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116. 虹口公園 폭탄투척사건 주모자 金九의 편지  

116. 虹口公園 폭탄투척사건 주모자 金九의 편지

 尹奉吉의 행동은 자신의 지시를 받은 것이라 주장

 이번 폭탄투척사건의 진실을 낱낱이 토로

 -본문은 金九의 글을 직역하여 보도하는 것-

 4월 29일 새벽 나는 윤봉길을 불러 폭탄 두 개를 건네주었다. 하나는 우리의 원수인 일본군벌을 제거하라는 것이었다. 폭탄을 건네면서 나는 다른 나라 사람들에 피해가 가지 않도록 조심할 것을 당부하였다. 또 다른 하나는 첫 번째 폭탄을 투척한 뒤 자살용으로 건넨 것이었다. 윤군은 태연하게 폭탄을 건네받았고 우리는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내세에서 다시 만날 것을 약속하고 작별의 악수를 나누었다. 나는 자동차 한 대를 세내어 윤군을 홍구공원으로 보냈다.  폭탄 2개와 大洋 4원만을 가지고 거사장소로 떠나는 윤군을 배웅하며 나는 마음속으로 거사가 성공하기를 빌었다.

 내가 바로 주모자

 윤봉길은 한국 禮山의 빈농 집안에서 출생하였다. 일본당국은 한인독립운동자를 일망타진하려는 의도에서 이번 홍구공원 폭탄투척사건을 모모 여러 한인 단체와 연결시키려 하고 있으나 여전히 진상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이번 사건에 연루된 혐의로 상해에 거주하는 무고한 한인들이 일본당국에 체포되었다. 뿐만 아니라 東京과 한국에서도 대대적인 검색과 체포가 진행되고 있다. 그러나 이번에 체포된 이들은 모두 이번 사건과 관련이 없다. 내가 바로 이번 사건의 주모자다. 상해를 떠나기 전 인도와 정의의 입장에서 이번 사건의 진상을 밝히려고 하는 것이다. 더불어 이번 사건의 진상을 밝히는 것이 우리 동지들의 애국열정을 불러일으켜 일본의 침략정책을 분쇄하는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거사 계획과 실행

 일본제국주의는 무력으로 한국을 병탄하였고 무력으로 중국 東三省을 약탈하였다. 이것도 모자라 선전포고도 없이 기습적으로 上海事變을 일으키기에 이르렀다. 일본의 거동은 동아와 세계의 평화를 해치는 침략행위이다. 이에 나는 세계평화를 위해하는 침략세력을 제거하고 인도주의를 실현시키기 위해 일련의 거사를 계획하였다. 그 첫 번째 행동으로 동경에 파견된 李奉昌군이 1월 8일 일황을 제거하려다 실패하였다. 일본군벌의 수뇌부들을 제거하기 위해 나는 4월 29일 재차 윤봉길군을 홍구공원에 보낸 것이다. 이제 이번 사건의 진상을 낱낱이 밝히고자 하나 동경사건에 대해서는 후일 다시 언급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尹奉吉의 역사

 1908년생인 윤봉길군의 부모님은 아직도 건재하시다. 부인과 두 자녀를 둔 윤군은 어려서부터 신동이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총명함이 남달랐다. 다만 성격이 급한 편이라 다른 사람들과 종종 다툼이 있었으나 싸움에서는 한 번도 진적이 없었다. 17세에 야학을 열고 5년 동안 빈농의 자제들을 가르쳤다. 일본인들의 경제적, 정치적 침략으로 동포들이 착취당하고 설움 받는 것을 볼 때마다 복수의 칼날을 갈던 윤봉길은 이를 실행하기 위해 집을 떠났다. 원래 上海를 목표로 했던 윤군은 여러 이유로 중도에 한동안 靑島에 머물게 되었다. 청도에 있는 동안 윤군은 일본인 中原兼次郞이 운영하는 세탁소에서 점원으로 일하였다. 여비에 충분할만큼 돈을 모은 윤군은 마침내 지난해 8월 상해에 도착하여 모 공장의 직공으로 취직하였다. 그러나 직원들에 대한 대우가 너무 각박하자 공장을 그만둔 윤군은 홍구시장 내 모 식품점에서 점원으로 일하며 기회를 노렸다. 여러 경로를 통해 비로소 나와 접촉한 윤군은 조국을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를 고민하다가 마침내 韓人愛國團에 가입하였다.

 한인애국단

 한인애국단은 전적으로 내 손에 의해 조직된 단체로 단원들은 모두 애국지사들이다. 애국단을 조직한 목적은 무력으로 빼앗긴 조국을 무력으로 되찾기 위해서이다. 따라서 조국을 위해 자신을 희생할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만이 단원이 될 수 있다. 대원에게 어떤 임무를 맡겨 어디에 파견할지, 누구에게 대원으로서의 자격을 인정할지는 모두 나 한 사람에 의해 결정된다. 고로 같은 한인애국단원이라도 다른 단원의 이름을 모르는 경우가 태반이다. 한인애국단은 회의 등 공개적인 절차를 거쳐 혁명사업 전개방침을 논의하는 기관이 아니라 철저한 비밀조직이다. 적의 수령을 암살하거나 적들의 행정기관 등을 파괴하는 것을 한국독립을 위한 혁명적 수단으로 삼고 있다. 우리는 白川이 지휘하는 대규모 군대와 결전을 벌인만한 병력이나 재력을 갖고 있지 않다. 오직 조국광복을 위해 자신을 희생할 열정을 가진 대원을 훈련시켜 맨주먹으로 삼엄한 일본군의 경계망을 뚫고 적의 심장부에 침투하여 적들을 제거할 뿐이다.

 나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는가?

 나는 누구인가? 이 글을 쓴 자는 누구인가? 내 이름은 金九이다. 일본군들이 체포에 혈안이 되어 있는 바로 그 김구이다. 금년 57세인 나는 이미 내 생명을 조국의 독립을 위해 바치기로 약속한 사람이다. 21세 때인 1896년부터 나는 조국과 민족을 위해 모험적 활동을 개시하였다. 당시 우리나라는 비록 사실상의 독립국이었지만 일본군은 이미 京城에 주둔하고 있었다. 일본군이 궁중에 난입하여 황후를 시해하는 사건이 발생하고 이로 인하여 전국이 커다란 충격에 빠졌다. 이때부터 나는 비밀리에 복수를 위한 행동을 준비하기 시작하였다. 나의 일본인들을 향한 복수의 첫 번째 행동은 黃海道 安岳에서 거행되었다. 내 손으로 일본육군장교 土田을 살해한 것이 그것이다. 거사 후 나는 내손으로 적 장교를 살해한 이유와 내 신상을 적은 장문의 글을 주변에 뿌려 일본당국에 체포되었다. 체포된지 20일 후 나는 濟物浦감옥으로 압송되어 법정에 서게 되었다. 당시 일본공사 林權助의 개입으로 나는 사형을 선고받았다.

 내가 감옥에 갇힌지 3년이 지난 뒤 나라의 사정은 갈수록 어려워져 간신히 명맥만 유지할 수 있을 뿐이었다. 세상이 뒤숭숭한 기회를 이용하여 탈옥한 나는 스님으로 위장하고 京城에서 멀리 떨어진 절에 몸을 숨겼다. 이후 나는 1년간 전국 각지를 유력하면서 조국을 위한 새로운 운동계획을 세우고 먼저 그 기초를 닦기 위한 준비작업에 착수하였다.

 1909년 安重根이 哈爾濱에서 伊藤博文을 암살한 사건이 발생하자 일본경찰은 이 사건에 연루되었다는 혐의로 나를 체포하였으나 곧 석방하였다. 이후 한동안 황해도 안악군에서 교직에 종사하던 나는 1911년 당시 조선총독 寺內 암살미수사건에 연루된 혐의로 재차 체포되었다. 당시 15년형을 선고받았지만 감형으로 5년만에 석방되었다. 나는 오랫동안 가명을 사용하고 있었기에 다행히 적들은 나의 진짜 신분을 알지 못하였다. 이때 내 신분이 밝혀졌었더라면 지금의 나는 없었을 것이다.

 1919년 한국에서는 전국의 모든 동포가 참가한 대대적인 독립운동이 전개되었다. 이 무렵 생명의 위협을 느낀 나는 결국 조국을 떠나 중국으로 활동무대를 옮기게 되었다. 중국에 첫발을 디딘 순간부터 지금까지 단 한순간도 나는 조국을 위한 투쟁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지금 우리가 가진 무기라야 권총 몇 자루와 폭탄 몇 개에 불과하다. 비록 미력하지만 나는 한국이 독립을 이루는 그날까지 결코 투쟁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 『時事新報』, 1932년 5월 9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