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2) 韓國唯一獨立黨 上海促成會 創立과 活動(1927. 4. 11)  

2) 韓國唯一獨立黨 上海促成會 創立과 活動(1927. 4. 11)

 大正 15년(1926) 10월 당시 현저하게 고조되는 각 단체의 통일운동 열기로 우선 北京에서 大獨立黨組織促成會가 조직되었고, 이에 자극받은 上海의 不逞鮮人 중에도 각파의 통일에 의한 대동단결을 시도하려고 분주하게 움직였으나, 上海는 여전히 西北派와 畿湖派의 알력이 심해서 진척에 곤란을 느끼는 상태였다. 昭和 2년(1927) 3월 말 공산계열의 洪南杓 · 鄭柏 등은 自派가 이를 조직하도록 획책하면서 매우 바쁘게 움직인 사실이 있다. 같은 해 4월 10일 洪鎭 · 洪南杓 2인 명의로 全民族的獨立黨結成宣言文을 발표하고, 翌 11일 3 · 1黨에서 창립총회를 거행했는데, 당시 집합한 자는 약 40명이었고, (가)한국유일당 조직을 촉성하는 것, (나)한국민족의 독립적 역량을 집중하는 일에 노력하는 것 등의 강령 및 명칭, 위원 기타를 결정하고 조직을 끝냈다.

 그리하여 당시의 집행위원은 (△ 표시는 반대 결석했지만 선출된 자)

洪鎭, 李東寧, △李圭洪, 趙尙燮, 趙琬九, 洪南杓, 曺奉岩, 鄭柏, 黃勳, 康景善, 李敏達, 羅昌憲, 崔錫淳, 崔昌植, △金徹, △金甲, △吳永善, △金枓奉, 安泰根, △金九, △尹琦燮, 宋秉祚, 金圭植, 玄鼎健

 이상 25명이었는데, 원래부터 좌익분자의 일시적인 야합이었으므로 黨內의 암투는 共産 · 非共産 두 파로 분립하고, 집행위원도 거의 매번 流會를 거듭하였다. 昭和 2년(1927) 9월에 이르러 北京促成會가 上海에서 각지 促成會(北京 · 上海 · 廣東 · 武漢 · 南京에 促成會가 있음)의 연석회의를 개최하자고 교섭하였다. 이를 계기로 집행위원 25명을 15명으로 줄이고, 연석회의 출석대표로서 李東寧 · 洪鎭 · 金枓奉 · 洪南杓 · 趙素昻을 선출하였다.

 同 연석회의는 같은 해 9월 30일부터 개최될 예정이었지만, 각지 대표자의 未着과 공산 · 민족 양파의 고집으로 연기에 연기를 거듭하다가 겨우 11월 7일에 준비회를 열었으며, 9일부터 본회의를 개최하였다. 출석대표로 北京에서 曺成煥, 廣東에서 鄭有麟, 武昌에서 白德林, 南京에서 金永浩 · 金一柱가 출석하여 11월 22일에 개회했는데, 본회의에서는 “전민족의 생사가 걸린 우리 독립운동은 지금 어떠한 상태에 있는가? 2천년래의 入寇와 3백 년 전의 원수와 18년 동안의 치욕은 말하지 않더라도, 현재 및 장래에 있어서 우리의 생존조건을 片端부터 박탈하는 그들 왜적에 대한 사활결투인 이 독립운동이 과연 어떠한 상태에 있는가? 말을 하려니 전율을 견딜 수 없지만, 사실상 萎靡不振한 상태에 있다”는 冒頭발언을 하고, 운동전선의 통일에 노력함으로써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자는 선언 및 (가)本會는 한국의 유일한 독립당의 성립을 촉성하는 各地의 促成會組織籌備會 성립에 노력한다, (나)本會는 한국독립에 필요한 전민족적 일체의 혁명역량을 총집중하는 일에 先驅임을 期한다, (다)本會는 우리의 실상과 세계 대세를 감안하여 독립당 조직에 관한 계획을 연구 · 제공하려는 것이며, 이상을 企圖한다는 綱領을 법으로 보호하고, 만주에서 유일당 촉성을 종용하기 위하여 대표 2인(上海 1, 北京 1)을 파견한다는 것을 결의하였다. 이렇게 해서 昭和 3년(1928) 1월 초 盤石縣에서 在滿 각 단체 통일회의를 촉진했는데, 上海促成會는 여전히 공산파가 대세를 좌우하며 점차 그 색채가 농후해지고 있고, 조직 이래 華東韓國學生聯合會 · 上海韓人學友會 · 上海韓人靑年會 등은 촉성회에 가맹 지원하고 있는 중이다. 현재 회원은 60명 내외라고 하며, 파벌투쟁이 늘어난 것 외에 特記할 활동은 없지만, 不逞團이 끝까지 대동단결에 노력하여 각지에서 일제히 촉성회조직이 생긴 것은 鮮內에서 新幹會의 설립과 아울러서 고려할 때 상당히 주의할 필요가 있음은 물론이며, 현재 上海에 있는 단체 중에서 중국본부한인청년동맹과 함께 비교적 유력한 단체에 속한다.

▪ 慶尙北道警察部, 『高等警察要史』, 1934, 105~106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