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제

해 제

1919년 4월에 대한민국임시정부(이하 임정)가 중국 상해에 수립된 후 1945년 8월까지 임정은 국제적 승인과 지지를 얻기 위하여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특히 1941년 12월 7일에 이른바 태평양전쟁이 발발한 후 임정은 ‘전시외교’를 표방하고 연합국 열강과의 본격적인 승인 교섭에 나섰다. 여기서 전시외교라 함은 임정의 ‘국군’인 광복군을 연합군의 일원으로 대일전에 참전시킴으로써 임정의 존재를 국제적으로 인정받는다는 것이었다. 이렇게 되면 전후 한국의 독립 회복과 더불어 임정이 주도적으로 신국가 건설에 나설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될 수 있었다. 요컨대 태평양전쟁기는 4반세기에 걸친 임정의 활동을 총결산하는 시기였다.

이 시기 임정의 승인외교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치했던 것은 대미교섭이었다. 연합국들 중 미국은 태평양전쟁에서의 주도적인 역할 때문에 전후 한국문제 처리에 결정적인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더욱이 미국은 1941년 3월 11일에 발효된 무기대여법(Lend-Lease Act)에 의하여 연합국들에게 상당한 분량의 무기와 군수물자들을 제공하고 있었다.

임정은 1940년 9월 중국 국민당정부의 임시수도인 중경에 정착한 뒤 광복군 총사령부를 창설하여, “만 1년이면 최소한 3개 사단을 편성하여 중국ㆍ미국ㆍ영국 등 연합군의 교전단체로서 참가하고 국토 수복시까지 전투를 전개한다”라는 계획을 세워둔 바 있었다. 태평양전쟁의 발발은 이러한 계획을 실현시킬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그러기에 임정은 미ㆍ일간 전쟁이 일어나자 곧바로 국무회의를 소집하여 “본 정부도 3천만 인민을 동원하여 민주국 및 침략전선에 참가하여 공동 분투할 것”을 결의하고 「대일선전성명서」를 발표했다. 이때가 1941년 12월 10일이었다.

그 후 임정은 중경의 미국대사관과 직접 접촉을 시도하는 한편, 워싱턴 D.C.의 주미외교위원부(위원장 이승만)를 통하여 미국 정부와의 교섭을 전개했다. 교섭 노력은 줄기차게 이어졌지만, 미국은 태평양전쟁이 끝날 때까지 임정 불승인정책으로 일관했다. 이러한 미국의 태도는 연합국 열강의 대한정책에 큰 영향을 끼쳤고, 이로 인해 임정 요인들은 해방 후 개인 자격으로 귀국해야만 했다.

‘망명정부’로서는 그 유례를 찾기 어려울 정도로 오랜 시일동안 분투해 왔음에도 불구하고 임정은 왜 대일전쟁을 이끌던 미국으로부터 승인을 받지 못했던 것일까? 당시 이 문제와 관련한 미국 정부의 공식 태도는 두 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첫째로 미국은 추축국 점령 하에 있는 국가들의 망명정부나 임시정부를 승인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세웠다는 것이다. 이러한 원칙은 독립 후 그 나라 국민들에게 스스로 정부를 선택할 수 있는 기회를 주어야 한다는 명분으로 정당화 되었다. 둘째는 임정은 한국민을 대표하는 ‘정부’가 아니라 경쟁적인 ‘한인그룹들(Korean groups)’ 중 하나에 지나지 않으며 국내와의 연결 또한 불투명하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두 가지 설명은 그 나름의 명분과 사실적 근거들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학계(특히 미국학계)에서도 대체로 수용되고 있는 분위기이다.

그런데 태평양전쟁기 임정 승인문제는 당시 한국민족운동진영 내에서 임정의 위상이나 역할 및 역량만을 보고 평가할 문제가 아니었다. 그것은 일본 패전 후 한국문제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하는 보다 근본적인 문제와 연결되어 있었다. 이 문제에서 미국은 전후 한국의 즉각적인 독립 대신 신탁통치라는 해결 방안을 고안해 냈다. 일본의 패전으로 동북아시아에서 힘의 공백이 생기면 중국과 소련이 이 지역의 주도권을 놓고 다투게 될 것인데, 이 경우 한반도가 그 지정학적 위치 때문에 곧바로 분쟁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것이 미국의 판단이었다. 한편, 영국은 그들의 식민지에 미칠 파장을 고려하여 한국의 독립에 대하여 시종 부정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었다. 소련은 한국의 독립에 호의적이었지만 친중ㆍ친미적 성향의 임정에 대하여는 거부감을 가졌다. 미국의 입장에서는 대일전쟁의 효율적 수행을 위하여 연합국들간의 상충된 이해관계를 조정하는 동시에 전후 동북아시아에서 자신들의 입지를 강화시킬 필요가 있었다. 미국의 신탁통치안은 그러한 정책적 고려의 산물이었고, 따라서 임정에 대하여는 불승인정책으로 일관할 수밖에 없었다.

본 자료집에는 태평양전쟁기 미국 정부의 중경임정에 대한 인식과 태도를 살필 수 있는 문서들이 수록되어 있다. 이들 문서의 출처는 미국 국립문서관(National Archives)이다. 이곳에는 의외라 싶을 정도의 많은 한국관계 문서들이 그들 나름의 독특한 분류방식에 따라 정리ㆍ보존되고 있다. 이들 문서 중 일정 시기가 지나 비밀분류에서 해제된 문서들에 한하여 연구자들의 자유로운 열람이 허용되고 있다. 그러나 소장된 문서의 양이 워낙 방대하고 체계적으로 완전히 정리되어 있는 것도 아니어서 필요한 자료를 찾는 데에는 많은 시간과 노력을 기울여야만 한다(Jack Saunders, "Records in the National Archives Relating to Korea, 1945-1950," Bruce Cumings ed., Child of Conflict:The Korean-American Relationship, 1943-1953, Seattle and London: University of Washington Press, 1983;방선주, 「미국 국립공문서관 국무부문서 개요」, 『국사관논총』 79, 1998 참조).

그런데 다행스럽게 미국 외교정책을 관장하는 국무부의 한국관계 문서들은 마이크로필름으로 제작되어 누구나 쉽게 이용할 수 있다. 그 중 우리의 독립운동기에 해당하는 것들은 다음과 같다.

 ① Department of State, U.S. “Records of the U.S. Department of StateRelating to Internal Affairs of Korea, 1910-1929.” M426, 9 rolls.

 ② Department of State, U.S. “Records of the U.S. Department of StateRelating to Internal Affairs of Korea, 1930-1939.” LM78, 2 rolls.

 ③ Department of State, U.S. “Records of the U.S. Department of StateRelating to Internal Affairs of Korea, 1940-1944.” LM79, 4 rolls.

 ④ Department of State, U.S. “Records of the U.S. Department of StateRelating to Internal Affairs of Korea, 1945-1949.” LM80, 12 rolls.

이상의 마이크로필름들 중에서 미 국무부의 대한정책 수립 과정과 임정에 대한 인식을 살필 수 있는 것은 ③과 ④이다. 미국은 태평양전쟁이 발발한 1941년 12월 이후에야 전후 한국문제의 근본적인 해결책을 모색하면서 중국과 미주에서 활동하던 한인독립운동단체들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고 정보를 모으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1945년 8월까지 마이크로필름에 수록된 국무부문서들은 그 성격으로 보아 두 범주로 나눌 수 있다.

 첫째는 중경임정과 주미외교위원부를 포함한 재미한인단체들이 미국 정부에 보낸 각종 청원문이다. 이 중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주미외교위원장 이승만과 중한민중동맹단(Sino-Korean People’s League)의 대표 한길수(Kilsoo K. Haan, 1900-1973)가 보낸 문건이다. 이승만은 이때 중경임정으로부터 대미외교의 전권을 위임받고 있었기 때문에 그가 보낸 청원문들은 주로 임정 승인과 광복군에 대한 군사적 지원 획득에 초점이 모아지고 있었다. 한편 1937년 중일전쟁 발발 후 재미한인사회에서 이승만의 유력한 경쟁자로 부상하던 한길수는 조선의용대 미주후원회 및 그 후속단체인 조선민족혁명당 미주지부와 연계하여 이승만의 중경임정 승인 노력에 제동을 걸고 있었다. 이외에도 대한인국민회가 주도한 재미한족연합위원회(United Korean Committee in America)와 이승만의 외교활동을 측면 지원하고 있던 한미협회(Korean-American Council), 그리고 중경임정이 직접 미국 정부에 제출한 문건들도 찾아볼 수 있다.

 둘째는 미국 정부의 공문서들로서 국무부에서 작성했거나 국무부에 접수된 다른 행정부처와 재외공관의 문서들이다. 이들 문서에서 다루고 있는 문제들은 복잡다단하지만, 그 중 가장 많이 거론되는 것은 중경임정을 포함한 한인망명단체들의 승인 문제이다. 이와 관련하여 국무부는 재미한인단체 및 주요 인물들의 동향을 개인 면담, 편지 검열, 정보기관의 사찰 등의 다양한 방법으로 예의 주시하는 한편, 중경임정의 실태를 주중 미대사관을 통하여 수시로 보고받고 있었다. 또한 국무부는 전후 한국 독립과 임시정부의 승인문제를 놓고 중국 국민당 및 영국 정부의 입장을 타진하고 있었다. 이외에도 한반도 내에서의 무장 봉기의 가능성과 더불어, 전술적 차원이기는 하지만 국외한인들의 인적 자원을 미국의 대일전쟁에 활용하는 문제가 신중히 검토되고 있었다.

 전체적으로 볼 때, 태평양전쟁기 미 국무부문서들은 일정한 체계 없이 무척 산만하다는 느낌을 줄 뿐만 아니라 전후 한국문제에 대한 미국 정부의 기본입장이나 또는 정책결정 과정에 있어 국무부와 다른 부처간 견해 차이를 보여주는 문건들이 쉽게 눈에 띄지 않는다. 이 때문에 공개된 국무부 일반문서들은 “정부의 온갖 종류의 쓸모없는 하찮은 서류들을 내버리는 쓰레기장”이라는 극단적인 비판이 제기된 바도 있다. 미국에서 외교문서를 관장하는 담당자들도 국무부 문서분류 체계의 결함과 더불어 결정적인 문서 사본들이 종종 빠져 있음을 인정하고 있다(Jack Saunders, ibid., p.317). 이러한 결점들은 국립문서관에 소장된 다른 정부 부처의 문서들에 의하여 보완될 수 있겠지만, 이들 문서 또한 소정의 절차를 거쳐 공개되는 만큼 완전한 자료의 복원이란 사실 기대하기 어려운 일이다. 따라서 우리는 어차피 공개된 문서들을 가지고 꼼꼼히 검토하는 가운데 의도적이었든 아니면 본래 그러한 것이었든 지워진 공백 부분들을 메꾸어 나갈 수밖에 없다.

 이와 같은 전제 하에 우리가 태평양전쟁기 미 국무부문서들을 통하여 얻을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첫째는 중경임정과 주미외교위원부가 추진했던 대미 승인교섭의 구체적 내용이다. 주지하듯이 임정은 출범 직후부터 외교노선에 치중했고, 특히 미일전쟁이 발생한 이후에는 미국의 승인을 얻기 위하여 최대의 노력을 기울였다. 대일전쟁을 주도하던 미국이 전후 한국문제에 결정적인 영향력을 미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임정과 주미외교부가 대미 승인교섭에 얼마만큼 집요한 노력을 기울였는가 하는 것은 이들의 청원문 분량에서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이들 문서들을 종합적으로 검토하게 되면 가장 중요한 고비에 임정 승인외교가 지녔던 특징과 그 한계 또는 문제점들을 파악할 수 있다.

 둘째, 미 국무부는 태평양전쟁 발발 후 현안으로 대두된 국외한인단체들의 승인 여부를 놓고 중국 국민당 및 영국 정부와 긴밀히 협의했던 바, 그 논의 과정에서 서로 의견이 달라지는 부분을 면밀히 검토해 보면, 그들 3정부가 한국문제를 어떻게 처리하려고 했는가를 짐작해 볼 수 있다. 왜냐하면 특정 한인단체의 승인 문제는 전후 한국의 독립 및 새로 등장할 집권세력의 성격과 직결된 민감한 사안이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국무부문서들의 상당 부분이 한국의 임시정부 승인 문제와 관련되어 있었던 것도 이 문제가 갖는 상징적 중요성을 보여준다고 하겠다.

 셋째로는 태평양전쟁기 미 국무부가 입수하고 있던 한국관련 정보의 분량과 그 질에 대한 파악이 가능하다. 사실 우리는 그동안 미국이 국외한인의 독립운동과 한반도 내의 사정에 대하여 얼마만한 정보를 갖고 있었고 또 어떻게 인식하고 있었는가 하는 문제를 거의 간과해 왔다. 그러나 이 문제에 대한 충분한 검토 없이는 전쟁 종결 이전 미국의 대한정책 수립 과정을 제대로 설명하기 어려울 뿐 아니라 전후 한반도에 진주한 미군정과 한국민의 관계에 대해서도 겉으로 드러난 현상으로 밖에 달리 이해할 길이 없다. 한편으로 중국주재 미 대사관의 임정에 대한 각종 보고서들은 이 시기 임정의 실상을 파악하는 데 적지않은 도움을 줄 수 있다.

 본 자료집의 제1부에는 태평양전쟁기 미국 국무부문서 가운데 중경주재 미 대사관의 임정에 대한 보고서들만을 선별ㆍ수록하고 있다. 1910년 8월 일본의 한국병합 이후 미국은 한국문제를 일본의 ‘내정문제’로 간주해 왔다. 3ㆍ1운동기 미국 내 기독교 단체와 일부 언론, 그리고 의회 일각에서 한국민의 거족적인 독립 요구에 대하여 동정적인 태도를 보였지만 미국 정부만큼은 어떤 공식 반응도 내놓지 않았다. 동아시아-태평양문제를 포괄적으로 다루었던 워싱턴회의(Washington Conference, 1921. 11. 12~1922. 2. 6) 기간에 상해임정은 ‘한국대표단(Korean Mission)’을 내세워 회의 참가를 요청했지만, 미국측은 임정의 존재 자체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러한 미국의 태도는 태평양전쟁 발발 이후 달라졌다. 전후 동아시아질서의 재편과 관련하여 한국문제의 근본적인 해결책을 모색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한편 중경의 임정과 워싱턴의 주미외교위원부는 미일전쟁이 발발하자 즉각 임정 승인과 광복군에 대한 지원을 요구하고 나섰다. 이제 미국으로서는 새로운 대한정책의 수립을 위하여 임정과 광복군의 실체부터 먼저 파악해야만 하는 상황에 직면했다.

 1941년 12월 22일 미 국무부는 중경주재 미국대사 고스(Clarence E. Gauss)에게 임정의 실제 세력과 조직, 그리고 임정에 관한 중국 국민당정부의 태도 등에 대하여 즉각 조사하여 보고하도록 지시했다. 이후 미국 정부의 임정과 광복군에 대한 정보 수집은 두 가지 경로를 통하여 이루어졌다. 첫째는 중국 현지에 파견된 자국 외교관과 군사 · 정보 관계자들이고, 둘째는 미국 내 한인단체 및 개인들을 통해서였다. 그 가운데 가장 중요한 통로는 중경주재 미국 대사관이었다. 이들은 임정의 동태를 직접 살필 수 있었고, 필요하다면 임정 요인 및 중국 정부의 책임자와도 접촉했다. 미 대사관은 한국인 ‘정보원’을 고용한다든가 중경에서 발간되는 신문과 중국 정부기관의 공보, 임정과 한인정당들의 선전물을 입수하는 등 자체적인 정보수집 활동을 벌이기도 했다. 중경의 미 대사관이 임정에 대하여 수집한 정보의 양은 어느 정도이며 그 내용은 어떠한 것들이었을까. 먼저 워싱턴의 국무부에 접수된 중경 대사관의 보고 건수를 보면 다음과 같다.

 중경주재 미 대사관의 임정에 관한 보고(1940. 1~1945. 8. 15)

년 도194019411942194319441945합 계
건 수0125(13)12(4)14(5)6(5)58(27)

* 괄호 안은 연도별 총 건수 중 전보(telegram)의 숫자이다.

위의 통계를 보면 알 수 있듯이 1940년에는 단 한 건의 보고도 없었다. 1941년에는 한 건이 있는데, 이것은 태평양전쟁이 일어난 뒤였다. 이때 미국대사 고스는 임정 외무부장 조소앙이 루즈벨트 대통령에게 보내는 편지를 국무부에 전달했다. 조소앙은 루즈벨트 대통령에게 보낸 편지에서 태평양전쟁에 대한 ‘자유한국(Free Corea)’의 입장을 6개항으로 정리하여 제시했다. 여기에는 (1) 한국민은 반침략 캠페인에 동참하며 추축국에 대하여 전쟁을 선포한다, (2) 한국이 일본과 체결한 ‘합방조약’ 및 기타 불평등조약은 무효이다, (3) 루즈벨트(Franklin D. Roosevelt) 대통령과 처칠(Winston Churchill) 수상의 ‘공동선언’ 즉 대서양선언을 전적으로 지지한다는 등의 항목이 포함되었다

1942년이 되면 미 대사관은 국무부의 긴급 훈령에 따라 임정에 대한 정보 수집에 착수했다. 그 결과 한 해 동안 25건(13건은 전보) 이상의 보고가 있었다. 국무부는 이를 통하여 중경임정의 상황을 대략적이나마 파악할 수 있었다. 1943년에는 보고 건수가 전년도의 절반 수준으로 떨어졌다. 전보의 경우에는 3분 1로 줄어들었다. 임정에 대한 긴급 보고의 필요성이 전년도에 비해 많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이는 달리 말하면 임정의 조직이나 활동에 그다지 큰 변화가 없었음을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이러한 사정은 1944년에도 비슷하다. 1945년에는 일본이 패전을 선언한 8월 15일까지 6건의 보고가 있는데 그 중 5건이 전보였다. 전쟁 종결을 앞두고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중경에서 올라온 보고서들의 전체적인 내용을 살펴보면 미 대사관은 다음 두 가지 사항에 관심을 갖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첫째는 임정이 그들의 주장대로 한국민 또는 한국의 독립운동을 ‘대표’한다고 볼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둘째는 임정과 중국 국민당정부와의 관계였다. 전자에서는 임정 조직과 내부상황, 광복군의 규모와 활동, 임정과 다른 지역(즉 국내와 만주, 소련 영내)에서 활동하는 독립운동 단체들과의 관계가 중시되었다. 후자와 관련해서는 임정에 대한 중국 정부의 간섭과 통제가 있는지, 있다면 그것은 어떠한 것인지, 중국은 과연 임정을 승인할 의사가 있는지 등에 주의를 기울였다.

첫번째 문제에 대하여는 임정 외무부장인 조소앙의 이야기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는 1942년 2월 4일 미국대사 고스에게 ‘한국임시정부’라는 제목을 단 문서를 제출했다(#895.01/ 81, Tjosowang→Gauss, 1942. 2. 4, “The Korean Provisional Government”). 14쪽 분량의 이 문서는 서문, 임시정부의 조직, 국무원과 임시의정원, 임시정부와 국내운동, 임시정부와 만주의 한국인들, 임시정부와 미주한인사회, 임시정부와 소련 내의 한인들, 임시정부와 한국독립당, 임시정부와 광복군, 임시정부와 연합국들, 한국의 주요 독립운동자들, 태평양전쟁과 한국 등 총12개 항목으로 구성되었는데, 그 요지는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1919년 3 · 1운동의 결과로 탄생한 한국임시정부는 국내외 독립운동세력들로부터 광범한 지지를 받고 있다. 특히 국내에서 혁명적 분위기를 조성하기 위하여 천도교, 기독교, 불교, 대종교 등 반일적 성향이 강한 종교 지도자들과 은밀히 접촉하고 있다. 현재 임시정부는 약 2만명의 병력을 보유하고 있다. 외부의 군사지원만 있으면 병력을 10만명까지 늘릴 수 있다. 미주한인들은 정신적, 물질적으로 임시정부를 적극 후원하고 있다. 소련 영내에 있는 2개 사단의 한인부대도 유리한 여건만 조성된다면 임시정부의 지휘체계 속에 편입시킬 수 있다. 임시정부의 당면과제는 3개 사단 이상의 정예부대를 훈련시켜 대일전쟁에 적극 참여하는 일이다. 이 문제의 해결은 연합국의 지원 여부에 달려있다. 미국이 무기대여법에 의하여 원조를 제공한다면, 임시정부는 한국민의 잠재된 혁명능력에 활기를 불어넣어 태평양전쟁에서 민주진영의 최종 승리를 결정짓는데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주장에 대하여 미 국무부의 태도는 부정적이었다. 즉 조소앙이 제출한 문서에서는 3 · 1운동 후 임정을 중심으로 한 한국독립운동의 지속성과 통일성을 부각시키려고 했지만 설득력이 떨어지며, 한국의 기독교인이라든가 만주, 중국본토, 시베리아, 미주에 거주하는 한국인들의 숫자도 과장함으로써 실제와 다르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고 했다. 국무부는 임정이 스스로 견고한 조직과 독립운동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을 갖고 있지 못하다는 인상을 받았다. 그들이 조소앙이 제출한 문서에서 흥미를 느낀 것은 임정과 광복군 지도자들-김구, 조완구, 조소앙, 조성환, 이시영, 이청천, 이승만, 유동열, 이범석 등-의 평균 연령이 62세에 달한다는 점이다(#895.01/81, 극동국 Salisbury의 메모, 1942. 3. 17).

1942년 3월 19일 미 대사관의 서비스(John S. Service)는 중국 외무부의 亞東司 司長인 양윈주(楊雲竹)를 방문하여 한국문제에 대하여 서로의 의견을 교환했다. 이때 양윈주가 중국관내 한인들의 활동에 관한 이야기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895.01/114, John S. Service, “Memorandum for the Ambassador,” 1942. 3. 19).

 (1) 중국정부는 한국인들의 독립 열망에 대하여 동정하지만 어떤 특정단체에 대한 승인은 주저하고 있다. 한인망명단체들의 분열로 과연 어느 단체가 한국민을 대표하는지 쉽게 판단을 내릴 수 없기 때문이다.

 (2) 중국관내의 한인들은 두개의 주요 그룹, 즉 조선민족혁명당(이하 민혁당)과 한국독립당(이하 한독당)으로 나뉜다. 민혁당은 다소간 좌익적인 경향을 띄고 있으며 시베리아의 한인들(약 2만명)로부터 후원을 받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임정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고 있다. 한독당은 뚜렷한 정치색이 드러나지 않으며 재미한인들의 지원에 힘입어 임정을 떠받치고 있다.

 (3) 민혁당과 한독당은 각각 조선의용대와 광복군이라는 무장조직을 거느리고 있다. 김약산(김원봉)의 지휘를 받는 조선의용대의 경우, 그 구성원이 얼마나 되는지는 잘 알려지지 않고 있지만 그렇게 대단한 것 같지는 않다. 임정 산하의 광복군은 대대급으로 추정되는 5개의 단위부대를 거느리고 있다고 주장하는데, 西安에 있는 한 부대만이 200명 정도의 병력을 갖고 있을 뿐 나머지 4개 부대는 문서상으로만 존재한다. 조선의용대와 광복군은 거의 대부분 일본군에 의하여 징집된 한적 사병들 가운데 중국군에게 포로가 되었거나 탈주한 병사들로 충원되고 있다. 이들은 실제 전투에 참가하는 대신 주로 선전 목적에 활용되고 있다.

이러한 설명은 조소앙의 주장과는 달리 임정의 대표성을 부정하고 있을 뿐 아니라 광복군의 규모와 활동에 대해서 어떠한 기대도 하기 어렵게 만들었다. 미 대사관은 나중에 김원봉을 통하여 조선의용대가 300명, 광복군이 200명 정도의 병력을 갖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그리고 임정이 만주에서 활동하는 한인 게릴라부대라든가 국내 조직과 연결되어 있다는 확증을 발견하지 못했다. 1942년 말이 되면, 미대사관은 임정과 광복군의 실상을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었다.

두번째 문제, 즉 임정과 중국정부와의 관계에 대하여 미 대사관은 어떠한 정보들을 입수하고 있었을까. 1942년 1월 7일 고스 대사는 ‘비공식적’이라는 단서를 달고 조소앙과 첫 회견을 가졌다. 이때 고스는 먼저 임정이 중국으로부터 승인을 받았는지에 대하여 물었다. 그러자 조소앙은 아직 승인을 받지 못했다면서 아무래도 중국은 전후에 한국을 그들의 ‘종주권’(suzerainty) 하에 두려는 욕구를 갖고 있는 것 같다고 했다. 고스는 국무부에 보낸 보고서에서 조소앙이 다른 사람들에게는 임정이 곧 중국으로부터 승인을 받게될 것처럼 말해왔다는 점을 상기시켰다. 고스는 또 임정이 장졔스(蔣介石) 총통으로부터 자금지원을 받고 있다는 소문을 확인하기 위하여 조소앙에게 질문을 던졌지만 역시 제대로 된 답변을 듣지 못했다고 했다. 고스는 조소앙이 임정에 대한 미국의 승인과 재정적 군사적 지원을 요청하면서도 정작 임정에 대한 그의 설명은 모호하고 불만족스러웠다고 보고했다(#895.01/81, Gauss→Hull, “The Provisional Government of the Republic of Korea,” 1942. 2. 12).

그 해 3월 19일 미 대사관의 서비스가 중국 외무부를 방문하여 亞東司 司長인 양윈주를 만났을 때, 그는 중국정부가 한인단체들의 통합을 위하여 직접 개입하고 있음을 시사했다. 즉 최근 중국군사위원회가 광복군을 승인했는데 이것은 광복군과 조선의용대를 하나로 합치기 위한 ‘예비조치’이며, 그 다음에는 한인정당들의 통합이 추진될 것이고, 그리고 최종단계에서는 임정 또는 그것을 대체할 새로운 통합체의 지도자들이 과연 한국민의 지도자가 될 수 있을지에 대한 판단을 내리게 될 것이라고 했다. 요컨대 중국은 그들의 통제 또는 영향력 하에 있는 한인무장부대와 정당들을 통합시킨 뒤 그것을 한국의 임시정부로 승인하고자 했던 것이다(#895.01/114, John S. Service, “Memorandum for the Ambasador,” 1942. 3. 19).

같은 해 5월 15일 중국군사위원회는 ‘직권’에 의하여 광복군과 조선의용대의 통합 편성을 명령했다. 이에 따라 조선의용대는 광복군의 제1지대로 편입되었다. 미국측에 예고했던 대로 중국정부의 첫 조치가 실효를 거둔 셈이었다. 그 해 10월부터는 조선민족혁명당, 조선혁명자연맹, 조선민족해방동맹 등 좌파 및 무정부주의자로 분류되는 정당의 소속원들이 임시의정원에 참여했다. 민혁당의 김규식과 장건상은 임정의 국무위원으로 피선되었다. 임정 내의 좌우합작이 본궤도에 올랐다.

이러한 사태진전을 주시하던 미 대사관은 11월 18일 민혁당의 총서기이자 광복군 부사령인 김원봉을, 11월 23일에는 한국독립당의 간부이자 임정 외무부와 선전부의 책임을 맡고 있던 조소앙, 안원생(David An), 엄항섭(David Um)을 대사관으로 초치하여 만났다. 경쟁적인 두 정당의 입장을 함께 들어보겠다는 의도였다.

이때 김원봉과 조소앙은 약속이나 한듯이 중국정부의 한국독립운동에 대한 간섭과 통제에 대하여 불만을 토로했다. 김원봉은 중국이 자신들의 목적을 위하여 한국독립운동을 이용하려 한다고 비판하면서, 그 증거로서 1940년 11월 중국측이 임정에 제시했다는 ‘9개조 요구(nine demands)’를 들었다. 김원봉은 또 중국이 임정에 대한 재정지원을 빌미로 쑨원(孫文)의 삼민주의를 기본적인 정치철학으로 채택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고 말했다.

조소앙은 다음과 같은 요지의 말을 했다. “임정은 중국 내 300만 한인애국자들을 활용하여 무장부대를 조직하려는 계획을 갖고 있었지만, 중국측의 원조 약속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고 한국인들에게 독자적인 군대조직을 허용했을 때 이들이 ‘또 다른 8로군(another Eighth Route Army)’이 되지 않을까 하는 국민당의 우려 때문에 현재까지 아무런 진척도 보지 못했다. 중국은 한인들의 ‘분열’을 임정에 대한 승인거부의 명분으로 삼고자 하며 전후에도 한국에 대한 정치적 지배를 관철시키려는 계획을 갖고 있다. 따라서 이번 임시의정원 회의에서는 한국독립운동의 본부를 미국으로 옮기는 것이 더 낫지 않겠는가 하는 의견까지 나왔다”고 했다(#895.01/199, Gauss→Hull, “Koean Independence Movement,” 1942. 11. 25).

1942년 12월 7일 엄항섭은 ‘한국광복군 9개 행동준승’의 전문을 담은 문서(“Guide for Activities of Korean Independence Army”)를 미대사관에 전달했다. 고스는 이 문서를 국무부에 보고하면서, “그들[임정]은 이제 힘들었던 중국의 속박에서 벗어나려고 하고 있다. 필요하다면 그들은 정부를 워싱턴으로 옮기려는 의도도 갖고 있다”고 보고했다(#895.01/20, Gauss→Hull, “Korean Independence Movement,” 1942. 12. 11).

그로부터 1년 뒤인 1943년 12월 1일 카이로선언이 발표되자 임정은 기쁨와 동시에 불안감을 갖게 되었다. 연합국 열강(미국ㆍ영국ㆍ중국)의 전후 한국독립 약속에는 고무되었지만, ‘적절한 시기(in due course)’라는 단서조항이 미국의 언론에서 이미 보도되었던 신탁통치와 연결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었다. 12월 4일 한독당과 민혁당대표들은 미대사관을 방문하여 ‘in due course’에 대한 정확한 해석을 요구했다. 그들은 이때 전후 한국이 중국의 ‘위임통치’ 하에 놓이게 될 것이라는 소문이 떠돌고 있다고 전하면서 중국측 의도에 대한 강한 의구심과 두려움을 나타냈다(#895.01/301, Gauss→Hull, 1943. 12. 7).

이런 가운데 중경임정은 연립정부의 구성을 서둘렀다. 1944년 4월 민혁당이 내각에 참여하고 김규식이 부주석으로 선임되었다. 임정을 매개로 한 좌우합작운동이 결실을 맺게 되자, “우리들의 임시정부는 대내적으로 일체 반일세력을 통일적으로 지도할 수 있고, 대외적으로는 전민족의 의사와 권력을 대표하게” 되었다는 선언문이 발표되었다.

대사관을 통하여 저간의 진행상항을 보고받은 미 국무부 극동국은 다음과 같은 잠정 결론을 내렸다. (1) 5개월간의 ‘막다른 협상’ 끝에 중경의 한인들은 마침내 한국임시정부의 정책과 인선에 대한 합의에 도달했다. 그러나 ‘한인 정보원’이 지적했듯이, 이면에서의 내부알력은 계속되고 있다. 새로운 통합은 아직 시험 중이며 유효할 것 같지는 않다. (2) 중국정부는 다시 압력을 넣었다. 그 정보원에 따르면, 국민당 조직부장(朱家驊)은 한인당파들에게 통합을 이루지 못하면 그들에게 지급되는 보조금을 끊겠다고 통보했다. (3) 새로운 정부는 여전히 한국독립당에 의하여 지배받고 있지만, 다른 당 대표들의 참여가 좀더 확대되었다. 이제 국무위원회와 내각에는 다른 당 출신들이 포함되어 있다. (4) 신정부에서 민혁당의 증대된 영향력은 미국에 대한 즉각적인 임정 승인 압력을 완화시키는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 그동안 민혁당은 한독당만큼 승인을 재촉하지는 않았다. 따라서 한국의 임시정부는 앞으로 물질적 지원과 군사원조를 확보하는데 주력할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895.01/337, 극동국 McCune의 메모, 1944. 6. 5).

이상의 몇가지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중경의 미 대사관은 다양한 경로를 통하여 임정과 광복군의 실상, 주요 정당과 인물들의 동향, 임정과 중국정부와의 관계 등에 대한 정보를 수집했고, 이를 바탕으로 그들 나름의 판단과 예측을 하고 있었다.

여기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점에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첫째로 미 대사관은 김구가 이끄는 한국독립당과 김규식ㆍ김원봉이 주도하는 조선민족혁명당을 ‘동등’하게 대우했다. 이러한 그들의 태도는 국무부가 미국에서 이승만과 한길수를 다루는 태도와도 일치했다. 둘째로 미 대사관은 국무부의 임정 불승인정책에 따라 자신들에게 주어진 책무를 다했다. 그들은 임정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자신들이 필요로 하는 정보를 입수했고, 중국 정부가 독자적으로 임정을 승인하려는 움직임을 견제했다. 이 중에서도 특히 후자가 중요했다. 중국의 임정 승인은 미국의 대한정책 기조를 흔들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 자료집의 제2부에는 태평양전쟁기 미국의 정보조정국(Coordinator of Information, 이하 COI로 줄임)과 그 후신인 전략첩보국(Office of Strategic Services, 이하 OSS로 줄임)의 중경임정과 광복군에 대한 보고서가 수록되어 있다. COI는 루즈벨트(Franklin D. Roosevelt) 대통령의 지시에 의하여 국가안보와 관련된 정보 수집 및 분석을 전담하기 위하여 1941년 7월에 만들어졌다. 도노반(William J. Donovan)을 책임자로 한 COI는 이듬해 6월 13일에 합동참모부 산하의 OSS로 재조직되었다. OSS는 적국에 대한 정보수집 외에도 적 후방지역에서 파괴, 교란, 게릴라전 등을 포함한 특별활동을 계획하고 실행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받았다.

미국은 임정에 대한 불승인정책을 고수하면서도 대일전쟁에 한국인 무장조직을 활용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전쟁 초기부터 호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모든 인적 · 물적 자원을 전쟁에 투입해야 할 필요성과 대륙방면에서 일본 본토와 그들의 점령지역에 접근하고자 할 때 한반도가 지니는 전략적 중요성 때문이었다. 이러한 이유로 COI-OSS는 국외거주 한인들을 이용한 소규모 첩보 및 침투공작에서부터 한반도 내 무장봉기에 이르기까지 그 가능성들에 대하여 폭넓게 검토했다.

한인독립운동가들 중 OSS에 가장 먼저 접근한 사람은 워싱턴에서 활동하던 주미외교위원장 이승만이었다. 그는 육군성 정보참보부 소속으로 COI의 중요 직책을 맡고 있던 굿펠로우(M. Preston Goodfellow)와의 친분을 최대한 활용했다. 굿펠로우는 1942년 8월 대령으로 승진하면서 OSS의 부국장이 되었다. 이승만이 OSS와 벌인 첫 사업은 미국내 한인들을 비밀리에 모집하여 특수훈련을 시키는 일이었다. 초기에는 한인 50명으로 출발하지만 나중에는 그것을 대대급 규모(500명 정도)로 키워 ‘자유한인부대(Free Korean Legion)’를 창설하고자 했다. 이 부대는 중국 현지의 미군과 광복군을 연결시키는 매개 역할을 해 줄 수 있는 것으로 기대되었다. 이승만은 한ㆍ미간의 군사협력이 임정 승인의 발판이 될 수 있다고 보았다.

한편, COI-OSS는 미주와 중국관내 한인들의 인적자원 활용에는 호의적이었지만 이것이 임정 승인과 같은 정치적 문제와 결부되는 것은 엄격히 경계했다. 그것은 기밀을 요하는 군사작전에 방해가 될 뿐만 아니라 한국에 대한 이해관계가 얽혀있던 연합국 열강 사이에 복잡한 문제를 야기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OSS는 주미외교위원부와 중경임정을 통하지 않고 소수의 한인들을 모집하여 직접 훈련시키는 비밀작전을 세웠다. 이른바 납코작전(Napko Project)과 독수리작전(Eagle Project)이 그것이다. 전자는 재미한인과 전쟁포로들을, 후자는 광복군과 일본군 부대에서 탈출한 학도병 등을 선발대상으로 한 특수작전이었다. 납코작전에는 ‘특공대원’으로 12명이, 독수리작전에는 58명의 한국인이 참가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모두 70명인데, 그들은 전쟁이 끝날 무렵에야 훈련에 들어갔기 때문에 대일전쟁에는 투입되지 못한 채 해방을 맞이했다.

미국 국립문서관의 OSS자료 담당관 맥도날드(L. H. McDonald)에 따르면, 1945년 9월 현재 OSS는 약 8,100평방 피트(feet)의 문서를 소유했던 것으로 추측된 바 있다. 이를 매수로 환산하면 대략 2천만 매가 넘는데, 그 중 절반 정도가 폐기되었다. 1995년 당시 OSS문서는 약 4000평방 피트로 평가되는데 이 가운데 3500피트가 기밀해제 되었다고 한다(방선주, 「미국 OSS의 한국독립운동 관련자료 연구」,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편, 『해방전후사 사료 연구』 Ⅰ, 도서출판 선인, 2002).

기밀에서 해제된 OSS문서 중 한국과 관계된 문서들은 재미사학자 방선주 박사에 의하여 일차 수집되어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자료집으로 출간된 바 있다(『한국독립운동사』 자료 22~25, 1993~1994). 여기에는 주로 태평양전쟁 막바지 한-미간 ‘군사합동’ 작전과 관련된 문서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지만, 한편으로는 임정에 대한 COI-OSS의 인식과 평가를 엿볼 수 있는 문서들도 꽤 포함되어 있다. 이들 문서를 일별해 보면 국무부와 COI-OSS의 임정 인식에는 큰 편차가 없다는 것을 알 수 없다.

본 자료집에는 COI-OSS문서 중 체계적인 보고서 형태를 갖춘 16건의 문서가 선별ㆍ수록되어 있는데, 임정과 광복군 지도자들에 대한 평가라든가 전후 러시아의 한국에 대한 영향력 행사의 가능성에 대한 분석과 예측들은 흥미롭다. 예컨대 1945년 2월 21일에 임정소재지인 중경에서 보고된 「한국인들과 독립운동(Koreans and their Independence Movement)」이라는 문건(5쪽)을 보면, 임정 각원들의 간단한 이력을 소개하는 가운데 김구에 대하여 평가하기를, “그는 지난 12년간 임정의 주석(chairman)을 맡아 왔고 현재 한국독립당의 집행위원이기도 하지만, 이런 주요 직책에도 불구하고 실질적으로 권력은 거의 지니지 않고 있다”고 했다. 반면에 조완구에 대하여는, “그는 한국독립당에서 가장 활동적이며 집행위원 중 한 사람이다. 작년에 임정의 재정부장이 되었다. 그는 다른 어떤 사람보다 한국독립운동에 해를 끼쳤으며 임정은 대부분 그의 통제 하에 있다”라고 했다. 이런 평가를 하게 된 이유랄까 근거는 제시되지 않고 있는데, 아마도 임정의 존재와 활동에 대하여 비판적이던 누군가가 그러한 정보를 제공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1945년 2월 27일 중경에서 보고된 「한국의 장래(Future of Korea)」라는 문건을 보면, “우리는 매우 믿을만한 출처로부터 소비에트 러시아가 일본의 패전 후 한국의 점령과 통제에 대한 계획을 이제 끝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대략 100,000명의 한국인에다 일부 중국인과 회교도까지를 포함한 것으로 추정되는 군대가 지난 3년간 중앙시베리아에서 훈련을 받아 왔으며, 지금은 언제든 동원할 수 있도록 훈련되고 장비가 갖추어져 명령만 떨어지면 한국으로 이동할 준비가 되어 있다”라고 되어 있다. 이 뿐만 아니라 러시아는 군대와 함께 한국으로 들어가 이 나라의 민정을 접수할 민간조직―이 조직은 온전히 한국인들만으로 구성됨―까지도 완벽하게 만들었다고 했다. 요컨대 러시아는 군사적, 행정적으로 한국을 점령할 채비를 끝냈다는 것이다.

전후 한국문제에 대한 소련의 개입 가능성과 그에 대한 우려는 태평양전쟁 발발 초기부터 중국 국민당정부와 임정측에서 제기된 바 있는데, 전쟁 후반기로 갈수록 그러한 우려는 더욱 커졌다. OSS의 보고서에는 바로 이러한 정황들이 반영되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문제는 1945년 2월의 시점에서 소련이 전후 한반도를 접수할 구체적인 계획과 준비를 완료했었는가 하는 점이다. 다시 말하면 당시 OSS에서 입수한 정보들이 얼마만큼 사실에 근접했었는가 하는 것이다. 이를 확인하기 위해서는 미국이나 중국측 자료가 아니라 소련 정부 및 군부의 당시 한국문제에 대한 인식과 그들 나름의 해결 방안을 보여주는 문서들이 필요하지만, 아직 이 부분에 대한 자료 발굴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태평양전쟁기 미 국무부문서라든가 COI-OSS문서들을 놓고 볼 때, 당시 미국은 대한정책 수립에 있어 몇 가지 한계를 갖고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예컨대 미국은 재미한인단체 및 중경임정의 요구 사항과 그 내부 사정에 대하여 나름대로 파악하는 바가 있었지만, 소련 및 만주 접경지대와 중국관내 공산당 관할구역에서 활동하고 있던 한인단체들과 무장조직에 대하여는 무척 소략한, 또는 시기가 지났거나 과장된 정보만을 갖고 있었다. 그것은 미국이 이 지역에 독자적인 정보망을 갖고 있지 못한 데에서 비롯되었다. 한편으로 일제 식민통치와 한반도 내의 사정에 대하여는 그 이전에 축적된 지식 및 정보들과 귀환 선교사들의 증언을 통하여 어느 정도 알고 있었지만, 과연 한국민 특히 일반 민중의 불만과 요구들을 얼마만큼 이해하고 있었는지는 미지수이다.

물론 해방 이전 미국이 대한정책을 수립함에 있어 가장 신경을 썼던 부분은 한국민의 다수 의사가 아니라 연합국 열강의 한반도에 대한 관심과 이해관계였다. 그런데 이 문제에 있어서도 미국은 정치적, 군사적으로 한반도에 직접적인 영향력을 미칠 수 있던 소련의 의도를 정확히 파악하고 있지 못했다. 소련의 대일참전이 마지막 순간까지 유동적이었기 때문에 미국은 그 이후의 사태 진전을 예측하기가 어려웠다. 소련의 참전 후 불과 일주일 만에 일본이 무조건항복 선언을 했던 데에서도 그러한 예측의 어려움을 짐작할 수 있다.

요컨대 일본의 패전 후 한국문제가 미국의 의도대로 순조롭게 풀려나가지 않았던 것은, 그들의 정책 결정에 있어 한국민의 다수 의사를 이해하고 그것을 반영시키려는 문제의식이 결여되었다는 점과 더불어 소련의 한국문제에 대한 개입을 어느 정도 예견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에 대한 적절한 견제 수단과 대안을 갖추고 있지 못했던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한편 태평양전쟁기 미국의 임정 불승인정책과 관련하여 우리는 임정의 주체적 역량과 한국민족운동 내부의 한계 내지 문제점들에 대하여도 냉정히 따져보아야만 한다. 무엇보다도 중경임정은 인적 물적 기반이 취약했다. 1940년대 전반기 중경거주 한국인은 300~400명 정도였다. 이들 대부분은 임정과 관련을 맺고 있던 독립운동자와 그 가족들이었다. 이들은 중국 국민당정부로부터 거처와 생필품을 제공받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임정이 독자적으로 사업을 벌이거나 광복군의 확대 · 발전을 꾀하기는 어려웠다. 임정은 결국 중국 정부의 재정적, 군사적 지원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었는데, 이것이 대외적으로 임정의 위상을 약화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본 자료집을 통하여 우리는 해방 이전 미국의 임정에 대한 인식과 불승인정책의 배경을 살피는 동시에 임정 자체가 갖고 있던 문제점들에 대하여도 객관적으로 검토할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기를 기대한다.

고정휴(포항공대 인문사회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