 정당들을 모은 임시정부에서 우익이 영향력을 행사할 것이라는 점을 인정하고 있다. 북한에서는 지하조직 외에 어떠한 조직된 활동이라도 효과적으로 제압했기 때문에 조선민주당(Chosun Democratic Party)을 그들의 수하에 넣고 독립동맹(Independence Union, 또는 조선신민당(New Korean Democratic Party))을 협력자로 만들었다. 소련측은 미국 점령 지역 내에서 만연한 반대 표현의 자유가 자신들에게 강력한 힘을 보태줄 것이라고 자신 있게 예상했다.”
두 번째 회기를 마치며 아놀드 장군이 제안한대로 다음 회의 전에 양측이 그 문제를 명확히 하기 위한 질문 사항을 서면으로 작성해 제출하기로 했다. 3월 25일 세 번째 회기에 앞서 미국측은 소련측에 다음과 같은 질문사항을 제출했다.014014 미국 문서 13번, 공동위원회 파일, 1946년 3월 23일, 아놀드 소장이 슈티코프 장군에게 전달한 비망록닫기
“1. 미국 대표단은 한국의 민주적인 임시정부 건설에 관한 소련측의 제안서 #1과 관련한 다음 질문들에 대한 답변을 정중히 요청한다.”
“2. 제안서 #171의 의제 중 제2항목에서 서술된 대로 위원회가 정당과 사회단체들의 명단을 작성할 때 당신은 어떤 방법을 고려하고 있는가?
a. 절차 상 첫 번째 수순은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b. 누가 명단 작성을 맡을 것인가?
(1) 남한과 북한의 명단을 함께 작성할 것인가? 또는 따로 작성할 것인가?
c. 명단 작성의 원칙은 무엇인가? 구체적으로는,
(1) 어떤 자격을 가진 사회단체를 선발하나?
(2) 어떤 자격을 가진 정당을 선발하나?
(3) 어떻게, 언제까지 이러한 자격요건을 정할 계획인가?
d. 명단 작성을 끝내는 데에 어느 정도의 시간이 소요될 것으로 생각하는가?”
“3. 3번 의제에 대해 : 당신이 제시한, 조직의 구조와 원칙에 대해 제안한 내용의 방법을 약술하시오.
a. 제안한 추천서로 어떤 방법으로 초청장을 제출할 것인가?
b. 이러한 정당과 단체들은 어떤 형식으로 자신들의 견해를 제시할 수 있는가?
c. 이렇게 제시한 견해는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예를 들면,
(1) 구성원들의 숫자에 무게를 둘 것인가? 만약 그렇다면, 누가 그 숫자를 정할 것인가?
(2) 정부 내에서의 적극적인 참여에 무게를 둘 것인가? 그렇다면 이것을 어떻게 판단할 것인가?
(3) 단체나 정당의 대중적인 지지에 무게를 둘 것인가? 만약 그렇다면 이것을 어떻게 판단할 것인가?
(4) 만약 1개 이상의 기준을 두어 정당과 단체들의 견해를 평가한다면 이러한 각 평가기준에 구체적으로 어느 정도의 무게를 둘 것인가?
d. 제21항에 따라 일을 수행할 때 어느 정도의 시간이 걸릴 것으로 생각하는가?”
“4. 이 정부의 정강에 대한 의제 제4항에 따르면 구체적으로,
a. “정강”이라는 표현은 어떤 의미인가?
b. 정강을 결정하기 위해 제안한 귀측의 방법을 약술하시오. 구체적으로 다음의 내용을 포함하시오.
(1) 정당과 단체들은 어떤 형식으로 그들의 견해를 제출할 수 있는가?
(2) 이러한 견해들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위의 3번 내용을 보시오.
c. 의제의 논의 사항을 수행하는 데에 시간이 얼마나 거릴 것이라고 예상하는가?”
“5. 임시 정부의 정치적인 구성을 위한 추천내용에 대한 의제 제5항에 따르면,
a. 임시 정부의 인적 구성을 결정하기 위해 귀측이 제안한 방법을 다음과 같은 구체사항을 포함하여 서술하시오.
(1) 이러한 정당과 단체들은 어떤 방식으로 그들의 견해를 제출할 수 있는가?
(2) 이러한 견해들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3) 어떤 기준으로 정부 내 직위에 맞는 인사를 선발할 것인가? 예를 들면,
(a) 대중적 지지기반이 기준이 될 수 있는가? 그렇다면 이것은 어떻게 판단할 것인가?
(b) 위원회가 발표한 공약에 대한 충성도로 기준을 삼을 것인가? 그렇다면 이것을 어떻게 판단할 수 있는가?
(c) 정당 소속이 필수조건이 될 것인가?
(4) 다양한 정당과 단체의 추천을 어떻게 통합할 것인가?
b. 당신의 안건에 대한 이러한 사항들을 마무리 짓는 데에 얼마나 시간이 걸릴 것을 생각하는가?”
“6. 장담하건대, 당신에게 불필요한 업무를 가중시키기 위한 의도는 전혀 없다. 그러나, 미국 대표단이 당신의 제안을 신중히 검토하려면 위의 사항에 대한 답변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3월 25일 세 번째 회기 전에 공동 성명 2개가 발표되었다. 두 성명 모두 절차상의 문제를 다루었을 뿐 별로 중요한 내용은 없었다.015015 공동성명 1호, 주한미군정청, 공보부, 22 1946년 3월 22일; 공동성명 2호, 주한미군정청, 공보부, 1946년 3월 25일..닫기 또한 세 번째 회기에 앞서 3월 25일 미국 대표단이 소련측에 질문서를 제출했다. 다음날 소련측은 모든 구체적인 질문사항을 무시하며 차후 토론에서 모든 해답이 주어질 것이라고 확언했다. 소련측 대표단은 질문서를 제출하지 않았고, 아무것도 제출할 생각이 없으며 질문에 대한 답변을 할 생각도 없었다고 세 번째 회기 중에 언급했다. 우리측과의 약속을 저버린 것이었다.
아놀드 장군은 “이번 회기의 목적은 소련측의 제안에 대해 토론하는 것이다. 우리가 바라는 바이기도 하다. 솔직히 말하자면 우리는 당신의 현재 계획을 이해할 수가 없다. 합의한 대로 우리가 제출한 질문에 답변을 받아야 우리도 파악이 가능하다. 그렇지 않다면 이 위원회는 어떤 진전도 없을 것이다.”라고 미국의 입장을 대변했다. 이에 대해 슈티코프는 “그건 좋은 방법이 아니다...이미 명백해진 부분에 대한 이의제기는 옳지 못한 것이다...만약 당신이 회의 주제를 두 가지로 압축하는 것에 동의한다면 그 두 가지에 대해 토론하자...우리의 제안은 매우 명확하고 일관된다. 즉,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사항을 반드시 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소련 대표단은 결정사항을 어떻게 이행할지 알고 있으며, 결정사항에는 이미 이행방법이 명시되어 있다.”라고 답변했다. 아놀드 장군의 다음과 같은 언급과 함께 회기가 끝났다. “우리의 질문에 답변할 것인지 아닌지 소련 대표단이 결정해야만 한다. 소련측이 답변하지 않겠다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그들의 제안을 더 이상 고려하지 않을 것이며 소련측의 제안내용으로 논의하기를 거부할 것이다. 대신 미국측 제안으로 토론을 계속할 것을 제안한다.”016016 세 번째 회기의 보고서, L.M 버치(Bertech) 소위, 1946년 3월 25일, 참모장 파일.닫기
위원회의 진행을 더 이상 늦추지 않기 위해 네 번째 회기 시작에 맞춰 미국 대표단은 소련측이 약속대로 명확한 답변을 제출해주기를 요청했다. 그러면서 아놀드 장군은 “우리는 당신의 제안이 구체적인 계획이라기보다 대강의 윤곽을 그린 것이라고 추정하고자 한다. 만약 이 경우, 우리의 질문에 대해 세부적인 답변을 할 수 없는 입장임을 이해할 수 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이 시점에서 우리의 질문을 취소하고자 하며, 이에 동의한다면 회담 진행을 위해 취소하겠다.” 그러나 소련측은 자신들의 제안이 그저 대략적인 것일 뿐이라는 점에 수긍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양측 모두 위원회의 활동이 다음과 같이 두 가지로 압축된다는 점에는 동의했다. (a) 정부 설립과 관련됨, (b) 향후의 한국의 국가 건설을 원조하기 위한 방안 모색과 관련됨.
합의한 부분에 대해 소련측은 “정당과 사회단체들의 명단 작성 시, 위원회가 협의해야한다”고 해석할 것을 주장했다. 미국측은 이러한 입장에 이의를 제기했다. 이 부분은 “한국의 민주적인 정당과 사회 단체들 중 어떻게 그리고 누구와 함께 협의할 것인가에 대한 결정”으로 해석하는 것이 합당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요약하면, 소련측은 협의할 단체의 명단 작성을 즉시 시작하기를 원했고, 반면에 미국측은 그 단체들을 선택할 때 필요한 원칙을 먼저 정하려고 했다. 미국측은 진행 방법이 합의될 때까지 이 첨예한 논쟁을 미루고 싶어 했다. 아놀드 장군은 그가 제안한 표현이 누군가를 인정하거나 제외하는 현재의 결론으로 이르지는 않겠지만, 이후에 문제가 야기될 수도 있는 방법이라고 언급했다.017017 네 번째 회기의 보고서, L.M 버치(Bertech) 소위, 1946년 3월 26일, 참모장 파일.닫기
다섯 번째 회기를 시작하면서 아놀드 장군은 “당신은 이 문제에 대해 적당하다고 판단되는 시기에만 결정을 내리려고 한다. 우리는 당신이 해결방안을 적절한 시기에 적절하게 제시하는 것을 방해하려는 게 아니라, 우리의 방안을 제시하는 것뿐이다...만약 원칙이 없다면 진행과정이 필요 없을 것이다. 적당하다고 보는 시기에 양측 다 어떤 주제든 꺼내들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당신이 이것을 선호한다면, 그러한 협상 계획대로 하지 않아도 된다. 그리고 우리는 양측이 동의한 첫 번째 주제인 한국 임시정부 건설 방안을 먼저 진행할 것이고, 이 부분은 변함없다. 국제적인 협의 원칙을 따르는가 여부, 우리의 협상 계획 여부에 상관없이 당신이 선호하는 방향에 따르고자 한다. 우리는 더 이상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다.”
이에 대해 치스챠코프 장군이 “그러면 이후에 정당과 단체 명단 작성에 완전히 참여하지 않을 것인가?”라고 의문을 표했다. 아놀드 장군은 “넓은 의미로, 우리는 제안된 어떤 해결방안이라도 고려할 수 있다. 확실히 말하건대, 우리는 명단 작성에 대해 논의할 수 있지만, 다만 우리가 맡은 부분에서는 자문단에 무게를 둘 것이다.”
슈티코프 장군은 “명단 작성 문제는 협상의 어떠한 국제 기준도 어기지 않았다...이러한 명단 작성은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에 따른 것이다...이것은 반드시 지켜야 한다...어떠한 협의 기구도 인정할 수 없다. 이러한 기구는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의 문구와 정신 모두에 위배된다...어느 개인도 한국인들을 대표할 수는 없다. 우리는 오직 정당과 단체들을 통해서만 한국인들과 소통할 것이다. 정당들이야말로 한국인의 대표성에 부합할 뿐, 개인들은 그렇지 않다.”고 소련의 입장을 정리했다. 이 논의는 언쟁으로 번졌고 “슈티코프 장군은 격노했다”. 버치 소위에 따르면, “정말로 화나 보였다. 슈티코프 장군은 탁자 맞은편에서 소리치며 ‘위험한 짓’을 그만두라고 경고했다”.018018 다섯 번째 회기의 보고서, L.M 버치(Bertech) 소위, 1946년 3월 28일, 참모장 파일.닫기
그러나 여섯 번째와 일곱 번째 회기에서는 전반적으로 우호적인 분위기였고 위원회 첫 번째 회기 동안 협의된 네 개의 목표들을 문구화시키는 데에 합의했는데 다음과 같다. (a) "한국의 민주적인 정당 및 사회 단체들과 협의를 위한 조건과 순서“ (b) "임시한국민주주의정부(Provisional korean Democratic Government) 및 지방 기관(임시 지부) 조직의 구조와 원칙에 대한 권고 세부사항 검토” (c) “미래의 임시한국민주정부의 예비 정치 강령과 그 외 적절한 예비 조치를 위한 세부사항 검토” (d) 임시한국민주정부의 인사들을 위한 권고 세부사항 검토” 이 합의는 근본적으로 곧 닥칠 설전을 연기한 절충안일 뿐이었지만, 그럼에도 위원회 업무 순서를 정한 것이었다.
소련측은 첫 번째 세 가지 목표를 실행하는 일을 공동위원회(commission) 산하의 위원회(committee)로 배정할 것을 제안했다. 이를 통해 세 개의 분과회가 지정되고 업무 수행을 위해 4일 간 전체 공동위원회가 연기되었다. 분과회에는 짜랍킨(Tsarapkin)과 데이어(Thayer)(목표 “a” 검토), 레베도프(Lebedoff)와 브리튼(Britton)(목표 “b" 검토), 발라사노프(Balasanov)와 번스(Bunce)(목표 "c" 검토)가 임명되었다.019019 여섯 번째와 일곱 번째 회기 보고서, 1946년 3월 28일과 30일, L.M 버치(Bertech) 소위, 참모장 파일, 그리고 미소공동위원회의 3호 성명, 24군단 여론국(PRO), 1946년 3월 30일.닫기
이 세 분과회들 중에서 “한국의 민주적인 정당 및 사회단체들과의 협의를 위한 조건과 순서”에 관한 논의의 임무는 첫 번째 분과회에 배정되었다. 이 주제로 위원회가 교착상태에 빠졌기 때문에 가장 흥미로운 부분이었다. 짜랍킨은 이 분과회의 소련 대표였는데,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을 완전하게 찬성하지 않는 사람들은 누구라도 신뢰할 수 없다는 생각을 제시했다. 미국의 대표는 데이어였는데, “신탁통치를 지지하지 않고 사실은 독립을 더 원한다고 말하는 정치 지도자와 국제적인 필요 때문에 하는 수 없이 신탁통치가 필요하다고 말하는 지도자 중 후자를 신뢰하는 일은 과연 적절한가?”라고 날카롭게 물었다. 짜랍킨은 그런 지도자를 신뢰하는 일은 매우 현명하지 못한 것이라고 답했다. 그런 다음, 데이어는 조선공산당의 지도자인 박헌영(Pak Heun Yung)의 발언을 사실상 문자 그대로 인용한 논평을 폭로했다. 버치 소위에 따르면 짜랍킨은 확실히 분노했다. 그러고 나서 데이어는 좌익인 조선인민당(People's Party)의 당수 여운형의 말을 다음과 같이 인용했다. “모든 한국인은 신탁 통치를 반대한다. 신탁통치를 지지하는 나의 행동은 전적으로 잘못된 것이다”. 짜랍킨은 사실 한국인 누구도 독립보다 신탁통치를 선호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하며 그 점을 결국 인정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스크바 결정을 정식으로 수락하는 일은 협의에 임하는 어떤 조직도 받아들여야 하는 필수 요소라고 계속해서 주장했다. 다음과 같은 데이어의 언급에 미국의 반응이 잘 요약되어 있다. “독립보다 신탁통치를 선호하는 정당은 없다. 우리가 아는 한, 아무도 신탁통치에 저항하지는 못하지만 그럼에도 신탁통치를 지지하는 건 아니다. 모든 정당은 그래서 사실상 입장이 같다고 볼 수 있다. 그들은 우리의 생각을 지지하지 않지만 맞서지는 못할 것이다...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을 수용한다는 말은 그러므로 의미가 없다”. 곧이어 데이어는 짜랍킨이 조건 없이 신탁통치 지지를 대중적으로 표명하는 남한의 정당을 지명하는 것을 비판했다. 그러한 정당을 지명할 수 는 없을 것이라고 짜랍킨도 인정했다. 1946년 4월 3일, 전체 위원회의 8번째 회기에서 분과회의 무능 때문에 분과회가 남겨놓은 문제에 대해 미소공동위원회가 4일 먼저 논의를 재개하게 되었다. 의견이 완전히 충돌했기 때문이다.
이 시점에서 소련의 제안은 정당들과 조직들의 협의에 있어서 두 가지 조건을 명시하는 것이었다. (a) “공동위원회가 협의할 민주 정당 및 사회단체들은 반드시 공식적으로 승인받아야 한다.” (b) “공동위원회는 한국과 관련한 모스크바 3상회의의 결정을 완전히 지지하고 결정사항의 이행을 위해 위원회에 협조하는 단체들과만 협상해야 한다.” 이러한 소련의 기준에 대해 미국은 모스크바 결정의 지지를 요구하는 조항에 반대했다. 공동위원회의 결정과 그 이행을 위해 기꺼이 복종하겠다는 단순한 약속을 듣기만 하면 조건에 부합하게 되는 것으로 생각되기 때문이다. 나아가, 만약 위원회가 모스크바 합의에 (신탁통치에 대항해) 반대의 목소리를 내지 않는 정당들하고만 협의하겠다고 결정한다면 남한에서는 협의할 대상이 아예 없을 것이다. 여기에 대해 소련측은 남한에도 모스크바 결정을 전적으로 지지하는 정당과 사회단체들이 있다고 이의를 제기했다. 또한 공동위원회는 한국인들의 정치적․경제적․사회적 진보와 민주적 자치정부의 발전, 한국의 국가적 독립의 실현을 (신탁통치가) 돕는다는 조항을 포함하여 모스크바 결정에 대해 부분적이라도 반대의 목소리를 내고 지지하지 않은 남한의 정당과 사회단체들과는 전혀 협의할 것이 없다는 의견을 표명했다. 이것은 그 날 소련의 마지막 제안이었다. 협약 시, 미국의 최종 입장은 본질적으로 다음가 같다. 공동위원회의 협의대상이 되는 정당·사회단체는, 그 정당·사회단체의 목적과 방법이 모두 진정으로 민주적이며 성실히 협조할 준비가 되어 있고, 모스크바 결정의 제2항과 3항에 따라 공동위원회가 임무를 수행하도록 충분히 지원해야 한다는 것이다. “만약 우리가 소련의 제안을 받아들인다면 나는 우리의 행동이 정부로부터 즉각적으로 거부될 것이라고 확신한다”고 아놀드 장군은 판단했다.020020 여덟 번째 회기 보고서, L.M 버치(Bertech) 소위, 1946년 4월 3일, 참모장 파일.닫기
4월 5일 아홉 번째 회기에서 소련은 절충안을 제시했다. 절충안의 내용은 정당의 지도자가 신탁통치에 반대한다고 해도 해당 정당이 현재 그러한 지도자를 거부하고 신탁통치를 지지한다면 그 정당을 협의 대상으로 수용한다는 것이다. 소련측은 “민주주의의 국가에서는 반드시 비민주적인 요소가 없어야 한다”고 덧붙였다. 이에 아놀드 장군이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정당들에게 독립을 열망하는 표현을 하지마라고 요구하는 것은 그들의 신념을 억압하는 것이다. 그것은 그들의 민주적 권리를 방해하는 시도이다. 정당들을 배제하자는 지침은 민주주의 활동에 대한 우리의 생각과 부합하지 않는다. 이러한 입장에서 우리는 모스크바 결정에 명시된 대로 따르고 있다...이곳 한국의 민주주의는 아직 유아기에 있다. 정당들은 20퍼센트도 안 되는 소수를 대변하고 있다. 우리는 나머지 80퍼센트의 사람들을 배제할 수 없다”
미 국무부는 신탁 통치에 반대하는 한국의 정당·사회단체들이 협의에서 배제되는 문제에 대한 미국 대표단의 반대 입장 표명을 전적으로 지지했다. 다음의 무전을 통해 알 수 있다.021021 전문, TOC 052318/Z WAR SVG, STATE DEPT WASH TO (판독불가능) 에서 24군단 사령관 정치고문에게, State Serial No. 50, 1946년 4월 5일, 부관참모부 문서철.닫기
“지금 신탁통치에 관한 토론에 임하는 것은 유용하지 않다. 그러므로 우리는 한국인이 모스크바 협정의 이 조항을 싫어한다고 해서 이를 이용해 한국 정당들을 협의 대상에서 배제할 수는 없다는 당신의 견해에 동의한다. 신탁통치와 관련한 마지막 결정은 공동위원회도 한국인들도 아닌 모스크바 협정의 제5항의 후반부에 부합하여 미소공동위원회에게 제안서를 받은 4개국 정부에게 책임이 있다.”

“만약 우리가 소련측에 이 부분을 이미 강조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다시 활용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모스크바 협정의 제2항에 따른 위원회 활동의 목적은 한국민주임시정부 구성을 권고하는 것이다......38선이 완전히 제거된다면, 남북한 사이의 인력과 정보의 교환은 더 쉽게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다. 만약 공동위원회에서 제안서 작성에 대한 합의가 용이하게 된다면, 대표 정당들 같은 쟁점을 결정짓기 위한 지역 선거 감독에 소련과 함께 착수하도록 준비되어 있다. 모스크바 협의에 명시되어 있듯이, 한국에서 우리의 유일한 목적은 민주적인 자치 정부의 발전과 한국의 독립국가 수립이다. 우리는 독립국가 한국이 소련과 미국뿐 아니라 국제 연합의 다른 국가들과도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기를 기대한다. 그리고 우리는 합리적인 절차를 통해 소련측 위원들이 우리 입장을 수용하게끔 준비하고 있다. 우리는 목표 달성에 있어서 타협하지 않을 것이며 목표가 성취될 때까지 인내할 작정이다.

“우리가 이행하기 위해 전적으로 노력 중인 업무에서 우리 자신의 책임을 덜기 위해 조급하고 불만족스러운 합의에 이를 수는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당신이 빨리 합의에 이르기 위한 불안감과 성급함 때문에 근본적인 목적에 해를 끼치지 않으려 하는 자세를 매우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실행 가능한 한 최대한 빨리 만족스러운 해결에 도달하는 과정을 원하기도 하지만, 우리는 섣불리 문제를 해결하고 싶지 않으며 당신의 행동을 전적으로 지지한다.”

10번째 회기는 미국측이 이른바 “분과회에 대한 지시”라고 명명한 초안에 대한 논의로 보인다. 이 초안의 요점은 다른 어떤 단체와 협의할지, 그들의 조언을 참고해 명단에 추가할지를 결정하여 공동위원회가 협의할 남북한의 민주적 정당·사회단체들의 기초 명단을 즉시 준비하라는 지시였다. 북한에서는 소련군 사령부가, 남한에서는 미군 사령부가 협의 대상 단체를 지명할 때 결정적인 발언권을 가지고 있었다. 초기의 명단은 남한과 북한의 인구뿐 아니라 다양한 사상을 적절히 대변할 수 있는 비율로 구성되었다. 이 시점에서 소련측은 모스크바 결정에 반대하는 정당·단체를 배제하자는 그들의 주장이 명단 구성의 조건으로 고려되었는지 질문했다. 그에 대해 아놀드 장군은 분과회가 협의 대상 정당들이 공동위원회 임무 수행에 성실히 협조할 것을 공표하도록 요구할 것이며, 불성실한 자들을 배제하자는 합리적인 요구를 만족시킬 것이라고 언급했다. 버치 중위에 따르면 이것은 사실, 소련의 주장에 대한 강한 거부였다. 배제 범위의 확장을 요구하는 것은 소련 대표단의 매우 극단적이고 불합리한 잘못된 신념이었다. 남한 정당·사회단체들에 대한 미국의 잠정적인 명단은 아래와 같다. 이것은 단지 논의된 것일 뿐 실행되지 않았다.022022 미국 문서 36번, 공동위원회 파일.닫기

1. 비상국민회의(Emergency National Assembly), 2. 민주주의민족전선(Democratic People's Front), 3. 한국독립당(Korean Independence Party) 4. 한국민주당(Hankook Damocratic party) 5. 조선공산당(Korean Communist Party) 6. 조선신민당(New Korean People's Party) 7. 신한민족당(New Korean Nationalist Party) 8. 조선인민당(Korean People's Party) 9. 신한민주당(New Korean Democratic Party) 10. 조선농민동맹(Korean Farmer's Federation) 11. 조선독립노동연맹(Korean Labor Federation for Independence) 12. 천주교회(Association of Christian Churches) 13. 천도교(Chuntokyo, 하늘의 도를 의미하는 종교) 14. 조선불교중앙총무원(Korean Buddist Central Council) 15. 유교회(Confucian Society) 16. 조선적십자사(Korean National Red Cross) 17. 조선기독교청년전국연합회(Korean Christian Young Man's Federation) 18. 독립촉성중앙협의회(Central Council for Independence) 19. 건국준비위원회(Preparation Committee for National Convention) 20. 조선여자국민당(Korean Women's Nationalist Party)

소련은 모스크바 결정에 반대한 정당들의 배제를 계속해서 요구했지만, 뒤따라 논의가 진행될수록 차츰 양보했다. 한 번은 슈티코프 장군조차도 찬성을 표했지만, 짜랍킨의 이의 제기로 다시 거부 의견으로 돌아서기도 했다. 매우 만족스럽지는 않지만, 상당한 수준의 문구가 승인되었는데, “협의하는 모든 정당 및 단체들은 모스크바 결정을 인정한다고 공표해야 하며 위원회가 시행하는 일을 도와야 한다”이다. 마지막으로 아놀드 장군은 “여기 한국에서 발언과 사상의 자유에 대한 우리의 신념은 변할 수도 없고 변화하지도 않을 것이다. 다시 한번 말하겠다. 정치적 신념을 표현했다는 이유로 그 누구든 처벌한다는 방침은 받아들일 수 없다. 우리는 협의 대상 정당·사회단체가 한국에 관한 모스크바 결정을 인정한다고 반드시 공표해야한다는 요구를 더 이상 하지 않을 것이며, 공동위원회가 모스크바 결정을 이행하도록 지지할 것이다.023023 열 번째 회기의 보고서, L.M 버치(Bertech) 소위, 참모부파일, 1946년 4월 6일.닫기
그러나, 합의가 될 것 같은 희망은 일시적이었다. 소련은 협의 대상 정당들이 모스크바 결정을 반드시 지지해야 한다는 언급이 없이는 어떤 방식도 분명히 반대하겠다고 선언했다. 토론은 맹렬히 계속되었고 같은 말이 끝없이 반복되었다. “모스크바 회의 결정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정직하지 않다....우리는 신탁통치 지지자들이 남한과 북한 양쪽에서 압도적인 다수라고 생각한다. 소수자들의 이익을 더 이상 고려할 수 없다”고 선언하면서 극단으로 치달았다.
미국측의 대답은 냉담하고 날카로웠다. “모스크바 결정을 ‘압도적인 다수’가 지지한다는 발언에 대해, 만약 슈티코프 장군의 이 언급이 신탁통치를 의미한다면 남한 사람들은 거의 지지하지 않는다고 말해두겠다. 이점에 있어서 우리 스스로를 속여 봤자 소용없다. 더욱이 대다수의 한국인이 남한에 살고 있다...배제 문제에 대한 당신의 견해는 모스크바 결정에 기초하지 않았다...모스크바 결정의 기본 문구는 우리가 민주적인 단체들과 협의해야 한다고 요구하는 것이다. 미국 대표단은 어떤 특정한 단체나 정당도 지지하지 않는다. 기본적인 민주적 권리, 즉 한국인이 자신의 견해를 지킬 수 있는 권리를 지지할 뿐이다. 모든 한국인은 모스크바 결정의 어떠한 부분이라도 반대할 권리를 가졌다...슈티코프 장군은 오직 다수인 사람들과만 협의하자고 제안했다. 사실, 어느 쪽이 다수인지에 대해 우리는 의견이 엇갈린다. 그러나 그것은 문제가 아니다. 독립을 위해 신탁통치를 지지하는 양쪽 모두, 소수파와 극소수파 또한 포함하여 귀를 기울여야 한다. 우리는 단지 그들이 공동위원회의 결정에 지지하는지만 묻고 있다. 말하자면 이것이 배제 문제에 대한 우리의 합의를 방해하는 요소이다. 그러므로 배제 문제에 대해 더 이상 언급하지 말고 우리의 임무를 진행하자.” 버치 중위는 “배제 문제를 통과시키려는 의지보다는 미국을 끌어들여 소련이 저지른 잘못에 대한 비난을 함께 받으려는 바람이 배제 문제를 주장하는 이유가 되었다고 추측해도 좋을 것이다.”고 말했다.024024 열한 번째 회기의 보고서, L.M 버치(Bertech) 소위, 1946년 4월 9일, 참모장 파일닫기
소련이 옹호 받을 수 없는 입장임을 충격적으로 주지시키기 위해 아놀드 장군은 12번째 회기에서 “한국인들이 모스크바 협정의 조항을 싫어한다는 이유로 한국의 정당들을 협의에서 배제시킬 수는 없다.”는 워싱턴의 지시문을 발췌해서 읽었다(184~185쪽에서 언급된 전문). 토론이 뒤따랐으나, 분과회가 협의 대상 단체들의 명단을 다시 작성할 수 있도록 공동위원회가 허락하자는 미국의 제안에 결국 슈티코프 장군이 동의했다. 그러나 그렇게 합의를 하면서도 슈티코프 장군은 미국측에게 소련 대표단은 이전에 논의된 조건을 앞으로도 방침으로 삼을 것이며 미국 대표단도 그렇게 한다면 가장 좋을 것이라며, “그렇지 않으면, 분과회는 동의할 수 없을 것”이라고 했다.
그런 후 아놀드 장군은 “모스크바 삼상회의 결정에 대한 지지를 협의의 조건으로 요구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 점을 소련 대표단은 이해하고 있습니까?”라며 직설적으로 물었다. 여기에 대해 슈티코프는 “모스크바 삼상회의 결정에 반대하는 이들이 지지로 돌아서지 않는 한 그들과는 협의하지 않을 겁니다. 이 점을 미국 대표단은 이해하고 있습니까?”라고 답했다. 이렇게 응수하는 것은 답변이 될 수 없다고 미국측이 지적하자, 슈티코프는 “아니오, 우리는 미국측 입장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라고 대답했다. 회기 막바지에 아놀드 장군이 의견 충돌 내용을 언급하는 공동 성명을 준비하자고 제안했다. 이 제안 이면에는, 의견이 충돌할 경우 미국측이 일방적으로 발표하겠다는 의미가 있었다. 소련측은 그 문제를 곰곰이 생각해보겠다고 약속했다.025025 열두 번째 회기의 보고서, L.M 버치(Bertech) 소위, 1946년 4월 9일, 참모장 파일.닫기
이 기간 동안 덕수궁에서 열린 회담의 결과에 대해 샌프란시스코(San Francisco)발 1946년 4월 6일자 AP통신(Associated Press) 기사가 나왔다. 한국 일간지 조선일보가 4월 7일에 보도한 대로, “정통한 소식통”에 따르면 미소공동위원회는 아직까지 한국 임시 정부 건설 논의를 성사시키지 못했고, 미군정 당국이 남한에 단독 정부를 세울 수 있다는 것이다. 게다가 또 다른 정보원은 이승만이 남한 단독 정부의 대통령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알려진 바에 의하면, 미국이 그러한 제안을 한 배경에는 공동위원회를 장기화하려는 소련의 시도와 미군 동원 해제로 예상되는 장교 수 감소가 있었다.026026 기사 요약, 주한미군정청, 공보부, 1946년 4월 8일.닫기
13번째 회기의 시작과 함께 슈티코프 장군이 준비해온 발언이 나왔다. 소련 대표단은 자신들의 입장을 다시 검증하고 재차 합당하다고 확인했다는 취지의 언급이었다. 즉, 모스크바 삼상회의 결정을 지지하고 결정사항 이행을 위해 노력하는 이들과만 협의해야 한다는 것이다. 슈티코프 장군은 계속해서 남한의 좌익인 민주주의민족전선(Democratic People’s Front)의 정당들이 모스크바 삼상회의의 모든 결정 사항에 대한 전면적인 지지를 선언했으며 반면에 다른 정당들은 신탁통치를 반대하는 증거가 많다고 덧붙였다. 최근 회의에서 김구가 신탁통치에 반대하는 입장을 표명한 점을 예로 들었다. 슈티코프 장군은 소련측이 어떻게 신탁통치에 대한 북한 주민들의 지지를 이끌었는지에 대해 설명했고, 남한에서도 이같은 과정을 거쳐 지지를 이끌어낼 수 있음을 시사했다. 최종적으로는, 미국인들이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을 충실히 이행할 의지가 부족하다고 비난했다.
아놀드 장군은 그 문제에 관해 유엔(United Nations) 헌장을 인용하면서 모스크바 결정에서는 최종 판단에 대해 한국인들과 협의하는 문제까지 예상하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당신들이 그러한 제외 조항을 도입할 권한이 어디에 있는가? 나는 모스크바 결정을 소련 대표단이 변경한 대로가 아닌 글자 그대로 시행해야한다고 제안하는 바이다.”라고 재차 질문했다. 신탁통치에 관한 유엔회의 헌장의 내용으로 토론이 이어졌지만, 소련 대표단은 이 회의와 전혀 상관없는 토론이라는 의견을 표출했다. 그러자 곧바로 아놀드 장군은 “유엔회의 헌장은 신탁통치의 형식을 기술한 규정이다. 짜랍킨(Tsarapkin)이 소련을 위해 여기에 서명한 사실에 주목하며, 소련이 반드시 책임을 져야 한다고 본다. 어떠한 형식의 신탁통치가 한국에서 행해질 지에 대해 미국 대표단이 알지 못한다는 점을 인정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남한 사람들에게 신탁통치에 대해 충분히 설명하지 못했다.”고 언급했다.
다음으로 아놀드 장군은 슈티코프 장군이 개회 발언에서 소련측이 남북한 모든 주민들의 민족 자결권을 위해 싸우겠노라한 약속을 상기시켰다. 아놀드 장군은 강한 어조로 “소련대표단은 지금 민족 자결권에 대한 소련측 입장을 재정립하고 있는 것인가? 왜 소련 대표단은 모스크바 3상회의 발표를 왜곡시키고 있는가? 모스크바 결정의 문구가 불만족스러운가? 애매모호한 말만 해서는 미소공동위원회가 어떠한 진전도 이루어 내지 못할 것이다.”라고 결론지었다.
이날 토론 막바지에 미국 대표단은 소련 정부가 압제에 신음하는 민족들의 독립에 대한 열망에 대해 막대한 관심과 연민을 보였던 점을 상기시켰다. 그리고 정확히 어떤 점에서 그러한 대승적인 의지가 지금의 비민주적인 대응으로 바뀌었는지 질문했다. 슈티코프 장군은 날카롭게 반박했다. “미국대표단이 여기서 소련의 국제 정책을 거론하는 건 맞지 않다. 우리의 역할이 아니다.”
4월 11일 보고027027 13번째 회기에서 L.M 버치 소위의 보고서, 1946년 4월 11일, 참모장 파일닫기에서 버치 중위가 소련측의 제외 방식 주장에 대해 흥미로운 논평을 했다.
“제외 방식에 대한 지금까지 소련의 주장을 보면, 북한에서 들어온 보고에 신빙성이 있다. 이것이 소련과 한국 공산주의자들 간에 논의를 통해 확실히 합의한 부분이라는 보고이다. 한국 공산주의자들이 과거 15년 내내 모스크바에 규율 문제를 지속적으로 제기하는 데에 성공했음을 보여준다. 한국 공산주의자들은 완전히 순응하지도 않았고 규율 상으로도 공산주의 최상의 전통과는 거리가 있다. 틀림없이 권력에 굶주려 신탁통치를 대중적으로 지지하라는 소련의 요구에 포섭 당했을 것이다. 소련이 제외 방식을 약속했기 때문이다.”
제13과 제14회기 사이에 아놀드 장군은 슈티코프 장군을 개인적인 회담장으로 불러냈다. 아놀드 장군은 왜 합의에 이르지 못했는지를 설명하는 성명을 지금 발표해야 한다고 언급했다. 소련 대표단이 자신들의 논리적 취약성을 분명히 알고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한 전략이었다. 아놀드와 슈티코프 장군이 거의 완전한 합의를 이루었다고만 말해두자. 이것은 1946년 4월 13일, 제14회기에 다음과 같은 형식으로 제출되었다.(밑줄 친 조항은 소련측 요구로 위원회 회기 전에 포함된 것이다)
“미소공동위원회는 진실로 민주적인 목적과 방식을 고수하며 다음과 같은 선언에 동의하는 한국의 민주주의 정당․사회 조직들과만 협의할 것이다.

우리 ( )는 모스크바 결정 제1항에 언급된 한국 관련 사항의 목적을 고수할 것을 선언한다. 즉,
(a) 독립국가로서의 한국의 재건,
(b) 민주주의 원칙으로 국가를 발전시키기 위한 조건 창출,
(c) 일본의 오랜 지배가 가져온 처참한 결과물의 가능한 한 가장 빠른 청산

나아가, 우리는 조선민주주의임시정부(Provisional Korean Democratic Government)의 구성을 위해 모스크바 결정 제2항을 이행하는 미소공동위원회 결정에 따를 것이다.
또한, 우리는 다음과 같이 모스크바 결정에서 제공한 방안에 따라 위원회의 활동에 협조하며, 한국 임시 정부의 참여에 협조할 것이다. “한국인들의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진전과 민주적인 자치정부의 발전, 독립국가 건설을 돕고 지원한다.”

슈티코프 장군은 마지막 부분의 “돕고 지원한다”라는 문구 뒤 삽입어구로 “신탁통치”라는 단어가 포함되지 않은 점만 빼면 수용할 만하다고 말했다. 이 제안을 지지하여 슈티코프 장군은 상당한 힘을 사용하는 방법으로 모스크바 결정에서 사용한 정확한 용어를 반복할 것(p.195 첫 문단) 그러나 아놀드 장군은 사령부에 “신탁통치” 단어는 빠져야 한다는 미국의 입장을 전달할 것이며 지시 하달을 요청할 것이라고 언급했다.028028 14번째 회기에서 L.M 버치 소위의 보고서, 1946년 4월 13일, 참모장 파일.닫기
제14회기와 제15회기 사이에 4일 동안 소련 대표단은 치스챠코프 장군에게 “신탁통치” 단어를 제외하기로 한 미국측 제안을 수용할지에 대한 지시를 요청하는 무전을 전송했다. 치스챠코프장군은 그 요청을 모스크바에 차례로 전달했고, 짐작컨대 미국의 제안을 거부하는 답변이 왔을 것이다. 4월 17일 제15회기 때에 이 사실이 알려졌고, 아놀드 장군은 제안한 선언문의 마지막 문단 전체를 제외하자고 제안했다. 이 제안을 소련측이 승인했고 공동성명(Joint Communique)제5호가 발표되었다. 버치 중위는 보고서에서 “미국의 가장 강력한 무기는 대중적 관심으로 압박하는 것이다.”라고 논평했다.029029 15번째 회기에서 L.M 버치 소위의 보고서, 1946년 4월 17일, 참모장 파일.닫기030030 특별 보도 자료, 24군단 홍보 장교, 1946년 4월 17일.닫기

공동성명 제5호(Joint Communique No.5)

민주주의 정당․사회조직과의 협의 조건에 대해 지속적으로 토론했다. 소련 대표단의 단장인 슈티코프(T. F. Shtikov) 중장(Colonel General)은 1946년 4월 8, 9, 11, 13일에 한국의 서울, 덕수궁에서 열린 회담의 의장이었다. 미국 대표단의 단장인 아놀드(A. V. Arnold) 소장(Major General)은 1946년 4월 17일 회담의 의장이었다.
“소련 대표단과 미국 대표단의 철저한 조사와 분석의 결과, 공동위원회는 민주주의 정당·사회조직과의 협의 조건을 포함하여 기간의 공동 임무 수행의 첫 번째 쟁점에 대해 다음과 같은 결론에 이르렀다.”

결정사항

“공동위원회는 진실로 민주적인 목적과 방식을 고수하며 다음과 같은 선언에 동의하는 한국의 민주주의 정당․사회조직들과만 협의할 것이다.

“우리 ( )는 모스크바 결정 제1항에 언급된 한국 관련 사항의 목적을 고수할 것을 선언한다.
‘독립국가로서의 한국의 재건, 민주주의 원칙으로 국가를 발전시키기 위한 조건 창출, 일본의 오랜 지배가 가져온 처참한 결과물의 가능한 한 가장 빠른 청산.’
‘나아가, 우리는 조선 민주주의 임시 정부(Provisional Korean Democratic Government)의 구성을 위해 모스크바 결정 제2항을 이행하는 미소공동위원회 결정에 따를 것이다. 또한, 모스크바 결정 제3항에서 제공한 방안에 따라 우리는 위원회의 활동에 협조하며, 한국 임시 정부의 참여에 협조할 것이다.’

서명( )
( )당 또는 조직 대표


공동위원회의 협의 대상인 한국의 민주주의 정당․사회조직의 대표를 초청하는 절차는 제1공동분과회(Joint Sub-Commission)가 추진하고 있었다. 절차의 세부사항이 완성되면 공식적으로 발표될 것이다.

“협의 대상이 될 한국의 민주주의 정당․사회조직에 대한 제안들을 참작하여 제2공동분과회는 모든 실행 단계에서 유효한 조선민주주의임시정부 조직의 구조와 원칙에 관해 공동위원회의 헌장을 준비할 것이다. 이 헌장에는 행정, 입법, 사법 권한을 행사하는 여러 정부기관과 그 업무 및 기능이 명시될 것이다.”
“제3공동분과회는 미래의 조선민주주의임시정부를 위한 정치강령과 그 외 적절한 방안들이 진행될 수 있도록 지휘해왔다.”
“또한 이 공동분과회는 한국의 민주주의 정당․사회조직과 협의를 진행할 것이다.”
“이 강령은 조선민주주의임시정부의 정치, 경제, 문화 분야에 대한 지향과 목표를 보여줄 것이다. 산업, 농업, 운송, 금융, 교육, 언론 자유 등과 같은 문제를 아우를 수 있을 만큼 포괄적인 범위가 될 것이다.”

이 시점에서는 공동위원회가 엄청난 진전을 이룬 것 같이 보이지만, 또다시 이러한 낙관론은 오래 가지 못했다. 4월 20일 제16회기 전에 분과위원회는 업무수행 중이었지만, 세 분과위원회 중 두 곳이 사실 상 교착상태에 빠졌다는 점이 미소공동위원회 회기 개최 전에 주요한 새로운 문제로 대두되었다.
데이어(Thayer)-짜랍킨(Tsarapkin) 분과회는 한국의 정당․사회조직과의 협의를 위한 기구 마련 업무를 진행했다. 신탁통치를 지지하는 정당만이 협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는 소련측 위원의 요구가 반복되어 교착상태가 발생했다. 이때까지 워낙 많이 들어 익숙해진 입장이었다. 그 부분에 대한 소련측의 신념이 좋지 못한 것이라는 증거이기도 했다. 사실, 그들은 분과회에서 전체 위원회에서는 폐기한 규제책을 제안했다. 버치 중위가 이러한 조처에 대한 가장 개연성 있는 설명을 제시했다. “...그들은 또다시 그들이 선호하는 전략을 사용하고 있다. 그들은 명백한 양보를 해준다는 근거를 충분히 확보하기 위해 불가능한 입장을 취하고 있다. 사실은 아무것도 내주지 않을 것이면서 말이다.”031031 16번째 회기에서 L.M 버치 소위의 보고서, 1946년 4월 20일, 참모장 파일.닫기
번스(Bunce)-발라사노프(Balasanov) 분과회에서 두 번째 교착상태가 이어졌다. 여기에서 소련측은 한국의 경제 재건이든 38선 분단에 따른 불행한 결과를 최소화하기 위한 것이든 어떠한 방안에 대해서도 딱 잘라 토론을 거부했다. 아놀드 장군은 “만약 소련측의 태도가 바뀌지 않는다면, 미국 대표단은 미소공동위원회의 실패에 대해 책임이 없다고 지금 말해야만 한다.”고 말했다. 또한 아놀드 장군은 위원회가 지연되면서 “전세계적으로 위원회에 대한 심각한 비판”이 일고 있다고 지적했다.032032 위와 같음.닫기
사실, 이 시기 전체를 아울러 한국의 여론은 미국과 소련 양쪽 모두에 대해 어떠한 눈에 띄는 진전도 거둘 능력이 없다는 쪽으로 확고해지고 있었다. 4월 14일, 군정(Military Government)의 공보부(Department of Public Information)가 다음과 같은 내용을 보고했다. “미소공동위원회에 관한 태도는 비관적이고 희망이 없다는 것이 지배적이다. 먼저, 한국인들은 위원회가 지체되는 현 상황에 대해 소련을 비난한다. 압도적인 다수가 여전히 그렇게 생각하지만, 한국 독립이 계속 늦어짐에 따라 소련과 미국 모두에 대한 비난이 슬그머니 커지고 있다...한국에 대한 결정이 늦어지면 늦어질수록 점점 더 많은 한국인들이 한국의 분단과 점령 상황의 책임이 소련에만 있지는 않다고 비난하리라 예상한다.”033033 여론동향 7번, 공보부, 주한미군정청, 1946년 4월 14일.닫기 공동위원회는 사실 상 교착상태였다. “소련이 이전에 포기한 입장으로 되돌아온 이유는 한국에서 정치적으로 소련을 지지하는 이들이 항의했기 때문”이라고 추측했다.034034 17번째 회기에서 L.M 버치 소위의 보고서, 1946년 4월 25일, 참모장 파일.닫기
38선 통제에 관해 소련측은 미국 대표단이 제안한 이동의 자유․상품 교환 보장 등과 같은 사항은 이미 1946년 1월 예비회담(Joint Conference)에서 정리되었다고 주장했다. 제24군단 정보참모부(G-2)는 “이 관계에서 흥미로운 점은, 비록 여기에서 소련측이 근본적으로 맞다고 해도...지금까지 그 문제에 대한 구체적인 본질은 아무것도 규명되지 않았다. 예비회담의 결정은 성립되지 못한다. 이것은 주로 소련의 무관심과 얼버무림, 북한지역에 외지인이 유입되지 못하도록 한 지속적인 방해의 결과였다. 사실, 치스챠코프 장군이 수정하고 최종 승인한 예비회담의 결과는 한낱 종잇장보다도 못한 것이었다.”고 지적했다035035 정보참모부 정보요약, 북한, 11번, 1946년 5월 6일.닫기 이에 대한 반박으로, 미국 대표단은 모스크바 결정의 제1항에서 한국인들의 산업, 운송, 농업, 민족 문화의 발전을 임시 정부가 도모해야 함을 규정했고 공동위원회는 이러한 과정을 위해 근본토대를 만들어 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주장은 자연스럽게 무시되었고 어떠한 합의나 결정에도 이르지 못 했다. 소련측이 확고부동하게 38선의 현재 상황을 바꾸지 않으려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한국인들이 임시 정부 건설 후 이 모든 문제를 해결해야한다고 주장했다.036036 위와 같음.닫기 소련측의 입장은 계속해서 모스크바 결정에서 신탁통치가 확고한 목적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무시하는 것이었다. 4월 24일 제18회기에서 소련 대표단은 절충안을 제시했다. “만약 어떠한 정당이나 사회조직이 공동위원회와의 협의를 위해 대표를 지정할 때, 모스크바 결정이나 연합국(소련과 미국)에 대한 대표의 태도가 양측 대표단에게 부적합하다면, 공동위원회가 그러한 정당이나 조직의 대표를 협의 대상으로 수용하기를 거부해야 한다.” 해당 회기 동안, 아놀드 장군은 성명을 제안하여 여론전으로 소련측을 재차 압박했다.037037 18번째 회기에서 L.M 버치 소위의 보고서, 1946년 4월 24일, 참모장 파일.닫기
다음 제19회기에서 슈티코프 장군은 솔직하고 거침없이 소련에 반대를 표명한 인사는 누구도 새 정부에 받아들일 수 없다고 말했다. 계속해서 소련측은 미국측이 협의 대상 정당의 명단 준비를 추진하지 않는다고 항의했다. 여기에서 아놀드 장군은 선행되어야할 협의 계획 문서를 공동으로 승인하기 전까지는 명단을 작성하지 않을 것이라고 답변했다. 그러자 소련측은 정당들의 신청서 작성에 기한을 설정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이 요구에 대해 미국측은 협의대상 정당들을 아직 공식적으로 초청하지 않았기 때문에 지금은 기한을 설정할 적절한 때가 아니라고 대답했다. 아놀드 장군은 미국 대표단이 작은 세력들과 연락할 시간을 충분히 가지는 데에 특히 관심이 있으며, 큰 세력들은 상당히 촉박하게 통보해야 참여할 것이라고 확신한다고 덧붙였다.
소련측이 못마땅하게 여기는 개인도 공동위원회에서 논의할 것이라는 미국측의 합의안에 대응해, 제19회기 말까지 소련측이 제외사항에 대한 전반적인 방침의 심의를 연기하는 것으로 합의안을 낼지 모른다는 추측이 가능해 보였다.038038 19번째 회기에서 L.M 버치 소위의 보고서, 1946년 4월 25일, 참모장 파일.닫기
동시에 이 토론 동안 분과회에서 미국측은 위원회의 결정 전에 소련측이 어떠한 개인이든 반대한다면 수용할 것이라는 양보안을 제안했다. 하지만 공식적으로는 미국측이 상당히 규모가 큰 정치세력들을 대표하는 한국인 누구와도 함께 협의할 의사가 있었다고 발표했다. 이 제안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하지(Hodge) 장군은 미국대표단에게 타협안을 철회하도록 지시했다. 또한, 정당이나 개인을 겨냥해 정치적 대가를 치르게 하거나 제외하는 조항 없이 민주적인 대표자를 요구하는 원래 제안을 고수하도록 했다.039039 전문, TFGCG 366, 주한미군사령관에서 연합군최고사령부로, 070450, 1946년 5월 7일, 참모장 파일.닫기
1946년 4월 27일, 하지 장군은 언론에 공동성명 제5호를 명확히 하기 위한 성명을 발표했다. 공동성명 제5호는 정치세력들이 위원회의 협의대상이 되기 서명해야 하는 선언문을 공식화한 것이었다.040040 특별보도자료, 사령부, 주한미군정청, 공보부, 1946년 4월 27일.닫기

“미소공동위원회에서 미국측 수석대표인 아놀드 장군은 공동위원회의 성명 제5호에서 표시된 선언문에 서명함으로써 정당 및 사회조직이 신탁 찬성 혹은 반대 의견 발표의 특전을 보장한다는 점에서 나와 견해가 동일하다. 공동위원회와 협의하기 위해 선언문에 서명한 정당이나 사회조직에 대해 그들이 신탁통치를 선호하거나 지지한다고 간주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선언문에 서명하지 않는다면 공동위원회의 협의대상이 될 수 없을 것이다.”

이 발표는 소련측을 곤혹스럽게 만들었다. 그동안 행한 소련측의 조치를 협의 참여 정당들에게 신탁통치 지지를 강제하는 요구로 보지 않는다는 미국측의 생각을 확실히 해주는 것이었다. 따라서 미국의 반대 주장이 고통스럽게 명확해졌기 때문에 소련측이 앞으로 신탁통치 반대자들을 제외하기로 양측 대표단이 합의했다고 주장할 근거가 사라져버렸다.
“위협적인 사람들(compromised individuals)”이라는 문구 제외 여부에 관한 토론이 계속되었다. 제19회기에서 미국측은 정당들이 소련측에서 수용할 만한 사람을 대표로 뽑아주기를 설득하기 위해 노력했다. 예상대로, 이 제안노은 거부당했다. 그러나 만약 소련측이 조치를 취하게 하기 위해서였다면, 결과가 없는 건 아니었다. 이러한 제안이 미국 대표단이 모스크바 결정을 지키려 하지 않고 결정의 이행에 관한 접근방식이 소련 대표단과 크게 다름을 의미한다면, 소련대표단은 이 제안을 전혀 고려대상으로 보지 않는다고 선언했다. 그리고 나서 이 동반자 관계의 정신으로 소련측은 문구 제외를 토론에서 일시적으로 빼기로 했다. 이때 임시 정부 인사에 대해 미국이 토론을 철회함으로써 이러한 소련측의 반응이 나왔다. 4가지 의제 중 오직 이 의제만이 교착상태를 벗어났다.041041 정보참모부 정보 요약, 북한, 11번, 1946년 5월 6일.닫기
비록 제외 관련 논쟁이 제20회기 토론에 포함되지는 않았지만, 소련측은 이 시기에 협의 대상 정당의 대표가 적당한 인물이 아니면 그 정당에 통보하고 다른 대표를 뽑으라고 요청해야 한다는 제안을 발표했다. 그러나 이 문제에 관해 어떤 조치도 없었다. 그 회기의 나머지 기간 동안 협의 대상 정당들에 보낼 설문서에 관한 토의만 이루어졌다. 합의된 질문내용은 아래와 같다.042042 미국 서류, 34번, 공동위원회에 제출됨, 1946년 4월 27일, 승인됨, 공동위원회 파일.닫기

“조선민주주의임시정부(Provisional Korean Democratic Government)의 임시헌장에 관련해 남북한의 민주주의 정당과 사회 조직들에 제출할 질문사항”

“조선민주주의임시정부와 지방 기구(임시헌장)의 조직 구조와 원칙에 관한 견해를 공동위원회에 제출하기를 요청한다.(...해당 일까지) 다음의 사항에 관해 세부적인 부분까지 충분히 당신의 견해를 기술해주기를 바란다. 당신의 답변은 임시헌장을 편찬할 때 포함될 수도 있다.”
“1. 국민의 권리(인권 법안. 예: 언론․출판의 자유, 보통 선거권, 종교, 의회, 개인 자유의 불가침성, 양성평등 등).
2. 앞으로 수립될 임시 정부의 유형과 성격
3. 중앙정부의 행정․입법권 시행기구
(a) 총선거로 입법기관을 구성하기 전에 한국 임시 정부가 법을 만들 수 있는 권한이 필요한가?
(b) 지방기관의 구성요소와 구조. 지방기관은 세 가지 기능을 수행할 예정임(예: 중앙 정부 해당 부처의 조직, 명칭, 기능, 최고 행정 기능을 수행할 최고책임자 또는 조직의 명칭, 입법 기능을 수행할 기관의 조직, 명칭)
(c) 장관과 관료들의 권한과 임무.
(d) 행정부․입법부 기능을 수행할 기관의 장과 그 외 주요 직급의 선거 또는 임명과 교체 여부(예: 임기, 후임, 해임).
(e) 행정부․입법부의 기능을 정지할 수 있는 방법.
4. 지방행정기구의 형성, 구조, 권한, 임무.
(a) 지방 기구의 선거 방법(각 시도읍면의 지방 기관의 선거 또는 임명 여부). 만약 선거를 한다면 어떤 원칙으로 선거를 실시할 것인가? 만약 임명한다면, 임명권자는 누구인가?
(b) 각 시도읍면의 지방 기구의 구성요소와 구조(명칭, 임무, 권한을 포함하여)
(c) 지방 기구의 사법권, 권한, 임무(각 시도읍면).
5. 사법기구.
(a) 구성요소(예: 유형, 규모, 법원의 수, 그 외 사법기관의 설립).
(b) 법원과 그 외 사법조직의 권한과 임무.
(c) 법관의 선발과 교체(예: 법관의 선거 또는 임명 여부, 임기, 해임).
6. 임시헌장의 변경과 수정 방법.
“위에 제시한 항목들 외에 당신이 추가한 답변사항이 합당하다고 판단되면 임시헌장에 포함될 수 있다.”
이 설문의 문제는 1946년 5월 1일 공동성명 제7호에 아래와 같이 요약되어 있다.043043 보도 자료, 사령부, 24군단 여론국(PRO), 1946년 5월 1일.닫기
“미소공동위원회는 1946년 4월 22일부터 27일까지 서울 덕수궁에서 개최되어 남북한의 민주주의정당․사회조직과 협의할 방침과 공동위원회 제2·3분과에서 기안한 민주주의정당․사회조직과 협의할 안을 토의하였다.”
“소련대표단의 수석대표 T. F. 슈티코프(Shticov) 중장(Colonel General)이 주재했다.”
“공동위원회는 한국의 민주주의 정당․사회조직과 협의할 방침에 관해 제1분과에서 작성한 보고서에 관한 논의를 마무리했다.”
“공동위원회 제2·3분과에서 작성한 한국의 민주주의 정당과 사회조직에 대한 설문 항목을 채택하기로 결정했다. 최대한 빠른 시일 내에 전체 항목을 게재할 것이다. 기본적인 설문 내용은 다음과 같다.”
“A. 한국 민주주의 임시 정부와 지방행정기구 조직의 구조와 원칙,
1. 국민의 권리.
2. 앞으로 수립될 임시 정부의 유형과 성격.
3. 중앙정부의 행정․입법권 시행기구.
4. 지방행정기구.
5. 사법기구.
6. 임시헌장의 변경과 수정 방법.

B. 임시 정부의 정강에 관하여
1. 정치대책.
2. 경제대책.
3. 교육․문화대책.

제21회기 동안 소련측의 “위협적인 개인들” 문구의 배제 주장을 둘러싸고 또 다른 교착상태가 반복되었다. 이 단계에서, 제24군단 정보참모부(G-2)는 다음과 같은 논평으로 한국의 상태에 관해 분통을 터뜨렸다.044044 정보참모부 정보요약, 북한, 11번, 1946년 5월 6일.닫기

한국인들은 정부 건설을 준비하고 있고 한발 물러나 있기를 바란다. 한국이 미국과 소련의 장기 점령지가 되었다는 점은 점점 더 명백해지고 있다. 일련의 위원회 활동과 한국 전체에서 미국과 소련의 이데올로기 충돌이 이미 드러나고 있다. 만약 소련계 인사들을 고려한다면, 한국인들이 원하는(만약 이러한 부분이 확인가능하다면) 정부의 유형과 지도자들은 확실히 형식적인 방식으로 되어왔음에 틀림없다. 결국 소련의 대외 정책 수행은 만족스럽게 되었다. 지금까지 한국에서 매우 밀접한 관계에 놓인 미국과 소련이지만 정부 이념에 관해서는 속을 알 수 없고 반갑지 않은 관계를 형성하고 있었다. 잠깐 동안의 미국과 소련의 밀월관계에서 그저 어떠한 종류의 흉물스러운 잡종이 태어날 것이다. 확실히 특이한 모습일 것이다. 현재 한국인들이 생각하고 말하는 것은, 민주주의라고 명명될 것이다.

제22회기에서 문구 제외 문제가 다시 논의되었다. 미국측이 양보안을 제시했다. 공동위원회가 한국의 정당들에게 대체 인물을 뽑아놓으라고 요청하자는 논의를 제안하는 내용이었다. 모스크바 결정이나 연합국에 대한 해당 정당 대표의 태도 때문에 미소 대표단이 부적합하다고 판단할 경우에 대비해서이다. 또한 미국측은 소련 대표단의 요청으로 대체 인사의 임명이 이루어졌다고 규정했다. 미국 대표단은 적절한 절차에 따라 선택된 공동성명 제5호에서 제시된 선언에 서명한 정당대표를 협의 대상으로 적절하게 본다고 덧붙였다. 나아가, 미국 대표단은 특정한 단체의 특정한 대표를 가리키는 것은 아니라고도 했다. 소련측이 이 제안을 거부하자, 미국측은 제안을 철회했다.045045 정보참모부 정보요약, 북한, 12번, 1946년 5월 **(보이지 않음)닫기
교착상태는 어떠한 해법이나 합의 없이 5월 5일 제23회기까지도 계속되었다. 모스크바 결정은 언론의 자유를 억압해서 지켜지는 것이 아니며, 신탁통치에 대한 반대 목소리를 모스크바 결정에 대한 공격이라고 여기지 않는다는 입장을 미국 대표단이 더 강력히 제기했다. 더 나아가 협의 대상 제외를 결정할 때 모스크바 합의 조항에 대해 반대 입장을 취했느냐가 기준이 될 수 없다고 언급했다.046046 위와 같음.닫기 그런 후 아놀드 장군은 위원회가 지지부진한 현 상황을 설명하는 공동 성명에 각각의 입장에 대한 언급을 포함시키자고 제안했다. 슈티코프 장군이 상부의 지시를 요청할 것이라고 언급하면서 이 제안은 일시적으로 보류되었다.047047 위와 같음.닫기
그동안에, 마지막 회기인 제24회기에 앞서 남조선과도입법의원(Representative Democratic Council of South Korea)의 의장인 김규식 박사가 제1분과회(정치담당)에 소개되어 협상 결렬을 앞당기는 기폭제가 되었다. 1946년 5월 1일, 김규식은 남조선과도입법의원의 공동성명 제5호에 대한 입장을 제시하며 “공동성명 제5호의 선언문에 서명하는 일은 공동위원회에서 신탁통치 반대를 주장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음을 의미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5월 6일 아침, 분과회 회의에서 짜랍킨(Tsarapkin)은 김규식과 남조선과도입법의원의 이러한 입장의 결과 “남조선과도입법의원과 관계된 어떠한 정당도 협의대상이 되지 않을 것이다”라고 단호하게 잘라 말했다. 같은 날 오후 공동위원회 회의에서 앞의 언급을 소련 대표단의 공식적인 입장으로 생각해도 좋을지 묻는 질문에 대해 슈티코프 장군은 긴 망설임과 상대방의 재촉 끝에 맞다고 답변했다. 이러한 전면적인 제외는 “소련측의 통제 아래에서 직간접적으로 운용되는...공산당과 그 위성 단체 외에 모든 정당들을 배제하기 하는 데에” 효과를 발휘했을 것이다.048048 전문, TFGCG 366, 주한미군사령관에서 연합군총사령부로, 070450, 1946년 5월 7일, 부관참모부 문서철.닫기
미국 대표단은 이러한 모든 제외에 대해 동의를 거부했다. 대신에, 한국을 가로지르는 38선에 놓인 장애물을 제거하기 위한 조치로 논의를 옮겨갈 것을 제안했다. 소련대표단이 이 제안을 거부하자 미국대표단은 이러한 상태에서는 더 이상의 임무 수행이 불가능하다며 휴회를 건의했다. 4가지 의제는 모든 부분마다 완벽히 지지부진하게 소진되어버렸다.049049 위와 같음.닫기 하지 장군은 연합군최고사령부(SCAP)에 보내는 무전에서 협상 결렬의 의미를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050050 전문, TFGCG 366, 주한미군사령관이 연합군총사령부로, 070450, 1946년 5월 7일, 부관참모부 문서철.닫기
“소련대표단이 의무적인 5년간의 신탁통치를 포함해 모스크바 결정을 반대하는 모든 정당이나 조직을 제외하려는 현재의 입장에서 물러날지 여부는 알 수 없다. 만약 물러나지 않는다면, 나는 현재의 조건 하에서는 더 이상의 협상을 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한다. 지금까지 소련측이 한국에서 완전히 공산주의자가 조종하는 정부 외에는 어떤 것도 건설하기 위해 협력한 의지가 없다는 점이 모든 면에서 드러난다. 신탁통치에 반대하는 입장을 표명한 한국인들은 모두가 그들의 고려대상이 아니다. 공산주의자가 조종하는 단체들이 초기에 신탁통치 반대 입장을 강력히 표명했지만 현재는 소련의 명령에 따라 신탁통치에 찬성하고 있다고 해도, 한국인의 93%가 신탁통치를 반대한다고 알려져 있다. 현재 한국에서는 두 가지 정당(수많은 세부 분파는 제외하고)만이 위력을 발휘하고 있다. 즉, 소련 통제 하의 공산주의 단체와 그 외 단체이다. 후자는 남조선과도입법의원(Representative Democratic Council of South Korea) 하에 있거나 북한에서 무자비하게 탄압받고 있다. 소련대표단의 최근 행보는 공산주의 단체들 외에는 민의를 대표하는 단체들을 모두 없애버리기 위한 뻔한 수작이다.”
“소련대표단은 우리가 모스크바 결정에 부응하지 않는다는 태도를 취하고 있다. 모스크바 결정이 한국에 대해 5년간의 의무 신탁통치를 만든다는 조건 없이는 우리가 동의하지 않기 때문이며, 또한 한국인들에 관한 부분에서 주제에 대한 어떠한 논의의 진전도 우리가 막을 수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 점에 있어서 모스크바 결정과 민주적 절차의 일반적인 양상에 관한 소련측의 해석은 우리의 해석과 전혀 반대이다. 만약 소련측이 현재 입장에서 물러나지 않는다면, 여기에 제기된 모든 이후의 논쟁과 절차는 한국인들을 의기소침하게 만들 뿐 아니라 무의미하며 시간낭비라고 생각한다. 다음 행보는 소련대표단에게 달려있다고 본다. 한국을 지키고 원칙을 유지하는 한, 여기에서의 우리 입장은 굳건할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현재 소련측에 새로운 눈에 띄는 변화가 없다면, 모든 상황을 언론에 공개할 수밖에 없다. 언론 공개를 준비하고 있고 사본은 준비되는 대로 빨리 당신에게 보낼 것이다. 정치고문이 동의함.”
“지시나 지적사항이 있는가?”

그 사안을 말끔히 정리시키고 미국의 입장을 기록으로 남기기 위해 슈티코프 장군에게 공동위원회 합의제안서 초안을 보냈다. 어떠한 정당이나 사회조직도 “모스크바 결정의 신탁통치 또는 그 외 정치적 쟁점에 대해 표현의 권리나 자유를 행사한 이유로” 제외대상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내용이었다. 동시에, 소련대표단이 여론의 압박을 받아 좀 더 이성적으로 대응하게 만들기 위해 미국이 일방적인 성명제안서를 소련측에 전달했던 것이다. 5월 8일 아침 하지 장군은 미국과 소련의 입장을 재검토하기 위해 슈티코프 장군과 3시간 동안 회의를 진행했다. 슈티코프 장군은 미국측의 일방적인 언론공개 제안에 대해 상부의 지시를 기다려야 한다고 요청했다. 그 사이에 하지 장군은 연합군최고사령부(SCAP)에 이 상황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051051 전문, TFGCG ***(보이지 않음), 주한미군사령관이 연합군총사령부로, 080733/7, 1946년 5월 8일, 참모장 파일.닫기
“소련측이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우리는 매우 유리한 위치에 서게 된다고 생각한다. 더 나아가, 이번 성명이 발표되면 남한의 공산주의 제5열의 기능이 마비될 것이고, 북한의 공산주의 괴뢰에게도 손상을 줄 것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오랫동안 소련측이 한국 문제에 관해 불리한 위치에 서게 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협상 연기가 바람직하지 않다고 인식한다. 제외 관련 쟁점이 확실하고 최종적으로 우리가 제안한 대로 마무된다면 소련측에 제안을 수용할 기회를 줄 것이다.”
5월 8일 10시 정각, 슈티코프 장군은 하지 장군을 방문해 상부에서 공동위원회 업무를 중지하고 전체 대표단은 5월 9일 일시에 북한으로 귀환하라는 지시를 받았다고 전했다. 슈티코프 장군은 소련의 입장을 제시하는 마지막 성명을 발표했다. 핵심적인 부분은 아래와 같다.052052 슈티코프 장군과 하지 장군 사이의 회의, 1946년 5월 8일, 참모장 파일.닫기
“우리는 하지와 아놀드 장군의 성명에서 그들이 한국을 통치할 수 없음을 확신한다. 그들은 도움이 필요하다. 모스크바 결정이 이 도움을 예견했던 것이다. 소련대표단은 한국인들의 정부 재건을 위한 원조와 민주국가 수립은 불필요하며 미국과 소련과 같은 강대국들이 이러한 원조를 제공해야 한다고 보았다. 이 때문에, 우리는 모스크바 결정에 반대하는 이들에게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다. 그들은 한국인들의 장래를 방해하고 개입하지 말아야 하며 미국과 소련 모두에 대한 모두에 대한 적대적인 정치선동과 시위를 멈추어야 한다.”
“소련대표단이 협의대상에서 특정한 인물들을 배제하자고 주장했던 주된 이유는, 우리는 한국의 가까운 이웃나라이고 그렇기에 소련에 우호적인 임시 정부를 건설하는 데에 관심이 크기 때문이다. 모스크바 결정에 반대하고 소련에 반대하는 입장을 표명한 지도자들이 소련을 중상모략하고 명예에 먹칠을 하고 있다. 만약 그들이 정부에서 권력을 쥔다면, 그 정부는 소련에 우호적이지 않을 것이며 그 관료들은 소련에 반대해 일부 한국인들에게 적대적인 조치를 취하는 데에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다. 만약 미국측이 미국에 적대적인 인사들이 정부에 있어서는 안된다고 요구했다면, 소련대표단은 미국의 입장에 동의했을 것이다...”
“비슷하게, 정당․사회조직들의 명단을 작성하는 때에 분과회의 미국인 위원이 큰 규모의 노동자․농민 조직들, 노동조합들, 농민조합들, 청년 민주주의조합들을 포함하지 않은 채 정당․사회조직들의 명단을 제출했던 것도 미심쩍다. 이 조합들이 한국인 중 많은 부분을 대표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신탁통치를 한국 정부가 구성되면 이들과 함께 논의할 문제라고 생각한다...”

註 001
특별 보도 자료, 사령부. 주한미군정청, 공보부, 1946년 3월 31일.
註 002
위와 같음.
註 003
첫 번째 회기의 보고서, 1946년 3월 20일, A.N. 버치(Bertech) 소위, 참모장 파일.
註 004
위와 같음.
註 005
위와 같음.
註 006
정보참모부 정보요약, 북한 9번, 1946년 4월 5일, 2쪽.
註 007
위와 같음.
註 008
위와 같음.
註 009
두 번째 회기 보고서, 1946년 3월 22일, L.M 버치(Bertsch) 소위, 참모장 파일.
註 010
위와 같음.
註 011
위와 같음.
註 012
위와 같음.
註 013
위와 같음.
註 014
미국 문서 13번, 공동위원회 파일, 1946년 3월 23일, 아놀드 소장이 슈티코프 장군에게 전달한 비망록
註 015
공동성명 1호, 주한미군정청, 공보부, 22 1946년 3월 22일; 공동성명 2호, 주한미군정청, 공보부, 1946년 3월 25일..
註 016
세 번째 회기의 보고서, L.M 버치(Bertech) 소위, 1946년 3월 25일, 참모장 파일.
註 017
네 번째 회기의 보고서, L.M 버치(Bertech) 소위, 1946년 3월 26일, 참모장 파일.
註 018
다섯 번째 회기의 보고서, L.M 버치(Bertech) 소위, 1946년 3월 28일, 참모장 파일.
註 019
여섯 번째와 일곱 번째 회기 보고서, 1946년 3월 28일과 30일, L.M 버치(Bertech) 소위, 참모장 파일, 그리고 미소공동위원회의 3호 성명, 24군단 여론국(PRO), 1946년 3월 30일.
註 020
여덟 번째 회기 보고서, L.M 버치(Bertech) 소위, 1946년 4월 3일, 참모장 파일.
註 021
전문, TOC 052318/Z WAR SVG, STATE DEPT WASH TO (판독불가능) 에서 24군단 사령관 정치고문에게, State Serial No. 50, 1946년 4월 5일, 부관참모부 문서철.
註 022
미국 문서 36번, 공동위원회 파일.
註 023
열 번째 회기의 보고서, L.M 버치(Bertech) 소위, 참모부파일, 1946년 4월 6일.
註 024
열한 번째 회기의 보고서, L.M 버치(Bertech) 소위, 1946년 4월 9일, 참모장 파일
註 025
열두 번째 회기의 보고서, L.M 버치(Bertech) 소위, 1946년 4월 9일, 참모장 파일.
註 026
기사 요약, 주한미군정청, 공보부, 1946년 4월 8일.
註 027
13번째 회기에서 L.M 버치 소위의 보고서, 1946년 4월 11일, 참모장 파일
註 028
14번째 회기에서 L.M 버치 소위의 보고서, 1946년 4월 13일, 참모장 파일.
註 029
15번째 회기에서 L.M 버치 소위의 보고서, 1946년 4월 17일, 참모장 파일.
註 030
특별 보도 자료, 24군단 홍보 장교, 1946년 4월 17일.
註 031
16번째 회기에서 L.M 버치 소위의 보고서, 1946년 4월 20일, 참모장 파일.
註 032
위와 같음.
註 033
여론동향 7번, 공보부, 주한미군정청, 1946년 4월 14일.
註 034
17번째 회기에서 L.M 버치 소위의 보고서, 1946년 4월 25일, 참모장 파일.
註 035
정보참모부 정보요약, 북한, 11번, 1946년 5월 6일.
註 036
위와 같음.
註 037
18번째 회기에서 L.M 버치 소위의 보고서, 1946년 4월 24일, 참모장 파일.
註 038
19번째 회기에서 L.M 버치 소위의 보고서, 1946년 4월 25일, 참모장 파일.
註 039
전문, TFGCG 366, 주한미군사령관에서 연합군최고사령부로, 070450, 1946년 5월 7일, 참모장 파일.
註 040
특별보도자료, 사령부, 주한미군정청, 공보부, 1946년 4월 27일.
註 041
정보참모부 정보 요약, 북한, 11번, 1946년 5월 6일.
註 042
미국 서류, 34번, 공동위원회에 제출됨, 1946년 4월 27일, 승인됨, 공동위원회 파일.
註 043
보도 자료, 사령부, 24군단 여론국(PRO), 1946년 5월 1일.
註 044
정보참모부 정보요약, 북한, 11번, 1946년 5월 6일.
註 045
정보참모부 정보요약, 북한, 12번, 1946년 5월 **(보이지 않음)
註 046
위와 같음.
註 047
위와 같음.
註 048
전문, TFGCG 366, 주한미군사령관에서 연합군총사령부로, 070450, 1946년 5월 7일, 부관참모부 문서철.
註 049
위와 같음.
註 050
전문, TFGCG 366, 주한미군사령관이 연합군총사령부로, 070450, 1946년 5월 7일, 부관참모부 문서철.
註 051
전문, TFGCG ***(보이지 않음), 주한미군사령관이 연합군총사령부로, 080733/7, 1946년 5월 8일, 참모장 파일.
註 052
슈티코프 장군과 하지 장군 사이의 회의, 1946년 5월 8일, 참모장 파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