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2) 만주의 한국인들(1933)  

2) 만주의 한국인들(1933)

만주의 한국인들
이승만 박사의 논평과 함께
리튼보고서에서 발췌
가격 : 2 스위스 프랑 제네바 1933
발 행
한국대표부
본 부
파리 말브랑쉐 7가

한국, 만주, 일본의 지도

서론

목적

혼란의 원인들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한국과 만주 문제

만주의 한국인 인구

초기 정착민들

최근의 이주

이주의 원인들

쌀 경작

한국인의 일본에 대한 적대감

한국인에 대한 중국인의 태도

분쟁의 시작

일본을 만족시키려는 중국의 노력

 한국인 사회의 탄압

 중국의 한국인 귀화 장려

조약상의 권리들

이중 시민권

만보산 사건

중국(인)과 한국(인)의 우애

일본에게 있어서 필수불가결한 만주

 잉여인구

 국 방

일본의 보호

러시아 영내의 한국인들

한국의 민족주의

인류애에의 호소

 고 통

 억 압

 정 탐

【부록】

일본인의 잔혹함

훈춘 사건

도쿄 대학살

서 론

 본 소책자는 중일분쟁 문제에 대한 의사결정을 위해서 국제연맹, 언론매체, 공정성을 대표하는 모든 사람들과 조직들에서 파견된 정부대표들의 관심을 집중시키는데 그 목적이 있다. 그런데 이들 대표자들은 극동문제를 공정하게 해결하는 작업에 있어서 중요한 문제 중 하나로 한국문제에 관한 리튼(Lytton)보고서에서 강조하고 있는 억압받는 자들의 정의를 대변하고 있다.

 이제 국제연맹은 중일분쟁에 관하여 내린 결정을 계기로 국제분쟁에 있어 도덕적 법정으로서 그 지위를 더욱 강화시켰다. 여기서 그 결정이란 리튼위원회에 의해서 보고된 공정성과 사실에 기초한 결정을 의미한다. 국제연맹에서는 이 같은 만주의 한국인 문제가 당연히 고려의 대상이 되어야만 한다.

 간략히 말해서 리튼보고서 및 이에 대한 첨부문서들에서 이용된 인용들은 가능한 한 최소한의 해설을 덧붙였다. 원문이 사용된 인용에서 축어와 보고서의 쪽수는 참조를 위해 추가되었다.

목 적

 한국, 만주, 시베리아, 하와이, 미국, 멕시코 및 그 이외의 지역에서 살고 있는 2,300,000명의 한국인들로부터 공인받은 우리 대표들은 통상 만주로 알려진 중국 동부의 세 지역에 살고 있는 백만 이상의 한국인들의 법적인 ‘지위’, 즉 이들의 ‘이중 국적’과 일본의 간섭 없이 만주에서 살고 땅을 구입하거나 빌릴 수 있는 ‘권리’에 관한 문제에 있어서 정의롭고 공정한 해결을 요구한다는 사실에 국제연맹 회원국들의 관심을 모으게 된 것을 영광으로 생각한다.

 한국의 잃어버린 독립을 회복하기 위하여 한국의 정당한 권리를 주장할 수 있는 보다 적절한 시기를 기다리면서, 우리는 만주분쟁과 복잡하게 얽혀 있으며, 중일문제와 관련하여 무시될 수 없는 국제연맹이 절적하게 이해할 필요가 있는 만주의 한국인들과 관련된 문제들로 논의를 한정하고자 한다.

 이들 한국인의 ‘고통’과 ‘희생’의 감정들을 표출함에 있어서 우리는 리튼보고서의 시각에서 상황을 적절하게 이해한 후에, 국제연맹이 일반적으로 한국인들 그리고 특별히 해외에 거주하고 있는 한국인들이 어느 국가를 선택하든 거부당할 수 없는 귀화의 권리를 가지며, 이들이 선택한 국가의 국법에만 종속되며, 다른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일본이 이 같은 귀화를 존중할 것을 요구한다.

혼란의 원인

 전 세계의 평화를 위협함과 동시에 수백만의 엄청난 동양인들을 끊임없이 공포와 공황상태로 몰아넣는 극동 위기의 근본적인 원인은 일본의 소위 ‘아시아 정복이라는 적극적인 정책’이다. 군사적 정복의 영광에 중독된 호전적인 사람들의 영토 야심 때문에 극동에서 야기되는 혼란은 이웃집을 무력으로 점거하고, 이웃의 어린이들을 때려서 이들을 다른 집으로 피난가게 하고, 어린이들이 보호를 필요로 한다는 명목으로 다시 이들을 쫓아가서 그 집을 점거하는 주정꾼의 이야기로밖에 설명할 수 없다. 공황에 휩쓸린 이웃은 문제가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면서 그 집으로부터 어린이를 내쫓으려 하였다. 그러나 이 어린이는 다른 누군가에 의해서 양육될 수 없으며, 그 집에서 살 권리가 있으며, 그 어린이가 거기에 있는 한 자신이 그 집을 사용할 권리를 갖는다고 주장하는 독선적인 보호자와 동행하기를 어린이는 거부하였다.

 물론 그 이웃의 나약함이 대체로 전반적인 문제의 원인이다. 하지만 공동체는 이 불행한 어린이와 나약한 이웃을 주정꾼이 마음대로 하도록 내버려 둘 것인가? 완전무장한 어떤 난폭한 사람을 방치하였고, 모든 공동체의 어떠한 집도 안전을 담보하지 못 할 것이라는 점을 이들은 깨닫지 못하였던가?

 문명세계는 이 문제에 대해 조금도 귀 기울이지 않을 것인가? 그 어린이의 울음소리가 들릴지도 모르며, 어려운 상황에 놓은 어린이의 슬픈 이야기는 리튼위원회의 보고서에서 발견할 수 있다.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한국과 만주문제

 다음의 리튼보고서에서 발췌한 부분은 한국인의 문제가 만주인들의 문제와 분리할 수 없을 정도로 연계되어 있어서 다른 한 쪽에 대한 해결책을 함께 찾지 않고서는 이 문제가 항구적으로 해결될 수 없다는 것을 한 눈에 보여주기에 충분하다.54_054_0 (한국인 문제는 다음의 쪽에서 충분히 논의되었다(리튼보고서 55~63쪽, 109쪽, 1번째 단락, 111쪽 첫 번째 단락)(첨부문서 24쪽, ‘연구 9번’, 251~279쪽).)닫기

 리튼보고서의 3장에 있는 ‘연구 9번’의 제목은 ‘중일분쟁의 요인으로서 만주에서의 한국인 문제들’이다(첨부문서 251쪽). 한국인 문제를 언급한 보고서의 다른 부분들은 다음과 같다. ‘한국인 문제에 대한 위원회의 각별한 관심’(리튼보고서 60쪽) ‘한국인 문제가 중일 적대감을 강화시켰으며, 한국인들 자신들을 희생시켰다’(리튼보고서 56쪽) ‘경찰 관할권의 갈등으로부터 발생되는 심각한 문제들, 특히 한국인과 관련하여 야기되는 심각한 문제들’(리튼보고서 58쪽)

 “중국인으로 귀화하지 않았을 때, 일본법에 따라 일본인 국적을 획득한 만주의 백만 한국인들의 존재는 일본과 중국 경찰 간의 갈등을 조장하는데 기여하였다. 이 같은 상황으로부터 다양한 논란들이 야기되었던 바, 결과적으로 한국인들은 고통과 잔인한 만행의 희생양이 되었다”(첨부문서 259쪽).

만주의 한국인 인구

 일본인 저자의 합리적인 추정에 따르면 만주의 한국인 인구는 약 800,000명 정도라는 것이다(첨부문서 253쪽). 한 한국인 저자는 “일본의 영사관에 알려지지 않은 채 만주안에서 무척 많은 한국인들이 살고 있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전체 한국인 수를 1,300,000명에서 2,000,000명 사이로 추정하고 있다”라고 지적하였다(첨부문서 254쪽).

 또 다른 일본인 저자는 “19년 사이에 800,000명 이상이 만주에 정착하였으며, 이 숫자는 25년 동안 한국인보다 유리한 환경에서 촉진된 200,000명이 안 되는 일본인 이주민들의 숫자에 비해 놀라운 것이다.”(첨부문서 253쪽)

여기서 “400,000명의 한국인들이 3대 1의 비율로 중국인을 압도하는 한국의 북쪽 국경지대인 간도지역에서 특별한 문제들이 발생하였다”는 것을 주지해야 한다(첨부문서 260쪽).

초기 정착민들

 한국인들 또는 이들의 조상들은 푸유(Fu-yu)시 근교의 만주에서 뚜렷하게 구별되는 인종적 집단으로 최초로 등장하였다. 몇 세기가 지난 후 고구려와 발해왕국이 만주에서 건설되었으며, 13세기 동안에 발해가 압록강을 넘어 남쪽으로 한반도에까지 확장되었다(첨부문서 256쪽).

 일본인 저자들 사이에는 한국인들이 만주땅에 대한 초기의 소유권, 특히 이들의 전통에 의해 자신들의 정당한 세습재산으로 간주되는 지역에 대한 소유권을 갖고 있다는 주장이 있다. 요동반도는 한때 고구려왕국의 영향력 아래 있었다. 여전히 고대한국 문명의 흔적을 갖고 있는 지역인 북간도의 누탄(Nutan) 계곡에 위치한 영고탑은 오늘날 한국인 공동체의 매우 중요한 중심지이다(첨부문서 257 · 268쪽).

 만주인들이 중국에 그들 자신의 왕조를 설립하기 이전에 간도지역에는 매우 많은 한국인이 있었다. 1881년 후 길림지방은 한국인 이주자에게 개방되었다. 1909년 이전에 만주의 한국인 인구가 얼마였는지를 말하기란 불가능하다(첨부문서 257쪽).

최근의 대량 탈출

 1910년 일본이 한국을 합병한 이후, “한국인들이 조국으로부터 대량 탈출을 감행한 근본적인 원인은 한국인들의 고국에서의 고단한 삶에 의해서거나 혹은 이민장려에 의해서거나 이주 장려를 위해 고안된 일본의 식민지정책의 결과였다”(첨부문서 261쪽).

이주의 원인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한국인들이 한반도에서 일본의 정치적 통치행위에 대한 불만때문에 만주로 이주하였는가라는 문제의 제기이다. 아마도 많은 한국인들에게는 이상적인 세계가 주어졌다고 하더라도, 이는 일본의 지배하에서는 불만족스러웠을 것이다. 합병시기 이전에 이러한 사람들 사이에 뿌리깊게 자리잡은 적대감이 있지 않았던가?”(첨부문서 263쪽) 일본인 고리대금업자들, 불법 토지점유자들, 그리고 무법자들에게 일본지배하의 한국은 이상향이었다.

 허버트 웰취(Hebert Welch) 주교는 다음과 같이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였다.

  “일본당국의 식민지정책 중 두 세 가지 정책이 매우 근본적으로 그리고 치명적으로 실패하였다는 것은 매우 자명하다. 한국의 발전이 일본의 결코 이타적이지 않은 동기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라고 한국인들이 생각한 것은 사실이다. 일본인들은 한국인들의 이익을 위해서라기보다는 자신들의 점유와 이익을 위해서 한반도를 보다 발전시키려 하였다”(첨부문서 263쪽).

  “무엇보다도 한국인들의 가장 큰 불만이었던 조선에서의 일본통치의 현저한 특징은 일본 헌병대 및 경찰의 상시적인 감시였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많은 한국인들, 특히 식자층들과 구체제하의 관직 보유자들이 조국을 떠나야 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일본인들에게 유리한 차별대우의 감소의 필요성을 인식하였던 사이토(齊藤實) 총독의 문화통치가 일본이 당면한 심각한 문제들에 대처하는데 많은 기여를 하였다는 것은 확실하다. 한국인들을 설득시키는 과제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고 있다. 이 점은 현재 조선총독부의 일본인 계몽관료들에 의해서 인정되고 있다”(첨부문서 264쪽).

  “한국문제는 전반적으로 농업과 연관되어 있다. 토지문제, 특히 합병 이후 초기의 일본인 이민자들에 의한 한국인 농민들의 어느 정도의 퇴출, 특히 동양척식회사와 같은 일본인 토지회사에 의한 농업용 토지의 획득, 정부의 이전 왕실토지의 획득과 관리, 토지소유권 문제가 제기되었을 경우에 중요했던 농지대장, 소득 증가에도 불구하고 한국인 토지소유자 및 소작인의 채무 증가, 농지의 융자회사에 저당 잡히기, 그리고 전반적인 인구문제를 수반하는 심각한 소작문제는 한국인 농민들로 하여금 이주를 택하도록 하는 주요한 원인들의 한 범주가 되었다”(첨부문서 264쪽).

  “특히 한국에서의 도로건설 및 행정에 대한 연구를 수행한 동경제국대학의 교수 요시노(Yoshino) 박사는 한국인 토지의 탈취와 자신들의 경작지에서 농민들의 계절별 노동력의 수요에 대한 신중한 고려없이 이 같은 도로건설을 위해 한국인 농민들의 노동력 동원체제를 강력하게 비판하였다”(첨부문서 264~265쪽).

  “일본인들의 이익을 위한 토지의 획득에 대하여, 심지어 합병 이전에도 불필요하게 방대한 토지가 실질적으로 ‘군사적 목적을 위해’ 징발되었다. 광물에 대한 권리를 포함하여, 모든 유기된 토지에 대한 양도권을 단 한명의 일본인에게 부여하고, 알려져 있듯이, 한반도의 모든 경작 가능한 토지의 절반 이상을 자신의 소유로 삼겠다는 악명 높은 노가모리(Nogamori) 계획은 많은 반대에 직면하였으며, 결국 철회되었다. 그 이후 바로 총리가 된 가츠라 다로(桂太郞)는 한국에서 돌아온 후 한국은 약 30퍼센트 정도의 인구 증가를 담당할 수 있는 충분한 토지를 가지고 있으며, 이러한 증가분의 상당부분이 일본인으로 구성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에 대한 명확한 이유가 없다고 지적하였다”

  “가츠라는 한국에서의 일본인의 농업 정착 장려 등을 포함한 토지 개발이라는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설립된 동양척식회사의 주요 창립자의 한 사람이었다”(첨부문서 265쪽).

  “정부 통계에 의하면 한국의 약 10퍼센트 미만의 농지 및 주거용 토지를 일본인이 소유하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몇몇의 견실하고 저명한 사설 조사관들의 견해에 따르면, 10퍼센트로부터 20퍼센트에 이르는 토지가 일본인 소유라는 것이다. 1927년 한국의 농촌상황에 대한 권위자이자 매우 탁월한 연구를 수행한 컬럼비아 대학의 브루너(Edmond Brunner) 박사는 조세 기록을 통해 남부의 일부 지역에서는 토지의 절반 이상이 일본인 소유였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아마도 이 같은 토지의 사분의 일은 한국인 소유로부터 일본인 소유가 된 것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일본 당국은 브루너 박사가 제시한 이러한 수치가 매우 높은 것이라고 주장하였다”(첨부문서 266쪽).

  “일본 작가인 아마노(天野)는 동양척식주식회사, 후지산업개발 그리고 일본인 자본가와 함께 다른 단체들에 의한 토지의 구매 및 일본인 농업정착민들의 이주는 한국인 지주 및 농민 붕괴를 촉진하였으며, 농지 임대료의 증가를 야기시켰다”고 지적하였다(첨부문서 261~262쪽).

쌀 경작

 “농업에 관한 한 중국농민들이 아니라 한국인들이 만주의 쌀 문화 발전에 기여하였다는 것이다. 1900년 이후 한국인의 대량 이주가 있기 오랜 전에 특히 타시치아오(Tashichiao) 주변의 남부 봉천지역의 중국인들이 건조한 논을 경작하였다는 것은 확실하다. 길림 및 흑룡강지방의 많은 중국인 농민들은 한국인들로부터 쌀 경작법을 배웠지만, 그 수는 비교적 적었다. 최근 몇 년간 만주에서 쌀 생산량이 괄목할 만하게 증가한 것은 한국인 때문이었다. 남만주철도회사 연구소에 따르면, 쌀 생산은 대략 1915년 7,000,000부셀(bushel-약 36리터, 약 2말)에서 1930년 17,000,000부셀(논벼 8,225,929부셀과 고지대 쌀 9,224,216부셀)로 증가하였다. 러일전쟁 이전에는 있었다고 하더라도 그 양이 매우 미미하였던 창춘의 북쪽 즉 북만주에서도 쌀이 재배되었다. 논벼와 고지대 쌀 경작은 러일전쟁 중 군대에 식량을 제공하였던 한국인 농민들에 의해서 심양과 하얼빈 사이의 지역에 도입되었다. 1915년 논은 중국동부철도의 동쪽지역을 따라 발견되었으며, 그 이후 쌀 경작은 송화강, 아무르강, 그리고 우수리강의 남쪽지역으로부터 위도 52도의 북부지역에 이르기까지 점진적으로 확대되었다”(첨부문서 256쪽).

 이와 같은 북부지역에서 쌀이 대규모로 재배되는 곳은 세계 어디에도 없으며, 쌀 문화의 전문가인 하얼빈의 러시아인 농업경제학자는 지배적인 견해와는 달리 만주에서 경작지당 생산량이 일반적으로 자바와 필리핀 섬과 같은 열대지역보다 훨씬 많다는 흥미로운 주장을 제기하였다. 또한 만주에서 한국인 농민들에 의해서 경작된 논의 면적보다 고지대 쌀의 면적이 훨씬 많은 것도 흥미롭다. 이와 관련하여 한국인 경제학자인 이훈구(H. K. Lee)의 말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만주에서 한국인 식민지화의 기반은 각별히 쌀 경작이다. 논(151,238에이커)은 약 26퍼센트에 이르며, 건조한 재배지(492,541에이커)는 한국인의 총 농지 면적의 74퍼센트에 이른다. 개척자들이 오랫동안 일하면 할수록, 건조한 논 경작지의 비중이 더욱 증가한다. 한국의 국경지대에서 건조한 재배지의 면적은 논 경작지보다 훨씬 크다. 이는 단지 한국인들이 대체로 쌀 경작이 가능한 새로운 장소에 정착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들 한국인은 이후 쌀 경작에 적합한 토지가 줄어들자 건조한 땅을 또한 활용하였던 것이다”(첨부문서 256쪽).

일본에 대한 한국인의 적대감

 “영국인 정치가 겸 동아시아를 연구한 쿠르존(Curzon) 경은 1890년대 초에 한국을 방문한 후 한국인과 일본인 사이의 인종적 적대감이 현재 한국의 가장 현저한 현상이라고 지적하였다”(첨부문서 263쪽).

 만약 역사가 인간의 정서에 영향을 미친다면, 그것은 어떤 하나의 ‘현상’으로 불릴 수 없으며 또한 ‘현대’ 한국에 한정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지난 4세기를 포함하는 중국에 대한 일본의 군사적 정복을 향한 첫걸음으로서 한반도에 대한 일본의 반복된 침략에 따른 매우 자연스러운 결과이다. 이러한 모든 공격 중에서 가장 비참한 것은 3,000,000명의 한국인 남성, 여성 및 어린이들이 사망하고, 국토가 완전히 황폐화된 1592~1597년의 히데요시(豊臣秀吉)의 침략이었다. 최근의 사건들은 이러한 전례에서 기인한 적대감을 완화하는데 기여하지 못하였다.

 리튼보고서는 ‘한국인이 만주로 이주한 정치적 원인들”이라는 주제 아래 다음과 같이 계속해서 언급하고 있다.

 “한국인은 매우 강렬한 인종적 그리고 문화적 의식을 가지고 있다. 이는 심지어 유교적 전통 위에서 오늘날까지도 발전된 매우 유서 깊은 문화이다. 1905년으로부터 1910년에 이르는 전환기에 한국을 지배했던 원래 왕조의 단점들이 무엇이었든지 간에, 그리고 자신들의 권력을 남용했던 소수의 지배자들이 있었다는 점이 잘 알려져 있지만, 적어도 대다수의 농민들과 매우 보수적인 한국인들은 왕조 전통 자체에 대한 깊은 존경심을 가지고 있었다. 오늘날의 한국에서 새로운 많은 것들과 한국 왕조의 몰락을 둘러싼 많은 여건들은 한국인의 전통과 특성을 모독하였다.”

 “1895년 왕비 시해에 대한 일본공사의 개입, 1907~8년의 약 5,000명의 한국인 애국 게릴라들이었던 ‘의병’을 진압하기 위하여 일본이 취한 과격한 조치들, 그리고 당시 대부분이 농민인 14,000명의 한국인들이 살해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 또한 가혹한 군국주의적 통치는 일본 의회에서 ‘군사 독재’[무단통치]로 묘사되었으며, 이는 1919년 독립운동에도 원인이 되었다. 윌슨(Woodrow Wilson) 대통령의 민족 자결로부터 영향을 받았지만, 일본 헌병의 감시 하에서 증가하는 삶의 고초들을 통해 구체화된 ‘만세’ 운동으로 알려진 전국적인 시위는 1910년 왕조의 지배에 종말을 고한 옛 한국 황제의 국장 전날에 일어났다. 비록 소위 독립운동이 그 날 이후 점차 덜 중요하게 되었을지라도, 1919년의 봉기를 제압하고 그 이후의 독립 옹호를 진압하기 위해서 일본 당국이 취한 가혹한 조치들은 한국인들의 마음에 한국에서 이룩한 일본정부가 한국에서 이룩한 물질적인 성취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한국인들에게 각인하는 데에는 도움을 주지 못하였다”(첨부문서 268쪽).

 리튼보고서는 명백한 이유들로 해서 양 국민들 사이의 오랜 인종적 적대감의 불길에 기름을 부은 매우 현저한 일부 사건들을 누락하였다. 서양인들은 명주로 된 기모노, 국화, 벚꽃의 위장 뒤에 매우 조심스럽게 감춰진 ‘문명화된’ 일본의 추한 부분들을 너무 늦기 전에 보는 것이 좋을 터인데 그러하지 못하였다. 한국의 전 황제의 독살은 1919년 3월 독립운동의 촉발 요인으로 기억되어야만 한다. 소극적인 저항을 억압하는데 사용한 일본인의 잔인한 방법들과 일본의 감시에도 불구하고 조금씩 외부 세계에 알려진 외국인의 목격담에 기초한 학살 및 고문에 대한 수많은 증언들은 전 세계인들에게 정의에 대한 깊은 분노심을 불러 일으켰다. 부록에서 이 같은 이야기들의 일부를 발견할 수 있다. 그리하여 한때 한국 기독교도들이 “오 주여, 우리가 어떻게 우리의 이웃을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던 기도는 놀라운 일이 아니다.

한국인들에 대한 중국인의 태도

 “중국인들의 시각에 따르면, 일본인이 모든 주요 관직을 독점하고, 도처에 깔린 헌병대에 의해서 한반도가 통치되며 외국 정부의 지배를 받는 억압받는 민족 한국인들은 정치적 자유와 보다 나은 경제적 여건을 위해 만주로 이주하였다. 이 같은 이주는 경제적 자산으로서 환영받았으며, 자신들의 세습 재산을 박탈당한 ‘억압받는 민족’은 오랜 고통과 가난에 대한 자연스러운 동정심과 인류애적 동정의 지지를 받았다. 이것은 인구의 90퍼센트가 농민이었던 한국인들의 경우에 더욱 그러하였다. 이들 한국인들은 만주에서 논을 경작하지 않는 중국인 농민들과 경쟁관계에 있지 않던 산업인 쌀을 경작하였다”(첨부문서 260쪽).

 “하지만 사실은 아마도 간도 바깥의 만주에서 600,000명 이상의 한국인들이 살았으며, 특히 이들은 만주의 절반인 동부지역에 넓게 분산되어 있었고, 한국의 북쪽에 놓여있는 지역인 길림지방에 집중되어 있었으며, 동청철도의 동쪽 부문의 지역과 송화강 하류 계곡의 지역에까지 많은 수의 사람들이 들어와 있었다. 게다가 부분적으로 몇 세대 전에 그 선조들이 이주한 한국인의 상당수 집단들이 만주출신이기 때문에 그리고 다른 사람들은 일본에 대한 충성심을 철회하고 중국인으로 귀화하였기 때문에, 오늘날 매우 많은 한국인들은 실제로 토지의 소유권과 임차권에 의해서 간도 바깥에서 만주의 농지를 소유하고 있다”(첨부문서 268쪽).

 “일본 영사관 관계당국은 한국인의 15퍼센트 이상이 중국으로 귀화하였음을 인정한다. 한국인이 일본 영사관으로부터 더 멀리 떨어져 있을수록, 중국인으로 귀화하는 경향이 더 많았다. 이것은 특히 출생에 따른 귀화에 의해서 오래 전에 중국시민이 된 주민들이 사는 몇 몇 한국인 마을이 있는 영고탑 주위의 길림지방, 물탄(Mutan) 강 지역에서 매우 뚜렷하다. 많은 사람들이 중국옷을 입으며, 자신들의 민족과 문화의식을 상실하지 않은 채, 한국인에 관하여 중국과 일본 사이의 양립할 수 없는 정책들 때문에 침해받아왔던 것과 같은 정치적 문제들을 제외한다면, 한국인들은 중국인들과 친근한 관계 속에서 살거나 살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면서 중국사회에 적응하였다. 수년 동안 대체로 전문적으로 한국인들에게 관심을 가져왔던 하얼빈의 한 외국인 거류민은 1932년 여름에 필자에게 북만주의 모든 한국인의 절반은 아마도 “중국시민권을 가지고 있다”는 자신의 견해를 표명하였다. 이와 마찬가지로 오랫동안 북만주의 한국인 공동체의 상황에 대해서 잘 알고 있는 하얼빈의 또 다른 외국인 거류민은 다음과 같은 견해를 필자에게 말하였다.

 “내가 받은 인상으로는 철도로부터 떨어진 동길림지방에 있는 밀산과 주닌시엔(Jungninshien)을 포함하는 동청철도의 동쪽 부문을 따라있는 지역의 한국인들 중 80 퍼센트는 완전히 귀화하였다는 것이다. 리슈첸(Lishuchen)을 떠나 방문한 길림의 한 마을 사람들은 모두 중국국적을 취득했으며, 일부 노인들을 제외하면 모두 중국옷을 입고 있다는 것이다. 그곳에는 일본인이 없었고, 마을 사람들에 대한 보호가 전혀 없었으며, 이들도 아무런 보호를 필요하지 않았기 때문에 일본국적을 보유해야 할 특별한 이유가 없었다. 한국이 외국의 지배로부터 독립하지 않는 한 이들은 한국으로 돌아갈 것을 결코 기대하지 않는다. 이에 대한 하나의 예외는 몰핀과 아편 판매에 관여함으로써 일본 영사의 보호를 받고 있었던 하얼빈지역의 일군의 한국인들이다”(첨부문서 270쪽).

 “일본 외무성으로부터 획득한 가장 최근의 수치에 따르면, 간도의 총 경작 가능한 토지는 440,000조(1조는 2.45에이커와 동일하다)이며, 그 중 242,000조는 현재 경작중이다. 실제로 경작이 이루어지고 있는 지역에서 141,500조는 한국인 소유로 되어 있으며, 100,500조는 중국인 소유로 되어 있다. 이 수치들은 자유소유권에 의거하여 일본인이 간도에서 농지를 직접 소유하지 않았다는 인상을 제공한다. ‘차명’의 사용을 통해서, 특히 일본의 대출기관의 관행으로 인해, 특별히 간도에서의 토지 담보권을 가진 동양척식회사의 행위에 의해서 그리고 그 밖에 만주에서의 토지저당권이라는 매개를 통해서 소유권이 자취를 감춰지는 경우에는 이 같은 가정이 의문을 제기받을 수 있다. 동양척식회사는 몇 년 전에 활동범위를 만주와 동부 내몽골로 확대하였다. 비록 확인할 수는 없을지라도 경작된 토지 200,000조 이상 중에서 50,000조 이상의 토지가 특히 동양척식회사의 활동을 통해서 1928년까지 일본인에 의해서 취득되었다고 전해지는 간도 지구의 룽친순(Lungchinsun)에 동양척식회사의 지방 사무소가 설치되었다”(첨부문서 268쪽).

 “다른 한편 중국인들은 경작 가능한 저지대에서 동일한 쌀 생산을 기대하면서 일반적으로 토지가 일본인의 손에 넘어가는 것을 막기 위해서 한국인을 소작인이나 노동자로 고용하였다”(첨부문서 269쪽).

분쟁의 시작

 일본군의 한반도 침략이 한국 가정 및 국가에 엄청난 비참함과 파멸을 초래하였던 것과 마찬가지로 일본군의 대륙 침략은 만주에 있던 한국인 공동체에 공포와 절망을 확산시키기 시작하였다. 1910년 한일합방 이후 “한국에서 일본인 이민자들을 위한 공간을 만들면서 만주에 있던 한국인을 ‘아시아 대륙으로의 경제적 군사적 침략의 선봉대”로 활용하려는 두 가지 목적을 지닌 일본의 정책은 한국인들을 자신들의 토지로부터 추방하려는 방향으로 정교하게 추진되었다.” 중국정부 및 중국인들은 한국인 정착민들을 개척자로 환영하였으며, 마치 그들이 시골사람이었던 것처럼 토지를 구매하고 임차할 수 있는 특권과 중국인과 거주할 수 있는 권리를 인정하였다. 중국인들은 다른 어떤 동기가 없다면, 한국인처럼 중국인들과 같이 살고자 이주해온 일본인 이민자들에게도 똑같은 대우를 하였을 것이다.

 하지만 일본은 자국으로의 정치적 지배권을 중국으로 확대하기 위한 효과적인 수단을 강구하기에 충분할 정도로 한국인의 수가 많다는 것을 인식하자, 합병 이후 한국인이 일본의 신민이며, 따라서 일본의 경찰과 헌병대의 감시체계를 중국 영토로까지 확대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일본을 만족시키려는 중국의 노력

 중국의 정책은 일본의 요구를 만족시킴으로써 문제를 해결하려는 것이었다. 중국정부는 이 같은 의도에서 처음에는 한국인의 민족주의 활동을 억제하려고 하였다. 이것이 일본을 만족시키지 못하자, 중국은 모든 한국인을 중국인으로 귀화시키려고 하거나 중국 영토를 떠나도록 강요하였다. 많은 한국인들이 중국인으로 귀화하자, 일본 황제가 귀화 특권을 한국인에게 결코 부여한 적이 없기 때문에 한국인의 중국인으로의 귀화를 인정할 수 없다고 일본정부는 주장하였다. 한편 중국은 한국인이 중국에서 거주하고, 토지를 구매하거나 임차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질 수 없다고 규정하였다. 일본은 이를 한국인에 대한 중국의 억압이라는 누명을 씌우면서 중국 영토에 대한 일본의 경찰 관할권을 확대하였다. 따라서 갈등을 피하고자 중국이 기울였던 모든 노력이 수포로 돌아갔다. 영토 점령이 아닌 다른 어떤 것도 일본을 만족시키지 못할 것이라는 점이 분명하였다.

 한국인 사회에 대한 탄압

 “한국인에 대한 일종의 동정심을 인정한 중국인들은 1925년의 미쓰야(三矢)협정에 관심을 가졌다. 이 협정은 일본이 ‘악질’로 한국에서 일본인들의 지위에 대한 위협으로 간주한 한국인들의 활동을 규제하고자 하는 중국 당국의 의지와 한국인들에 대한 중국인들의 ‘억압’의 사례인지를 다른 이들로 하여금 믿도록 하려는 행위들에 대한 일본의 공식적인 승인의 증거였다”(리튼보고서 61쪽).

 “중국 당국이 한국에 있는 일본 당국으로부터 지명 수배된 한국인 사회의 지도자들을 즉각 체포하고 송환하며,” 중국 경찰이 ‘악질’ 한국인들을 체포하여야 하며, 이들을 재판 및 처벌을 위해 일본인에게 넘겨주어야 한다는 것을 명시한 그 조약은 동 봉천지방의 한인사회(주로 반일 인사들)를 억압하는데 있어서 중국과 일본 경찰 사이의 협력을 제공하였다. 그러므로 중국정부는 “한국인들을 관리함에 있어서 몇몇 규제 조치들이 강제력을 가지게 된 것은 주로 이러한 조약에 실질적인 효력을 부여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주장하고 있다”(리튼보고서 61쪽).

 중국의 한국인 귀화 장려

 “1914년 중국 국적법에 따르면, 오직 중국의 국법에 의해 다른 나라로 귀화하는 것이 허용된 외국인들에게만 중국인으로 귀화하는 것이 용인되었다. 하지만 중국은 외국인이 원 국적을 포기해야 한다는 조항을 포함하지 않은 국적법을 1929년 2월 5일에 개정하였다. 따라서 한국인은 일본법에서는 귀화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일본의 주장에 관계없이 중국인으로 귀화하였다. 일본 국적법은 결코 한국인이 자신의 일본 국적 상실을 허용하지 않았으며, 비록 1924년에 수정된 국적법이 “외국 국적을 자진 획득한 사람은 일본 국적을 상실한다”는 조항에 효력을 인정하였을지라도, 이 일반법은 제국의 특별령에 의해 결코 한국인에게는 적용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특정 지역에서, 특히 일본 영사관의 접근이 용이하지 않은 곳에 거주한 전체 한국인 중 5퍼센트에서 10퍼센트에 이르는 많은 한국인들이 중국인으로 귀화하였다. 우연하게도 만주 국경선을 넘어서 소련의 영토로 이주한 사람들도 소련 연방의 시민이 되었다(리튼보고서 57~58쪽).

 “만주 당국이 귀화하지 않은 한국인을 차별하는 명령들을 하달하였다는 사실은 중국에 의해서도 부정되지는 않았다. 특히 1927년 이후 만주의 중국정부가 일본의 지배권을 수반하는 한에 있어서 한국인의 이주를 당연히 반대해야 하는 위협으로 대개 간주하였다는 것을 확인시켜주는 다수의 명령들과 지시들이 있다”(리튼보고서 60쪽).

 “특히 일본 영사관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지역의 관리들은 종종 귀화를 지원하는 한국인들에게 그러한 (귀화) 확인증의 발급에 쉽게 동의하였으며, 종종 한국인이 귀화하도록 실제로 강요하거나 한국을 떠나도록 강요하였던 것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이 같은 행위들은 일본 경찰에 의해서 그리고 귀화 관련 수수료 수익금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중국은 일부 일본인들이 실제로 한국인들을 차명 토지소유자로 활용하기 위하여 또는 귀화한 한국인들로부터 이전된 토지를 취득하기 위하여 이들의 귀화 과정을 묵인하였다고 주장하였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말하자면 일본정부는 한국인의 귀화를 승인하지 않았으며, 어디에서든 가능한 이들에 대한 지배권을 주장하였다”(리튼보고서 58쪽).

조약상의 권리들

 “중국은 한국인이 간도 너머의 만주에서 농지를 구매하거나 임차할 수 있는 권리를 부정하였다. 왜냐하면 이와 관련하여 중국과 일본 간에 체결된 협정은 오직 1909년의 간도협약으로서, 이는 간도지역에만 적용되도록 그 범위가 제한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오직 중국인이 된 한국인만이 토지를 사거나 이와 관련하여 만주에 거주하거나 토지를 임차할 수 있는 권리를 부여받았다. 만주에서 토지를 임차할 수 있는 한국인의 권리를 부정하게 되면, 중국정부는 특별 토지 소유와 더불어 거주권을 한국인에게 인정했던 1909년의 간도협약이 오직 간도지역에서만 그 효력을 갖는다고 주장하였으며, 한국인은 중국 통치권에 복속된다는 점을 명시하였다. 그리고 이 협약은 “그 지역에서 발생하는 중국과 일본 간의 국지적인 문제들은 상호 양보에 의해 해결하게 된다고 주장하는” 그 자체로서 자기 충족적인 도구이다. 간도협약에는 일본이 한국인에 대한 지배권의 권리를 포기하고, 중국이 한국인들에게 농지의 특별 소유권을 인정한다는 내용이 포함되었다. 중국이 1915년의 조약과 각서들이 간도협약을 대체할 수 없다고 주장하였기 때문에, 양국은 1910년 일본의 한국합병 이후에도 협약을 계속해서 준수하였다. 특히 새 조약은 “간도와 관련하여 중국과 일본 사이에 존재하는 모든 조약들은 이 조약의 내용과 다른 경우를 제외하고서 그 효력을 갖는다”고 명시하는 구절을 포함시켰다. 간도협약에는 어떠한 예외도 없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중국정부는 1915년의 협약과 각서를 간도지역에 적용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간도지역은 지리상으로 ‘남만주’-거기에는 어떤 합의된 정치적 규정이 없기 때문에 오직 이는 지리적인 의미로만 규정되어야 한다는 점에서-의 일부가 아니기 때문이었다.”

 “중국측 주장은 1915년 이후 일본에 의해서 반박되었는데, 일본의 입장은 1910년 한국의 합병에 입각하여 한국인이 일본의 신민이 된 이상 남만주와 동몽골에 관한 1915년의 중일협약과 각서의 조항들은 남만주의 일본인 신민들에게 토지 임차권 및 거주권을 인정하며, 동부 내몽골에서 협동농업사업에 참여할 수 있는 권리를 부여한다는 것이었다. 일본정부는 간도협약이 다른 조약들과 상충할 경우 1915년 협정의 조항들에 의해서 대체되며, 간도협약이 자기 충족적인 도구라는 중국의 주장은 근거가 없다고 주장하였다. 왜냐하면 간도의 한국인에게 보장된 권리는 사실 일본이 그 지역을 중국 영토의 일부로 인정한 결과였으며, 다른 일본 국민에게 인정된 권리와 특권을 추구하는 만주의 한국인을 규제하는 것은 차별이라고 일본이 주장하였기 때문이다”(첨부문서 269쪽).

이중 국적

 “중국의 중앙정부와 만주의 지방정부는 한국인의 이중 국적이라는 문제와 관련하여 한국인의 무차별적인 귀화를 달갑지 않게 생각하였다. 그것은 중앙정부와 지방정부가 한국인이 중국 국적을 임시 취득함으로써 농지를 획득하려는 일본 정책의 잠재적 도구가 될 수 있다고 두려워하였기 때문이다. 길림성지방 전역에 걸쳐서 토지의 구매와 판매를 관리하던 길림성 지방정부가 1930년 9월에 이 규제들을 시행하자, “귀화한 한국인이 토지를 구매할 경우, 영구 귀화한 시민으로서 거주의 수단으로 토지를 구매하고자 하는 것인지 아니면 일본인을 대신해서 구매한 것인지를 조사해야 한다는 점이 제시되었다.”(첨부문서 271쪽)

 길림성 지방정부는 지역 당국자들에게 1931년 6월 다음의 지시를 하달하였다.

 “당신의 관할 아래 있는 지역으로 이주한 대량의 이민자들은 대체로 농업에 종사하는 한국인들이며, 이들은 법을 준수하며 평화적으로 우리의 영토를 개발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하지만 일본정부의 입장에서는 이들을 경제 침략의 선봉대로 항상 활용하기 때문에, 결국 토지의 사기구매와 같은 사악한 방법을 동원하여 북동지방을 점령하기 위한 구상에 따라 그렇게 행동하고 있다”(첨부문서 273쪽).

 그러므로 만주에 있는 한국인들의 토지 획득에 대해 중국인들이 반대하는 주된 이유는 한국인들에게 지배권을 행사할 수 있는 권리가 일본정부에 있다는 주장과 중국 신민으로서 귀화할 한국인의 권리를 부정하는 데에 있다. 여기서 이중 국적에 관한 미묘한 문제가 발생한다. 1914년 12월 20일 중국 국적법에 따르면, 다른 나라 국민으로 귀화하는 것을 법률로 허용하는 국가의 외국인만이 중국인으로 귀화할 수 있다.

 “합병 이전의 일본의 국적법에 따라 한국인이 또 다른 국적을 획득할 권리를 부여받지 못하였다고 주장한 일본정부는 여하한 한국인도 일본법에 따라 중국인이 되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며, 중국인으로 귀화하든 그렇지 않든 간에 일본 통치권 아래 놓일 것이라는 입장을 취하였다. 일본은 소위 간도지역에 있는 한국인이 귀화를 통해서 중국인이 되는 것을 인정할 수 없다고 주장하면서, 1916년 중국과 일본정부 사이에 이 문제에 관한 각서의 교환이 있었다는 것이다. 중국정부는 그 각서가 한국인과 중국인을 차별하는 것이며, 한국인이 러시아인이나 소비에트 연방의 시민으로 귀화하는 것을 일본이 허락해야 하며, 중국과 마찬가지로 특권을 부정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첨부문서 270쪽).

일본은 한국의 합병에 의해 한국인이 ‘일본의 신민’이며, 중국인으로 귀화하는 것이 인정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한국인은 일관되게 그리고 지속적으로 이를 부정하였다. 합병이 일어나기 오래 전에 많은 사람들이 한국의 국경 밖에서 살았다. 게다가 그 조상들이 몇 세대 전에 그곳으로 이주한 수 천 명의 한국인들은 ‘만주출생’이며, 일본은 이들에 대한 어떤 권리도 없다(첨부문서 268쪽).

 모든 한국인이 일본의 신민이었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어떤 법에 의하여 일본정부는 한국인이 일본국적을 포기하고 다른 나라로 귀화할 수 있는 양도할 수 없는 한국인의 권리를 부정할 수 있단 말인가? 1924년 7월 수정된 일본의 국적법 제20조에 의해 “외국 국적을 획득한 사람은 자발적으로 일본 국적을 상실한다.” 이 법에 따르면 심지어 일본 국민조차도 일본정부의 동의 없이 자신의 국적을 포기할 수 있다. 지금 러시아와 미국 거주의 일본인은 자유롭게 자신의 국적을 포기하였고, 자신이 태어난 나라의 시민이 되었다. 여하튼 일본은 결코 한국인을 충성스러운 일본 국민으로 만들지 못하였다.

만보산사건

 만보산문제는 한국인들을 만주로 쫓아냄으로써 중국의 주권을 침해하고자 한 일본 통치의 한 전형적인 사례이다. 그 다음 일본은 한국인들에게서 문제가 야기되고자, 그 후 한국인들을 ‘보호하고’ ‘평화 및 질서를 유지하기’ 위하여 일본 경찰, 헌병대, 그리고 군대를 분쟁지역으로 파견하였던 것이다.

 한국인들은 만보산 창춘 근처의 작은 마을에서 다량의 중국인 농지로부터 용수 공급을 전환하기 위한 관개 수로를 건설하였다. 한국인들을 ‘보호하기’ 위한 일본 경찰이 없었다면, 중국 당국이 나타나서 수로 건설을 중단시켰다면, 한국인들은 수로 건설을 중단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한국인들은 일본 영사관 경찰의 도움을 받으면서 계속해서 “도랑을 팠다!”(리튼보고서 62쪽).

 400여 명의 중국인 농민들이 한국인들을 내쫓았을 때, “일본 영사관 경찰이 한국인을 보호하고 군중을 해산시키기 위하여 발포하였다. 그러나 희생자는 없었다. 중국인 농민들은 철수하였으며, 일본 경찰은 한국인들이 이퉁강을 가로지르는 댐과 수로를 완성할 때까지 그 곳에 머물렀다”(리튼보고서 62쪽).

 “만보산에서의 상황, 특히 일본어와 한국어 신문에 인쇄된 1931년 7월 1일의 사건에 관한 기사가 야기한 파장으로 인해서 일련의 反중국 폭동이 한국 전역에서 일어났다.”

 “공식 보고서에 의하면 중국은 127명의 중국인이 학살되고, 393명이 부상을 당했으며, 중국인의 재산상의 피해가 2,500,000엔이었다고 발표하였다”

 “일본정부는 이러한 폭동 발생에 유감을 표명했으며, 사망자 가족에 대한 보상을 제공하였다”(리튼보고서 62~63쪽).

 이와 관련된 사실에 대한 중요한 진술은 다음과 같다.

1) “하지만 일본은 이 같은 폭동이 민족적 감정의 자발적인 폭발에서 기인하였다고 주장하고 있다”(리튼보고서 63쪽). 지금까지 한국인과 중국인 사이에 어떤 민족적 감정도 보고된 적이 없었다. 이번 사건의 경우 이 같은 ‘불만 폭발”의 책임이 누구에게 있는가?

2) “중요한 결과는 한국에서 야기된 이 같은 소요들이 중국 전역의 反일본산 제품 불매운동을 부활시키는데 직접적으로 기여하였다는 사실이다”(리튼보고서 63쪽). 일본이 보기에 이는 한국인과 중국인 사이의 민족적 적대감을 조성하려는 모든 노력에도 불구하고, 양국 국민은 항상 이들의 공동 적인 일본에 대항하여 협력한다는 것을 설명해주고 있다.

3) “중국정부는 한국인의 거주권 및 토지임대권이 간도지역 이외에는 적용되지 않았기 때문에 한국인들이 이 같은 권리가 없는 곳에서 살고 있었다는 사실에서 만보산사건이 기인하였다고 주장하였다”(리튼보고서 63쪽). 이는 소요의 주요인을 지적하고 있다. 한국인들은 자신들의 법적 지위에 관한 어떠한 문제도 야기하지 않은 채 수 년 동안 그곳에 살았다. 하지만 일본이 한국인에 대한 ‘보호권”을 주장하자, 중국은 그 주장의 이면의 의도를 알아내자마자 즉시 한국인의 국적에 문제를 제기하였다. 그리하여 한국인은 무고한 희생양이 되었다.

4) “일본정부는 만보산으로부터 영사관 소속 경찰의 철수에 동의하였지만, 한국인 소작민들은 자신들의 논을 계속해서 경작하기 위하여 남게 되었다”(리튼보고서 63쪽). 이것은 한국인이 일본의 보호를 원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대한 뚜렷한 증거이다. 사실 한국인들은 모든 일본 경찰과 군사력이 만보산은 물론 전 아시아 대륙에서 철수하기를 원하였다.

5) ‘만보산사건과 1931년 9월 사건과의 관계’(리튼보고서 61쪽). 만주를 침략할 준비가 끝나자, 일본은 먼저 군사적 행동을 위한 구실을 확보하기 위하여 ‘민족 갈등의 폭발’을 활용하였다. 하지만 기대하였던 것처럼 중국인들이 한국인들에게 복수하지 않고 일본산 제품에 대한 전국적인 불매운동을 시작하였기 때문에 이 같은 계획은 실패하였다. 그리하여 일본은 사과했으며, 1931년 9월 18일의 군사적 침략을 위한 구실로 철도사건을 활용하였다.

중국과 한국의 우애

 한국인과 중국인은 대부분의 세대에 걸쳐서 심각한 마찰 없이 각각의 문화 및 민족적 특성을 유지하면서 만주, 간도 및 그 밖의 지역에서 수 십 년간 더불어 살아왔다.

 “실상 중국정부의 영향으로 부당한 대우를 받았다 하더라도,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중국인과 함께 하는 것에 자신들의 운명을 걸기를 원하였다”(첨부문서 271쪽).

 “여기서 만보산 소요가 발생한 동안 일본의 선동으로 한국에서는 일부 한국인들이 몇 몇 중국인들을 학살하였으며, 커다란 물질적 손해를 입혔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중국인은 한국인에 대한 보복성 폭동을 꾀하는 대신에 일본에 대한 전국적인 불매운동을 시작하였다”(리튼보고서 63쪽).

 “비록 일단 중국 국민으로 귀화한 한국인은 일본에 복종하거나 이들의 보호를 요구하는 것을 자제할지라도, 의심의 여지없이 중국인으로부터 재정적인 곤경에 처한 경우, 한국인 지주들은 일본인 대부업자 및 관리들에게 자발적으로 재정적 도움을 청하고 있다”(첨부문서 269쪽).

 “송화강 계곡의 하류와 같이 멀리 떨어진 지역에서 귀화한 한국인들이 많이 사는 한국인 공동체들은 대체로 그 지역의 촌락 경비대 또는 게릴라를 매수하거나 비적떼로 하여금 다른 비적떼와 대적하게 하는 불안정한 방법을 지원함으로써 일종의 보호를 확보하는 도적 대비 체계와 같은 비정상적인 조치들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첨부문서 270쪽).

 “중국인으로 귀화한 한국인들 중에는 독립지지자들,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맹의 국민들을 제외한) 공산주의자들, 그리고 일본 영사의 감시에서 벗어난 거주지로 인해서 혹은 특히 토지를 자유롭게 구매하거나 임차하기 위하여 가능한 한 중국인의 생활에 스스로를 많이 동화시키려는 욕망으로 인해서, 일본 국적을 벗어버리기를 선호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렇지만 확실히 일본 영사의 보호에 대한 한국인들의 의지를 포기하게 하고 귀화 관련 비용으로부터 수익을 얻기 위하여 많은 중국의 지방당국들은 많은 한국인들을 중국인으로 강제 귀화시켰다. 심지어 동부 세 개 省의 중앙정부가 이 같은 귀화를 무시하거나 제한하는 훈령을 발표하였을 때조차도, 필자의 관심을 끈 수많은 경우들에서 지방 당국들은 중앙정부의 승인을 받지 못한 ‘임시 귀화 확인증’이라는 수단을 통해서 한국인들을 지속적으로 귀화시켰다”(첨부문서 271쪽).

 “1928년 1월 심양에서 열린 ‘전만주한국인’회의에서는 일본법에 입각하여 한국인의 중국 국민으로의 귀화를 인정하는 일본 법률의 채택을 선호하는 해결책이 채택되었다는 것은 흥미롭다”(첨부문서 271쪽).

일본에게 있어서 필수불가결한 만주

 “일반적으로 말해서, 일본의 공론은 만주의 자원이 일본의 과잉 인구에 대한 효과적인 해결책을 제공할 수 있다고 확신하고 있다. 일본 국민들은 만주가 국방이라는 기본 시각에서 뿐만 아니라 경제적 시각에서도 일본에게 필수불가결하다고 믿고 있다”(첨부문서 72쪽).

 그렇다면 만주는 일본에게 있어서 일본의 인구과잉 및 국방을 위해서 ‘없어서는 안 되는’ 것인가? 일본이 자국의 국력 향상을 위한 두 가지 중대한 청원을 정말로 신실하게 제시하였다고 세계가 믿었던 시대는 지나갔다.

 과잉 인구

 일본은 한국을 합병하자, 일본의 과잉 인구를 해소하기 위해서는 한국이 필요하다는 주장을 강하게 제기하였다. 이십삼 년의 시간이 흐른 뒤에 한국에는 400,000명의 일본인이 있다. 지금 일본은 과잉 인구를 해소하기 위해서 만주를 필요로 한다는 동일한 주장을 제기하고 있다. 만약 일본이 정말로 이 같은 인구문제에 관심이 있다면, 중국과 한국이 그러했던 것처럼 지배권을 요구하지 않는 대신, 수백만 명의 일본 국민을 만주로 이주시킬 수 있었을 것이며, 중국은 이에 대해 어떠한 반대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게다가 일본만이 세계에서 인구 과잉에 직면한 유일한 국가는 아니다. “오늘날 85,000평방 마일을 가진 한국에는 이천백만 명이 살고 있으며, 매년 증가하는 인구는 이십만명 이상이다. 한국은 이미 과잉 인구 국가이다”(첨부문서 260쪽).

 “1910년에서 1920년 사이에 만주로 이주한 한국인의 총 수는 아마도 한 해 한반도의 인구 증가 수보다 훨씬 많지는 않다. 지금까지 만주로의 이주는 농업문제 해결에 거의 아무런 기여를 하지 못하였다”(첨부문서 267쪽).

 국 방

 여기서 우리는 일본이 한국을 합병할 당시 한국이 일본의 국방에 필수불가결하다고 매우 강력하게 주장하였다는 사실을 기억해야만 한다. 지금 일본은 만주를 필요로 한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 일본의 국경선이 더 확대될수록, 확대된 방어선 때문에 인접한 영토를 보다 많이 필요로 할 것이다. 일본의 확대된 국경선의 한계가 있는 것일까, 아니면 모든 국가들이 일본의 국방 이익을 위해서 자국의 국가적 존재를 희생해야 하는 것인가?

일본의 보호

 한국인에 대한 중국인의 ‘억압’에 의해서 매우 크게 고무된 일본의 ‘인류애적 동정심’은 일본으로 하여금 한국인을 ‘보호하기’ 위하여 자국의 경찰, 헌병대 및 군대를 중국 영토로 황급히 파견하게 하였다. 이 얼마나 우스운 일인가! 한국에서 일본정부에 의해 자행된 억압보다 더 사악한 ‘억압’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만주의 한국인들은 일본정부의 ‘보호’보다 중국의 ‘억압’을 선호한다.

 일본은 한국인의 독립과 존엄성을 보호한다는 미명 아래 일본의 숭고한 조약들과 당당한 항의들을 위반하면서 한국의 주권을 파괴하였다. 한국 제국의 왕실 가족의 안전과 명예를 “보호한다”는 구실로 일본은 한국의 왕후를 살해하였고, 황제를 독살하였을 뿐만 아니라 왕조를 일본 총독부로 대체하였다. 일본은 평화와 질서를 ‘보호하기’ 위하여 한국인들로부터 집과 논 그리고 국민의 권리를 강탈하였으며, 무장하지 않은 남자와 여자, 아이들을 폭행하고, 총칼로 찌르고, 총살하였으며, 남자와 여자를 감옥에 가득 투옥시켰다. 그런데 이들은 조국을 위하여 질서정연한 집회에서 다른 잘못 없이 (오랫동안) ‘만세’를 외쳤다는 사실만으로 채찍질 당하고, 고문을 받았으며, 불구가 되고, 살해당한 애국인사들이었다. 이 불행한 한국인들은 오직 이러한 일본의 ‘보호’를 피하기 위해서 사랑하는 조국을 떠났다. 그러나 이들은 자신들을 다시 구속하려는 손길이 지금 만주로 뻗쳐 오고 있음을 인식하고 있다. 이들은 소위 중국의 억압보다 스스로 부과한 일본의 많은 보호를 두려워하며, 이에 분노하고 있다.

러시아의 한국인들

 “해마다 엄청난 ‘逆이민’이 있을지라도, 한국에서 만주로, 그리고 만주에서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의 영토로의 국경선을 가로지르면서 이루어지고 있는 한국인 이민이라는 요소는 문제를 더욱 복잡하게 한다”(첨부문서 252쪽).

 “한국인 공동체는 북만주 경계선을 따라 만주는 물론 시베리아와 아무르 강변에 이르기까지 전역에 흩어져 있으며, 최근 소비에트 연방으로부터의 한국인 ‘逆이민’으로 인해서 그 숫자는 현저하게 증가하였다. 사실 한국인들은 동부 길림지방에서 우수리 강과 아무르 강을 넘어서 인접한 러시아 영토에까지 수년 동안 동쪽으로 그리고 북쪽으로 이주하였다. 북만주 주변의 시베리아 횡단열차의 아무르 노선을 넘어가는 흔치않은 여행자는 블라고베스첸스크(Blagovestchensk)에서 하바로스크(Habarovsk) 사이의 역에 진입하는 열차를 환영하는 상당수의 농민들이 한국인들이라는 것을 거의 인식하지 못할 것이다. 1929년 이 많은 한국인들과 이야기를 나누었을 때, 필자는 이들을 중국인이라고 생각하였다. 왜냐하면 이들은 중국 옷을 입고 있었고, 두 나라 말이나 세 나라 말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블라디보스토크에 한국인들이 그렇게 거주한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첨부문서 254~255쪽).

덜 중요한 두 번째 집단은 한국의 북동지역으로부터 두만강의 하류지방을 건너 이주하거나 또는 소비에트 사회주의공화국의 연안의 해안선을 통해 이주하였다. 그리고 이들은 우수리 강의 우측 강변에 있는 니콜스크 북쪽과 한카 호수 주변으로 흩어졌다. 거기서 멀리는 시베리아에까지 이주하였다(첨부문서 259쪽).

 “간도 및 시베리아에 인접한 우수리 강변의 프리모르스크 주의 많은 한국인들은 한국의 지배 영역이 지금의 한국 국경선 너머로 뻗어 나오자 중국인, 일본인 혹은 러시아인보다 먼저 정착하였다. 게다가 만주의 한국인들 중에는 다수의 반일 혁명가 이외에 열렬한 러시아 혁명 지지자들이 있었다(첨부문서 24쪽).

 이들 한국인들이, 일본이 러시아 영토를 침범할 태세를 갖춘 시기에, 일본 신민으로서의 지위를 유지하였다면, 일본은 이들을 ‘군사적 침략의 선봉대’로서 확실히 활용할 것이었으며, 이들 한국인들은 만주에서 그러하였던 것과 같은 동일한 대량학살 및 잔인한 행동의 희생자가 될 것이다. 그보다 더한 러시아와 일본간의 충돌 위험이 이곳에 잠복하고 있다. 만약 일본의 만주 침략이 시베리아에서 재현되지 않는다면, 이 같이 심각하고 불길한 문제들을 일거에 해결한다면 이는 선견지명을 가진 정치적 수완이 될 것이다.

한국의 민족주의

 일본은 이웃 영토를 침범하고 점령한 것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수많은 변명거리를 찾고 있다. 예를 들면, 일본은 간도와 그 외 지역에서 ‘한국인 사회’, ‘악질의 한국인들’, ‘독립 지지자들’을 한국 통치의 총체적인 문제와 밀접하게 연관된 ‘가장 심각한 문제’라고 주장하였다”(첨부문서 267쪽). 23년간의 일본의 한국 점령이 한국 민족을 말살시킬 수 없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한국인의 정신을 제거할 수 없다는 것을 확신시키기에 충분할 것이다.

1920년 3월 한국에서 필라델피아 신문에 기고한 프레이저 헌트(Fraizer Hunt)는 다음과 같이 주장하고 있다. “한국인의 보다 많은 독립운동은, 일본의 보다 많은 억압 및 탄압, 보다 많은 잔혹함과 더 많은 약속들을 가져다 줄 것이다. 이것들은 한국에서 등장한 일본에 대한 징후들이다. 오늘날 한국에는 혁명적 운동이 살아있으며, 일본의 여하한 총칼이나 수많은 약속도 이를 근접할 수는 없다.”

 기회가 있을 때마다 일본의 중심부로 날아드는 23,000,000명의 적대적인 사람들을 무력으로서만 진압하려는 부질없는 노력들을 하는 대신에, 일본이 한반도를 그 주인들, 즉 거의 4300년 동안 독립국으로서의 지위를 유지하였던 한국인들에게 되돌려주어야 한다는 현명한 정치적 러더십이라는 정책을 제안할 것이다. 일본은 반역적인 국민이기 보다는 독립적인 친근한 국가인 한국으로부터 보다 많은 이득을 얻게 될 것이다.

 “만주에서 한국인에 대한 중국의 ‘억압’을 묘사하여 인용된 한 부류의 경우는 일본의 지배로부터 한국의 독립을 지지하는 자들과 공산주의자인 한국인들에 대한 것이다. 소위 간도지역은 1919년 한국에서의 ‘만세운동’ 이후 1920년 공산주의자들과 결합한 한국 독립운동가들이 널리 확산되는 곳이었으며, 남동부 만주에서의 이러한 봉기는 수개월 후에 특히 한국인들의 심각한 인명손실을 가져올 때까지 일본의 군대와 경찰에 의해서 탄압을 받지 않았다”(첨부문서 273쪽).

 “오웬 라티모어(Owen Lattimore)는 한국인이 중국인으로 귀화하였을 때조차 동화에 대한 강한 저항감을 보였으며, 스스로 충심으로 중국인이라 생각하려는 경향을 전혀 보이지 않았다고 진술하고 있다. 이들은 민족적으로, 언어적으로 그리고 문화적으로 한국인으로 남아 있다. 이들은 다음 세대에서조차도 이러한 태도 변화를 예방하기 위하여 충분히 결속된 집단에 정착하고자 한다. 이들은 중국인들이 경쟁할 수 없는 북부지역의 쌀 문화 기술을 가지고 있으며, 따라서 실질적으로 중국의 언어와 문화적 영향으로부터 자신들을 보호할 수 있는 많은 수 및 매우 밀집된 인구로 토지를 장악할 수 있다”(첨부문서 24쪽).

인류애에 대한 호소

 다음의 몇몇 발췌문에는 특히 지금 제네바에 있는 세계 지도자들과 일반적으로 서구 국가들의 계몽된 대중의 인류애적 공감에 호소하려는 의도가 있다. 하나의 참조문과 부록을 예외로 하면, 모든 발췌문은 우연하게도 일본에 의해서 거부되고, 다른 문명화된 세계에서 수용된 리튼보고서로부터 축약된 내용을 인용한 것이다. 보행자이거나 전문적인 정치인이건 간에, 이러한 고통과 발버둥치는 인류애의 호소에 귀 기울이지 않는 사람은 없다. 특히 그러한 불만들이 만주의 한국인들, 즉 23,000,000명의 한국인들의 고통에 관한 것일 때, 한 인간으로서 동료의 불만에 귀 기울이는 것은 의무이다.

 고 통

 “수십 년 동안 소규모 단위로 옮겨 다닌 한국인들은 한국의 북동지역에서 산맥을 가로질러 만주로 향하였으며, 이러한 이동은 관리의 은밀한 감시가 최소화되는 겨울에 특히 이루어졌다. 만주에 있는 외국인 거주자의 다음과 같은 진술이 보여주는 것처럼, 최근에 이러한 이주가 얼마나 많았던지를 말하기는 불가능하지만, 그것은 특히 1919년과 1920년 즉 한국에서 독립운동이 일어나는 동안에 이같은 현상이 일어났다.

 “만주로 이주해 오는 한국인 이민자들의 수많은 고통은 심지어 실제로 이들의 고통을 목격한 사람들에 의해서도 의심의 여지없이 완전히 실감되지 않을 것이다. 한 겨울 영하 40도에 가까운 혹한에서 하얀 복장을 한 형체들의 조용한 행렬이 만주의 우거진 숲과 돌이 많은 산허리의 완고한 땅을 맨손으로 싸우면서 삶과 죽음의 위험을 무릅쓰고 생존을 위한 새로운 세계를 찾아서 열 명, 스무 명, 그리고 오십 명 단위로 얼어붙은 산맥을 기어간다. 이들은 여기서 지칠 줄 모르는 노력을 통해 중국의 벌판 위의 황폐한 산의 경사면에 곡괭이와 호미를 사용하여 식물을 심고, 살아가는데 충분하지 않은 부족한 수확량을 맨손으로 거두어들임으로써 살아있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첨부문서 258쪽).

 “많은 사람들이 식량 부족으로 인해 죽었다. 여성과 아이들뿐만 아니라 젊은 남자들도 동사하였다. 또한 이러한 새로운 환경 아래서 질병의 희생자도 있었다. 한국인들이 강변의 얕은 곳의 부서진 얼음 위에서 맨발로 서서 2피트 깊이의 얼음같이 찬 물의 넓은 개울을 건너가기 전에 헐렁헐렁 한 바지를 말아 올린 다음, 반대편에서 서둘러 자신의 옷을 입고 신발을 신고 서있는 것을 본다.”

 “그래서 수백 명 단위로 노인과 젊은이, 약한 사람과 강한 사람, 키가 큰 사람이나 작은 사람 모두가 온다. 아이들은 길가의 여관에서 태어난다.” “지난 해에는 75,000명의 한국인이 이주하였으며, 만주의 북부와 서부지역에서 사는 한국인의 총 인구가 총 50만 명 정도가 되었다”(첨부문서 258~259쪽).

 억 압

 “일본은 대략 1927년 말에 전면적인 反일본 선동의 여파이자 중국 관리의 교사에 의해 만주에서 한국인 이민자들을 막기 위한 운동이 시작되었다고 주장한다. 또한 일본은 이 같은 억압이 만주지방들이 1928년 난징 국민정부에 대한 충성을 선언한 이후 강화되었다고 지적한다. 중앙정부 및 만주의 지방정부의 명령에 대한 수많은 해석들이 한국인들을 중국인으로 강제 귀화시킴으로써 한국인들을 억압하기 위한 중국 정책의 명확한 증거로서 제시되었다. 이 정책은 경작지로부터의 추방, 강제 이주, 무차별적인 징집, 과도한 세금 부과, 주택과 토지에 대한 지대 혹은 주택세 계약의 방해, 가장 잔인하고 불쾌한 잔혹함과 추잡스러움을 이들 한국인에게 부과하였다”(첨부문서 272쪽).

 “필자는 무자비함과 고문을 당한 남자, 여자 그리고 아이들을 포함한 여러 한국 농민들을 조사하였고, 조사위원회에 제출할 이들의 사진을 찍었다. 이러한 사례들은 무시하기에는 너무나 일반적이었으며, 진실한 인류애적 공감을 불러일으킬 수밖에 없는 이들의 고통을 한국인들은 감내하였다. 몇 달 또는 심지어 몇 년 후에, 그리고 특히 1931년 9월 18일 이후 만주의 발전이라는 시각에서 개별 사례들에 대한 공정한 판단을 내리는 어려움은 자연스럽게 이들의 증언에 대한 심각한 문제를 제기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인들의 고통은 통탄스러웠으며, 대부분의 경우 이들 자신에게 책임이 없었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다는 점이 매우 명백하였다”(첨부문서 272쪽).

 “특히 만주 내의 모든 한국인 공동체는 많은 경우 불합리한 박해를 받거나 이들 가운에 공산주의자가 있다는 미명하에 추방되었다. 게다가 1927년과 30년 사이에 만주의 일본 신문에 게재된 기사들이 일본의 공식적인 태도에 대한 지표로서 받아들일 수 있다면, 한국 공산주의를 척결한다는 미명하에 자행된 중국 당국의 이들 행동은 늘상 비난받지는 않은 것 같다. 결과적으로 공산주의 이데올로기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고, 만주 땅에서 간신히 삶을 연명하기 위해서 외로이 남겨진 수천 명의 한국인들이 무고하게 희생되었다는 것이다. 중국 당국에 의해서 투옥되고, 고문당하며, 살해당한 한 명의 한국인 공산주의자 때문에 백 명의 무고한 한국인 남성과 여성, 그리고 아이들이 유사한 고통을 당하였다. 덜 순종적인 농촌지역 사람들의 정치적 활동으로 인해서 많은 한국인들이 이와 마찬가지로 희생당하였다는 것은 확실하다”(첨부문서 274쪽). 중국 당국은 특히 1927년 만주의 토지에 단순 소작인과 노동자를 제외한 한국인들의 자유로운 정착을 금지시키기 위해 명백히 만주의 관리들에 의해 시도된 그 같은 노력들이 ‘억압’의 사례로 간주될 있다는 것을 부정하고 있다”(첨부문서 260쪽).

 정 탐

 남만주철도회사(대련)의 한 한국인 피고용인인 김상민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다수의 무고한 한국인들은 만주에서 진퇴양난의 상황에 빠져있음을 발견하였으며, 매우 엄청난 어려움에 처해 있다. 사실 만주의 한국인들은 일본의 보호로부터 어떠한 혜택도 받지 못하였지만, 반대로 이중등록법에 의해서 자유를 구속당하고 있다. 일본의 정책은 자국의 개입 및 통제를 위하여 한국인을 활용하는 것이었다. 우리는 국외 거주를 원하는 한국인이 원칙적으로 일본으로부터 허가를 얻어야 된다고 생각한다. 귀화라는 문제는 일본정부에 대한 한국 지식인들의 적대감을 야기하는 주요한 원인들 중의 하나이다. 또한 이것은 더 이상 지체 없이 폐지되어야 한다. 일본 경찰 당국은 상당수의 비밀요원들을 고용한 것 이외에 만주에서 불순한 한국인들을 감시하고 이들을 체포하기 위하여 정보활동을 지속하고 있다. 이러한 정탐 정책은 오직 일부 사상적 지도자들의 활동들을 더욱 치밀하게 하는 자극제가 될 것이다. 막대한 경비가 드는 이 같은 정보수집의 용도는 무엇이겠는가? 우리는 이 같은 자금이 만주의 주인인 궁핍한 한국인들의 고통을 경감시키기 위한 보다 중요한 공익적인 데에 사용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정탐 정책은 폐기되어야 한다”(첨부문서 271쪽).

 지난 25년 동안 오직 일본의 공포정치를 피하기 위해서 자신들의 집과 조국을 떠나 오랜 시간 동안 고생, 위험, 빈곤 및 노력을 통해 힘들게 마련한 생계를 꾸릴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으로 만주의 황무지를 살만한 주거지로 바꾼 한국인들은 다시금 일본의 군사적 지배의 무자비한 팽창에 짓밟히고 있다.


[別紙]
제목일본의 잔혹함  

일본의 잔혹함

 리튼보고서는 수차례에 걸쳐 “1919년의 봉기를 탄압하기 위하여 일본정부가 취한 가혹한 조치들을 언급하였다”(첨부문서 263쪽). 다음의 일부 진술들은 신문 기사에서 인용한 것이다.

 한국에서 일본인의 잔혹함을 묘사하는 기사가 언론에 게재되었던 3월 13일자 북경의 AP통신의 특보에는 특히 다음과 같은 진술이 포함되었다.

  “붙잡힌 장로회 신학교의 학생들은 옷이 모두 벗겨진 채로 나무 십자가에 묶여서, 맨발과 알몸으로 그 십자가를 지고 거리를 걷게 되었다. 이들 학생의 선생이 십자가를 지고 가자, 일본인은 스승과 마찬가지로 이들 학생 역시 동일한 특권을 누려야 한다고 말하였다”(『워싱턴 스타』, 1919년 5월 26일).

  “일본의 통치에 반발하여 최근 소요가 일어난 한국의 상황은 플러싱(Flushing L., I)의 부인인 롬프리(Lomprey, I., I)에게 한국의 평양에 있던 기독교 학교의 교사인 뉴욕 출신의 그레이스 딜링햄(Grace Dillingham)이 3월 11일에 보낸 서신에서 언급되어 있다. 이 서신은 한국의 여학생들이 전신주에 묶여서 일본 헌병대에 의해서 공개적으로 채찍질을 당하였다고 기술하였다. 투옥된 기독교도들은 십자가에 묶여 발가벗긴 채 구타당하였다. 두 명의 미국인 여성은 일본 군인들에 의해서 구타당했고, 교회는 약탈당하였으며, 성경이 찢겨졌다”(워싱턴 디 씨 『이브닝 스타』, 1919년 5월 6일).

  “일본정부는 한국의 폭도들에게 아무런 동정심도 없었다. 독립운동에 가담한 것에 대한 처벌은, 이 그림이 보여주고 있듯이, 죽음이다. 이 사진은 희생자가 총살당한 직후에 찍은 것이다. 무릎을 꿇은 뒤 이들은 조잡하게 세워진 십자가에 팔을 벌린 채로 묶였다. 최근 독립을 쟁취하기 위한 한국인들의 시도는 한반도를 휩쓸었다. 수백 군데에서 중요한 봉기가 있었으며, 일본인에 의한 대규모 학살이 보고되었다”(보스턴 『트랜스크립트』, 1919년 5월 15일).

  1919년 5월 31일 『리터러리 다이제스트』(Literary Digest)는 다음의 내용을 부연하였다. “한국인들은 아무런 무기를 가지고 있지 않았지만, 군인들은 군중을 향해 발포하였고, 구경꾼을 때려 눕혔으며, 소녀들은 머리채를 잡힌 채 끌려 다녔으며, 노인과 여성들은 걷지 못할 때까지 구타당하였다.

  일본 군인들은 이들을 일본 독립 교회로 끌고 가서는, “십자가를 지라고” 말한 뒤, 이들을 십자가 위에 뉘어 놓고 스물아홉 번 구타하였다. 어제 백 명이 투옥되었으며, 차 안의 두 명은 아직 죽지 않았다. 이 같은 잔학 행위를 목격한 한 비기독교도 일본인은 “너무 소름이 끼쳐서 거의 서 있을 수 없었다”라고 말하였다.

 일본 신문 『저팬 애드버타이저』는 수많은 잔학 행위에 관한 내용들을 기사화하였다. 우리는 1919년 4월 29일에 실린 장문의 보고서 중 단지 몇 줄만을 인용하고자 한다.

  “군인들은 때때로 이른 오후에 마을로 와서 모든 남자 기독교도들을 교회에 모이도록 명령하였다. 우리 정보원에 따르면 삼십 명 정도로 추정되는 사람들이 모였고, 군인들은 이들에게 총격을 가하였으며, 교회 안으로 난입하여 칼과 총칼로 이들을 마무리하였다. 그 다음에 이들 군인은 교회에 불을 질렀다. 하지만 바람의 방향과 교회가 마을의 중앙에 위치해 있었기 때문에 민가로 불이 번지지는 않았기 때문에, 군인들이 이들 민가에 각기 불을 질렀으며, 한참 후에 마을을 떠났다.”

 훈춘사건

 “소위 간도지역이 1919년 한국에서 일어난 ‘만세운동’에 뒤이은 1920년 공산주의자들과 합세한 한국인 독립운동가들의 봉기가 확산되는 무대였으며, 남동부 만주에서의 이러한 봉기가 몇 달 후 특히 한국인들이 심각한 인명 손실을 입을 때까지 일본 군대와 경찰에 의해서 탄압받지는 않았다”(첨부문서 273쪽).

 “한국의 만세운동에 대한 대응으로서 1920년 간도에서 야기된 훈춘사건의 원인은 1920년 갑자기 4000명에서 10,000명으로 증가한 한국으로부터의 이주를 감소시키려 하였던 만주지역의 혼란스러운 상황을 보여주고 있다”(첨부문서 264쪽).

 이 훈춘사건은 리튼보고서에서 자주 언급되었다. 하지만 그것은 명백한 이유들로 인해서 실제로 무엇이 일어났는지를 결코 밝히지는 않았다. 일본인이 한국인에 대해 자행한 무섭고 잔혹한 행위들을 눈으로 직접 목격할 수밖에 없었으며, 한국인들과 더불어 살았던 몇몇 영국 선교사들을 증언을 인용하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몇 년 동안 일본정부는 간도의 한국인 주민들 가운데서 한국의 민족운동을 분쇄하기 위한 기회를 찾으려 하였다. 도적들의 습격이 훌륭한 구실을 제공하였다. 이 같은 목적을 수행하기 위한 보복 원정대인 군대가 간도로 파견되었다.

 1920년 10월 5일 이후 일본군은 네 개의 조로 분리되어 체계적인 공포정치를 시작하였다. 즉 마을을 불사르고, 주민들을 학살하며, 경작지를 황폐화시켰다. 우리는 한국인과 중국인들이 증언한 이야기 이외에도 적어도 세 명의 신뢰할 만한 영국인 목격자들의 증언을 가지고 있다.

 일본군이 이 간도지역을 통과한 이틀 뒤인 10월 31일에 ‘노라바위(Norabawie)’ 마을을 방문한 용정에 있던 캐나다 장로교 선교회에 소속된 뉴펀들랜드 출신의 의사 마틴 박사(S. H. Martin)는 다음과 같이 진술하였다.

  “아래에 기록된 사실들은 중국 길림지방의 남부지역인 간도의 전지역에 해당된다.”

  “중국으로부터의 강력한 항의를 받은 일본은 가능한 모든 기독교 공동체, 특히 모든 젊은 남자들을 제거할 목적으로 이 지역에 15,000명의 군대를 파견하였다.

  “매일 마을들이 조직적으로 불태워졌고, 젊은 남자들은 총살당했으며, 최근에는 방화 및 전면적인 살인으로부터 고통 받는 도시 주변의 마을들이 등장하였다. 아래의 사실들은 매우 정확하다.”

  “새벽에 일본 보병의 전 경계선이 노라바위의 주요 기독교 마을을 포위하였다. 그리고 계곡의 위쪽에서부터 거대한 조, 보리 및 짚단에 불을 놓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나서 집안에 있던 사람들을 바깥에 정렬시켰다. 군인들은 아버지나 아들이 앞으로 나올 때마다 바로 총살하였다. 이들이 쓰러지면, 아마도 단지 절반만이 죽었을지도 모르지만, 불타는 거대한 짚단을 그들 위로 던졌다.”

  “비록 그들이 근거리에서 세 번 총을 맞았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불길로부터 일어나려고 할 때, 그들에게 총칼을 꽂음으로써 나오는 땅 위의 핏자국을 나는 보았다. 시신들은 쉽게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검게 타버렸다. 어머니와 아내들, 그리고 아이들은 마을의 모든 성인 남자들에게 가해진 이러한 잔혹함을 볼 수밖에 없었다. 집들이 불탔으며, 이 마을에서 명확히 보일 정도로 모든 농촌지역이 금방 연기로 가득 찼다. 그리고 나서 일본 군인들은 흩어져서 계곡에서 주 도로에 이르기까지 다른 마을들에 있던 기독교 신자들의 집을 불태웠다. 그런 다음 이들 군인은 황제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하여 집으로 돌아갔다.”

  “근처 마을에 도달하자, 우리는 여성, 어린이 그리고 백발의 노인 남자만을 발견하였다. 등에 어린 아기를 업은 여성은 소리 내어 울면서 위 아래로 걸어가고 있었다.”

  “나는 열아홉 채의 건물들의 잔해를 사진으로 찍었다. 그 중에서 어머니와 딸들은 불탄 잔해에서 시체나 타지 않은 귀중품들을 찾고 있었으며, 나이든 남자는 머리털을 잡아 뜯으면서 울고 있었다. 그래서 많은 여자들이 울고 있었으며, 내가 목격한 것에 대해 매우 화가 난 나머지 노출이 충분히 될 때까지 사진기를 나는 똑바로 들고 있을 수가 없었다.”

  “나는 살인과 방화가 일어난 서른 두 개의 마을에 대한 이름과 정확한 기록을 가지고 있다. 한 마을에서는 145명이 살해당하였다. 여자 및 어린이와 함께 집들이 불탔다. 소눈퉁(Sonuntung)에서 열네 명의 사람들이 커다란 무덤 앞에 서 있었으며, 총살당한 뒤 불타는 나무 및 기름과 함께 시신은 파괴되었다. 이것이 대표적인 예이다.”

 용정에 있던 캐나다 장로교 선교부의 풋트(W. H. Foote) 목사는 기독교 주민들의 집과 학교 그리고 교회가 불 탄 마을들의 이름을 기억하고 있다. 그 중 한 곳에서 25명이 총살당하였고, 시체는 불태워졌다. 그는 이 같은 사례들이 절대적으로 믿을 만한 것이라고 단언한다. 왜냐하면 네 명의 선교사와 한 명의 세관원이 잔해를 조사하였기 때문이다.

 풋트 목사는 계속해서 청산(Cheng San)에 있던 이들의 집에서 7구의 불에 타 죽은 시신이 있었다고 말한다. 운통자(Un Tong Ja)에서는 80명이 총살당했으며, 모두 기독교 마을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이 마을로 가는 군인들과 부대 지휘관들은 대체로 극악무도한 짓을 한 뒤 지나가는 것 말고는 마을 주민들과 어떠한 대화도 하지 않았다”고 풋트는 주장하였다. 구세동(Ku Sei Tong)만이 어떤 행위에 대한 이유를 사람들에게 설명한 유일한 곳이었다. 군인들을 수행한 어떤 한국인은 마을 사람들에게 그 집 주인이 한국을 위한 애국적 행동을 위해서 자금을 모집하였다는 증거를 가지고 있다고 말하였다. 만약 법률 위반자들만이 고통을 당한다면, 심지어 한국인들이라 하더라도 심각하게 저항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전적으로 무고하고 무기력한 사람들이 불의와 고난에 대해 단 한 마디도 발언할 기회를 갖지 못한 채 살해되었기 때문이다.”

 풋트 목사는 간창(Kan Chang)에서의 일본인 병사들의 행위를 언급하면서, 마을의 젊은 남자들이 한옥 앞에 집결되었고, 어떤 형태의 조사도 없이 25명 모두가 총살당하였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나서 두 더미로 나뉜 시체 위에 나무로 쌓은 다음 불을 질렀다. 연료가 그 시체들 위로 뿌려지는 동안 일부 부상자들이 일어서려 했지만 총칼에 찔려 쓰려졌으며, 불길 속에서 죽음을 맞았다.

 “나는 이 사람들을 잘 안다”고 풋트는 계속해서 말하였다. “이들은 산골짜기 구석에서 산다. 땅은 척박하며 땔감은 부족하다. 이들은 생계를 위해 열심히 일하는 조용하고 성실한 사람들이었다. 이들의 교회와 학교, 성경책과 찬송가, 주일예배와 무엇보다도 구세주는 이들의 기쁨이었다. 이들은 애국적인 전사도 아니었으며, 교회가 정치에 관여하는 것에 동의하지도 않았다.”

 용정에 있던 캐나다 장로교회의 선교부 회원인 온타리오 출신의 엠마 팔레토르프(Emma M. Palethorpe)는 수칠고(Suchilgo) 마을에서 처형당한 다섯 명의 남자들의 대한 진술에서 일본군들에 의해 용정으로부터 3마일 떨어진 언덕 위로 끌려가서 살해당한 자가 누구인지를 말하고 있다.

 “언덕 위에는 도로나 마을에서 잘 보이지 않는 꽤 큰 구덩이가 있었다”고 그녀는 말하였다. “희생자들은 이 구덩이의 바닥에 앉았으며, 거기서 그들은 칼로 난도질당하였다. 두 개의 칼이 부러졌으며 끔찍한 짓들이 총칼로 마무리 되었다는 것을 목격자들은 증언하고 있다. 그리고 난 다음 구덩이 주변에 흩어진 흙들을 긁어모아서 잘려 나간 시신들을 덮었다.”

 캐나다 선교사들에 의해서 유출된 일본인의 잔혹함에 관한 기록들이 외부 세계에 알려지기 시작할 때까지 공포정치는 두 달 동안 지속되었다.

 도쿄 대학살

 1923년 11월 20일에 미국에 있던 한국친우회의 회장인 필라델피아의 플로이드 톰킨스(Floyd W. Tomkins) 박사는 미국의 국무장관인 찰츠 E. 휴즈(Charles Evans Hughes)에게 도쿄에 지진이 일어나는 동안 500여 명의 한국인들이 학살당하였고, 15,000명이 투옥된 사건을 비판하는 항의서를 제출하였다. 그는 “일본에서 지진이 일어나는 중에 발생한 사건들은 한국인의 대의가 갖는 정의로움에 주목하게 하였다.” 일본에서 수년간 살았던 요코하마 항구의 보조 감독관이었던 헤드스트롬(Hedstrom) 대위는 “가능한 한 많은 한국인을 죽이라”는 공식 명령이 내려졌다고 보고하였다.

 그 항의서의 일부분에서는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

  “그는 그 명령의 추진 과정의 목격자로서 1923년 9월 2일 250명의 한국인들이 손과 발이 묶인 채 다섯 명 단위로 기름이 덮인 오래된 고물 위로 던져진 다음 산채로 불에 태워졌다.”

  “1923년 9월 4일 화요일 저녁에 또 다른 목격자였던 스티븐스(W. H. Stevens)는 자신과 아내, 처제, 에덴 와인라이트(Ethen Wainwright) 및 뉴욕 출신의 조지 로스(George Ross)를 빌린 자동차에 싣고서 니코로 데려갔다. 차는 일본 군인들에 의해서 세워졌고, 스티븐스와 그의 일행은 총살 준비를 마친 여덟 명의 한국인 처형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분명히 그 군인들은 한국인들을 총으로 쏘거나 총칼로 죽이는 대신에 조금씩 죽게 함으로써 그 일행이 느낄 공포를 즐기고 있었다. 잘려나간 사지들은 고속도로에 던져졌으며, 그 일행은 권총의 협박에 의해서 죽은 시체들 위로 차를 몰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만약 이들이 명령에 따르지 않는다면, 한국인과 동일한 운명을 맞이할 것이라는 위협을 받았다.”

  “이것들은 많은 다른 사례들과 더불어 당신의 부서 앞에 있는 두 가지 사례이다. 수백 명의 한국인들이 학살당하였고, 수천 명의 사람들은 음식을 제대로 공급받지 못한 채 감금되었으며, 심지어 범법자들에 대한 훨씬 경미한 처벌이나 이들로부터 정확한 배상도 없었으며, 이 같은 만행에 대한 어떠한 항의나 보복도 없었다. 바로 이것이 한국의 상황임을 전 세계는 기억해야만 한다.”

 다음의 이야기는 학살로부터 간신히 벗어난 한국인들이 은밀히 전해 준 끔찍한 학살에 관한 기다란 목록의 기록들로부터 인용한 것이다. 나머지 것들은 너무 끔찍해서 말로 표현할 수 없다.

  “남자와 여자, 노인과 젊은이를 포함하여 2,000명 이상의 한국인들이 다섯 명 또는 그 이상의 단위로 함께 묶였다. 그리고 그들은 각각 가와하라(川原)와 근방의 군, 헌병대 및 경찰서로 할당된 후, 그곳에서 총칼에 의해 모두 살해되었다. 이 같은 정규 공권력 뿐만 아니라 총, 권총, 칼과 죽창으로 무장한 수호대 혹은 방위대가 한국인들을 사냥감으로 찾아다니는 굶주린 늑대처럼 난폭하게 활동하고 있었다. “한국인이 여기에 있다”라는 신호 소리가 있으면, 수천은 아니지만 수백 명의 피에 굶주린 폭도들이 죄다 살인에 가담하고자 하는 욕망에서 사방에서 몰려들었다.”

 초대 주영 일본 대사였던 도쿠가와(J. M. Tokugawa)는 1923년 10월 10일 맨체스터 가디언에 다음과 같이 지적하였다.

  “도쿄 및 요코하마 근교의 모든 한국인들이 몰살되었다는 당신 취재원의 추측은 완전히 사실에 반하며, 정당화될 수 없다. 다수의 한국인 반항자들은 지진을 이용하여 폭탄과 기름 그리고 다른 발연성 물질들로 거대한 방화를 일으키고자 하였으며, 이 같은 폭동과 강간이라는 범죄를 저질렀다. 그리하여 일부 일본인 무리들이 자위적인 예방 조치를 취하였으며, 다수의 한국인들이 폭력 행사로 체포되었다. 그리고 아마도 다른 무고한 사람들은 지진이 일어난 다음날 죽거나 부상을 당하였다. 정부는 보호조치로서 대다수가 노동자들이거나 학생들인 한국인 주민 5000명을 소집했으며, 경찰의 보호 아래 여러 중심지로 이들이 이송되었다. 1,500명은 나라시노(習志野)로, 60명은 메구로(目黑)로, 그리고 약 2,500명은 도쿄 근교로 이송되었다.”

 위의 진술은 모든 일본 관료들 및 주요 언론인들이 한국인의 책임과 관련하여 비난을 받자, 변명을 하는 과정에서 최초로 보인 전형적인 태도였다. 하지만 그 다음 만행 및 이 같은 사실에 대한 철저한 왜곡에 대해 외국의 압도적인 국가들이 비판적인 태도를 취하자, 일본 수상 야마모토 곤노효에(山本權兵衛)는 한국인 학살이 “일부 일본인의 몇 몇 사실들에 대한 오해에서 전적으로 기인하였다”라는 공식 성명을 발표하였다. 일본정부가 도쿄 외곽의 후나바시(船橋)에 있던 라디오 방송국을 통해서 공식 명령을 방송한 사실은 1923년 11월 15일 제국의회에서 이 문제에 관한 논쟁 도중에 마침내 드러났으며, 모든 진술들은 국회 공식 기록에서 찾아볼 수 있다.

▪ 고려대학교 중앙도서관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