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78. 폭탄사건 후에 있어서의 金九 일파의 기타 동정 보고  
발신일1932년 11월 10일
발신자재 上海 총영사  
수신자외무대신  

78. 폭탄사건 후에 있어서의 金九 일파의 기타 동정 보고

재 上海 총영사

외무대신

1932년 11월 10일

 사건의 전후를 통하여 김구 일파가 재미한교 및 재상해항일제단체와 밀접한 연락을 가지고 그 후원 비호 밑에서 활동하여 왔고 또 장래 계속하여 활동할 의도가 있음이 관측되는 실정이므로 더욱 계속하여 엄중 주의중이다.

 기

제1. 虹口公園폭탄사건 후에 있어서의 김구 일파의 도피

제2. 독립운동자간의 분야와 그 파벌투쟁

제3. 東北義勇軍후원회장 褚輔成의 金九 비호

제4. 한인독립운동자간에 있어서의 통신연락

제5. 흉포행위에 사용한 폭탄과 자금의 출처

제6. 최근 한인독립운동간에서의 반김구 열기의 대두와 김구의 廣東여행설

제7. 한국 각 혁명단체의 연합과 중한항일운동의 합작

 제1. 虹口公園폭탄사건 후에 있어서의 김구 일파의 도피

 김구는 4월 29일 虹口公園에서의 관병식의 기회를 이용하여 흉포행위를 결행할 계획을 하자 그 반동으로 우리 측으로부터 강압을 받을 것을 예상하고 4월 26일 사전에 그의 거처인 佛界環龍路 118호의 19 러시아인 셋방 Mrs. Astahoff16_016_0 金九는 4월 8일 우리 측의 검거를 만나 위기일발의 사이에 간신히 도주한 자인데 일단 杭州로 도피하였다가 다시 상해로 돌아와 環龍路(Route Valloon)118호의 19 Mrs. Astahoff집 뒷편 2층의 1실을 빌려 4월 16일부터 嚴恒燮과 함께 이곳으로 이사하였다. 김구는 사건 전 이미 동처를 떠났으나 엄항섭은 그대로 수일간 동처에 머무르다가 결국 5월 2일 오후 6시 외출하여 타처로 옮기고 익 3일밤 그의 부인을 시켜 짐 전부를 받아오게 하였다.닫기의 집을 나와 中國街蓬萊市場 부근으로 옮기고 한국임시정부 간부에 대하여는 극비밀리에 4월 29일16_116_1 4월 29일 관병식 당일 金九가 흉포행위로 나갈 계획이 있는 것에 대해 당시 불조계경찰당국이 사전에 알고 있었던 형적이 있다. 즉 불 경찰본부 정치부장 Sarly가 사건 전야(28일) 우리 측 관계관의 초대를 받았고 그 출석을 약속하였는데도 불구하고 그 시기에 이르러 출석하지 않았으므로 우리 측의 초대를 고의로 기피한 것이라는 의혹이 있고, 김구가 사전에 이와 같은 배려에 이르렀던 것은 당연히 불조계 당국을 통해 있었던 것으로 믿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닫기흉포행위 결행의 뜻을 말하고 피난여비로16_216_2 임시정부 국무위원은 위원장 李東寧 외에 趙琬九, 趙素昻, 金澈, 金九의 4명이다.닫기로 국무위원에 각 60불을, 비서에 30불을 배부 지급하였다. 사건이 발생하자 김구는 군무부장 金澈과 행동을 같이 하며 당지 교통대학 체육교사 한인(중국적)申國權의 주선으로 일찍이 김철의 면식이 있는 당지 외국인기독교청년회 주사16_316_3 미국인 S. A. Fitch는 당지 Foreign Y.M.C.A.의 주사인데 그의 부는 당지에서 저명한 목사이며 그의 형은 목사로 지금 杭州에 있다. 동인은 중국에서 태어난 관계상 극단적인 친중배일사상을 가지고 있어 앞서 金九가 발표한 영문의 선언서 같은 것도 동인 원조 하에 행해진 것이라는 정보가 있다.닫기미국인 S. A. Fitch의 비호를 받아 그가 아는 모목사의 사택에 잠복하였다. 그러자 당시 우리 측의 이들 일파에 대한 추적이 더욱 급함을 알고 김철은 5월 10일 도망하여 杭州로 가서 淸泰第二旅社에 투숙하고 제32호실에 들어 동소에 韓國臨時政府辦公處를 개설하였다. 그리고 동처에서 사건후 제1회 국무위원회의를 개최하기로 되어 있었으므로 김구 또한 5월 14일 上海를 출발하여 杭州로 가서 聚英旅社에 투숙하였다.

사건17_017_0 4월 30일 미명과 5월 6일 미명 양차의 검거를 말한다.닫기후 양차의 검거로 불조계의 한인으로서 적어도 임시정부 또는 民團 내지 獨立黨에 관계가 있는 자는 성내, 南市 혹은 杭州, 蘇州, 南京, 北平 등으로 각각 그 연고를 찾아 도피 사산했는데 임시정부 간부중 金九, 金澈, 외에 李東寧, 趙琬九, 趙素昻 등은 항주로 달아나고 민단간부 李裕弼, 李始榮, 李秀峰, 嚴恒燮, 崔錫淳 등도 또한 일시 杭州로 도피하였으나 그후 점차 上海로 돌아와 南市성내에 잠복하였다. 그리고 이들 일파는 말할 것도 없고 기타 사람들도 지금 그 거처가 일정하지 못하고 주위의 정세에 응하여 각처를 전전하는 실상이다. 김구의 심복이라고 볼 수 있는 자는 安恭根, 嚴恒燮, 金東宇, 安敬根, 王雄, 李東寧인데, 위 중 이동녕은 늘 김구와 동거하고 엄항섭 또한 김구의 비서로 때로는 상해로 오는 일이 있으나 그 좌우를 떠나지 않고, 이에 반하여 안공근은 김구의 대표격으로 그의 거처17_117_1 城內 國貨路 天德里 14호라 한다(헌병대 정보에 의함).닫기를 성내에 정하고 때로는 杭州, 南京에 가나 그의 본거는 上海에 둔 것 같다. 그리고 안경근, 김동우 특히 안경근은 김구와 안공근 또는 김구 일파와 기타와의 연락 교섭의 역할을 하고 있는 것 같으며 왕웅은 우리측의 검거를 두려워하여 南京으로 이전하였다고 한다.

 제2. 독립운동자간의 분야와 그 파벌투쟁

 작년 萬寶山事件으로부터 계속하여 滿洲事變이 발발하게 되자 재 상해한인은 비상한 충동을 받고 민족의식에 자극되어 중국 측의 항일운동과 합류하여 이에 따르게 되었다. 먼저 上海韓人各團體聯合會를 조직하고 활동을 일으켰는데 임시정부에서는 국무위원회의 결과 일본 측에 대한 공포적 파괴행동을 결행하기로 결정하고 정부부내에 특무기관이란 것을 설치하여 金九를 이의 책임자로 임명하였다. 이에 있어 김구는 스스로 자금책에 혹은 인선에 남모르게 백방으로 노력하여 결국 재미한교로부터 송부해 온 자금을 이용하여 금년 연두의 櫻田門 밖의 불경사범을 결행하였다. 본 사건은 재미한교는 말할 것 없고 중국 측 항일 제단체의 비상한 찬사를 받고 독립운동자간에서의 김구의 입지는 갑자기 급등하여 단연 그 두각을 나타내게 되었다. 그리고 그간 중국 측 항일제단체와의 연락이 더욱 밀접해갔는데 흉포행위를 계속하여 이들 중국 측 항일 제단체로부터의 자금의 출손을 청구할 가망이 충분하였으므로 군무부장 金澈은 趙素昻과 더불어 金九의 활동을 원조하여 흉포행위의 하수인이 될 만한 인물의 물색, 중국 측과의 연락교섭 등에20_020_0 본년 3월 상해사변 후 재 上海 한인독립운동자들은 김구, 김철, 조소앙 등의 주창에 의해 중국 측 廣東파의 일당과 합작하여 ‘中韓抗日大同盟’이란 것을 조직하였다. 3월 하순 김구가 그의 심복 李德柱, 兪鎭萬을 한국내로 보냄에 즈음하여도 金澈, 趙素昻이 참획하였고, 이들 두 명에 대해 송별연을 베풀어 격려하는 바가 있었다. 이에 의해 당시 김철은 김구와 대등한 지위에 있으면서 항일흉포행위 결행에 대해 참획하는 바가 있었던 것임을 추측할 수 있다.닫기 간여하고 노력하는 바가 있었다. 그런데 한편 종래 재상해 독립운동자로 과격한 운동을 좋아하지 않고 온건 착실하게 사회실상에 맞게 그 실력을 양생하여 종국의 목적을 달할 것을 표방한 興士團 원동부장 安昌浩도 또한 시국 변천에 비추어 보는바 있어 중국 측의 동정을 얻어 그 원조를 구하기 위해 廣東에서 온 한인독립운동자20_120_1 王億은 廣東의 한인으로서 당시 중국 측에 접근하여 항일운동에 종사해 왔는데 上海事變중 상해로 와서 安昌浩에 접근하여 이와 합작하여 항일공포계획을 수립하려고 한 형적이 있다. 그 후 일단 北京으로 향했으나 다시 상해로 와서 마침내 그의 모습을 숨겼다.닫기 王億과 서로 모의하고 중한연합의 항일단체 조직을 획책하였다. 그러나 4월 29일 우리 측의 수배로 불국경찰의 손에 체포되어 우리 측에 인도되고 왕억과 당지를 떠나고 그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4월 29일 虹口公園爆彈事犯의 결행을 보자 金九, 金澈 등은 다른 한인독립운동자와 더불어 그의 모습을 감추고 5월 중순 연이어 杭州로 도피하여 김철이 숙박한 淸泰 제2旅社에서 사건 후 제1회의 국무위원회의를 5월 15, 16일의 양일에 걸쳐 개최하였는데 그 출연자는 李東寧, 趙素昻, 趙琬九, 金澈의 5명이며 본회의에 의해 재무부장 김구를 군무부장에, 군무부장 김철을 재무부장으로 경질 임명하였다.

 그런데 이보다 앞서 김구가 홍구공원사건 직후 19로군으로부터 임시정부에 증정한 것을 김철 일파가 7,000불을 횡령하였다는 소문에 분개하고 있던 김구 일파는 재南京 朴贊翊을 통하여 민단관계의 李裕弼 일파와 서로 모의하고 5월 29일 朴昌世, 金東宇, 安敬根, 文逸民을 杭州로 보내 그 소지금을 몰수케 하였다.

 그런데 본 사건은 한인간에 이상한 충동을 주어 금전문제를 중심으로 하여 그 투쟁이 더욱 첨예화하고 더 나아가서는 그 추한 상황을 사회에 폭로하고 중국 측에 대한 신용을 실추해 버릴 우려가 있게 되었으므로 그 선후 조치를 강구하기 위해 6월 상순에 이르러 국무위원회를 嘉興에서 전후 2회 개최하였다. 그 결과 위 杭州辦公處襲擊事件을 심의하기 위해 독립당 이사회를 개최하기로 되어, 6월 하순 杭州시내 모 소학교에서 4일간에 걸쳐 회의한 바 있었다. 본회의에 참석한 자는 李裕弼, 安恭根, 金枓奉, 李始榮, 崔錫淳, 嚴恒燮, 宋秉祚, 朴贊翊, 金九, 金澈, 李東寧, 趙琬九, 趙素昻, 金晳 등의 43명이다. 석상 朴昌世, 金東宇를 불러내어 판공처습격사건의 전말을 보고케 하고 그 진상조사에 박찬익, 엄항섭, 김두봉을 선임하고 산해하였는데 이제껏 그 결과를 보지 못하였다. 이리하여 표면 본 문제는 일단 해결된 것 같으나 金九, 金澈 간의 감정은 쉽게 융화하기에 이르지 못하고, 김철 일파에서는 항주판공처습격사건을 김구의 뜻을 받은 엄항섭의 사주에 의한 것이라고 믿고 크게 품은 바가 있는 실상이다.

 4월 29일 폭탄사건에 의해 분산하였던 한인독립운동자 간부중 먼저 상해로 귀환한 자는 이유필 일파이며 이유필은 佛界 白來爾蒙馬浪路 普慶里 4호의 민단사무소를 中國街老西門金家坊 112호로 이전하고 정치위원을 개선하여 정무위원장 李春山, 의경대장 朴昌世, 재무부장 崔錫淳, 서무부장 嚴恒燮, 간사 李秀峰으로 하여 그 진용을 고쳤는데 엄항섭을 제외한 다른 사람은 모두가 이유필파의 인물로 점하였다.

 위중 한사람 엄항섭은 김구의 측근으로 일한 인물인데 아마 김구파를 대표하여 민단위원에 참가된 것으로 사료된다. 그런데 嚴恒燮은 9월 20일자로 사표를 제출하고 상해를 떠났는데 그 후임에는 金枓奉을 임명하였으므로 민단에서의 김구 일파의 세력은 근절된 형태가 되었다. 지난 5월 21일 중국지 『時事新報』 지상에 安昌浩에 관한 기사가 게재되어 있다25_025_0 5월 21일 時事新報의 기사는 金晳의 투서에 의한다. 당시 안창호가 체포된데 대한 동정이 흠연히 일어나 중국 측으로부터의 의연금의 출연이 적지 않은데 대해, 안창호가 진정한 혁명가가 아니라는 뜻을 발표하여 그 열을 식히려고 한 것은 결국 자파의 지위 옹호를 위해 한 것이다.닫기. 그 내용은 안창호를 욕하는 것으로 그 기사의 출처가 김철 일파인 金晢임이 판명되었으므로 일찍부터 종래 단에서 김구를 능가하는 세력을 가지고 있었으나, 재차의 폭탄사건 이래 김구의 성명이 홀로 올라감을 보고 내심 불쾌한 것이 있어 교민단을 자기 세력 하에 두고 기관지 상해한문을 이용하여 성대히 자기선전을 행하는 한편 직접 중국 측 항일 제 단체에 접근하여 그의 후원을 얻으려고 힘쓰고 있는데 이를 위해 김구 일파에 대항하여 흉포행위를 획책하고25_125_1 李裕弼은 올 여름 이래 빈번히 東北義勇軍後援會에 접근하려고 하여 누차 그 간부와 회담한 사실이 있다. 그리고 항일흉포계획을 세우고 그 실적을 올릴 필요가 있다고 간주하고 朴昌世, 李秀峰으로 하여금 소요되는 폭탄 권총 등의 변통에 노력케 하고 목표를 재 上海 각 관헌과 주요 경제기관에 두고 획책을 진행시키고 있는 형적이 있다.닫기 朴昌世, 李秀峰 등으로 하여금 이의 실행방법을 연구케 한 사실이 있다. 요컨대 현하 상해의 한인독립운동자는 폭탄사건과 이에 따르는 중국측 및 재미한교로부터 획득할 자금을 둘러싸고 金九派 · 金澈派 · 李裕弼의 3파로 나뉘어 때로는 이합집산의 변화는 있어도 대체로 서로 정립하여 대항하고 추한 투쟁을 일삼는 실정이다.

 제3. 東北義勇軍 후원회장 褚輔成의 金九 비호

 4월 29일 폭탄사건 후 김구는 잠시 당지 外人基督敎靑年會 주사 S. A. Fitch의 알선으로 그의 친구인 모 목사의 집에 잠복하였다. 5월 14일 上海 출발 杭州로 향해 제1회 항주에서의 국무위원회의에 출석하고 양 3일로서 嘉興으로 옮겼다. 이때 누구의 알선에 의한 것인지 명료치 않으나 東北義勇軍29_029_0 동북의용군후원회는 東北義勇軍의 경제적 후원을 표방하고 조직된 것으로 의용군에 대한 의연금모집단체이다. 당회 외에 비슷한 2 · 3단체가 있다. 시정부는 ‘의용군’원조라 해서는 일본에 대해 형편이 나쁘니 ‘難民救濟會’로 개칭케 하고 이들을 전부 합동시키려고 종용하고 있었다고 하는데 본후원회는 완연히 그 명칭을 유지하고 있다. 그 사무소는 上海 梏嶺路 人安里 29호 저보성의 주택에 있고 사무원은 3 · 4명이 있어 형식적인 사무를 집행하고 있다. 최근 시찰한 바에 의하면 새로 만든 군복을 뭉쳐서 한쪽 모퉁이에 쌓아둔 것이 있었다. 사무원의 말에 의하면 당회에서 최근까지 모인 액수는 30만 원 내외이며 각 상점과 회사사무원 등을 모집원이 호별 방문하여 기부를 받으며 모집원은 현재 20명 가량이라 한다.닫기 후원회장 褚輔成(字 慧僧)29_129_1 褚輔成은 嘉興인으로 당년 63세이다. 日本 東洋大學 高等警務科를 졸업하고 귀국하여 嘉興商會(현재는 嘉興商民協會)의 총리가 되어 오랫동안 상인간의 지도자였던 자이며 뒤에 浙江省의 諮義局 의원이 되어 浙江軍政府 참사 중의원의원으로 국회에 나가 부의장으로 일한 일이 있다. 현재는 上海 法政學院 원장, 全折公會 대표자로 상당한 자산가였으나 정치운동으로 거의 가산을 탕진하고 현재는 무자산자와 같다. 연설에 솜씨가 있고 선전이 뛰어나다. 원래 친일가였으나 21개조 후 배일의 급선봉이 되어 일이 있을 때마다 배일선전에 힘쓰고 있다. 그러나 원래 신용이 없고 종래도 누차 이러한 수단으로 교묘히 착복한 예가 있다. 따라서 은행 회사 기타 유력한 상점 등은 거의 동북의용군 후원회를 상대로 하지 않고 있다.닫기의 비호를 받게 되어 일단 가흥에 있는 그의 저택으로 嚴恒燮, 李東寧 등과 함께 유숙하였다. 뒤에 단신으로 나와 저보성이 경영하는 직포공장, 嘉興絲廠 緯成絲廠 중의 하나인 가륜사창 부속 사택으로 이전하였다고 한다. 이리하여 김구는 그 곳에 거처를 정하고 일단 안정되었으나 독립운동 기타 공무상 사람과 면담을 하지 않을 수 없을 때는 나가서 杭州, 蘇州, 上海에 수시 출장하여 용무를 처리하고 끝나면 또 嘉興으로 돌아가 잠거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이와 같이 김구는 동북의용군후원회의 비호를 받고 있었을 뿐 아니라, 동회로부터 물질적 원조를 받고 있었던 것 같다. 올 여름 이래 수회에 걸쳐 동회에 자금을 요구해 왔다. 즉 9월 하순부터 10월 상순에 걸쳐 安恭根으로 하여금 3차 동회에 대해 교섭케 하였고 다시 10월 7일 嚴恒燮으로 하여금 동양 절충케 한 사실이 있다. 10월 9일 安恭根은 김구의 뜻을 받고 上海愛文義路聯珠里 全浙公會로 저보성을 방문하고 交通部 上海電報局 사무원 閔弼鎬를 통역으로 운동자금 출연의 구체적 교섭을 하여 결국 동북의용군후원회로부터 5 · 6천원 정도의 지출을 하겠다는 뜻을 저보성으로부터 회답을 얻었다고 한다.

 제4. 한인독립운동자간에 있어서의 통신연락

 4월 29일 홍구공원폭탄사건 후 臨時政府 獨立黨 기타 독립운동에 관계가 있는 일파의 한인은 모두 불조계를 떠나 도피 분산한 바이나, 이들 분산한 한인독립운동자 간부간의 연락 보호 유지에 대해서는 그들이 극히 고심한 바가 되었던 모양이다. 김구가 사건 전 이미 한국 만주방면에 대관암살의 목적으로 파견한 李德柱, 兪鎭萬, 金兢鎬, 柳相根, 崔興植 등과의 통신 연락은 오로지 佛界 新天祥里 20호 安恭根 가족의 주택을 주소로 하여 행해졌다. 그러나 이들 통신의 일부가 관헌의 손에 들어가 마침내 김긍호, 유상근, 최흥식의 검거를 보게 되었기 때문에 그 후 통신 연락에 대하여는 극도로 경계를 더하게 된 것 같으며, 嘉興에 있는 김구로부터 上海에 있는 안공근, 엄항섭, 김철 등에 대한 통신은 모두 안경근 기타 1 · 2의 심복에 의해 지참되고 있는 사실을 인지하였다32_032_0 당관에서 그 후 입수한 김구의 서간이 있다. 9월 5일자 김철에게 보내는 것인에 안경근에 의해 직접 지참한 것이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一江仁兄偉鑑爲詢別來兄體萬裕 閣節泰和而滬上別無事故不爲之關慮而已弟雲遊跡跡姑無安棲所事亦無奉聞者耳今接藕泉兄書送我百金兄自傳之云故玆委送一波而商矣卽爲擲送口(一字不明)望餘只此不備 九月五日 凡弟拜
위 서간 중 藕泉는 趙琬九, 一波는 嚴恒燮이다.그 후 김구는 9월 하순 그 곳 전차차장감독 劉一平에게 다음 역문과 같은 서간을 보낸 사실이 있다. 이 또한 안경근이 직접 지참한 것이다.
劉君에게요즈음 생활 곤란은 어떤지 요사이 들으면 버스회사 사변에 대해 그토록 강경하게 진출하려고 하는 군의 입지에는 무한히 찬성하나 좀 더 큰 사건을 결행하기 바란다. 가족의 생계문제를 고려할 것 없이 일을 하는데 노력하라. 금전은 문제가 아니다. 이 편지를 보는 대로 곧 의향을 통지하기 바란다.怱怱 白凡
닫기
. 김구는 사건 발생 후를 통하여 재南京 朴南坡와 극히 밀접한 연락을 가지고 그의 책모에 의해 동북의용군후원회 19로군 등에 접근한 모양이다. 비밀히 이와 문서의 왕복을 하고 있고 또 한편 재상해, 재북평 등의 한인독립운동자 간부와도 연락을 유지해 온 것인데 이의 연락방법으로서는 上海電報局 사무원인 한인 閔弼鎬32_132_1 閔弼鎬는 16세 때 상해로 와서 그의 형 閔濟鎬와 동거 후 불조계 전보학교에 입학 1년 후 졸업하여 곧 상해전보국원이 되다. 이래 각지로 전근하고 결국 上海로 되돌아와 독립당에 가맹, 朴南坡와 친교가 있었다. 또 王雄과도 친밀하였던 관계로 왕웅의 집 佛租界 西門路 226호를 빌려 9월 상순 이전하였다. 10월 13일 그 곳 파견 헌병대의 손에 체포되었으나 김구 일파의 통신연락을 은밀히 보고한다는 약속 하에 15일 석방되었는데, 그 후 1 · 2의 통신을 하였을 뿐이며 19일 가족을 끌고 어디론가 도망하였다.닫기를 이용하였다. 원래 민필호는 박남파와 친밀하였으므로 그들 일파 간에서 민필호가 통신연락의 중심이 될 것을 朴으로 하여금 권유케 하였던 것이다. 즉 본년 6월 상순 박남파는 비밀리에 상해로 와서 당시 上海城內 國貨路 天德里 14호에 거주중인 동지 安恭根과 공동으로 장래 재상해 동지와 각처에 흩어진 동지와의 사이의 통신연락기관이 되어 활동할 것을 명했다. 이로 인해 민필호는 南京, 杭州, 北平방면으로부터 동인에게 송부해 오는 통신을 모아 혹은 이를 심부름꾼에게 넘기고 혹은 다시 소기의 수취인에게 전송하는 등 적당히 처리해 왔는데, 그가 접수한 우편물은 1개월 평균 南京으로부터의 내신 14 · 15통, 北平으로부터 내신 2 · 3통, 杭州와 嘉興으로부터의 내신 4 · 5통이며, 朴南坡로부터의 것은 精奇, 曹成煥(재北平)으로부터의 것은 曹奇라 이서하고 抗州와 嘉興으로부터의 것은 澄奇 또는 江奇라 표기해 있다. 또 전보는 美國, 僑民團, 布哇, 巴里 등 각지로부터 김구 또는 임시정부로 보내는 것으로, 내용은 운동자금의 통지 또는 폭탄사건 후의 상해 상황을 조회해 오는 것이 대부분이라고 한다.

 제5. 흉포행위에 사용한 폭탄과 자금의 출처

 본년 1월 8일 櫻田門外不祥事件 및 4월 29일의 虹口公園爆彈事件에 사용한 수류탄과 폭탄의 출처는 당지 南市의 병공창에 있고 이를 김구에 제공하기 위해 중개한 자가 동병공창의 창고장이었던 한인 王雄이라 칭하는 王海雲임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것 같다. 즉 이에 관하여는 앞서 安恭根이 누설한 바와 柳相根의 진술에 의해 이를 추측할 수 있을 뿐 아니라 尹奉吉의 진술에 의하면 그가 처음 김구로부터 폭탄 2개를 제공받은 것은 佛租界 西門路 226호이며 이 집은 당시 왕웅의 집이였던 것으로 이 사실은 왕웅이 폭탄제공의 중개자였음을 추측하기에 충분하다. 그뿐 아니라 김구의 통신상의 연락자가 되고 또 왕웅과도 친한 사이인 민필호가 위 폭탄을 왕웅이 병공창과 의논하여 김구에 수교한 것이라고 진술하였다. 덧붙여 말하면 왕웅은 사건발생 후에도 김구와 긴밀한 연락을 유지하고 있었던 모양인데 9월 상순 西門路 226호의 집을 퇴거하여 佛租界 四明邸 12호 鄧司令의 집에 기거하였다. 그 후 병공창을 사직하고 목하 三門灣開港公司에 취직 근무 중이다.

 김구가 대역사건 범인 이봉창에게 수교한 300불과 그가 東京으로 송금한 100원이 재미한교가 임시정부에 보낸 송금에 의한 것임도 거의 확실한 것 같다. 당시 김구는 임시정부 재무부장의 직에 있었고 이들 임시정부에 보낸 송금을 이용할 수 있는 지위에 있었던 것이다36_036_0 李奉昌의 진술에 의하면 1931년 12월 13일 밤 사진관과 같은 집을 나와 걸으면서 하는 말에 김구는 미국에 있는 한인동포로부터 자금을 송부해 오는 것이라고 누설하였다 한다(이봉창 제8회 신문조서 제8문답) 한인청년당 이사장 임시정부 외교부차장 金晳이 누설한 바에 의하면 작년 만주사변 이래 재미한교의 송금이 증가하여 재무부장 김구가 이를 처리하고 있으므로 이봉창에 준 돈은 위 재미한교의 송금에 의한 것임이 명백하다고 말했다.닫기. 홍구공원폭탄사건의 하수인 尹奉吉에 수교한 90불, 崔興植에게 지급한 580불36_136_1 본년 3월 28일 상해를 떠날 즈음하여 김구로부터 180불, 4월 26일 200불 5월 19일 200불을 받았다.닫기(전후 3회에 걸쳐) 柳相根에 지급한 1,000불36_236_2 2월 25일 광동으로 향해 출발하기 2일전에 민단에서 김구로부터 700원을 받고 다시 4월 26일 大連으로 출발할 즈음 300원을 받았다.닫기(전후 2회) 李德柱에 지급한 120원, 兪鎭萬에 수교한 60불, 金兢鎬에 지급한 50불 합계 1,900불의 흉포행위자금이 어디서 나온 것인가는 직후 알 자료가 없어 명료하지 않다. 그러나 본년 3월 20일 불계에서 한인측 金九, 金澈, 趙素昻 등이 상의하고 중국 측 광동파 胡用淸 등과 더불어 中韓民族抗日大同盟을 조직한 사실에서 근거하여 아마 위 동맹의 중국 측 간부를 통해 혹은 광동파 내지 19로군 간부로부터 지출을 받은 것으로 사료된다. 홍구공원폭탄사건은 한인독립운동자 측에서 보면 의외의 성공이며 중국 측 항일 제단체에 이상한 충격을 주어 이들 단체 간에는 한인독립운동단체를 이용하여 항일수단에 공용하려는 기운이 농후한 것이 있다. 이 정세를 본 중국 각지의 한인독립운동자들은 수처에서 큰 소리로 자기 이름을 외치며 중국측에 접근을 기도하고 서로 다투어 자금 인출에 열중하게 되었다. 즉 당지 韓國獨立黨 중 金澈, 趙素昻 일파는 市商會에, 金九 일파 · 李裕弼 일파는 각각 東北義勇軍後援會 東北水災難民救護委員會에, 또 김구 일파는 따로 19로군에 접근하여 독립운동 내지는 흉포행위 실행을 위해 상당한 다액의 자금 출연을 요청하여 온 것 같다. 閔弼鎬의 진술 기타 정보에 의하면 김구파, 김철파, 이유필파에서 모두 19로군 동북의용군후원회 시상회 등에서 수천원의 출연을 얻고 있는 모양이나 구체적 사실은 명료하지 않다36_336_3 閔弼鎬의 진술에 의하면 한인과 중국 측 항일단체와의 사이의 자금 수수 상황은 앞서 표와 같다(헌병대조사에 의함).닫기

연 월 일금액교부자수령자적요
1931년
말일
불상朱慶灡朴南坡안공근을 거쳐 김구에 교부하여 독립당의 비용에 충당하였다고 한다. 또 일설에는 이봉창의 일본도항에 관계가 없느냐고 말하는 자도 있다.
1932년
5월 초순
5,000불上海市商會金澈, 趙素昻안창호와 윤봉길의 가족 구휼금으로 수령하였다고 말하나 2명이 횡령착복하였다는 설이 있다.
1932년
5월 중순
각 300불朱慶灡金弘叙, 崔東旿,
金元鳳, 申翼熙
 
상동2,000불상동朴南坡안공근을 거쳐 김구에 교부
1932년
5월 하순
1,000불상동朴南坡독립당단에 교부한다는 언질로 얻었으나 이유필과 박남파의 쟁탈전이 되어 아직 누구에도 교부돼 있지 않다.
1932년
연월일불상
10,000불十九路軍王雄안공근을 거쳐 김구에 교부하다 독립당비와 윤봉길 가족 구휼비로 하였다고 말함.
1932년
연월일불상
금액불상
폭탄 약간과 같이
朱齊靑韓國革命黨 王公海 
1932년
6월 초순
5,000불東北災民救濟會上海韓人僑民團 
1932년
10월 9일
5,000불褚輔成安恭根교부의 승낙을 받았으나 아직 실제 접수가 없다고.

 제6. 최근 한인독립운동간에서의 반김구 열기의 대두와 김구의 廣東여행설

 櫻田門外 및 虹口公園에서의 흉포행위는 어느 것이고 김구 개인의 계획 책모에 의해 실행된 것이라 하여 위 2사건으로 말미암은 성명은 홀로 김구가 독차지한 바가 되어 임시정부, 독립당, 교민단 등의 간부로서 이를 불쾌해 하는 자가 적지 않다. 앞서 金澈은 중국 측으로부터 지급된 자금문제에 관련한 임시판공처습격사건으로 인해 이를 주로 김구 일파의 사주에 의한 것이라 하여 크게 품은바 있고, 이유필 등 민단간부 사람들은 김구가 2사건으로 물질상 상당히 유복한 현상임에도 불구하고 같이 2사건 때문에 거주에 협위를 받고 그 직을 떠나 분산 유리한 무고한 한인을 돌보는 바 없음을 원망하고 있다. 또 獨立黨으로서는 그 반대당인 韓國革命黨41_041_0 韓國革命黨은 본년 2월 상순 조직되었다. 그 주요인물은 尹琦燮(원 仁成學校 校長), 鄭泰熙(1929년도 上海僑民團 총무), 金士執(재한국 변호사) 등이며 이사장은 尹琦燮, 총무는 鄭泰熙, 외교부장은 申翼熙, 재정부장은 王雄이다. 전 당원 약 40명중 상해에 있는 成濬英, 崔龍得 외 약 20명이며 南京당원중 申翼熙가 가장 유력하며 동인은 남경국민당 중앙당부의 모과에 근무하고 있어 중국 측과의 연락에 밀접한 것이 있다. 또 남경에 있는 한인 비행사는 모두 동당원이다. 동당의 목적은 獨立黨의 그것과 매우 동일하나 다만 이와 정권쟁탈을 해야 할 대립적 지위에 있다. 동당의 윤기섭, 신익희는 다 같이 독립당원이었으나 독립당에서 제명된 자이다.닫기의 일파가 자기 세력 확장을 위해 김구에게 접근하려고 하므로, 김구가 이를 이용하여 자기의 손아귀에 거두어 이윽고 임시정부의 실권을 장악하려고 하는 야심을 감춘 것이라 하여, 김구에 대해 시기의 눈으로 감시하는 실상이다. 김구는 사건 후 褚輔成의 집에서 비호 받았으나 9월 상순 그 집을 나와 같은 嘉興에 있는 褚의 직포공장 가륜사창의 부속 사택으로 이전하여 李東寧, 嚴恒燮 동가족 3명, 金毅漢 동 가족 2명과 동거하며 南洋華僑聯合會의 의연금을 주로 하여 기타 朱慶灡, 褚輔成 등의 원조금을 합치면 약 6만 불의 자금을 가지고 있다고 전해지고 있다. 이에 대해 독립당에서는 김구 자신이 상해로 와서 합작할 것을 요청하였으나 김구는 말을 이리저리하며 응하지 않고 그 태도가 도리어 한국혁명당에 편을 드는 듯한 모양이 보였다. 결국 최후적 교섭을 하기 위해 10월 5일 이사장 宋秉祚는 杭州에서 김구파의 수령 李東寧과 친교가 있는 趙琬九를 통하여 김구와 이동녕에게 면접을 요청하였다. 조완구는 송병조의 뜻을 승낙하고 익 6일 그 뜻을 재嘉興 김구에게 서면으로 통지한 바 있었다. 송병조가 김구에 면담할 용건은 김구로 하여금 완전히 독립당으로 복귀할 것을 권설하는데 있었던 것 같다. 이에 대해 김구는 부재이고 이동녕은 병이라 칭하고 면접을 거부하였다. 송병조는 불평을 가득 품고 10월 12일 헛되이 상해로 돌아왔다. 조완구는 따로 위의 형편을 상해의 김철에게 통신하였다41_141_1 10월 13일자 재杭州 趙琬九로부터 재上海 金澈에게 보낸 다음과 같은 서간(역문)이 있다.
江兄귀서는 잘 받았습니다. 그 후 별고 없으신지요 소생은 여전하게 지내고 있읍니다. 金九는 부재이고 이동녕은 병으로 올 수가 없다고 합니다. 宋군은 어제 귀환하였읍니다. 어제 상해한문을 보오니 ‘我運動 過去의 誤謬’라 제한 논문은 무의식적인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귀형도 보셨을 줄로 생각합니다. 무엇인가 들으신 것은 없읍니까. 秋凉이 깊어가는 때인 만치 조심하시기를泉弟로부터 10월 13일
닫기
. 이에 있어 송병조, 이춘산, 김철, 박창세 등 독립당 간부가 회합하여 김구 태도에 대한 장래의 방책을 의논하고 그의 금전문제에 관한 비행을 조사 발표하여 이를 성토하기로 하고 또 김철에 대해 앞서 공직을 피탈 처분한 것을 취소할 것을 약속하였다. 이리하여 김구 일파는 사실상 독립당과 분리한 것 같은 상태가 되고 위 양자 간의 골은 더욱 깊게 되었다. 이보다 앞서 김구는 19로군이 당지를 철퇴한 후 南洋華僑聯合會, 東北義勇軍後援會, 東北難民救濟聯合會 등에 대해 그의 심복인 朴南坡를 중개로 하여 열심히 동작을 걸어 그의 경제적 원조를 구하려고 노력해 왔고, 또 상당히 그 목적을 달성한 것 같으나 더욱 그 운동을 확대할 목적으로 앞서 박남파를 廣東으로 보내 광동정부 요인에게 운동케 한 바가 있었던 모양이다. 그런데 박은 그의 교섭이 뜻과 같지 않아 10월 하순 서신을 동북의용군후원회 간부 吳山41_241_2 吳山은 四川省인으로 연령은 48세 일본제국대학 법학사로 오랫동안 廣東에서 정치운동에 종사했으며 일시 廣東政府 사법차장으로 근무하였다. 북벌군이 南京에 들어오기 전부터 上海에 체류하여 全國鐵路協會 총간사의 직함으로 배일운동이 일어날 때마다 배일단체의 주동자가 되어 있었다.닫기에게 보내 廣東省당부 정치분회 주석 陳濟棠에게 소개해 달라고 요청하였다. 또 한편으로는 김구에게 글을 보내 광동측은 김구 자신이 와서 교섭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는 의향이므로 급히 광동으로 와달라고 요청하였으므로, 김구는 마침내 뜻을 결심하고 10월 31일 그의 심복의 한사람인 안공근을 동반하고 당지를 출발하여 광동으로 향하였다고 한다. 또 이와 동시에 당지 한인 사이에서는 김구는 신변의 위험을 두려워하여 남양으로 도피하였다는 풍설이 유포되고 있다. 위 광동행에 관해서는 최근 그의 비호자인 褚輔成이 누설한 바라하여 전해지는 것이므로 단지 소문으로 들어 넘기기 어려운 것이 아닌가 사료된다.

 제7. 한국 각 혁명단체의 연합과 중한항일운동의 합작

 獨立黨내에 있어서의 反金九 열기가 앙양해온 일은 전술한 바와 같다. 최근 동당에서는 金九, 李東寧, 安恭根, 嚴恒燮, 趙琬九 5명을 제외하려는 의논이 있고, 독립당 외에 시국에 자극되어 수처에 조직된 한인의 혁명 각 단체 또한 김구의 전횡적 활동과 독점적 성명에 겸연하여 이에 반감을 품는 자가 적지 않다. 그런데 10월 중순 北京에서 金永浩라 칭하는 李埈然과 金奎植의 2명이 상해로 와서 일면 그의 소속단체인 遼東義勇軍의 대표라 하여 東北義勇軍後援會의 경제적 원조를 요청하는 동시에, 한편 獨立黨과 韓國革命黨과의 사이의 불화를 조정하는데 분주하였다. 그 알선의 결과 독립당과 한국혁명당과의 융화를 보았을 뿐 아니라 더우기 재北京 韓國同族會, 재南京 義烈團, 재滿洲 朝鮮革命黨 등 5단체의 연합을 실현하게 되었다. 무릇 동북의용군후원회 기타 항일단체는 한국혁명단체에 대해 그 운동자금을 지급할 의사가 있으나 그 단체와 이를 대표하는 인물이 구구하여 어느 것을 원조해야 할 것인지에 미혹되어 이의 응대에 고심하고 있으므로, 쌍방의 편의를 위해 그 통일연합을 할 필요가 박두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리하여 10월 말에 이르러 위 5개 단체는 서로 합하여 ‘韓國對日戰線統一同盟’이란 것을 조직하였다. 그 단체명과 책임자는 다음과 같다.

 韓國獨立黨(上海) 李春山 金枓奉

 韓族同盟會(北京) 金奎植46_046_0 金奎植은 미국유학생이며 天津에 있었으나 東北義勇軍後援會와 연락하기 위해 10월 중순 상해로 와 목하 당지에 있으면서 한국독립운동 통일을 위해 알선중이다. 일설에는 그는 동북의용군후원회로부터 5,000원의 여비를 받고 북미로 선전을 위해 여행할 예정이라고도 운운한다.닫기

 朝鮮革命黨(滿洲) 崔義山47_047_0 崔義山은 日本士官學校 출신으로 연령은 50세 가량.닫기 柳春郊(별명 東說)

 義 烈 團(南京)      朴健雄48_048_0 朴健雄은 南京에 있다. 연령은 27~8세이다.닫기

 韓國革命黨(南京) 申翼熙 尹琦燮

 그런데 한편 중국 측 항일제단체간에도 동북의용군후원회 간부 朱慶灡, 褚輔成 일파의 전횡을 미워하는 자가 적지 않아 차라리 차제에 각 단체를 일괄하여 연합조직을 만들어 내어 한국 측의 연합조직과 합작하는 것이 더 낫다고 간주하는 자가 많다. 이에 중한 양 간부가 여러 가지로 접충한 결과 이에 연합조직을 만들기로 되어 11월 2일, 中國 街城內 小東門 부근에서 韓國獨立黨 이하 5단체와 중국 측 항일 제단체 대표자가 회동 협의한 결과 ‘中韓民衆討日同盟’이란 것을 조직하였다. 그리고 본 동맹의 사무는 총무부, 군무부, 외교부, 재무부, 조직선전부, 특무부, 조사부의 7부에 의해 분장되었다. 한인으로서 그 책임적 지위에 있는 자는 군무부장 柳春郊, 조직선전부장 朴健雄, 특무부 부부장 李春山, 동부원 李秀峰 등이 있다. ‘中韓民衆討日同盟’의 중국 측의 구성분자 여하, 그 강령, 목적, 활동상황 등에 이르러서는 목하 계속 내사중이나 위 단체 성립에 의해 재중한인의 독립 또는 항일을 목적으로 하는 독립운동의 열기는 더욱 높아져 각종 세력의 협조통일에 의해 그 역량을 강화하여 온 것이 있음은 부인하지 못할 사실이라고 말할 것이다. 시국 변전에 응하여 여하한 방향으로 그 운동을 전개해 오느냐 무릇 주의를 게을리할 수 없는 것이 있을 것이다.

▪ 國會圖書館編, 『韓國民族運動史料(中國篇)』, 742~752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