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제

해 제

 이 자료집에는 대한민국임시정부(이하 임시정부로 약칭)가 중국을 상대로 전개한 외교활동과 관련된 자료들을 수록하였다. 임시정부는 중국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임시정부가 수립되어 활동한 지역이 바로 중국이었고, 임시정부의 조직을 유지하며 활동하기 위해서는 중국과 긴밀한 유대 및 협조관계를 가져야 하였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임시정부는 수립 직후부터 해방을 맞아 환국할 때까지 27년여 동안, 여러 방법과 통로를 통해 중국의 유력 인사들을 비롯하여 중국국민당 및 중국정부를 상대로 외교활동을 전개하고 있었다.

 임시정부는 수립 이후 환국할 때까지 다양한 방법으로 중국과의 외교활동을 전개하였지만, 이와 관련된 원본 자료는 많이 남아 있지 않다. 외교활동과 관련된 자료들은 대부분 임시정부에서 작성하여 중국에 보내거나, 중국에서 작성하여 임시정부로 보낸 것들이다. 그렇지만 임시정부에서 보낸 자료가 중국 측에 온전하게 남아 있지 않고, 또 환국 당시 국내로 가지고 온 임시정부 문서도 거의 망실되어 중국에서 임시정부로 보낸 자료들도 남아 있는 것이 많지 않다.

 이 자료집은 그동안 발간된 독립운동 관련 자료집에서 임시정부의 외교활동과 관련된 자료들을 수집하여 정리한 것이다. 우선적으로는 임시정부에서 중국에 보낸 것과 중국에서 임시정부에 보낸 외교활동 관련 자료들을 주 대상으로 수집하였다. 대만에서 발간한 『國民政府與韓國獨立運動史料』와 대만의 자료를 수집하여 정리한 秋憲樹의 『資料韓國獨立運動』, 그리고 임시정부의 외무부장을 역임한 趙素昻이 환국할 때 가지고 들어 온 ‘素昻文書’와 주석을 역임한 金九의 자료를 모은 『白凡金九全集』 등에 이와 관련한 자료들이 적지 않게 전해지고 있다. 이외에 간접 자료이기는 하지만, 일본 측 정보자료에 보이는 임시정부와 중국과의 외교활동 관련 자료도 수집하여 포함시켰다.

 각종 독립운동 관련 자료집에서 수집하였지만, 이것이 임시정부가 중국과 전개한 외교활동 관련 자료를 모두 망라한 것이라고 하기는 어렵다. 더욱이 중국과의 외교는 일정한 통로가 아닌 중국의 유력 인사, 중국국민당과 중국군사위원회, 중국정부 등 다양한 형태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그 실상을 제대로 파악하는 것도 쉽지 않다. 또 어디까지를 외교활동으로 보아야 할지 쉽게 판단하기 어려운 것들도 많다. 본 자료집에 수록한 것 이외에도, 지금까지 전해지지 않거나 찾지 못한 자료들이 더 많을 것으로 생각된다.

 수집한 자료는 연월일 순으로 정리하였고, 그것을 편의상 1920년대 · 1930년대 · 1940년대로 분류하여 수록하였다. 시기를 나눈 데는 특별한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니다. 별달리 분류할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다만 임시정부의 중국에 대한 외교활동의 통로나 방법이 시기별로 약간의 변화와 특징을 가지고 있고, 중국 측의 임시정부에 대한 태도도 시기별로 약간의 차이를 보이고 있다.

 1920년대

 임시정부가 중국을 상대로 외교활동에 나선 것은 廣東에 護法政府가 성립된 것을 계기로 해서였다. 중국은 1911년 辛亥革命으로 淸이 붕괴되고 중화민국을 성립하였지만, 袁世凱의 北洋軍閥政府가 이를 뒤엎으면서 여러 군벌이 할거하는 혼란한 정국이 계속되었다. 1917년 孫文이 중화민국의 헌법을 지키기 위한 護法軍政府를 조직하여 護法戰爭을 일으켰고, 1921년 5월 廣州에서 호법정부 大總統에 취임하였다. 이를 계기로 임시정부는 손문의 호법정부를 상대로 임시정부의 승인과 함께 한국독립운동의 지원을 요청하는 외교활동을 전개한 것이다.

 손문이 대총통에 취임하기 전에 呂運亨이 광동을 방문하여 광동군정부의 주요 인사들과 만났다. 이러한 사실이 일제의 정보자료에 나타나 있다(「呂運亨의 廣東行의 건」 등). 이에 의하면, 여운형은 1920년 12월 20일 상해를 출발하여 광주를 방문하고 1921년 1월 11일 다시 상해로 돌아왔다. 여운형의 방문목적은 광동군정부에 ‘조선독립에 대한 원조 및 조선인에 대한 군대교육을 시키는 일 등을 협의하기 위한 것’이라고 하였다. 여운형은 廣州에서 徐謙 · 陳炯明 등을 만났고, 진형명은 ‘광동정부가 확립되는 날 임시정부를 승인해주겠다’ ‘근간 비행기교습소를 설립할 터인데 조선학생의 입학을 허가하겠다’고 하며, 한국독립운동에 대해 적극 지원할 것을 약속하였다고 한다.

 손문이 호법정부 대총통에 취임하자, 임시정부에서는 특사를 파견하였다. 申圭植이 李承晩 대통령에게 보고한 정무보고 중 「廣東(中華民國)에 派遣하는 特使任命에 關하야」라는 내용이 그것이다. 이에 의하면 임시정부 국무회의에서 1921년 9월 22일 당시 국무총리 대리 겸 법무총장 신규식을 특사로 결정하였고, 신규식은 9월 30일 출발하여 3~4주일 일정으로 廣州를 방문한다고 하였다. 임시정부가 신규식을 특사로 파견한 목적은 세 가지였다. 하나는 광동정부를 승인하여 임시정부와 인연을 맺고, 둘째는 중국 각계 요인들과 연락관계를 맺는 것이며, 셋째는 광동정부에서 태평양회의에 대표를 파견할 경우 그 대표에게 한국문제를 회의에 제출케 한다는 것이었다.

 신규식은 광동으로 떠나기 전 중국의 각계 인사들에게 보내는 글을 발표하였다(「大韓民國臨時政府敬告中華民國各界諸君子書」). 이 글은 중국인들에게 한국의 독립운동을 원조해 줄 것을 요청한 것으로, 신규식은 중국이 한국의 독립운동을 원조해야 하는 이유 4가지를 들고 있다. 하나는 수천 년 동안 많은 도움을 준 인도주의적 입장에서, 둘째는 아시아에서 일어날 전쟁을 막고 세계평화를 위해서, 셋째는 중국이 일본과 馬關條約에서 조선은 독립국임을 분명하게 밝힌 국제신의를 지키기 위해서, 넷째는 중국은 한국과 脣齒之間의 관계라며 일본의 중국침략을 저지하기 위해서 등이었다. 이런 이유로 중국의 각계 인사들은 한국의 독립을 지원해야 한다고 하면서, 가장 시급하게 원조할 일은 태평양회의에 출석하는 중국대표들이 회의에서 한국의 독립문제가 의안으로 제출될 수 있도록 요구하는 일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각종 언론을 통한 원조와 실제적인 도움이 필요하다며, 중국 각계의 인사들이 이러한 요구를 잘 헤아려 달라고 하였다.

 임시정부에서는 광동의 호법정부에 특사를 파견하였다. 특사는 국무총리 대리 겸 법무총장 신규식이었다. 신규식은 閔弼鎬를 대동하고 10월초 상해를 떠나 홍콩을 거쳐 광주에 도착하였고, 호법정부의 주요 인사들과 대총통인 손문을 만났다. 「임시정부 법무총장의 廣東방문에 관한 건」, 「중국 廣東政府의 신규식에 대한 태도」 등이 이와 관련된 자료들이다. 이에 의하면 호법정부에서는 국제관례상 정식으로 할 수는 없지만, 개인의 交情으로 환대하였고, 손문과의 접견도 성사시켰다. 개인의 기록물이라 여기에는 수록하지 않았지만, 함께 수행하였던 민필호의 ≪韓中外交史話≫에 손문과의 접견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신규식은 胡漢民(대총통 비서장)과 伍廷芳(외교부장) 등을 만난 뒤 대총통 관저를 방문하여 손문을 만났다. 이 자리에서 신규식은 임시정부는 호법정부를 승인한다고 하면서, 호법정부가 임시정부를 승인할 것, 한국청년의 중국 군관학교 수용을 허가할 것, 차관 5백만 원 및 조차지대를 허락하여 한국독립군을 양성토록 할 것 등을 요청하였다.

 이러한 신규식의 활동은 중국과의 공식적인 외교활동의 첫 시도라는 점에서 큰 의미를 갖는다. 뿐만 아니라 이후 중국이 한국의 독립운동을 지원하게 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는 점도 있다. 손문은 호법정부 자체가 아직 광동성이라는 한 부분만을 장악하고 있고 다른 국가의 승인을 얻지 못한 형편이었기 때문에, 신규식의 요청을 받아들이는 데 한계가 있었다. 그렇지만 북벌계획이 완성되면 전력을 다하여 한국의 독립운동을 원조하겠다고 하였고, 그 후계자인 蔣介石의 중국국민당 정부도 손문의 뜻을 받들어 나갔다.

 신규식이 호법정부를 방문하여 손문과 접견한 이후, 중국 각계의 인사들 사이에 한국독립운동을 승인하고 지원하자는 논의가 활발하게 일어났다. 우선 광동의 국회의원들이 한국독립승인안을 제출한 것을 들 수 있다. 광동국회의원 張萬純 등 10명의 의원이 1921년 11월 28일 비상국회에 ‘중국이 먼저 한국을 독립국으로 승인하고 이를 전국 내와 태평양회의에 통고하자’는 한국독립승인안을 제출한 것이다(「廣東國會의 韓國獨立承認案」). 또 중국국민외교대표회에서도 한국독립승인을 결의하였다. 1921년 11월 30일 상해 靜安寺路 寰球中學 學生會館에서 개최된 中華全國國民外交大會의 대표 94명이 태평양회의에 보낼 전문초안을 제출하면서 ‘한국의 독립을 승인할 일’을 안건으로 제출하기도 하였다(「中國國民外交代表會의 壯擧」).

 한편 광동에서 中韓協會가 결성되기도 하였다. 일제의 정보자료에 광동에 거주하고 있는 중국인과 한국인 70여명이 중한협회를 발회하기로 하고, 1921년 9월 27일 광동도서관내에서 성립대회를 개최한 것으로 나타나 있다(「廣東에서의 中韓協會조직의 건」). 廣東大元帥府 사법부장인 葉夏聲이 임시의장으로 선출되었다는 것과 기관지로 『光明月報』를 발행하기로 하고 의연금을 모집한다는 내용, 그리고 ‘中韓協會簡章’ ‘선언서’ ‘특별간사규칙’ 등이 들어 있다.

 중한협회에 이어 상해에서는 中韓互助社가 결성되었다. 중한호조사는 신규식의 발기로 1922년 9월 5일 프랑스조계 안의 삼일예배당에서 한국인 申圭植 · 金奎植 · 呂運亨 · 李裕弼 · 申翼熙, 중국인 吳山 · 黃敬頑 · 黃宗漢 · 鄧嘉縉 · 汪劍農 등이 참여하여 결성하였다. 이사장은 중국인 吳山, 부이사장은 한국인 金奎植이었다. 설립목적은 “중한 국민과 양국의 행복을 도모하기 위함”이라 하였고, 정식명칭은 中韓國民互助社總社라고 하였다. 이는 상해뿐만 아니라 중국 각지에 중한호조사를 설립하고, 상해의 중한호조사가 그 본부 역할을 한다는 의미였다. 중한호조사는 설립 이후 상호 원활한 의사소통을 위해 어학강습소를 설치하기도 하고, 자금모집을 위해 연예회를 열기도 하였다. 연예회에서는 安重根 의사가 伊藤博文을 처단한 것을 주제로 연극을 공연하였다고 한다.

 또 중국의 항일단체 및 각계 인사들과 제휴 및 유대관계를 맺기 위해서도 다양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趙素昻이 排日중국인 단체의 집합에 참여하여 한중이 서로 제휴하여 일본에 대항하자는 내용의 연설을 하기도 하였고, 잡지를 발간하여 이를 강조하기도 하였다. 『上海週刊』 특별호에 ‘중한의 호걸들이여 왜적과 맞서 國恥를 설욕하고 공수동맹을 맺어 동아의 평화를 지키자’는 글이 그것이다. 이를 통해 “중한의 호걸들이여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느뇨. 한국의 망국을 보고도 모른 체한다면 중국 또한 조만간 한국과 같은 운명을 피할 수 없게 될 것”이라며, 두 나라 인민이 손잡고 왜적을 쓰러트리기 위해 함께 노력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리고 중국의 4억 인민과 대한민국 2천만 인민이 공동약속을 하자며, 두 나라 인민은 “상호 협력하여 일본을 배척할 의무를 진다” “왜인과 절교할 의무를 진다” “왜적의 상품을 불용할 의무를 진다” “왜인의 비밀과 죄악을 폭로할 의무를 진다”는 4개조로 된 중한동맹조약을 맺자고도 하였다.

 중국국민당 대회가 개최될 때 축전을 보내 한국의 독립운동에 대한 협조를 요청하기도 하였다. 1929년 3월 중국국민당 3全大會가 개최되자 임시정부는 전보를 보내, 중국국민당이 다년간 분투하여 전국을 통일하는데 성공한 것을 축하하며, 세계 각지의 혁명동지들과 연합전선을 구축하여 인류의 복리를 증진시키는 데 힘을 보내줄 것과 한국의 독립운동에 많은 성원을 보내 줄 것을 요청하고 있다.

 1930년대

 1930년대에 들어와 임시정부는 보다 적극적인 활동방안을 모색하면서, 중국과의 외교활동도 활발해졌다. 임시정부 인사들은 1930년 1월 한국독립당을 창당하였다. 1920년대 중반 이래 침체되어 있던 국면을 쇄신하기 위해 정당을 조직하고, 이를 기반으로 독립운동을 전개하고자 한 것이다. 그리고 별도의 특무조직으로 韓人愛國團을 조직하여 의열투쟁을 전개하였고, 이를 계기로 중국과의 관계가 더욱 활발해지게 되었다(이와 관련한 자료는 한인애국단편에 수록).

 임시정부에서 한국독립당을 창당하자 중국국민당의 각 黨部는 전문을 보내 축하하면서, 한국독립운동을 지원한다는 뜻을 천명하였다. 일제의 정보자료에 의하면 중국국민당 浙江省黨部, 漢口特別市黨部, 南昌市黨部에서 전문을 보내왔다. 그 내용은 ‘조선의 독립운동은 중국의 혁명운동과 밀접한 관계에 있고,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에서 벗어나는 길이 곧 동북변경의 영토주권을 강고하게 할 수 있는 것’이라며, 한국의 독립운동을 원조하겠다는 것이 핵심이었다.

 임시정부가 중국에 주력하였던 외교활동의 하나는 만주지역의 한인동포들에 대한 문제였다. 만주지역에 거주하고 있는 한인동포들이 중국정부와 중국인들로부터 배척을 당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일본과 소련은 만주지역에 세력을 확대하고 있었다. 이러한 정세 하에서 중국은 한인동포들에 대해 모스크바를 배경으로 중국공산당과 결탁하고 있는 존재로, 또 일본의 앞잡이 노릇을 하는 존재로 의심하게 되었다. 만주지역에 거주하는 한인들을 불량한 존재로 인식하게 되면서, 중국은 한인동포들의 존재에 대해 크게 불안해하고, 이들을 축출하고 배척한 것이다.

 임시정부는 중국 측에 만주지역 한인동포들의 실상을 설명하고, 이들에 대한 축출과 배척을 중지할 것을 요청하는 활동을 전개하였다. 1930년 10월 30일 임시정부가 중국 측에 보낸 「東三省韓僑問題」란 문건이 그 하나다. 이는 ‘동삼성과 한교의 역사적 고찰’ ‘한일합병 후 한인의 동삼성 이주’ ‘동삼성 한교의 현황’ ‘일본제국주의와 동삼성 한교의 장래’ ‘동삼성 한교의 권리문제’ ‘한교들의 최저한도의 희망조건’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를 통해 임시정부는 동삼성은 조만간 일본에 유린될 것이 뻔한데, 동삼성에서 일본을 축출하기 위해서는 한인동포들을 안정시켜야 한다며, 한인동포들에 대한 배척운동을 저지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동삼성에 거주하는 한인들을 어루만지고 그들의 마음을 수습하는 일이 일본세력을 축출하기 위해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 된다는 것, 또 그것이 동삼성을 안정시키는 유일한 방략이라는 것을 강조한 것이다. 그리고 최저한도로 ‘구금되어 있는 한교들을 즉시 석방할 것’ ‘한교축출에 대한 명령을 철회하고 민중의 한교배척운동을 제지할 것’ ‘한국독립운동자를 정치범으로 대우하여 일본경찰에 체포되거나 일본관헌에 인도되지 않도록 할 것’ ‘한교사무를 전담하는 기구를 설립하고 한교의 교육 · 산업 · 자치 등 사무를 신중하게 처리할 것’ 등을 요청하였다.

 「東三省韓僑問題」는 외교적 목적으로 작성된 것이지만, 만주지역 한인동포들의 이주현황 · 생활상 등을 이해하는 데 귀중한 자료적 가치도 가지고 있다. 우선 1930년 당시 한인동포의 숫자와 각 지역별 분포상황이 나타나 있다. 동삼성의 한교는 遼寧省에 약 50만 명, 吉林省에 약 70만 명, 黑龍江省에 약 10만 명 등 총 130만 명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를 中東線 동부지역(阿城 · 烏珠河) · 中東線 서부지역(哈爾濱 · 蘭西 · 安達站 등) · 齊克線 지역(齊齊哈爾) · 松花江 서부지역(綏花 · 靑崗 등) · 松花江 지역(呼蘭 · 賓縣 · 通河 등) · 소련과 중국의 국경지역(東寧 · 賓淸 · 同江 등) · 중국과 소련의 국경지역(坡西區 · 毛溝嶎 · 二浪頭 등) 7개 지역으로 나누어 각 지역마다 거주하는 한인의 숫자를 기록해 놓았다. 이와 더불어 한교 숫자의 조사는 각 기관에 따라 차이를 보이고 있다며, 8개 기관에서 조사한 숫자도 함께 명기하였다.

 1. 長春 방면의 조사(1929년말 현재)요녕성:455,125명 길림성:556,320명 흑룡강성:363,240명

 2. 瀋陽 방면의 조사(1930년초 현재):130만명

 3. 만주신문 조사:811,629명

 4. 남만철도 조사:783,187명

 5. 척식회사 조사:736,266명

 6. 일본영사관 조사:619,276명

 7. 중국방면의 조사:540,500명

 8. 일본영사관이 조사한 한교의 분포표- 남만철도 연안:39,531명- 요녕성:135,254명- 길림성:54,661명- 간도:382,390명- 흑룡강성:7.449명

 임시정부는 중국 관내에 소재지를 두고 있지만, 만주지역의 동포들이 임시정부의 주요한 인적 기반이었다. 임시정부에서는 만주지역 동포들의 숫자를 대략 130만 명 정도로 파악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들의 생활상을 교육방면 · 납세방면 · 산업방면 · 금융방면 · 정치방면으로 나누어 설명하고, 이들이 중국정부에 요구하는 7가지 요구사항을 소개하였다. 이러한 내용들은 임시정부가 직접 조사 작성한 것이라는 점에서, 또 만주지역에 거주하고 있던 한인동포들이 직접 요구한 사항이라는 점에서, 사료적으로 중요한 가치가 있다.

 임시정부는 「동삼성한교문제」를 작성하여 중국 동삼성 각 縣의 관공서를 비롯하여 전국 지방관서에 배부하였다. 그리고 1931년 5월 남경에서 중국국민당의 국민회의가 개최되자, 남경에 거주하고 있는 朴贊翊을 보내 만주지역 한인들에 대한 보호를 요청하기도 하였다(「國民會議에 대하여 임시정부의 책동에 관한 보고」). 이와 함께 국무위원 趙琬九 · 趙素昻 · 李東寧 · 金澈 · 金九 명의로 된 「선언」을 국민회의에 제출하였다. 그 내용은 임시정부와 한국독립당이 추구하는 목표와 활동방향을 설명하고, 이를 실행하는 데 있어서 만주지역 한교의 역할이 중차대하다는 것을 강조한 것이었다.

 임시정부는 만보산사건으로 한중 국민들 사이에 충돌이 발생하자, 이를 무마하기 위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1931년 7월 만주에서 한중 농민들이 수로문제를 가지고 충돌이 일어났고, 이 사실이 알려지면서 국내 각지에서 중국인들을 폭행하거나 살해하는 일이 벌어졌다. 이러한 사실이 중국에 알려졌고, 중국인들이 한인들을 구타하는 등 한중간에 심각한 갈등이 발생하였다. 임시정부에서는 국무회의를 개최하고 대책을 강구하였다. 우선 외무부장 趙素昻으로 하여금 중국의 각 기관을 찾아가 완화책을 꾀하기로 하였다. 조소앙은 시정부, 시당부, 경비사령부 등을 방문하여 “이번 사건은 전혀 일본의 사주 및 선동에 의한 친일파 조선인의 폭행으로서 일본의 음모에 이용되는 것이다. 우리는 중국민중과 협력하여 결사적으로 대일행동을 집행하는 데 주저하지 않을 것이다”라며, 사태완화에 주력하였다.

 다른 한편으로는 외무부장을 비롯하여 각 단체들이 이에 대한 성명서를 발표하기도 하였다. 「한국에서 발생한 화교박해사건에 대한 한인들의 성명」이 그것이다. 국무위원 전원이 서명한 성명서와 동삼성 한교단체의 성명서, 상해한인연합회의 성명서가 수록되어 있다. 이들 성명서를 통해 일본이 한교들을 강박하여 침략의 앞잡이로 삼고 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지만, “한교 전체와 만보산일대 개간농민의 행동과는 완전히 무관하다”, “이번 한국경내에서 발생한 華僑慘案의 근본적 원인은 일본제국주의의 오도와 선동에 있다”, “중국관민들은 일제의 간사한 계략을 통찰해주기 바란다”며, 사건을 완화시키기 위해 다방면으로 노력을 기울였다.

 공식적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중국국민당과 접촉하는 통로가 마련된 것은 1930년대부터였다. 1932년 4월 윤봉길의사의 홍구공원의거가 그 계기가 되었다. 윤봉길의사의 의거를 주도하였던 金九가 일제로부터 체포 위협에 직면하게 되자, 蔣介石은 중국국민당 조직부장 陳果夫에게 김구를 보호하도록 하였다. 진과부는 1910년대 상해에서 申圭植을 비롯한 한국독립운동자들을 적극 도왔던 陳其美의 조카로서, 한국독립운동에 대해 누구보다도 이해가 많았던 인물이었다.

 진과부는 윤봉길의사의 의거를 주도하고 상해의 피치 박사 집에 은신해 있던 김구를 안전한 지역으로 피신시키고자 하였고, 그것을 조직부에서 일하고 있던 蕭錚에게 맡겼다. 蕭錚은 그가 잘알고 지내던 褚輔成에게 부탁하였다. 저보성은 중국국민당 당원으로 浙江省 主席을 역임한 바 있고 嘉興의 유지였다. 金九는 상해에서 가흥으로 가 저보성의 도움으로 그의 집에 피신하였다. 이후 蕭錚과 金九 사이에 연락통로가 마련되었다. 상호간의 연락은 주로 서신을 통해 이루어졌고, 중간에서 그것을 담당한 사람이 있었다. 蕭錚과 함께 중국국민당에서 일하고 있던 공패성이 남경과 가흥을 오가며 연락을 담당하였고, 또 중국국민당에 근무하고 있던 朴贊翊이 그 역할을 담당하였다.

 김구와 진과부 사이의 연락관계가 맺어지면서, 중국국민당과의 통로가 마련되었다. 소쟁은 김구와의 연락을 담당하며, 그 내용을 중국국민당 조직부장 陳果夫에게 보고하였고, 진과부는 중요한 사항의 경우에는 蔣介石에게 보고하여 허락을 맡았다. 자료집에는 김구와 소쟁 사이에 오고간 서신, 그리고 진과부가 장개석에게 올린 보고서들을 수록하였다. 내용이 간단하여 그 실상을 설명할 수 없지만, 이러한 통로를 통해 김구는 장개석과의 면담을 추진하였고, 낙양군관학교에서 한인청년들의 군사훈련을 실시하게 되었다.

 1940년대

 임시정부가 중국과 교섭하는 통로는 중국국민당이었다. 1932년 윤봉길의사의 의거 이후 중국국민당 조직부장 陳果夫와 金九 사이에 연락통로가 개설된 것이 그 계기였다. 이후 임시정부가 해방을 맞아 환국할 때까지 중국과 교섭하는 창구는 중국국민당이었고, 담당부서는 조직부였다. 그러나 담당자는 변화가 있었다. 중국국민당의 조직부장에 임명된 사람이 한국담당업무를 맡게 되었기 때문이다.

 1938년 陳果夫에서 朱家驊로 바뀌었다. 바뀌는 데는 이유가 있었다. 蕭錚의 증언에 의하면, 1938년 湖南省 長沙에서 발생한 김구피격사건 때문이었다. 진과부는 이 사건이 한국혁명동지들 간에 내부분규로 일어난 것이라는 소식을 듣고, 매우 마음 아파해하면서 소쟁에게 “당신도 이 일로 고생을 했으니 우리로서는 협조를 끊고 그 방도를 모색하여 남에게 넘기자”고 하였다고 한다. 한국의 독립운동 세력 내부의 분규를 보고 실망한 진과부가 한국관계업무에서 손을 떼고자 한 것이다. 진과부는 임시정부와의 업무를 군사위원회에 이관할 생각이었지만, 그 보고를 받은 장개석이 중국국민당 조직부로 하여금 업무를 담당토록 하였다.

 이로써 임시정부와의 관계는 중국국민당 조직부에서 담당하게 되었고, 임시정부는 이를 창구로 하여 중국과 교섭하게 되었다. 당시 중국국민당 조직부장은 朱家驊였다. 1938년 10월부터 주가화가 한국담당 책임을 맡았고, 徐恩曾 · 李超英 · 康澤 등이 실무자들이었다. 임시정부가 중경으로 이전하고, 양측 사이에 교섭이 많아지자 담당 인원을 더 늘렸다. 1942년 7월 중국국민당 상무위원회에서 戴傳賢 · 何應欽 · 王寵惠 · 陳果夫 · 朱家驊 · 吳鐵城 · 王世杰 등 7명으로 전문소위원회를 조직하고, 여기에서 한국문제의 전체적인 일을 처리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1944년 5월 吳鐵城이 조직부장을 맡게 되면서, 주가화에 이어 오철성이 한국담당 책임자가 되었다.

 이와 같이 중국의 한국담당 부서와 책임자가 정해지면서, 1940년대 중국과의 외교활동은 비교적 체계적으로 이루어졌다. 그 방법은 두 단계를 거쳤다. 우선 임시정부는 중국국민당 조직부장과 접촉하고, 조직부장이 이를 중국의 당 · 정 · 군 책임자에게 보고하는 형식이었다. 예를 들면 임시정부가 중국국민당에 요구하는 사항이 있을 경우, 중국국민당 조직부장에게 서신이나 공문을 보내고, 조직부장이 이를 중국국민당 중앙집행위원회에 제출하였다. 또 임시정부가 중국군사위원회에 보내는 것도 일단 조직부장에게 보내면, 조직부장이 이를 중국군사위원회에 제출하는 방법이었다. 이외에 특별한 경우에는 임시정부에서 직접 蔣介石이나 중국군사위원회에 공문을 보내는 일도 있다.

 임시정부는 1940년 중경에 정착하면서 활발하게 활동하였다. 민족주의 계열 독립운동 세력을 통일하여 한국독립당을 창당하였고, 이를 기반으로 임시정부의 조직을 확대 강화한 것이다. 그리고 무장세력으로 한국광복군을 편성하였다. 즉 당 · 정 · 군의 체제를 정비한 것이다. 임시정부가 당 · 정 · 군의 체제를 갖추고 적극적으로 독립운동을 전개해 나가면서, 중국과의 외교활동도 더욱 활발하고 다양하게 전개되었다. 임시정부가 중국을 대상으로 전개한 외교활동은 다양했다. 그 중에서도 광복군 창설에 대한 승인문제, 임시정부를 비롯한 독립운동 세력들에 대한 재정적 지원문제, 그리고 임시정부의 승인문제 등이 주요한 현안이었다.

 임시정부가 중국 측을 상대로 전개한 외교활동 중 하나는 광복군 창설에 대한 인준문제였다. 임시정부는 1940년 9월 17일 광복군을 창설하였지만, 중국군사위원회가 이를 인준하지 않고 있었다. 중국군사위원회는 광복군을 그 예속 하에 두려고 하였지만, 임시정부가 이를 거부하고 독립적으로 유지하려고 하였기 때문이다. 창설 후 광복군이 활동을 시작하자, 중국군사위원회는 중국 각지의 부대에 명령을 내려 광복군의 활동을 엄밀 취체하도록 하였다. 이에 임시정부는 중국을 상대로 광복군 창설을 인준하고 광복군에 대한 취체명령을 철회해 줄 것을 요구하는 활동을 전개하게 되었다.

 김구는 주가화를 대상으로 광복군 창설 인준문제를 교섭하였다. 광복군을 창설한 직후 주가화에게 광복군총사령부 성립기념식을 성대하게 거행하였으니, 광복군 훈련과 편제 등에 관해 협조해 달라고 하면서, 총사령 李靑天과 직접 방문하겠다는 서신을 보냈다(「긴급사무 협의를 위해 방문의향을 전하는 편지」). 또 「광복군의 향후 공작절차를 개진한 공함」을 보내, 광복군이 중국과의 공동작전을 통해 중국의 抗戰을 돕고 한국의 독립을 완성하고자 한다면서, ‘광복군의 정식 성립을 비준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이러한 김구의 요청에 대해 주가화는 중국군사위원회와 장개석에게 보고하였고, 그 결과를 알려주었다(「광복군 편조문제의 진행 상황을 전하는 공함」).

 그러나 광복군 문제는 임시정부 의도대로 해결되지 않았다. 1941년 6월 주가화는 김구에게 “광복군 조직문제는 이미 위원장님으로부터 원칙적인 비준을 받았습니다. 지금 주관부처에서 업무를 처리 중에 있습니다”는 답변을 보내왔다(「광복군 조직문제에 대한 장개석의 원칙적인 비준을 전하는 공함」). 그렇지만 주관부처인 중국군사위원회 판공청의 의도는 중국군을 보내 광복군을 통제하려는 것이었다. 이에 김구는 직접 장개석과 면담하겠다고 하였다. 김구는 주가화에게 공함을 보내 “광복군 문제가 여전히 제자리걸음을 면치 못하고 있는 이유를 이해할 수 없다”며 “광복군 문제를 해결할 마지막 방안으로 장개석 위원장을 직접 뵙고 청원하고 싶다”고 하였다. 주가화를 창구로 하여 중국과 교섭을 전개하는 것이 공식적인 통로였지만, 때로는 김구가 장개석에게 공함을 보내거나 직접 면담을 요청하기도 한 것이다.

 중국을 상대로 한 외교활동의 또 하나는 재정적 지원을 요청하는 것이었다. 임시정부는 미주교포들로부터 애국금 · 혈성금 등의 명목으로 자금을 지원받고 있었지만, 이것만 가지고는 임시정부를 유지 운영하기가 어려웠다. 더욱이 임시정부가 중경에 정착하여 광복군을 창설하고 적극적인 항일독립운동을 전개하면서 많은 자금이 필요하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임시정부 가족들을 비롯하여 중경에 모여드는 한인들의 생활도 문제가 되었다. 여기에 1941년 12월 미일 간에 태평양전쟁이 발발하면서 미주교포들이 보내오는 자금도 여의치 않았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임시정부는 중국 측에 재정적 지원을 요청하지 않을 수 없었고, 주가화에게 보낸 공함 및 서신 중 상당수는 재정문제와 관련된 것들이다.

 처음에는 필요할 때마다 지원을 요청하였다. 광복군을 창설한 후 초모활동을 통해 많은 한인청년들이 광복군에 참여하게 되면서, 이들을 입히고 먹이는 문제가 절박해졌다. 김구는 주가화에게 최근 중국 각지에서 한인청년 5백여 명이 광복군을 찾아왔다고 하면서 “이들이 필요로 하는 경비는 그간 스스로 준비하였으나 이제 우리의 힘만으로는 더 이상 경비를 마련하기 힘든 지경이 되었다. 머지않아 겨울이 다가오는데 의복과 침구 등을 갖출 여력이 없어 수많은 열혈청년들이 추위와 굶주림에 시달리고 있다”며, 한국청년 구제비로 20만원을 요청하였다. 주가화는 이를 장개석에게 그대로 보고하였다(「김구의 한국청년 구제비 20만원 지원요청을 전하는 簽呈」). 이에 대해 장개석은 10만원을 지원하도록 군정부에 지령하였고(「한국청년 구제비 10만원 지급결정을 전하는 공함」), 주가화는 김구에게 “구제비 10만원을 지원하기로 하였으니 軍需署에 사람을 보내 수령하라”는 공함을 보내왔다.

 1941년 말부터 중국은 정기적으로 지원하기 시작하였다. 1941년 12월부터 매달 6만원을 지급하기 시작한 것이다. 1943년 5월까지 이러한 규모의 재정적 지원이 계속되었다. 그러나 당시 중경에는 임시정부 이외에도 조선민족혁명당을 비롯한 여러 독립운동 세력들이 활동하고 있었고, 중경의 인구가 급속하게 증가하면서 인플레이션으로 인해 물가가 치솟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6만원을 가지고는 생활하는 것조차 어렵게 되었다. 임시정부는 새로운 방도를 찾았다.

 임시정부가 찾은 새로운 방도는 중국에 신용차관을 요청하는 것이었다. 김구는 1942년 6월 주가화에게 중국정부가 솔선하여 임시정부에 실제적인 원조를 한다면 동맹국들도 뒤를 따를 것이라고 하면서 “중국정부에서 우리에게 미화 50만 달러의 신용차관을 제공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신용차관 50만 달러 제공요청에 관한 공함」). 주가화는 중국정부 재정부장 孔祥熙에게 이에 대해 적극 검토해주기를 요청하였지만, 공상희는 “항전에 전념하고 있는 우리나라도 지금 외화가 절실히 필요한 시점이다. 한국독립당이 달러를 필요로 한다면 직접 미국정부와 접촉하여 차관을 얻는 것이 좋을 것이다”라는 부정적인 답변을 보내왔다. 주가화는 그 결과를 서신을 통해 김구에게 전하였다(「신용차관 제공요청과 관련한 孔祥熙의 답신 내용을 전하는 편지」).

 신용차관을 얻지 못한 임시정부는 보조비를 증액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김구는 주가화에게 6만원의 지원금으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다며, 장개석 위원장에게 보조비를 증액해주도록 간곡히 청해 달라고 하였다. 요구한 보조금은 20만원이었다. 한국독립당과 임시정부 활동비를 비롯하여 중경에 거주하고 있는 한교 340명의 생활비로 20만원은 있어야 현상을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이다(「보조비를 20만원으로 증액해 달라는 공함」). 보조비는 중국국민당 중앙에서 지급되었다. 그러나 물가는 하루가 다르게 치솟았고, 임시정부는 계속하여 보조비 증액을 요구하였다. 1944년에는 보조비를 1백만 원으로, 1945년에는 5백만 원으로 증액시켜 달라고 하였다.

 이외에 특별한 일이 발생하였을 때, 그리고 임시정부의 활동경비는 별도로 요청하였다. 1945년 1월말 일본군을 탈출한 학병 50여명이 安徽省 阜陽을 거쳐 중경에 도착한 일이 있었다. 이들을 위해 필요한 경비를 중국에 요청하였고, 중국의 행정원에서는 재정부에 2백만 원을 지원하라는 명령을 내렸다(「귀순 한국청년 구제비 2백만 원 지급결정을 알리는 공함」). 그리고 국내외 공작활동비를 비롯하여 샌프란시스코회의에 파견하는 대표의 경비를 요청하기도 하였다.

 또 임시정부 승인을 위한 외교활동을 전개하였다. 이를 위한 활동은 다양한 방법으로 전개되었다. 「關於承認韓國臨時政府之節略」, 「備忘錄」 등의 문건을 작성하여 제출하거나 임시정부 국무위원 명의로 장개석에게 직접 요청하였고, 외무부장이 중국 각계의 인사들을 만나 요청하거나 중한문화협회의 강연회 등을 통해 임시정부 승인의 당위성과 필요성을 강조하기도 하였다.

 김구는 1942년 1월 30일 중국 측에 임시정부 승인을 요청하는 절략을 제출하였다. 중국이 임시정부를 승인하는 것은 두 나라간 역사적 · 도의적 · 이해득실에서 중대한 의미를 갖고 있는데, 유감스럽게도 승인을 받지 못하고 있다며, 임시정부 승인을 촉구한 것이다. 특히 孫文이 廣州에서 대총통에 취임할 때 申圭植을 國使로 맞이하고 한국독립운동을 지원하겠노라 약속한 것을 언급하면서, 국제정세가 반침략진영에 유리하게 전개되고 있는 지금이야 말로 임시정부를 승인할 천재일우의 기회라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1944년 7월에는 임시정부 국무위원의 명의로 장개석에게 임시정부 승인을 요청하였다. “지난 해 카이로회의에서 각하의 강력한 요청으로 영국과 미국의 영수도 전후 한국의 독립을 보증하는데 찬동하였다”고 하면서, “전후 한국의 독립보증을 창도하셨던 각하께서 이런 정황을 살피시어 중국정부가 솔선하여 임시정부 승인하길 바란다”고 하였다. 중국정부가 앞장서서 임시정부 승인하라는 요청이었다.

 그러나 중국은 연합국과의 관계 때문에 독자적으로 임시정부를 승인할 수 없었다. 그렇지만 임시정부 승인을 위해 적지 않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1945년 3월 吳鐵城은 金九에게 공함을 보내 주미중국대사 邵毓麟이 전보를 보내왔다며 그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이에 의하면 邵毓麟은 미국의 국무장관과 원동사무담당관을 만나 한국문제를 논의하였으나, “미국은 현재 상황에서는 임시정부를 승인할 의사가 없다는 것을 확인했다”며, 임시정부가 “미국의 실제적인 원조를 이끌어 낼 필요가 있다”고 하였다.

 장개석과의 직접 면담을 하기도 하였다. 중국과의 공식적인 교섭은 중국국민당 조직부장을 통하는 것이었지만, 장개석과의 직접 면담을 요청하여 접견한 경우도 있었다. 장개석과의 면담은 일단 조직부장 주가화에게 요청하고, 주가화가 이를 장개석에게 건의하여 실현시켰다. 1943년 7월 26일 장개석과의 면담이 이루어졌다. 1943년 11월 카이로에서 미 · 영 · 중 3개국 거두들이 전후문제를 협의하기 위한 회의를 개최한다는 소식을 듣고, 임시정부 주석 金九 · 외무무장 趙素昻 · 선전부장 金奎植 · 군무부장 金元鳳 · 광복군 총사령 李靑天이 군사위원회 접견실에서 장개석과 만났다. 김구는 장개석에게 ‘미국과 영국이 전후 한국문제에 대해 국제공동관리 방식을 주장하고 있는데, 중국이 한국의 독립을 주장하여 관철시켜 달라’고 요청하였다. 장개석과의 면담은 이후에도 몇 차례 더 이루어졌다.「接見韓國金九主席談話經過」(1944. 9. 20), 「總裁接見韓國臨時政府主席金九記錄」(1945. 9), 「總裁接見韓國臨時政府主席金九談話」(1945. 10. 29) 등이 그것이다.

 이외에 민간차원의 외교활동도 이루어졌다. 中韓文化協會가 대표적인 사례이다. 중한문화협회는 임시정부 외무부장 趙素昻과 중국의 행정원장 孫科의 주도하에, 한국과 중국 각계의 인사들이 참여한 가운데 1942년 10월 11일 중경에서 결성되었다. 성립식에는 金九 · 趙素昻 · 李靑天 · 金元鳳 등 한국측 인사와 孫科 · 吳鐵城 · 白崇禧 · 馮玉祥 등 중국 측 인사들을 비롯하여 400여명이 참가하였다. 한국에서는 임시정부와 임시의정원 · 광복군의 주요 인사들이, 중국에서도 당 · 정 · 군의 주요 인사들이 대부분 참여하여 성립되었다. 성립식 상황을 중국의 『中央日報』가 10월 12일자로 보도하였다.

 중한문화협회는 한중 각계의 인사들로 구성된 일종의 우호단체였다. 결성 이후 중한문화협회는 茶菓會 · 講演會 · 座談會 등을 개최하며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특히 강연회에서는 한중의 인사들이 나서서 한중합작, 임시정부 승인문제, 한국독립문제 등을 주제로 삼았다. 그러한 예로 1943년 2월 28일 3 · 1절 기념일을 맞아 개최한 강연회에서 馮玉祥은 “중한 양국의 운명은 상관관계에 있다. 중국의 승리와 동맹국의 승리는 바로 한국의 승리이다. 한중은 서로 도와야 하며 서로 관심을 갖고 승리에 대한 믿음을 가져야 한다”는 내용의 연설을 하였다. 그리고 카이로회의에서 한국독립문제가 발표되자, 召力子와 梁寒操를 초청하여 ‘한국독립과 세계평화’ 및 ‘한국독립지원’을 주제로 한 강연회를 개최하기도 하였다.

 중한문화협회는 민간단체로서 집행력을 갖고 있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참여한 주요 구성원들이 한국과 중국의 당 · 정 · 군을 이끌고 있는 유력 인사들이었고, 한중간에 유대와 우호관계를 상징하는 존재였다. 그리고 이들이 참여한 가운데 강연회 · 좌담회 등을 개최하여 한중간의 현안문제들에 대해 의견을 교환하였다. 이를 통해 한중의 주요 인사들이 상호 이해를 증진시켰고, 이것이 공식적으로 이루어지기 어려운 외교적 문제들을 해결하는데 적지 않게 도움이 되었다. 공식적인 외교활동 못지않게 중한문화협회를 통한 활동도 중요하게 다루어져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 자료집은 임시정부가 중국을 상대로 전개한 외교활동 관련 자료들을 수집하여 정리한 것이지만, 누락된 것들도 적지 않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중국을 상대로 한 외교활동이 다양하게 전개되었기 때문에, 그 범위를 명확하게 한정하기 어려운 점이 있다. 또 외무부 관련 자료와 중국의 임시정부에 대한 인식을 각기 별도의 자료집으로 발간하면서, 서로 중복된 것을 피하느라고 자료가 단절된 부분도 있다. 외무부 자료집과 중국의 인식 자료집을 함께 참고하여 보충하면 되리라 생각한다.

한시준(단국대학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