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제

해 제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 28 · 29 · 30의 세 권은 한인애국단 관련 자료를 수록하였다. 韓人愛國團은 1931년 말 특무공작을 전개하기 위해 조직한 의열투쟁 단체이다. 임시정부는 1930년대에 들어서면서 독립운동을 활성화시킬 방안으로 의열투쟁을 전개하기로 하였고, 이를 위한 기구로 한인애국단을 조직하였다.

한인애국단은 金九가 주도하였다. 임시정부 국무회의에서 의열투쟁을 독립운동의 한 방법으로 결정하고, 그 구체적인 계획 및 실행에 관한 사항은 김구에게 일임한 것이다. 당시 김구는 임시정부의 재무장이면서, 상해교민단장을 맡고 있었다. 김구는 한인청년들을 중심으로 한인애국단을 조직하였고, 1931년 12월 13일 李奉昌을 한인애국단 제1호 단원으로 가입시켰다. 이후 한인애국단의 본격적인 활동이 시작되었다.

한인애국단은 1932년 1월 8일 이봉창의 일황저격의거를 필두로, 각종 의열투쟁을 전개하며 활동하였다. 2월과 3월에 상해의 부두에 정박해 있던 일본군함 出雲艦과 일본군 비행장의 폭파를 추진한 것, 4월 29일 윤봉길의사가 상해의 홍구공원에서 거행된 일황 생일인 천장절 및 상해전승기념식장에 폭탄을 투척하여 상해거류민단장 河端貞次와 육군대장 白川義則 등을 처단하는 의거를 결행한 것, 李德柱와 兪鎭萬을 국내로 보내 조선총독을 처단코자 한 것, 5월 柳相根과 崔興植을 大連에 파견하여 일본 관동군 사령관과 만철총재의 처단을 추진한 것 등이 모두 한인애국단에서 계획하고 결행한 활동이었다.

한인애국단의 활동범위는 일본과 국내, 그리고 중국 각지에 걸쳐 있었다. 일본에서는 동경 한복판에서 일황의 처단을 감행하였고, 국내에서는 식민지통치의 책임자인 총독의 처단을, 상해에서는 일본군사령부의 공략과 홍구공원에서 일제 요인들을 처단하는 의거를, 만주에서는 그 침략의 핵심 요인인 관동군 사령관과 만철총재의 처단을 추진한 것이다. 이러한 한인애국단의 활동은 일제의 침략전선을 따라 이루어진 것이고, 실행 직전에 좌절된 경우도 있었지만, 커다란 성과를 거두기도 하였다.

한인애국단의 자료는 다양하다. 한인애국단은 비밀결사로 조직되었고, 그 활동 또한 극비리에 전개되었기 때문에, 직접 생산한 문건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그렇지만 한인애국단의 활동과 관련한 자료들은 많이 남아 있고, 그동안 많은 자료들이 수집되었다. 자료는 크게 네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하나는 이봉창과 윤봉길의 선서문을 비롯하여 한인애국단 명의로 발표한 글과 격문, 이봉창 · 윤봉길의사의 추모 관련 글들이다. 둘째는 일제가 한인애국단의 활동과 관련하여 수집 보고한 정보자료들이다. 한인애국단의 활동과 관련하여 상해총영사가 외무대신에 보고한 문건들을 비롯하여, 일본 각 기관들 사이에 오고 간 보고문건 및 정보자료들이 전해지고 있다. 셋째는 이봉창 · 윤봉길의거가 결행되었을 때, 각국의 신문들이 이를 보도한 신문 보도기사들이다. 넷째는 의거를 결행한 후 일제에 피체되어 재판을 받은 기록이다. 이봉창 · 윤봉길, 유상근 · 최흥식 등이 의거 직후 일제에 피체되어 재판을 받은 각종 기록들이 그것이다.

이들 자료를 세 권으로 나누어 수록하였다. 제28권에는 이봉창과 윤봉길의 선서문을 비롯하여 한인애국단에서 발표한 글과 격문, 그리고 한인애국단의 활동과 관련하여 일제가 수집한 정보문서와 보고문건 등을 수록하였다. 제29권에는 이봉창 · 윤봉길의거에 대한 국내와 중국 신문의 보도기사를, 제30권에는 이봉창 · 윤봉길, 유상근과 최흥식이 피체되어 재판을 받은 재판 관련 기록을 수록하였다.

이 자료집은 이봉창과 윤봉길의 선서문을 비롯하여 한인애국단에서 발표한 글과 격문, 이봉창 · 윤봉길의사 추모식 관련, 한인애국단의 활동과 관련된 일제의 정보문건과 보고서 등을 수록한 것이다.

자료는 대부분 기존에 발간된 각종 독립운동 관련 자료집에서 발췌하였다. 특히 『白凡金九全集』에 한인애국단 관련 자료들이 많이 수록되어 있다. 이외에 이봉창 · 윤봉길의사에 대한 추도식 및 그와 관련된 자료들은 한국국민당에서 발행한 ≪韓民≫이란 잡지에서 수집하였다.

일제의 정보문건과 보고서들은 대부분 일본외무성 외교사료관에 소장되어 있다. 일례로 외교사료관에 「昭和 7年 1月 觀兵式에서의 還幸에 대한 朝鮮人 不敬事件」이란 문서철이 있는데, 이는 이봉창의거와 관련된 각종 정보문건 및 보고서들을 묶어 놓은 것이다. 일본외무성 외교사료관에 소장되어 있는 자료들은 그동안 국사편찬위원회와 국가보훈처 등 여러 기관에서 수집하였다. 수집한 자료들은 대부분 양 기관을 비롯하여 국회도서관 등 각 기관들에서 자료집으로 발간하기도 하였다.

일제는 한인애국단의 이봉창과 윤봉길 등의 의거가 결행되자, 이 의거와 관련하여 많은 정보를 수집하였다. 정보수집은 주로 상해총영사관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그리고 상해총영사는 수집한 정보를 외무대신에게 보고하였다. 보고는 이에만 한정되지 않았다. 의거에 대한 중국 측의 반향과 태도, 그리고 세계 각국의 동향 등을 비롯하여, 총영사관의 활동 등에 대해서도 보고하였다. 또 상해총영사 이외에도 중국 각처에 있는 영사관을 비롯하여, 헌병대 · 일본군 등이 보고한 것도 있다.

수집한 자료는 연월일 순으로 정리하여 수록하였다. 분류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였지만, 효과적인 방안이 없었다. 때문에 시간의 앞뒤가 서로 얽혀 있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면 1932년 1월 9일자에 일어난 일을 1월 15일에 보고한 경우 자료는 15일 순서에 배치하였다. 자료가 생산된 일자를 기준으로 배열하였기 때문이다.

Ⅰ. 한인애국단 명의로 발표된 자료

한인애국단은 일종의 비밀결사였고, 그 활동도 극히 비밀리에 전개하였다. 이러한 성격 때문에 한인애국단은 그 조직이나 활동과 관련하여 직접적인 문건을 거의 남기지 않았다. 한인애국단에서 생산된 직접적인 문건으로 현재 남아 있는 것은 크게 세 종류이다. 이봉창 · 윤봉길의사의 선서문, 한인애국단에서 발표한 격문, 그리고 김구가 주도하고 있던 한국국민당 기관지 ≪韓民≫에 수록된 이봉창 · 윤봉길의사의 추모식 관련 글들이 그것이다.

이봉창과 윤봉길의사의 선서문이 남아 있다. 이봉창과 윤봉길의사는 의거를 결행하기 직전 선서문에 서명하였다. 이봉창의사의 선서문은 “나는 赤誠으로써 祖國의 獨立과 自由를 回復하기 爲하야 韓人愛國團의 一員이 되야 敵國의 首魁를 屠戮하기로 盟誓하나이다”라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이봉창은 김구로부터 일본으로 향할 준비를 하라는 지시를 받은 후 1931년 12월 13일 행장을 갖추고 김구를 찾아갔다. 김구는 이봉창을 데리고 安恭根의 집으로 데리고 가 한인애국단에 입단시키고, 일황을 도륙하겠다는 선서문에 서명토록 하였다. 선서문은 김구가 미리 준비해 둔 것이었다.

윤봉길의사도 의거를 결행하기 직전 선서문에 서명하였다. 윤봉길의사가 선서문에 서명한 것은 의거를 결행하기 3일 전인 4월 26일이었다. 이날 윤봉길은 김구와 만나 이봉창의사가 했던 것처럼 똑같은 절차와 방법으로 “나는 赤誠으로써 祖國의 獨立과 自由를 回復하기 爲하야 韓人愛國團의 一員이 되야 中國을 侵略하는 敵의 將校를 屠戮하기로 盟誓하나이다”라는 내용의 선서문에 ‘宣誓人 尹奉吉“이라고 서명하였다.

한인애국단 명의로 발표한 격문과 글들도 일부 전해지고 있다. 한인애국단은 1932년 이봉창, 윤봉길, 유상근 · 최흥식 등의 활동 이후 별다른 활동을 전개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한인애국단의 조직은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고, 그 명의로 발표한 글들이 남아 있다. 1935년 12월 19일 구국운동에 나선 중국 학생대표들에게 보내는 글(「한인애국단에서 中華全國來京학생대표에 보내는 글」), 1936년 3 · 1절을 맞아 발표한 「3 · 1기념일에 대한 격문」, 1936년 4월 29일에 발표한 「한인애국단이 중국혁명동지에게 삼가 고하는 글」, 1936년 8월 29일 「國恥紀念日에 愛國同志에 檄함」 등이 그것이다. 12월 19일은 윤봉길의사가 순국한 날이고, 4월 29일은 홍구공원의거를 결행한 날이다. 윤봉길의사의 거사일과 순국일, 그리고 3 · 1절과 국치기념일 때 한인애국단 명의로 글을 발표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김구가 주도한 한국국민당에서 이봉창 · 윤봉길의사의 의거 및 순국일을 기하여 기념식을 거행한 자료들도 있다. 한국국민당은 1935년 11월 김구가 주도하여 결성한 정당이다. 한국국민당에서는 그 기관지로 ≪韓民≫을 발행하고 있었는데, 여기에 이봉창 · 윤봉길의사에 대한 기념식을 거행한 기사들이 수록되어 있다.

1932년 10월 10일 상해에서 이봉창의사의 추도식을 거행하였다는 내용이 『上海韓聞』 제16호에 게재되었다. 『上海韓聞』은 한국독립당에서 발행한 기관지였다. 상해총영사 石射猪太郞이 외무대신 內田康哉에 보고한 문건에 의하면, 『上海韓聞』에 10월 15일 오전 프랑스조계 愛多亞路의 모 사원에서 36명이 참석한 가운데 이봉창의사 추도식을 거행하였고, 그 식순과 추도사 내용이 실려 있다며, 그것을 별첨으로 첨부하였다. 그러나 실제로 추도식이 거행되었는지는 불분명하다. 상해총영사는 이를 보고하면서, 이는 李裕弼 등의 주창에 의해 민족주의자들을 자극하기 위해 허구의 보도를 한 것이라 하고 있다.

한국국민당이 결성된 후에는 이봉창의사의 의거일과 순국일을 맞이하여 기념식을 거행하고 있었다. 1936년 10월 15일자로 발행된 ≪韓民≫ 제8호에는 「이봉창의사의 취업4주년기념」이란 글과 함께, “자고로 韓人은 비범함이 으뜸이라. 어찌 영웅호걸이 진시황을 제거하려던 滄海公 뿐이랴. 침략의 원흉을 제거한 안중근이 앞장서자 이번에는 또다른 장사가 동경에 잠입하여 큰일을 꾸미더라. 승냥이와 호랑이처럼 흉악한 시위병에 둘러싸인 일황의 기세가 흉흉하기 이를데 없는데, 우레와 같은 소리를 내며 한 발의 폭탄이 하늘에서 떨어지니 천하가 놀라고 경악한 일황의 비명소리는 하늘에 닿더라”라는 중국인의 시를 싣고 있다(「이봉창의사의 죽음을 애도하며」). 그리고 다음해인 1937년과 1938년에 이봉창의거 기념식을 거행한 사실이 ≪한민≫ 11호와 16호에 수록되어 있다.

윤봉길의사의 의거일과 순국일에도 기념식을 거행하였다. 1936년 4월 29일에 발행된 ≪韓民≫ 제2호는 윤봉길의사의 홍구공원의거를 기념하는 특집호로 꾸며졌다. 1936년은 윤봉길의사의 의거 4주년이 되는 해였고, 「4 · 29기념의 의의」, 「4 · 29와 한인애국단」, 「4 · 29당시의 情形」, 「4 · 29기념 부록」, 「윤봉길의사의 略傳」 등의 글들을 싣고 있다. 그리고 제5주년이 되는 1937년에도 ≪한민≫ 제13호에 「4 · 29를 축하하자」라는 글을 실었으며, 제5주년과 제6주년에는 기념식도 거행하였다고 한다.

Ⅱ. 일제의 정보자료

이 자료집에 수록한 한인애국단 관련 자료 중 대다수는 일제의 정보자료이다. 일제는 1932년 1월 8일 이봉창의사의 일황저격의거와 4월 29일 윤봉길의사의 홍구공원의거가 결행되자, 여러 기관들이 나서서 한인애국단의 활동과 관련한 정보를 수집하여 보고하는 한편, 사건의 실상과 주모자를 파악 체포하기 위한 수사활동을 전개하였다. 이러한 자료들이 일본외무성 외교사료관에 보관되어 있다.

이봉창 · 윤봉길의사의 의거가 결행된 후, 일제는 상해의 총영사관을 중심으로 헌병대 · 일본군 등의 기관들이 나서서 한인애국단의 활동과 관련한 정보를 수집하였다. 그리고 수집한 정보는 각급 상부에 보고하였다. 상해총영사와 일본공사가 외무대신에게, 상해주재 사무관이 경무국장에게, 헌병사령관이 외무차관에게, 제3함대군의장이 해군성 의무국장에게 보고한 것이 그러한 예이다.

정보수집이나 보고내용은 다양하다. 이봉창과 윤봉길에 대한 신상보고를 비롯하여 사건관련 보고, 주모자 김구의 소재지 추적 및 체포계획 관련, 안창호를 비롯한 한인들의 체포과정 및 프랑스조계 당국과의 협조 관련, 그리고 중국을 비롯한 각국 신문들의 보도내용에 대한 조사 보고와 그에 대한 대응 등 여러 방면에 걸쳐 있다. 이를 몇가지 내용별로 구분하여 자료를 설명하고자 한다.

1. 이봉창 · 윤봉길의 신상 및 사건 관련

1932년 1월 8일 이봉창의사가 일본 동경에서 일황을 처단하기 위해 폭탄을 투척한 의거를 결행하였다. 그 날 밤으로 이봉창에 대한 인적사항이 전보를 통해 상해총영사관에 전달되었다. 일본 동경의 경시청 형사부장이 상해총영사관 경찰서장에게 전보를 보내 범인은 李奉昌이고, 뒤에서 주모한 인물은 白貞善이라며, 경시청에서 조사한 내용을 알렸다. 이에 대해 상해총영사관에서는 이봉창의 신상을 조사하였고, 1월 9일자로 조사한 내용을 상해총영사가 외무대신에게 보고하였다. 보고는 ‘이봉창의 이곳에서의 행동’이라는 제목으로, 이봉창의 현주소는 上海 斐偏路 288번지라는 것과, 작년 9월 閩江路 축음기상 榮昌公司에서 점원 겸 외판원으로 근무한 사실, 그리고 12월 17일 상해에서 우편선 氷川丸의 3등 선객으로 神戶를 향해 출발하였다는 내용이었다.

첫 보고 이후 상해에서 이봉창의 행동에 관한 조사와 수사는 계속되었다. 2월 25일자로 상해총영사가 외무대신에 보고한 「櫻田門外 불상사건 범인에 관한 당지의 수사상황 속보의 건」이 그것을 말해준다. 이는 이봉창이 김구와 함께 사진을 찍은 사진관에 대한 조사, 김구와 함께 묵었던 여관에 대한 조사, 그리고 자금의 출처 등을 조사하고 보고한 것이다.

1932년 4월 29일 윤봉길의사의 홍구공원의거가 결행되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상해총영사는 당일인 4월 29일자로 외무대신에게 「한인독립운동자의 투척사건 보고」를 비롯하여, 폭탄투척사건에 대하여 여러 차례 보고하고 있다. 총영사 뿐만 아니라 상해에 주둔하고 있던 헌병사령관도 외무차관에 보고하였다(「폭탄투척사건 관련 헌병대 보고」). 그 내용은 “4월 29일 오전 11시 40분 상해 홍구공원 관병식에서 한국인 尹奉吉이 일반 관람석에서 군사령관석에 폭탄 1개를 던져 군사령관 植田 사단장, 野村 사령관, 重光 공사, 村井 총영사, 河端 행정위원장 등이 중경상을 입었다”고 하면서, “범인은 현장에서 체포되어 관계 용의자와 같이 신문 중이다. 윤봉길은 상해 한국독립당 당원이라고 칭하고 있으며, 동 당원 李裕弼로부터 폭탄 2개와 2백원을 지급받고 투척을 명령받았다고 말한다”는 것이었다.

5월 3일자로 상해총영사가 외무대신에 보고한 문건은 비교적 구체적이고 자세한 내용을 담고 있다. 보고내용은 다음과 같이 5개 항목으로 정리되어 있다.

   1. 재류관민 합동의 천장절 축하식회장에서의 폭탄투척과 범인의 체포

   2. 식장의 경비정황과 폭탄투척 상황

   3. 범인이 사용한 폭탄의 구조와 그 휴대와 행동상황

   4. 범인의 신원과 그 범행동기 및 경위

   5. 본 범행의 연루자와 그 수사

 여기에 몇가지 중요한 내용이 들어 있다. 하나는 윤봉길의 체포 당시 상황이다. 이에 대해 “범인은 폭탄투척에 당면하여 먼저 1개를 투척한 후 다시 도시락형의 물건을 집어 올리려고 할 때 부근에 있었던 우리 해군 1등 병조와 경비 중인 헌병 당관 경찰서원(高柳吉衛 순사) 등이 곧 체포하였는데, 日人 군중의 격앙이 심하여 그를 포위하고 구타하여 드디어 졸도시키게 되었으나 군헌의 힘에 의해 곧 동 공원의 우리 헌병 제1분대에 인치되었다”라고 하였다. 윤봉길의사가 일본군중들에 의해 졸도할 정도로 구타를 당하였다는 점이다.

폭탄투척 당시의 상황도 나타나 있다. 윤봉길의 자백과 현장목격자의 진술을 토대로 “범인은 무대 후방 군중속에 혼입해 있으면서 기회를 엿보고 있었는데, 오전 11시 40분 휴대하고 있던 도시락형의 폭탄을 지상에 놓고 어깨에 걸고 있던 수통형의 폭탄을 베껴 가죽 끈이 붙은 그대로 오른손에 쥐고 몇걸음 전진하여 기마병 바로 뒤편에서 무대 위를 겨냥하여 던지고 다시 지상에 놓은 도시락형의 폭탄을 집어 던지려고 뒤돌아서는 것을 군중이 압도시켜 체포하였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당시의 경비상황에 대해서는 “무대 위 각 대관의 신변호위로 6명의 기마병이 무대후방에 식장을 면하여 서고 그 후방 약 몇 미터의 장소에 수명의 보조헌병이 배치되고 군중은 그 후방에 있었다”라 하고 있다.

또 당일 오후에 일본 관계자들이 모여 대책을 숙의한 사실도 나타나 있다. 29일 오후 5시 30분부터 육군, 해군, 공사관, 총영사관 관계자들이 참석하여 선후 처리에 관한 대책을 협의하였다. 그 결과 “이 기회를 이용하여 한국독립운동에 일대 타격을 줄 방침하에 일제 검거를 프랑스측에 요구하기로 하였다”는 것, 그리고 “30일 오전 4시 우리 측 검거반(赤木 사무관을 총지휘로 하고 당관 경부 이하 44명, 헌병대원 22명의 응원을 가하고, 따로 헌병장교 3명 합계 70명)을 출동시켜 동 5시 프랑스 공부국 경찰대와 현지에서 회동하여 각각 수사케 하였다”는 내용이 들어 있다. 일제는 임시정부 요인들을 체포하기 위해 30일 오전 5시부터 70명을 동원하여 수색한 것이다.

2. 安昌浩를 비롯한 한인 11명 피체

윤봉길의거 직후 일제는 프랑스조계를 급습하여 임시정부 요인들을 체포하고자 하였다. 이 과정에서 安昌浩를 비롯한 한인 11명이 피체되었다. 일제는 윤봉길을 취조하여, 그 주모자가 李裕弼이라는 진술을 얻어냈다. 그리고 프랑스조계 경찰에 이유필의 체포를 요구하였고, 일본 경찰을 투입시켜 이들을 체포한 것이다.

안창호는 이유필의 집에서 피체되었다. 일본경찰이 이유필의 집을 엄습하였으나, 이유필은 집에 없었다. 일본경찰이 이유필의 집에 잠복해 있을 때, 안창호가 그 집에 들어와 체포되었다(「상해 한국인 독립운동자 단속대책」). 그리고 金德根을 포함하여 金德穆 · 朴華山 · 車均燦 · 李東一 · 張鉉瑾 · 朴濟道 · 朴濟建 · 李基成 · 張相國 · 胡聖源 등도 체포되었다. 이들은 임시정부 요인의 자녀이거나 청년학생들이었다. 임시정부 요인들은 이미 피난하였지만, 이들은 별다른 관련이 없어 피난하지 않고 있다가 체포된 것이다.

임시정부 요인들을 체포하기 위해 일제는 총영사관 경찰 및 헌병대원 등을 동원하여 프랑스조계를 수색하였다. 「상해폭탄사건후의 백색공포」는 그러한 상황을 설명한 것이다. 이에 의하면 “홍구공원사건으로 왜적의 고관들이 거꾸러지니 놈들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미처 날뛰었다”고 하면서, “왜경부 園田의 지휘하에 편의군경 100여명이 출동하여 36장의 체포장을 들고 수사를 개시하였고, 또 한편으로는 수색 군경과 낭인들은 29일 밤 중국복을 입고 다수 한국인이 살고 있는 프랑스조계의 霞飛路 · 馬浪路 · 勞神父路 · 貝勒路 일대에 비밀히 잠복하였다”라 하고 있다. 그리고 이로 인해 프랑스조계에 더 이상 살 수 없게 되었다며, 그 상황을 “이후부터 프랑스조계는 암흑세계로 변하고 우리 한국인민은 벌써 이 속에서 안연히 발부치고 살 수 없게 되었다”고 하였다.

프랑스조계 당국이 일제의 요구에 대해 어떠한 입장을 취하고 있었는지에 대한 것도 나타나 있다. 윤봉길의거 직후 프랑스조계 당국은 일제의 요구를 받아들여 일제 경찰이 프랑스조계 안에 들어와 활동하도록 하였다. 이로 인해 안창호를 비롯한 한인들이 체포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프랑스조계 당국은 일제의 요구를 교묘하게 회피하고 있었고, 이로 인해 일제는 임시정부의 주요 인사들을 체포하지 못하였다.

프랑스조계 당국은 일제가 조계안에서 활동하는 임시정부 인사들의 체포에 협조해 줄 것을 요청할 때, 이를 허락하지 않고 있었다. 일제가 요구해 올 때, 프랑스조계 당국에서는 ‘프린스 콘테’를 내세웠다. ‘콘테’는 프랑스의 식민지였던 월남의 독립운동가로, 일본 동경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프랑스측은 일제가 한국독립운동자들에 대한 단속을 요구하면, 그 교환조건으로 콘테를 단속해주도록 요구한 것이다.

프랑스조계 당국은 ‘콘테’를 이용하여 일제의 요구에 적극적으로 협력하지 않았고, 그 결과 임시정부 요인들이 체포를 면할 수 있었다. 상해총영사가 외무대신에 보도한 「베트남인 콘테와의 관계」 「프랑스조계 당국의 비협조」 등이 그러한 자료이다. “당관에서 여러 방면과 협조하여 金九와 그 일당의 체포에 애쓰고 있으나 프랑스측이 베트남 독립운동의 단속을 요구하고 있다”고 하면서, 프랑스조계의 입장에 대해 “우리 행동을 방해까지는 안하더라도 적극적으로 단속할 의사가 없음은 분명함”이라 하고 있다.

3. 김구의 정체 및 소재지 추적

일제의 정보자료와 보고문건에 나타나는 내용 중 하나는 김구의 정체를 파악하고, 그소재지를 추적하여 체포하는 것이었다. 일제는 김구가 임시정부 경무국장으로 활동할 때부터, 김구를 주목하고 그를 체포하려고 하였다. 그러다 1932년 1월 8일 이봉창의사가 일본 동경에서 일황을 처단하기 위해 폭탄을 투척한 사건이 일어났다. 이를 계기로 일제는 김구의 정체파악과 그를 체포하기 위해 혈안이 되었다.

이봉창의사가 일황을 저격한 직후, 일제는 김구를 그 주모자로 지목하였다. 1932년 1월 9일자로 상해총영사 村井倉松이 외무대신에 보고한 문건(「백범의 정체」)에 “이봉창이 말했다고 하는 白貞善은 그 인상, 연령, 주소 등의 상황으로 미루어 볼 때 현재 이곳 한국임시정부의 재무부장, 한국교민단장 金九에 해당되는 자로 사료됨”이란 내용이 들어 있다. 이는 이봉창이 신문에서 주모자를 백정선이라고 하자, 상해총영사에게 그에 대해 조사하도록 하였고, 상해총영사가 이를 조사하여 보고한 것이다. 백정선이 김구라는 사실을 보고하면서, 상해총영사는 “즉시 그 소재 수사에 착수하는 한편 이곳 프랑스 총영사와 그의 체포 인도에 관해 교섭하여 승낙을 얻었고, 그 구체적인 방법을 협의 중”이라고 하였다.

상해총영사관은 프랑스 총영사의 양해를 얻고, 김구에 대한 체포에 나섰다. 상해총영사는 1월 11일자로 외무대신에 보낸 문건에서 “김구가 프랑스 조계 馬浪路 普慶里 4호 임시정부내에 잠복하고 있음을 밝혀내고 이달 5일 프랑스측의 양해아래 체포에 나섰으나 조선인의 내통으로 행방을 감추어 검거하지 못했음”이라고 하였다. 이미 상해총영사관에서는 이봉창의거가 결행되기 전인 1월 5일 김구를 체포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사실을 언급하면서, 상해총영사는 프랑스 총영사의 양해를 얻어 김구 체포를 위해 여러 수단을 동원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고하고 있다.

  김구의 소재 수사 체포에 관하여는 이곳 각 정보기관 협동으로 극력 내탐하고 있으며, 다른 한편 본관과 프랑스 총영사 케쿠랑과의 양해에 의거하여 프랑스 조계 경찰당국의 충분한 협의를 얻기 위해 이날 다시금 赤木 사무관과 杉村 경감이 정치부장 사라레이와 회담, 수사방침에 대해 상세한 협의를 한 결과, 이번에는 당분간 강경한 활동은 피하고 먼저 거처를 찾아내기 위해 여러 수단을 동원하고 있음.

일제는 김구를 체포하기 위해 일본에서 검사를 직접 상해에 파견하기도 하였다. 1월 19일자로 외무대신이 상해총영사에게 보낸 문건(「수사 검사의 상해 출장」)이 그 사실을 알려준다. 이에 의하면 동경지방재판소 검사국 검사 龜山愼一이 21일 神戶를 출발하여 23일 상해에 도착할 것이라고 하였다. 龜山愼一은 1월 10일 豊多摩 형무소에서 이봉창을 조사하였던 인물이다. 이외에도 대심원 검사국 검사인 吉田正武와 서기 江川二六, 그리고 경시청에서 경부 2명이 상해에 파견되었다.

윤봉길의거 직후 일제는 김구의 거처를 포위하고 그를 체포하려고 하였다. 5월 2일자로 상해총영사 村井倉松이 외무대신 芳澤謙吉에게 보고한 문건(「櫻田門外 불상사건 범인 연루자 김구 수사에 관한 건」)에 의하면, 헌병대장과 협의하고 준비하여 “경찰 20명, 헌병 10명 계 30명의 체포대를 조직하여 다음날 1일 오전 4시 먼저 環龍路 118의 19호의 김구 거처를 완전 포위한 다음 이를 프랑스 경찰본부에 통고하고 프랑스 형사의 파견을 요청하여 즉각 엄중 수사를 벌였으나 이미 늦어 김구를 체포하지 못했다”고 하였다. 김구를 체포하기 위해 윤봉길의사의 사형을 연기하고 있었다는 사실도 나타난다. 1932년 9월 21일자로 石射 총영사가 외무대신에 보낸 문건에 “헌병대 철수 전에 윤봉길의 사형을 집행하는 것은 오늘에도 계속하여 김구 체포에 노력하고 있는 것과 관련하여 당관으로서는 찬동하기 어려우며, 또한 지금 당장 이를 집행하는 것은 오늘까지 연기해 온 의의를 잃는 것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 그것이다. 김구를 체포하기 위해 윤봉길의 사형 집행을 연기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김구를 체포하기 위해 헌병대 1백명을 철수하지 않고 남겨두었고, 또 조선인 朴春山을 첩자로 이용하기도 하였다. 1932년 9월 16일자로 村井 총영사가 외무대신에게 보낸 「일본헌병의 실패」와 그 속보 1 · 2 · 3에 그러한 사실이 나타나 있다. 일본헌병대에서는 한국인 박춘산을 첩자로 불란서 조계에 들여보내 呂班路 13호에 거처를 마련하고, 김구의 소재를 파악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소재는 파악되지 않았고, 계획이 수포로 돌아가자 이를 철수시켰다. 9월 12일 일본헌병 5명이 트럭을 가지고 박춘산의 가구와 물건을 챙겨 나왔고, 이 과정에서 중국인 집주인과 마찰이 일어났다. 이 상황을 보고하는 가운데 헌병대와 첩자를 이용한 사실이 나타나 있다.

일제는 김구의 소재를 파악하고, 그를 체포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였다. 상당기간 일제는 김구의 소재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1932년 11월 10일자로 상해총영사가 외무대신에 보낸 문건(「폭탄사건 후 김구 일파의 동정」)에 의하면, 일제는 김구의 소재를 비교적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일제가 추적한 김구의 소재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4월 26일, 環龍路 118의 19 러시아인 셋방에서 나와 中國街 蓬萊市場 부근으로 옮김.

 -윤봉길의거 후, 군무부장 金澈과 함께 교통대학 체육교사 申國權의 주선으로 미국인 피치(S,A, Fitch)의 비호를 받음

 -5월 14일, 상해에서 杭州로 가 聚英旅社에 투숙

 -5월 15-16일, 杭州 淸泰第2旅社에서 개최된 국무회의에 참석(군무부장에 임명)

 -국무회의 직후 嘉興으로 옮김

 -嘉興의 褚輔成의 저택에서 嚴恒燮 李東寧등과 함께 유숙

 -6월 하순, 杭州시내 소학교에서 열린 한국독립당 이사회에 참석

 -9월 상순, 褚輔成의 집을 나와 그의 부속 사택으로 이전

 -10월 31일, 安恭根을 대동하고 광동을 향하였다고 함

 일제는 여러 정보를 통해 김구의 소재지를 추적하였지만, 결국 그를 체포하지 못하였다. 그리고 11월 18일에는 김구를 유인하기 위해 상해에 구금시키고 있던 윤봉길을 일본으로 이송하고, 헌병대도 철수시켰다(「상해파견헌병대 철퇴에 관한 보고」).

 4. 신문 보도에 대한 조사 보고

 이봉창 · 윤봉길의사의 의거가 결행되자, 각국의 신문들이 이를 대대적으로 보도하였다. 특히 중국의 상해 · 천진 · 복주 등 해안에 접해있던 도시를 비롯하여 남경 · 북경 등 각지에서 발간되던 신문들이 이를 크게 보도하고 있었다. 이외에 버어마 · 소련 등 각국의 신문및 방송들도 이에 대해 보도하였다. 일제는 이러한 신문보도와 각국의 반향을 예의 주시하였고, 상해를 비롯하여 각처에 있는 일본총영사관이 신문의 보도내용과 반향을 조사하여 보고한 것이다.

 일제의 기본적인 원칙은 보도금지였다. 1932년 1월 10일자 상해총영사가 외무대신에 보낸 문건(「상해지역 신문보도 금지조치」)에 “당관에서는 9일부로 본건 범죄의 내용 및 수사 진행상황 등 당관이 발표한 것 이외의 사항 게재를 금하도록 이곳 지방의 신문 통신사에 명령하였다”고 하면서, “내지의 신문기사 등에 대해서도 적절한 조치를 취해 줄 것”을 요청하고 있다. 일제는 보도금지를 바랐지만, 그대로 되지 않았다. 중국의 각 신문들이 이봉창 · 윤봉길의거에 대해 연일 상세하게 보도한 것이다.

 이봉창의거가 결행되자 중국의 각 신문들은 1932년 1월 9일부터 이를 대대적으로 보도하기 시작하였다. 중국 신문의 보도는 일황에게 폭탄이 명중하지 못했음을 안타까워하는 논조를 담고 있었다. 상해총영사는 이러한 중국 신문의 보도를 不敬이라 여겼고, 신문의 보도내용과 이에 대해 영사관이 취한 조처를 외무대신에게 보고하였다(「중국언론의 보도와 일본의 대응」). 상해총영사는 상해의 ≪民國日報≫가 “韓人刺日皇未中 日皇閱兵畢返京突遭狙擊 不幸僅炸副車兇手卽被逮(한인이 일황을 저격했으나 명중하지 않아, 일황이 열병을 마치고 돌아가던 중 갑자기 저격 당해, 불행하게도 겨우 수행차에 폭발하였고 범인은 즉시 체포)라는 제목을 달았다는 것과, 그 기사 내용 전체를 보고하고 있다.

 상해를 비롯하여 각지에서 이러한 보고들이 잇따랐다. 1932년 1월 10일자로 福州에 주둔하고 있던 馬要 사령관이 차관에게, 靑島의 총영사가 외무대신에게, 버어마 랑군 영사관에서 외무대신에게 보고한 문건 등이 그것이다. 馬要 사령관은 ≪東方日報≫가 투서형식으로 일황저격사건과 일본해군을 모욕하는 기사는 실었고, ≪신테우일보≫는 황실을 모욕하는 기사를 실었다고 하면서, 총영사가 즉각 항의하였다고 하였다. 그리고 靑島의 川越 총영사는 ≪民國日報≫가 이봉창의거에 대해 보도를 하였는데, 그 표제가 “몹시 불경함에 즉각 공문으로 市정부에 엄중 항의하고 계속 교섭 중”이라고 하면서, 일본거류민 행정위원회에서 이 문제를 협의하였는데 그 가운데는 “黨部를 습격해야 한다는 이야기가 있다”고 하였다.

 버어마의 ≪랑군타임즈(Rangoon Times)≫ ≪랑군메일(Rangoon Mail)≫ ≪랑군가제트(Rangoon Gazette)≫ 등의 신문들도 이봉창의거를 보도하였다. 랑군 영사관 사무대리 加納四郞이 1932년 1월 11일자로 외무대신에게 보고한 문건에 그 내용이 나타나 있다. 이에 의하면 ≪랑군타임즈≫는 “일왕에 대한 폭탄 공격” “한국으로부터의 폭탄”이란 표제어로, ≪랑군메일≫은 “잘못된 암시”라는 제목의 사설로, ≪랑군가제트≫는 “히로히토 일왕에 대한 공격, 폭탄이 마차를 빗마치다, 한국인 공격자 체포”라는 제목으로, 이봉창의거를 보도하였다. 이들 신문은 동경발 로이터 통신을 받아 게재하였는데, 그 기사에 “왕궁의 유명한 사쿠라다몬을 지나는 왕실마차에 폭탄이 날아들었는데 히로히토 일왕은 간신히 부상을 피했다”는 내용이 들어 있었다.

 소련에서도 라디오 방송을 통해 일왕의 암살사건을 보도하였다. 만주에 있는 일본군 관동군 참모장의 1932년 1월 15일자 보고에 그 내용이 들어 있다. 이에 의하면 소련은 “연일 각지의 라디오를 통해 조선 · 중국 · 러시아의 배일적화방송을 하고 있다. 특히 용서할 수 없는 것은 1월 10일 우리 황실에 대해 극히 불경스러운 방송을 하였음”이라며, 블라디보스톡의 라디오가 “일본에서 있은 1월 8일의 암살사건은 일본의 제위 및 그 신성에 대해 이제는 아무도 믿지 않고 있음을 명료하게 증거하고 있음”이라는 내용의 방송을 하였다는 사실을 언급하고 있다. 그리고 외무대신은 1월 16일자로 재소비에트연방 廣田 대사에게 그 사실을 통보하기도 하였다.

 1932년 11월 30일자로 작성된 「중국 신문잡지의 불경기사 종합」은 중국 각 지역의 신문들이 보도한 실상을 총정리한 것이다. 이는 제1장 개설, 제2장 중국 각지 신문잡지 등의 불경기사 사건, 제3장 국민정부와의 교섭으로 구성되어 있다. 제1장 개설에는 중국이 만주사변 이래 대일감정이 극도로 악화되어 평소에도 대대적으로 배일기사를 게재하여 무지한 민중의 排日熱을 선동해 왔는데, 이봉창의거가 발생되면서 더 격화되었다고 하면서, 그 상황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중국지들은 본건 기사를 보도함에 있어 때가 왔다는 듯이 혹은 兇漢 李를 志士라고 부르고 義士라고 칭하며 그 범행을 찬양하고, 그 쾌거의 실패를 애석해 하거나, 혹은 우리 황실의 존엄을 모독하고 우리 국체의 위신을 상하게 해 한 사람의 李는 죽더라도 만인의 李가 출현하여 조종의 원수를 갚을 것 운운하며 큰소리 쳐대고, 불경스럽기 그지없는 한국독립선언이라는 것을 실어 또다시 지나침에 이르렀으며, 혹은 ‘日本宮闈秘史’라 칭하고 혹은 ‘大正天皇의 秘密病과 肉感的 醜劇’이라 題하고, 우리 황실에 관해 황당무계한 기사를 날조하여 이를 욕되게 했고, 원래 충군애국으로 세계 으뜸인 우리 국민의 격분을 살만큼 언어도단의 언사를 농하여 우리 국민으로서 결단코 용서할 수 없는 不敬을 저지르기에 이르렀음.

 이러한 중국의 신문과 잡지의 보도경향을 언급하면서, 이와 같은 불경기사는 1월 9일을 시작으로 11월 현재까지 31개지에 달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각 지방별로 불경을 저지른 신문”을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北平:≪北京晨報≫ ≪리더≫ ≪法文報≫

 天津:≪益世報≫ ≪火線≫ ≪北寧黨務週報≫ ≪大公報≫

 靑島:≪民國日報≫ ≪靑島民報≫ ≪正報≫ ≪靑島日報≫ ≪新靑島報≫

 上海:≪民國日報≫ ≪上海報≫

 南京:≪中央日報≫ ≪民生報≫ ≪新京日報≫

 漢口:≪武漢日報≫ ≪莊報≫

 長沙:≪湘珂畵報≫

 福州:≪新潮日報≫ ≪東方日報≫

 厦門:≪厦門商報≫ ≪厦門時報≫

 汕頭:≪汕報≫

 廣東:≪광동가제트≫ ≪共和報≫ ≪新聞報≫ ≪華强日報≫ ≪民國日報≫ ≪晨光≫

 제2장은 중국 각지의 신문보도에 나타난 주요 기사내용을 언급하고, 각지에 있는 일본영사관이 취한 조처를 정리한 것이다. 이에 의하면 天津의 ≪益世報≫는 1932년 1월 9일자 「일본천황을 소개함」이란 표제로 “천황은 허위로 받들어 모셔지고 있는 정치적 우상” “군벌은 천황과 결탁” “총리대신을 노리지 않고 천황을 모살하려는 것은 스스로에게 원인이 있다”는 내용을 보도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火線≫은 1월 15일자로 「장하도다! 韓國獨立黨人의 一團」이란 제목으로 이봉창의거를 보도하였다. 이외에 福州의 ≪新潮日報≫는 1월 9일자로 “왕성한 한인이 폭탄 던져 일황을 공격, 安重根을 배워 드디어 張子房 되었음에 축배를 들자. 애석하게도 공격이 실패”라는 표제로, 厦門의 ≪厦門商報≫는 1월 26일과 27일 이틀에 걸쳐 “이봉창의 행동은 2천만 조선인의 의사”라는 표제로, 汕頭의 ≪汕報≫는 1월 10일자로 「朝鮮革黨 彈擲 倭皇之壯擧」라는 제목으로 이봉창의거를 보도하였다고 한다.

 제3장은 중국의 신문보도에 대해 중국 국민정부와 교섭한 내용을 언급하고 있다. 이봉창의거를 계기로 上海 · 靑島 · 福州 등 중국 각지의 신문들이 불경기사를 보도한 데 대하여 “사안의 중대성을 감안하여 각기 관계 영사들은 지방관헌에게 엄중 항의하였다”는 것, 그리고 중국 南京政府의 외교부장이 이에 대해 보내온 회답내용을 언급하였다. 중국의 외교부장은 “해당 신문사에 대해 앞으로 신중하게 취급하도록 계고할 것”이라고 하면서, 동시에 “일본의 각 신문 및 통신사도 때때로 우리나라 최고 당국을 모욕하고 또 사회치안을 혼란케 하는 기사가 있으니 일본 각 신문사 통신사에 대해서도 절실하게 단속해 주기 바란다”라는 답변을 보냈다고 한다.

 이 자료집은 한인애국단의 명의로 발표된 문건과 일제가 수집하여 보고한 정보자료 등, 한인애국단 관련 자료들을 수록한 것이다. 이중 일제의 정보자료는 한인애국단의 활동과 관련되어 많은 사실을 알려주고 있지만, 때로는 정확하지 못한 정보도 적지 않다. 때문에 일제의 정보자료를 이용하는 경우에는 정확한 확인이 필요하다. 본 자료집 28, 29, 30권에 수록된 자료들을 상호 비교하면 커다란 도움이 되리라 생각한다.

한시준(단국대 역사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