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제

Ⅰ. 大韓民國臨時政府 憲法

대한민국임시정부(이하 임시정부로 약칭)는 1919년 4월 중국 상해에서 수립되었다. 이후 해방을 맞아 환국할 때까지 임시정부는 정부로서의 조직을 유지 운영하면서 활동하였다. 27년여에 걸쳐 임시정부가 정부로서의 조직을 유지 운영하며 활동하였던 기본 골격은 헌법이었다. 임시정부의 헌법은 임시정부의 가장 기본적인 문건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임시정부의 헌법은 수립 당시인 1919년 4월 11일 ≪大韓民國臨時憲章≫이란 이름으로 제정 공포되었다. 이후 해방을 맞아 환국할 때까지 ‘憲法’ · ‘約憲’ · ‘憲章’이란 이름으로 다섯 차례에 걸쳐 개정이 이루어졌다. 1919년 9월 11일에 ≪大韓民國臨時憲法≫, 1925년 4월 7일 ≪大韓民國臨時憲法≫, 1927년 4월 11일 ≪大韓民國臨時約憲≫, 1940년 10월 9일 ≪大韓民國臨時約憲≫, 1944년 4월 22일 ≪大韓民國臨時憲章≫이란 이름으로 개정 공포된 것이다.

그동안 임시정부의 헌법을 정리한 일이 있었다. 1974년 국회도서관에서 임시의정원의 회의록과 자료를 모아 『大韓民國臨時政府議政院文書』를 발간하면서, 제1편으로 「臨時政府 憲法 및 議政院法」을 수록한 것이 그 하나였다. 이는 임시정부의 헌법을 처음으로 모아 정리하였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 그러나 1927년 4월 11일 공포된 ≪대한민국임시약헌≫이 빠져있어, 임시정부의 헌법을 완전히 갖추지 못하였다.

1999년 또 한 차례 헌법이 정리되었다. 韓詩俊이 임시정부에서 제정 공포한 헌법 및 법령을 모아 『大韓民國臨時政府法令集』을 발간한 것이 그것이었다. 이는 『대한민국임시정부의정원문서』를 비롯하여 그동안 간행된 독립운동사 관련 자료집에 수록되어 있는 임시정부의 헌법 및 법령을 총정리 한 것이다. 이 작업은 종전에 빠져 있던 1927년 4월 11일에 공포된 약헌을 보충하여, 임시정부의 헌법을 한 곳에 모았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었다. 그리고 1940년 10월 9일에 공포된 ≪대한민국임시약헌≫은 한문본으로 전해지고 있던 것을 번역하여 수록하였다.

두 차례에 걸친 작업으로, 임시정부의 헌법은 일단 한 곳에 정리되었다. 그러나 임시정부가 제정 공포한 헌법의 원본을 수록한 것은 아니었다. 원본을 보고 필사하거나 독립운동사 관련 자료집에 들어 있는 것을 활판으로 인쇄하여 수록한 것이었다. 일단 임시정부의 헌법을 정리하였다는 성과는 있었지만, 원본을 찾거나 그것을 영인하지 못하였다는 아쉬움이 남게 되었다.

임시정부의 헌법은 모두 6차례 제정 공포되었지만, 현재 그 원본이 모두 전해지고 있지 않다. 6차례의 헌법 중 원본이 전해지는 것은 3개뿐이다. 1919년 4월 11일 공포된 ≪대한민국임시헌장≫과 1919년 9월 11일에 공포된 ≪대한민국임시헌법≫의 원본이 『雩南李承晩文書』에 영인 수록되어 있다.

이외에 임시정부자료집 편찬사업을 추진하면서, 새로 하나를 더 발굴하였다. 1927년 4월 11일 공포된 ≪대한민국임시약헌≫의 원본을 찾아낸 것이다. 이는 임시의정원 의장을 지냈던 金朋濬의 후손(김국부)이 소장하고 있었고, 그 후손이 임시정부자료집 편찬사업의 취지에 동의하고 기꺼이 원본을 제공해 주었다. 헌법 원본을 하나 더 찾게 된 것은 임시정부자료집 편찬사업을 추진하면서 거둔 조그만 성과의 하나이다. 지면을 통해 후손에게 감사드린다.

3 · 1운동 직후 국내외 독립운동가들은 임시정부를 수립하고자 하였다. 이를 위해 많은 인사들이 상해로 모여들었고, 1919년 4월 10일 이들 중 29명이 회합을 가졌다. 이 회합에서 臨時議政院을 구성하였고, 임시의정원에서 임시정부를 수립하였다. 4월 10일 밤 10시에 제1회 임시의정원 회의가 개최되었다. 이 회의에서 國號를 大韓民國으로 결정하고, 국무총리를 중심으로 한 정부의 官制와 閣員을 선출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수립한 것이다.

임시정부는 수립과 함께 그 헌법인 ≪大韓民國臨時憲章≫을 제정 공포하였다. ≪대한민국임시헌장≫은 임시정부 수립을 추진하는 단계에서 준비되었고, 趙素昻이 기초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조소앙은 1904년 황실유학생으로 일본에 유학하였고, 明治大 법과를 졸업한 인물이었다. 임시헌장 기초안은 제1회 임시의정원 회의에 제출되었고, 의정원에서는 趙素昻 · 申翼熙 · 李光洙 3인 심사위원의 심사를 거친 후, 본회의에서 제6조와 제8조의 일부만을 수정하고 그대로 통과시켰다. 의정원을 통과한 ≪대한민국임시헌장≫은 1919년 4월 11일 임시의정원 의장 李東寧과 임시정부의 國務總理 李承晩을 비롯한 국무위원 명의로 공포되었다.

≪대한민국임시헌장≫은 ‘임시정부는 임시의정원의 결의로 임시헌장을 선포한다’는 선포문과 함께 모두 10개조로 구성되었다. 구성이나 내용에서는 매우 간략한 것이었지만, 이는 한국 역사상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 헌법이었다. 제1조에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로 함”이라 하여, 國體와 政體를 민주공화제로 한 것이다. 그리고 제2조에서는 “임시의정원의 결의에 의하여 통치함”이라고, 代議制를 규정하였다. 9년 전인 1910년 대한제국에 이르기까지 전제군주제였음을 생각한다면, 이는 한민족의 역사가 전제군주제에서 민주공화제로 바뀌는 민족사의 대전환을 이룬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리고 행정부(임시정부)와 의회(임시의정원)를 구별하고, 인민의 자유(언론 · 출판 · 집회 등), 권리(선거권 · 피선거권 등), 의무(교육 · 납세 · 병역) 등을 규정하였다. 이로써 임시헌장은 민주주의 원리에 기초한 한국 최초의 헌법이라는 역사적 의미를 갖는다.

1919년 9월 11일, 임시정부는 ≪大韓民國臨時憲法≫을 제정 공포하였다. 이는 종전의 ≪임시헌장≫을 개정한 것이다. 헌법을 개정하게 된 이유는 노령 · 상해 · 국내에서 수립된 세 임시정부가 통합을 이룬 것이 주된 요인이었다. 3 · 1운동 직후 국내외 여러 곳에서 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 이 가운데 실제적인 조직과 기반을 갖춘 것은 노령의 ‘대한국민의회’, 상해의 ‘임시정부’, 국내의 ‘한성정부’였다. 이들 세 곳의 임시정부는 수립 직후인 1919년 5월부터 통합을 논의, 국내에서 수립된 한성정부의 법통을 계승한다는 원칙하에 노령과 상해의 임시정부를 통합한다는데 합의를 이루었다.

세 곳에서 수립된 임시정부가 하나로 통합을 이루어, 통합정부로 출범하면서 헌법을 개정한 것이다. 헌법의 개정은 申翼熙의 주도하에 이루어졌다. 신익희는 1919년 4월 11일 공포된 ≪대한민국임시헌장≫의 심사위원을 한 경험이 있었고, 당시 법무부의 차장을 맡고 있었다. 신익희 등이 기초한 헌법개정안은 임시의정원에 제출되었고, 임시의정원은 9월 6일 이를 만장일치로 통과시켰다. 그리고 임시정부는 1919년 9월 11일자로 개정한 헌법인 ≪대한민국임시헌법≫을 공포하였다.

≪대한민국임시헌법≫은 전문을 포함하여 8장 58개조로 구성되었다. 전문에서는 “임시의정원은 원년 4월 11일에 발포한 10개조의 임시헌장을 기본삼아 임시헌법을 제정”하였다는 것, 그리고 “公理를 彰明하며 公益을 增進하며 國防 및 內治를 籌備하며 政府의 基礎를 鞏固하는 保障이 되게 하노라”하여, 임시헌법을 공포한 이유와 목표를 천명하였다.

≪대한민국임시헌법≫은 1919년 4월 11일에 공포한 10개조의 ≪대한민국임시헌장≫을 기본으로 하였지만, 사실상 새로이 헌법을 제정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종전의 10개조가 모두 8장 58개조로 구성되어, 헌법의 내용이 대폭 확충되고 세분화되었다는 점에서 그렇다. 전문을 비롯하여, 제1장 綱領, 제2장 人民의 權利와 義務, 제3장 臨時大統領, 제4장 臨時議政院, 제5장 國務院, 제6장 法院, 제7장 財政, 제8장 補則으로 구성되었다.

≪대한민국임시헌법≫은 종전의 ≪임시헌장≫을 기본삼아 제정한 것으로 ≪임시헌장≫의 정신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러나 ‘대한민국의 주권행사는 헌법 범위내에서 임시대통령에게 위임함’이라고 하여, 대통령중심제를 채용하였다는 점이 큰 특징이라고 하겠다. 그리고 제5조에 “대한민국의 立法權은 議政院이 行政權은 國務院이 司法權은 法院이 행사함”이라고 하여, 입법 · 행정 · 사법의 三權分立 체제를 마련하기도 하였다. 근대헌법의 체제를 갖춘 憲法典이라고 할 수 있다.

1925년 4월 7일, 임시정부의 세 번째 헌법인 ≪大韓民國臨時憲法≫이 공포되었다. 제2차 개정헌법이었다. 헌법을 개정한 이유는 대통령의 탄핵과 관련이 있었다. 임시정부는 1919년 9월 세 곳의 정부를 통합하면서, 대통령제를 채용하였고, 미국에서 활동하던 李承晩을 대통령으로 선출하였다. 그러나 대통령 이승만은 상해에 부임하지 않고 미국에서 활동하였고, 이 과정에서 상해에 있는 인사들과 적지 않은 갈등과 마찰을 빚었다. 이로 인해 임시정부는 무정부상태가 지속되었고, 정부로서의 조직을 유지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이러한 임시정부의 혼란을 수습하는 방안으로 헌법개정이 논의되었다. 그 논의가 구체화되어 추진된 것은 1924년 12월 朴殷植 내각이 들어서면서였다. 박은식은 국무총리 겸 대통령대리로 선출되어 임시정부의 혼란을 수습하고자 하였고, 수습 방안으로 대통령에 대한 탄핵과 더불어 헌법의 개정을 추진하였다. 1925년 3월 임시의정원에서는 대통령이 직무지에 부임하지 않고, 임시정부와 의정원을 부인하였다는 등의 이유로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면직안을 통과시켰다. 이와 더불어 추진된 헌법개정은 대통령제로 인한 폐단을 극복하는 데 핵심을 두었다. 헌법개정위원회를 구성하여 헌법개정안을 마련하였고, 임시의정원은 정부에서 제출한 헌법개정안을 통과시켰다. 의정원을 통과한 헌법개정안은 1925년 4월 7일 ≪대한민국임시헌법≫으로 공포되었다.

≪대한민국임시헌법≫은 前文 없이 38개조로 구성되었다. 내용이나 조항으로 보면, 이전보다 소략해졌다. 이 헌법의 가장 큰 특징은 대통령제를 폐지하고 國務領制를 채택한 점이라고 할 수 있다. 대통령제로 인한 폐단을 없앤 것이었다. “임시정부는 國務領과 國務員으로 조직한 국무회의의 결정으로 행정과 사법을 總辦함”이라 하고, “국무령이 국무회의를 대표한다”라고 하였다. 정부의 지도체제를 대통령중심제에서 국무령을 중심으로 한 내각책임제로 바꾼 것이었다. 종전의 대통령에 대해서는 임기 규정이 없었으나, 국무령의 임기는 3년으로 정하였다. 그리고 “대한민국은 光復運動 中에는 광복운동자가 전인민을 대표함”이라고 하여, 독립운동자가 인민을 대표하는 것으로 규정한 것도 특이한 점이다.

그러나 ≪대한민국임시헌법≫은 오래가지 못하였다. 1926년 말 다시 개헌 문제가 대두된 것이다. ≪대한민국임시헌법≫의 가장 큰 특징은 국무령제를 채택한 것이었지만, 국무령을 중심으로 한 정부의 조직을 제대로 구성하지 못하게 된 것이 주요한 요인이었다. 국무령제로 개헌한 이후 李相龍 · 梁起鐸 · 安昌浩 · 洪震 등이 국무령에 선출되었지만, 제대로 내각을 구성하지 못하였다. 만주에서 활동하던 이상룡은 상해로 와 국무령에 취임하였지만, 내각을 구성하지 못한 채로 있다가 돌아가 버렸다. 이어 양기탁이 국무령에 선출되었지만 취임하지 않았고, 안창호도 의정원에서 국무령에 선출된 사실을 통보받았지만 역시 취임하지 않았다. 선출한 국무령이 취임하지 않자 임시의정원에서는 선거 방법을 바꾸었다. 의정원에서 선출하여 당사자에게 통보하던 종전의 방법에서, 당사자를 만나 미리 내락을 얻어낸 후 의정원에서 선출하는 형식을 채용한 것이다. 이에 의해 홍진이 국무령에 선출되었고, 홍진은 1926년 7월 정식으로 국무령에 취임하였다. 그리고 국무원을 선출하고, 정부의 조직도 갖추었다. 그러나 홍진은 전민족을 대단결한 민족유일당운동에 주력하였고, 이를 위해 1926년 12월 국무령을 사임하였다.

홍진 국무령이 사임한 후 1926년 12월 金九가 국무령으로 취임하였다. 국무령에 취임한 김구는 “현재의 제도로는 내각을 조직하기가 곤란한 것을 통절히 깨달았으므로”라고 하면서, 국무령의 제도로는 내각을 조직하기 어렵다고 판단, 개헌을 추진하였다. 金甲 · 李圭洪 등을 중심으로 約憲起草委員會를 구성하였고, 이를 통해 개헌안이 마련되었다. 이로써 3차 개헌안이 마련되었고, 명칭은 ≪大韓民國臨時約憲≫이라고 하였다. 이는 1927년 2월 15일 임시의정원을 통과하였고, 4월 11일 공포되었다.

3차 개헌인 ≪대한민국임시약헌≫은 前文 없이 50개조로 구성되었다. 임시약헌의 가장 큰 특징은 집단지도체제를 채용한 점이다. “임시정부는 국무위원으로 조직한 국무회의의 의결로 國務를 總辦함”이라 하고, 主席 1인은 국무위원 중에서 互選한다고 하였다. 주석은 국무회의를 주관하는 사회자에 지나지 않았다. 국무위원을 중심으로 한 집단지도체제였다. 그리고 임시정부보다 임시의정원의 지위를 강화시켰다. “대한민국의 최고권력은 임시의정원에 있음”(제2조)이라고 한 것과 임시정부(제3장)보다 임시의정원(제2장)을 앞에 둔 것이 그것이다.

이 ≪대한민국임시약헌≫의 원본이 본 자료집을 통해 처음으로 공개된다. ≪임시약헌≫은 원본이 공개되지 않은 채 내용만 알려져 있었다. 李延馥 교수가 학술지에 ≪임시약헌≫의 全文을 소개한 것이다. 원본을 보관하고 있는 의정원 의장 金朋濬의 후손이 원본을 尹炳奭교수에게 보여주었고, 이를 이연복교수가 소개한 것이라고 한다. 김붕준의 후손이 임시정부자료집 편찬을 위해 그동안 소장하고 있던 원본을 흔쾌히 제공하였고, 본 자료집에 이를 그대로 영인하여 세상에 공개하게 되었다.

1940년 10월 9일, 또다시 헌법 개정이 이루어졌다. 임시정부가 重慶에 정착하여 한국광복군을 창설하고 정부의 조직과 체제를 정비하면서, 헌법을 개정한 것이다. 임시정부는 1932년 4월 尹奉吉 의사의 홍구공원의거를 계기로 근거지였던 상해를 떠나야 했다. 이후 임시정부는 杭州 · 鎭江 · 長沙 · 廣州 · 柳州 · 綦江 등지로 이동해 다니다가 1940년 9월 중경에 정착하였다. 이 동안 임시정부는 金九를 중심으로 한 한국국민당을 기초로 하여 유지 운영되고 있었다. 그러다 1940년 5월 趙素昻 · 洪震을 중심으로 한 한국독립당(재건)과 李靑天 · 崔東旿 등 만주에서 활동하던 세력이 주축이 된 조선혁명당의 3당이 임시정부의 옹호 유지를 전제로 통합을 이루어 한국독립당을 창당하였다. 민족주의 계열 3당이 합당하여 세력을 통일함으로써, 임시정부의 지지기반이 확대되었다. 임시정부는 이러한 세력기반을 배경으로 하여 1940년 9월 17일 한국광복군을 창설하였다. 그리고 정부의 조직과 체제를 확대 강화해 나갔다. 이 과정에서 헌법의 개정이 추진되었고, 1940년 10월 9일 개정된 헌법인 ≪대한민국임시약헌≫이 공포되었다. 4차 개헌이었다.

4차 개헌인 ≪대한민국임시약헌≫은 前文 없이 42개조로 구성되었다. 이전의 헌법보다 조항이 축소되었다. 4차 개헌의 가장 큰 특징은 집단지도체제인 국무위원회제를 폐지하고, 단일지도체제인 主席制를 채택한 점이다. 국무위원회제에서의 주석은 국무회의를 주관하는 사회자에 불과하였지만, 개정된 헌법에서는 주석이 임시정부를 대표하는 실질적인 대표자였다. 주석의 선출은 임시의정원에서 선거를 통해 실시하고, 주석의 위상은 “임시정부를 대표”하며 “국군을 總監한다”라고 하여, 주석에게 정부 首班과 국군 통수권자로서 실질적인 국가 원수의 위상과 권한을 부여한 것이다.

이러한 단일지도체제의 확립은 전시체제에 대비하기 위한 조처였다. 임시정부가 중경에 정착하던 1940년 9월은 1937년이래 계속되고 있는 중일전쟁에 이어 유럽에서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때였다. 중일전쟁과 제2차 세계대전이라는 국제정세 변화에 따라 이에 대비할 필요가 있었고, 이를 위해 강력한 지도체제가 요구되었던 것이다. 주석제로의 개헌과 더불어 주석은 그동안 임시정부를 유지해 온 김구를 선임하였다. 김구의 주도력을 제도화한 것이었다.

≪대한민국임시약헌≫은 한문본으로만 전해지고 있다. 다른 헌법의 경우로 보면 국한문본으로 작성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이는 전해지지 않고 있다. 1942년 4월 임시정부선전위원회에서 편찬한 『韓國獨立運動文類』에, 또 1974년 국회도서관에서 간행한 『대한민국임시정부의정원문서』에 한문본으로 수록되어 있다. 본 자료집에는 한문본과 함께 번역본을 수록하였다. 번역본은 趙一文이 『한국독립운동문류』를 번역한 것(건국대 출판부, 1976)을 참고하였다.

1944년 4월 22일, 제5차 개정헌법인 ≪大韓民國臨時憲章≫이 공포되었다. 다섯 번째로 개정한 헌법이었다. 좌익진영의 독립운동 세력들이 임시정부에 참여하여 좌우연합정부를 구성하게 되면서, 또 일제의 패망이 예견되는 상황에서 건국에 대비하기 위한 내용을 첨가하기 위해 개헌을 추진한 것이다. 조선민족혁명당을 비롯한 좌익진영은 임시정부와 관계없이 독자적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이러한 좌익진영이 중경에 정착한 후인 1942년 그동안 고수해 왔던 임시정부에 대한 不關主義 노선을 포기하고 임시정부에 참여하였다. 1942년 7월 좌익진영의 무장세력인 조선의용대가 한국광복군에 편입하여 제1지대가 되었고, 그해 10월에는 조선민족혁명당 · 조선민족해방동맹 · 조선무정부주의자총연맹 등에서 활동하던 인사들이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선출되어 의정원 회의에 참석한 것이다.

좌익진영이 임시정부에 참여한 것을 계기로 하여 헌법 개정이 추진되었다. 1942년 10월에 개최된 제34차 임시의정원 회의에서 좌익진영의 참여에 따른 헌법 개정이 논의된 것이다. 그리고 제34차 의정원 회의에서 臨時約憲修改委員會를 구성하기로 하였다. 약헌수개위원회는 趙素昻 · 趙琬九 · 車利錫 · 趙擎韓 · 崔錫淳 · 金尙德 · 申榮三 · 朴健雄 · 柳子明 등 9명의 위원으로 구성되었고, 이들에 의해 헌법 개정안이 마련되었다. 임시약헌수개위원회는 제34차 의정원 회의가 폐회된 후부터 활동을 시작하였다. 1942년 11월 27일 첫 회의를 가진 이래 1943년 6월 18일까지 모두 22차례에 걸쳐 회의를 갖고 헌법 개정안을 마련하였다.

그러나 개헌안은 쉽게 마련되지 못하였다. 국무위원의 수를 둘러싸고 좌우익 진영이 대립한 것이다. 좌익진영에서는 임시정부 참여 대가로 야당측에 일정한 국무위원을 할당해 줄 것을 요구하였고, 기존에 임시정부를 유지 운영해 왔던 한국독립당인 여당측에서는 가급적 그것을 제한하려고 한 것이다. 양측 사이에 주장과 대립은 지속되었다. 1943년 10월에 제35차 임시의정원 회의가 소집되어 이 문제가 집중적으로 논의되었지만, 결말을 보지 못하였다. 양측의 대립이 격렬해진 가운데 제35차 정기의회의 회기가 끝났다. 헌법개정안은 정기의회가 끝난 후, 양측의 막후 협상을 통해 합의를 이루었다. 그리고 1944년 4월 20일 임시의회를 소집, 양측이 합의한 개헌안을 상정하여 통과시켰다. 의정원 회의를 통과한 개정안은 1944년 4월 22일 ≪大韓民國臨時憲章≫이란 이름으로 공포되었다.

5차 개헌인 ≪대한민국임시헌장≫은 前文과 62개조로 구성되었다. 임시정부가 제정 공포한 6차례의 헌법 중 가장 방대한 내용을 담고 있는 헌법이다. 헌법 전문에는 임시정부는 3 · 1운동을 계승하여 건립되었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밝혔다. 이 임시헌장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좌우익 세력이 합의하여 만든 헌법이라는 점이고, 부주석제를 신설하였다는 점이다. 부주석제를 신설한 것은 좌익진영의 임시정부 참여에 따른 정치적 배려에서 나온 것이고, 조선민족혁명당의 金奎植이 부주석에 선임되었다.

이와 더불어 5차 개헌이 갖는 중요한 의미는 정치적 이념과 목표를 달리하고 있던 좌우익 독립운동 세력이 공동의 이념과 목표를 설정하였다는 점이다. 이것은 중국관내 좌우익 진영이 임시정부로 세력을 통일하고, 공동한 독립운동의 이념과 목표에 합의를 이룬 상태로 해방을 맞았다는 의미도 있다. 그리고 이 헌법은 일제의 패망이 예견되는 상황에서 광복후 이떠한 민족국가를 건설할 것이냐 하는 민족국가 건설의 대강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도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1919년 4월 11일 ≪대한민국임시헌장≫이 제정 공포된 이래, 1944년 4월 22일 제5차 개헌으로 ≪대한민국임시헌장≫이 공포되기까지, 임시정부 헌법의 변천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명칭공포일개헌차수구성
대한민국임시헌장1919.  4. 11 전문,  10조
대한민국임시헌법1919.  9. 111차 개헌전문, 8장 58조
대한민국임시헌법1925.  4.  72차 개헌    6장 35조
대한민국임시약헌1927.  4. 113차 개헌    5장 50조
대한민국임시약헌1940. 10.  94차 개헌    5장 42조
대한민국임시헌장1944.  4. 225차 개헌전문, 7장 62조

Ⅱ. 大韓民國臨時政府公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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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韓民國臨時政府公報≫(이하 ≪공보≫로 약칭)는 임시정부에서 발행한 일종의 官報이다. 관보는 정부의 소식을 국민들에게 알리는 공식적인 기관지로서, 헌법과 법령의 공포 · 예산 · 조약 · 인사 · 기타 공무에 관한 사항을 수록하고 있다. 임시정부의 ≪공보≫도 이와 같은 성격이다. 임시정부에서 제정 공포한 헌법과 각종 법령, 직원의 인사, 국무회의 기사 등 정부의 행정 및 활동과 관련한 내용들이 중심을 이루고 있다.

≪공보≫는 임시정부에서 공식적으로 발행한 간행물이다. 임시정부에서 ≪공보≫를 발행하기 시작한 것은 1919년 9월 3일 제1호를 발간하면서부터였다. 이 시기는 3 · 1운동 직후 노령 · 상해 · 국내에서 수립된 세 임시정부가 하나로 통합을 이루고 정부로서의 조직과 체제를 갖춘 때였다. 통합정부를 구성하면서, 임시정부가 공보를 발행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후 ≪공보≫는 1944년 12월까지 발행된 것으로 확인된다.

≪공보≫는 임시정부에서 발행한 대표적인 간행물 중의 하나이다. 임시정부의 조직과 활동에 대한 전반적인 기록을 수록하고 있는 것이 ≪공보≫이고, 임시정부의 실상을 이해하고 연구하는 데 가장 기초적인 사료가 ≪공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임시정부의 문서가 망실되어 전해지고 있지 않듯이, ≪공보≫도 온전하게 남아 있지 않다.

≪공보≫는 임시정부의 대표적인 간행물이자 중요한 사료가 되지만, 그동안 이를 정리하려는 노력이 별달리 기울여지지 않았다. 2004년에 들어와서야 ≪공보≫를 수집 정리하였다.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에서 그동안 산재되어 있던 ≪공보≫를 수집 정리하여 자료총서 제19집으로 『대한민국임시정부공보』를 펴낸 것이다. 이는 처음으로 ≪공보≫를 수집하여 발행하였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가지고 있지만, 결호도 적지 않다. 호외를 포함하여 모두 67개호를 찾아 수록하였다. 그렇지만 1944년 12월 20일자로 제83호까지 발행된 것이 확인되고, 이외에 호외도 적지 않게 발행되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누락된 것이 적지 않음을 알 수 있다.

본 자료집 편찬을 추진하면서 ≪공보≫에 대한 대규모 수집 작업을 벌였다. 독립기념관에서 펴낸 『대한민국임시정부공보』를 근간으로 삼고, 여기에서 누락된 것을 새로 찾는 데 중점을 두었다. 그 작업은 우선 기존에 발간된 독립운동사 관련 자료집들에 수록되어 있는 ≪공보≫를 찾아 정리하였다. 국사편찬위원회에서 간행한 『韓國獨立運動史』 資料 중 臨政篇,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의 『독립운동사자료집』, 국회도서관의 『韓國民族運動史料』, 국가보훈처의 『海外의 韓國民族運動史料』, 일본외무성 외교사료관과 金正明의 『朝鮮獨立運動』 · 『思想情勢視察報告集』을 비롯한 각종 일제정보자료 등, 그동안 발간된 많은 독립운동사 관련 자료집들이 그 대상이었다.

임시정부 관련 인물들의 문서나 전집 속에 보관 수록되어 있는 것들도 찾았다. 임시정부 외무부장 趙素昻이 가지고 들어온 문서를 영인한 『韓國獨立運動史資料集』 趙素昻篇(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7), 임시정부 대통령 李承晩이 소장하고 있던 ‘이화장문서’를 정리하여 출판한 『雩南李承晩文書』(연세대 현대한국학연구소, 1998), 임시정부 주석 金九의 관련 자료를 집대성한 『白凡金九全集』(백범김구선생기념사업협회, 1999), 수립 초기 내무총장 겸 국무총리 대리로 임시정부의 기반을 마련한 安昌浩 관련 자료인 『島山安昌浩全集』(도산안창호선생기념사업회, 2000) 등에 ≪공보≫가 수록되어 있다.

또 당시 발행된 신문들도 조사하였다. 상해에서 발행된 ≪獨立新聞≫과 미주에서 발행된 ≪新韓民報≫등이 그것이다. ≪독립신문≫은 임시정부의 기관지나 다름없던 것으로, 보도기사 중 ≪공보≫가 수록되어 있었다. 그리고 美洲 大韓人國民會의 기관지인 ≪신한민보≫는 중국에서 보내 온 ≪공보≫를 그대로 전재하거나 일부 내용을 보도하기도 하였다.

이렇듯 ≪공보≫를 수집하는 과정에서 커다란 성과를 거두기도 하였다. 김자동 선생이 그동안 보관해 오던 ≪공보≫를 기증해 온 것이다. 김자동은 東農 金嘉鎭의 손자로 그의 부친 金毅漢과 모친 鄭靖和가 모두 임시정부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집안이다. 이들은 해방 후 중국에서 환국할 때 임시정부와 한국독립당과 관련한 문서들을 가지고 들어왔고, 그동안 보관해 오던 문서들을 모두 국사편찬위원회에 기증하였다. 기증한 문서 중 22개호에 달하는 ≪공보≫가 포함되어 있었던 것이다. 또 도산안창호선생기념사업회에서도 ≪공보≫를 발굴하였다. 최근 미국에서 대한인국민회 자료를 수집하였는 데, 대한인국민회 자료 중에도 8개호의 ≪공보≫가 들어 있었던 것이다. 이들은 기존에 발간된 자료집에 들어 있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 지금까지 알려져 있지 않았던 새로운 ≪공보≫였다.

이로써 본 자료집 편찬을 추진하면서, 기존에 조사 정리된 것 이외에도 처음으로 알려지는 새로운 ≪공보≫들을 수집하게 되었다. ≪공보≫는 1919년 9월 3일 제1호가 발행된 이래 1944년 12월 20일 제83호까지 발행된 사실이 알려져 있다. 이 중 지금까지 수집한 것은 일련 번호로 발행된 83호 중 57개 호와 호외로 발행된 19개호 등, 모두 76개호이다. 현재까지 수집한 ≪공보≫의 현황과 출처, 발행기관, 인쇄형태를 표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번호호수발행일소장처발행기관인쇄형태
1제1호1919. 9. 3이승만문서총무국필사
2제2호1919. 9. 5이승만문서총무국필사
3제3호1919. 9. 10이승만문서총무국필사
4호외1919. 9. 11이승만문서총무국필사
5호외1919. 9. 11이승만문서총무국필사
6호외1919. 11. 5이승만문서국무원필사
7제6호1919. 11. 21이승만문서국무원필사
8제7호1919. 11. 17이승만문서국무원필사
9제10호1920. 1. 20이승만문서서무국필사
10제11호1920. 1. 26이승만문서서무국활자
11제12호1920. 2. 12이승만문서서무국활자
12제13호1920. 3. 24이승만문서서무국활자
13호외1920. 3. 24이승만문서서무국활자
14제14호1920. 4. 1이승만문서서무국활자
15제15호1920. 4. 7이승만문서서무국활자
16제17호1920. 5. 28신한민보서무국-
17제19호1920. 11. 25신한민보서무국-
18호외1921. 1. 13이승만문서서무국등사

번호호수발행일소장처발행기관인쇄형태
19호외1921. 2. 7신한민보서무국-
20제21호1921. 5 31신한민보서무국-
21제23호일자불명신한민보--
22제24호1921. 6. 22신한민보서무국-
23제28호1921. 7. 20이승만문서국무원필사
24제29호일자불명신한민보--
25제30호일자불명신한민보--
26제31호일자불명신한민보--
27제34호1921. 9. 14이승만문서국무원필사
28호외1921. 9. 20이승만문서국무원필사
29제35호1921. 9. 23이승만문서국무원필사
30제36호1921. 10. 2이승만문서국무원필사
31호외1923. 1. 5이승만문서국무원필사
32제1호1924. 9. 1이승만문서서무국활자
33제40호1924. 12. 27일본외무성서무국활자
34호외1925. 4. 7일본외무성국무원-
35제42호1925. 4. 30도산기념관국무원활자
36호외1925. 5. 18도산기념관-필사
37호외1925. 7. 7국회(중국편)국무원-
38호외1926. 3. 5도산기념관-활자
39제44호1926. 12. 16이승만문서-활자
40제45호1926. 12. 17이승만문서-활자
41제46호1926. 12. 30도산기념관-필사
42제49호1931. 3. 1독립기념관비서국필사
43호외1932. 5. 22이승만문서-필사
44제55호1933. 6. 30국회(중국편)--
45제56호1934. 1. 20국회(중국편)비서국-
46제57호1934. 4. 15도산기념관비서국-
47제58호1934. 9. 15국회(중국편)비서국-
48제59호1935. 4. 8이승만문서비서국활자
49제60호1935. 11. 25도산기념관비서국활자
50제61호1936. 11. 27도산기념관비서국활자

번호호수발행일소장처발행기관인쇄형태
51제62호1937. 7. 16백범전집비서국-
52제63호1937. 10. 25국편(김자동 기증)비서국활자
53호외1938. 3. 20독립기념관비서국활자
54제64호1939. 9. 30국편(김자동 기증)비서국필사
55제65호1940. 2. 1국편(김자동 기증)비서국활자
56호외1940. 3. 14국편(김자동 기증)비서국필사
57호외1940. 8. 15국편(김자동 기증)비서국필사
58호외1940. 10. 9국편(김자동 기증)비서처필사
59제67호1940. 10. 15국편(자료 3)비서처-
60제69호1941. 2. 1국편(김자동 기증)비서처필사
61제70호1941. 6. 4국편(김자동 기증)비서처필사
62제71호1941. 10. 7국편(김자동 기증)비서처필사
63제72호1941. 10. 17국편(김자동 기증)비서처필사
64제72호1941. 12. 8국편(김자동 기증)비서처활자
65제74호1942. 2. 10국편(김자동 기증)비서처필사
66호외1942. 2. 25국편(김자동 기증)비서처필사
67제75호1942. 8. 20국편(김자동 기증)비서처활자
68제76호1942. 11. 30국편(김자동 기증)비서처필사
69제77호1943. 4. 15국편(김자동 기증)비서처필사
70제78호1943. 8. 4국편(김자동 기증)비서처필사
71제79호1943. 10. 8국편(김자동 기증)비서처필사
72호외1943. 12. 2조소앙문서비서처필사
73제80호1944. 4. 15국편(김자동 기증)비서처필사
74제81호1944. 6. 6국편(김자동 기증)비서처필사
75제82호1944. 9. 10국편(김자동 기증)비서처필사
76제83호1944. 12. 20국편(김자동 기증)비서처필사

자료:소장처에서 ‘국편(자료2)’는 『韓國獨立運動史 資料2』(臨政篇Ⅱ), 국사편찬위원회, 1971;‘국편(자료3)’은 『韓國獨立運動史 資料3』(臨政篇Ⅲ), 국사편찬위원회, 1973;‘국편(김자동 기증)’은 국사편찬위원회에 김자동선생이 기증한 자료:‘국회(중국편)’은 『韓國民族運動史料』(中國篇), 국회도서관, 1976; ‘조소앙문서’는 『韓國獨立運動史資料集』 -趙素昻篇(三)-, 韓國精神文化硏究院, 1997;‘이승만문서’는 『雩南李承晩文書 - 東文篇』 第八卷, 中央日報社 · 延世大學校 現代韓國學硏究所, 1998;‘백범전집’은 『白凡金九全集』 第四券, 대한매일신보사, 1999;‘일본외무성’은 일본 외무성 외교사료관 소장 마이크로필름 복사분(국사편찬위원회 소장);‘도산기념관’, ‘독립기념관’은 각각 도산안창호선생기념사업회와 독립기념관 소장 자료를 나타냄.

위의 표에 나타난 바와 같이 호외를 포함하여 모두 76개호의 ≪공보≫가 조사 수집되었고, 이를 본 자료집에 수록하였다. 수집한 ≪공보≫는 대부분 원본으로, 원본은 모두 영인하였다. ≪신한민보≫에 게재되어 있는 것은 ≪공보≫를 활자화하여 보도한 것이고, 일제의 정보자료에 들어 있는 것은 일제 정보기관이 ≪공보≫의 내용을 일문으로 번역하여 보고한 것을 다시 한국어로 번역하여 수록한 것이다.

이번 임시정부자료집 편찬과정에서 많은 ≪공보≫를 수집하는 성과가 있었지만, 아직도 누락된 것이 적지 않다. 일련 번호로 간행된 것 가운데 제4 · 5 · 8 · 9 · 16 · 18 · 20 · 22 · 25 · 26 · 27 · 32 · 33 · 37 · 38 · 39 · 41 · 43 · 47 · 48 · 50 · 51 · 52 · 53 · 54 · 66 · 68 · 73호 등 28개호는 아직도 찾지 못한 채로 있다. 그리고 호외의 경우는 발간 사실 자체를 정확히 알 수 없어, 얼마가 누락되었는지 확인할 방법이 없다.

수록한 ≪공보≫에는 간행 일자의 순서가 바뀌거나 호수가 중복된 경우도 있다. 제6호의 발행일자가 1919년 11월 20일인데, 제7호는 1919년 11월 17일로 되어 있다. 그리고 제1호는 1919년 9월 3일 발행되었는데, 1924년 9월 1일에 발행된 것이 제1호로 되어 있기도 하다. 또 제72호는 두 번 발행되었다. 1941년 10월 7일과 1941년 12월 8일에 발행된 것이 모두 72호로 되어 있다. 아마도 이는 ≪공보≫ 발행과정에서 생겨난 실수인 것으로 보인다.

임시정부는 수립과 더불어 ≪공보≫의 발행을 주요 업무의 하나로 설정하였다. 임시정부에서는 수립 직후인 1919년 4월 25일 정부의 부서와 각 부서가 담당할 업무를 규정한 「大韓民國臨時政府章程」을 제정 발표하였는데, 여기에 ≪공보≫의 발행을 주요한 업무의 하나로 규정해 놓은 것이다.

≪공보≫의 발행은 국무원에서 담당하였다. 「대한민국임시정부장정」에 의하면, 국무원에는 總務局과 銓稽局 등 2개의 부서를 둔다고 하였고, 총무국이 담당할 사무 중 하나로 “법률 명령의 발포와 官報에 관한 사항”을 규정하고 있다. 국무원의 총무국으로 하여금 정부의 관보를 발행하도록 한 것이다.

이후 국무원에서 ≪공보≫의 발행을 담당하는 것은 변함이 없었지만, 그 부서는 바뀌었다. 국무원의 부서가 바뀐 데 따른 것이었다. 1919년 9월 세 곳의 임시정부가 통합을 이룬 후, 정부 부서에 대한 개편이 있었다. 부서에 대한 개편은 1919년 11월 5일 「大韓民國臨時官制」로 공포되었다. 이에 의하면 국무원에는 庶務局 · 法制局 · 銓稽局을 둔다고 하였다. 종전의 2국에서 3국으로 부서가 증설된 것이다. 그리고 서무국이 담당할 사무로 “印刷及 公報에 關한 事項”이라고 하여, 서무국에서 ≪공보≫를 발행하도록 하였다.

≪공보≫를 발행하는 부서는 이후에도 여러 차례 바뀌었다. 1921년 7월부터는 國務院의 이름으로, 그리고 1926년부터는 임시정부 이름으로 발행한 것이다. 이 시기는 임시정부가 정부로서의 조직과 체제를 제대로 유지 운영하지 못하고 있던 때였다. 그러다 1934년부터는 秘書局의 이름으로 발행되었다. 여기서 말하는 비서국은 국무회의 비서국인 것으로 생각된다. 임시정부는 1927년 4월 개헌을 단행하였고, 국무위원으로 조직한 국무회의로 하여금 행정을 주관하도록 하였다. 그 소속 부서가 나타나 있지 않지만, 국무회의에 비서국이 있었던 것 같다.

1940년 10월 9일부터는 秘書處에서 ≪공보≫를 발행하였다. 비서처는 국무위원회의 부서였다. 1940년 10월 9일 主席制를 핵심으로 한 헌법을 개정하여 공포하였고, 이에 의해 주석과 국무위원을 구성원으로 하는 국무위원회를 조직하였다. 바로 이 국무위원회의 비서처에서 ≪공보≫를 발행한 것이다.

≪공보≫의 발행은 정기적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다. 중요한 사항들이 있을 때마다 발행하는, 즉 부정기적으로 발행되었다. 특히 헌법이나 법령의 개정 및 공포, 대통령의 면직, 국무령 선거, 안창호 서거 등 특별하고 긴급한 일이 있을 때에는 호외를 발행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임시정부가 처한 형편에 따라 발행되지 못한 경우도 있다. 1927년부터 1930년까지는 발행되지 않았던 것이 그렇다. 이 시기는 임시정부가 정부의 조직을 유지 운영할 수 없을 정도로 극심한 침체상태에 빠져 있었다.

≪공보≫는 여러 형태로 인쇄되었다. 직접 필기구로 쓴 필사본과 등사본, 활자로 인쇄한 활판본 등이다. 인쇄방법이 다양했던 것은 임시정부가 처한 상황 때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재정문제도 작용하였을 것이고, 또 활자를 마련하지 못한 것도 이유가 되었다고 생각된다. 초창기에는 주로 필사본으로, 1920년대에는 활판본으로, 1940년대에는 거의 필사본으로 발행되었다. 임시정부가 상해에 있을 시기에는 ≪독립신문≫을 간행할 정도로 활자가 구비되어 있었다. 그러나 1940년대 중경에서는 활자를 마련하기 어려웠던 사정이 있었을 것이다.

≪공보≫의 발행 부수는 일정하지 않았던 것 같다. ≪공보≫ 발행의 실태를 알 수 있는 자료는 국무원이 작성한 「大韓民國元年二年兩年度 公報에 關한 件」이란 문건이 유일하다. 이에 의하면 17호와 18호는 각 2천부, 19호는 1,500부를 발행한 것으로 나타나 있다. 일정한 부수는 아니었지만, 적지 않은 부수가 발행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공보≫에는 임시정부에서 공포하는 공식적인 공문들이 수록되었다. 임시정부는 1919년 12월 23일 공포한 「大韓民國公文式令」을 통해 ≪공보≫에 수록할 공문의 범위를 규정하였다. 이에 의하면 임시대통령이 발하는 法律 · 敎令 · 條約 · 豫算을 비롯하여 국무총리가 발하는 院令, 행정 각부의 총장이 발하는 部令, 대통령이나 각 관청에서 일반 국민에게 알리는 布告 등은 정부공보로써 공포한다고 한 것이다. 이외에 官吏의 任命 및 免任, 대통령이 관리에게 발하는 訓令, 각 관청에서 발하는 處分令, 인민이 대통령이나 관청에게 진정하는 呈文, 呈文에 대하여 대답하는 批文 등도 ≪공보≫에 수록한다고 하였다.

≪공보≫의 구성은 대체로 敍任 及 辭令, 重要事項, 特別事項, 重要通信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초창기에는 비교적 이러한 체제가 유지되었다. 그러나 임시정부의 활동이 활발해지면서 法律公布, 命令, 國務會議 紀事, 臨時議政院 紀事, 布告 등으로 다양해졌다.

‘서임 및 사령’은 국무원이나 각부의 총장을 비롯하여 차장과 정부 각 부서 직원들에 대한 인사발령 사항을 수록한 것이다. 때로는 國務員의 選任及 解任 · 職員의 任免 · 職員 選任의 件 등으로 표기되기도 하였다. 이는 임시정부에서 활동한 인물들에 대한 조사나 그들의 활동을 추적하는데 기초적인 자료가 된다.

‘중요사항’에는 국무회의에서 논의되고 의결된 사항을 수록하였고, 國務會議 事項 · 國務會議 紀事 · 國務會議 紀事摘要 · 國務委員會 重要紀事 등으로 표기되기도 하였다. 국무회의는 국무위원들이 참여하여 정부의 조직이나 활동에 대해 심의 의결하는 기구로, 국무회의 기록은 임시정부를 연구하고 이해하는 데 더없이 중요한 자료가 아닐 수 없다. 국무회의 기록이 별도로 정리되었는지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 ≪공보≫에 수록된 국무회의 기사가 유일한 것이 아닌가 한다.

‘특별사항’에는 임시의정원과 관련된 내용들을 수록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의정원의 인사관련 사항을 비롯하여 회의 공고 및 회의 내용 등을 수록하고 있다. 1940년대 중경시기에는 임시의정원이 활성화 되면서 별도로 臨時議政院 紀事라는 제목을 붙였고, 이를 통해 의정원 회의의 경과와 회의 내용을 싣기도 하였다. 이는 현재 남아 있는 임시의정원문서와 더불어 임시의정원을 연구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되고, 또 의정원 문서에 없는 내용도 적지 않아 그것을 보완할 수도 있다.

‘중요통신’은 국내외 각지에서 활동하는 인사 및 단체들과의 통신을 수록하였다. 미주지역에서 활동하는 李承晩과 대한인국민회가 임시정부에 활동상을 보고하는 통신을 비롯하여, 이승만 대통령이 국무총리 李東輝에게 보낸 통신을 수록한 것이 그러한 예이다. 그리고 국내에서 임시정부 성립 축하식을 거행하였다거나 大韓民國靑年外交團이 그 활동과 국내의 사정을 보고하는 통신, 연해주에 파견한 특파원들이 보내오는 통신, 북간도에서 보내오는 통신, ‘論敦駐箚委員黃己煥의 報告’ 등과 같이 유럽지역에서 보내오는 보고 등을 수록하였다. ‘중요통신’은 초창기에 한정되었지만, 임시정부가 국내외 각 지역과 어떤 관련 및 연락을 맺고 있었는지를 알려준다.

‘법률공포’에는 임시정부가 제정 공포하는 헌법과 각종 법령이 수록되었다. 임시정부는 1919년 4월 11일 大韓民國臨時憲章을 제정 공포한 이래 5차례에 걸쳐 헌법을 개정하였고, 그것을 ≪공보≫에 수록하였다. 1919년 9월 11일 개정 공포한 大韓民國臨時憲法, 1925년 4월 7일 개정공포한 大韓民國臨時憲法, 1940년 10월 9일 개정 공포한 大韓民國臨時約憲이 호외로 실려 있다.

1927년 4월 11일과 1944년 4월 22일에도 헌법이 개정 공포되었지만, 이를 수록한 ≪공보≫는 전해지지 않는다. 이외에 臨時大統領令과 敎令을 비롯하여 국무원에서 발하는 國務院令, 각부에서 발하는 部令, 規程, 條例 등이 수록되어 있다. 그리고 11월 17일을 殉國先烈紀念日로 정한 것, 國旗樣式一致案을 제정한 것 등, 임시정부에서 결정한 내용들이 수록되었다.

‘포고’에는 임시정부에서 발표한 선포문 · 포고문을 수록하였다. 선포문과 포고문은 임시정부 명의나 국무위원의 연명으로, 그리고 ‘국무원 포고’, ‘재무부 포고’와 같이 각부 명의로 발표된 것들이 있다. 이외에 ‘臨時政府諭告’ ‘國內外 各團體及 民衆全體에 告함’ ‘告國內外同胞書’ ‘告在中國淪陷區僑胞書’ 등, 임시정부가 국민들에게 알리는 각종 문건들을 수록하였다.

임시정부의 활동이나 행사와 관련된 내용들도 수록하였다. 임시정부가 중경에서 군사특판단을 구성하여 서안으로 파견한 내용을 ‘軍事特派員 派遣’, 3 · 1절 행사에 대해 ‘3 · 1節紀念籌備會經過’ 등으로 수록한 것이 그러한 예이다. 그리고 카이로회의에서 한국독립을 보장하였다는 소식이 전해졌을 때 ‘3强會議의 韓國獨立保障’이라 한 것과 같이 독립운동과 관련한 내용들을 수록하기도 하였다.

본 자료집에 수록한 헌법과 공보는 임시정부의 가장 기본적인 자료가 된다. 그렇지만 광복 60주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임시정부의 헌법과 공보가 온전하게 전해지지 않고 있다. 비록 원본을 모두 갖추지는 못하였지만, 이 자료집을 발간하면서 처음으로 임시정부의 헌법 원문이 수집 정리되었다. 그리고 83호 중 28개호가 결호로 남아 있긴 하지만, ≪공보≫ 역시 지금까지 가장 많은 분량이 수집 정리되었다. 앞으로 누락된 헌법 원본과 결호로 남아 있는 ≪공보≫를 더 찾아야 하는 과제가 남아 있다.

한시준(단국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