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51. 폭탄투척사건 발생 후 韓國革命黨 영수 安昌浩 피포  

51. 폭탄투척사건 발생 후 韓國革命黨 영수 安昌浩 피포

 중상을 입은 重光은 세 차례나 혼절

 白川은 계속 피를 토하고 野村은 실명

 외국 언론은 이번 사건이 정전회담에 악영향을 미치지 않을까 우려

 어제 虹口公園에서 발생한 폭탄투척사건으로 일본 군 · 정 요인 6명이 부상을 입었다. 오늘 아침 본보 기자가 취재한 결과에 의하면 부상자의 현재 상황은 다음과 같다.

 重光은 여전히 위험한 상황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오늘 새벽부터 오전 10시까지 이미 3차례나 혼절하여 장뇌주사를 4번이나 맞았다. 가슴에 심한 상처를 입은 白川은 각혈이 멈추지 않고 있어 역시 위급한 상황에 처해 있다. 河端은 오늘 새벽 3시 10분 사망하였다. 野村은 두 눈이 모두 실명된 상태이다. 植田은 부상이 경미한 편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발가락 몇 개를 잘라내야 하였다. 村井은 어제 저녁 퇴원하여 집에서 요양 중이나 불안감에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한 것으로 전해진다. 어제 사건이 발생한 직후 일본 측은 프랑스조계당국의 협조를 얻어 대대적인 한인 체포에 나서 한국독립당 영수 安昌浩 등을 체포하였다. 안창호 등의 체포와 관련한 상세한 내용을 집중 보도한다.

 韓國革命黨 영수 安昌浩 피포

 어제 오전 홍구공원에서 폭탄투척사건이 발생하자 오후 1시 일본영사관 경찰이 프랑스조계를 방문하여 한인 李春山의 체포 인도를 요청하였다(이춘산은 현재 한국교민단 총재로 일찍이 한국임시정부 요직을 역임하였다). 일본의 요청을 받아들인 프랑스조계당국은 즉시 사복형사대를 霞飛路 寶康里 27호 이춘산의 집에 파견하여 수색에 나섰다. 이춘산이 외출 중인 것을 확인한 형사대는 이씨가 귀가하기를 기다렸다. 이때 마침 이씨의 친구인 안창호가 일이 있어 이씨의 집을 방문하였다. 안창호를 이춘산으로 오인한 형사대는 안 씨가 집안으로 들어서자마자 그를 체포하여 盧家灣에 위치한 순포방으로 압송하여 심문하였다. 안 씨는 자신이 이춘산이 아니라고 극구 부인하였다. 또한 소식을 듣고 달려온 한국인 유력인사들이 이구동성으로 안창호를 변호하며 구출하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랑스조계당국은 안창호를 일본영사관에 인도하였다.

 安昌浩의 약력

 한국독립당의 영수인 안창호는 한국인 모두가 믿고 존경하는 민족지도자로 한국임시정부 요직을 역임하였다. 17세에 혁명사업에 투신한 뒤 지난 40년간 오직 조국과 민족을 위해 한 길을 달려왔다. 평범한 농부 집안에서 출생한 안 씨는 젊은 시절부터 혁명사업에 투신하였는데 한인 사이에 큰 영향력을 발휘하였던 ‘新民會’도 안 씨가 주도한 단체였다. 신민회는 전국 각지에서 약 1만여 명의 청년동지를 규합하여 국권회복운동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이 운동은 실패로 돌아가고 안창호는 부득이 망명길에 오르지 않을 수 없었다. 한동안 미국에서 교민들을 규합하여 혁명단체를 조직하고 활동하던 안창호는 ‘3 · 1운동’ 후 상해로 활동무대를 옮겨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국내외 각지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던 한인들은 모두 안 씨의 지휘를 받았다. 혁명사업에 뛰어든지 이미 40년이 지난 안 씨는 모든 한인으로부터 존경을 받는 인물로 일찍이 한국임시정부 총리를 역임하였다. 조국을 위해 평생을 바친 안 씨의 혁명역사와 탁월한 지도력은 아국의 孫中山 총리를 떠올리게 한다.

 목격자들의 증언

 홍구공원에서 폭탄투척사건이 발생했다는 소식을 접한 기자는 즉시 홍구공원으로 달려갔다. 그러나 기자가 도착했을 때는 이미 주변에 철통같은 경계망이 펼쳐진 뒤라 공원에 입장할 수 없었다. 이에 기자는 기념식에 참가했던 일본인들을 상대로 조심스럽게 사건 당시 상황을 취재하려 하였다. 그러나 일본인들은 한결같이 취재에 불응하였다. 다행히 기념식에 초대받아 현장을 직접 목격하였던 서양인 몇 명을 취재할 수 있었다. 이들의 증언을 토대로 당시 상황을 상세히 소개한다.

 기자가 취재한 첫 번째 목격자는 기념식장에 초대받았던 서양인이었다. 그는 “사건은 重光 공사 일행이 열병을 마치고 열병에 참가한 병사들의 경례를 받은 뒤 사령대 중앙에 자리하자마자 발생하였다. 사령대는 白川, 重光 등 군 · 정 요인과 각 국 외빈을 위해 임시로 가설된 것이었다. 열병식이 끝나자 각 국 외빈은 자리를 뜨고 사령대 위에는 重光 등 일본 군 · 정 요인들만이 남아 군중들과 함께 국가를 제창하였다. 국가를 부른 뒤 잠시 장내가 조용해진 순간 거대한 폭음과 함께 사령대 주변에 농연이 자욱하였다. 폭발음이 울림과 동시에 사령대의 일부가 무너져 내렸다. 장내의 질서가 일순간 어지러워지고 기념식에 참가했던 사람들은 모두 어찌할 바를 모르고 허둥대는 모습이었다. 폭탄이 도대체 어떻게 사령대에 투척되었는지는 직접 눈으로 보지 못했다. 다만 사령대에서 매우 가까운 곳에서 투척된 것만은 분명해 보였다. 폭탄이 폭발하는 순간 사령대 위에 있던 사람들은 표정이 하나 같이 얼어붙었고 곧이어 한 사람이 사령대 위에서 굴러 떨어졌는데 아마도 重光 공사였던 것 같다. 폭발 후 도처에서 비명소리가 들려오고 수많은 사람들이 사령대로 몰려갔다. 당시 사령대 위에 있던 사람 가운데는 植田 중장만이 여전히 제자리에서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고 그대로 서 있었다. 내 주변에 있던 사람들은 대경실색하여 모두 공원 정문으로 몰려 나갔다. 친구와 함께 나도 정문을 통해 밖으로 나왔는데 이때 이미 공원 주변은 군경이 에워싸고 있었다. 우리는 서양인이었기에 별다른 제지를 받지 않고 공원을 빠져 나올 수 있었다.”며 당시 상황을 소상히 전해 주었다.

 기자가 취재한 두 번째 서양인은 “열병식이 끝나고 각 국 외빈이 자리를 뜰 때 나도 자리에서 일어나 사령대에서 불과 몇 미터 떨어진 곳에 있었다. 폭발사건이 발생하자 우리는 완전히 공황상태에 빠져들었다. 처음에는 강력한 폭발음이 들리더니 잠깐 동안 온 세상이 쥐죽은 듯 고요하였다. 뒤이어 폭발로 인한 화염이 마치 번갯불처럼 번쩍이고 귓속에는 윙윙 거리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귓속의 소리가 점점 커지더니 마지막에는 천둥소리처럼 들렸다. 수천 명이 일시에 모두 정신이 나간 듯 보였다. 이도 잠깐 장내는 엄청난 혼란에 빠져 들었다. 사령대 부근에 있던 관중들이 난폭하게 범인으로 추정되는 사람을 제압하여 땅바닥에 내동이치는 모습이 보였다. 군중들은 그 사람의 옷을 찢고 발로 차며 마침내 얼굴을 피투성이로 만들어 버렸다. 일본헌병대가 군중들 사이에서 그를 끌어냈을 때는 얼굴부터 허리까지 선혈이 낭자한 모습이었다. 옷소매 사이로도 연신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비록 중상을 입었지만 그의 얼굴에는 때때로 냉소가 흘러 나왔다.”고 폭발 상황과 윤봉길의 피포 과정을 회상하였다.

 기자가 세 번째로 취재한 서양인 부인은 “폭탄이 폭발할 당시 나는 사령대에서 채 3미터도 되지 않은 가까운 곳에 있었다. 당시 상황을 자세하게 설명할 수는 없지만, 白川 대장이 내 발 앞으로 굴러 떨어지던 광경은 잊을 수 없다. 얼굴과 머리에 계속 선혈을 흘리던 白川 대장은 곧 호위대에 의해 병원으로 후송되었다. 당시는 내 생애에서 가장 긴장된 순간이었다. 내가 보기에 사령대 위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파편을 맞은 것 같았다. 첫 번째로 쓰러진 사람은 양복을 입고 있었다. 그 사람은 일어나려고 애쓰는 모습이었으나 기력이 없는 듯 곧바로 쓰러지고 말았다. 내가 보기에는 중상을 입은 듯하였다. 폭탄이 터질 때 마치 번갯불과 같은 섬광이 퍼졌다. 폭탄이 어디에서 어떻게 날아왔는지는 확신할 수 없다. 다만 河端 가까이에서 폭발한 것은 분명해 보인다.”며 여전히 긴장된 얼굴로 당시 상황을 기자에게 전해 주었다.

 네 번째 목격자는 “당시 나는 멀리서 망원경으로 사령대 주변을 관찰하고 있었다. 사령대 왼편에서 비옷을 입은 한 친구가 뛰어 나오기에 처음에는 이 사람이 촬영기사이겠거니 생각했다. 이 사람이 사령대 뒤로 사라짐과 동시에 폭발음이 들려왔다. 내 생각으로는 이 사람이 폭탄을 투척한 것이 분명해 보인다. 사령대는 지상으로부터 채 2미터가 되지 않은 높이였다. 폭탄이 터짐과 동시에 重光 공사가 먼저 바닥으로 떨어지고 이어 白川 대장이 떨어졌다. 사령대 뒤로 사라졌던 그 친구는 주변에 있던 군중들에게 끌려 나왔는데 이미 온몸이 선혈로 붉게 물들어져 있었다.”고 말하였다.

 다섯 번째 목격자는 “폭발음이 들린 뒤 폭탄을 투척한 청년은 군중들을 향해 전단지를 살포하면서 격앙된 어조의 유창한 일본어로 연설을 하였다. 일본 군경이 몰려들어 체포하려 하자 그 청년은 총을 꺼내들더니 총알이 다 떨어질 때까지 연속하여 수십 발을 난사하였다. 청년은 오른손과 왼발에 총상을 입고 체포되었다.”며 다른 목격자와는 다른 내용을 증언하였다.

▪ 『大晩報』, 1932년 4월 30일;『島山安昌浩全集』 제6권, 84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