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련 영사관의 폐쇄
겨울을 지나 봄을 관통하는 긴 일련의 사건들은 1946년 7월 2일 서울에 있던 소련 영사관의 최종적인 폐쇄로 이어졌다.
1945년 가을, 서울에 있는 영사관의 활동들은 다소 이해하기 힘들어 보였다. 영사인 알렉산더 세르게예비치 폴리안스키(Alexander Sergeievitch Polianski)씨는 소련이 일본에 선전포고를 한 이후에 억류되지 않았다. 그와 그의 직원들은 이 시기에도 공산주의 활동을 계속했을 수 있다고 생각된다.001001 연합군최고사령부 군정처(Government Section), “윌리엄 크리스트(William E. Crist) 준장의 한국 출장 보고서”, (날짜 없음), 4부, 센트럴 파일, 주한미군사령부 사무국 총무과.닫기 한국인 공산주의자들과 그의 정확한 관계는 이후에 제24군단 정보의 필수적인 요소가 되었다.002002 제24군단 정보참모부 정기보고 86, 1945년 12월 3일, 3~4쪽.닫기 다소 의심스러운 소식통에 의하면, 소련 영사관의 직원들이 서울에서 효과적인 스파이 체계를 유지하고 있으며, 일본이 항복한 이후의 시기에 소란을 조장했으며, 도시 전체에 배포하기 위한 전단을 인쇄했다고 주장되었다.003003 제24군단 정보참모부 정기보고 81, 1945년 11월 30일, 2쪽. 이 진술의 근거는 서울의 일본 헌병대 전 지도자였다.닫기
1945년 가을부터 1946년 초봄까지에 걸쳐 남한의 극장에서 소련이 제작한 영화를 보여주는 것은 미군 사령부를 괴롭히는 일이었다. 1945년 9월 17일 제24군단 정보참모부의 세실 니스트(Cecil W. Nist) 대령은 한국인 혹은 미국인들에게 소련 영화를 보여주는 것에 반대하지 않는다고 소련 영사에게 통보했다.004004 세실 니스트 대령이 서울의 소련 영사관 샤브신(A. I. Shabshin) 부영사에게 보내는 서신, 1945년 9월 17일, 정보참모부 문서철.닫기 그러나 영사관에서 영화를 대규모로 배포하는 것은 고려하지 않고 있었다. 1946년 1월에 이르러 미군 사령부는 소련 영사관에서 영화를 상업적인 목적으로 한국의 영화업계에 대여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005005 제24군단 사령부 미군 방첩대 제229파견대, 파일 4-77, 1946년 1월 15일, Special Agent 4204, 제목: “한국 영화 산업 영사기사 조합”, 정보참모부 문서철.닫기 바로 그 후에 미군 점령지역 도처의 한국 극장에서 이러한 영화들이 상영되고 있음을 알리는 보고가 들어오기 시작했다.006006 제7사단 사령관이 제24군단 사령관(정보참모부)에게 보내는 전문, 191800/I, 200915, 1946년 1월 20일, 정보참모부 문서철.닫기
2월 26일, 하지 장군은 만약 소련 영화 “승리의 행진(Victory Parade)”이 남한의 어떤 곳에서든 상영된다면, 이는 즉시 압수되어야 하고 소련군 사령부에 통보될 것이라고 지시했다.007007 주한미군사령관이 제6, 7사단 사령부에게 보내는 전문. ASCOM 24, 주한미군정, 261505/I, 1946년 2월 26일, 정보참모부 문서철.닫기 같은 날에 미군정 내의 영화과(Motion Picture section) 담당 장교는, 소련 영사관에서 최소한 11편의 영화를 남한에 상품으로 배포하고 있었고, 그 중 3편의 영화는 현재 서울의 영화관에서 상영 중이라고 보고했다. 상영 중인 3편의 영화에 대해서 그 장교는 “나는 그 3편의 영화를 보았는데, 그 영화들이 사실을 왜곡한다는 면에서는 반대할 만 하지 않다고 생각한다.”라고 말했다. 마지막으로 “미주리호에서의 항복 조인식(Surrender Ceremony on the Missouri)”은 “항복 조인식을 완전히 직설적으로 설명하는데, 이는 우리의 뉴스 영화에서 상영되는 것과 동일하다.”고 했다.008008 로버트 루단(Robert Roordan) 중위가 공보부 책임자에게 보내는 부처간 비망록: 소련 영화, 1946년 2월 26일, 정보참모부 문서철.닫기
하지 장군은 조치를 취하기 시작했는데, 3월 6일 폴리안스키씨에게 이러한 영화들의 보급을 중단하도록 요구하는 서신을 전달했다. 서신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포함되었다.009009 참모장 가빈 장군이 폴리안스키에게 보내는 서신, 1946년 3월 6일, 정보참모부 문서철.닫기

“이러한 성질의 상업적 사업은 귀하의 사무소가 가진 지위에 부합되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최근 미군과 소련군 사령부의 대표들이 협상한 협정에 포함되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귀하는 어떤 보수를 받든지 간에, 어떠한 개인과 단체, 혹은 행사에든 영화 필름을 배포하는 것을 중단할 것으로 나는 기대한다. 그리고 현재 남한에 존재하는 모든 소련 영화들을 귀하가 회수하고, 귀하의 사무소와 소속 직원들은 우리의 협정에 명확하게 허가되지 않은 상업 활동을 하는 것을 삼가할 것이라 기대한다.”

미국 측의 서신에는 상영되는 소련 영화들의 이름까지 명확하게 언급되었다. 폴리안스키는 이러한 훈계에 대해 각각의 영화에 대해 근거를 열거하며 답했다.

“전쟁 후의 6시간(Six hours after the War)” - 1945년 9월 17일 니스트 대령이 서명한 서면 허가를 받음. 영화 배포됨.
“무지개(Rainbow)”와 “우리 마을 출신의 한 남자(A Guy From Our Town)” - 배포됨. 상업화 하지 않음. 필름의 손상으로 인한 최소한의 수수료만 받음. 상영하기 이전에 군정의 사전 허가가 필요하다고 극장의 운영자들에게 경고하였음.
“이반 4세(Ivan the Terrible)” - 미군 방첩대 대표들이 참석했던 “소련-조선 문화협회(Soviet-Korean Culture Society)”의 회의에서 상영되었음.
“승리 후의 오후 6시(6 PM After the Victory)” - 존재하지 않음.
“오늘의 뉴스(News of the Day)” - (승리의 행진, 빈(Vienna)의 탈환, 일본의 항복 결의 서명) - 서울의 극장 근로자 노조들 사이에 배포됨. 두 개의 극장에서 상영. 군정에 의해 사전 관람되었고, 상영 허가를 승인받았음.

폴리안스키의 답변은 다음과 같이 끝났다. “만약 영화 상영에 대해 귀하의 군정 당국이 승인했던 허가를 취소하는 것이 부득이하다고 판단되면, 우리는 즉시 필름의 회수를 제안할 것이다. 우리가 귀하의 서신을 남한에서 소련 영화의 상영을 금지하는 것으로서 여길지의 여부를 명확히 해주기를 요청한다.”010010 폴리안스키가 가빈 장군에게 보내는 서신, 1946년 3월 7일, 정보참모부 문서철.닫기 미군 사령부는 이 문의에 대해 간단히 말하기를 “영사관으로 보낸 서신은 영사관에서 받은 이전의 어떤 지시든지 철회한다는 것으로서 해석되어야 한다.”고 답했다. 이 요청은 영화 상영이 중단되는 것으로 나타났다.011011 가빈 장군이 폴리안스키에게 보내는 서신, 1946년 3월 7일, 정보참모부 문서철.닫기
3일 후인 3월 9일에 다음의 지시가 미군 사령부에 의해 발표되었다.012012 주한미군사령관이 제6, 7사단에게 보내는 전문, TFGBI 214, 군수사령부(ASCOM) 24, 주한미군정, 091200/1. 1946년 3월 9일, 부관참모부 문서철.닫기

“오늘 부로, 소련 혹은 소련 정부기관의 지시를 통해 생산되고 제작된 영화는 미군이 주둔한 한국 지역에서 한국인에게 상영하는 것이 금지된다. 소련산 영화 필름을 가지고 있는 극장들은 즉시 그 영화 필름을 접수처를 통해 서울에 있는 소련 영사관으로 반환할 것이다. 3월 20일 부로 한국 영화관에 있는 소련 영화들은 압수될 것이고, 우리 사령부에 즉시 통지될 것이다. 언급한 이 명령 또는 군사 행동에 대한 공표는 없을 것이다.

그와 동시에 이전에 서울에서 미국 영사를 지냈던 정치고문 랭던(William R. Langdon)이 문제에 대해 보고했다.013013 주한미군사령관(랭던을 대표하여)이 연합군최고사령부에게 보내는 전문, TFGCG 321, 071310/I, 1946년 3월 1일, 부관참모부 문서철.닫기

“소련 총영사가 상업적 목적에서 움직였고, 한국인 기부자들로부터 기금을 받은 증거가 명확하다. 그는 영화를 상영해도 되는지에 대해 주한미군사령관이나 군정의 허가를 절대 묻지 않았다. 그는 그의 활동을 부정하려 하지 않았고, 이 문제에 대해 토론할 때 당황하고 불편한 기색이었으며, ‘나는 조금도 알지 못했다’라고 말하려고 했다. 몇몇 영화는 여러 미군 장교들에게 상영되었으며, 소련 총영사는 그들로부터 이 영화들을 공적으로 배급하는 것에 허가를 받았다고 주장하려 했다.
“국무부가 위의 정보를 모스크바의 대사관으로 전달하여 적절한 방식으로 취급하자는 방법이 제안되었다. 이러한 활동이 계속된다면, 주한미군사령관은 아마도 소련 영사관의 폐쇄를 요구하거나, 아니면 최소한 총영사의 철수를 요구할 것이다.”

여기에서 랭던은 부분적으로 틀렸는데, 폴리안스키가 공식적인 허가로서 해석할 수도 있었던 것은 앞서 언급한 1945년 9월 17일의 제24군단 정보참모부 니스트 대령의 편지 때문이었다. 게다가 1946년 2월 22일 남한 미군정 공보부의 영화과는 소련 영사에게 다음의 허가를 발급했었다. “다음의 소련 영화들, ‘모스크바 승리 행진’, ‘빈(Vienna)으로의 행군’, ‘미주리호에서의 항복 조인식’은 우리 과에 의해 검열되어 대중에 보급되었는데, 상급 기관의 반대 결정을 받았다.”014014 1946년 2월 22일자 허가증, 로버트 루단 중위, 주한미군정 공보부 영화과, 정보참모부 문서철.닫기
어쨌든 문제는 봉합되지 않았다. 1946년 5월 10일에 한국의 영화 배급 회사 대표가 어떤 소련 영화들의 상영을 허락해 달라고 군정에 접촉해왔다. 그 영화 필름들은 즉시 압수되었다. 소련 영사관은 이 사고를 통지받았고, 만약 소련 측이 영화 필름들을 남한에서 제거하는데 동의하고, 영화의 상업적 유통이 합법화되면 그 영화 필름들을 반환하겠다는 통지를 받았다.015015 참모장 가빈 장군이 폴리안스키에게 보내는 서신, 1946년 5월 18일, 정보참모부 문서철.닫기 폴리안스키는 그의 입장에서는 규제를 회피하려는 의도가 없었고, 오직 군정 검열관의 승인과 미군 사령부의 인가를 얻으려는 목적으로 회사에 영화 필름을 준 것이라는 주장으로 대항했다.016016 폴리안스키가 참모장 가빈 장군에게 보내는 서신, 1946년 5월 20일.닫기 한국의 영화 회사 간부가 작성한 이후의 성명은 대체로 이와 같은 주장을 뒷받침했다.
그 사이에 남한에서 소련 영화를 금지하는 1946년 3월 9일 명령의 내용이 일반에게 유출되었다. 3월 12일 『자유신문』은 “38선 이남의 영화관에서 소련 영화 상영 금지”라는 표제를 붙였고, 실수로 그러한 포고가 군정에 의해서 발표되었다라고 설명했다.017017 『자유신문』, 1946년 3월 12일, 정보참모부 문서철.닫기
영화의 배급을 둘러싼 이러한 논쟁은 궁극적으로 소련 영사관의 폐쇄로 이어지는 사건들의 긴 사슬에서 그저 한 국면일 뿐이었다. 이미 1945년 10월에 하지 장군은 소련 총영사와 그의 직원에 대해 의문을 제기했다. 또한 당시에는 영사가 서울에서 한국의 공산주의 운동을 돕고 있고, 막후에서 한국인들에게 미국과 미국의 점령 정책을 비방하고 있다고 여겨질 수 있었다. (상세한 내용은 323쪽을 참조) 동시에 미군 사령부는 소련 영사관에 일정 정도의 식량을 제공하고 있었고, 또한 북한으로 가는 철도교통과 도쿄로 향하는 항공교통 제공은 말할 것도 없었다. 이와 같은 부조화는 하지 장군에 의해 지적되었다.018018 주한미군사령관이 태평양미육군총사령관에게 보내는 전문, TFGCG 112, 111638, 1945년 10월 11일, 부관참모부 문서철.닫기

“이렇게 우리는 소련 영사관원들에게 감시를 위한 모든 시설을 제공하고 정치적 활동을 보장해 주지만, 여기에 대해서 아무런 대가를 돌려받을 수 없는 입장에 있다.
“다시 말하지만, 우리 사령부는 결코 소련 총영사가 철수해야 한다고 요구하는 것을 권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이 상황이 간과되어서는 안된다. 만주의 미국 당국자가 통신 시설을 보유하도록 요청해야 할 때인지도 모른다. 현재 남한에서 획득할 수 있는 조건에서, 영사 기관들의 지위에 관해 지침을 알려주면 감사하겠다.”

1946년 2월이 되어서야 서울의 영사에 대한 잠정적인 정책을 결정한 전문이 워싱턴 D.C.로부터 도착했다. 전문의 내용은 영국은 외무부 대표를 파견할 허가를 받았지만, 영사의 지위를 가지지는 않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소련 영사관이 서울에서 활동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발생하는 모순은 잠재적으로 난처한 것으로 여겨졌다. 게다가 미군 사령부는 국무부가 순전히 영사관의 기능을 위한 목적으로 서울의 미국 총영사관을 다시 열고 싶어 한다고 통지받았다. 그러므로 워싱턴은 엄격하게 영사관의 기능을 수행하기 위해 서울에 해외 영사관의 재개를 허가해 줄 것을 요망하고 있다고 추정되었다. 이러한 행동은 “소련에 압력을 가한다는 점이 기본으로 여겨질 것이고, 이는 언제든 좋은 시점에 북한에 영사관의 설치를 허락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라고 지적되었다.019019 워싱턴 D.C.에서 서울의 정치고문에게 보내는 전문, 200840, 1945년 2월 20일, 정보참모부 문서철 19.닫기 답변으로 하지 장군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020020 태평양미육군총사령관에서 WARCOS(국무부에 전달)에게 보내는 전문, CA 58243, 주한미군사령관 참조, 260637/Z, 1946년 2월 26일, 부관참모부 문서철.닫기

“비록 이곳에 미국 영사관을 재설립한다는 안에는 환영할 것이지만, 그리고 만약 그것이 미국 정부의 정책이라면 영국과 다른 국가들의 영사관 설립에도 반대하지 않을 것이지만, 나는 필요하다고 여겨질 때에 이 곳 소련 총영사의 규모와 활동을 축소할 수 있도록 하는 어떤 수단의 채택을 선호할 것이다. 소련 총영사는 여자와 아이들을 포함하여 현재 21명의 인원을 보유하고 있다.
“그리고 최근의 회담에서 합의된 군사 연락단이 영사관 직원들은 영사관의 문제에만 한정해서 활동하도록 해야 한다고 소련 측에게 제안하기 위해 설치되었을 때, 그 해결책은 미국인에게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한 비공식의 미국 사무소가 설치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만약 그들이 이의를 제기하면, 미국은 북한의 영사관 대표에게 필요한 경우 서울에 있는 소련 사무소의 폐쇄를 요청할 수도 있다. 베닝호프는 미국과 다른 해외 영사관들이 최종적으로 허가를 받고 설립된다면 이에 동의한다.”

여기에 대해 태평양미육군총사령관은 다음의 의견을 덧붙였다.021021 위와 같음.닫기

“숙소와 사무소의 부족이 영향을 줄지도 모르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이런 사무소들의 규모나 정당한 활동을 제한하려고 시도하는 것은 실현 불가능하거나 바람직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영사관 직원을 군사 연락단에 배속시키는 것에 관한 하지 장군의 제안은 북한에 영사관 대표를 확보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실용적일 수도 있다.”

3월 15일, 미군 사령부는 전쟁부와 국무부의 이 문제에 대한 입장은 미국이 점령 당국으로서 다른 국가들의 지위에 대한 편견을 갖지 않고, 서울의 모든 영사관의 개설과 폐쇄, 기능 등을 바람직하다고 여겨지는 쪽으로 조치해야 한다는 것이라고 통지받았다. 뿐만 아니라 국무부는 그 대가가 소련 총영사의 규모를 줄이려는 하지 장군의 노력에 영향을 주어야 한다고 여겼다. 결국 미국 사령부는 다음을 소련 측에 알리도록 제안받았다. (a) 미국은 남한에서 소련 영사의 유지 문제와 북한에서 미국 영사의 유지 문제가 깊은 관련이 있다고 믿는다. 그리고 (b) 주한미군총사령관은 북한의 평양에 적은 인원으로 미국 영사관을 설립하기를 원한다. 그리고 미국 점령 지역의 소련 시설들을 소련 점령 지역에서 미국 시설들이 승인된 것과 동등한 수준으로 제한하고자 한다.022022 워싱턴 D.C.에서 태평양미육군총사령관, 주한미군사령관에게 보내는 전문, 150028/Z, 1946년 3월 15일, 부관참모부 문서철.닫기
3월 19일에 이러한 제안들에 답하여, 하지 장군은 전문을 보냈다.023023 주한미군사령관이 태평양미육군총사령관에게 보내는 전문, TFGCG 327, 연합군최고사령부 참조, 191549/I, 1946년 3월 19일, 부관참모부 문서철.닫기

“국무부의 제안에 따라, 소련군 사령관에게 보내는 다음의 서신에 서명할 준비가 되었다.
“‘우리 정부는 나에게 북한에서 미국의 이해관계를 적절히 보호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평양에 적은 인원의 미국 영사관을 설립하는 문제를 귀하와 상의하도록 지시했다.’
“‘참고로, 북한에서 미국의 이해관계는 중요한 제조업, 선교사, 문화, 사업, 주거 등으로 구성된다고 말할 수 있다. 또한 미국 법정 증서의 공증, 시민권 서류, 시민 구호, 비자 발급 등 영사관의 도움을 요청하는 개인적인 이해관계도 포함된다.’
“‘만약 위에서 제시된 사무소의 개설에 반대하지 않는다면, 기꺼이 남한에서 소련의 이해관계를 위해 유사한 서비스를 행하는 비슷한 규모의 소련 영사관을 서울에 유지할 수 있게 허락하도록 하겠다.’
“그러나 이 서신이 공동 위원회 회담의 개막에 삐걱거리는 소리를 만들어 낼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서신을 당분간 보류하기를 제안한다.
“나의 관할 내에서 미국인들과 한국인들을 위한 필수적인 영사 업무를 수행하기 위하여 영사 업무의 빠른 설립을 바란다고 거듭 말하기는 하지만, 한국임시정부가 성립되기 전까지 국무부 대표를 분리하여 유지하는 것은 한국에서 미국 활동의 중복을 초래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또한 고려할 숙소와 사무소 공간이 부족하다는 문제도 있다.”

결정타는 하지 장군이 서울에 있는 소련 총영사 폴리안스키씨에게 전화를 했을 때인 4월 27일에 가해졌다. 그리고 다음의 구두 성명이 전달되었는데, 아래에 그대로 옮겨 놓았다. 그것은 사실상 최후통첩이었다.024024 주한미군사령관이 연합군최고사령부에게 보내는 전문, TFGCG 353, 270546, 1946년 4월 27일, 부관참모부 문서철. 서신 “한국 서울에서 소련 총영사의 실패”도 참조, 윌리엄 랭던(William R. Langdon), 국무부 정치고문, 1946년 7월 10일, 참모장 파일.닫기

“서울에서 귀하와 귀하 직원들의 지위를 합법화할 때가 왔다. 국제법에 대해서 나보다 귀하가 더 잘 알 것이라 확신하는데, 귀하의 위치는 매우 비정상적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첫 번째 이유는 영사관의 설립은 최고사령관과의 특별 협의가 있는 경우를 제외하면 보통 점령지역에서는 영사관이 기능을 하지 않는다. 그리고 두 번째로 귀하는 이전에 일본 천황으로부터 받은 승인에 의해 서울에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점령 지역에 묶인 우방의 영사관원으로서, 그리고 북한에 있는 소련 사령부와의 연락 담당자로서 이따금 귀하는 우리 사령부에 도움이 되었기 때문에, 나는 예의를 다 하기 위해 귀하가 서울에 머무는 것을 허락하여 왔고, 내가 할 수 있는 한도 내에서 교통과 식량, P.X. 이용의 특혜 등등을 부여하고 있다. 이와 관련하여 말하고 싶은 것은 프랑스 정부는 그들의 영사를 철수시켰고, 몇 달전에 일본으로 영사를 파견했다. 중국 영사관은 우리 군이 서울을 점령했을 때 폐쇄되었고, 여전히 재개되지 못하고 있다. 영국 외무성의 대표는 미국 정부와 도쿄의 연합군 최고사령관과의 특별 협의에 의해 우리 사령부와의 연락 담당자로서 지난 주 서울에 도착했으나, 영사 업무를 수행하도록 허가받은 것은 아니다. 미국 정부조차도 아직 서울에 영사를 보유하지 않고 있다. 따라서 소련 정부의 영화를 배포하는 것 같은 영사 기능의 수행을 요구하는 것, 그리고 영사관의 문에 황동 현판을 걸어 놓는 행동, 정당들과의 공식적인 관계 등은 불법일 뿐만 아니라 다른 동맹국들에 비해서도 차별적으로 행해지는 것이다.
“나는 귀하의 정부가 귀하의 지위와 이곳에서의 지속적인 활동에 관하여 논하기 위해 우리 정부에 접촉해 올 것을 기대하고 있다. 그러나 내가 아는 한 귀하의 정부는 이러한 방향에 대해 7개월간 어떤 움직임도 취하지 않았다. 나는 부득이하게 이와 같은 입장을 지켜 왔는데, 특히 공동위원회의 성립과 소련군 연락사무소의 설립 이후로, 이제는 더 이상 소련군 사령부와의 연락 담당자로서 귀하의 사무소는 필요하지 않다. 나는 우리 군대의 관할권 내에서 영사 혹은 영사의 기능을 허가할 권한이나 재량이 없다. 그러므로 만약 우리 사령부와의 민간 연락을 위해서, 혹은 관리인이나 필수적인 영사 임무를 위해서 서울에 한명의 영사관원이나 아니면 두 명을 계속 유지하고 싶다면, 그 문제로 우리 정부에 접촉하도록 귀하의 정부에게 알릴 것을 요청한다. 그동안에 우리 정부의 허가를 얻거나, 혹은 우리의 군사 점령이 어떤 다른 지휘권으로 대체된다거나, 혹은 어떤 정부든 총영사 기능을 행사하기 위해서 연합국의 최고사령관에 의해 허가를 받을 때까지는 영사 활동을 수행하지 말고, 황동 현판을 영사관의 문에 걸어 놓지도 않기를 요청한다.”
“또한 귀하의 공식적인 지위가 합법화될 때 까지, 나는 귀하와 귀화의 직원들을 사적인 우방으로서 대해야 하며, 더 이상 귀하에게 식량과 P.X. 이용, 휘발유, 외교관의 면책특권, 그리고 그 외의 특별한 혜택 등의 특권을 허락할 수 없음을 유의해 주기를 바란다. 마슬로프씨 부부와 같이, 미소공동위원회의 소련 측 대표단에 의해 직접 고용된 전 영사관원들의 경우는 예외로 취급될 것이다. 제한된 기능을 수행할 한 명 혹은 두 명의 영사관원을 서울의 우리 사령부에 파견하기 위해 우리 정부와 체결될 수 있는 모든 협의는 상호간의 기초 위에서 행하여 질 것으로 기대하고, 이는 바꿔 말하면 그 협의를 통해 자동적으로 미국이 언제든 작은 규모의 영사같은 것을, 미국 국민들이 중요한 제조업, 선교사, 문화, 주거지 등과 관련된 소유권을 가지고 있는 평양으로 파견하도록 허락될 것이라는 점을 귀하의 정부에게 확실히 해줄 것을 부탁한다. 인가받은 영사관을 서울에 설립하기 위해 우리 정부와 접촉하는 과정에서, 나의 관할권 내에서 누가 계속 남아있도록 허락되어졌는지 알고 싶으므로, 귀하의 정부는 영사관 설립에 누구를 파견하여 배치할 것인지 개개인의 이름을 나에게 알려야 한다.”

폴리안스키의 즉각적인 답장은 소련 영사관이 대체로 1884년 이래 서울과 한국에 존재하고 있었고, 부산에는 여전히 소련 시민이 거주하고 있고, 시민권을 얻으려고 하고 있는 사람들도 있다는 것을 그저 지적하려는 것이었다.025025 비망록: “폴리안스키가 소련 영사관에 관한 하지의 최후통첩에 답하다”, 1946년 4월 27일, 참모장 파일.닫기 5월 6일에 다음의 서면 답장을 받았다.

“서울의 소련 영사관에 관하여 4월 27일에 귀하가 나에게 던진 질문, 그리고 상호간의 기초 위에서 평양에 미국 영사를 파견하는 것에 관하여 함께 제시한 요구는 반드시 미국과 소련의 정부간 외교 경로를 통해서 해결되어야 한다. 따라서 소련 영사관에게 평소처럼 그 업무를 계속하려는 기회를 박탈하려 하는, 혹은 소련 영사관 직원들로부터 음식과 휘발유 등의 공급을 허용치 않도록 하는 미군 사령부 측의 어떠한 일방적인 조치에도, 나는 소련 정부의 대표에 대한 미군 당국의 비우호적인 행동으로 여길 것이다.”026026 주한미군사령관이 연합군최고사령부에게 보내는 전문, TFGCG 365, 0618301, 1946년 5월 6일, 부관참모부 문서철.닫기

이 때 미군 사령부는 소련 영사관에게서 식량과 휘발유의 공급, P.X. 이용, 외교관의 면책특권, 그리고 다른 특권 등과 같은 서비스를 공급하지 않는 행동을 취하지 않았다. 하지 장군은 소련 영사관원 가운데 어떤 직원들은 공동위원회에서 함께 일하고 있고, 또 공동위원회 기술진의 일부를 구성하고 있기 때문에, 소련 영사관에 저러한 서비스를 공급하는 것을 계속하는 것이 필수적이라고 생각된다고 설명했다. 위원회에 참가한 소련 대표단의 몇몇은 사실, 소련 영사관에서 식사를 하고 숙소를 제공받고 있었다.027027 위와 같음.닫기
한편, 1946년 4월 30일에 미군 사령부는 소련 시민권을 승인하기 위한 소련 위원단의 도착이 임박했음을 통지받았다. 그 위원단은 4월 30일에 미국 해병대의 비행기를 통해 톈진에서 서울로 떠날 예정이었다.028028 □가 제24군단에게 보내는 전문, 0826/2, 300636/I, 1946년 4월 30일, 부관참모부 문서철.닫기 같은 날에 폴리안스키는 가빈 장군으로부터 연락을 받고, 문제를 전해 들었다. 폴리안스키는 이 위원단의 이른 도착에 대해 놀라움을 표시한 후, 단정적으로, 그리고 끈질기게 그들의 도착, 또는 남한에서 그들의 목적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한다고 했다. 폴리안스키는 페트로프(Petroff)가 다롄의 부영사인 것은 알고 있었다고 시인했지만, 위원단의 다른 3명의 단원(Kniasfu, Kakine, Zatov)에 대해서는 모른다고 했다. 가빈 장군은 폴리안스키에게 그 일행들이 소련 시민권을 승인하기 위한 위원단이라고 말하려고 했을 때, 그저 애매하고 냉담한 답변이 돌아왔을 뿐이었다. 그러나 그는 공항에서 그 일행들을 맞이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요청했으나, 요청은 거부되었다. 사실은 기상악화로 그 일행들은 예정된 스케줄에 도착하지 못했다. 폴리안스키는 그의 활동에 대한 미군 사령부의 태도 때문에 여전히 불쾌해 보였고, 회담이 진행되는 동안에 비협조적이었고 묵묵부답이었다. 남한에서 영사 활동을 중단하라는 요청에 대하여, 폴리안스키는 그의 정부로부터 지시를 받을 때까지는 그렇게 할 수 없다고 말했다.029029 주한미군사령관이 태평양미육군총사령관에게 보내는 전문, TFGBI 268, 010617, 1946년 5월 1일, 부관참모부 문서철.닫기
소련 위원단의 문제는 하지 장군이 중국의 사령관에게 다음과 같은 내용이 포함된 전문을 보낸 이후에 유야무야되었다.030030 주한미군사령관이 중국 사령관에게 보내는 전문, TFGCG 360, 020140, 1946년 5월 2일, 부관참모부 문서철.닫기

귀하의 전문은... 위원단의 3인이 소련 시민권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소련 시민권의 승인은 총영사의 일반적인 역할이다. 현재 남한에 있는 적은 수의 백계러시아인들[러시아 혁명에 반대한 사람들] 때문에, 이 상례적인 절차는 영사관이 만약 인가를 받을 경우 이미 이곳에 있는 적은 영사관원들에 의해서도 처리될 수 있다. 상급사령부로부터 반대되는 지시를 받지 않는다면, 참조 전문에는 언급되지 않았던 설득력 있는 이유가 준비되지 않는다면, 지금 또는 이후에도 이 소련 당국자들의 입국을 승인하도록 제안하지 않을 것이다.

1946년 5월 25일 소련 영사관의 폐쇄가 있을 때 까지 이 문제는 공개적으로 논의되었다. 뉴욕 타임스로 발송된 서울발 긴급 보도는 다음과 같다.031031 기사 “U.S. Ban on Russians awaited in Seoul”, 리차드 존스턴(Richard J. G. Johnston) 작성, 뉴욕타임즈, 1946년 5월 25일.닫기

미국 국무부가 모스크바로 보낸 최후 통첩에 의한 기한이 지남에 따라 오늘 이곳에서는 미국 당국에 의한 소련 영사관 폐쇄가 예기되고 있다. 그동안 워싱턴에서는 미국 영사관이 한국 내 소련 점령지역의 수도인 평양에 설립되어야 한다고 요구했고, 그렇지 않으면 이곳의 소련 영사가 영사 활동을 중지하도록 요구했다.
한편 서울의 소련 영사관원인 폴리안스키는 그의 직무를 수행할 기회를 제안 받았지만, 지금까지 그로부터 답변을 받지 못했다...

5월 29일 폴리안스키는 미군 사령부로부터 6월 1일 부로 소련 영사관원으로서의 P.X. 이용과 식량 배급, 판매소의 특혜 등을 더 이상 연장하지 않을 것이라고 통보받았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소련 측의 보급로가 미군의 보급로보다 훨씬 가깝다는 점이 지적되었다.032032 의사록, 가빈 장군과 폴리안스키 간의 대담, 1946년 5월 29일, 참모장 파일.닫기
그 후에 이 문제는 정부 간의 외교 수준에서 계속되었다. 제24군단은 사건의 경과에 대해 워싱턴 D. C.로부터 받은 6월의 전문에서 다음과 같이 통지받았다.033033 워싱턴에서 태평양미육군총사령관에게 보내는 전문, 030916/Z, 1946년 6월 3일, 부관참모부 문서철.닫기

“다음은 6월 5일 오후 5시로 기록된 모스크바로부터 받은 전문 1756의 원문이다.
“‘5월 28일 몰로토프와의 대화 이후에... 나는 5월 29일자 서신을 통해 우리의 대화를 승인했다. 그 서신에서 나는 그에게 평양에서 영사관을 개설하는 것에 대한 미국 정부의 제안에 가해진 부정적인 결정을 재검토하고 재고할 것을 요청했다. 몰로토프의 지시로 로조프스키(Lozovski)가 쓴 6월 4일자 서신에서 다음과 같이 답했다. “최근 남한의 미군 사령부는 서울에 있는 소련의 총영사와의 관계에서 몇 번의 독단적인 행동을 저지르고 있다. 그 행동들은 혼란을 초래할 뿐만 아니라, 소련 총영사의 정상적인 기능을 불가능하게 만들고 있다. 위의 상황을 고려하여, 소련 정부는 이러한 정황과 관련하여 서울의 소련 영사관을 폐쇄하기로 결정했다고 미국 정부에 알리기를 요청한다. 소련 총영사의 건물들과 소유물의 보호를 위해서 몇 명의 인원이 남아서, 서울에서 미군 사령부와 연락을 주고 받게 될 것이다.”
나는 국무부가 사실의 서술에서 오류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을 경우, 로조프스키에게 다음의 답변을 보내고자 한다.
“‘서울에 있는 소련 총영사관을 폐쇄한다는 소련 정부의 결정을 알리는 1946년 6월 4일자 귀하의 서신을 받았음을 알린다. 나는 그에 상응하여 미국 정부에 알릴 것이다. 나는 또한 귀하의 서신에 나와 있는 진술에서 미군 사령부가 서울에 있는 소련 총영사와의 관계에서 몇 번의 독단적인 행동을 저지르고 있고, 그 행동들이 소련 총영사의 정상적인 기능을 불가능하게 만들고 있다는 것에 주목하고 있다. 남한에서 소련 총영사와 관련하여 미군 사령관이 취한 조치는 우리 두 정부 간의 협정에 의해, 혹은 남한에 있는 미군 사령관을 통해 직접적으로 총영사 지위의 합법화를 요청하려는 것이었고, 이것이 이루어질 때까지 총영사의 활동을 보류하도록 요청하려는 것이었다. 나는 바로 5월 10일에 소련 총영사의 직원들이 식량과 가솔린을 공급받고 있고, 미군 상점들(P.X.)에서 상품을 매입할 수 있는 특혜를 받았으며, 외교관의 면책특권과 다른 특권들도 부여받았음을 알고 있다. 그리고는 상호적인 기초 위에서 신임장을 주고 평양에 적은 수의 영사 대표를 파견하도록 해달라는 미국의 요청에 대한 소련 정부의 결정이 있을 때까지, 폴리안스키씨에게 그의 영사 활동을 중지해 달라는 요구를 했으나 아무런 조치가 취해지지 않았음을 알고 있다. 일본이 항복하고 약 9개월 전 미군에 의해 남한이 점령될 때부터, 그 때 이후로 모든 점에 있어서 서울에 있는 소련 총영사의 직원들은 미군 당국에 의해 정중하게 대우받아왔고, 미군 사령부의 조치가 혼란을 만들었거나, 혹은 서울에서 소련 총영사의 정상적인 활동을 불가능하게 만들었다는 것은 근거가 없는 것이다. 모든 적절한 시설들이 서울에 있는 소련 정부의 건물들과 소유물의 보호를 위해서 제공될 것이다. 비록 나는 과도하게 답변을 강요하고 싶지는 않지만, 만약 우리 정부가 북한에서 미국 영사관을 설립하고자 하는 나의 요청에 대해 빠른 시일 내의 결정이 내려진다면, 5월 29일자 나의 편지에 대한 귀하의 언급을 알고 싶다. 비쇼스키(Vishioski)씨와의 최근 회담의 결과로서 지금까지 내가 알기로는, 영사관은 필요에 따라 그리고 필연적으로 상호적인 기초 위에서 설립되어야 한다는 것이 소련 정부의 관점이다. 지난 연락에서 내가 지적했던 것처럼 미국 정부는 미국 국민들이 중요한 제조업, 선교사, 문화, 주거지 등과 관련된 소유권을 갖고 있는 평양에 영사관을 개설하기를 원했는데, 그 결과 우리 정부는 그 지역에서 정상적인 영사 기능을 수행할 필요를 느끼게 되었다.”
“모스크바로 보낸 지시는 다음과 같다. “6월 7일 오후 2시, 국무부는 로조프스키에게 보내고자 귀하가 제안한 성명에 동의한다...그 성명에는 잘못된 부분이 없다.”

1946년 6월 11일 폴리안스키는 소련 정부로부터 아주 빠른 시일 내에 소련 영사관을 폐쇄하라는 지시를 받았다고 보고했다. 그는 이미 서울에 있는 콘스탄틴 그레고리비치 시코프(Konstantin Gregorievich Sikoff)씨가 관리인으로서 남을 것이고, 그를 돕기 위해 추가로 두 명의 소련인, 세르게이 세모노비치 주딘(Sergei Semonovich Zudin)과 니콜시 알레세스비치 크리보쉐프(Nikolsi Alexsesvich Krivosheef)를 파견할 것이라고 소련 외무부로부터 이어서 통보받았다. 폴리안스키는 즉시 짐을 싸기 시작했다고 밝혔고, 4명의 소련군 병사와 1대의 트럭이 그의 출발을 돕기 위해서 북으로부터 서울로 오는 것이 인가되어야 한다고 요청했다. 이 요청은 승인되었다. 그 때에는 성명서를 발표하지 않기로 상호간에 합의했다.034034 주한미군사령관이 연합군최고사령부에게 보내는 전문, TFGCG 410, 20400/2, 1946년 6월 11일, 부관참모부 문서철.닫기
이틀 후인 6월 13일에 미군 사령부는 영사관을 위한 관리인으로서의 역할을 하기 위해 소련 외무부에 의해 위임을 받지 못한 두 명의 추가 인원, 크리보쉐프와 주딘이 평양에 도착했다는 것을 통지받았다. 그리고 그들이 서울로 이동하기 위한 입국 허가를 요청받았다.035035 샤닌 장군이 가빈 장군에게 보내는 서신, 1946년 6월 13일, 정보참모부 문서철.닫기 비록 하지 장군은 6월 11일 국무부에 북한으로부터 내려오는 두 명의 관리인에 관하여 알려진 어떠한 정보라도 달라는 요청을 전송했으나,036036 주한미군사령관이 연합군최고사령부에게 보내는 전문, TFGCT 410, 20400/2, 1946년 6월 11일, 부관참모부 문서철.닫기 미군 사령부가 이미 알고 있는 정보 외에 다른 정보는 제공받을 수 없었다.037037 워싱턴에서 태평양미육군총사령관에게 보내는 전문, 222017/Z, 1946년 6월 22일, 부관참모부 문서철.닫기
7월 2일 폴리안스키가 7명의 남자, 9명의 여자, 13명의 어린이로 구성된 그의 동료들과 함께 기차를 타고 서울에서 평양으로 떠나면서 문제는 종결되었다. 앞에서 언급한 관리인 3명만이 영사관에 남았다. 추가로 미군 경비 한명이 소유물의 보호를 위해 배치되었다.038038 주한미군사령관이 연합군최고사령부에게 보내는 전문, TFGCG 428, 020550/Z, 1946년 7월 2일, 부관참모부 문서철.닫기
서울에 있는 소련 영사관의 폐쇄로 이어지는 사건들의 이 논의에서 영사관원들과 남한 공산주의자 활동의 관계는 거의 언급되지 않았다. 비록 엄격하게 합법적 정신에 입각하면 소련 측이 만든 정치적인 음모의 아주 작은 증거가 있을 뿐이었지만, 모든 것이 표면에 드러난 것처럼 확실하지 않음에도 미군 사령부 측에서는 근거가 충분한 혐의라는 적절한 이유가 있었다. 이 문제는 다음 절에서 더 세밀하게 다루어진다.

註 001
연합군최고사령부 군정처(Government Section), “윌리엄 크리스트(William E. Crist) 준장의 한국 출장 보고서”, (날짜 없음), 4부, 센트럴 파일, 주한미군사령부 사무국 총무과.
註 002
제24군단 정보참모부 정기보고 86, 1945년 12월 3일, 3~4쪽.
註 003
제24군단 정보참모부 정기보고 81, 1945년 11월 30일, 2쪽. 이 진술의 근거는 서울의 일본 헌병대 전 지도자였다.
註 004
세실 니스트 대령이 서울의 소련 영사관 샤브신(A. I. Shabshin) 부영사에게 보내는 서신, 1945년 9월 17일, 정보참모부 문서철.
註 005
제24군단 사령부 미군 방첩대 제229파견대, 파일 4-77, 1946년 1월 15일, Special Agent 4204, 제목: “한국 영화 산업 영사기사 조합”, 정보참모부 문서철.
註 006
제7사단 사령관이 제24군단 사령관(정보참모부)에게 보내는 전문, 191800/I, 200915, 1946년 1월 20일, 정보참모부 문서철.
註 007
주한미군사령관이 제6, 7사단 사령부에게 보내는 전문. ASCOM 24, 주한미군정, 261505/I, 1946년 2월 26일, 정보참모부 문서철.
註 008
로버트 루단(Robert Roordan) 중위가 공보부 책임자에게 보내는 부처간 비망록: 소련 영화, 1946년 2월 26일, 정보참모부 문서철.
註 009
참모장 가빈 장군이 폴리안스키에게 보내는 서신, 1946년 3월 6일, 정보참모부 문서철.
註 010
폴리안스키가 가빈 장군에게 보내는 서신, 1946년 3월 7일, 정보참모부 문서철.
註 011
가빈 장군이 폴리안스키에게 보내는 서신, 1946년 3월 7일, 정보참모부 문서철.
註 012
주한미군사령관이 제6, 7사단에게 보내는 전문, TFGBI 214, 군수사령부(ASCOM) 24, 주한미군정, 091200/1. 1946년 3월 9일, 부관참모부 문서철.
註 013
주한미군사령관(랭던을 대표하여)이 연합군최고사령부에게 보내는 전문, TFGCG 321, 071310/I, 1946년 3월 1일, 부관참모부 문서철.
註 014
1946년 2월 22일자 허가증, 로버트 루단 중위, 주한미군정 공보부 영화과, 정보참모부 문서철.
註 015
참모장 가빈 장군이 폴리안스키에게 보내는 서신, 1946년 5월 18일, 정보참모부 문서철.
註 016
폴리안스키가 참모장 가빈 장군에게 보내는 서신, 1946년 5월 20일.
註 017
『자유신문』, 1946년 3월 12일, 정보참모부 문서철.
註 018
주한미군사령관이 태평양미육군총사령관에게 보내는 전문, TFGCG 112, 111638, 1945년 10월 11일, 부관참모부 문서철.
註 019
워싱턴 D.C.에서 서울의 정치고문에게 보내는 전문, 200840, 1945년 2월 20일, 정보참모부 문서철 19.
註 020
태평양미육군총사령관에서 WARCOS(국무부에 전달)에게 보내는 전문, CA 58243, 주한미군사령관 참조, 260637/Z, 1946년 2월 26일, 부관참모부 문서철.
註 021
위와 같음.
註 022
워싱턴 D.C.에서 태평양미육군총사령관, 주한미군사령관에게 보내는 전문, 150028/Z, 1946년 3월 15일, 부관참모부 문서철.
註 023
주한미군사령관이 태평양미육군총사령관에게 보내는 전문, TFGCG 327, 연합군최고사령부 참조, 191549/I, 1946년 3월 19일, 부관참모부 문서철.
註 024
주한미군사령관이 연합군최고사령부에게 보내는 전문, TFGCG 353, 270546, 1946년 4월 27일, 부관참모부 문서철. 서신 “한국 서울에서 소련 총영사의 실패”도 참조, 윌리엄 랭던(William R. Langdon), 국무부 정치고문, 1946년 7월 10일, 참모장 파일.
註 025
비망록: “폴리안스키가 소련 영사관에 관한 하지의 최후통첩에 답하다”, 1946년 4월 27일, 참모장 파일.
註 026
주한미군사령관이 연합군최고사령부에게 보내는 전문, TFGCG 365, 0618301, 1946년 5월 6일, 부관참모부 문서철.
註 027
위와 같음.
註 028
□가 제24군단에게 보내는 전문, 0826/2, 300636/I, 1946년 4월 30일, 부관참모부 문서철.
註 029
주한미군사령관이 태평양미육군총사령관에게 보내는 전문, TFGBI 268, 010617, 1946년 5월 1일, 부관참모부 문서철.
註 030
주한미군사령관이 중국 사령관에게 보내는 전문, TFGCG 360, 020140, 1946년 5월 2일, 부관참모부 문서철.
註 031
기사 “U.S. Ban on Russians awaited in Seoul”, 리차드 존스턴(Richard J. G. Johnston) 작성, 뉴욕타임즈, 1946년 5월 25일.
註 032
의사록, 가빈 장군과 폴리안스키 간의 대담, 1946년 5월 29일, 참모장 파일.
註 033
워싱턴에서 태평양미육군총사령관에게 보내는 전문, 030916/Z, 1946년 6월 3일, 부관참모부 문서철.
註 034
주한미군사령관이 연합군최고사령부에게 보내는 전문, TFGCG 410, 20400/2, 1946년 6월 11일, 부관참모부 문서철.
註 035
샤닌 장군이 가빈 장군에게 보내는 서신, 1946년 6월 13일, 정보참모부 문서철.
註 036
주한미군사령관이 연합군최고사령부에게 보내는 전문, TFGCT 410, 20400/2, 1946년 6월 11일, 부관참모부 문서철.
註 037
워싱턴에서 태평양미육군총사령관에게 보내는 전문, 222017/Z, 1946년 6월 22일, 부관참모부 문서철.
註 038
주한미군사령관이 연합군최고사령부에게 보내는 전문, TFGCG 428, 020550/Z, 1946년 7월 2일, 부관참모부 문서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