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1. 『한국의 광복을 위한 중국정부의 지원에 대한 회상』  

1. 『한국의 광복을 위한 중국정부의 지원에 대한 회상』

[저자] 蕭錚

[원문제목] 「中國協助韓國光復之回憶」

[게재지] 『傳記文學』 第44卷 第5期, 第45卷 第1 · 3 · 4 · 6期

 한국정부가 자유를 찾아 중화민국으로의 귀순을 결심한 6명의 義士를 구속 기소하고, 아시아 청소년 야구 선수권대회에 참가한 우리 대표단이 퇴장한 사건을 계기로 과거 우리나라 조야가 한국광복운동을 위해 협조했던 열성이 이제는 지나간 옛일이 되었구나 하는 감회에 젖게 되었다. 개인적으로 한국광복운동과 인연을 맺은 것은 민국 21년(1932)이니 지금으로부터 이미 반세기가 지난 아득한 옛날의 일이다. 우리의 혁명선열들이 한국광복운동에 협조한 때부터 계산한다면 중한 두 나라 지사들은 70년 이상을 공동의 목표를 위해 분투한 셈이다. 이처럼 장구한 세월이 지났으니 지금 한국인들이 과거 중한의 합작관계를 까맣게 잊어버린 것도 의외는 아니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역사는 사실을 비추는 거울이다. 과거의 기록들을 하나씩 들추다보면 혹 옛 일들에 관한 기억이 되살아나 사람들로 하여금 중한 두 민족의 우의가 얼마나 돈독했는지 알게 할 수 있지 않을까! ‘과거를 들추는 자는 영웅이 아니다’는 말이 있다. 하지만 역사란 본시 과거를 들추는 작업이 아닌가! 어느 누가 중한 두 민족이 이루어 낸 피와 눈물의 역사를 말살할 수 있겠는가!

一. 대한민국 독립운동지도자와 중국혁명지사의 연계

 1876년 조선을 강박하여 ‘일한수호조약’(이른바 ‘병자조약’)을 체결한 뒤 일본은 호시탐탐 한국을 병탄할 기회를 노렸다. 그 첫 번째 단계로 일본은 한국이 중국과의 관계를 단절하도록 강요하는 한편 신식군대의 훈련과 내정개혁에 간섭하였다. 이를 통해 일본은 조선의 ‘독립’을 고취하여 중국에 대한 종속적인 관계를 청산하도록 획책하였다. 그 결과 조선 내부는 ‘親華派’와 ‘親日派’ 두 파벌간의 암투와 분쟁이 발생하게 되었다. 전자는 대부분 보수적인 인물들로 구성되었는데, 이들은 오랜 세월 중국은 조선에 대해 정치적 침략야욕이나 경제적 침탈의 욕심을 보이지 않았다며 ‘친화’를 주장하였다. 이에 반해 ‘친일파’들은 중국정부(청조)는 이미 부패한 반면 일본은 유신의 단계에 있음으로 조선은 일본을 배워 서구화에 힘써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이런 주장을 바탕으로 ‘친일파’는 다수의 청년지식인을 흡수하여 단발을 단행하고, 겉으로는 기독교 선교를 내세우면서 실제로는 일본의 한국침략을 위한 첨병 노릇을 하였다.

그러나 당시 한국의 민간세력은 여전히 보수적인 경향이 강했다. 특히 단발을 수치스러운 것으로 생각한 백성들은 ‘동학당’이라는 비밀조직을 결성하여 ‘계급관념 타파’, ‘탐관오리 숙청’ 등을 구호로 활동하였다. 동학당은 전국을 관장하는 ‘道主’ 아래 각 府 · 道에 총지휘관 성격의 ‘接主’를 두었다. (대한민국임시정부 주석 金九 선생의 회고록인 『白凡逸志』에 의하면 김 선생은 19세에 황해도의 ‘接主’가 되어 ‘金昌洙’라는 이름으로 7백여 정의 소총을 가진 대원을 이끌고 황해도의 首府인 海州를 공격했다 한다). 그러나 오합지졸에 불과한 동학도들은 결국 관군의 공격을 이겨내지 못하고 실패하여 사방으로 흩어지게 되었다. 민간에 잠복한 동학도들은 후일 ‘반일’의 주력이 되었다.

 조선의 내정에 대한 간섭을 날로 강화한 일본은 각 ‘道’(조선은 모두 8개의 도로 구성되어 있었음)에 총감을 두고, 각지에 경찰소를 설치하여 그 지휘권을 장악하였다. 왕실에까지 마수를 뻗친 일본은 친러를 주장하는 閔妃(당시 국왕과 왕비는 러시아와 친밀한 관계를 통해 일본을 견제할 것을 주장하였다)를 시해하고 평양에 대규모 병력을 주둔시켰다. 갑오년(서기 1894년)에 이르러 일본군은 청군과 충돌을 일으켜 마침내 두 나라 사이에 대규모 전쟁이 발발하게 되었다. 연전연패한 청군은 요동반도까지 상실하였고, 다음해에는 청나라 해군까지 황해에서 대패하여 제독 丁汝昌이 자살하였다.

 육상과 해상전투에서 모두 패한 청조는 부득이 굴욕적인 馬關條約을 체결하여 2억냥에 이르는 거액의 배상금을 지급하는 한편 조선의 독립을 인정하고, 요동반도 및 대만과 팽호를 일본에 할양하였다. 일본이 요동반도를 차지하면 동진정책에 큰 장애물이 될 것으로 판단한 러시아는 독일 · 프랑스와 연합하여 요동반도를 중국에 반환하도록 간섭하였다. 이때부터 이미 일본은 러시아와의 일전을 준비하였다.

 우리 동북3성은 광대한 면적에 비해 인구는 희소하였으나 자원이 풍부한 지역으로 오래 전부터 일본이 눈독을 들여온 곳이다. 조선 말기부터 장백산과 압록강 일대에는 조선 이민자들이 크게 늘어나기 시작하였다. 특히 을미사변 이후 의병활동을 벌이다 실패한 지사들이 동북지역을 피난처로 삼게 되면서 요동 일대에는 항일지사들의 발길이 더욱 잦아지게 되었다. 김구도 그 중의 하나였다.

 갑오전쟁에서의 승리로 조선 전역은 물론이고 요동까지 세력권에 둔 일본이 기고만장하였음은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러 · 독 · 프 3국간섭으로 부득이 요동반도를 중국에 반환한 일본은 또 다른 전쟁을 준비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결국 1903년 중국 경내를 주전장으로 전쟁을 벌인 일본과 러시아는 1905년 미국에서 강화조약을 체결하여 전쟁을 마무리하였다. 전쟁에서의 승리로 중국 경내의 요동반도 남단에 위치한 旅順과 大連 두 조차지를 차지한 일본은 이외에도 수많은 권리를 획득하였다. 이 가운데 특히 주목되는 부분은 ‘러시아는 일본이 조선의 정치 · 군사 및 경제면에서 특별한 이익을 향유함을 인정한다. 아울러 일본이 조선의 국정에 대한 지도 · 보호 및 감독의 권한을 가짐을 인정한다.’고 명문 규정한 것이다. 이는 한국을 일본의 보호국으로 인정한 것에 다름 아닌 것으로, 이때부터 조선 전역은 일본의 속지나 다름없는 처지로 전락하고 말았다.

 러 · 일 간에 맺어진 포츠머스조약으로 조선에서의 독점적인 지위를 인정받은 일본은 곧이어 조선을 위협하여 제2차 한일협약을 체결하였다. 조선을 일본의 보호국으로 규정한 이 협약의 체결 소식이 알려지자 조선 각지에서 혁명지사들이 분기하여 의병활동을 벌였으나 일본의 고압정책으로 모두 실패하고 말았다.

 1909년 12월 安重根 의사가 하얼빈에서 일본외상 伊藤博文을 저격한 사건은 세상을 놀라게 한 쾌거였다. 안 의사는 조선의 세족 출신으로, 進士인 부친 安泰勳은 의협심이 강하고 재산도 상당하였다. 안태훈의 큰아들인 안중근은 거사 다음해 여순감옥에서 사망하였다. 안 의사의 사촌동생인 安明根도 寺內 총독 암살사건에 연루되어 15년간 옥살이를 하였다. 안 의사의 동생인 安恭根은 대한민국임시정부에 가담하여 김구 주석을 보좌할 때 필자와 자주 교류하였는데 그 자세한 내용은 후술하도록 하겠다) 이 사건 이후 온갖 어려움을 물리치고 독립운동에 매진하는 한국혁명지사들이 크게 늘어났는데, 이는 모두 안 의사의 거사에 영향 받은 것이었다.

 중국혁명의 영도자인 孫中山 선생이 첫 번째 거사를 일으킨 곳은 廣州(을미년, 서기 1895년)였다. 거사 실패 후 일본과 미국을 거쳐 영국에 도착한 선생은 런던에서 청국공사관에 억류되는 고초를 겪기도 하였다.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선생은 이후에도 혁명당원들을 이끌고 국내 각지에서 거사를 일으켰으나 매번 실패를 맛보았다. 을미년에서 을사년까지 십년간의 거사에서 장열하게 희생된 혁명당원을 제외하고도, 거사 실패 후 일본으로 망명한 사람만도 수천 명에 이르렀다. 당시 대부분의 혁명당원이 일본을 망명지로 택한 것은 지리적으로 중국대륙과 가까워 또 다른 거사를 도모하기 용이했기 때문이었다.

 1905년, 유럽에서의 활동을 접고 미국을 거쳐 재차 일본에 도착한 손중산 선생은 이전 여러 단체로 나뉘어 별도로 활동하고 있던 혁명지사들을 총집결시켜 ‘중국혁명동맹회’를 조직하였다. 손 선생을 위시하여 黃興(克强) · 陳其美(英士) · 張繼(溥泉) · 戴季陶(天仇) 등 혁명선열들이 이 조직의 중심인물이었다. 혁명의 4대 방침과 혁명방략을 근간으로 삼은 중국혁명동맹회는 이후 국내외 혁명운동의 중심기관으로 자리하였다.

 손 선생의 혁명운동은 三民主義의 실현을 목표로 하였다. 민족의 독립자유를 주장한 민족주의, 정치와 경제의 자유평등을 강조한 민권주의와 민생주의에 입각하여 손 선생은 이러한 자유평등의 기회를 누리지 못하는 동아의 각 민족에 대해 무한한 동정의 뜻을 품고 있었다. 지리적으로 가장 가까우면서도 깊은 역사적 관계를 맺어온 한국이 일본에 의해 멸망한 사실에 손 선생은 특히 깊은 동정심을 가지고 있었다. 이런 까닭에 손 선생은 동경을 중심으로 세계 각지를 왕래하며 혁명활동을 전개하면서 현지에서 활동 중인 한국혁명지사들과도 밀접한 연계를 맺고 도움을 아끼지 않았다.

 항전 전 張溥泉 선생이 필자에게 일러준 바에 의하면, 안중근 의사는 생전 진기미 · 황흥 두 선생과 특별한 우의를 맺었다 한다. 후일 안 의사의 동생인 안공근 선생에게 사실여부를 확인하였더니 자신도 분명 그런 얘기를 들은 바 있다 하였다. 이 한 가지만으로도 형제와 같은 중한 두 나라 혁명지사들의 관계가 얼마나 깊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중국 상해에 설립된 것도, 蔣 총통이 대한민국임시정부 김구 주석에 대해 특별한 관심을 보이고 한국광복을 위해 지원한 것도 결코 우연한 것은 아니었다. 이제부터 이와 관련한 자세한 내용들을 회고해 보고자 한다.

 1910년 3월 안중근 의사가 여순감옥에서 처형된 뒤인 그해 8월 22일, 한일합병조약이 체결됨으로써 한국은 정식으로 멸망을 고하였다. 망국 후 安昌浩 · 梁起鐸 · 李東寧 · 金九 · 崔光玉 등은 新民會를 중심으로 활동하며 각 애국단체를 통합하여 漢城에 道督祔를 설립하고 각 도에는 總監을 두어 국맥을 잇고자 하였다. 이들은 양기탁을 경기도 대표, 김구를 황해도 대표, 安泰國을 평안남도 대표, 李昇薰을 평안북도 대표로 정하고 거사경비를 마련하기 위해 각 대표들이 해당지역에서 모금운동을 벌이도록 하였다. 이 무렵 안중근 의사의 사촌동생인 안명근이 寺內 총독을 저격하려다 실패하고 체포되어 15년간 복역하게 되었다. 이 사건에 연루된 김구 선생도 다음해(신해년) 체포되어 심한 고문으로 세 차례나 죽을 고비를 넘겼다(김구 선생은 17년 전 일본군을 살해 후 체포되어 사형 선고를 받았으나 탈옥하였다. 다행히도 당시 가명을 사용했던 관계로 두 번째 체포되었을 때 그 신분이 노출되지 않았다). 혹독한 고문에도 불구하고 동지들의 이름을 발설하지 않았던 김구 선생은 17년 형을 선고받았다. 일본 명치천황의 서거로 3분의 1의 형기를 감형 받았던 김 선생은, 2년을 감옥에서 보낸 뒤 1913년에야 출옥하였다.

 신해혁명의 성공으로 1912년 중화민국이 성립되기는 하였으나 다음해 2차혁명이 실패로 마감되면서 중국은 군벌통치시대로 접어들었다. 김구 선생이 출옥한 후 몇 년이 지난 1919년 한국에서는 ‘3 · 1운동’이 발생하였다. ‘3 · 1운동’ 발생 직후인 3월 4일 압록강을 건너 중국 安東으로 망명한 김구 선생은 14명의 동지와 함께 상해에 도착하였다.

二. 중국혁명의 성공과 상해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성립

 서기 1911년(신해년) 10월 10일, 중국 혁명당원들이 武昌에서 거사를 일으키자 전국 각지에서 이에 호응하였다. 다음해(1912년) 1월 1일, 南京에서 임시대총통에 취임한 國父 손중산 선생이 중화민국의 정식 성립을 선포하면서 아시아 최초의 민주공화국이 탄생하게 되었다. 중화민국의 탄생이 전세계에 엄청난 반향을 불러 일으켰음은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특히 조국광복과 민주국가의 건설을 위해 노력하고 있던 한국의 혁명지사들에게 중화민국의 탄생은 강한 희망의 불꽃으로 피어올랐다.

 혁명운동을 전개하기 시작한 때부터 한국의 지사들은 중국혁명의 성공이 한국의 전도와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잘 알고 있었다. 더구나 안중근 의사의 거사가 중국 혁명당원들의 도움으로 성공한 사실은 한국지사들을 고무시키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중국혁명의 성공 소식이 알려지자 당시 옥중에 있던 김구 · 양기탁 등을 제외한 대부분의 혁명지사들이 중국의 상해에 집결하였다. 이동녕 · 申圭植 · 閔石麟(후일 김구 선생의 비서로 활동할 때 필자와 막역한 관계를 유지하였다. 항일전쟁이 끝난 뒤 상해총영사를 지내기도 하였다) 등이 당시 상해에서 활동하던 대표적인 한국 혁명지사이다.

 신해혁명 성공을 전후하여 중국혁명의 중심이었던 상해의 혁명당원들은 陳其美(영사) 선생이 영도하였다. 국부 손중산 선생에 의해 중화민국임시정부 工商總長에 임명된 뒤에도 진기미 선생은 여전히 상해의 혁명당원들을 이끄는 중국혁명의 주력으로 활약하였다. 중국혁명의 조속한 완성을 위해 개인을 희생하기로 결심한 국부의 양보로 남북평화협상이 성공을 거두자 국부께서는 임시대총통의 자리를 북방의 수령인 袁世凱에게 양보하였다.

 北京에서 임시대총통에 취임한 원세개가 가장 두려워한 존재는 진기미 선생이었다. 누차 북상을 재촉하는 원세개의 전보를 받은 진 선생은 원씨의 간계를 간파하고 공직 취임보다는 해외시찰을 원한다는 자신의 뜻을 전하였다. 원세개가 여비 명목으로 6만원(당시 중국 은화 1원은 1달러에 상당) 가운데 우선 4만원을 상해로 보내자 진 선생은 전액을 혁명동지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이 가운데 5분의 1은 당시 중국에서 활동하고 있던 월남 · 인도 등 약소민족 혁명지사들에게 분배해 주었는데, 한국지사들에게 가장 많은 액수가 분배되었다. 이에 관해 진기미 선생의 조카인 陳果夫 선생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숙부는 한국의 독립을 촉진하기 위해 한국 혁명지사들과 상해에서 비밀단체인 ‘신아동제사’를 조직하였다 …… 숙부는 약소민족에 대한 동정과 지지를 아끼지 않았다. 민국 원년 말, 숙부가 해외 공상업 시찰을 원하자 원세개는 여비 명목으로 4만원을 상해로 송금하였다. 이 돈은 잠시 내가 관리하게 되었으나 불과 두 달이 못되어 모두 바닥나고 말았다. 대부분은 동지들을 위해 사용하였고 5분의 1, 즉 8천원 정도는 한국 · 월남 · 인도의 혁명당원에 대한 지원과 중국에 유학하고 있던 한국학생들의 학비 등으로 지출되었다. 이를 통해서도 숙부가 얼마나 세계혁명에 많은 관심을 두고 있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이어 진과부 선생은 “어느 해인가 겨울방학을 맞아 인사차 상해로 숙부를 찾아간 적이 있었다. 숙부 집에서는 마침 회의가 열리고 있었는데 참석자는 한국 · 월남 · 인도 · 말레이시아 · 태국 등 외국인들이었다 …… 당일 회의는 동방각민족연합혁명단체회의로 숙부가 주재하였다. 숙부는 중국혁명은 중화민족의 혁명 성공을 위한 노력과 동시에 동방 각 민족의 반제국주의 혁명이 성공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어야 한다고 굳게 믿고 계셨다. 따라서 아직 중국혁명이 성공을 거두지 못한 상황에서도 대외연계의 준비를 게을리 하지 않으셨다.”28_028_0 『陳果夫先生文集』 참조.닫기고 기록하고 있다.

 중국혁명의 완성을 위해 평생 국부를 추종하였던 진기미 선생은 원세개의 하수인에 의해 민국 5년 상해의 자택에서 암살되었다. 한국의 주상해총영사를 지낸 민석린은 진기미 선생 및 진과부 선생과의 관계를 회상하면서 “중한 두 나라 혁명지사들을 연계시키는 중추기관으로 상해에 조직된 ‘新亞同濟社’는 ‘박달학원’을 두어 선전용 책자를 출판하였다. 진기미 선생이 암살당한 뒤에는 선생의 조카인 진과부 선생이 한국독립운동과 관련한 문제에 대해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민국 8년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상해에 설립되자 진과부 선생은 한국독립을 위해 여러 방면에서 협조하였다.”29_029_0 閔石麟,『飮水思源』 참조.닫기고 기록하였다. 진기미 선생의 유지를 받들어 진과부 선생이 한국광복을 위해 실제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은 내용들은 뒤에 자세히 서술하도록 하겠다.

 1914년(민국 3년) 제1차 세계대전이 폭발하였다. 오스트리아와 헝가리를 병탄한 빌헬름2세의 독일은 1917년(민국 6년) 영국을 봉쇄하기 위해 무제한 잠수함전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이는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미국의 여론을 자극하여 미국이 참전하는 계기가 되었다. 미국의 참전으로 유럽전쟁이 세계대전으로 비화되자 중국의 군벌정권도 참전을 선언하였다.

 참전을 선언하기는 하였으나 중국은 실제 전투인원을 파견한 것은 아니었다. 대신 일본이 이 기회를 이용하여 원래 독일이 점령하고 있던 膠州灣(靑島)을 점령하였다. 북경정부의 수령인 段祺瑞는 참전을 명목으로 일본으로부터 대규모 차관을 들여와 자신의 무장세력을 확충하였다. 1918년 독일이 패전하고 다음해 베르사이유강화조약이 체결되어 영국과 프랑스는 전승국이 되었다. 이 무렵 미국은 제네바에서 세계평화회의를 소집할 것을 주장하였다. 미국대통령 윌슨은 ‘민족자결’정책을 발표하여 세계의 항구적인 평화를 위해서는 우선 약소민족의 독립을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에 자극 받은 세계 각지의 약소민족들이 독립을 외치기 시작하였다.

 해외에 망명하고 있던 한국광복운동의 지도자들도 파리강화회의에 대표를 파견하여 한국독립의 당위성을 널리 선전하기로 하는 한편, 독립운동의 보조를 일치시키기 위해 임시정부 설립을 위한 노력에 박차를 가하였다. 다른 한편으로는 국내의 민중들을 동원하여 3월 1일 전국적인 규모의 평화적인 시위운동을 전개하기로 하였다. 각지의 농 · 공 · 상인은 물론이고 학생단체들까지 참가한 시위운동은 한성의 탑골공원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수많은 군중들이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는 가운데 독립선언이 발표되자 일본은 대규모 군경을 동원하여 이를 진압하고자 하여 결국은 폭력시위로 비화되게 되었다. 3월 1일부터 4월 30일까지 2달 동안 전국 각지에서는 760여 차례의 시위가 발생하여 참가인원이 46만여 명에 달하였고, 1천 4백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3 · 1운동’을 계기로 지금까지 소수 지사들에 의해 전개되던 한국독립운동은 전체 한인의 일치된 요구로 변화되었다.33_033_0 胡春惠의 학위논문 「中國與韓國之關係」 참조. 국립정치대학 정치학박사인 호춘혜 군의 이 논문은 한국독립운동의 경과를 상세히 다루고 있는데, 필자도 지도교수 중 한 명이었다. 후일 호 박사는 논문의 내용을 보충하여『韓國獨立運動在中國』이라는 제목의 단행본으로 출판하였다.닫기

 1913년 출옥한 김구 선생은 혹형으로 망가진 몸과 마음을 추스르기 위해 잠시 고향으로 돌아가 휴식을 취하였다. 얼마 뒤 숙부가 사망하자 뒷일을 처리하고 집안 대소사를 정리한 김구 선생은 재차 거사를 도모하기 위해 고향을 떠나게 되었다. 마침 이 무렵 앞서 살펴본 ‘3 · 1운동’이 일어나게 되자 3월 4일 선생은 압록강을 건너 안동으로 피신하였다. 일주일 뒤 선박편으로 상해에 도착하여 이동녕 등과 회합한 선생은 3월 26일 임시정부 위원에 피선됨과 동시에 경무국장(각국의 조사특무국장과 유사한 정보기관장)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이때까지도 여러 조건을 놓고 저울질하느라 임시정부의 소재지가 최종 결정되지 않은 상태였다.

 당시 동북지방에 많은 한인들이 거주하고 있었던 관계로 블라디보스톡에 임시정부를 두자는 주장이 상당히 우세하였다. 더구나 3월 21일 이미 한국국민회의가 블라디보스톡에 조직되어 자치정부를 성립한 상태였다. 또한 한국 국내의 동지들도 비밀리에 전한대표회의를 소집하여 역시 임시정부를 설립하였다. 이에 각 방면의 영수들이 집중토의한 결과 중국의 최대무역항인 상해를 임시정부 소재지로 정하였다. 1919년(민국 8년) 4월 11일 상해 프랑스조계 내에서 열린 제1차 임시정부 의정원회의는 국호를 ‘대한민국’으로 정하는 한편 임시헌장 10조를 통과시키고, 李承晩을 국무총리로 선출하였다. 얼마 뒤 국무총리는 대통령으로 개칭되었다.

 성립 초기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사방에 흩어져 있던 각 방면의 명망가들을 각 부 장관에 임명하기는 하였으나 여전히 한국독립운동을 통일적으로 영도할 중심인물이 결여된 상태였다. 각 방면의 지도자들을 단결시키고 한 자리에 모아 독립운동의 보조를 일치시킬만한 여건이 조성되지 않은 상태였던 것이다. 더구나 이 무렵 중국의 혁명세력도 상당한 어려움에 처해 대한민국임시정부에 직접적인 도움을 줄 수 없는 형편이었다.

 당시 군벌들이 장악하고 있던 북경정부는 극단적인 친일정책을 펴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국민당 유력인사들에게 한국을 도와 항일에 나서기를 호소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형편이었다. 설상가상으로 상해에서의 생활에 어려움을 느낀 대한민국임시정부 요인들이 하나 둘 상해를 떠나면서 독립운동은 더욱 어려운 지경에 처하게 되었다. 심지어 대통령 이승만마저 미국으로 되돌아가버린 상황이었으니 다른 이들이 어떤 선택을 했을지 불문가지였다. 이런 어려운 상황에서 거의 유일하게 상해를 떠나지 않고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지탱한 인물이 경무국장 김구였다.

 김구는 자서전인 『백범일지』에서 매일 세끼 식사를 한국교민 집을 돌아가며 마치 걸식하듯 해결했던 어려운 사정을 회고하였다. 이 대목을 읽다가 영웅의 어려웠던 한때를 생각하며 눈물을 흘렸던 기억이 새롭다! 생활상의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5년간 경무국장을 맡으면서 김구는 직무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김구는 『백범일지』에서 “임시정부 성립 후 5년간 심문관, 판사, 검찰 및 사형집행관의 직무를 겸하였다. 당시 범죄자에 대한 처분은 권계 후 석방시키거나 사형시키는 두 가지 방도 가운데 하나였다.”고 당시를 회고하고 있다.

 ‘엄격’하면서도 ‘신중’한 성격의 김구는 경무국장 재임 시 친일분자 색출, 대한민국임시정부 요인 보호, 일본의 경찰활동 파괴 등 임무를 효과적으로 수행하였다. 일본의 앞잡이는 일본인이나 한인을 물론하고 일률적으로 사형에 처하는 엄한 수단을 채용하였다. 당시 상해에 거주하고 있던 일본인이나 한인은 대부분 프랑스조계에 맞붙은 虹口의 公共租界에서 생활하였다.

 상해에서 활동하고 있던 한인들은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지지하는 사람도 적지 않았지만 일본의 밀정 또한 상당수였다. 이들은 임시정부 요인들의 활동을 정탐하여 일본경찰에 보고하는 것을 주로 하였다. 특히 임시정부의 혁명활동을 주관하고 있던 김구는 밀정들의 가장 중요한 감시대상이었다. 다행스럽게도 프랑스조계 당국이 김구에 대해 동정심을 가진데다 프랑스조계 내에 거주하는 한국 교민들도 대부분 임시정부와 김구를 지지하여 안전상의 염려는 많지 않았다. 그러나 이런 주변환경도 경제적인 어려움을 해소시켜 줄 수는 없었다.

 이 무렵 북경정부는 일본이 요구한 21개조(이를 승인한 5월 9일은 후일 ‘국치기념일’로 정해졌다)를 승인하였다. 파리강화회의에 출석한 중국대표단 가운데 남방 혁명정부를 대표하는 顧維鈞 · 王正廷은 전승국의 일원인 중국의 권리를 강력하게 주장하였다. 그러나 북방 군벌정부를 대표하는 曹汝霖 등은 일본의 원조를 얻기 위해 중국의 국권을 스스로 포기하는 매국적인 행태를 보였다. 이에 중국 국내에서는 한국의 ‘3 · 1운동’과 마찬가지로 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5 · 4운동’을 일으켜 집회와 시위를 벌였다.

 학생들과 군경의 충돌로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하였고, 매국노로 지목된 曹汝霖 · 陸宗輿 · 章宗詳의 가옥이 파괴되고 분노한 군중에 의해 이들 매국노들이 부상을 입기도 하였다. 북경의 학생들에 의해 시작된 ‘5 · 4운동’을 성원하기 위해 전국 각지에서는 ‘일본상품 불매운동’과 더불어 ‘중국문화혁명’이 흥기하였다. 당시 손중산 선생은 ‘護法’을 기치로 廣州에 護法政府를 설립하고 북방의 군벌정권에 대항하고 있었다.

 상해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이 무렵 호법정부에 원조를 청하고자 閔石麟 · 朴贊翊43_043_0 박찬익은 중국에서는 ‘濮精一’이라는 가명을 사용하였다. 중국국민당에 가입하기도 했던 박찬익이 김구 선생을 보좌할 때 필자와 막역한 관계를 유지하였다. 박 선생의 큰아들인 朴英俊은 현재 한중협회 회장을 맡고 있다.닫기을 광주에 파견하였다.43_143_1 閔石麟,『中國護法政府訪問記』 참조.닫기 그러나 당시 호법정부 역시 내외의 곤경에 처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외교적으로 승인하겠다는 약속 외에는 실제적인 도움을 주지 못하였다. 그나마도 얼마 뒤 호법정부가 와해되면서 이 약속은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1920년(민국 9년) 국제연맹이 정식으로 성립되었다. 다음해 미국이 태평양학회를 소집하자 대한민국임시정부 대통령 이승만은 회의 참가를 핑계로 미국으로 되돌아가 버렸다. 이 무렵 공산혁명에 성공한 소련에서는 레닌이 적극적인 동진정책을 펼치고 있었다. 코민테른이 중국에 파견한 대표와 연락을 취한 李大釗 · 陳獨秀 등은 이해 5월 비밀리에 상해에서 중국공산당임시중앙을 성립하였다. 대한민국임시정부 내 좌파분자인 金奎植은 모스크바에서 열린 동방피압박민족대회에 참석하였다.

 1923년(민국 12년) 한국 공산분자들은 상해에 ‘鐵血團’을 조직하고 임시정부 개조를 요구하였다. 임시정부 내무총장 安昌浩 또한 1920년 임시정부의 명으로 모스크바에 파견되어 소련과 연계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이보다 앞서 이미 한국 좌파분자에 대한 지원을 약속한 소련은 안창호의 방문에 대해 냉담한 반응을 보였다. 이후 안창호는 국제연맹에 대한민국임시정부 승인을 요구하기도 하였으나 역시 아무런 성과도 거두지 못하였다.

 임시정부의 내부분열을 수습하기 위해 힘을 기울였으나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미국으로 건너가기 전 안창호는 김구를 자신의 후임으로 추천하였다. 철저한 반공주의자였던 김구는 좌파분자를 용납하지 않았다. 1924년 대한민국임시정부의정원은 이동녕을 대통령대리로 선출하였다. 이에 이동녕은 자신이 맡고 있던 국무령(즉 국무총리)직을 김구에게 맡기고자 하였으나 김구는 극구 사양하였다. 1927년 대한민국임시정부가 국무령제를 집단지도체제인 국무위원제로 개편하여 尹琦燮 등 5명이 국무위원에 선출되면서 국무총리는 국무위원회 주석에 불과한 자리가 되었다.

三. 蔣 總裁의 중국혁명 영도와 초기 대한정책

 민국 13년 광주에서 국민당 제1차전국대표대회를 소집한 손중산 선생은 국민당의 개조와 더불어 혁명군을 중건할 결심을 표시하였다. 전국대표대회 폐막 직후 정식으로 개교한 황포군관학교는 혁명군의 요람이었다. 이 학교의 교장에 임명된 蔣中正 선생은 혁명건국의 준비에 전력을 기울였다. 진기미 선생과 막역한 사이였던 장중정은 민국 성립 초기 상해에서 國父를 함께 보필하면서 진 선생의 원대한 포부와 식견을 누구보다 잘 알게 되었다. 국부의 명에 의해 중국 국민혁명의 기초공작을 맡게 된 장중정은 진 선생의 조카인 진과부를 황포군관학교 상해주재대표로 임명하였다(장중정과 진기미 두 선생은 결의형제를 맺었다. 이런 연유로 진과부는 장 선생을 숙부처럼 대하였고, 사석에서는 통상 ‘장 숙부’라고 불렀다).

 진과부는 상해에서 황포군관학교를 위한 장비 구입과 학생 모집을 담당하였다. 이 기회에 진과부는 일부 한국청년들을 황포군관학교에 입학시켰다. 진과부의 특별한 노력으로 황포군관학교 1 · 2 · 3 · 4기 입학생 가운데는 한국학생이 상당수를 차지하였다. 당시 황포군관학교의 黨 대표는 廖仲愷 선생이었다.

 소련이 파견한 고문 보로딘은 廖 선생을 국민당 좌파로 분류하고 료 선생을 적극 이용하고자 하였다. 이런 연유로 황포군관학교 초기 입학생 가운데는 공산분자가 적지 않았다. 비교적 급진적인 사상을 가진 군관학교의 한국청년들은 손쉽게 공산당의 선전에 넘어가 적지 않은 학생이 좌경적인 색채를 띠게 되었다. 황포군관학교 재학 시 공산당과 긴밀한 관계를 맺은 金若山 등은 후일 김구 선생이 영도하는 대한민국임시정부를 반대하였다. 이를 매우 가슴 아프게 여기던 진과부 선생은 여러 차례 필자에게 한국학생 모집과정을 자세하게 설명하였다.51_051_0 김약산의 다른 이름은 陳國斌으로 황포군관학교 4기 졸업생이다. 김과 같은 기수의 중국인 동급생으로는 삼민주의역행사의 최초 발기인 가운데 한 명인 滕傑이 있었다. 등걸은 후일 상부의 명에 의해 김약산 등이 조직한 한국혁명운동의 한 지파인 조선의열단의 지도공작을 담당하기도 하였다. 상세한 내용은 滕傑, 「三民主義力行社援助韓國獨立運動之經過」 참조.닫기

 민국 14년 3월 12일 국부가 북경에서 사망할 당시 장중정 선생은 황포군관학교 학생들을 이끌고 東征을 진행 중이었다. 전장에서 국부의 사망 소식을 접한 장 선생은 애통함을 금치 못하면서 전군을 모아 놓고 국부의 유지를 계승하여 혁명을 완성할 것을 서약하였다. 이로부터 채 1년이 못되어 廣東 전역을 통일한 혁명세력은 국민정부를 성립하고 여세를 몰아 민국 15년 가을 북벌을 개시하였다. 북벌 개시 3개월만에 武漢을 점령하고 江西省 전역을 장악한 국민혁명군은 다음해 초에는 浙江과 上海를 점령하고 4월 초에는 南京에 국민정부를 성립하였다.

 국민혁명군이 무한을 장악하자 국민정부도 광주에서 무한으로 옮겨오게 되었다. 이 와중에 공산당은 혁명정권을 탈취하려는 음모를 꾸몄으나 민국 16년 초 상해에서 공산당 숙청작업이 시작되어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공산당 숙청작업과 남경국민정부 성립으로 무한과 남경 두 정부 사이에 대립이 계속되었으나 결국에는 장중정 선생의 양보로 통일을 이루게 되었다.

 민국 17년 초 재차 북벌을 개시한 국민혁명군이 파죽지세로 북진하자 일본은 중국의 통일을 저지하기 위해 濟南에 병력을 출동시켰다. 당시 상해의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여전히 아무런 진전을 보지 못하고 있었다. 오히려 내부적으로는 통일전선을 부르짖는 좌경분자의 책동으로 인하여 성립 초기의 혁명 선진들이 다투어 임시정부를 이탈하는 상황이 전개되고 있었다.

 韓僑들의 지원과 지지를 얻지 못한 임시정부는 재정적으로도 극도의 곤란에 처해 있었다. 심지어 사무실 임대료 20원을 내지 못해 고소당하기도 하고 이곳저곳으로 옮겨 다녀야 하는 형편이었다. 이런 어려움 속에서도 대한민국임시정부가 그나마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한국독립당’(1930년 4월)을 조직하여 임시정부의 중심을 다잡은 김구와 이동녕의 노력 덕분이었다. 중한 두 나라 인사들은 모두 한국독립당이 독립을 위해 계속 분투해 주기를 간절히 바랐다.

 군사위원회 예하 중앙군관학교에서 훈련받은 한국학생(황포군관학교 제외)

훈련단위명칭기별입학일자졸업일자학생수훈련장소교관구성훈련과목중국방면관계자한국방면관계자
중화민국
軍事委員會幹部訓練班第6隊(朝鮮革命幹部學校)제1기21.10.2022.4.2226명南京湯山善祠廟중국인 3명, 한국인 17명(1)정치조:정치·경제·사회·철학(2)군사조:제식훈련·사격술·촉탄제조법 등(3)군사연습何應欽
滕傑
金若山
(隊長)
동상제2기22.9.1723.4.2054명南京江寧鎭동상(1)경제학(2)삼민주의(3)유물사관(4)각국혁명사(6)사격술(7)전술(8)진중요무(9)폭탄제조법(10)기타.동상동상
동상제3기24.3.224.10입학시 44명,
졸업시36명
1.南京郊外 上方鎭 天寧寺2.南京郊外 牛首山3.南京城內 花露巷 胡家花園동상(1)조선혁명정신훈화(2)사회학(3)세게경제(4)특무공작(5)경제학(6)제식훈련(7)소총 및 기관총 조작법(8)진중요무(9)정치학(10)연습교련(11)기타동상동상
中央軍官學校洛陽分校軍官訓練班第17隊 22.1224.4입학시 92명,
졸업시 62명
洛陽 西工 營房軍分校한국인 4명, 나머지는 중국인 교관(1)일반군사과목(2)마술훈련(3)혁명정신교육陳果夫
祝紹周
金九
李靑天
李範奭
南京中央軍官學校(特別班) 22.1224.12입학시 50명,
후일 대부분 퇴학
南京中央軍校불명중국학생과 동일한 훈련과정 金九
李靑天
金若山
韓國獨立軍特務隊預備訓練所 24.224.1228명南京불명(1)혁명상식훈련(2)군사입영훈련불명金九
南京中央軍官學校제10기23.824.1017명南京中央軍官學校內중국교관중국학생과 동일한 훈련과정 외에도 정신훈련에 치중  
同上제11기24.9 20명동상동상동상 金九
軍事委員會政訓班朝鮮學生隊 24.1027.584명江西 星子縣軍分校, 湖北 江陵縣불명특무훈련 위주康澤
藍英
金若山

 민국 17년 북벌성공으로 통일을 완성한 국민정부는 손중산 선생의 5권분립 정신에 입각하여 입법 · 사법 · 행정 · 감찰 · 고시 등 5院 정부를 성립하였다. 그러나 정부가 주도한 군비감축에 대한 불만으로 민국 19년 북방의 閻錫山 · 馮玉祥, 광동의 李濟琛, 광서의 李宗仁 등이 연합하여 대규모 내전인 中原大戰을 일으킴으로써 중화민국의 원기가 크게 상하는 불행이 발생하였다. 다행히도 張學良이 동북군을 이끌고 入關(이후 장씨는 북경에 주재)함으로써 내전이 종식되고 중앙정부의 지배력이 공고하게 되었다.

 민국 20년 9월 18일, 그간 호시탐탐 대륙진출을 노리고 있던 일본군이 마침내 瀋陽을 시작으로 동북 각지를 점령하고 말았다. 일치단결하지 않고서는 국가를 지킬 수 없다는 위기감에 쌓인 각계 인사들은 내부적 통일을 통해 저항력을 강화시키는 한편으로 국제연맹에 일본의 침략행위를 고발하였다. 국제사회의 비난에도 아랑곳하지 않은 일본은 다음해 1월 28일에는 상해사변을 일으켜 남경국민정부를 근본적으로 소멸시키려는 음모를 서슴치 않았다. 그러나 상해지역 주둔군과 중앙군의 2개월에 걸친 분전으로 일본군의 침략야욕은 분쇄되었다.

 침략전쟁에서 승리를 거두지 못한데다 국제사회의 여론이 악화되자 일본은 우선 중국 북방의 기득권을 공고히 하기로 결정하고 상해사변을 마무리하고자 하였다. 상해사변이 발생하자 洛陽으로 천도했던 국민정부는 國難會議를 소집하여 장기항전을 도모하였다. 그러나 아직 전면적인 장기항전의 준비가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은 현실을 감안하여 일본의 정전협정 체결 요구를 수용하기로 결정하였다.

 9 · 18사변 발생 후 진과부 선생은 한국독립당과의 구체적인 합작을 시도하였다. 한국독립당 인사들도 9 · 18사변이 중한 두 나라의 통일전선 구축에 유리한 국면을 창출할 것이라 기대하였다. 다만 창졸간에 사변이 발생한지라 아직 구체적인 합작계획을 세우지 못한 상황이었다. 1 · 28사변으로 중일 두 나라 군대가 상해를 무대로 정식 전쟁을 벌이게 되자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이를 천재일우의 기회로 간주하였다. 그러나 자신의 앞가림도 힘들었던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중국을 위해 구체적인 공헌을 하기에는 그 역량이 너무나도 미약하였다.

 후일 필자가 진과부 선생으로부터 들은 바에 의하면 상해사변 당시 중한 간 유일한 연결통로였던 濮精一 동지에게 의견을 구한 적이 있었다 한다(원래 이름이 朴贊翊인 복 동지는 한국독립당원이었다. 상해사변 발생 시 濮 동지는 국민당 중앙조직부에 근무하고 있었다). 특별한 의견이 없던 복정일은 『震壇報』를 발행하여 중국 거주 한인들의 의식을 환기시킬 필요성을 제안하였다(상세한 과정은 후술). 한편 김구 선생은 이 무렵 일본인들의 사기를 떨어트리기 위해 일본 요인들을 암살할 용사들을 모으고 있었다. 그 결과 李奉昌이 동경에서 일황을 암살하려다 실패한 사건64_064_0 註 7 및 윤봉길 의거와 관련한 자세한 내용은 김구의 『백범일지』를 참조하라. 여기서는 그 대략만을 간략하게 기록하였다.닫기, 李德柱 · 兪鎭植이 조선총독을 비롯한 일본 요인 암살을 위해 한국 국내에 파견된 사건, 柳相根이 동북에 파견되어 관동군사령관을 암살하려다 실패한 사건 등이 발생하게 되었다.64_164_1 註 8 및 윤봉길 의거와 관련한 자세한 내용은 김구의 『백범일지』를 참조하라. 여기서는 그 대략만을 간략하게 기록하였다.닫기

 상해협정이 체결된 뒤인 민국 21년 4월 29일, 일본인들은 상해 홍구공원에서 성대한 天長節紀念式을 준비하였다. 당일 기념식에는 상해침공을 지휘했던 일본군 白川 대장을 비롯한 일본 요인들이 대거 참석할 예정이었다. 이를 절호의 기회로 간주한 김구는 윤봉길 의사를 파견하여 기념식장에 폭탄을 투척하도록 하였다. 그 결과 白川이 현장에서 즉사하고 상해총영사 重光葵와 제3함대 사령관 野村 중장 등이 중상을 입었다(일본인 거류민단장 河端 역시 현장에서 즉사하였다).

 윤봉길 의사가 투척한 폭탄은 우리 상해병기창에서 특별히 제작한 것으로, 그 모양이 일본인들이 즐겨 사용하는 물통과 도시락 형태의 두 가지였다. 김구는 사전에 金弘一(당시 王雄이라는 가명을 사용하고 있었다)을 통해 상해병기창의 朱 공장장에게 폭탄 제작을 비밀리에 청하였고, 직접 병기창에 가 폭탄의 위력을 시험해 보기도 하였다. 상해병기창에서 특별차량에 실려 王雄에게 건네진 폭탄은 다시 김구의 손에 전달되었다. 거지로 변장한 김구는 이 폭탄을 프랑스조계 내 숙소로 옮긴 뒤 보관하다 거사 직전 윤봉길에게 건네주었다.

 오래 전부터 조국을 위해 희생할 각오가 되어 있었던 윤봉길 의사는 상해에 도착한 뒤 야채상으로 가장하여 일본인이 많이 거주하는 虹口 지역을 돌며 주변의 정황을 숙지하였다. 천장절기념식이 열릴 것이라는 소식을 접한 뒤 김구를 찾은 윤봉길은 이 기회를 택하여 거사를 하기로 결심한 자신의 뜻을 전하였다. 조국의 독립을 위해 몸과 마음을 바칠 것을 다짐한 윤봉길의 의지가 굳음을 확인한 김구는 구체적인 계획을 세우기 시작하였다. 윤봉길은 거사 전 기념식이 열릴 홍구공원을 여러 차례 답사하며 지형을 관찰하였다.

 거사일인 4월 29일 새벽 6시, 김구는 윤봉길과 함께 자신의 집에서 최후의 아침식사를 같이 하였다. 자신의 손목시계를 영원한 이별의 기념으로 김구에게 건넨 윤봉길은 7시경 거사장소인 홍구공원으로 향하였다. 홍구공원을 뒤흔든 폭탄소리와 함께 윤봉길은 유명을 달리하였으나 대한민국은 이로써 영원히 존속할 수 있게 되었다.68_068_0 註 9 및 윤봉길 의거와 관련한 자세한 내용은 김구의 『백범일지』를 참조하라. 여기서는 그 대략만을 간략하게 기록하였다.닫기

 장중정 선생은 평소 인재의 ‘육성’과 ‘훈련’을 가장 중시하였다. 따라서 한국독립운동에 대한 선생의 협조방침도 인재 육성에 주안점을 두었다. 앞서 언급한 胡春惠 박사의 연구에 따르면 우리 중앙군관학교에서 훈련을 받은 한국학생은 수백 명에 달하였다(위의 통계표 참조). 이 숫자는 황포군관학교 졸업생을 포함하지 않은 것이다.

四. 대한공작 참여와 항전 전 김구 선생과의 왕래

 민국 20년 가을 9 · 18사변이 발생했을 때 필자는 독일 베를린에서 토지문제를 연구하고 있었다. 소식을 듣고 울분을 참지 못한 나는 당시 함께 독일에 머물고 있던 桂永淸 · 歐陽格 · 貢沛誠 등과 상의한 끝에 몰래 귀국하여 동북의 馬占山 의용군에 참가할 뜻을 가지기도 하였다. 얼마 뒤 상해사변이 발생하자 우리 네 사람은 상부의 명에 의해 조기 귀국하게 되었다. 처음 우리 모두는 모스크바를 거쳐 동북으로 가기로 약조하였다. 그러나 장중정 선생이 전년 말 下野했다는 소식을 접한 우리는 계획을 일부 변경하였다. 상의 끝에 나는 해로를 통해 귀국하여 奉化로 가 장 선생에게 그간의 경과를 보고하는 한편 계영청의 부인과 필자의 아내를 杭州에 안치시키는 임무를 맡게 되었다. 나머지 세 동지는 이전의 약조대로 직접 동북으로 가 의용군에 합류하기로 하였다.

 민국 21년 2월말 우리 네 사람은 베를린을 출발하여 귀국길에 올랐다. 3월말 내가 상해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停戰상태에 있었으나 국민정부는 여전히 낙양에서 환도하지 않은 상황이었다. 이 무렵 국난시기 확실한 영도중심이 필요하다는 국민의 여망에 따라 장중정 선생은 군사위원회 위원장으로 복직하여 徐州에서 군대를 지휘하고 있었다.

 상해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진과부 선생을 예방하였다. 이 자리에서 선생은 국내의 여러 사정과 더불어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상황에 대해서도 소상하게 알려 주었다. 얼마 뒤 윤봉길 의거가 발생하자 선생은 나에게 김구 일행의 안전과 생활에 관련한 일들을 보살펴 주기를 청하였다. 더불어 선생은 장중정 선생에게 김구 선생을 보호하기 위해 필자를 항주로 파견하게 된 사정을 전보로 보고하였다. 이때부터 나는 본격적으로 중국에서 활동하고 있던 한국독립운동자들과 관련을 맺게 되었다.

 민국 21년 4월 29일 김구의 지령을 받은 윤봉길 의사가 홍구공원에서 일본 요인을 폭살한 사건이 발생하자 일본은 즉각 한국독립당 수령인 김구 체포를 위해 대규모 인원을 동원하였다. 이 기간 수색을 피해 김구는 미국인선교사 퍼스(Dr. Firth) 부부의 집에 안공근 · 嚴恒燮 등과 함께 20여일을 은신하였다. 그러나 더 이상 상해에 머물기 어려운 상황에서 필자와 동향인 殷鑄甫 선생이 전 浙江省정부 주석 褚輔成 선생과 연락을 취해 김구 일행이 잠시 嘉興의 褚 선생 집에 머물 수 있도록 주선하였다. 당시 남경에 머물고 있던 濮精一도 김구 일행의 안전한 도피 문제로 급히 진과부 선생에게 도움을 청하였다. 이에 진 선생은 귀국한지 얼마 지나지 않은 필자에게 김구 일행의 도피와 신변보호를 일임하신 것이었다. 진 선생이 필자에게 이 임무를 맡긴 것은 아마 내가 절강에서 오래 활동한데다 殷 · 褚 두 선생과도 친교가 있었기 때문에 이를 고려하였을 것이다.

 진과부 선생의 밀명을 받고 항주에 도착한 나는 먼저 羅霞天 동지의 부인인 江一天 여사를 찾았다. 저보성 선생의 비서를 지낸 나하천 동지는 나와 함께 독일에 파견되었으나 아직 귀국하지 않은 상태였다. 강 여사가 여전히 저보성 선생 집안과 왕래하고 있다는 사실을 파악한 나는 강 여사에게 嘉興으로 가, 褚 선생의 의견을 구해 주기를 청하였다. 얼마 뒤 가흥에서 항주로 돌아온 강 여사는 褚 선생 및 선생의 며느리인 朱 여사의 뜻을 전하였다. 강 여사는 褚 선생은 김구 일행의 가흥에서의 생활은 전적으로 자신이 책임질 것이라 하였으며, 며느리인 朱 여사는 가흥보다는 자신의 친정이 있는 海鹽縣에 적당한 거주지를 마련하는 것이 더욱 안전할 것이라고 제의하였다고 전하였다.

강 여사의 말을 듣고 크게 안심이 되기는 하였으나, 만전을 기하기 위해 나는 절강성 보안처장 蔣伯誠을 만나 김구 일행의 신변보호에 만전을 기해 줄 것을 당부하였다. 장 처장의 확답을 받은 뒤에도 나는 주변의 이목을 피하기 위해 가흥으로 가 褚 선생 부자와 김구 일행을 만나려던 계획을 포기하고 남경으로 향하였다. 상부에 그간의 경과를 보고하고 난 뒤에는 복정일 동지와 만나 향후 계획을 논의하였다. 이 자리에서 나는 김구 선생이 장중정 선생을 한 번 만나볼 필요가 있으며, 진과부 선생에게 한국독립운동의 진행방침에 관해 자세히 설명할 필요성을 역설하였다. 복정일 동지는 즉시 가흥으로 가 김구 선생에게 내 뜻을 전하였으며, 남경으로 돌아온 뒤에는 구체적인 계획들을 함께 상의하였다.

 9 · 18사변 후에도 장중정은 외부의 적과 대적하기 전 먼저 내부를 안정시켜야 한다는 주장을 고수하였다. 이런 방침에 따라 민국 21년 5월 ‘豫 · 鄂 · 皖三省剿匪總司令’을 겸임하고 漢口에 머물며 공산당 토벌작전을 지휘하고 있던 장중정 선생이 긴히 상의할 일이 있다며 전보를 보내왔다. 貢沛誠 동지와 함께 장 선생을 만나 그간의 상황을 보고하는 한편 나를 대신해 貢 동지가 한국사무를 맡는 것이 좋겠다고 추천하였다. 베를린에 머물 때부터 나는 貢 동지를 유심히 관찰하였다. 평소 모든 일에 열성을 보인데다 책임감이 강했던 貢 동지가 계영청 · 구양격과 동북으로 가 의용군에 합류하겠다는 말을 듣고는 조국을 위해 자신을 희생할 의지가 분명함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의용군 참가의 뜻을 이루지 못한 세 동지는 4월경 남경으로 귀환한 상태였다.

 장 선생을 만난 뒤 나는 공산군 점령구역의 토지계획을 준비하여 올리는 한편 인재육성을 위해 중앙정치학교(국립정치대학의 전신)에 지정연구반(후일의 지정학원)을 설치할 것을 제안하였다. 더불어 전문가를 소집하여 平均地權의 보편적인 실시를 위한 준비작업을 진행할 것도 건의하였다. 토지문제에 관한 의견을 올리는 기회에 나는 장 선생에게 한국독립당의 최근 상황과 김구의 안전에 관한 내용을 보고하면서, 앞으로는 토지문제에 전념하기 위해 한국사무에는 더 이상 참여하지 않았으면 한다는 바람을 전하였다. 한동안 말없이 생각에 잠겨있던 장 선생은, 한국사무는 이미 진과부에게 전권을 맡겼으니 이 문제는 진과부와 상의하라고 말씀하셨다.

 남경으로 돌아온 뒤 진과부 선생을 만나 이 문제를 거론하자 진 선생은, “한국사무는 매우 중대한 문제일 뿐만 아니라 철저히 기밀을 요하는 민감한 사안이다. 만일 이 문제가 조금이라도 잘못 된다면 한국혁명의 전도에 엄청난 영향을 미칠 뿐만 아니라 중일 간 전면전도 촉발시킬 수 있다.”며 한국사무는 계속 내가 맡아 주기를 간청하였다. 그러면서 진 선생은 혼자 힘으로 벅차면 공패성 동지가 옆에서 도움을 주도록 조치하겠다 하였다. 진 선생의 간곡한 청을 물리치지 못하고 결국은 계속해서 한국사무를 맡게 되었다.

 8월경 歐陽格 동지가 공무로 한구에 가 장중정 선생을 만날 일이 있게 되었다. 나는 이 기회에 김구를 접견하는 문제와 김구가 제출한 기병학교 설립 등 두 가지를 장 선생에게 진언해 주기를 부탁하였다. 김구는 동북지역에 집단으로 거주하고 있는 한교들로 기마별동대를 조직하여 한국 경내로 진입시키면, 국내 동포들로부터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고 반일혁명의 역량을 증대시킬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만일 김구의 생각대로 일이 전개된다면 중국에 대한 일본의 압박을 감소시킬 수 있을 것이라 믿었기에 나 역시 그 의견에 찬성하는 편이었다.

 구양격 동지가 한구에 도착한 며칠 뒤인 8월 10일, 중앙조직부에서는 김구의 계획이 무모한 것으로 보임으로 받아들일 수 없다는 내용의 암호전보를 보내왔다. 비록 기병학교 설립 계획은 실현되지 못했지만 장중정 선생과 김구의 만남은 성사되었다. 민국 21년 겨울 장 선생이 남경으로 돌아온 뒤 진과부 선생이 김구를 동반하여 장 선생을 알현하고 면담을 진행하였다. 이에 관해서는 김구의 『백범일지』에 자세하게 언급되어 있는 관계로 여기서는 다루지 않겠다.

 김구가 장중정을 만난 다음날, 진과부 선생이 능원 쪽 새로운 거처로 나를 불러 한국독립운동과 관련한 여러 문제들을 논의하고 아래와 같은 몇 가지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1)매달 생활보조비 및 활동비 명목으로 김구에게 5천 원을 지원한다. 필요한 모든 수속은 소쟁이 전담한다. (2)특별한 용도의 사업비는 김구가 집행계획을 준비하여 올리면 장 위원장의 결재를 얻어 진과부가 경비를 마련하도록 한다. (3)김구의 안전문제 및 사무실 마련 등은 소쟁이 맡아 처리한다(대한민국임시정부는 항주에 잠시 머물다가 다음해 진과부 선생이 강소성정부 주석을 맡게 되자 진강으로 이주하였다가 다시 남경으로 옮겼다.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이전할 때마다 내가 나서 해당 지방당국과 접촉하여 편의를 제공하도록 요청하였다). (4)한국독립당과 대한민국임시정부에 대한 우리측의 공작계획은 소쟁이 취합하여 진과부의 손을 거쳐 장 위원장에게 전달하고 최종결재를 받아 시행한다. (5)한국사무 처리과정에 공패성 동지를 참여시킨다(이후 수년간 대한문제 처리과정에서 공패성 동지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나하천 동지도 귀국 후 한국사무 처리과정에 참여하였다).

 이날 저녁 진과부 선생의 집을 찾은 김구에게 위의 결정사항을 전하자 김 선생은 모든 조항을 일일이 확인한 뒤 완전한 동의를 표시하였다. 이후 한국독립운동 원조사무를 처리하는 과정에서 수시로 진과부 선생 및 김구 선생과 의견을 교환하며 주고받은 편지 등을 업무의 성격에 따라 구분하여 아래에 소개하도록 하겠다.

甲. 독립운동 경비 지원

 한국독립운동에 필요한 경비는 김구를 단일 수령창구로 나의 손을 거쳐 지원되었다. 김구는 처음에는 복정일(또 다른 이름은 濮純)을, 나중에는 안공근(안중근 의사의 동생)을 대표로 파견하여 돈을 수령하였다. 처음 나는 김구와 경비 지급과 수령상의 편의를 위해 경비수령용 전용도장을 새기고, 누구든지 이 도장과 수령증만 있으면 돈을 수령할 수 있도록 약조하였다. 한국독립운동 지원경비는 민국 22년 2월부터 진과부 선생이 관리하는 특별비 항목에서 지급액만큼 나에게 보내지고 나는 다시 이 돈을 김구의 대리인에게 전달하였다. 간혹 진 선생이 일이 있어 경비 지출이 늦어지는 경우에는 내가 우선 지불하고 사후에 진 선생에게 청구하기도 하였다. 민국 23년부터는 중앙당부 특별비 예산에서 돈이 지불되었다. 따라서 김구가 발행한 영수증은 직접 중앙당부에 제출되어 나의 손을 거쳐 처리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 기타 특별사업비는 앞서 언급한 것처럼 다른 경로를 통해 마련되어 김구에게 전달되었다. 아래 보이는 편지와 영수증은 경비지원과 관련한 것이다. 여기에 특별히 ‘필자 주’를 덧붙여 당시의 상황을 소상하게 독자들에게 전하고자 한다.

▶첨부문건 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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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신] 陳果夫

[수신] 蕭錚

[연월일] 민국 23년 2월 19일

 靑萍 형 보십시오. 근자에 濮 동지와 연락을 취하지 못해 그쪽 상황을 제대로 알지 못했습니다. 당연히 중앙당부에서 근무하고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그렇지 않은 모양입니다. 복 동지가 예정대로 震壇報를 출판한다면 매달 3~5백원 정도를 지원해 줄 수 있을 것이나 그 이상은 곤란합니다(만일 출판을 포기한다면 복 동지를 위해 다른 일자리를 알아볼 것입니다). 최근 경비가 부족한데다 수령하는 과정도 이전보다 훨씬 복잡해졌기 때문입니다. 김구와 관련한 문제는 이전 장 위원장께서 지시하신 대로 먼저 처리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위원장의 답전 내용을 김구에게 전달하였는지요?

果夫 드림

2月 19日

97_097_0 위는 민국 23년 2월 19일 진과부 선생이 보낸 편지이다. 한국혁명지사들의 생활에 특별한 관심을 보인 진 선생은 이들의 일자리 마련을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였다. 편지에서 언급한 복 동지는 복정일 선생(또 다른 이름은 濮純)으로, 한때 국민당 중앙당부에서 근무한 적이 있었다. 앞서 살펴본 대로 당시 복 동지는 한국광복운동을 널리 선양하기 위한 기관지로 진단보를 발행할 계획을 갖고 있었다.닫기

▶첨부문건 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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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신] 陳果夫

[수신] 蕭錚

[연월일] 민국 23년 5월 10일

 靑萍 형 보십시오. 趙 군이 다녀갔습니다. 그의 말에 의하면 경비가 부족하여 어려움이 심하다 합니다. 이에 부탁하니 형께서 우선 5백원을 마련하여 즉시 지급해주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胡 과장편에 보낸 편지는 이미 받으셨으리라 생각합니다.

果夫 드림

5월 10일

107_0107_0 위는 민국 23년 5월 10일 진과부 선생이 보낸 편지이다. 편지에서 칭한 趙 군은 안공근을 말한다. 이 무렵 김구 등은 활동경비가 부족하여 상당한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진 선생이 마련해 주기를 부탁한 5백원은 예산 외의 특별구제비였다. 당시 한국독립운동에 관한 경비지원은 모두 나의 손을 거쳤던 관계로 진 선생께서 특별히 편지를 보내 부탁한 것이다.닫기

▶첨부문건 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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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신] 金九

[수신] 蕭錚

[연월일] 민국 22년 10월 30일

 靑萍 형 보십시오. 근자에 安 동지가 항주에 도착하여 그를 통해 남경의 상황을 전해들을 수 있었습니다. 형의 정성과 도움에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진 선생께서 威海衛사건을 잘 마무리해 주실 것으로 믿습니다. 이후 다시는 이 같은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본분을 져버린 徐 모를 엄중히 처벌해야 할 것입니다. 비행기조종사 李 군 문제는 해결방법이 있는지요? 비록 사소한 문제이기는 하지만 제 신용과 큰 연관이 있으니 속히 적당한 자리를 물색해 주시기 바랍니다. 다시 한 번 부탁드립니다. 복정일 동지가 집안일로 휴가 중입니다. 따라서 당분간 남경의 일은 安 동지에게 맡길 것입니다. 濮 동지와 마찬가지로 잘 대해 주시고 우리가 도모하는 일이 순조롭게 진행될 수 있도록 계속 보살펴주기 바랍니다. 형이 제안한 방법대로 새 도장을 팠습니다. 이후로는 어느 누구든 이 도장을 가지고 간 사람을 저의 대리인으로 간주하고 일을 처리해 주십시오. 편안하시기 바랍니다.

弟 김구 드림

10월 30일

117_0117_0 위는 민국 22년 10월 30일 김구 선생이 보낸 친필편지이다. 편지에서 언급한 위해위 독직사건은, 전문위원 徐 모가 일본의 요구로 현지의 한국혁명당원들을 체포하여 강제로 출경시킨 것을 말한다. 그 다음 내용은 나와 접촉하기 위해 안공근을 남경주재대표로 삼게 된 경위를 언급하고 있다.닫기

乙. 김구 선생과 동지들의 안전문제

 숙부인 진기미 선생을 따라 중국혁명에 투신한 때부터 진과부는 매사에 극히 신중한 태도를 보였다. 후일 진과부는 장중정 선생을 도와 공산당 숙청작업에 참여한 이후 수시로 험난한 상황에 처하기도 하였다. 이때부터 진과부는 매사에 더욱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기 시작하였으며, 특히 안전문제를 중시하였다. 일본군벌의 음험함을 익히 알고 있던 진과부는 자신의 안전문제보다도 김구와 한국혁명지사들의 안전에 가장 큰 관심을 보였다. 조금이라도 수상한 정보가 접수되면 진과부는 이를 즉시 김구에게 전달하여 안전에 만전을 기하도록 하였다. 진 선생이 강소성정부 주석에 취임하자 나는 안전상의 이유를 들어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진강으로 옮기도록 하는 것이 좋겠다고 건의하였다.

김구 일행이 鎭江으로 거처를 옮겼다고 안전문제가 완전히 해결된 것은 아니었다. 진강은 주민이 많아 이들의 눈을 피하기 쉽지 않았다. 또한 일본과의 긴장관계가 증폭되면서 일본군벌은 수시로 밀정을 진강에 파견하여 진과부의 움직임을 파악하고 이를 통해 장 위원장의 계획을 탐지하고자 하였다. 이런 여러 이유로 진강에서의 안전이 염려되자 김구는 다시 溧陽으로 이동하게 되었다. 이 무렵 각 지방정부는 적 밀정의 침투를 막기 위해 호구조사를 매우 엄하게 실시하고 있었기에 중국어가 서투른 김구는 불편함이 적지 않았다. 결국 남경으로 옮긴 김구는 江寧實驗縣의 농촌에 주거를 마련하였다. 마침 당시 縣長이던 梅思平은 나와 동향인데다 중앙정치학교에서 함께 근무한 막역한 사이였다. 이런 인연으로 강녕에서 김구의 생활은 비교적 안정될 수 있었다.

 민국 26년 7 · 7사변의 폭발로 중일 전면전은 피할 수 없게 되었다. 사변 발생 직후 김구를 남경성내로 이주시켰으나 뒤이어 남경과 상해에까지 적의 폭격이 가해졌다. 안전을 염려한 나는 직접 안전을 책임지기 위해 김구를 내가 주관하고 있던 地政學院 내 교직원 숙소에 머물도록 하였다. 윤봉길 의거 후 상해를 떠난 때부터 7 · 7사변이 발생하기까지 수년간 김구의 안전과 관련하여 진과부는 수없이 많은 편지를 나에게 보냈다. 이 가운데 중요한 것 세 통을 골라 아래에 소개하고자 한다. 이 편지의 내용을 통해 중국정부가 대한민국임시정부와 그 요인들의 안전에 얼마나 많은 관심과 노력을 기울였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7 · 7사변의 폭발로 중일 전면전이 개시된지 불과 4개월여 만인 11월경, 아군은 이미 상해일대에서 철수하여 남경마저 위태로운 상황이었다. 이에 중앙정부는 重慶으로의 천도를 선포하였고, 지정학원도 중앙정치학교가 옮겨간 廬山으로 이전하게 되었다. 따라서 한동안 나는 여산과 남경을 오가야 하는 상황이었다. 이후의 방침을 논하는 자리에서 김구는 중국군이 남경에서 철수하면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무선방송 설비를 우선 한구로 옮기는데 동의하였다. 이런 사정을 진과부 선생에게 보고하자 진 선생은 11월 25일 답신을 보내왔다. 이 편지의 말미에서 진 선생은 강소성정부 주석직에서 물러나고 싶다는 뜻을 내비쳤다. 이는 아마 주석직을 군인에게 맡기고 물러나 강소 북부 일대에서 유격전을 전개하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건의했던 나의 말에 영향 받은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첨부문건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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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신] 陳果夫

[수신] 蕭錚

[연월일] 민국 24년 8월 24일

 靑萍 형 보십시오. 방금 敬之가 보낸 전보를 받았습니다. 상해에서 폭발사건이 발생하여 혐의자로 한국인 김 모가 체포되었다 합니다. 심문 결과 범인은 이 사건은 일본의 음모를 분쇄하기 위한 거사이며, 남경에 있는 동료 5~6명은 黃龍山에 있는 天寧寺에 간부학교를 세우고 활동 중이라고 자백하였다 합니다. 속히 사실여부를 조사해주기 바랍니다. 편안하시기 바랍니다.

弟 果夫 드림

8월 24일

135_0135_0 위는 민국 24년 8월 24일 진과부 선생이 보낸 편지이다. 민국 21년 4월 29일 윤봉길 의사의 홍구공원 의거는 세상을 놀라게 한 중대사건이었다. 이 사건 후 김구와 대한민국임시정부 요인들은 소주 · 항주 등지로 몸을 피하였다. 그러나 이후에도 한인 지사들은 일본군벌이 장악하고 있던 상해 홍구와 여러 지역에서 거사를 계속하였다. 일본군벌의 엄한 감시와 진압도 결코 한인 지사들에게 두려움을 줄 수 없었다. 이런 와중에 민국 24년 8월 상해에서는 또 한 차례 폭발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사건발생 직후 보내온 이 편지에서 진과부 선생은 체포된 혐의자의 진술 내용이 사실인지 확인하고, 그 말이 사실이라면 한인 지사들의 피난을 도우라고 청하였다. 편지 서두의 ‘敬之’는 何應欽 장군을 말한다.닫기

▶첨부문건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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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신] 陳果夫

[수신] 蕭錚

[연월일] 민국 25년 3월 10일

 靑萍 형 보십시오. 보내준 편지 잘 받았습니다. 장 위원장으로부터는 아직 회답이 없습니다. 貴陽의 설비가 부족하여 전보를 발송하기 쉽지 않은 탓인 듯합니다. 전번에 받은 밀령의 내용이 아무래도 이상합니다. 남경으로 돌아간 뒤 직접 張治中에게 전후사정을 확인하고자 합니다. 어쨌든 사실여부를 확인하기 전까지 한국 동지들에게 조심하도록 주의시켜 주기 바랍니다. 수많은 학생들을 어떻게 처리해야할지 실로 중대한 문제입니다. 다시 연락드리도록 하겠습니다.

果夫 드림

3월 10일

147_0147_0 위는 민국 25년 3월 10일 진과부 선생이 보낸 편지이다. 당시 장 위원장은 공산당 토벌작전을 지휘하기 위해 서남지역에 진주하고 있었다. 이 무렵 군사위원회는 돌연 한국혁명당원들을 조사하라는 명령을 반포하여 김구 등은 매우 당황하였다. 이 편지에서 진 선생은 한국 동지들에 대한 관심을 충분히 표현하고 있다. 특히 각지에 산거하고 있는 한국청년 간부들에 대한 특별한 관심을 살펴볼 수 있다. 편지에서 말하는 한국 동지들은 김구 일행을 칭하는 것이다.닫기

▶첨부문건 6:

DB주석 DB주석 원문에는 '(附件八) 釋文'으로 기입되어 있다.닫기

[발신] 陳果夫

[수신] 蕭錚

[연월일] 민국 26년 8월 25일

 靑萍 형 보십시오. 보내준 편지 잘 받았습니다. 김 선생의 안전문제를 두고 이미 縣長과 의견을 나누었습니다. 얼마 전 호구조사를 진행하던 壯丁들이 수상하다며 김 선생을 縣정부로 잡아왔었다 합니다. 조사 결과 나를 잘 안다고 하여 돌려보냈다 합니다. 지금 현장이 나서 적당한 거처를 알아보고 있으며 다른 문제는 없는 것으로 파악되었습니다. 김 선생에게 다른 거처를 마련할 생각이면 재차 강녕현장에게 연락하여 방도를 강구하도록 하겠습니다. 보고의 사실여부는 현재로서는 확인할 방도가 없습니다. 이후 대한민국임시정부 활동경비 수령문제는 형이 남경으로 돌아온 뒤 다시 상의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오늘만도 남경은 6차례나 적기의 공습(오전 1차례, 오후 5차례)을 받았습니다. 수많은 정부기관이 폭격을 당했는데 구체적인 피해상황은 아직 조사되지 않았습니다. 내가 있는 곳은 폭격의 피해를 입지 않았습니다. 주변에 처리할 일이 많은데 장 위원장께서도 수시로 전화를 걸어 각종 사무를 맡기시는지라 근자에는 거의 남경에 들르지 못하고 있습니다. 牯嶺이 아직까지 안전하기는 하지만 더욱 많은 지하대피소를 마련해야 할 것 같습니다. 무엇보다도 안전이 최우선 아니겠습니까. 지상의 건축물은 크게 신경 쓰지 않아도 되겠지만 지하시설은 견고하게 건설해야 할 것입니다. 듣자하니 오늘 공습으로 교통부와 재정부 등 건물이 파괴되었다 합니다. 당초 새 건물을 짓는데 들어갈 돈을 국방공사에 투입하였거나 비행기 혹은 대포를 구입하였더라면 항전역량을 증진시키는데 도움이 되었을 것을 생각하니 안타깝습니다. 근년에 각종 건설공사에 투입된 수천만원의 예산을 국방건설에 투자하였더라면 적들이 이처럼 방자하게 굴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편안하시기 바랍니다.

弟 果夫 드림

8월 25일 저녁

160_0160_0 위는 민국 26년 8월 25일 진과부 선생이 진강에서 보낸 편지이다. 7 · 7사변이 발생한지 얼마 지나지 않았지만 당시 이미 남경과 상해 일대에도 전운이 깊이 드리워져 있었다. 이무렵 김구 선생 등 일부 한국지사들은 江寧縣에 거주하고 있었는데 호구조사 시 종종 오해가 발생하여 불편함이 적지 않았다. 편지 서두에서는 바로 이 문제를 언급하고 있다. 당시 나는 중앙정치학교 지정학원이 옮겨간 廬山에 머물며 수시로 남경을 오갔다. 진 선생의 편지를 받고 남경에 도착한 뒤 나는 김구 일행을 中山門 밖 지정학원 내 숙소로 옮기도록 조치하였다. 바쁜 와중에도 여산에 견고한 지하시설 건설까지 신경 쓰는 것으로 보아 동지들을 향한 진과부 선생의 관심과 동정이 얼마나 세심하고 지극하였는지 이 편지를 통해 충분히 짐작해 볼 수 있다.닫기

▶첨부문건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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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신] 陳果夫

[수신] 蕭錚

[연월일] 민국 26년 11월 25일

 靑萍 형 보십시오. 김구가 말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무선방송 설비를 한구로 옮기는 문제는 재고해 보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이곳저곳으로 옮겨 다니는 것보다는 중앙정치학교도 여산에 머무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정부의 재정이 충족하다면 안전을 고려하여 자주 옮기는 것도 좋겠지만 현재 사정이 여의치 않습니다. 이곳에서는 더 이상 후방공작을 진행할 수 없는 형편입니다. 군대 내 불량분자들이 우리의 적후공작을 돕기는커녕 오히려 방해하고 있습니다. 물가는 하루가 다르게 오르고 상점은 문을 닫았으며, 공장은 가동을 중단한지 오래입니다. 이런 지경에서는 정부로서도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름뿐인 자리(당시 陳 선생은 강소성정부 주석 겸 보안사령이었다)에 연연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속히 군사와 정치의 통일이 이루어져 정부의 권위가 제고되면 군사방면에도 도움이 될 것으로 생각됩니다. 지금은 서생들이 나설 때가 아닌 것 같습니다.

弟 燾 드림

11월 25일

171_0171_0 진 선생의 본명은 ‘祖燾’이고 ‘果夫’는 자이다.닫기

丙. 한국광복운동에 관한 김구 선생의 계획

 『백범일지』에서 김구 선생은 광복운동은 큰 줄기만을 서술한데다 정확한 날짜가 표시되어 있지 않다. 더구나 이 책의 후반부는 대부분 연로한 김 선생이 귀국한 뒤의 사정을 서술하고 있는 관계로 더더욱 날짜 관계가 모호하다. 수십년에 걸친 중국 망명생활에서 김구 선생이 진과부 선생 및 나와 주고받은 아래의 편지를 통해 중국에서 펼쳐진 한국독립운동의 비사를 밝혀 보고자 한다.

 장 위원장과 첫 번째 만난 자리에서 김구는 활동자금 명목으로 2백만원 지원을 요구하였다. 이에 대해 장 위원장은 구체적인 계획을 마련하여 제출하면 고려해 보겠다고 답하였다. 두 사람은 필담(김구의 중국어가 서툴러 필담을 나누었다. 두 사람은 배석했던 진과부도 물리친 뒤 밀담을 나누었다. 자세한 과정은 『백범일지』 참조)을 통해 서로 의견을 교환하였다. 그러나 항주로 되돌아온 뒤 김구는 더 이상 경비지원 문제를 거론하지 않았다. 한편 김구는 장 위원장을 만나기 전부터 기병학교 설립을 거론하였으나 장 위원장이 동의하지 않자 이 문제 역시 더 이상 재론하지 않았다.

 우리측에서 경상비를 지원한 뒤 무슨 연유에서인지 알 수 없지만 이 문제로 대한민국임시정부 내부에서는 분규가 발생하였다. 반대파 인사들은 임정의 이름을 내세워 경비를 타낸 뒤 다른 용도로 사용하고 있다며 김구를 공격하였다. 심지어 한국독립당 내부에서조차 이 문제를 들어 자신을 의심하자 김구는 오뇌에 쌓이게 되었다.

 복정일 동지로부터 이런 소식을 접하자 나는 복 동지를 통해 김구에게 “광복운동이 성과를 거두기 위해서는 구체적인 계획이 필요하다. 중국혁명은 단순한 청조 타도가 아니라 삼민주의적 신중국 건설이라는 구체적 목표를 내세웠기에 동지들로부터 호응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 ‘혁명’은 일시의 수단에 불과한 것이고 民治 · 民有 · 民享의 새로운 국가 건설이 목표였기에 중국혁명은 성공을 거둘 수 있었던 것이다. 지금 한국혁명진영은 단지 ‘독립’ 혹은 ‘광복’을 기치로 내세우고 있다. 하지만 ‘독립’ 혹은 ‘광복’이 완성된 뒤에는 혁명의 목표를 상실하여 동지들은 사분오열되고 말 것이다. 따라서 한국혁명진영이 당장 필요로 하는 것은 ‘한국국민당’을 중심으로 진정한 주의와 건전한 당강을 갖춘 혁명정당을 탄생시키는 것이다.”라는 개인적인 의견을 전하였다. 나의 의견에 심히 동감을 표시한 김구는 민국 25년 7월 5일 이런 뜻을 담은 답신을 보내왔다. 한국국민당은 1936년 김구와 이동녕의 주도하에 1년 전 상해에서 조직된 ‘민족혁명당’에서 정식으로 탈퇴하는 한편으로 공산분자를 배제하고 삼균주의를 종지로 채택하는 개조를 단행하였다.

▶첨부문건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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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신] 金九

[수신] 蕭錚

[연월일] 민국 25년 3월 10일

 靑萍 형 보십시오. 복정일 동지를 통해 형의 근황을 전해 들었습니다. 항상 한국광복을 위해 도움을 아끼지 않는 형의 보살핌에 감사드립니다. 남을 돕는 것이 나를 돕는 것이라는 정신으로 일을 진행하다보면 함께 추구하는 대업이 더욱 빨리 실현될 수 있을 것입니다. 자세한 사정은 추후 뵙고 말씀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편안하시기 바랍니다.

弟 金九 드림

3월 10일

189_0189_0 위는 민국 25년 3월 김구 선생이 필자에게 보낸 편지이다. 독립당을 진정한 혁명정당으로 개조하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나의 의견을 복정일 동지를 통해 전해들은 김 선생은 이에 찬동을 표시하고 ‘한국국민당’을 조직하고 삼균주의를 종지로 삼았다.닫기

▶첨부문건 9:

DB주석 DB주석 원문에는 '(附件十一) 釋文'으로 기입되어 있다.닫기

[발신] 金九

[수신] 蕭錚

[연월일] 민국 25년 7월 5일

 靑萍 형 보십시오. 여러 사정으로 얼굴을 보지 못한지 한참 되었습니다. 마침 精 형이 방문하였기에 복 동지에게 형의 근황을 탐문해 보았습니다. 항상 우리 동지들을 잘 보살펴 주심에 감사할 따름입니다. 같은 배를 탄 운명공동체라는 생각으로 시종여일하게 원조해 주시기를 청합니다. 자세한 말씀은 복 동지를 통해 전하도록 하겠습니다. 편안하시기 바랍니다.

弟 金九 드림

7월 5일

201_0201_0 위는 민국 25년 7월 김구 선생이 필자에게 보낸 편지이다. 편지 가운데 精 형은 복정일 동지를 칭한다. ‘같은 배를 탄 운명공동체라는 생각으로 시종여일하게 원조해 주시기를 청합니다’라 표현한 것은, 독립당 해산 후 조직된 한국국민당에 대한 지속적인 도움을 청한 것이다.닫기

민국 24년 장 위원장은 공산당 토벌을 지휘하기 위해 서남 각 성을 돌다 5월 成都에 머물게 되었다. 장 위원장은 나를 비롯하여 黃紹竤(절강성정부 주석) · 歐陽格(電雷學校 교장) · 桂永淸(교도단 단장) 등을 四川으로 불러 시국에 관한 의견을 교환하기 위해 특별히 전용기를 파견하였다. 당시 한국국민당이 이미 성립된 상태였다. 손중산 선생이 정한 삼민주의와 거의 비슷한 당강을 채택한 한국국민당은 일본에 항거하기 위한 각종 공작계획을 마련하였다. 사천으로 출발하기 전, 진과부 선생은 장 위원장에게 나를 단독으로 접견해 주기를 청하는 친필 편지 한 통을 써 주었다. 단독으로 장 위원장을 알현하는 기회에 나는 시국에 관한 여러 의견과 더불어 한국문제에 대해 자세한 보고를 올렸다. 보고를 듣고 난 위원장께서는 매우 만족함을 표시하시며 한국혁명 단체의 반일 통일진선 구축과 신속하게 구체적인 공작계획을 준비할 것을 김구에게 전해 달라 하였다.남경으로 돌아온 뒤 나는 즉시 장 위원장의 뜻을 진 · 김 두 선생에게 전달하였다. 다음해 노구교사변이 발생하자 7월 30일 김구는 ‘일본 후방에서의 교란계획’(이 계획서는 상당히 장문으로 되어 있는데 현재 내가 보관하고 있는 이 문서의 마지막 한 페이지가 탈루되어 있다. 그렇기는 하지만 계획의 대강을 파악하는 데는 큰 어려움이 없다)을 제출하였다. 후일 長沙에서 각 당파의 대표를 소집하여 통일문제를 논의하는 자리에서 김구는 반대파에 의해 重傷을 입게 되었다. 이와 관련한 내용은 후술하도록 하겠다

▶첨부문건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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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신] 陳果夫

[수신] 蔣介石

[연월일] 민국 25년 3월 26일

 위원장께 올립니다. 김구가 대신 전해주기를 청한 사안 및 淮河 정비와 관련한 내용들은 소쟁 동지를 통해 보고 드리고자 합니다. 소 동지를 단독으로 접견할 기회를 주시기를 청합니다. 편안하시기 바랍니다.

果夫 올림

3월 26일

214_0214_0 위는 민국 25년 3월 26일 진과부 선생이 장 위원장에게 쓴 편지이다. 원래 3월말 다른 동지들과 장 위원장의 전용기 편으로 성도로 가기로 되어 있었으나 사정상 출발할 수 없었다. 5월에야 사천으로 가, 장 위원장을 만난 자리에서 김구 선생의 청구사항(이미 앞에서 상세히 서술하였음)을 보고하였다. 따라서 진 선생의 이 편지는 장 위원장에게 전달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닫기

민국 23년 福建事變이 마무리 되었다. 그러나 공산당과 패잔병들이 버리고 간 다수의 무기가 민간에 유입되어 정부를 긴장시켰다. 이 와중에 불순한 의도를 가지 무리들이 복건지역을 돌며 민간에서 은닉하고 있는 무기들을 끌어 모으고 있었다. 그 가운데는 김구 명의로 무기를 사들이는 자가 있다는 정보가 입수되자 장 위원장은 이를 상당히 중시하였다. 이에 민국 24년 8월 진과부 선생은 이 정보가 사실인지 여부를 김구 선생에게 직접 확인해 줄 것을 나에게 청하였다. 확인 결과 김 선생은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부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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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신] 陳果夫

[수신]蕭錚

[연월일] 민국 25년 8월 27일

 靑萍 형 보십시오. 김구 선생이 남경에 도착하거든 즉시 김 선생 명의로 복건에서 무기를 구매하고 있다는 첩보의 사실여부를 확인해 주기 바랍니다. 장 위원장께서 이 문제에 특별한 관심을 갖고 계신 듯 직접 전보를 보내 사실을 확인하라 하였습니다. 아마 다른 불순분자들이 김 선생의 명의를 도용한 것이겠지만, 사실관계를 분명히 확인할 필요는 있을 것입니다. 편안하시기 바랍니다.

弟 果夫 드림

8월 27일

226_0226_0 위는 민국 25년 8월 27일 진과부 선생이 보낸 편지이다. 당시 한국지사들은 우리측의 협조하에 무기구입을 위한 자금을 마련하고 있는 중이었다. 이즈음 김구 명의로 福州에서 무기를 사들이는 자가 있다는 첩보가 입수되었다. 이를 심각한 상황으로 간주한 장 위원장이 사실여부를 확인하도록 진과부 선생에게 지시하여 진 선생이 편지를 보내게 된 것이다.닫기

김구 선생이 정식 군사간부 양성에 큰 관심을 보이자 나는 중앙군관학교 낙양분교(당시 낙양분교의 주임이었던 祝紹周 장군은 어린 시절 진과부 선생과 같은 학교에서 공부한 동창생이다)에 한국학생 훈련반을 개설할 것을 건의하였다. 훈련반의 학생 선발과 교관 임명 등 세부사항은 김구에게 일임하는 것이 좋겠다는 나의 의견을 채납한 진과부 선생은 이 문제를 정식으로 장 위원장에게 건의하였다. 장 위원장의 결재가 떨어지자 크게 기뻐한 김 선생은 이청천(이씨는 후일 한국광복군 총사령이 되었다)을 훈련반 총대장에 임명하였다. 앞의 표에 보이는 낙양분교 훈련반은 이런 과정을 통해 개설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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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신] 陳果夫

[수신]蕭錚

[연월일] 민국 25년 2월 23일

 靑萍 형 보십시오. 낙양분교에 한국학생 훈련반을 개설하는 문제를 장 위원장께 보고 드렸더니 “요청한 대로 실시하라”는 결재가 떨어졌습니다. 즉시 濮 동지에게 사실을 전해 주시기 바랍니다.

果夫 드림

2월 23일

239_0239_0 위는 민국 25년 2월 23일 진과부 선생이 보낸 편지이다. 이즈음 김구 선생은 광복운동을 위해 필요한 군사간부 양성에 큰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 김 선생과 상의한 끝에 나는 중앙군관학교 낙양분교에 한국학생을 위한 훈련반을 개설할 수 있도록 주선해 보겠노라 약조하였다. 후일 진과부 선생을 통해 이를 보고받은 장 위원장이 “요청한 대로 실시하라”는 결재를 내림으로써 낙양분교에 한국훈련반이 개설될 수 있었다. 당시 낙양분교의 주임이던 祝紹周 장군은 어린 시정 진 선생과 함께 공부한 동창생이었던 관계로 일이 훨씬 쉽게 진행될 수 있었다. 한국학생훈련반이 개설된 뒤 김 선생은 다수의 청년을 입교시켜 건군과 광복을 준비하였다. 이 훈련반의 졸업생 가운데 상당수가 현재 한국군의 고위간부로 복무하고 있다.닫기

김구 선생이 혁명활동을 전개하는 과정에서는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특히 각지에 산재한 동지들과의 연락이 원활하지 못하여 겪는 어려움이 적지 않았다. 이에 나는 대한민국임시정부 전용의 무선설비가 있다면 연락에 편리할 뿐만 아니라 통신업무를 다루는 한국청년들을 양성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이런 의견을 당시 중앙조사통계국장이던 徐恩曾(작년 臺北에서 병사) 장군에게 전하고 협조를 구하였다. 서 장군은 흔쾌히 무선설비 일체와 이를 다룰 직원 2명을 파견하여 김 선생의 전용 무선국으로 사용하도록 하는 동시에 무선설비 조작기술을 한국청년에게 가르쳐주도록 조치하였다. 서 장군의 명에 의해 파견된 汪鏞生 · 何永逸 두 동지는 기술이 뛰어날 뿐 만 아니라 맡은 일에 충실하여 김 선생은 여러 차례 나에게 감사의 뜻을 전하였다.노구교사변이 발생한 뒤 이 무선설비는 더욱 큰 성과를 발휘하였다. 후일 김 선생의 총부가 지정학원으로 이전하자 무선설비 역시 지정학원으로 옮기게 되었다. 이때는 내 비서인 林立(卓如)군을 파견하여 김 선생을 보좌하도록 하였다. 후일 남경이 함락되자 나는 羅霞天 형에게 부탁하여 임 · 왕 · 하 세 동지와 함께 무선설비를 한구로 옮기도록 조치하였는데, 이에 관한 자세한 내용은 후술하도록 하겠다.김구 선생은 또한 동북 한교의 조직과 훈련에도 깊은 관심을 보였다. 김 선생의 대표로 활동할 당시 복정일군은 수시로 이 문제를 거론하며 군사인원 몇 명을 동북에 파견하여 도움을 주기를 청하였다. 나는 이 문제를 두고 공패성 동지와 의견을 교환한 끝에 공 동지가 직접 동북으로 가 공작을 진행하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제안하였다. 더불어 진과부 선생에게 전후사정을 보고하고 참작해 줄 것을 청하기도 하였다. 후일 진 선생은 이를 장 위원장에게 보고하고 공 동지 등 4명을 동북에 파견하여 공작을 진행하도록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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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신] 金九

[수신]蕭錚 · 貢沛誠

[연월일] 민국 22년 10월 6일

 靑萍 · 沛誠 동지 보십시오. 오랫동안 소식 전하지 못해 죄송스러울 따름입니다. 마침 濮 동지가 찾아와 근황을 전해들을 수 있었습니다. 두 분께서 威海衛사태를 원만히 해결하기 위해 애쓰셨다는 소식 듣고 무한한 감사의 뜻을 감출 수 없었습니다. 사방이 모두 적으로 둘러싸인 이 어려운 상황을 헤쳐나가 대업을 이루기 위해서는 시종여일한 합작이 무엇보다도 필요하리라 생각됩니다. 조만간 뵐 수 있으리라 기대합니다. 우선 복 동지를 통해 계획을 전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편안하시기 바랍니다.

弟 金九 드림

10월 6일

252_0252_0 위는 민국 22년 10월 김구 선생이 보낸 편지이다. 위해위사태가 발생하자 나는 이를 원만히 해결하기 위해 공패성 동지를 현지에 파견하였다. 이런 사정을 알게 된 김 선생이 특별히 위와 같은 감사의 편지를 보낸 것이다. ‘우선 濮 동지를 통해 계획을 전해 드리도록 하겠다’는 것은, 군사인원을 동북에 파견하는 문제를 언급한 것이다. 후일 실제로 공패성 동지는 등걸 선생이 파견한 인원을 인솔하고 동북으로 가 공작을 진행하였다. 근자에 滕俊夫(傑) 선생은 당시의 상황에 대해 다음과 같이 회고하였다. “진과부 선생을 대신해 실제 대한사무를 담당한 것은 蕭錚(靑萍) 선생이었으며, 소 선생의 조수로 활약한 이가 공패성 선생이었다 …… 당시 한국독립운동 지원과 관련하여 잘 알려지지 않은 비사 한 가지를 소개하고자 한다. 민국 21년 7월 15일 저녁 장 위원장이 무한에서 ‘속히 직원 3명을 공패성에게 보내라. 이들은 반드시 공패성의 지휘를 받도록 하라’는 내용의 전보 한통을 보내왔다. 이 짧은 전보는 장 위원장의 일기에서도 언급되어 있다. 전보를 받은 즉시 나는 지시대로 3명의 청년장교를 공 선생의 사무실로 파견하고 반드시 그의 명령에 따르도록 하명하였다. 나중에 입수한 정보에 의하면 이들 세 청년장교는 김구 선생의 지령으로 동북에 파견되어 지하공작을 진행하였다 한다. 이를 통해 소 선생이 대한사무에 매우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게 되었다.”(滕傑 선생이 구술한 「三民主義力行社援助韓國獨立運動經過」 참조).닫기

만약 등걸 선생이 언급하지 않았더라면 아마 나도 이 일을 까맣게 잊고 있었을 것이다. 동북에 공작인원을 파견하는 문제는 워낙 기밀을 요하는 사안인지라 진과부 선생이나 김구 선생이나 모두 이를 비밀에 부쳐 주고받은 편지에는 전혀 언급되어 있지 않다. 물론 나 역시 이와 관련한 문건은 하나도 가지고 있지 않으며, 공 동지는 이미 저세상 사람이 되어 버렸다.또 한 가지, 대일항전이 개시되기 전 김구 선생은 비행기 구입을 위한 경비지원을 요청한 적이 있었다. 김 선생은 비행훈련을 받은 한국청년이 비행기를 몰고 일본이나 한국 경내에 진입하여 전단을 살포하는 등 활동을 전개하면 선전공작에 큰 도움이 되리라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진과부 선생도 김 선생의 계획에 찬동하여 비행기 구입을 위한 경비마련에 힘써 보겠다고 약조하였다. 그러면서 진 선생은 장거리 비행임무를 완수할 수 있는 한국청년을 쉽게 구할 수 있을지 염려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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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신] 陳果夫

[수신]蕭錚

[연월일] 민국 25년 10월 1일

 靑萍 형 보십시오. 김구 선생이 염려하는 바가 전혀 틀리지는 않다고 생각합니다. 모든 문제는 立夫 아우가 돌아온 뒤 다시 상의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비행기 구입은 원안대로 추진하는데 문제가 없을 것입니다. 조종사 육성훈련은 바르면 빠를수록 좋을 것입니다. 훈련에 필요한 비용은 제 사무실에서 마련할 것입니다.

果夫 드림

10월 1일

265_0265_0 위는 민국 25년 10월 진과부 선생이 보낸 편지이다. 김구 선생이 비행기 구입을 위한 경비 지원을 요청하자 진 선생이 원칙적으로 동의한 내용은 앞서 이미 언급한바 있다.닫기

五. 남경 함락 후의 정세와 피습 후 김구 선생의 행적

 민국 26년 8월 중일전이 전면적으로 개시되자 대한민국임시정부와 김구 선생은 이제부터 중한 두 나라가 동일한 전선에 서서 일본과 작전을 전개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였다. 그러나 중국당국은 대규모작전은 중국군이 전담하고, 대한민국임시정부는 단지 중국 내 한인들을 단결시켜 일본군에 대한 기습공격 등을 통해 상당한 타격을 가해주기를 희망하였다. 더불어 한국 국내의 역량을 동원하여 일본의 후방을 교란시키고 일정한 견제역량으로써 전선의 대규모작전에 호응해 줄 수 있기를 바랐다. 이에 나는 여러 차례 김구 선생에게 중국의 바람을 전하면서 속히 한국혁명 역량을 하나로 결집시켜 단기간 내에 뭔가 보여줄 수 있도록 힘써 주기를 청하였다. 그러나 이후로도 몇 달이 흘러 남경이 함락될 때까지도 한국혁명진영의 단결과 통일이 이루어지지 못하자 매우 실망스럽지 않을 수 없었다.

 민국 26년 11월말, 일본군의 공세에 밀린 아군이 상해일대에서 철군하기 시작하면서 남경까지도 위태로운 지경에 처하였다.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르자 중앙은 진과부 선생의 사직을 받아들였다. 강소성정부 주석에서 물러나 중앙정치학교 교육장 일에 전념한 진 선생은 한동안 廬山에 이주해 있던 학교를 호남 서부의 芷江으로 옮기는 일에 몰두하였다. 강소성정부 주석 이취임식 등 주변정리를 마친 진 선생은 12월초 강소성 수상경찰국 소속의 전용선박편으로 漢口를 거쳐 호남에 도착하였다. 사전에 진 선생으로부터 전화 연락을 받은 나는 여산에서 내려와 중도에 九江에서 합류하여 같은 배를 타고 漢口까지 동행하였다.

 항행하는 도중 진 선생과 정국의 변화와 앞으로의 방침에 대해 장시간 깊은 대화를 나누었다. 물론 김구 선생이 영도하는 대한민국임시정부와 관련한 여러 문제들도 주된 화제 가운데 하나였다. 당시 나는 진 선생에게 “중일 간에 전면전이 개시된 이상 김구 선생의 안전과 과거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활동에 대한 일본의 압박 등은 더 이상 문제될 것이 없어 보인다. 관건은 한국혁명진영 내 각 당파의 충돌과 분규가 너무 심하여 김구로서도 도저히 통제할 방도가 없다는 것이다. 이로 인하여 우리가 대한민국임시정부에 바라는 바의 반일활동이 전혀 진전을 보이지 않고 있다. 따라서 앞으로의 대한원조공작은 ‘구제’에 치중한 이전과는 달리 ‘통일’에 중점을 두고 진행해야 할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먼저 대한공작을 담당하는 책임기관의 통일을 이루어야 할 것이다. 현재 상황에서는 전쟁수행이 모든 것에 우선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한국혁명운동에 대한 지원공작도 중앙당부가 아니라 군사위원회에서 통일지휘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된다.”고 개인적인 견해를 상세하게 피력하였다. 나의 의견에 전적으로 동감을 표시한 진 선생은 한구에 도착하는 즉시 이를 장 위원장에게 보고하겠노라 약속하였다.

 남경에서 철퇴하기 전 김구의 總部와 무선통신 장비는 모두 지정학원 내에 위치하였다. 김구는 安恭根을 파견하여 상관사무를 처리하였고, 나는 羅霞天 형 및 汪 · 何 두 동지(무선통신 업무 담당)에게 사무실 한 칸을 내주고 업무를 처리하도록 하였다. 남경에서 철퇴하기 전에는 내가 이용하던 자가용을 이들에게 건네주며 다른 교통편이 여의치 않거든 무선설비를 蕪湖 · 九江을 거쳐 육로로 한구까지 운반하도록 조치하였다(나는 학교를 이전하는 일로 먼저 여산으로 출발하였다). 안공근과는 다른 경로를 거쳐 한구에서 만나기로 약조하였다.

 후일 羅 · 林 · 汪 · 何 등이 모두 안전하게 한구에 도착하자 우리는 濱江街에 위치한 ‘富貴館’에 숙소 겸 사무실을 마련하였다(부귀관은 원래 일본인이 운영하던 상점이었다. 전쟁발발 후 한구경비부에서 접수한 이 건물을 잠시 사무실 겸 숙소로 빌린 것이다). 우리가 한구에 도착한 한참 뒤, 심지어는 다음해(민국 27년) 10월 한구에서 철퇴할 때까지도 끝내 안공근의 모습을 찾을 수 없었다. 安군의 안전이 심히 염려되어 김구 선생에게 물어보았으나 역시 명쾌한 답을 얻을 수 없었다. 후일 『백범일지』를 읽고서야 전후사정을 알 수 있었다. 남경 철수 전 김구 선생은 안공근에게 상해로 가 안중근 열사의 부인을 안전한 곳으로 피신시키도록 지시하였다. 그러나 안 의사의 부인을 상해 밖으로 구출하는데 성공하지 못한 안공근은 김구에게 호된 꾸지람을 듣게 되었다. 이로 인해 김구의 주변을 떠난 안공근은 이후 자유행동을 하여 지인들과 연락이 두절된 것이었다.

 남경 철수 직전 김구는 상해와 남경일대에 거주하고 있던 한인 및 임시정부 요인과 당원 등 수백 명을 이끌고 세 척의 목선에 분승하여 곧장 長沙로 내달렸다. 직전 호남성정부 주석에 새로 임명된 張治中 장군은 김구 일행의 안전보장과 생활상의 편의제공을 철석같이 약속하였다. 김구의 안전과 생활에 별 문제가 없음을 확인한 우리는 물론이고 진과부 선생도 크게 안도하였다. 아울러 진 선생은 이미 장 위원장께서 한국관련사무는 군사위원회에서 통일적으로 지휘하도록 조치를 내리셨다고 전해주었다. 이 무렵 마침 일이 있어 한구를 떠나게 된 나는 나하천 형에게 현상을 유지하며 상부의 명령을 기다리기를 부탁하고 雲南으로 출발하였다. 내가 운남으로 떠난 뒤에도 무선설비는 그대로 유지되어 매일 각 방면과 한국관련사무에 대한 전보를 주고받았다.

 민국 27년 5월 어느날, 돌연 長沙로부터 김구 선생이 피습당해 중상을 입었다는 내용의 전보가 도착하였다. 나는 즉시 나하천 형에게 전보를 보내 장사로 가 자초지종을 조사해 진과부 선생에게 보고하고(진 선생도 당시 장사에 머물고 있었다) 사후문제들을 원만하게 처리해주도록 부탁해 줄 것을 청하였다. 피습소식을 접한 장 위원장도 김 선생에게 위로의 전보를 보내고, 장치중에게는 최상의 의료설비를 총동원하여 치료에 최선을 다하라고 지시하였다.

나중에 확인한 바에 의하면 한국독립운동 진영의 ‘통일’문제를 논하기 위해 김구는 장사에서 3당회의를 소집하였다. 이 자리에서 조선혁명당원 李雲煥이 총기를 난사하여 사상자가 발생한 것이다. 첫 번째 총탄을 맞은 김구가 중상을 입고 바닥에 쓰러지자 이운한은 玄益哲과 柳東說을 향해 계속 총을 난사하여 현익철이 사망하였다. 전후사정은 『백범일지』에 자세히 언급되어 있는 관계로 여기서는 생략하도록 하겠다.

 피격 후 장기간 요양을 취하는 동안 김구 선생이 제대로 업무를 볼 수 없었던 관계로 대한민국임시정부도 한동안 별다른 활동을 하지 못하였다. 내가 운남에서 한구로 돌아온 무렵 이미 장사까지도 위험한 상황이었고 武漢에서는 철수준비가 한창이었다. 이즈음 어느 정도 몸을 추스린 김구 선생은 일행을 이끌고 장사를 떠나 廣州로 향하였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나는 중앙조사통계국에서 빌린 무선설비를 반납하고 왕 · 하 두 동지도 원대복귀시켰다. 나 · 임 두 동지는 이후 나를 따라 중경으로 옮겨 계속 활동하였다.

 잠시 광주에 머물던 김구 일행은 얼마 뒤 廣西 柳州로 옮겨 이곳에서 몇 달을 머물렀다. 다음해(민국 28년) 2월 ‘광복진선청년공작대’를 조직한 한국혁명진영은 청년들을 각 전구로 파견하여 공작을 진행하도록 하였다. 3월, 四川의 綦江으로 이전한 대한민국임시정부는 11월에는 ‘군사특파단’을 西安에 파견하였다. 이는 중앙군관학교 낙양분교장이었던 祝紹周 선생이 새로 섬서성정부 주석에 임명되어 낙양에서 훈련받았던 많은 학생들이 서안에서 공작을 진행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민국 29년 진과부 선생은 대한민국임시정부가 ‘광복군’을 조직할 수 있도록 허용해 줄 것을 장 위원장에게 요청하였다. 이어 김구는 그의 ‘대가족’(김씨의 ‘대가족’은 상해와 남경일대에 거주하고 있던 한인 및 임시정부 요인과 당원 등 수백 명을 말한다)과 함께 중경에 도착하니 이때가 민국 29년 9월이었다.

 중경에 도착한 뒤 김구가 우선적으로 해결해야할 문제는 여전히 적지 않았다. 그 가운데서도 가장 시급히 해결해야할 문제는 크게 3가지였다. 첫째는 대가족을 안주시키는 문제였다. 둘째는 하와이와 미주대륙에서 활동하고 있는 동지들과 연락을 취하고 경제적인 도움을 청하는 문제였다. 세 번째는 長沙에서부터 상의를 계속하였으나 여전히 결말을 보지 못하고 있는 한국 각 혁명단체의 통일을 이루는 문제였다.

 중경에 도착한 뒤 김구는 閔石麟(당시 김 선생의 통역)을 대동하고 나를 찾아와 ‘광복군’ 성립과 ‘대가족’ 안치 등 여러 문제를 상의하였다. 이에 나는 ‘광복군’은 곧 정식성립이 가능할 것이며, ‘대가족’은 시외에 안치하는 것이 좋겠다는 뜻을 전하였다. 얼마 뒤 우리측에서는 중경 교외의 ‘土橋’에 따로 건물을 지어 한인들을 안치하였다. 광복군 성립문제도 순조롭게 진행되어 군사위원회는 ‘원안대로 처리’를 결정하였다. 군사위원회의 결정을 전하자 대한민국임시정부는 낙양분교 한국훈련반 대대장이던 李靑天을 한국광복군 총사령에 임명하였다. 취임을 앞두고 방문한 이청천을 만나보니 범상치 않은 인물이 아님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그토록 고대하던 ‘광복군’ 성립전례는 김구 선생과 대한민국임시정부 요인들이 총집결한 가운데 중경의 嘉陵賓館에서 성대하게 거행되었다. 최초 광복군총사령부는 서안에 두기로 결정되었다. 그 예하에는 3개 지대를 두고, 제1지대장에 李範奭(후일 대한민국 정식정부가 성립된 뒤 외교장관과 내각총리 역임)을 임명하여 山西에 파견하였다. 이범석은 과묵하고 진중한 인상을 주는 인물이었다. 高雄 지대장이 이끄는 제2지대는 綏遠으로 파견되었으며, 金學奎 지대장이 인솔한 제3지대는 山東지역으로 파견되었다. 김구 선생도 한국 각 당파의 통일문제를 처리한 뒤 직접 서안으로 가 한국광복군 사무에 관여하였다.

 서안으로 출발하기 전 한국 각 당파의 통일문제를 진지하게 논의하기 위해 김구는 재차 綦江으로 향하였다. 먼저 한국국민당 전체회의를 소집한 김구는 당원들에게 혁명단체의 통일을 위한 자신의 의지를 설명하며 협조를 구하였다. 그러나 회의에 참가한 대부분의 당원들은 한국혁명 진영 각 단체 구성원의 사상이 복잡한데다 특히 공산주의자들은 결코 진정한 합작을 원치 않을 것임으로 통일작업이 쉽지 않을 것을 염려하였다. 그러나 김구는 거의 한 달간을 설득한 끝에 마침내 당원들의 동의를 얻어 내는데 성공하였다. 김구의 적극적인 노력의 결과 국민당 · 한국독립당 · 조선혁명당 3당의 통일이 이루어져 민족진선을 형성하였다. 반면 공산진영의 조선민족혁명당 · 조선민족해방동맹 · 조선민족전위동맹 · 조선혁명자동맹 등은 공산주의를 포기할 수 없다며 합작에 응하지 않았다. 특히 조선민족혁명당의 수령인 金若山은 합작회의에서 맨 먼저 자리를 뜨며 강한 불만을 표시하였다. 이후 민족진선의 3당은 미주에서 활동하고 있던 각 혁명단체와 연합하여 새로운 한국독립당을 결성하고 김구를 집행위원장에 추대하였다. 동시에 대한민국임시정부 역시 개조를 단행하여 김구를 국무회의주석에 추대하는 한편 이승만을 외교위원회 위원장에 임명하였다.

전면적인 항전이 개시된지 수년만에 어렵사리 대한민국임시정부가 김구 중심으로 개조를 완성하고, 김구를 따라 사방을 전전하다 중경에 도착한 ‘대가족’의 안치문제도 해결을 보게 되었다. 무엇보다도 한국광복군의 정식성립이 이루어지자 나는 진과부 선생에게 한국사무에서 손을 떼게 해달라고 청하였다. 이에 진 선생은 중앙당부 대신 군사위원회에 對韓事務를 이관시키기로 했던 이전의 약속을 상기시키며 군사위원회에 사무를 이관시킨 뒤 자연스럽게 바람이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라며 조금만 더 힘써 줄 것을 부탁하였다. 그러나 이런 소식을 접한 김구의 반응은 사뭇 달랐다. 김구는 여러 차례 蔣 위원장에게 편지를 보내 중앙당부에서 계속 대한사무를 맡아줄 것을 청하였다. 김구의 편지는 매번 내 손을 거쳐 진 선생에게 전달되었고, 그때마다 진 선생은 편지는 잠시 내가 보관하고 있는 것이 좋겠다고 말씀하였다. 결국 김구가 여러 차례 장 위원장에게 올린 편지는 지금까지 내가 보관하고 있다.

 중국방면에서 대한사무를 담당하는 지도기구가 변화된 과정은 호춘혜 박사의 저서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여기서 다시 언급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우여곡절이 많았지만 어쨌든 대한사무가 군사위원회로 이관된 뒤 토지개혁문제에 전념할 수 있게 되어 내심 기쁨을 감출 수 없었다. 그렇다고 이후 내가 한국문제에서 완전히 손을 놓은 것은 아니었다. 국방최고위원회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와 관련한 문제를 논의할 때마다 나는 위원 자격으로 참석하여 개인적인 의견을 피력하였다. 특히 현안이었던 대한민국임시정부 승인문제에 있어 나는 신속한 승인에 찬성하는 입장을 견지하였다.

 카이로회의에서 장 위원장이 전후 영 · 미 · 중 3국은 한국이 독립된 민주국가를 건설할 수 있도록 지원해야 한다고 말한 것은 한국의 전도와 관련하여 매우 중요한 주장이었다. 당시 나는 이미 한국사무에서 손을 뗀 뒤였지만 이 소식을 듣고 충심으로 기뻐하였다. 얼마 뒤 일본이 패망하고 김구 선생이 귀국하게 되자 장 위원장 부부는 김 선생 일행을 위해 성대한 환송회를 열어 한국광복을 축하하였다. 수십년간 한국의 광복을 위해 중국 조야가 흘린 피와 땀이 마침내 결실을 맺은 순간이었다.

六. 일본 투항 후 한국의 상황과 귀국 후 김구의 활동

 1945년 8월 15일 일본은 마침내 무조건투항을 선언하였다. 그러나 전쟁 종식 후에도 한국은 즉각 독립을 인정받지 못했다. 오히려 남과 북으로 분단되어 미 · 소 두 나라 군대에 의해 점령되는 운명에 처하였고 분단 상황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광복의 기쁨도 잠시, 예상치 못한 상황에 한인들은 큰 분노와 함께 실망감을 감출 수 없었다. 이는 또한 과거 70여 년간 한국을 원조하고 지지했던 중국의 노력을 물거품으로 만드는 결과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蔣 위원장을 비롯하여 한국독립을 위해 애썼던 중국 조야를 슬프게 만든 것은 ‘대한민국’의 탄생을 위해 누구보다도 노력하였던 김구 선생의 허무한 죽음이었다. 항일전쟁 승리 전후부터 김구 선생의 사망까지 수년간의 상황은 다음과 같이 숨 가쁘게 전개되었다.

 한국광복군이 성립되자 동아 전장을 주도하고 있던 미군은 비로소 대한민국임시정부에 주의를 기울이기 시작하였다. 1942년에는 한국광복군 별동대가 인도주둔 영국군의 동의를 얻어 미얀마전구에서 활동을 벌였다. 카이로회의 후에는 광복군 제2지대장 金學奎가 阜陽에서 미군과 비밀리에 합작을 진행하였다. 당시 미군은 광복군에게 신무기 사용법을 교육하는 한편 미국식 훈련을 실시하였다. 李範奭이 이끄는 광복군 제3지대도 미군과 합작하여 폭파훈련을 받고 한국 경내로 잠입하여 활동을 벌일 계획을 세우기도 하였다. 광복군이 미군당국의 주목을 받게 되자 흥분을 감추지 못한 김구는 직접 陝西의 杜曲에서 훈련중인 광복군을 순시하기도 하였다. 아울러 김구는 미군 작전부장과 군사협의 체결을 논의하기까지 하였다. 서안에 도착한 김구는 섬서성주석 祝紹周 장군이 베푼 연회석상에서 일본의 투항 소식을 듣게 되고, 이로써 미군과의 모든 합작계획은 폐기되고 말았다.

 2차세계대전 당시 중국에 주둔하고 있던 미군은 대한민국임시정부와 광복군에 대해 비교적 우호적인 입장을 취하였다. 그러나 정치와 관련한 임무를 띠고 중국에 파견된 미국인들은 이와는 완전히 상반된 입장을 취하였다. 당시 미국의 좌익분자들은 루즈벨트 대통령 주변을 완전히 포위하고 국무원의 동아정책을 그들 마음대로 요리하고 있었다. 이들은 국방최고위원회가 대한민국임시정부 승인문제를 논의하자마자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승인하지 못하도록 우리 외교부에 압력을 가하였다. 소련은 이미 자국 경내에서 활동하고 있는 한국 좌파단체를 승인한 상태인데, 중국이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승인하게 되면 소련이 遠東戰場 참가에 소극적인 태도를 취하게 되리라는 것이 그들이 내세운 이유였다. 국무원 내 좌경분자들의 강한 압력에 우리 외교부는 결국 시종 대한민국임시정부 승인문제에 주동적인 자세를 취하지 못하였다. 민국 38년 8월 진과부 선생은 외교부장 송자문에게 개인적으로 편지를 보내 속히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승인해 줄 것을 청하였으나 역시 별무소득이었다.

 일본이 투항한 뒤에도 미국은 영국의 주장을 좇아 표면적으로는 한국은 일정기간의 신탁통치기간을 거친 뒤에야 비로소 독립할 수 있다는 입장을 취하였다. 영국이 소련군의 북한 진주를 희망한데는 나름대로의 계산이 있었다. 소련이 서태평양에 일정한 세력을 형성하면 미국세력의 확장을 견제할 수 있게 될 것이고, 이로써 영국은 전후에도 자유세계에서의 주도적인 위치를 계속 유지하려는 속셈이었던 것이다. 라티모어 등 루즈벨트 주변의 좌파인사들마저 영국의 진정한 의도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영국의 정책에 동조하면서 자연 미국은 소련과 영국의 술책에 놀아나는 꼴이 되고 말았다.

 미국의 잘못된 정세판단으로 일본의 투항과 동시에 소련은 아무런 힘도 들이지 않고 한반도의 절반을 자신들의 세력권에 넣고 한국사무에 있어서 미국과 동등한 발언권을 확보하였다. 미 · 영 · 소 삼국은 표면적으로는 중국까지도 한국에 대한 국제공동관리에 참여시키고자 하였다. 그러나 시종여일하게 한국의 신탁통치에 반대한 장 위원장은 삼국의 요청을 단호하게 거절하였다.

 민국 34년 10월 27일, 당시 미국에 있던 송자문 외교부장에게 보낸 전보에서 장 위원장은 한인들이 하루속히 독립정부를 조직할 수 있도록 지원할 것을 지시하였다. 그러나 송 부장의 조회를 받은 미국정부는 종전 전 한인들이 국외에 조직한 어떤 정치단체도 승인할 수 없으며, 어떤 형식으로도 이들 단체들을 지원할 의사가 없음을 분명히 하여 중경의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승인할 의사가 없음을 재확인하였다. 이는 미 · 영 · 소 삼국이 이미 한국에 대한 신탁통치를 결정하였음을 우회적으로 표현한 것에 다름 아니었다. 미국의 강경한 반응에 머뭇거리던 송자문은 결국 장 위원장에게 미국의 의지를 거스를 수 없는 현실을 타전하였다. 냉혹한 현실을 거스를 수 없음을 직시한 장 위원장은 속히 김구 일행을 귀국시키는 것이 한국의 장래를 위한 최선의 선택이라는 판단을 내리게 되었다.

 장 위원장이 송자문 부장에게 전보를 보내기 전인 9월 17일, 중앙조직부장 陳立夫는 김구 선생의 부탁을 받고 중국국민당 총재를 겸하고 있던 장 위원장에게 귀국 후 활동경비로 法幣 3억원을 지원해 줄 것을 청하였다. 이에 장 위원장은 우선 법폐 1억원과 미화 20만 달러를 활동비 명목으로 지원하도록 결재하였다. 더불어 장 위원장은 김구 일행이 귀국 시 이용할 수 있도록 전용기를 내줄 것을 미국당국에 요청하였다. 이에 대해 미국당국은 김구가 대한민국임시정부 해산을 공식선포하고 개인자격으로 귀국할 때에만 교통편을 제공하고 안전을 보장할 수 있다는 입장을 취하였다. 부득이 김구는 측근 막료만 대동하고 한국독립당 당수 자격으로 귀국길에 오를 수 있었다. 장 위원장 부부가 베푼 성대한 환송회를 끝으로 중경에서의 피난생활을 마친 김구 일행은 11월 5일 두 대의 비행기에 분승하여 상해로 향하였다. 11월 12일과 13일 두 차례에 나누어 미군 수송기편으로 상해를 출발한 김구 일행은 여전히 독립을 누리지 못하고 있던 조국 땅을 밟게 되었다.

 귀국 후 김구 선생은 신탁통치를 반대하고 남북으로 분할된 조국을 하나로 합치기 위한 또 다른 고난의 길에 온몸을 던졌다. 더불어 김구는 후손들에게 독립을 위해 분투한 선열들의 뜻을 널리 알리기 위해 尹奉吉 · 李奉昌 · 白貞基 3의사의 유해를 봉환하여 효창공원에 합장하였다. 3의사 묘의 한편에는 안중근 의사의 묘혈을 준비해 두었으나 5년이 채 못 되어 그 자리는 김구 자신의 묫자리로 바뀌고 말았다.

 신탁통치 반대와 남북통일을 위해 김구는 몸소 평양까지 가 공산주의자들을 설득하고자 하였다. ‘대한통일’을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지 할 수 있다는 김구의 애국충정을 보며 과거 김구가 직접 필자에게 했던 “공산주의자들에게는 민족이나 국가의 개념이 없다. 따라서 이들과 ‘통일’을 논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던 말이 떠올랐다. 공산주의자들과의 협상에서 민족감정을 내세우는 것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은 진리나 다름없는데, 남북통일을 위한 김구의 노력이 어떤 결과로 나타날지는 말할 필요도 없는 것 아니겠는가!

 철저하게 신탁통치를 반대한 김구는 또한 남한만의 단독정부 구성에도 반대하며 ‘총선’ 불참을 선언하고 정계은퇴를 결심하였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1949년(민국 38년, 국공내전에서 패배한 국민정부가 대만으로 천도한 해) 6월 26일 12시경 사저에서 괴한의 총격을 받고 사망하니 향년 74세였다.

 평생을 조국을 위해 헌신한 위대한 지도자의 죽음에 한국 조야는 슬픔을 감추지 못하였다. 김구 사후 영원히 그를 기념하기 위해 한인들은 뜻을 모아 한성 시내에 선생의 동상을 건립하고 그의 묘소에는 참배객이 줄을 이었다. 1971년 한국방문 시 필자는 김구 선생의 차남인 金信(당시 교통부장관)과 함께 묘역을 참배하였다. 김 선생의 동상 앞에는 선생을 기리는 장 위원장의 글이 새겨져 있었다. 나 역시 선생과의 인연을 생각하며 한동안 깊은 회상에 잠겨 있었다.

 중국에서 출생하고 교육을 받은 김신 장군은 당연히 중국 어문에 능하였다. 1959년부터 장기간 중화민국주재 대사를 역임한 김 장군은 민국 48년 4월 부인과 함께 내 처소를 찾아와 내가 보관하고 있던 김구 선생의 편지와 관련문건들을 둘러보았다.

 민국 34년 봄, 내 어머니의 환갑 때 당시 중국에 머물고 있던 김구 선생과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여러 선생들이 화갑을 축하하는 글들을 보내왔다. 40년이 지난 지금, 어머니께서는 백 살을 넘게 살아계신데 김구 · 조소앙 · 복정일 등 여러 선생은 단 한분도 이승에 계시지 않는다. 수십년 전 한국독립지사들과의 인연을 회상하니 감개가 무량할 따름이다.


 註 : 이 글은 『백범일지』와 본인이 소장하고 있는 일기 등을 참고하여 새롭게 정리한 것이다. 따라서 이전에 썼던 「中國援助韓國光復運動之鱗爪」의 내용과는 다른 부분이 적지 않다. 특히 이번 글에서는 정확한 날자를 밝히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민국 53년 진과부 선생의 서거 2주년을 맞아 기념문집 발간을 위해 쓴 「中國援助韓國光復運動之鱗爪」는 워낙 급하게 쓴 탓에 내용에 소홀함이 없지 않았다. 더구나 문집은 기념식에 참석한 인사들에게만 배포된 ‘비매품’이었던 관계로 널리 유포되지 않아 내 글의 오류를 지적받을 기회도 없었다. 여전히 이 기념집을 소장하고 계신 분들께 양해를 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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