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제

해 제

1. 개 관

이 자료집은 중경시절 대한민국임시정부 임시의정원 문서들을 수록하고 있다. 시기적으로는 1940년 9월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중국 사천성 기강에서 중경으로 이전한 이래 1945년 광복 직후 환국 이전까지를 포괄하고 있으며, 내용상으로는 속기록 · 회의록 · 의사록 등 임시의정원 회의록류들을 수록하고 있다. 이 때는 임시정부가 오랜 이동시기를 끝내고 중경에 안착한 이래 최후의 강력한 항일투쟁을 전개해 광복을 맞을 때까지의 시기를 포괄한다. 임시정부가 3 · 1운동 이래 가장 왕성한 활동력을 보여주던 시기였다.

본래 이 자료집은 중경시대 임시의정원 기록들을 한 권으로 모아 편집할 계획이었다. 그런데 편집과정에서 원문의 영인분량이 많아져, 한 권으로 담기가 어려웠다. 이런 연유로 중경시대 임시의정원 기록들은 제32회 의회(1940년)부터 제35회 의회(1943년)까지를 『임시의정원문서Ⅱ』 한 권으로, 제36회 의회(1944년)부터 제39회 의회(1945년)까지를 『임시의정원문서Ⅲ』 한 권으로 분책했다. 이는 편집상의 편의를 위한 것으로, 내용상의 구분은 아니다. 이에 따라 해설 · 해제 역시 제35회 의회를 기점으로 나누었다. 개관은 두 권 모두에 해당하는 내용이므로 함께 수록하였다.

◆ 자료의 출처

수록된 자료들의 대부분은 1931년 이래 두 차례에 걸쳐 임시의정원 의장을 지낸 晩湖 洪震선생이 만난을 무릅쓰고 국내로 가져온 것들이다. 원래 트렁크 수 개 분량이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46년 홍진선생의 사거 이후 유족들이 소중히 보존했으나, 1950년 6 · 25전쟁으로 대부분 逸失되었다. 그후 1968년 국사편찬위원회가 선생의 영손 홍석주 건국대학교 교수로부터 남은 자료들을 차람하여 마이크로필름으로 촬영하여 보관하다가 1970년 ≪한국독립운동사(자료1 · 임정편I)≫로 간행함으로써 세상에 알려졌다. 임시의정원의 활동을 보여주는 1차 사료로서의 가치를 담은 이 자료집은 임시정부사는 물론 독립운동사 연구의 기초사료로 활용되었으며, 그 중요성에 따라 1983년 재차 복간되기도 하였다. 국사편찬위원회가 출간한 내용은 임시의정원 회의록류와 기타 공문서류로 원문 총 2천여 쪽에 달했다. 국사편찬위원회 간행본의 ≪해설≫에 따르면 원본은 모두 解本되어 낱장으로 남았고, 결본과 중복된 것이 있어 완전정리가 어려웠다고 한다[이현종, 1983 ≪해설≫ ≪한국독립운동사(자료1 · 임정편I)≫ 국사편찬위원회(이하 ≪국편≫으로 줄임) 659쪽]. 원본의 형태는 필사 및 등사본이 주종을 이루고 있으며, 이를 촬영한 마이크로필름이 국사편찬위원회와 국회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원문은 홍석주교수의 기증으로 국회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한편 동일한 홍진 문서철에 기초해서 국회도서관이 1974년에 ≪大韓民國臨時政府議政院文書≫를 간행한 바 있다. 약간의 출입과 순서의 차이는 있으나 국사편찬위원회 간행본과 내용상 큰 차이는 없다. 1970년 국사편찬위원회의 간행본과 1974년 국회도서관 간행본의 가장 큰 차이는 형식 · 체제면에서 국사편찬위원회가 활자조판본을 낸 반면 국회도서관은 필사정서본을 냈다는 점이다. 내용면에서 국사편찬위원회본에는 1945년 8월 광복직후 개최된 중경시대 마지막 의정원회의였던 제39회 의정원회의의 의회속기록이 미수록된 반면 국회도서관본에는 해당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회의록의 종류와 특징

이 자료집에 수록된 것은 임시의정원 제32회 의회(1940)부터 제39회 의회(1945)까지이다. 이 가운데 회의록 등 관련 문건이 일실 · 결락된 것은 제32회 의회(1940년) 분이다. 32회 의회경과에 대해서는 2건의 임시정부 관보가 남아있어 그 대강을 알 수 있다. 그 외 현재 남아있는 의정원 회의관련 기록은 議事錄, 速記錄, 會議錄 등이다. 의정원 회의와 관련된 여러 기록들이 다양한 기록의 형태로 남아있다. 이를 표로 작성하면 다음과 같다.

가장 많은 기록이 남아있는 회차는 제38회 의정원회의(1945년)로 의회속기록과 의회회의록이 남아있다. 현전하는 임시의정원 회기 가운데 가장 많은 분량이 남아있으며, 전체 의정원 문서철 가운데 1/5의 비중을 차지할 정도로 상세하다. 그 다음은 제34회 의회로 의회속기록과 院務보고서가 남아있어 상세한 진행경과와 주요 쟁점들을 파악할 수 있다.

≪표 1≫ 1941~45년간 임시의정원 회의관련 기록현황

회차회기회의록류기타
의회속기록의회회의록의회의사록특위회의록
32회1940.10. 1~10. 9?××× 公報
33회1941.10.15~10.17××  
34회1942.10.25~11.25××約憲修改委院務보고서ㆍ
≪우리通訊≫
35회1943.10.9~1944.9.15×× 院務보고서
36회1944. 4.20~ 4.24××建國綱領修改委 
37회1945. 2.28××  
38회1945. 4.11~ 5. 8×  
39회1945. 8.17~ 8.22×  

임시의정원이 어떤 문서들을 생산 · 보존하였는지에 대한 단서는 ≪대한민국21년 현재 임시의정원 서류목록≫을 통해 알 수 있다(≪국편≫ 194쪽). 1932년 윤봉길의사의 상해의거 이후 임시정부청사가 일제 관헌의 습격을 받아 파괴되고, 수많은 내부 문건이 피탈된 이후 오랜 이동시기를 겪었기 때문에 1939년에 작성된 이 목록은 ‘의정원’ 내부에 보관된 최대의 기록으로 추정할 수 있다.

먼저 임시의정원 회의와 관련해서 紀事錄 草案, 紀事錄, 速記錄 등이 작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기사록 초안은 手記로 작성한 후, 이를 바탕으로 기사록을 인쇄해서 배포했음을 알 수 있다. 기사록의 경우 이 목록에는 제7회(1920년)분이 올라 있고, 한국연구원에 1919년도분 기사록인 ≪大韓民國臨時議政院紀事錄(第一回集~第六回集)≫(1919) 1책이 실물로 소장되어 있으므로, 최소한 1920년까지 기사록이 작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가장 기초적인 자료인 속기록의 경우에는 1919년에 해당하는 1회~6회분이 나타나지 않는다. 1932년 상해 윤봉길의거 이후 일본영사관 경찰이 압수한 대한민국임시정부 서류목록에도 해당연도의 속기록이 드러나지 않는 것으로 미루어 속기록은 1920년 7회부터 작성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1920년 7회 회의에서는 기사록과 속기록이 병행되었으나 이후로는 속기록만 작성된 것으로 미루어 1921년 제8회 임시의정원 회의 이후 속기록이 기사록을 대체한 것으로 판단할 수 있다. 내용상 비교를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기사록은 실질적으로 속기록의 내용을 담고 있었다. 기사록의 배포범위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임시의정원 의원 및 정부 관계자 및 상해 독립운동진영에 배포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독립운동 총본부의 내밀한 기록의 출간은 임시의정원의 비밀유지에 난관으로 작용했을 가능성이 있으며, 필사

≪표 2≫ 대한민국21년(1939년) 현재 임시의정원 서류목록

類編名目年度部數備考
議政院紀事錄草案(1~6회)원년도(1919)2此는 인쇄하였고 그 원고가 卽 此임
議會史(6회)원년도(1919)7등사
議政院紀事錄(7회)2년도(1920)2등사
의정원 속기록(7회)2년도(1920)상하 각2등사
의정원 속기록(8회)3년도(1921)3등사
의정원 속기록(9회)3년도(1921)1등사
의정원 속기록(10회)4년도(1922)1등사
의정원 속기록6년도ㆍ7년도(1924~25)6등사
임시정부 公報元年度起1 
사무일지원년~6년도(1919~24)5 
서무에 관한 서류원년~3년도(1919~21)2 
기밀에 관한 서류원년~7년도(1919~25)3 
회계에 관한 서류원년~2ㆍ3년도(1919~21)17그중 일부는 6년도분
규례에 관한 서류원년ㆍ2년도(1919~20)3 
조사에 관한 서류2년도(1920)5 
可決議案에 관한 서류원년~4년도(1919~22)3 
否決議案에 관한 서류6년도(1924)1 
議員進退에 관한 서류원년~6년도(1919~24)3 
의정원관계 서류원년~7년도(1919~25)5 
議案集2년도(1920)2 
文書軸4년도(1922)2 
職員所關文簿원년~6년도(1919~24)12 
文書受發簿원년~6년도(1919~24)9 
在籍議員住所3년~6년도(1921~24)2 
의원주소록3년~6년도(1921~24)2 
의원출석부원년~6년도(1919~24)4 
방청권 청구 급 교부명부원년~7년도(1919~25)7 
합계 114 

초안을 만든 후 인쇄로 옮기는 절차상의 복잡함과 유지비용의 문제도 적지 않게 작용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속기록의 경우 처음 작성된 7회(1920년)부터 11회(1923년)까지의 실물은 현전하지 않는다. 1924년 제12회 의정원회의의 제30~39차, 47~48차 회의의 의회속기록이 홍진문서에 남아있다. 원문에는 ≪30회 의회속기록≫ 등 ‘回’로 기록되어 있으나, 모두 1924년 제12회 의정원회의 제30차 의회속기록이다. 위의 표에서 기록한 ≪의정원 속기록 6년도 · 7년도≫분의 일부인 것으로 보인다.

의회사의 경우 1919년 6회로 되어있으나, 부수가 7부로 되어 있는 것으로 미루어 당해 년도에 개최된 제1회부터 제6회까지의 임시의정원 회의가 정리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후 기록이 없는 것으로 미루어 계속 의회사가 정리되었을 가능성은 적다고 판단된다.

위의 표에서 부수는 중복되는 책의 수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책의 권수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직원소관문서≫나 ≪회계에 관한 서류≫에서 드러나듯이 동일 책의 중복부수가 12부, 17부라고 보기는 어렵기 때문에, 전체 권수가 12책, 17책이라는 의미로 해석된다. 또한 ≪의원주소록≫이나 ≪의원출석부≫처럼 복본을 만들 필요가 없는 서류철이 2부, 4부인 것은 해당 책수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이렇게 판별하면 적어도 1939년 현재 임시의정원이 소장한 관련 서류철은 총114책이며, 해당시기는 1919~24년까지임을 알 수 있다.

위의 목록에서 두드러지는 한 가지 의문은 1925년 13회 의정원 이후 1931년 이전의 기록이 전무하다는 사실이다. 가장 큰 가능성은 1932년 상해 홍구공원 의거 이후 일제의 탄압으로 임시정부가 이동시대에 접어들면서 기록들이 피탈 · 산일 · 망실되었을 가능성이다. 국민대표회의 이후 침체기에 접어든 임정의 내부사정이 작용했을 가능성도 있으나, 속기록 등 기초기록을 만들지 않았을 가능성은 없다. 마지막 가능성은 위의 목록이 초기 임시의정원 관련 기록현황 만을 추려 작성했을 가능성이다. 임시의정원의 기초자료라고 할 수 있는 의회속기록은 이런 연유로 제12회(1925년) 의회속기록 일부, 제34회(1942년) 의회속기록, 제38회(1945년) 의회속기록, 제39회(1945년) 의회속기록 만이 현전하고 있다. 1932년 이전의 기록들은 일제의 탄압을 피해 이동하는 과정에서 산일되었을 가능성이 높은 반면, 그 이후 기록들은 6 · 25전쟁의 와중에서 산일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1932년 일제가 임시정부를 습격해 압수한 ≪압수품목록≫에 따르면 임시의정원 관련기록이 상당량에 달하는 것으로 파악된다. 건수로는 1920년 22건(권), 1921년 2건(권), 1923년 23건(권), 1925년 5건(권), 1926년 5건(권), 1927년 5건(권), 연도미상 12건(권) 등 총 74건(권)이었다. 이중 회의록에 해당하는 것은 의사록 · 속기록 등인데 모두 13권 정도가 확인된다[≪압수품목록≫ ≪朝鮮民族運動年鑑≫(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3 ≪독립운동사자료집 7집 : 임시정부사자료집≫) 1486~1525쪽].

≪표 3≫ 1932년 일제가 압수한 ≪압수품 목록≫ 중 임시의정원 회의록류

연도명칭부수비고
1921년제8회 의회의사록1 
제9회 의회의사록1 
1923년속기록3 
제10회 의회의사록(민국4년분)1 
제11회 의회의사록1 
1925년속기록1 
의회일지1 
1927년제19회 의사록1 
제20회 의사록1 
제21회 의사록1 
연도미상임시정부 속기록1 

이들 의사록, 속기록의 대부분은 1939년 임시의정원이 작성한 목록에 드러나지 않는다.

한편 위의 1939년 의정원 목록에 나타나지는 않지만 현전하는 회의록류로는 ≪의회회의록≫(36회~39회)과 ≪의회기사록≫(32회), ≪의회의사록≫(33회) 등이 있다. ≪의회회의록≫은 간략하게 회의의 진행경과와 주요안건을 소개해 놓은 것으로, ≪의회속기록≫을 모본으로 삼아 축약한 것으로 보인다. ≪의회기사록≫과 ≪의회의사록≫은 ≪의회속기록≫보다는 축약되어 있지만 ≪의회회의록≫보다는 상세하게 의회의 진행경과를 서술해 놓았다. 즉 회의 진행경과의 세부묘사란 측면에서 볼 때 ≪의회속기록≫ → ≪의회기사록≫ · ≪의회의사록≫ → ≪의회회의록≫의 순서로 상세한 기록을 남기고 있다. 관련기록이 남아있지 않은 상태에서 이런 회의록류들이 어떤 기준과 원칙 하에 작성되었고, 어느 시점에서 변화했는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다.

원문의 지질은 미농지와 괘선용지 등이 활용되었으며, 국한문 혼용을 기본으로 했다. 때에 따라서는 8차 헌개기위회회의록의 일부, 약헌개정위원회회의록(제8회 · 9회)의 일부 등에서 드러나듯이 중국어로 표기된 경우도 있다. 원본의 기록방식은 필사본과 등사본이 중심이며 인쇄본도 있다. 필사본의 경우 연필, 모필, 펜 등으로 기록되었다.

◆ 연도별 회의 진행상황

임시의정원 회의를 연도별로 보면 1940~44년까지 모두 1회씩의 정기회의가 개최된 데 반해서, 1945년에는 모두 3차례의 회의가 개최되었다. 즉 해방이 임박하면서 임시의정원 역시 그 활동이 민활해졌음을 알 수 있다. 1945년에 열린 3차례의 회의 중 ≪대독일선전포고≫라는 긴급사항만을 다룬 제37회를 제외하면 제38회 의회와 제39회 의회는 1940년대 중국내 항일독립운동 세력 내부에서 제기된 최후의 항일운동, 민족통일전선 결성, 건국방략 등과 관련해 가장 핵심적인 쟁점을 다루고 있다. 특히 38회 의회는 이 시기 임시정부가 도달한 내부의 통일 · 단결과 외부와의 연대 · 연합의 실상을 보여주고 있다.

◆ 기타 자료

32회 의회(1940년)와 34회 의회(1942년)의 경우 회의록류에 해당하지 않는 자료들이 포함되었다. 32회의 경우 회의록류가 현전하지 않기 때문에, ≪大韓民國臨時政府 公報≫ 2호[≪號外≫(1940. 10.9), ≪제67호≫(1940. 10. 15)]를 수록하였다.

34회 의회의 경우 회기는 1942년 10월 25일부터 11월 25일까지였으나, 현전하는 ≪의회속기록≫은 11월 4일까지를 기록하고 있다. 이후의 의회 진행상황은 중경 민족혁명당이 간행하고, 재미조선민족혁명당이 재간행한 ≪우리通訊≫에 나타나 있다. ≪우리通訊≫은 1942년 10월 민족혁명당이 의회의 진행경과와 주요 의원의 주장 등을 발표하기 위해 우리통신사를 조직하고 발간한 ‘의회경과록’이다. 10월 26일 제1호를 낸 것을 필두로 11월 13일 제13호를 간행했다. 내용구성은 민족혁명당의 노선에 따라 社說 · 短評 · 消息一束 · 會場速寫 등으로 꾸몄는데, 발행소는 중국 사천성 중경시 민족혁명당 주소로 되어 있으며, 발행자는 제8호(1940. 11. 5)부터 周世敏으로 등재되었다. 이중 의회속기록처럼 회의 진행경과를 자세히 기록한 ≪會場速寫≫ 항목이 32회 의회의 전 진행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속기록처럼 速寫했다고는 하나 ≪의회속기록≫에는 미치지 못하며, 정리방법도 세련되지 못했다. 또한 단순히 速記만 한 것이 아니라 민혁당의 입장에서 중간중간 소제목을 달아 민혁당의 당론을 강조하기도 했다. 때문에 이 자료가 민혁당의 입장과 노선에 의해 정리된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하며, 또한 중경판을 미주에서 재간행하는 轉寫과정에서 약간의 출입도 있었을 것으로 예상된다.

의정원 회의록들이 일실된 관계로 이 시기의 상황을 이해하는데는 중국측의 자료가 긴요하다. 특히 秋憲樹교수가 1970년에 간행한 ≪資料韓國獨立運動≫ 1 · 2(연세대학교 출판부, 이하 ≪추헌수≫ 1 · 2로 줄임)는 임시의정원 문서를 이해하는데 큰 도움을 준다.

2. 회별 의정원문서의 특징과 쟁점

▪ 32회 의회(1940년)~35회 의회(1943년)의 특징과 쟁점은 『임시의정원문서Ⅱ』를 참조.

▪ 36회 의회(1944년)

36회 의회는 임시의회로 1944년 4월 20일부터 26일까지 개원하였다(≪국편≫ 436~438쪽). 36회 의회는 오랫동안 논란이 되었던 약헌수개안을 통과시켰다. 임시약헌은 이제 臨時憲章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얻게 되었다. ≪대한민국임시약헌개정안 설명서≫에 의하면 약헌이 헌장으로 바뀐 이유는 約字보다는 章字가 좀더 莊重性이 있기 때문이었다[1944년 4월 20일 통과 · 시행된 臨時憲章의 전문은 ≪大韓民國臨時憲章≫(民國26年) 國會圖書館, 1974 ≪大韓民國臨時政府議政院文書≫ 20쪽에 수록되어 있다]. 또한 새로운 헌장에 의해 유기명투표 방식으로 주석 김구, 부주석 김규식과 국무위원 14인을 선거했다.

한편 36회 의회 뒤에는 ≪建國綱領修改委員會會議錄≫(1~4차)(1944.10.26~12.10)이 첨부되어 있다. 건국강령의 수정 · 개정문제는 이미 임시의정원 35회 의회에서 제기되었고, 1944년 10월부터 시작된 것이었다. 그 핵심은 건국강령이 모든 독립운동세력 및 민족구성원의 일치된 지향을 반영해야 하는데, 임시정부 국무위원회에서 행정부의 권위로 선포됨으로써, 입법부의 입법조치를 거치지 않았다는 비판이었다. 즉 입법부 및 독립운동세력의 중지를 모아야 온전한 건국강령이 될 수 있다는 여론이 제36회 의회 내내 제출되었다. 이 결과 建國綱領修改委員會가 조직되었다. 崔東旿 · 趙素昻 · 柳林 · 姜弘周 · 孫斗煥으로 구성된 건국강령수개위원회는 총 4차에 걸친 회의를 개최했고, 강홍주가 건국강령 기초위원으로 새로운 안을 작성했다. 이후 7차례나 회의를 시도했지만, 회의가 성립조차 되지 않았다[임시의정원 제38회 의회 제12일회의(1945. 4. 28)에서 강홍주 · 박건웅의 발언(≪국편≫ 288~301쪽)]. 현재까지 밝혀진 회의경과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국편≫ 357~360쪽).

≪표 4≫ 建國綱領修改委員會 회의경과

 참석자중요내용
제1차(1944.10.26)최동오, 조소앙, 유림, 강홍주소집(최동오), 기록(강홍주)
제2차(1944.10.28)최동오, 조소앙, 유림, 강홍주修改의 제한성을 둘러싼 논쟁
제3차(1944.11.16)최동오, 조소앙, 유림, 강홍주건국강령ㆍ혁명방략 따로 제정
제4차(1944.12.10)최동오, 유림, 강홍주강홍주를 修改기초위원으로 선임

▪ 37회 의회(1945년)

제37회 의회는 1945년 2월 28일 국무위원회의 요구로 개원한 임시의회였다. 이 의회는 국무위원회에서 제출한 ≪對德宣戰同意案≫을 의결통과시키고 당일로 폐원했다. 내용은 임시정부의 對독일 선전포고였다(≪국편≫ 436~438쪽).

▪ 38회 의회(1945년)

1945년 4월부터 5월까지 개최된 제38회 임시의정원 회의에서는 임정의 통일과 확대 · 개조논의가 첨예화되었다. 쟁점은 ① 독립운동자대표대회(이하 대표대회) 소집, ② 임시의정원 · 임정 확대개조, ③ 임시헌장 修改문제였다. 이 중 가장 큰 쟁점은 독립운동자대표대회의 소집문제였으며, 그 핵심에는 어떻게 임정을 확대 · 개조해서 해외독립운동세력의 총영도기관으로 만들것인가 하는 점이 놓여있었다.

1) 독립운동자대표대회 소집

대표대회의 소집문제가 정확히 언제 공식 발의되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민족혁명당과 신한민주당이 강력히 주장한 대표대회 소집문제는 1943년 이래 논의의 초점이 되고 있었다(정병준, 1999 ≪해방직전 임시정부의 민족통일전선운동≫ ≪대한민국임시정부수립80주년기념논문집(하)≫ 국가보훈처). 독립운동자대표대회 소집안은 제38회 임시의정원 회의에서만 2차례 제출되었다. 첫 번째 안은 신한민주당과 민혁당이 제출한 것이었고, 두 번째 안은 한독당과 민혁당이 제출한 것으로 첫 번째안과 상당히 이질적인 내용을 담고 있었다.

≪표 5≫ 임시의정원 제38회 회의에 제출된 독립운동자대표대회 소집안

 제안일시제안자심사위원심사의견ㆍ결과
1차1945.4.19孫斗煥 외嚴恒燮,廉溫東, 未詳5당회의에서 논의하고 취소
2차1945.5. 7崔錫淳,李海鳴,金若山,廉溫東,安勳,趙時元,楊宇朝朴建雄,趙素昻,嚴恒燮원안대로 통과

첫 번째 대표대회 소집안은 민혁당과 신한민주당에 의해 제6일 회의(1945. 4. 19)에 제출된 것으로 보인다. 현재 첫 번째의 소집안은 원안이 남아있지 않아 정확한 내용을 파악할 수는 없다. 의정원 회의에서의 논의를 토대로 내용을 구성해 보면 ① 대표대회 소집 주체는 임시의정원 의장 · 임정 주석 · 광복군 총사령으로 구성된 주석단, ② 제목은 독립운동자대표대회이지만 내용은 각당대표대회였던 것으로 보인다[제38회 의회 제7일 회의(1945. 4.20)에서 조소앙, 엄항섭, 손두환의 논의내용을 참조(≪국편≫ 247~249쪽). 民主主義民族戰線, 1946 ≪朝鮮解放年報≫ 文又印書館 151쪽].

민혁당의 의도는 대표대회를 소집해 현존하는 의정원 대신 새로운 입법기관을 설립하고, 이 입법기관에서 정부의 각 수장을 선거함으로써 임정을 확대 · 개조한다는 것이었다[≪五黨統一과 改憲≫(1945. 5. 4) ≪추헌수2≫ 82쪽]. 또한 한독당이 지배하는 국무위원회를 불신하고 있던 신한민주당측은 당원인 임시의정원 의장 洪震을 주석단에 포함시켜 대표대회를 추진하려 했다(≪국편≫ 247~249쪽). 가장 문제가 된 부분은 의정원이 과연 대표대회를 논의할 권한을 갖고있는가의 여부와 대표대회의 권한, 소집주체의 문제였다. 그러나 이 안은 5당통일회의에서 논의 중이며, 의정원의 권한이 아니라는 이유로 상정 · 토론된 날인 제8일 회의(1945. 4. 21)에서 한독당원 安勳(趙擎韓)의 동의에 따라 제안자인 孫斗煥에게 반송되었다(≪국편≫ 258쪽).

두 번째 소집안은 한독당과 민혁당의 공동 긴급제안으로 15일 회의(1945. 5. 7)에 제출되었다[≪臨院發第15호(1945. 5. 8)≫ ≪국편≫ 440~441쪽].

주 문:현하 내외정세에 鑑하여 현재 議籍에 망라된 독립운동자대표의 기구보다 실질적으로 명실상부한 각지의 독립운동자대표대회를 정부로 하여금 최속한 기간에 소집하여 독립운동에 관한 중요문제를 결정하여 합법적으로 추진 실현하도록 할 것. 단 독립운동자대표대회에 관한 구성요소 급 범위와 소집정도는 정부에서 결정하여 실시할 것.

이 유:구술 / 1945년 5월 7일

제안자:崔錫淳, 李海鳴, 金若山, 廉溫東, 安勳, 趙時元, 楊宇朝.

이 안건의 심사위원인 박건웅, 조소앙, 엄항섭은 원안 그대로 통과를 주장했다. 두 번째 제안은 임시의정원 · 임정 확대개조안이 한독당 심사위원의 의견대로 부결된 직후에 제출된 것으로, 신한민주당 등의 반발을 무마하기 위한 것이었다. 두 번째 제안에서 가장 크게 문제가 되었던 부분은 소집주체를 누구로 할 것인가 하는 점과 소집기한의 문제, 대회의 권한문제 등 세가지였다. 소집주체와 소집기한, 대회권한을 둘러싼 쟁점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임시의정원 제38회 의회 제7일회의(1945. 4.20), 제8일회의(4. 21), 제15일회의(5. 7) ≪국편≫ 247~249, 258, 312~318쪽].

≪표 6≫ 독립운동자대표대회 소집을 둘러싼 쟁점

발언자소집주체소집기한대회권한ㆍ기타
1차제안
(손두환외)
주석단(의장,주석,총사령)未詳新입법기관구성→新정부각료선임→院府확대ㆍ개조/소집장소(중국,미국,멕시코도 가능)
2차제안
(최석순외)
임시정부(=국무위원회)최속한 기간내독립운동중요문제결정,합법적추진 실현
박건웅주비처(회)(의정원,정부,각당파,각문화단체,무장대오)1945. 7 이내 
박찬익임시정부1946.4.11 이전 
조완구임시정부반년내 
염온동국무위원회+의정원 상무위원회(신설)1945.10 이내 
안훈국무위원회5~6개월내 
엄항섭국무위원회최속한 기간내 
김약산국무위원회반년내 

한독당이나 민혁당, 신한민주당 등 중경에 존재하던 모든 정당들은 독립운동자대표대회가 필요하다는 점에는 공감했다. 그러나 한독당측은 소련 · 화북지역과의 연락 · 교통난, 비용 및 해당국 정부와의 교섭 등 현실적인 문제를 제기하며 국무위원회가 중심이 되어 빠른 시일 내에 독립운동자대표대회를 개최하자고 주장했다. 특히 엄항섭은 38회 의회 제15일 회의(1945. 5. 7)에서 화북 · 소련에서 대표가 오는데 3개월 내로는 불가능하며, 샌프란시스코회의에 전보를 보내는데도 각당이 돈이 없어 정부가 대납했다는 점을 지적했다. 이러한 구상의 중심에는 한독당의 임정 장악력이 손상받지 않는 한도 내에서의 임정 확대 · 강화방침이 놓여있었다. 반면 민혁당 · 신한민주당은 終戰이 목전에 도래했으며, 임정이 확대 · 개조되지 않으면 소련 · 화북 · 미주 등에서 새로운 정부가 수립될지도 모른다는 우려를 내세웠다. 종전이 목전에 도래했다는 점에 대해선 모든 이들의 견해가 일치했다. 이청천은 “연내 싸움이 끝난다”고 발언했고, 박건웅 역시 “지금 독립운동 기한이 반년이나 일년밖에 않남았다”며 시간의 촉박성을 강조했다(≪국편≫ 312~318쪽). 그러나 이들은 한독당이 장악하고 있는 국무위원회가 대표대회를 추진하는데 반대했다. 표면적 이유는 각지의 항일단체가 국무위원회를 신임하지 않는다는 이유였지만, 본질적으론 이들이 대표대회를 국무위원회 장악과 연계시켰기 때문이다.

결국 논란 끝에 국무위원회가 소집주체가 되어, 최속한 기일 내에 대표대회를 개최한다는 결정이 내려졌다. 소집시기가 정해져 있지는 않았지만, 아마도 김구-한독당을 중심으로 한 국무위원회는 1945년 8~9월의 시점에 중경에서 독립운동자대표대회를 개최하려 했을 가능성이 높다.

2) 임시의정원 · 임시정부 확대 · 개조

‘臨時議政院 及 政府擴大改造案’은 38회 의회 제13일 회의(1945. 5. 1)에 제출되었다. 중국국민당 중앙집행위원회에 제출된 문건에 따르면 임시헌장 수개안과 임시의정원 · 임시정부 확대개조안은 민혁당이 제출한 것으로 되어있다(≪五黨統一과 改憲≫(1945. 5. 4) ≪추헌수2≫ 82쪽). 민혁당이 제출한 院府(의정원과 정부) 확대개조안의 정확한 내용은 알 수 없다. 다만 의정원 속기록과 조소앙 · 엄항섭 · 박건웅 등 심사위원 3인의 심사보고서가 남아있다.

이 안이 제출된 이유는 첫째 전민족의 총영도기구로 임정을 확대 강화하자는 것(박건웅), 둘째 소련에서 새로운 임시정부를 수립할 가능성이 있으며 위임통치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임정과 의정원을 확대 개조해야한다(손두환)는 것이었다(≪국편≫ 302~305쪽). 논리적으로 보면 임시헌장을 고치고, 이에 의거해 임시의정원법을 고친 후, 의정원 의원 확대와 국무위원 개편이 이루어지는 것이었다. 이러한 임정 개조논의는 민혁당이 임정에 참여한 이후부터 계속된 것이었으며, 이미 34~35회 의정원 회의에서 민혁당이 강력하게 제기한 바 있었다(염인호, 1993 ≪김원봉연구≫ 창작과비평사 263~266쪽).

그런데 민혁당이 제출한 院府 확대개조안의 심사위원들은 원부 확대개조안이 ‘案으로서 성립되지 않는다’는 심사의견을 밝혔고, 표결결과 찬성 16, 반대 3으로 심사위원의 의견이 통과되었다. 이로써 원부확대개조안은 제대로 논의조차 되지 못한 상태에서 폐기되었다.

임시의정원의 확대는 중경거주 한인으로 제한된 의원 선발요건을 화북 · 만주 · 소련 · 미주 등에 거주하는 한인으로 확대하는 것을 핵심으로 하는 것이었다. 임정의 확대 · 개조는 한독당이 절대 다수를 점하고 있는 국무위원회에서 한독당의 비율을 낮추는 한편, 여타 정당의 비율을 높이며 동시에 해외 한인들을 망라하는 것이 핵심이었다. 이런 측면에서 의정원 · 정부의 확대 · 개조는 독립운동자대표대회와 긴밀히 결합된 것이었으며, 5당통일회의가 논의한 핵심 주제이기도 했다.

3) 임시헌장 수개

임시헌장 수개안은 제38회 의회에 제출된 여러 안 중에서 가장 기초적이고 중요한 안이었다. 임시헌장 개정에는 임시의정원 의원 총원의 3/4 출석과 출석의원 2/3의 찬성이 필요했으나, 결국 폐회식까지 회의정족수가 채워지지 않았고, 임시헌장 수개안은 자동 폐기되었다. 1944년 4월 20일 통과 · 시행된 임시헌장 제61조에 따르면 “本憲章은 臨時議政院에서 總在籍議員 3분지 1 이상이나 정부의 제안으로 總在籍議員 4분지 3의 출석과 출석의원 3분 2의 찬동으로 개정함을 得함”으로 되어 있다[≪大韓民國臨時憲章≫(民國26年) 국회도서관, 앞의책 20쪽]. 그런데 제38회 의회 제8일 회의에서 박건웅과 폐회식에서 부의장 최동오는 임시헌장 개정에 재적의원 2/3의 출석이 필요하다고 발언했고, 이는 이전의 임시약헌의 규정을 잘못 인용한 것이었다(≪국편≫ 266, 322쪽).

임시헌장 수개안은 민혁당이 제출한 것이었는데, 현재 원안이 남아있지 않다. 그러나 여러 자료를 통해 볼 때 가장 핵심적인 부분은 중경거주 한인만이 임시의정원에 참가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지는 조항, 즉 ‘대행체제’에 대한 개정이었다. 臨時憲章 제10조에 의하면 의정원 의원 선거에 있어서 “내지 각선거구에서 선거할 수 없을 때에는 各該 선거구에 原籍을 두고 임시정부 所在地에 僑居하는 光復運動者가 各該區 선거인의 선거권을 代行할 수 있음”으로 되어 있다(국회도서관, 앞의책 16쪽). 즉 중경거주 한인들만 선거권과 피선거권을 갖는 것이었다. 민혁당과 신한민주당은 화북(독립동맹 · 의용군), 소련, 남미 등 해외 한인의 의정원 참가를 가로막는 이 조항을 개정하자고 주장했고[≪五黨統一과 改憲≫(1945. 5. 4) ≪추헌수2≫ 82쪽], 이에 기초해 임시헌장 수개안이 38회 의회에 제출되었다. 임시헌장 개정을 통해 의정원 범위를 해외 각운동세력으로 확대하고, 새로 구성된 의정원이 새로운 정부 구성원을 선출하는 방식으로 임정을 확대 · 개조한다는 것이었다.

민혁당과 신한민주당은 두 가지 방향에서 임정의 확대 · 개조와 자파 세력의 부식을 의도했다. 첫 번째는 임정 내부에서 임시헌장개정→새로운 의정원 구성→새로운 정부각료 구성→임시정부의 확대 · 강화로 이어지는 방향, 두 번째는 독립운동자대표대회 소집→새로운 의회 구성→새로운 정부 구성→임시정부의 확대 · 강화의 방향이었다. 두 방향은 모두 새로운 임시의정원 구성과 새로운 정부구성, 그리고 그 가운데에서 양당의 지분 강화를 의도하는 것이었다.

반면 한독당은 먼저 중경 내 5당파를 통일한 후 임시헌장을 고친다는 입장을 굽히지 않았고, 결국 임시헌장 修改에 필요한 회의정족수를 채우지 못한 채 임시헌장 修改案은 자동폐기되었다.

4) 건국강령 수개

건국강령의 수개문제 역시 38회 의정원에서 심도있게 논의되었다. 김원봉은 건국강령 문제 역시 대표대회로 이관하자고 주장했지만, 기존 수개위원을 사임시키고 새로운 수개위원으로 박건웅 · 김상덕 · 안훈 · 조완구 · 최석순 5명을 선임하는 것으로 논의가 종결됐다(≪국편≫ 299~302쪽).

제38회 의정원 회의는 중경시대 가운데 가장 많은 쟁점과 중요안들이 등장한 회의였다. 그 핵심은 임정을 항일운동세력의 총지도부로 만들기 위한 임시정부의 확대 · 개조문제였다. 38회 임시의정원 폐막 이후 제출되었던 4가지 중요안건은 국무위원회에서의 논의를 거쳐 재차 임시의정원에 상정될 예정이었다. 그러나 이후 수차례 개최된 국무위원회에서도 각당은 서로의 의견차를 좁히지 못했다[≪最近의 臨政動態≫(1945. 6. 8);≪海外韓國獨立運動者代表大會 開催에 關한 意見≫(1945. 6. 15) ≪추헌수1≫ 403~405쪽].

▪ 39회 의회(1945년)

제39회 의회는 일제가 패망한 이틀 뒤에 개최되었다. 1945년 8월 17일, 18일, 21일, 22일 4일간 개최된 마지막 임시의정원 회의에서는 임시정부 내 여당인 한국독립당과 야당인 민족혁명당 · 신한민주당 · 조선민족해방동맹 · 조선무정부주의자총연맹 등의 대결양상이 분명하게 드러났다. 이제 논의의 초점은 광복방략이 아니라 귀국후 정권 수립방략으로 이동했다.

의회 개원은 8월 17일 李光濟 · 李海鳴 · 손두환 · 李集中 등의 요청으로 이뤄졌으나, 김구는 광복군-OSS의 연합군사작전을 논의차 서안에 가있었기에 본격적인 논의가 이뤄지지 않았다. 다음날인 8월 18일 재중경 한국혁명자대회(在渝韓國革命運動者大會)에서 임시정부에 청원건의안을 제출했다. 또한 손두환 · 강홍대 · 金鐵男 · 박건웅 · 이정호 · 이해명 등은 국무위원의 총사직이 선결문제라고 주장했다.

중경으로 귀환한 김구는 8월 21일 제3일차 회의에서 이청천의 국내파견, OSS와의 연합훈련, OSS 국장 도노반과의 회담 소식을 전하며, 국무위원의 총사직을 거부했다. 김구를 중심으로 한 임시정부는 야당세력의 도전에 맞서 임시정부의 정권을 국내 인민에게 봉환하기 위해 곧 입국한다는 제의사항을 내놓았다.

임시정부 내 反한독당 연합세력은 국무위원의 총사직과 看守내각의 구성, 임시의정원의 권한정지 등을 주장했다. 이미 8월 13일 이정호 등 20명은 의정원 의장에게 제출한 ≪제안≫을 통해 임시의정원의 권한을 전국통일적 임시의회에 봉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제안≫(1945. 8. 13) ≪국편≫ 192쪽). ‘광복이전’이라는 단서 속에 대한민국의 주권을 임시정부 소재지 거주 독립운동자들이 행사해 왔으니, 이제 代行制를 폐지하고, 임시의정원의 권한을 전국통일적 임시의회에 봉환해야 하며, 따라서 임시의정원의 직권을 정지시켜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이러한 제안에 뒤이어 행정부인 국무위원의 총사직을 요구했으나, 김구는 이를 거부했다.

8월 22일 제4일차 회의에서 한독당은 “임시정부의 정권을 국내 인민에게 봉환하기 위해 곧 입국한다”는 정부제의사항을 표결에 부치자고 제안했고, 이에 맞서 이정호 등 민혁당 소속 의원 4명, 강홍대 등 신한민주당 소속 의원 6명, 박건웅 등 해방동맹 소속 의원 3명은 전제조건인 국무위원의 총사직을 주장하며 퇴장했다. 8월 23일 손두환 등 19명은 의정원 의장 앞으로 ≪현내각은 즉시 총사직하고 간수내각을 조직≫해야 한다는 제안을 내놓았다(≪국편≫ 192~193쪽). 제안은 임시정부가 임시적 국외혁명정권이었고, 이제 해방이 되어 전국민에 의한 전국통일적 임시정부가 수립될 예정이므로, 인민대중의 자유 抉擇을 위해 현국무위원회는 총사직하고 看守內閣을 조직하여 박절한 일체 사무를 辦理케 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해방이래 중경에서의 한국독립당계열 대 反한독당계열의 대립은 정권 ‘탈취’를 위한 한국공산당의 종용에 따라 민족혁명당, 신한민주당, 조선민족해방동맹, 조선무정부주의자총연맹 등이 임정을 공식 탈퇴해 귀국한 후 친소정부의 수립을 노린다는 중국국민당 정보당국의 관측을 낳을 정도로 격화되었다[≪미상→중국국민당중앙집행위원회≫(1945. 9. 9) ≪추헌수1≫ 406쪽].

이후 임시정부는 국내 귀환과 정권의 국민봉환을 주장하며 9월 3일 「임시정부의 당면정책」을 발표하였다. 총14개 조항으로 구성된 당면정책은 임시정부의 건국구상을 구체적으로 정리한 것이었다. 이는 세 단계로 임시정부가 귀국한 후 1) 임시정부의 정권 접수 및 과도 조치 집행, 2) 민족영수회의 소집을 통한 과도정권 수립 및 임시정부 기능 중단, 3) 전국적 보통선거에 의한 정식 정부 수립으로 이어지는 것이었다. 즉 임시정부가 귀국후 정권을 접수해 과도적으로 통치기능을 수행하는 첫 번째 단계를 지나 ‘민족영수회의’를 통해 과도정권을 수립하는 두 번째 단계, 마지막으로 전국 보통선거를 통해 정식정부를 수립하는 세 번째 단계에 도달한다는 것이었다. 임시정부의 정권수립 구상 · 방략은 임정법통론에 근거해 임시정부를 확대 · 강화해 정식 정부를 수립한다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었다. 임시정부는 환국후 이러한 노선에 따라 여러 차례에 걸쳐 과도정부 수립을 시도했다.

임시의정원은 환국후 반탁투쟁의 와중에서 실질적으로 해산했다. 1946년 2월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반탁진영이 망라된 비상국민회의는 과도정부 수립을 위한 대의체이자 임시의정원을 계승한 조직이라고 선언했다. 1년 뒤인 1947년 2월 비상국민의회는 이승만진영의 민족통일총본부 · 독촉국민회와 통합해 국민의회를 결성했는데, 이 시점에서 국민의회는 임시의정원을 계승한 입법부로 자임했다.

정병준(목포대 교수 · 한국현대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