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제

해 제

이 자료집에서는 군무부를 중심으로 한 대한민국임시정부(이하 임정)의 군사기구 관련 법규, 군사활동 관련자료, 그리고 중국국민당정부(이하 중국정부)와 오고간 문서, 일제정보기관의 자료 등을 수록하였다. 크게 ‘군무부 및 군사기구’ ‘미주 한인비행학교’ ‘만주지역 독립군과의 관계’ ‘한인군관학교’ ‘조선의용대의 합류’편으로 구성되었다.

수록된 자료가 생산된 시기는 임정 수립부터 1940년 한국광복군 창설까지이다. 광복군의 창건과 활동에 관한 자료는 다른 책에서 다루기에, 여기에서는 조선의용대 주력의 화북지역 이동이후 重慶에 잔류한 인원의 광복군 합류와 관련한 내용만 수록하였다.

「군무부 및 군사기구」 관련자료를 통해서는 임정 군사조직의 편제 · 기구에 대한 계획과 임정 산하 군대조직의 편제, 군사활동을 뒷받침할 각급 조례와 규정, 병력동원 방안, 재외 한인사회를 대상으로 한 군구 설정 계획, 군사간부 양성 계획 등에 근접할 수 있다.

「미주 한인비행학교」의 설립과 운영이 임정 군무부장인 노백린의 주도 하에 이루어졌기에, 임정 군사활동의 범주에 포함시켰다. 한인비행학교의 설립과정과 폐교 배경 등에 관한 자료를 실었다.

「만주지역 독립군과의 관계」 관련자료는 만주지역 독립운동세력의 임정에 대한 기대감과, 수립 직후 독립운동의 ‘총영도기관’으로서 임정의 위상을 뒷받침해 주는 자료이다.

「한인군관학교」 부분은 윤봉길의거 직후 김구가 중국국민당정부의 지원 하에 중국중앙육군군관학교 낙양분교 내에 한인특별반을 설치하여, 한인청년을 양성한 사실과, 그 후속체제로서 한국특무대독립군 및 학생훈련소 운영와 관련한 자료들이다.

1930년대 전반기 김구와 임정 관계 등을 토대로, 김구의 한인군관학교 운영 사실을 임정 군사활동의 범주에서 파악하는 것이 합리적인 접근이겠는가 하는 견해도 제기될 수 있을 터이다. 하지만 위의 사실이 결과적으로 광복군의 인적기반을 구축하는 역할을 하였던 점, 임정의 대표 내지는 대리인으로서 김구가 수행한 군사활동의 일환으로 파악할 수 있다는 측면에서 수록하였다.

「조선의용대의 합류」와 관련한 자료로는 1940년 말에서 1941년 상반기에 걸쳐 조선의용대의 주력이 黃河를 건너 陝西省 太行山脈의 중국공산당 항일근거지로 이동한 다음, 충칭에 남은 조선의용대 총부의 일본병력이 한국광복군에 편입되는 과정을 대상으로 하여, 중국정부의 방침과 입장, 광복군 측의 반응이 어떠하였는지를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이하 임정 군사활동의 흐름을 개괄해 보고, 주요 자료의 내용과 성격을 살펴보기로 한다.

1. 군무부 및 군사기구

1919년 11월 5일 발표된 「대한민국 임시관제」는 임시대통령의 직할기관으로 대본영 · 참모부 · 군사참의회의 설치를 규정하였고, 군무부의 조직과 직무를 8개 조 29개 항으로 명문화하였다.

大本營은 최고 통수기관으로 국무총리 및 참모총장 등이 주요 막료로 참여하고, 최고 군사기밀과 작전계획의 수립을 관장하였다. 參謀部는 국방 및 용병에 관한 방안을 기획하고 총장 · 차장 · 참모로 구성되었다. 軍事參議會는 주요 군사정책에 대한 대통령의 자문기관이었고, 軍事參議院은 대통령이 임명하는 의장 · 부의장 · 참의원으로 조직토록 규정되었다. 한편 군무부에는 군무부장 휘하에 비서 · 육군 · 해군 · 군사 · 군수 · 군법의 6개 局이 설치되어, 임정이 지향할 군사활동의 대강을 마련토록 하였다.

지휘체계는 참모본부 · 총사령부 · 지방사령부로 편제되었고, 초급장교 양성 기관으로 육군무관학교를 설치하였다. 군인은 지휘관인 武官과 일반병인 兵員으로 구분되었다. 무관의 계급은 將官(正將-副將-參將) · 領官(正領-副領-參領) · 尉官(正尉-副尉-參尉) · 下士(檉士-副士-參士)이었고, 병원은 일등병 · 이등병 · 삼등병이었다. 이외에 계급에 준한 보직 규정이 별도 마련되었다.

이같은 임시군제는 갑오개혁 이후 개정된 구한국군대의 그것과 흡사하였다. 이는 대한제국정부의 계승이라는 정치적 의미와, 국무총리 李東輝 · 군무총장 盧伯麟 · 군무차장 金羲善 등의 구한국군대 장교 출신 이력과도 관련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 군무부의 직원편제 변화를 알려주는 자료[Ⅰ-1-1) 이 자료집의 목차번호, 이하 같음) ‘군무부의 역사보고 奉呈의 건’, 1921. 1. 7, ‘별책제목’ 「대한민국임시정부 군무부 직원 증감 월보표」(1919년 11월~1920년 11월)]에 따르면, ‘總長→次長→參事→書記’제를 골간으로 출발하여, ‘국장’직이 증설되고(1920. 2), 이어서 ‘편집부위원’직과 ‘무관학교 교관 및 직원)’직이 증설되었다(1920. 5). 인원 또한 처음의 5명에서 차츰 증가하여 12명을 피크로(1920. 5) 9명에 이르렀다. 이같은 사례는 군무부를 포함한 수립직후 임정의 제기구가 제자리를 찾아가는 과정을 반영하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1920년 2월 18일에는 군무부령 제1호로 「軍事警衛勤務條例」[Ⅰ-Ⅰ-6)]와 「警衛勤務細則」을 발표하였는데, 이는 군사기밀의 보호와 일제의 침투를 경계하기 위한 조처의 일환이었다. 군사인재의 양성을 위한 방책으로는 ‘육군사학’이라는 명칭의 군사간부 양성기관을 설립하여, 군사과목을 교육하려는 계획을 마련하였고[Ⅰ-Ⅰ-3) ‘陸軍士學學則’], 이는 임시육군무관학교의 설립 [Ⅰ-1-7) ‘臨時陸軍武官學校條例’]으로 발전하였다.

이와 함께 군사교재를 간행하려 한 사실이나 [Ⅰ-1-9) ‘臨時編輯委員部規定’], ‘임시군제’ ‘임시군구제’ 등의 성문적 근거를 마련한 사실 등은 초기 임정의 군사활동에 대한 관심과 준비과정을 알려준다.

1919년 12월 18일 군무부령 제1호로 발표된 「大韓民國陸軍臨時軍制」[Ⅰ-1-7)]는 군대의 편제 · 정원 · 병역 · 군적 · 군기 · 징벌 · 동원 · 조직 · 각급기관 · 신분 등이 구체적으로 명시하였다. 「大韓民國陸軍臨時軍區制」[Ⅰ-1-7)]는 만주 · 노령지역 한인사회를 주요 인적기반으로 설정하고, 이 지역을 임정의 통치권으로 선언하였다.

그리하여 한인 거주지역을 서간도 군구(하얼빈 이남 吉林省 부근, 奉天省 전역) · 북간도 군구(延吉縣 일대) · 강동군구(노령 일대)로 구획하였다. 모집대상은 만 20세 이상 50세 이하 남자이며, 군구제 사무는 지방사령부와 지부에서 관장토록 하였다. 임정이 군사활동의 인적기반을 확보하기 위해 만주 · 노령지역 한인사회를 주목하였음이 드러난다.

1919년 4월 11일 제정된 대한민국임시헌장 제6조는 국민의 ‘병역 의무’를 규정하였고, 같은 해 9월 11일 공포된 임시헌법 제10조도 병역의 의무를 명문화하였다.

또한 1920년 1월 24일의 「군무부 포고」 제1호는 ‘군인 양성’과 ‘군대 편성’을 위한 ‘충용한 대한남녀’의 동원을 촉구하였다. 이렇듯 임정 군사노선의 인적기반은 國民皆兵制에 근거하였는데, 국민개병제 실시를 위해 착수한 사업이 軍籍 등록사업과 국민군 편성이었다.

1920년 3월 20일 오후 7시에 거행된 제1회 國民軍 편성식에는 국무총리 이동휘 이하 정부 각원과 손정도 임시의정원 의장 및 임시육군무관학교 생도 등 200여 명이 참석하였다. 군무차장 김희선은 「告達文」에서 국민군을 ‘국가의 원기’, ‘동포의 意表’로 규정하였다. 이어서 이동휘 · 손정도 · 안창호 · 여운형의 축사와 격려사, 군사국장 도인권의 갑 · 을반 편성 및 훈련일정 발표, 국민군 대표 선우혁의 선서, 임시육군무관학교 생도들의 독립군가 제창, 만세삼창 등의 순서로 진행되었다. ‘國民皆兵의 第1聲’으로써 국민군 편성은 결실을 맺었고, 이후에는 상해조선인거류민단을 중심으로 일정기간 유지되었다.

또한 “국내외 각 단체와 기타 지원자를 군사기율로써 조직화하여, 국방계획과 국내외를 망라한” 협동 · 단결체제를 갖추려는 목적 하에서, 임시군사주비단의 조직을 구상하였다[Ⅰ-1-2) 군무부령 제1호 ‘臨時軍事籌備團制’]. 특히 군무부 직할로 설치하고자 하였던 대한광복군참리부[Ⅰ-1-11) ‘大韓光復軍參理部規定’]는 실제 무장활동 담당기관 성격을 띠었던 것 같다.

임정의 군사활동은 중일전쟁 발발을 기폭제로 적극화되었다. 임정 국무회의에서는 군사위원회의 설치를 의결하였고[Ⅰ-2, 「軍事委員會 설치에 관한 기사」, 1937. 7. 16], 이어서 軍事特派員이 파견되고[Ⅰ-3, 1939. 7. 30], 軍事委員이 선임되고[Ⅰ-3, 1939. 12. 5], 參謀部가 증설되며[Ⅰ-3, 1939. 11. 5], 통수부가 설치된 사실[Ⅰ-4, ‘大韓臨時政府統帥部官制’, 1941. 2. 10] 등이 이를 뒷받침한다.

그러나 임정의 군사노선은 재정기반의 취약과 국내외 한인사회에 대한 통치권이 확립되지 못함으로써, 성문적인 근거에 한정되었다.

2. 미주 한인비행학교

임정의 비행대대 편성 및 비행사 양성계획은 독립전쟁 준비론이 적극 대두되던 1920년 1월부터 태동되었다. 상하이에서는 안창호를 중심으로 비행기 구입이 추진되었고, 미주에서는 노백린을 중심으로 飛行家養成所 설립 작업이 구체화되었다.

안창호 등은 1월 중순부터 비행기 구입에 착수하였는데, 비행기를 이용해 국내를 대상으로 선전 · 연락활동을 전개하려는 의도였다. 상하이 주재 『大陸報』 기자 에반스 및 에드먼 등을 상대로 구체적인 상담을 추진하였으나, 비행기의 성능 미달과 재정난 등으로 중단되었다.

그러나 1920년 2월 20일 미국 캘리포니아주 윌로우스에서는 비행가양성소가 설립되었다. 임정 군무총장 노백린과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 재무 金宗林이 주도하였으며, 재원은 김종림이 기부한 2만불 및 토지와 재미 한인사회의 의연금으로 충당되었다. 당시 캘리포니아 주정부는 주립학교의 시설 일부를 제공하였다.

비행가양성소의 목적은 독립전쟁에 동원할 비행대와 무선전신대 편성이었고, 교육내용은 전술 · 비행술 · 무선전신학 등이었다. 4월에는 캘리포니아주 헤드우드 비행학교 출신 한인 비행사 6명을 교관으로 확보하였고, 5월에는 비행기 두 대를 매입하는 한편, 미국인 기술자 등을 고용한 뒤, 7월 5일 개학식이 거행되었다.

개학식 행사에는 200여 명의 한인이 참석하였고, 노백린 및 감독 郭林大의 연설과 한인비행사 6명 소개 순서로 진행되었다. 비행술 교육은 7월 6일부터 시작되었으며, 입학 시 인원이 15명이었고 10여 명이 입교 대기 중이었다. 또 입학 직후 비행가양성소의 운영을 담당할 임원을 선출하였으며, 운영 책임은 감독 곽림대와 학생대표에게 위임되었다. 이후 재학생들은 大韓人飛行家俱樂部를 조직하여, ‘장래 비행사회의 발전’을 위해 노력할 것을 다짐하며, 상호친목과 자기발전을 도모하였다.

한편 김종림 등은 비행가양성소의 운영을 지원하기 위한 기구로 飛行士養成社를 조직하였다. 비행사양성사는 7월 25일 장정을 제정하였고, 26일 「비행사양성사 취지서」를 발표하였다. 총재 김종림 이하 임원진 명의로 발표된 22개 조 부칙 9개 항의 장정은 설립 취지가 비행가양성소 운영 지원임을 명시하고, 비행가양성소의 운영을 감독에게 일임하였다.

  가만히 앉아서 요구한다고 저절로 오는 독립이 없고, 울면서 구걸한다고 누가 주는 독립이 없으되, 지으면 생기는 독립, 쇠와 피를 합하면 제조하는 독립은 있습니다. 그러고도 우리가 진실로 독립을 원할진대, 먼저 철혈사업을 짓고 행함이 필요한 것을 깨달아야 마땅하지오. …

  미주에 재류하는 우리의 형편으로는 인원이 적으니 육군을 편성함에 넉넉치 못하고, 오직 널리 금전을 거두어 재력의 일부를 감당함이 의무의 하나라고 하겠나이다. 하지만 그보다도 더 유익하고 필요한 사업이 있으니, 이일이 원동이나 어느 다른 천지에서는 할 수 없는 비행가 양성이 그 사업이올씨다.[Ⅱ-6, 「비행사 양성사 장정, 취지서」1920. 7. 26, 신한민보 1920년 8월 12일자]

  위의 내용은 미주 한인들의 한인 비행사 양성에 대한 기대 및 열망을 알려준다. 6개월 간의 교육을 통해 19명의 한인 비행사를 배출하였으나, 아래의 내용은 한인비행사 양성이 중단될 수 밖에 없었던 상황을 알려준다.

  박희성 씨가 치룬 시험은 잘 치루고 마지막 시험에 불행히 낙상되었으나, 천행으로 생명의 위험은 면하였고, 그가 빌린 선생의 비행기는 전부 부서져서 다시 쓰지 못하게 되었고, 함께 갔던 이용근 · 정몽룡 양씨는 시험도 한번 못치뤄 보고 돌아오게 된 것이라. …

우리 비행학생 3인이 그간 선생의 비행기를 가지고 공부하던 터인데, 그 비행기가 부숴진 후에는 비행기가 없어 공부할 수 없게 되었소이다. 윌로우스에서 쓰던 우리 비행기도 한 3백달러를 들여 □수하여야 쓸 수 있겠고, 그 비행선생이 이전에 사용하던 좀 늙은 비행기가 있어 □수코자 하는데 그도 한 2백 여 달러가 들어야 되겠다하오니, 대략 5백 여 달러가 있어야, 우리 비행학생들이 다시 공부를 계속할 형편이외다[Ⅱ-9, 「박희성씨 위한 만찬회, 비행학생 도웁시다」, 1921. 5. 5, 신한민보 1921년 5월 5일자]

훈련과정에서 비행사 부상 및 비행기 파손 사건이 발생하였고, 새로운 훈련용 비행기의 구입에 소요될 재정 수요를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에, 한인비행학교의 운영이 더 이상 지속되지 못하였던 것이다.

3. 만주지역 독립군과의 관계

일제문건[Ⅲ-7, 「南滿統義府 군대의 上海臨時政府 관할에 들어간다는 선언문 및 경고문 발송의 건」, 北제◸호, 대정 13년 5월 21일, 통역관 木藤克己, 警務局長 丸山鶴吉 귀하]에서, 1924년 당시 서간도지역 독립군단체의 통합기구 성격을 띠었던 통의부의 임정 지도체제로의 귀속 선언은 자체 무장역량을 확보하지 못하고 있던 임정에게는 千軍萬馬를 얻는 듯한 힘을 실어주었을 것이다.

만주지역을 무대로 무장활동을 전개하던 독립군이 임정을 지도기관으로 인정하고 충성을 맹세하였다면, 이는 임정이 실질적인 항일투쟁의 총지휘기관으로서 위상을 확보하는데 큰 힘이 되었을 것이다. 또 임정이 표방한 군사노선을 현실화하기 위해서도 만주 · 노령지역 한인사회 및 독립운동단체와의 연대가 긴요하였다.

때문에 임정은 「대한민국육군 임시군구제」를 제정하여, 이 지역 한인사회를 군사활동의 인적기반으로 설정하였고, 특파원 파견을 통해 재만 한인사회 및 항일독립군과의 연대 형성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1920년대 중반에 이르면 임정의 노력은 교착 상태에 직면하는데, 임정의 위상 퇴락 및 재만 독립군의 재편성 시도 사실 등이 주원인이었다.

1) 임정특파원의 파견

1920년 3월 중순 북로군정서 대표 김성이 상하이 도착하여, 임정 국무회의에 출석하여, 대한국민회의 압박 사실을 진정하였고, 徐一 총재 명의로 작성된 신청서를 제출하며 ‘정부위원 파견’을 공식적으로 요청하였다. 독립군단체간의 갈등을 호소하고, 중재를 요청한 사실은 만주지역 독립군단체들이 임정의 리더십과 권위를 인정하였을 뿐 만아니라, 기대감을 갖고 있었음을 반증한다.

이에 4월 29일 열린 국무회의는 서 · 북간도지역의 특파원 파견을 결정하였고, 5월 말에는 안정근 · 왕삼덕 · 조상섭 · 윤기섭 · 이진산 등이 서 · 북간도로 출발하였다. 특히 안정근과 왕삼덕의 파견은 북간도 지역의 유력한 독립군 단체인 大韓國民會와 北路軍政署 간의 대립을 해소하기 위함이었다.

7월 두 사람은 북로군정서 및 광복단을 제외한 7개 단체의 통합 성과를 도출하였다. 또 북로군정서 본부를 방문하는 등, 북간도 지역 독립군 단체의 통합을 위해 진력하였다. 비록 북로군정서는 완강하게 거부하였지만, 1920년 10월 말 大韓義民團 · 新民團 · 大韓光復團 · 大韓國民會는 안정근의 제의에 동의하고, “각 단체의 통합을 실행하고 정부 시정방침에 복종할” 것을 서약하였다. 그러나 청산리전투라는 새로운 국면을 맞게됨에 따라, 임정 특파원의 노력은 결실을 맺지 못하였다.

한편 임정에서는 이용을 북간도에 파견하였다. ‘임정 간도특파원 및 무관학교 설립위원장’ 자격으로 이용은 대한국민회의 홍범도 등을 만나 무관학교 설립 문제를 협의하였고, 1920년 7월에는 대한의민단측과 무관학교를 설립키로 결정하였다. 이후 임정에서는 대한국민회 사관연성소 건립자금으로 1만 원을 지원하였다.

2) 임정과 서간도지역 독립군단체

임정과 서간도지역 독립군단체의 연계 사실은 大韓獨立軍備團 · 大韓靑年團聯合會 · 光復軍司令部 · 西路軍政署 등의 활동에서 단서가 발견된다. 1919년 5월에 조직된 대한독립군비단은 약장에서 “본 단은 임시정부 국무총리 총재 각하의 명령에 의해 조직한다”고 규정함으로써, 임정산하 군사기관을 표방하였다.

1919년 9월 결성한 대한청년단연합회는 1920년 4월의 제2차 총회에서 “조직적 · 통일적 행동과 외교활동을 위해 정부의 존재 필요성이 인정된다”고, 임정지지 방침을 천명하였다. 4월 20일의 비밀회의에서는 이탁을 임정에 파견키로 결정하였다. 이후 이탁은 임정 군무부의 승인을 얻어냈고, 임정 연락기관인 怡隆洋行을 통해 무기를 운반해 왔다.

1919년 12월 韓族會 · 紀元獨立團 · 民國獨立團 · 靑年團聯合會 등 서간도지역 독립군단체들은 통합을 의결하고, 1920년 2월 김승학 · 이탁 · 안병찬을 상하이에 파견하였다. 이해 7월 임정 내무부 직속기관으로 光復軍參理部 및 군무부 산하 군사기관으로 光復軍司令部가 설치된 것은 그 결실이었다. 그리고 임정에서는 이탁을 다시 파견하여, 특수부대 성격의 光復軍總營을 조직하였다.

西路軍政署와 임정의 관계를 살펴보면, 扶民團 등 서간도 지역 독립군 단체는 1919년 4월 軍政府로 통합하고, 한인사회 자치기관으로 韓族會를 조직하였다. 군정부는 임정 산하기관으로의 편입을 결정하고, 軍政署로 개칭하였다. 1919년 11월 17일의 임정 국무회의에서 군정부의 타협안을 받아들임으로써, 군정부는 임정산하 서로군정서로 개편되었다.

그러나 임정과 서로군정서의 연대는 오래 지속되지 않았다. 서로군정서는 국내진공전을 결의하고, 윤기섭과 이진산을 임정에 파견해 재정 지원과 임정 군사기관의 만주 이동 및 부대 편성을 주장하였다. 서로군정서측은 군사활동에 소요될 재정 기반의 확보를 최우선시하고, 외교와 내정은 부차적 사항임을 지적하였다. 결국 독립운동 방략의 차이로 임정과 서로군정서의 연대는 한계를 노정하게 된다.

임정과 서간도지역 독립군단체의 연대는 統義府에 이르러 적극적인 양상을 띠었다. 『독립신문』은 통의부의 활동상황을 상세히 보도하였고, 통의부는 국민대표회의 소집 시점인 1923년 1월 1일자 독립신문에 신년축하 광고를 게재하는 한편, 재만 한인사회에 징수한 부과금 중에 ‘독립신문 유지비’를 포함시켰다. 이는 통의부가 임정의 통치권을 인정함과 동시에 재정기반 확충에도 일조하였음을 뜻한다.

1923년 말 통의부는 임정직할의 새로운 독립군단 설치문제 협의를 위해 백광운과 김원상을 상하이에 파견하였다. 그리고 1924년 5월에는 의용군 제1 · 2 · 3중대와 유격대 제3대, 독립소대 대표의 연서로 ‘임시정부 중심의 재결속’을 주장하였다.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직할을 적극적으로 받을 것, 대동통일의 선봉이 되어 내외를 막론하고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기치아래 통일시키는 데에 적극적으로 힘써 도모할 것, 대한민국육군으로서 내외의 무장 각 단체에게 가입을 권유하고 또한 이에 가입시킬 것 …

우리들 군인은 오로지 원리와 원칙에 따라 국부적 사회의 지휘 하에 있어서의 활동을 초월하여 전민족의 최고기관으로서 세계열방이 묵인하는 바인 우리 임시정부의 기치 아래에 뭉치고자 했을 뿐만 아니라 임시정부 군무부의 호령 아래에서 讎敵을 격퇴할 것을 맹약했다. 우리 임시정부는 전민족의 대동통일적인 최고기관이다. 따라서 대한의 군민인 우리들은 모름지기 전민족의 최고기관인 임시정부를 공고히 하는 것은 그 의무이며 본분이라 할 것이다.

우리들 군인은 반드시 모든 민족이 주재하는 임시정부 기치 아래에서 대업을 완성시키고자 결심하여 절대로 개인의 야욕 하에서 또는 국부적인 사회의 편견 하에서 활동하지 않을 것임을 선언하는 바이다. 혹은 임시정부에 대해서 인물에 대한 평과 제도에 대해서 논하는 자가 있다 하더라도 이런 불완전함도 우리들의 책임이며 이를 완전하게 만드는 것도 우리들의 당연한 의무이다. 어찌하여 이런 것만을 구실로 하여 당당한 임시정부에 전혀 반대하는 것을 일시적인 오해가 아니라고 할 것인가.

그렇다면 우리들은 군민을 막론하고 오로지 血誠만을 가지고 원리와 원칙에 따라서 임시정부의 기치 아래 모여야 하지 않겠는가![Ⅲ-8, 「선언서」, 1924. 4. 南滿軍人代表]

임정에서는 독립신문사 사장 김승학과 이유필을 통의부로 파견하였고, 의용군 1 · 2 · 3 · 5 중대는 임정 군무부 산하 光復軍司令部의 계승을 표방하며, 대한민국임시정부육군 주만참의부를 결성하였다.

‘대한민국임시정부 육군’을 자임한 참의부와 임정과의 관계는 1925년 ‘대한민국임시정부육군 주만참의부 군무부장’ 자격으로 만주에 파견된 蔡元凱의 활동 속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이해 봄 ‘정의부와 참의부 간의 동족상잔‘ 조정 임무를 띠고 내무총장 이유필과 함께 파견된 채원개는 정의부 및 참의부 지도부와 관할 한인사회를 순방하며, 두 단체의 갈등 해소를 위해 노력하였다. 그는 1927년 초 임정 명령에 의거 황포군관학교 교관 부임을 위해 만주를 떠날 때까지 참의부에서 활동하였다.

3) 임정과 북간도지역 독립군단체

「알려드리는 글:대한독립군에 내력(약) · 전투상보(1921. 9. 11)」[대한독립군북만쥬통신부 리즁실 올님, 대한민국임시졍부 대통령 리승만 박사 각하, Ⅲ-3]와 「戰鬪報告(1921. 10)」[大韓獨立軍北滿洲通信部, 臨時政府軍務總長 盧伯麟 閣下, Ⅲ-4]처럼, 임정에 대일전투 상황을 보고하고 있는 사실은 북간도지역 독립운동단체와 임정의 관계를 함축적으로 보여준다.

북간도지역 항일 독립군단체 중 임정과의 유대 관계를 살필 수 있는 단체는 大韓國民會이다. 1919년 3월 13일 결성된 朝鮮獨立期成會는 임정 수립과 함께 대한국민회로 개칭하고, 임정에 대해 지지 입장을 표방하였다. 1919년 11월 이동휘의 임정 국무총리 취임을 계기로 유대관계는 한층 강화되었다. 1920년 4월 대한국민회는 「告諭」 4호에서도 “본회는 작년 임시정부가 건설되자 즉시 봉대하여, 일체 행위를 정부방침에 복종하였다”고 천명하였다.

다음으로 北路軍政署와 임정의 관계를 살펴보면, 1910년대 북간도 지역의 중추적 단체인 重光團은 1919년 5월 大韓正義團으로 개편하였고, 이해 10월 吉林軍政司 등과 통합 軍政府를 성립시켰다. 1919년 12월 군정부는 임정 국무원포고 제205호에 의해 大韓軍政署로 개명하고, 임정 군사기관으로서 위상을 천명하였다.

국내신문 보도에 의하면, 1923년 여름 북로군정서와 대한국민회를 비롯한 무장단체 · 종교단체 · 교육단체는 대표 100여 명의 연명으로 작성된 청원서를 임정에 제출하였다. 요지는 임정 ‘행정기관’의 북간도지역 설치 및 북간도지역 독립군단체의 통일 도모였다. 이에 임정에서는 8월 20일의 임시국무회의에서 이 청원안을 가결시켰고, 용정의 墾北督辦府와 각 현 단위 지역의 監理署 설치를 결정하였다. 그리하여 이 지역 거주 한인 56명을 독판부 및 감리서 책임자로 임명하고, 사령서를 8월 23일 발송하였다. 이로써 임정의 북간도지역 한인진영에 대한 지도력은 확인되었다. 임정 행정기관의 설치 여부는 확인되지 않지만, 이는 북간도지역 독립운동진영의 임정에 대한 기대감이 지속되었음을 의미한다.

그런데 “너는 용감하던 부여 · 고구려인의 자손이 아니뇨, 너는 살수일전에 수군 100만을 멸하고 안시성두에 당 태종을 패주케 한 조상의 자손이 아니뇨, 너의 조상은 임진왜란에 8년의 대혈전으로 국가와 자유를 사수하던 조상이 아니뇨, 너는 이를 기억하나뇨 안나뇨.”[Ⅲ-2, 「大韓民國光復軍營 선언(1920. 8) ‘敵의 官公吏된 者여 곧 退職하라’]라는 글은 만주지역 독립군들이 갖고 있던 강역의식과 역사의식의 일단을 드러내고 있다.

‘당 태종을 패주시킨’ ‘고구려인의 자손’으로서, 또 임진왜란 때 ‘국가와 자유를 사수하던’ 의병대중의 후손이라는 소명의식을 갖고 있던 독립군이었기에, 만주지역을 고향으로 여기며, 독립운동기지로 가꾸어 가며, 기꺼이 항일독립운동에 자신과 가족의 삶을 던졌을 것이다.

4. 한인군관학교

南昌에 주재하고 계시는 蔣 위원장님 보십시오. 지난해 한인들이 우리 군관학교를 입학할 수 있도록 허락하시어, 군관학교 내에 특별히 한인을 위한 훈련반을 개설하였습니다. … 지금 한인 동지 백여 명이 군관학교에 입학하여 훈련하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위원장님께서 군관학교 분교의 祝 교육장에게 밀전을 보내시어 이들 한인 청년들의 입학을 허용할 수 있도록 조처해 주시기 바랍니다.[Ⅳ-1, 「韓人이 군관학교에 입학하여 훈련할 수 있도록 도움을 달라는 電文(1933. 10. 27)」, 발신:陳果夫, 수신:蔣介石, 來電17849號 ]

위의 자료는 한인군관학교 설립에 주도적인 역할을 한 당시 중국국민당 조직부장 천궈푸가 장제스 위원장에게 올린 전문이다. 이를 통해 보면, 중국중앙육군군관학교 낙양분교 내에 한인특별반을 개설키로 결정한 김구와 장개석의 회담 시점을 1932년 9월~10월로 유추하는 견해[孫世一의 비교 評傳, 「한국민족주의의 두 類型:李承晩과 金九」, 『月刊朝鮮』 2006년 9월호, 593~594쪽]가 합당함을 알 수 있고, 장 위원장이 낙양분교 祝紹周 교육장에게 직접 지시함으로써 한인군관학교가 개설되기에 이르렀음을 알려주고 있다.

1932년 4월 29일 윤봉길의사의 홍구의거를 계기로 한인독립운동에 대한 중국민의 인식은 일변하였다. 국민당정부의 정책도 적극적인 지원 방침으로 전환하였다. 군사 · 정보기관을 비롯한 각 방면에 다수의 한인을 수용하고, 한인을 일본군 점령지역 및 일제 침략기관에 침투시켜 정보수집과 파괴공작을 수행토록 한다는 것이었다. 바야흐로 한 · 중연합의 항일노선이 강화되기 시작하였다.

안동(지금의 丹東)경찰서에 들어온 정보 의하면, 남경에 있는 불령 조선인 김구계통과 이청천이 경영하고 있는 낙양군관학교 분교의 조선인 학생 40명은 금년 4월 상순에 제1회 졸업식을 거행할 예정인데, 이번 졸업생은 中韓革命軍이라 일컬어 낙양에서 中國軍敎導隊를 편성하여, 주로 반만 · 항일공작 별동대에 배속시키기로 결정하고, 남경의 중앙군사위원장 장개석은 이번 국책 전환을 기도하고, 친일정책을 표방하여 국방 충실 · 재정 통일 · 국력 확장과 시국을 바로잡을 것을 기하기 위하여, 표면상으로 반만과 항일태도를 버리고, 이면에서는 타산적 · 정책적으로 간접적으로 중국에 있는 불령 조선인들을 이용 사주하여 반일 · 반만공작을 진행시키면서, 전적으로 책임을 조선인에게 전가시키는 견지에서, 금후에 있어서 조선인 군관 양성에 대해서는 적극적으로 원조할 것을 서약했다고 한다.[Ⅳ-16, 「洛陽군관학교 조선인 학생 동정(1935. 4. 12)」, 평북고 제6084호]

위의 자료는 한인군관학교의 설립과 운영이 중국국민당정부와 임정 양측의 항일운동 역량을 강화할 수 있는 공약수로 평가되었음을 알려준다.

국민당정부 측은 한인들의 항일투쟁 역량을 중국항일전쟁 체계 안으로 끌어들임으로써, 정보 수집과 분석, 일본군을 상대로 한 선전 · 심리전 등에서 전술적인 효과를 거둘 수 있기를 기대하였을 터이고, 임정측 또한 한인군관학교 운영을 통해 우수한 청년투사를 양성하는 한편, 이들을 임정의 무장활동기반으로 흡수함으로써, 향후 항일운동의 역량과 여건을 향상시킬 수 있기를 희망하였다.

朴贊翊과 蕭錚이 한 · 중연합의 실천방안에 대해 실무협의를 진행하였고, 중국중앙육군군관학교 낙양분교 내에 한인특별반을 설립키로 합의되었다. 한인특별반의 정식명칭은 ‘중국중앙육군군관학교 낙양분교 제2총대 제4대대 육군군관훈련반 제17대’였다.

學科敎育은 지형학 · 축성학 · 전술학 · 병기학 · 통신학 · 중병기학 · 정치학 · 각국혁명사 등이었고, 術科敎育은 체육 · 체조 · 무술 · 검술 · 야간연습 · 야영연습 · 보병조전 · 사격 등이었다. 학과교육에 있어서는 중국어회화 능력에 따라 두개 반을 편성하였다. 술과교육은 기본적인 군사훈련과 함께 각종 포와 기관총 등의 조작법을 가르쳤으며, 승마훈련도 실시하였다.

김구는 베이징 · 텐진 · 상하이 등지를 무대로 입교생을 모집하는 것과 더불어 재만 한국독립군 간부들을 교관으로 초빙키로 하였다.

김구는 자신을 옹립하기 위해 작년 6월 길림에 근거를 가진 한국독립군 이청천의 참모 李宇精 · 金尙德 양인이 남경에 온 것을 기화로 이청천과 결탁하고, 그를 초빙하여 군사부장으로 하고 그 부하를 초치하여 군관학교 창설의 협정을 꾀하고, 곧 이청천에게 밀사를 파견하여 남경으로 올 것을 촉구하는 한편, 스스로 국민정부 요로에 극력 운동한 결과, 드디어 중앙당부도 원조하기로 되어, 이번 중앙군사위원회 정훈반 낙양분교소 안에 한인군관학교 설치 허가를 얻어, 금년 3월 개교하게 되어[Ⅳ-9, 「金九 一派의 軍官學校 設立狀況 槪要에 관해 재北平 中山 一等書記官 外務大臣에게 報告한 要旨」, 1934. 6. 4]

위의 일제기관이 파악한 것처럼, 김구는 한국독립군과 접촉 사명을 띤 특사를 만주에 파견하여, 한국독립군측과의 연합을 시도하였다. 양측 간에 수 차례의 접촉을 시도한 끝에, 李圭彩(이우정)와 박찬익은 한국독립군의 이동과 김구측의 재정지원에 합의할 수 있었다. 이규채는 박찬익으로부터 한국독립군의 이동경비로 600원 (당시 쌀 한 가마 가격이 4~5元 정도)을 제공받고, 吉林으로 돌아왔다.

이청천의 일대기에서는 이들의 밀행 정황을, “밀림 속을 찾고, 무인산간을 찾아 유랑의 나그네길을 걷기를 며칠, 밤이 되면 유랑의 길을 걷고, 낮이 되면 낙진 속을 찾아” “가다가는 날이 밝으면 쉬고, 쉬다가는 밤이 되면 길을 걷고” “너무도 많은 장애물이 걸쳐 있었다.” “중국인 의복으로 변장하여, 중국인 장사꾼 같이 차렸다. 이리하여 열차 내에 오르니, 이곳에도 무서운 헌병이나 경찰의 눈은 그들의 시선을 새롭게 하였다. 山海關까지 여러 번의 조사가 있었으나, 모두가 간단한 질문 정도였다”고 기술하였다. 하지만 경비 부족으로 인해 재차 오광선이 남경에 파견되어, 박찬익으로부터 1200원을 수령하여 길림으로 돌아갔다. 그리하여 9월 말 이청천 · 홍진 · 김창환 등 40여 명의 ‘재만’한국독립당 및 한국독립군 간부들이 베이징으로 이동할 수 있었다. 이들은 베이징에서 이틀 간 머문 다음, 다시 뤄양으로 출발하였다. 한인특별반에 입교하기 위해서였다. 이청천 · 오광선 등 한국독립군 간부들은 한인특별반의 교관이 되었고, 한국독립군 대원들은 입교생이 되었다.

김구를 중심으로 한 관내지역의 임정옹호세력과 북만주지역의 대표적인 독립운동 세력이었던 한국독립군이 연합함으로써, 임정은 무장투쟁역량을 강화할 수 있었고, 후일 광복군의 창건도 이때 불씨가 지펴졌다고 할 수 있다.

학생의 과반수는 만주국내에서 모집한 관계로 보아, 졸업 후는 다시 만주국에 들어가 반일 제공작을 잠행할 것이다. 또 베이징을 연락지로써는 가장 적당하다고 하여, 이청천 일파가 남하한 후에도 여전히 수명의 간부급 인원을 남겨놓았고, 현재 申肅은 淸華園(베이징에서 약 20里 떨어진 교외)에, 李宇精은 당지 서쪽 모처에 잠복하여, 洛陽分校所 및 金九本部와 연락하고 있다[Ⅳ-9, 「金九 일파의 군관학교 설립상황 개요에 관해 재北平 中山 一等書記官이 외무대신에게 보고한 요지」, 1934. 6. 4]

위의 일제 정보자료는 향후 만주지역 독립운동세력과의 연락 및 만주지역 한인사회를 무대로 한 한인군관학교 입교생 모집 및 졸업생의 만주지역 파견 계획 등과 연계하여, 베이징을 중간거점으로 활용코자 하였음을 시사한다.

이와 함께 “1934년 11월경부터 이청천이 베이징주재 중계기관인 동지 金元植을 통해 길림지방에 있는 동지 金斗先과 韓光으로 하여금 같은 해 3월 15일 南京軍官學校에 입학시키기 위해 생도 10여명을 모집토록”[Ⅳ-19, 「南京軍官學校관계 피의자 취조개요 및 현황보고 건(1935. 6. 8)」, 合機密제445호 부속첨부, 경무국 間島주재 총영사 永井淸, 조선총독 宇垣一成 귀하]하였다는 자료 또한 이와 같은 개연성을 뒷받침하고 있다.

1934년 2월 개교 시의 입교생 수효는 92명이었다. 입교생들에게는 피복 등의 군수품이 보급되었으며, 매월 12원의 급여가 지급되었다. 이 가운데 식비 6원·국민당당비 2원 40전을 공제한 나머지가 실제 수령액이었다 (당시 쌀 한가마의 가격이 약 5원이었다).

한인특별반 운영으로 구체화된 김구의 항일투쟁 기반은 한국특무대독립군과 학생훈련소 설치로 이어졌다. 김구가 주도한 특무조직은 일제의 감시를 피해 방랑의 길을 걸어야 하였던 임정과 임정요인을 지키는 임무를 띠었다.

韓人愛國團은 특무활동의 모체로서 단원들 간의 ‘혈맹적’ 연대 관계를 골간으로 하였다. 비밀결사라는 조직의 특수성으로 인하여 폐쇄성이 짙었다. 주로 특무활동 결행 직전에 가입 · 선서 절차를 거친 다음 특무활동에 착수케 함으로써, 책임기관으로써 역할하였다. 중국국민당정부와의 교섭 활동 및 대외활동 시 공식기구로도 기능하였다.

韓國特務隊獨立軍은 무력수단을 통해 일제침략 세력을 응징코자 하는 특무활동의 실행기구로서, 군사조직을 지향하였다. 그리고 김구의 지도력을 옹호하고, 김구의 리더십을 뒷받침하였다. 특히 한인특별반 운영이 종료된 이후에는 김구계열의 구심점적인 기능을 하였다. 중국중앙육군군관학교 및 남경중앙대학 등에 입교 중인 김구계열 인물들의 집결지 노릇도 하였다.

學生訓練所는 일명 ‘특무대예비훈련소’ ‘蒙藏訓練所’로도 불렸다. 중국중앙육군군관학교 입교인물에 필요한 예비교육을 실시하는 등, 각지에서 모집한 청년들을 수용하여 교육시키는 기구였다.

한인특별반 입교생과 한국특무대독립군 · 학생훈련소 활동에 참여한 인물들은 이후 한국국민당 · 한국광복운동단체연합회 · ‘통합’한국독립당 및 광복군 활동에 참여하여, 임정의 핵심적인 기반으로 성장하였다.

5. 조선의용대의 편입

1941년 5월 조선민족혁명당은 제7차 중앙집행위원회 회의에서 임정에 참여키로 결정하였고, 12월 10일의 제6차 전당대표대회에서 공식 선언하였다. 그리고는 임정에 대해 ‘불관주의(不關主義)’ 노선을 취해 온 이유로, 임정이 통치권을 행사하지 못하고 있는 점, 각국이 임정을 승인 · 원조하지 않는 점, 임정이 합법적인 선거를 통해 조직되지 않은 점 등을 지적하였다.

그리고 임정 참여를 결정하게 된 배경으로는, 태평양전쟁 발발로 인한 국제정세의 급격한 변화와 국민당정부의 적극적인 원조 등으로, 한국독립운동의 세계혁명에 대한 기여도가 점증하고 있는 점 등을 들었다. 이와 함께 참여의 조건으로, 임정을 한국민족 전체의 대표기구로 확대 개편하고, 또 각 혁명단체 및 혁명군중대표대회의 개최를 통해 임정이 최고 전투지휘부로서의 역할을 수행할 것을 요구하였다.

이에 따르면, 국제정세의 변화와, 이로 인한 한인독립운동이 직면하는 새로운 국제환경에 효과적으로 대처하기 위한 방안으로써, 임정을 중심으로 한 한인세력의 단결과 통일이 요구되고 있으며, 조선민족혁명당은 이러한 역사적 조건의 요청에 부응하기 위하여 임정 참여를 결정하기에 이르렀다는 요지이다.

중공을 동정하고 지지하는 조선의용대는 과분할 정도로 중공을 중시하였습니다. 조선의용대의 주된 활동무대는 비록 黃河 이남이었지만, 저들의 마음은 河北(중공 활동구)에 있었습니다. 따라서 저들의 숙원은 하루 속히 ‘中共天堂’에 들어가 활동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들은 지난 3~4년간 오직 도하할 기회만 엿보고 있다가, 마침내 금년 3월 하순부터 6월 하순에 걸쳐 3개 지대원 1백여 명이 모조리 ‘華北敵後工作’이라는 명분으로 황하를 건너고 말았습니다. 조선의용대 제1 · 2 두 지대는 漢口에 있을 때부터 이미 도하의 뜻을 품고 있었습니다. 저들이 지난 3년간 洛陽 · 老河口 일대로 주재지를 옮긴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었습니다. 저들은 그간 부단히 延安과 연락을 취해 왔습니다. …

조선의용대는 계속하여 중국당국을 속이기 위해 총대장인 金元鳳은 여전히 重慶에 머물며 껍데기뿐인 조선의용대 본부를 지키고 있습니다. 아울러 낙양과 노하구 등지에는 3~5명의 노쇠하고 병든 대원들을 남겨 辦事處를 운영하고 있는데, 이는 중국당국을 속이기 위한 연막전술에 불과한 것입니다[Ⅴ-1, 한국광복군, 「조선의용대가 황하를 건너 중공 측에 가담하게 된 경과」, 시기 미상]

하지만 위의 평가는 조선민족혁명당이 내세운 임정 합류 배경과는 판이한 시각의 차이를 드러냈다. 조선의용대가 광복군에 합류하더라도, 화학적인 용해가 수비지 않을 것임을 느끼게 한다.

한편 1942년 4월 20일 제28차 국무회의에서는 조선의용대와 광복군의 통합을 결의하였다. 5월 15일 국민당정부 군사위원회도 조선의용대의 광복군 합류를 명령하였고, 김원봉을 광복군 부사령에 임명하였다. 이어서 조선의용대는 광복군 제1지대로 개편되었다.

듣건대 군사를 주관하는 기관이 조선의용군을 새로 조직하여 한국광복군과 길을 나누어 아울러 진행하는 것이 사실이라면, 통일에 장애가 있을 뿐만 아니라 마찰이 있을 우려가 있으니, 살펴서 소관기관에 신칙하여 별도로 명의를 세우지 말아, 軍令의 통일을 기해야 한다. 아울러 김구 등이 책임을 지고 조선의용대의 잔여 간부인원을 접수하여 매우 공평한 방법으로 분별하여, 광복군 대오 중의 상당한 지위에 편입시킨다[Ⅴ-2, 「朱家驊가 蔣介石에게 朝鮮義勇隊 인원을 光復軍으로 편입시켜주고, 金九를 면담해주도록 장개석 위원장에게 요청한 簽呈」, 1942. 2. 11]

위의 중국정부 측 입장에는 태평양전쟁 발발이래 긴박해진 국제정세를 배경으로, 항일전쟁의 효율적인 수행을 위한 방안의 하나로써 한인세력을 단결시켜, 이들을 중국정부의 지휘권 아래로 편입하고자 하는 전략적 의도가 함축되어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12월 1일 조선의용대 대장 김원봉은 ‘광복군 부사령’ 자격으로 重慶 라디오방송을 통해 “한국민에게 권고한다. 마땅히 독립군에 가입하여 한국해방을 위해 분투하여야 한다. 일본이 한국의 정권을 침탈한지 벌써 32년이 경과하였으나, 한국민이 쉬지않고 무력으로 대항하였으니, 이는 한국의 빛나는 역사이다. 우리가 자유와 행복을 누리려면 반드시 오랜 시기의 艱苦奮鬪를 지내야 바야흐로 목적에 도달할 것이다”라는 요지의 연설을 하였다. 그간 임정에 대해 비판적이고 냉소적이었던 조선민족혁명당의 임정 합류는 공식화되었다.

12월 5일에는 김구 등이 배석한 가운데, 광복군 부사령 취임식이 거행되었다. 1944년 4월 22일에는 김원봉이 국무위원 겸 군무부장에 선임됨으로써, 조선민족혁명당은 일제 말기 임정 운영의 한 축을 이루었다.

이미 보았듯이, 조선의용대의 광복군 합류 배경을 둘러싼 신경전은 임정을 중심으로 하여 경쟁적 동반자 관계에 있던 민족주의 우파세력과 민족주의 좌파세력 간의 입장 차이를 반증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소수에 지나지 않는 조선의용대 잔류인원을 이끌고 광복군 1지대와 부사령직을 차지하게 된 사실은 조선민족혁명당과 조선의용대로서는 기대이상의 반대급부를 받은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어쨌든 조선의용대라는 중국관내지역에서 최초로 창설된 한인무장부대가 임정의 지휘권 아래로 귀속되었다는 사실은 정치적 · 상징적 의미가 적지 않았다. 이로써 일제 패망기 임정은 좌우합작의 연립정부 모양새를 갖추게 되었고, 임정의 위상에도 중량감이 더해졌다.

한상도(건국대 사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