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제

해 제

 한국국민당은 1935년 11월부터 1940년 5월까지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유지 운영하였던 정당이었다.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정당을 조직하고, 이를 중심으로 정부를 유지 운영하기 시작한 것은 1930년부터였다. 1930년 1월 임시정부 요인들이 한국독립당을 결성하고, 이를 기초세력으로 하여 정부의 조직을 유지 운영한 것이 그 시초였다. 그러나 한국독립당은 1935년 7월 5개 정당 및 단체가 통일을 이루어 민족혁명당을 결성할 때, 이에 참여하면서 해체되었다. 이후 한국국민당이 결성되어 임시정부를 유지 운영하였다.

 한국국민당은 민족혁명당 결성에 참여하지 않은 한국독립당 세력들이 결성하였다. 5개 정당 및 단체가 통일을 이루어 단일당을 조직하자는 논의가 있을 때, 한국독립당은 단일당 결성에 참가여부를 둘러싸고 두 세력으로 갈렸다. 참가하자는 측과 불참하자는 측으로 나뉜 것이다. 趙素昻을 비롯하여 참가를 주장하는 세력은 1935년 6월 한국독립당의 해체를 선언하고, 당원 70여명이 단일당 결성에 참여하여 민족혁명당을 창립하였다. 그러나 宋秉祚 · 車利錫 등을 중심으로 한 ‘불참파’는 단일당 결성에 참여하지 않았다.

 민족혁명당 결성에 참여하지 않은 ‘불참파’들이 세력을 결집하여 한국국민당을 창당하였다. 송병조와 차리석은 항주에 있던 李始榮 · 趙琬九, 가흥에 머물고 있던 李東寧, 광주에 있는 한국독립당 광동지부의 金朋濬 · 楊宇朝 등과 연락하여 세력을 결집하였다. 그리고 한인애국단과 낙양군관학교에 한인특별반을 설치하여 군사간부를 양성하면서 많은 청년들을 거느리고 있던 金九와 손을 잡았다. 이들은 모두 한국독립당 소속으로 민족혁명당 결성에 참여하지 않았던 인사들이었다. 이들이 세력을 결집하여, 1935년 11월 한국국민당을 창당하였다.

 이들은 한국국민당의 창당을 추진하면서 임시정부의 무정부상태를 수습하였다. 임시정부는 민족혁명당이 결성되면서 무정부상태나 다름없게 되었다. 당시 임시정부 국무위원 7명 가운데 金奎植 · 趙素昻 · 崔東旿 · 梁起鐸 · 柳東說 등 5명이 국무위원직을 사임하고 민족혁명당에 참가한 것이다. 이로써 임시정부는 宋秉祚 · 車利錫 2명의 국무위원만 남게 되었고, 사실상 무정부상태가 되고 말았다.

 이들은 민족혁명당 결성에 참가하지 않은 한국독립당 세력의 재결집을 추진하면서, 임시정부의 조직을 재정비하였다. 임시정부 조직의 재정비는 임시의정원 회의를 통해 이루어졌다. 1935년 10월 19일 제28회 임시의정원 회의가 개최되었다. 임시의정원 회의에는 재적의원 13명 가운데 7명이 참석하였다. 이 회의에서 민족혁명당 참가를 위해 사직서를 제출한 5명의 국무위원에 대한 보선이 실시되었다. 그 결과 김구 · 이동녕 · 이시영 · 조성환 · 조완구 등 5명의 국무위원을 선출하였다. 그리고 이들을 중심으로 임시정부의 조직을 갖춤으로써, 임시정부는 무정부상태를 벗어나게 되었다.

 임시정부의 무정부상태를 수습한 후, 이들은 임시정부를 유지 옹호하기 위해 한국국민당을 결성하였다. 임시정부를 유지 운영할 수 있는 기초세력이 필요하기도 하였고, 또 反임시정부를 표방하는 민족혁명당에 대항할 수 있는 정당도 필요하였던 때문이었다. 한국국민당의 결성은 옛 한국독립당 세력들 중 민족혁명당에 참가하지 않은 세력들을 결집하는 방법으로 이루어졌다. 그리고 1935년 11월 말 이사장 金九, 이사 李東寧 · 宋秉祚 · 趙琬九 · 車利錫 · 金朋濬 · 安恭根 · 嚴恒燮, 감사 李始榮 · 曺成煥 · 楊明鎭을 선출하여 한국국민당을 창당하였다.

 한국국민당은 창당 이후 선전활동과 청년층을 중심으로 전위적 조직체를 결성하면서 세력과 지지기반을 확대시켜 나갔다. 선전활동은 주로 당 기관지를 통해 이루어졌다. 기관지는 『韓民』으로 1936년 3월부터 월간으로 발행하였으며, 주로 安重根 · 李奉昌 · 尹奉吉을 순국열사로 찬양하면서 청년들의 영웅심 및 혁명의식을 고취하였다. 또 韓國國民黨靑年團과 韓國靑年前衛團을 결성하여, 당의 강력한 지지기반이자 전위조직으로 삼았다.

 한국국민당은 이러한 활동과 세력확대를 통해 임시정부를 유지 옹호하는 정당으로서, 또 민족혁명당에 맞설 수 있는 정당으로서의 위치를 확보해 갔다. 그리고 1937년 중일전쟁을 전후해서는 민족주의 진영의 주도적 단체로서의 위상을 갖게 되었다. 당시 민족혁명당을 탈당하여 결성된 한국독립당(조소앙 · 홍진 등)과 조선혁명당(이청천 · 최동오 등) 등의 민족주의 세력이 있었다. 이들과 함께 임시정부를 옹호 유지한다는 전제하에 연합을 실현하여, 한국광복운동단체연합회를 결성한 것이다. 한국국민당은 한국광복운동단체연합회를 주도하면서, 이를 기반으로 1940년 5월까지 임시정부를 유지 운영하였다.

 한국국민당과 관련된 자료는 자료의 생성 주체로 보면, 크게 세 종류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한국국민당에서 생성한 자료이다. 한국국민당은 1935년 11월 창당 선언문에서부터 1940년 5월 해체선언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문서들을 생산하였다. 그러나 원 문서는 별로 남아 있지 않다. 대한민국임시정부와 함께 중국대륙 여러 곳으로 이동해 다녀야 했던 것이 주요한 요인으로 생각된다. 현재 전해지고 있는 한국국민당 명의로 된 문서들은 대부분 3 · 1절, 국치일 등 기념일에 발표한 선언서들이다. 그러나 기관지로 발행한 『韓民』과 산하단체인 한국국민당청년단에서 발행한 『韓靑』은 대부분 남아 있다. 이는 崔起榮 교수와 韓相禱 교수가 그동안 여러 통로를 통해 산발적으로 수집해 왔고, 도산 안창호선생기념사업회가 미주지역에서 수집한 자료속에 일부가 포함되어 있기도 하였다. 또 고려대학교 중앙도서관에서 수집한 것도 있다. 이로써 『한민』과 『한청』은 거의 빠진 것 없이 남아 있게 되었다.

 두 번째는 일제측이 생성한 정보자료이다. 일제측은 상해총영사관과 특별경찰을 비롯하여 여러 통로를 통해 대한민국임시정부를 비롯하여 한국국민당과 관련한 정보를 수집하여 보고하였다. 일제측의 정보자료는 그동안 일본외무성 외교사료관을 비롯하여 일본의 각 문서보관소에 소장되어 있는 것들을 수집하여 왔고, 수집한 자료들은 대부분 자료집으로 발간되었다. 이러한 자료집은 일본측에서 발행되기도 하였고, 국사편찬위원회를 비롯하여 국내의 여러 기관에서도 자료집을 발간해 오고 있다.

 세 번째는 중국측에서 생성한 자료들이다. 중국측의 자료는 시기적으로 1939년과 1940년에 생성된 것들이다. 한국국민당은 대한민국임시정부와 함께 1939년 5월 四川省 綦江에 도착하였고, 이후 1940년 5월까지 기강에 머물고 있었다. 한국국민당이 기강에 머물고 있을 때, 綦江縣 정부와 경찰당국 등의 기관들은 자신의 관할구역에 들어온 한인들에 대해 인적 사항과 거주지 등을 월별로 조사하여 보고하였다. 그리고 한국국민당이 중국당국에 요청한 문제들에 대해 중국의 해당 담당자들이 장개석에게 보고를 올리거나, 해당 기관들끼리 처리문제를 둘러싸고 주고 받은 보고서들이 있다.

 본 자료집에는 이러한 한국국민당 관련자료들을 수집하여, 두 권으로 나누어 수록하였다. 제35권에는 한국국민당에서 직접 발표한 각종 문건들을 비롯하여 일제의 정보자료와 중국의 여러 기관들에서 조사 보고한 자료들, 그리고 한국국민당에서 발행한 『韓民』을 수록하였다. 제36권에는 한국국민당의 산하단체인 한국국민당청년단에서 발행한 『韓靑』을 수록하였다. 『한민』과 『한청』은 한 권에 수록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하지만, 분량의 문제로 인해 별도로 수록하게 되었다.

한국국민당 관련자료

 제35권에는 한국국민당 관련 자료와 한국국민당 기관지 『韓民』을 수록하였다. 한국국민당 관련자료는 자료의 생성 주체로 볼 때, 한국국민당측 자료, 일제측 자료, 중국측 자료 등 세 종류이다. 이 세 종류의 자료들을 별도로 구분하지 않고, 한 데 모아 연월일 순으로 정리하여 수록하였다.

 한국국민당측 자료는 한국국민당에서 생성한 자료들이다. 한국국민당 명의로 된 자료들 중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선언서 종류이다. 한국국민당은 1935년 11월 창당하면서 「선언 」을 발표하였다. 그리고 매년 3 · 1절 · 건국절 · 국치일 등을 맞을 때마다, 한국국민당 명의로 이를 기념하는 선언을 발표하였다. 이러한 각종 선언을 통해, 한국국민당이 추구하는 목표와 의의를 비롯하여 국제정세에 대해 분석하거나 활동방향 등을 밝히고 있다.

 창당 선언문이 남아 있다. 이는 한국국민당 이사장 김구, 그리고 이사와 감사의 공동명의로 발표된 것으로, 원본은 전해지지 않고 일제측 정보자료에 들어 있다. 한국국민당의 창당과 관련된 자료들은 거의 없지만, 유일하게 창당 「선언 」만 그 내용이 알려져 있다. 이 「선언 」에 한국국민당을 창당하는 이유와 한국국민당이 추구하는 목표가 나타나 있다. 한국국민당을 창당하는 이유는 그동안 독립운동이 사상의 차이, 견해의 不同, 조직의 무능 등에 있다고 반성하면서, 正大無邪한 정신과 群策群力으로 한 곳에 집결하여 독립운동에 매진하자는 데 있었다. 그리고 한국국민당의 추구할 목표를 다음과 같이 천명하였다.

  이에 우리는 국가주권의 완전한 광복과 全民的 정치 · 경제 · 교육의 3대원칙에 신앙을 확립하고 한국국민당을 조직하였다. 장래 더욱 더 성실, 건전, 영용의 비개인적 정신으로써 彷徨淆散 鬱怫恨怪하는 사람을 一團으로 하여 導成하고 玉碎의 귀함을 맛보고 瓦全의 수치를 극복하는 大英勇無畏의 步調로써 분투매진하고, 적의 모든 세력을 박멸하여 완전한 민주공화국을 건설하며, 위로는 조상의 광휘를 빛내고 아래로는 자손만대에 영예를 발전시켜서 세계 각국 민족과 공존공영을 도모할 것을 선언한다.

 한국국민당은 삼균주의를 정치이념으로 삼고 있다. “정치 · 경제 · 교육의 3대원칙에 신앙을 확립하고”라 한 것은 곧 삼균주의를 가리키는 것이다. 그리고 정치적 목표는 일제의 모든 세력을 박멸하고 국가주권을 완전히 광복하여 민주공화국을 건설한다는 것과 세계 각국 민족과 공존공영을 도모한다는 데 두었다.

 정치이념과 목표로 보면, 한국국민당은 상해에서 결성된 한국독립당과 똑같다. 삼균주의는 趙素昻에 의해 창안된 정치이념으로, 1930년 상해에서 결성된 한국독립당이 이를 정치이념으로 삼았다. 정치적 목표도 한국독립당과 다르지 않다. 또 한국국민당을 결성한 인물들도 모두 한국독립당 인사들이었다. 정치적 이념이나 주도 인물로 보면 한국국민당은 한국독립당의 후계체나 다름없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한국독립당이란 당명을 사용하지 않은 것은 이미 민족혁명당에서 탈당한 조소앙이 洪震 등과 함께 1937년 9월에 해체된 한국독립당을 재건하였기 때문이었다.

 한국국민당은 1936년 3 · 1절을 맞아 「한국국민당 삼일절선언 」을 발표하였다. 창당 이후 처음 맞는 3 · 1절이었다. 이를 통해 한국국민당은 그 존재를 세상에 드러냈다. 17년전 2천만 민중은 한국이 독립국이며 자유민임을 선언하고, 독립만세로 투쟁한 역사적 사실을 회고하면서, 한국국민당의 성격과 활동방향을 다음과 같이 천명한 것이다.

  오로지 삼일정신을 굳게 지키고 모든 선열의 유지를 계승하며 과거 우리 陣線내의 중대한 착오를 청산하고 한번이라도 異端的 思想에 좌우되어 기로에서 방황한 적이 없는 純眞한 광복운동자만으로서 쌓은 토대 위에 당의 기초를 세우고 반세기 가까운 장구한 세월에 오직 조국광복과 동포의 행복만을 위해 일관된 정신으로써 분투노력하고 있다. 또 동시에 이 운동을 영도해 온 여러 선배들로서 당의 領袖로 삼고 삼일운동 당시에 전민중의 지지와 7천 5백여 先烈의 흐르는 피의 대가로서 성립한 임시정부를 전복하려는 모든 반동세력을 숙청하고 이 기관을 강화시킴으로써 전민중이 본당을 열렬히 옹호하였고, 열렬히 옹호하는 전민중이 본당에 대해서 이것을 요구하고 있다.

 이는 한국국민당은 삼일정신과 선열의 유지를 계승하여 결성한 것이고, 순수한 민족주의 정당이라는 사실을 밝힌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異端的 思想이란 공산주의와 무정부주의를 말한다. 한국국민당은 공산주의나 무정부주의에서 방황하지 않았던 순진한 민족주의자들로 구성되었고, 조국광복과 동포의 행복을 위해 일관되게 투쟁할 것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임시정부는 3 · 1운동을 통해 흘린 선열의 피의 대가로 성립된 것이라며, 한국국민당은 임시정부를 적극 옹호할 것임을 천명하고 있다.

 한국국민당은 임시정부를 옹호 유지할 것임을 기회가 있을 때마다 천명하였다. 1936년 8월 29일에 발표한 「국치일에 임하여 」라는 선언서를 통해서도, 한국국민당은 3 · 1운동의 正脈을 계승한 정당이라는 것, 그리고 3 · 1운동의 정신을 이어 받아서 수립된 것이 임시정부라고 하면서, “엄밀한 조직하에서 임시정부를 옹호 전진하면서 민족적 반항과 무력적 파괴를 적극 전개하자”고 하였다.

 한국국민당은 그 산하에 韓國國民黨靑年團과 韓國靑年前衛團을 결성하였다. 일종의 외곽단체이자 전위조직이라 할 수 있다. 「한국국민당청년단 창립선언 」은 한국국민당청년단을 창립하고 발표한 선언이다. 한국국민당청년단은 김구 휘하에 있던 청년들을 중심으로 하여 결성되었다. 김구 휘하에는 두 개의 청년조직이 있었다. 중국중앙육군군관학교 입교생들을 중심으로 조직한 한국특무대독립군, 그리고 중앙육군군관학교에 입교시킬 목적으로 모집하여 수용하고 있던 학생훈련소가 그것이다. 그런데 한국특무대독립군의 실체가 일제 관헌에 발각되고, 또 1936년 초에는 핵심인물이었던 金東宇 · 吳冕植 등이 이탈하여 별도로 韓國猛血團을 조직한 일이 일어났다. 이를 계기로 김구는 한국특무대독립군을 해체하고 이를 대신할 조직으로 1936년 7월 11일 한국국민당청년단을 조직하였다.

 한국국민당청년단은 김구를 영도자로 모시고, 새로운 청년의 혁명운동을 일으키고자 결성되었다. 창립 선언을 통해 “한국국민당에 모인 청년투사들은 과거 40여년에 일관한 정신으로서 혁명운동에 분투노력 하신 백범 김구 선생의 영도를 받아 그의 손과 발이 되어 그의 정신과 사업을 계승하고저 純摯한 열정으로 분기하여 한국국민당청년단을 창립하였다”라고 하였다. 김구를 영도자로 삼고, 그의 손과 발이 되고자 한국국민당청년단을 창립하였다는 말이다.

 한국국민당청년단과 김구의 관계를 이해할 수 있는 것으로 「백범 김구 선생의 환갑을 축하함 」과 「백범 김구 선생의 약력 」이 있다. 이는 1936년 8월 27일 김구의 환갑을 맞아 한국국민당청년단에서 발표한 것이다. 여기에 한국국민당청년단에서 김구를 어떠한 인물로 여기고 있는지가 잘 나타나 있다.

  선생은 완전히 혁명에서 태어나고 혁명에 자라고 혁명으로 끝날 것을 또한 결심하였다. 그런 까닭에 한국의 올바른 혁명을 알려고 한다면 우선 선생의 굳세고 굽힘 없는 정신을 알고 선생의 바른 사상을 아는 것에 의해서, 또한 한국혁명을 기본으로 하는 데에서만 알 수 있다. 구월산 봉우리에 남아 있는 참호의 폐허는 선생이 분전한 최후의 혈전장이며, 왜의 감옥 철창 중에 뚝뚝 흘린 핏자국은 구사일생을 한 유적이다. 이것뿐이겠는가. 櫻田門에 날아간 벼락은 선생의 손에서 내려진 철퇴이며, 虹口공원에 던져진 폭탄은 선생의 심혈을 기울인 바의 갖가지 유적이다. 선생은 이와같은 망국의 풍운아이며, 선생은 이와 같은 혁명의 전공자이다.

 한국국민당청년단에서는 김구를 혁명의 典範처럼 여기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청년단의 구성원들이 모두 김구 휘하의 청년들이라는 점도 있었지만, 이들은 김구의 항일투쟁 과정을 통해 그를 혁명의 전공자로 평가하고, 그를 혁명의 영수로 받들고 있었다.

 「한국국민당의 전시 후방 교란계획 책략 」은 중일전쟁 발발 직후 작성한 것으로, 중일전쟁 발발에 대응하여 한국국민당이 추진해 나갈 활동계획을 정립하여 제시한 것이다. 한국국민당은 중일전쟁 발발에 대해 “중일전쟁의 폭발은 일본제국주의의 몰락의 징조이자 중화민국의 완전한 독립을 알리는 서막”이라고 하면서, 동시에 이는 우리 한국민족이 국권을 회복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된다고 하였다.

 한국국민당은 이러한 기회를 놓칠 수 없다며, 활동방향을 설정하였다. 당시 한국국민당이 처한 현실로 볼 때 일제를 타격할 수 있는 가장 유효한 방법은 적후방 교란활동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일본군이 중국대륙을 침략하면서 가장 염려한 것은 후방교란으로 인해 발목이 잡히지 않을까 염려했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한국국민당의 활동방향을 적후방교란으로 잡았다. 그 방법으로 만주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독립군들을 동원하여 일본군과 전투를 벌이는 것, 그리고 개인 혹은 소규모 단체에 의한 특무공작을 전개한다고 하였다.

 「한국광복운동단체연합선언 」과 「중일전쟁 전국에 대한 한국광복운동단체의 선언 」은 한국광복운동단체연합회를 결성하고 발표한 것이다. 한국광복운동단체연합회는 중일전쟁 발발 직후인 1937년 8월 17일 한국국민당과 한국독립당(재건) · 조선혁명당, 그리고 미주지역의 대한인국민회와 하와이의 대한인국민회 · 대한인단합회 · 대한부인구제회 · 동지회 · 대한인애국단 등 9개 단체가 연합하여 결성한 연합체였다. 이를 약칭하여 광복진선이라고도 했다.

 「한국광복운동단체연합선언 」은 9개 단체가 연합을 이룬 배경과 목적을 천명한 것이다. 연합체를 결성하게 된 배경은 일제에게 나라를 빼앗긴 지 28년여 동안 광대한 대중과 선열들이 조국광복을 위해 처절한 투쟁을 전개하였지만, 아직까지 조국광복의 대업을 이루지 못한 원인을 찾는데서 비롯되었다. 그 원인으로 제시한 것은 세 가지이다. 하나는 ‘그간 정신력과 물력을 집중시키지 못하고, 대적투쟁의 전략과 전술을 제대로 갖추지 못하였으며, 성숙된 혁명이론도 갖지 못하였다’는 것이다. 둘째는 ‘민족주의에 입각한 정당한 투쟁이 반민족 반혁명세력에 의해 좌절되고 회색분자들의 방해로 소기의 목적을 이루지 못했다’는 것이고, 셋째는 ‘많은 계획을 세웠으나 적들의 압박과 간계로 인해 제대로 실현하지 못했다’고 하였다. 이러한 반성에 기초하여 강대한 역량을 발휘하고자 각 단체의 연합을 추진하였고, 혁명단체를 연합시켜 단일조직으로 재탄생시킬 것이라 하고 있다. 그리고 광복진선이 추진할 목적으로 ‘강력한 광복진선을 건립하고 조직을 확대한다’ ‘완전한 합작을 통해 일체의 당면공작을 실행한다’ ‘임시정부를 옹호하고 지지한다’는 것을 천명하였다.

 「중일전쟁의 전국에 대한 한국광복운동단체의 선언 」은 중일전쟁 발발이란 정세의 변화에 따라 대내외 동포들에게 발표한 선언이다. 일제는 노구교사건을 계기로 중일전쟁을 일으켰지만, 결국 중일전쟁은 일제의 패망과 중국의 승리로 귀결될 것이라고 하였다. 이러한 전망하에 중국민족과 함께 연합전선을 결성하여 대일항전을 전개할 것이라고 하면서, ‘중일전쟁은 중한 두 민족 생사존망의 갈림길이다’ ‘한국민족이여 모두 일어나 중국의 대일전선에 동참하자’ ‘중한 두 민족이 연합하여 왜구를 소멸하자’ ‘일본제국주의의 본거지를 소탕하자’ ‘왜노의 앞잡이를 숙청하자’라는 것을 구호로 내걸었다.

 「동지동포들에게 보내는 공개신 」은 1939년 5월 金九와 金元鳳이 좌우 양진영으로 나뉘어 있는 독립운동 세력을 통일하기로 합의하고 발표한 것이다. 중일전쟁을 계기로 우익진영과 좌익진영의 독립운동 세력들은 한국광복운동단체연합회와 조선민족전선연맹으로 각각 연합체를 결성하여 활동하고 있었다. 1939년 좌우 독립운동 세력들이 四川省 重慶과 綦江에 집결하게 되면서, 이들 사이에 통일문제가 대두되었다. 양진영을 대표한 김구와 김원봉이 통일문제를 교섭하였고, 이들은 중일간의 전면적 전쟁이라는 호기에 한국민족의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서는 전민족의 역량을 집중시켜야 한다는 데 인식을 같이 하였다. 그리고 자주독립국가 및 민주공화제 건설, 일제 및 친일파의 재산몰수, 산업의 국유화 및 농민에 토지분배, 남녀평등, 국비교육 등 10개조의 공동 강령하에 좌우 양진영에 소속되어 있는 정당 및 단체를 일체 해소하고 통일된 단일조직을 수립하자는 데 합의를 이루었다. 이 「공개신 」이 발표된 후, 1939년 8월 좌우 양진영에 소속되어 있던 7개의 정당 및 단체는 통일을 추진하기 위해 ‘7당통일회의’를 개최하였다.

 「광복진선원동3당통일대표회의경과대략 」은 한국국민당과 한국독립당(재건) · 조선혁명당의 3당이 통합을 추진한 경과를 기록한 것이다. 광복진선으로 연합을 이루고 있던 이들 3당은 기강에서 개최된 ‘7당통일회의’가 결렬되자 3당의 통합을 추진, 1940년 5월 9일 3당이 통일을 이루어 한국독립당을 창당하였다. 「경과대략 」은 이를 기록한 것으로, 크게 세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하나는 3당통합을 논의한 회의를 기록한 것, 둘째는 창립대표대회 관련 기록, 셋째는 창립 이후 중앙집행위원회 관련 기록이다.

 3당통합을 위한 회의는 두 번 개최되었다. 첫 회의는 1939년 10월 2일부터 12일까지, 두 번째 회의는 1940년 3월 24일부터 5월 8일까지 열렸다. 이 회의에서 黨名 · 黨義 · 黨綱 · 黨策 · 黨憲 · 組織 · 事業 등이 결정되었다. 그리고 1940년 5월 9일에는 창립대회를 개최하여 3당대표회의에서 결정된 것들을 통과시키고, 중앙집행위원과 중앙감찰위원에 대한 선거를 실시하여 한국독립당을 창당하였다. 당을 창립한 후 중앙집행위원회를 개최하고, 당의 조직과 활동방향을 결정해 나갔다. 중앙집행위원회는 1940년 5월 11일, 7월 20일, 12월 20일에 개최되었으며, 이를 통해 중앙집행위원장을 선출하고 당의 조직 및 활동방향 등을 결정하였다.

 「중한 두 나라 국민당의 조속한 연계를 청하는 편지 」는 한국국민당이 중국국민당과의 연계를 맺기 위해 교섭한 사실을 알려주는 자료이다. 이 편지는 1940년 1월 2일 한국국민당 이사장 金九가 중국국민당 조직부장 朱家驊에게 보낸 것으로, 이전부터 주가화에게 여러차례 편지를 보낸 사실이 나타나 있다. 김구는 주가화에게 한국국민당과 중국국민당이 긴밀한 관계를 맺을 수 있도록 힘써 달라고 하면서, 중국국민당이 한국국민당에게 정신적 물질적 원조를 제공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일제측 정보자료는 상해의 일본총영사관과 특별경찰들이 수집하여 보고한 것들이다. 일제의 정보수집은 한국국민당이 南京에 있을 때 집중되어 있고, 한국국민당의 조직에서부터 김구를 중심한 인물들의 동정 및 활동에 이르기까지 상세한 부분에 걸쳐 있다. 일례로 김구는 윤봉길의거 이후 중국측으로부터 각별한 신뢰를 받고 있으며, 매월 3천원의 경제적 원조를 받고 있다고 하였다. 그리고 안공근이 김구의 참모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 청년들 사이에 안공근에 대한 인기가 없다는 것, 안공근의 횡포에 분개한 청년들이 한국국민당을 이탈하여 한국독립당 재건파에 합류하고 있다는 사실 등, 내부 인사들이 아니면 알 수 없는 내용들이 있다(「한국국민당의 內情 」).

 또 한국국민당의 활동과 한국국민당 명의로 발표되는 각종 문건들을 수집하여 보고하고 있다. 한국국민당이 1936년 7월 11일 한국특무대독립군의 金東宇 일파가 탈퇴한 후 중앙육군군관학교 졸업생 17명을 합쳐 한국국민당청년단을 결성한 사실, 청년단에서 『韓靑』이란 기관지를 창간한 사실 등을 소상하게 조사하였다. 그리고 한국국민당이 1936년 11월 6일 남경에서 당제2차대회를 개최한 사실과 대회에서 결정한 당원의 결속 · 당세 확장 · 활동방침 등 구체적인 내용을 언급하고 있다. 한국국민당의 창당 일자는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러나 제2차당대회를 11월 6일에 하였다는 것으로 보면, 한국국민당의 창당일자는 1935년 11월 6일이었을 가능성이 많다. 이러한 활동에 대한 정보와 더불어 「한국국민당 제2차대회선언 」과 『韓民』 『韓靑』을 비롯하여 「백범 김구 선생의 환갑을 축하함 」, 「국치기념일선언 」, 「건국기념절선언 」, 「삼일절기념일에 즈음하여 동포에게 고함 」, 「한국국민당삼일절선언 」, 「6 · 10운동을 기념하라 」등 한국국민당과 한국국민당청년단 명의로 발표되는 각종 문건들도 수집하여 첨부하고 있다(「한국국민당(김구파) 」.

 일제의 정보자료 중에 한국국민당이 상해에서 여러 활동을 전개하고 있다는 사실이 나타나 있다. 중일전쟁을 전후한 시기의 조사 보고에 의하면, 한국국민당은 華北 · 北京 · 上海 등지에 당원들을 파견하여 여러 가지 활동을 전개하고 있었다(「한국국민당(김구파) 」). 이 중 몇가지 내용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 7월 중순 : 김구파 한국국민당은 부하 청년 몇 명을 華北에 파견하는 동시에 첨예분자의 결집을 도모하고, 安恭根은 몰래 상해 거주 조선인 등에 ‘시국공작상 필요에 대해 희생적 決死청년을 되도록 다수 획득하도록 알선하기 바란다’고 의뢰하였다고 한다.

 -7월 31일에 입수한 첩보에 따르면 김구는 한국국민당원 6명을 화북에 파견하여 北平시장 秦德純의 보호하에 中韓互助社의 부활 및 일본측의 군사, 기타 일반정보 수집에 힘쓰게 하였다. 또 이들은 한족항일동지회집행위원회 명의로 ‘화북 거주 동포에게 고하는 글’을 작성 살포한 모양이다.

 -8월말 金九는 安恭根 · 嚴恒燮 등을 따라 상해에 잠입, 중국측의 軍政 각 방면을 두루 방문하였다. 특히 프랑스 공무국 정치차장인 러시안인 엠랴노프와 장시간 회견하였으며, 3일간 체제한 뒤 엄항섭을 동반하고 남경으로 퇴거한 사실이 있다.

 -8월 하순 한국국민당의 중진 安恭根 · 朴昌世 · 金弘壹은 부하 몇 명을 거느리고 상해에 잠입하여 친일적 중국인과 조선인의 암살을 기도하는 한편, 중국측 便衣隊 본부 및 중국 각 항일신문사 등에 출입 연락하여 중한연합의 책동에 광분하였다.

 -10월 12일 사변이래 상해에서 책동 중인 한국국민당 당원은 프랑스조계 高山路 부근에 지부를 두고 상점을 가장하여 사람 눈을 가리고 있다. (중략) 상해 지부는 藍衣社 상해지사와 연락하고 있다. 특히 조사부원은 虹口 · 楊樹浦 · 吳淞의 각 전구에 들어가 일본군의 진용 · 편성 · 실력 등을 조사하고 무기 · 탄약 · 식량 · 비행기 · 대포의 저장소 등을 보고하고 있는데, 중국군 비행기가 야간 출동하여 성적을 거둔 것은 전부 이에 기인하는 것이라고 들었다.

 -10월 13일 한국국민당 당원이며 황해도 출신 盧伯麟의 조카 盧泰俊(당 25세)은 상해 江灣鎭 방면에서 중국중앙군 某師 기관총대장으로서 이적행위 중 다리 부위에 부상을 입고 후송되어 프랑스조계 내 중국홍십자병원에 입원하였는데, 최근 치유 퇴원하고 다시 전선으로 간 사실이 있다.

 중일전쟁 발발 당시 한국국민당은 남경에 있었다. 이로보면 한국국민당은 남경을 거점으로 화북지역과 상해 등지에 당원들을 파견하여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상해에서 일본군 시설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여 중국측에 알려주었고, 중국군 비행기가 이를 폭격하여 성과를 거두었다는 사실은 매우 주목하지 않을 수 없는 내용이다.

 중국측의 자료는 여러 종류가 있다. 그 중 하나는 『新華日報』가 김구와 담화한 내용을 보도한 것이다. 『신화일보』는 중국공산당에서 발행하는 신문이었다. 이 신문이 1938년 1월 28일 김구를 방문하여 담화한 내용을 2월 5일자로 보도하였다. 김구의 담화는 한국국내의 상황과 중국민족의 항전에 대한 관점을 이야기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이 과정에서 김구는 일제가 중국을 침략하면서 한국인 무뢰배들을 고용하여 앞잡이로 삼은 것은 부인할 수 없지만, “대다수 한인들은 일본에 대해 극심한 반감을 갖고 있다. 이들은 결코 중국침략의 선봉에 서는 행위를 하지 않을 것이다”라는 것을 강조하였다. 그리고 중일전쟁은 일본국내의 군벌과 재벌이 합세하여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일으킨 것이라고 하면서, 이러한 전쟁의 본질적 한계로 인해 전쟁의 승리는 중국의 것으로 결정된 것이나 다름없다고 하였다.

 중국측이 한국독립운동에 대한 지원을 김구 쪽으로 결정하게 되는 과정을 알려주는 자료가 있다(「한국혁명당파 통일문제에 관한 편지 」). 1939년 5월 21일 徐恩曾이 朱家驊에게 보낸 편지가 그것이다. 이에 의하면 중국측은 김구와 김원봉에게 통일을 종용하였지만, 김구측에서 김원봉이 공산주의에 대한 신앙을 버린다는 성명을 발표한 연후에 통일문제를 논의할 수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김원봉은 이를 거절하였다고 한다. 이에 따라 통일은 無望하게 되었다고 하면서, 무작정 통일만 강조하다가는 중국의 영도를 따르지 않게 되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며, 그 방안을 제시하고 있다. 그 방안은 한국민족이 동참하는 민족혁명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도덕성과 명망을 갖춘 인물을 지원하는 것이 바람직 할 것이라고 하면서, “이런 기준에서 볼 때 김원봉보다는 김구를 지원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하였다. 또 “김구는 사상이 비교적 온건하고 도의관념이 투철한 인물”이라고 하면서, 장래 한국이 독립을 쟁취한 뒤에도 중한 두 나라의 긴밀한 우의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김구를 지원해야 할 것이라 하고 있다. 서은증은 이러한 논의를 종합하여 장개석에게 김구를 지원하는 것이 타당하다는 보고를 올리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을 개진하였다.

 또 중국의 한국담당자들이 김구를 만나 협의한 내용을 장개석에게 보고한 자료들이 있다. 1940년 3월 2일 朱家驊가 蔣介石에게 보고한 문건이 그것이다(「김구와의 면담결과에 대한 보고 」). 주가화는 김구가 찾아와 장시간 대화를 나누었다고 하면서, 김구가 요청한 내용을 장개석에게 보고하였다. 그 내용은 현재 화북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한국국민당 동지들의 보고에 의하면 적군에 끌려나온 한인사병들 가운데 탈출자가 갈 수록 늘어나고 있다며, 이 지역에 기구를 조직하여 탈출한 병사들을 조직하고 훈련하면 중국항전에도 도움이 된다는 것이었다. 주가화는 확인한 결과 김구의 말이 사실과 다르지 않다며, 장개석에게 “韓籍사병들의 탈출을 적극 유도하고 이들을 훈련시킨다면 우리의 항전에 직접적으로 유리할 것”이라며, 김구가 제안한 공작을 지원해주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을 개진하고 있다. 이는 김구가 한국광복군 창설을 추진하면서, 중국측의 협조를 얻기 위해 설득한 내용이었다.

 임시정부와 한국국민당이 기강에 도착한 이래 綦江縣정부와 경찰당국에서 이들에 대한 인적 사항과 거주지 등을 조사 보고한 자료가 있다. 임시정부는 廣西省 柳州를 거쳐 1939년 5월 3일 기강에 도착하였다. 기강에 도착한 직후부터 기강현정부와 경찰당국에서는 이들의 성명 · 성별 · 연령 · 국적 · 종교 · 직업 · 거주지 · 여권 및 국적증명 등에 대해 조사하였다(「綦江縣第1區城鎭聯保辦公處 外僑調査表 」). 작성자는 綦江縣第1區 城鎭聯保處였고, 1939년 5월분, 6월분, 8월분, 9월분, 10월분, 11월분, 12월분이 전해지고 있다. 이에 의하면 당시 기강에 도착하여 머물고 있던 임시정부 요인과 가족들은 남자 67명, 여자 40명으로 총 107명이었다.

 기강현 정부에서는 韓僑들을 지방정부에 거주신청을 해야 한다며, 韓僑登記暫行辦法을 제정하였다(「韓僑登記暫行辦法에 관한 訓令 」). 이에 의하면 韓僑들은 상반신 사진 두 장과 함께 거주신청서를 제출하고, 기강현 정부는 이를 접수한 뒤 신청자의 내력을 확실히 파악한 후 등록증을 발급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등록증을 발급받은 한교는 검열에 대비하여 항상 등록증을 휴대하여야 하고, 주소가 변경되거나 다른 지역으로 이주할 경우에는 사전에 보고하여야 하며, 중국기관의 감독과 지도를 받도록 되어 있었다.

 이 표에는 각 개인별 거주지가 기록되어 있다. 이에 의하면 기강에 도착하였을 당시 임시정부 요인 및 가족들은 대부분 上昇街 陳家公館에 머물렀다. 이후 거주지가 마련되면서 각 가족 단위로 거주지를 옮겼다. 曺成煥 · 李東寧 · 趙琬九 등은 臨江街 43호에, 趙素昻 · 洪震 · 楊宇朝 등 세 가족은 新街子 三台莊에, 그리고 한국광복진선청년공작대의 청년들은 산 위에 있는 觀音庵에 거처하였다.

기관지 『韓民』

 한국국민당에서는 기관지로 『韓民』을 발행하였다. 『韓民』은 당의 선전부에서 발행하였고,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1936년 3월 15일자로 발행된 창간호부터 1940년 10월 15일자로 발행된 제23호에 이르기까지, 上海韓民社에서 신문 형태로 발행한 것이다. 다른 하나는 1940년 3월 1일 제1기 제1호의 창간호를 낸 이래 제1권 제5기까지 발행된 『韓民』이 있다. 이는 한국국민당 · 한국독립당(재건) · 조선혁명당이 합당을 추진하면서 당의 선전지를 발행하기로 한 것으로, 韓民月刊社에서 잡지 형태로 발행하였다. 잡지 형태의 『한민』은 순한문으로 발행되었고, 제1기 제1호, 제1기 제2호, 제1권 제3 · 4기 합간, 제1권 제5기가 전해지고 있다. 이는 분량 관계로 여기에 포함시키지 않았다. 별도의 자료집으로 간행할 예정이다.

 이 자료집에는 신문 형태로 발행된 『韓民』만 수록하였다. 『한민』은 그동안 일제 정보자료를 통해 그 발행 사실과 일부 내용이 전해져 왔다. 정보를 수집 보고할 때, 『한민』에 실린 내용을 번역하여 보고한 것들이었다. 이후 독립기념관과 국가보훈처를 비롯하여 도산안창호선생기념사업회 · 고려대학교 중앙도서관 등에서 부분적으로 수집하였고, 또 崔起榮 교수와 韓相禱 교수가 개인적으로 수집하기도 하였다. 이를 통해 『한민』 대부분이 수집되어 본 자료집에 수록될 수 있었다.

 『한민』은 1936년 3월 15일 창간호를 발행한 이래 월간으로 발행되기 시작하여 1940년 10월 15일자로 제23호까지 발행되었다. 이 과정에서 두 차례 호외가 발행되기도 했다. 1937년 8월 한국광복운동단체연합회를 결성하고 그 선언을 발표하였을 때, 그리고 1938년 3월 島山 安昌浩의 逝世 소식이 알려졌을 때 호외를 발간하였다. 23호 중 제19호 · 제20호 · 제21호는 전해지지 않는다. 본 자료집에는 호외 2개호를 포함하여 모두 22개호를 수록하였다. 한국국민당에서는 당초에 일간으로, 또 순한글로 『한민』을 발행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재정적인 문제와 국문활자의 부족 등으로 부득이하게 월간으로, 또 국한문혼용으로 발행하게 되었다. 발행소를 남경이 아닌 상해로 한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라 생각된다.

 『한민』을 창간한 목적은 ‘한국혁명의 진정한 이론을 파악하고 이를 제창’하는 데 있었다. 한국국민당은 김원봉과 의열단계열을 공산주의로 보고, 이들과 통일을 이룰 수 없다며 민족혁명당 결성에 참여하지 않은 세력들이 주축이 된 정당이었다. 이들은 공산주의를 배격하였고, 또 공산주의자들이 독립운동을 혼미하게 한다고 여겼다. 그리고 민족의 역량이 부족하니 일제의 양해하에 합법적 운동을 하자며 자치운동을 주장하는 것도 적의 노예가 되려는 자라거나 邪說이라고 배격하였다. 즉 국내에서는 자치운동을 주장하는 자들이, 그리고 국외에서는 공산주의자들이 독립운동을 혼미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이러한 환경에서 독립운동의 진정한 이론을 제창하기 위해 『한민』을 창간한다고 하였다.

  本報는 이에 느낀 바 있어 毅然히 出世하였다. 비록 우리 同人의 力量이 不足하며 才質이 菲薄하나 切迫한 環境은 우리 同人으로 하여금 다시 더 沈黙하기를 許치 아니한다. 그럼으로 우리는 一切를 不顧하고 見義思勇의 一片赤誠으로 憤然히 蹶起하였다. 우리는 上述한 모든 邪說을 排擊하고 우리 革命의 眞正한 理論을 把握하며 提唱하야써 우리 光復運動의 耳目이 될 責任을 自負하고 꾸준히 努力奮鬪하기를 滿天下同志 앞에 힘 있게 盟誓한다.

 이는 창간사를 통해 밝힌 내용이다. 여기서 말하는 邪說이란 자치운동론과 공산주의를 가리킨다. 자치운동론과 공산주의를 배격하고 ‘혁명의 진정한 이론을 파악하며 제창한다’는 것이 『한민』을 창간하는 목적이었다. 이러한 목적은 ‘社告’를 통해 다시 한번 강조되었다. “本報는 韓國民族의 純正한 基本精神을 發揮하며 祖國光復事業의 指路者가 되어 充實한 任務를 極盡하기로 自誓하오니”라고 한 것이 그것이다.

 『한민』은 대략 4면으로 발행되었다. 내용의 구성은 일정하지 않았다. 대체로 ‘임시정부 소식’ ‘한국국민당 소식’ ‘재미한인사회 소식’ ‘국제정세’ 등을 비롯하여, 국내외 독립운동전선에서 특별한 일이 있을 때, 이와 관련한 소식으로 꾸며졌다. 그리고 安重根 · 李奉昌 · 尹奉吉의사의 의거일과 순국일, 3 · 1절과 國恥日 등에는 이를 기념하고 그 의의를 되새기는 글들을 싣고 있다. 이외에 ‘來稿’라 하여, 외부에서 보내오는 글들을 수록하였다. ‘來稿’는 대부분 독립운동 과정에서 발생하는 이념 · 노선문제 등과 관련한 문제를 논하는 글과 일본 · 중국을 비롯하여 각국의 독립운동을 논한 글들이다.

 『한민』은 대한민국임시정부와 한국국민당을 비롯하여 국내외 독립운동전선에서 일어나고 있는 갖가지 일들을 ‘소식’으로 전하고 있다. 이러한 독립운동 관련 ‘소식’들 중에는 1930년대 중반 이후 독립운동사를 이해하는데 있어서는 물론이고,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새로운 사실들도 적지 않다.

 우선 대한민국임시정부가 미주교포들과 긴밀한 관련을 맺고, 이를 기반으로 삼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임시정부는 상해를 떠난 이래 중국대륙을 이동해 다니는 동안 사실상 기반이 없었다. 이때 임시정부의 기반이 된 것은 미주지역 교포들이었다. 「我臨時政府와 美洲韓人獨立黨 」, 「布哇團合會의 美擧 」(제2호) 등의 기사가 그것으로, 미주교포들이 임시정부를 절대 옹호하고 성의로 극력 원조하겠다는 뜻을 보내왔다고 하였다. 그리고 「美洲國民會의 壯한 歷史 」, 「美洲僑胞의 愛國熱誠과 臨時政府의 新發展 」, 「布哇同胞의 敎育狀況 」, 「在美同胞의 統一運動 」등 미주지역 교포들의 활동과 실상에 관한 글들을 비롯하여, 「感荷義捐 」이란 난을 별도로 마련하여 미주교포들의 의연금 납부 현황을 싣고 있다.

 대한민국임시정부와 한국국민당을 비롯하여 국내외 독립운동과 관련한 ‘소식’들도 실려 있다. 「臨時政府의 國際的 活躍 」(제2호)은 프랑스 파리에 외교특파원을 두어 歐洲방면에 대한 외교사무를 도모한다는 것이었다. 외교특파원으로는 프랑스에서 활동하고 있던 徐嶺海를 임명하였다. 「臨時政府의 外交特派員 徐嶺海氏의 活動 」(제5호) 「萬國平和大會에 我代表 徐嶺海氏 出席 」(제8호)은 서영해가 유럽에서 활동하고 있는 상황을 보도한 것이다. 그리고 임시정부 내무부에서 재외동포들에 대한 인구조사를 시행하였음도 알 수 있다(「臨時政府 內務部에서 在外同胞의 人口調査 」).

 한국국민당이 중국 軍閥 傅作義 부대와 관계를 맺고 있었음을 알려주는 기사도 있다. 傅作義는 綏遠省(내몽고) 일대를 거점으로 하고 있던 중국의 군벌로, 수원성 일대에서 일제가 조종하는 滿蒙軍과 싸우고 있었다. 한국국민당에서는 이러한 傅作義 군대에 승전을 축하하는 전보 (「韓國국민당에서 綏遠軍에 祝電 」,제9호)와 위로품을 보냈고(「綏遠의 抗日軍慰勞 」, 제10호), 傅作義는 이에 대해 “우리는 마땅히 분용히 싸워서 적을 파하여 여러분의 기대하는 바를 저버리지 않겠다”는 답신을 보내오기도 하였다(「韓國國民黨에 來한 綏遠軍의 答覆 」) . 구체적인 내용은 나타나 있지 않지만, 이를 통해 한국국민당이 傅作義 군벌과 관계를 맺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후일 임시정부가 광복군을 창설하면서 대원들을 확보하기 위해 綏遠省에 초모공작대원들을 파견한 것도 이러한 관계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한다.

 1936년 8월 9일 독일 베를린 올림픽에서 손기정과 남승룡이 마라톤에서 우승하였을 때, 『한민』은 즉각 이를 보도하였다. 1936년 8월 29일자로 발행된 제6호에 「韓國이 낳은 마라손 大王 孫 · 南兩君의 大勝捷 」이란 기사로 손기정이 2시간 29분 19초의 신기록으로 우승의 월계관을 차지하였다는 소식을 전하고 있다. 그리고 제7호에는 한국국민당이 손기정과 남승룡에게 보내는 편지를 실었다(「마라손의 凱旋將軍, 孫 · 南兩君에 보내는 信 」). 이 편지에는 손기정과 남승룡이 각각 1등과 3등을 차지한 사실을 언급하면서, “그대들의 승전한 쾌보가 한번 세계에 전하매 한인은 가는 곳마다 기쁨에 넘쳐서 미칠듯하였다. 여기에는 남녀노소 · 노동자 · 자본가 · 소작인 · 지주의 구별이 없음은 물론이오 심지어 적의 주구까지라도 뛰고 춤추었다”며, 한민족 전체가 감격해 하고 있음을 전하였다.

 만주지역에서 韓中抗日軍이 일본군과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하고 있다는 소식도 보도하고 있다. 제6호에 실린 「韓中抗日軍, 倭軍隊를 大擧襲擊 」, 「反滿軍과 共軍이 撫松縣襲擊 」, 「北間島 一帶에 結集된 部隊 」, 「東北韓人이 組織한 韓國靑年抗日軍委會 」, 「韓中義勇軍의 入國大活動 」등의 기사가 그것이다. 이 기사 중 하나는 한중연합항일군 3백여명이 1936년 9월 12일 穆陵縣 서쪽에서 中東線 철로를 끊고 있다가 일본군을 실은 기차가 전복되는 것을 습격하여 장교 이하 25명을 죽이고, 46명을 부상케 하였다고 한다. 또 9월 24일에는 한중의용군 60여명이 함경북도 웅기 부근의 덕화진과 세평을 습격하여 일본 군경과 전투를 치렀다는 내용도 있다.

 金日成의 활동과 관련한 기사도 있다. 「共軍의 禍害 」(제9호)란 제하에 장백현 지역에서 동북인민혁명군이 이주동포의 재물을 약탈하거나 인명을 살해한다고 하면서 “그 중에도 김일성이 영솔한 부하가 명수도 4, 5백명에 달하고 또 활동이 그 중 제일 많다 한다. 그들은 촌리로 다니면서 곡식과 재물을 있는 대로 빼앗고 그래도 조금만 불만하면 집을 불사르고 사람을 잡아다가 죽이기도 하는데 금년 1년 동안에 그들이 동포의 촌락을 습격한 회수가 428회요, 피해자의 수는 2,204명이며, 10월 한달 동안에만 잡혀가서 인명의 손해를 받은 것이 204명이라 한다”고 하였다.

 또 「武裝團의 活動 」이란 제목으로 제14호와 제15호에 김일성의 활동내용을 보도하였다. 제14호의 보도는 보천보전투 소식을 전한 것으로 “6월 4일 밤에 김일성 일파의 무장단 2백여명이 정예한 무기를 휴대하고 갑산군 보천보를 습격하여 주재소 · 우편소 · 면소 · 삼림보호소 · 보통학교 · 상점 등을 소탕하고 왜추격대와 맹렬히 싸워 왜놈측에 다수의 사망자와 부상자를 내이고 그 후로도 최현 · 조국안 등과 합세하여 국경 방면을 여러차례 습격하여 왜놈으로 하여금 대공황리에 일시도 마음을 놓지 못하고 그 응부에 급급하여 국경일대의 경비를 더욱 두터이 한다고 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제15호에는 “김일성 · 최현 일파의 무장단 150여명이 임강현 토파구와 태평차 지방에 있는 만주군대를 습격하여 무장해제를 시키고 무장과 탄약을 전부 가져갔다”고 하는 내용이다.

 국내에 관한 소식들도 있다. 그 중 宇垣 총독을 암살하려다 체포되어 재판을 받은 사실을 보도한 것이 있다. 1936년 5월 26일 경성 지방법정에서 趙安得 · 崔榮鎭 · 尹樂三 · 印振明 · 具承會 · 李金珍 등이 판결을 받았다고 하면서, 이들은 1935년 11월과 12월 세 차례에 걸쳐 宇垣총독의 암살하려고 하였으나 성공하지 못하고 체포되었다고 한다.

 각종 기념일과 관련한 기사들이 있다. 3 · 1절, 국치일, 건국절, 임시정부 수립기념일, 그리고 安重根 · 尹奉吉 · 李奉昌의사의 의거일과 순국일을 맞을 때마다 그 기념행사 및 이와 관련한 글들을 실었다. 3 · 1절 기념식 행사를 어떻게 거행하였는지를 가장 잘 파악할 수 있는 것은 1938년 제19회 기념식이다. 이때 임시정부와 한국국민당은 湖南省 長沙에 있었다. 당시 기념식 상황을 준비 · 장식 · 초대 · 개식 · 축사 · 유흥 · 선전 등으로 나누어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있다(「遠東某地에서 擧行한 3 · 1節紀念狀況, 近年에 初有한 大盛況 」). 이외에 3 · 1절을 맞이 할 때 「3 · 1절에 대한 所感 」, 「3 · 1운동 당시의 光景 」등 3 · 1운동의 의의와 상황 등의 글을 실어 그 의미를 되새기고 있다.

 8월 29일 國恥日에도 그 기념식과 발표한 선언을 비롯하여, 국치와 관련한 다양한 글들을 싣고 있다. 특히 제6호에는 다양한 글을 실었다. 「國恥紀念 」이란 논평을 비롯하여, 합병조약문, 1876년 병자수호조약에서부터 1910년 합병에 이르기까지 각종 조약과 협정 내용(「條約上에 表現된 日本의 對韓侵略程序 」), 李完用과 宋秉畯이 매국을 위해 경쟁한 내용 및 윤덕영이 황제가 곤히 잠든 틈에 옥쇄를 가져다가 寺內에게 전달하였다는 내용을 담은 「完用 秉畯間의 爭先賣國醜態 」, 국치 당시의 상황을 회고한 「記憶에 남아 있는 亡國當時의 몇가지 慘景 」, 망국소식을 듣고 순국자결한 열사들을 소개한 「流芳百世의 殉國 諸烈士 」, 합방 후 일제로부터 爵位를 수여받은 이들의 명단을 소개한 「乳臭萬年의 賣國貴族輩 」등이 그것이다.

 임시정부에서 매년 건국절 기념행사를 거행한 사실도 알 수 있다. 제9호에 실린 「建國紀元節 感言 」, 「建國紀元節紀念 」, 「倍達의 建國記略 」등이 이와 관련된 기사이다. 이에 의하면 임시정부에서는 매년 음력 10월 3일에 건국절 기념식을 거행하고 있었다. 임시정부에서 음력 10월 3일에 거행한 건국절 기념행사를 해방 후 대한민국 정부에서는 양력 10월 3일에 거행하고 있다.

 임시정부에서 매년 수립기념일 행사를 거행하였음도 알 수 있다. 임시정부의 수립기념일은 4월 11일이었다. 1937년에 제18회 임시정부 수립기념일 행사를 한 사실이 제13호에 실려 있다. 4월 11일이 임시헌장을 발표하고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성립한 기념일이라고 하면서, “금년 4월 11일은 임시정부를 성립한지 제18회째 되는 기념일임으로 임시정부에서는 그 날에 성대한 기념식을 거행하였다”고 하였다(「我臨時政府成立紀念 」). 그리고 임시정부를 성립하게 된 동기, 임시의정원 조직, 임시정부 성립, 임시정부 개조, 제도변경 범4차, 임시정부와 우방 등을 정리한 글을 싣고 있다(「臨時政府의 成立經過를 紀念하자 」). 1938년에도 임시정부 수립기념식을 거행하였다. 제17호에 「臨時政府成立紀念 」이란 기사에 “이달 4월 11일은 민국 원년 이날에 각지 대표가 상해에 모여 임시의정원을 조직하고 10개조의 임시헌장을 제정 발포한 후 임시정부를 성립한 날임으로 임시정부에서는 그날 모지에서 기념식을 거행한다”고 하였다.

 安重根 · 李奉昌 · 尹奉吉의사의 의거일과 순국일을 맞이할 때는 이들이 결행한 의거의 과정과 의미를 되새기는 글들을 수록하였다. 제2호에는 윤봉길의거를 기념하여 「4 · 29紀念의 意義 」, 「4 · 29와 韓人愛國團 」, 「4 · 29 당시의 情形 」, 「尹奉吉義士의 略傳 」등의 글들 실었다. 그리고 「尹奉吉義士의 就義5週年紀念 」, 「李奉昌義士의 擧義6週年紀念 」, 「安 · 李兩義士와 榮光의 10月 」, 「安重根義士의 事蹟 」등을 비롯하여, 「大連炸彈事件의 追憶 」, 「崔興植氏의 略歷 」, 「柳相根氏의 略歷 」 등의 글들을 싣고 있다. 이러한 글들 중에는 의사들이 거행한 의거의 과정과 실상이 소상하게 서술되어 있어, 중요한 자료가 된다.

 『한민』의 주요한 구성 중 하나는 ‘來稿’이다. 이는 외부 인사들이 보내오는 글인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름을 밝히지 않고 필명(愚民, 白頭山人, 冷心 등)을 사용하여 필자가 누구인지 확인하기 어렵다. ‘來稿’는 독립운동전선에서 일어나고 있는 이념과 노선, 그리고 주요 논쟁에 관한 글이다. 창간호에 실린 「我獨立運動의 動向 」(愚民)이란 글은 한국국민당이 지향하는 바를 밝힌 것이라 할 수 있다. 이에 의하면 과거의 독립운동은 領袖로 자처하는 群雄들의 야심 때문에 목표가 동일하고 지향이 같으면서도 정치적 주장이 分岐되어 是非를 분별할 수 없었다고 하면서, 가장 信仰하는 사람을 영수로 하고 그의 명령에 복종하자고 하였다. 그러면서 한국국민당이 바라는 영수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우리 당에서 요구하는 領袖는 理論만 爲主하는 庸夫가 아니요. 豪言에만 氣勝하는 儒者가 아니다. 즉 원대한 眼光과 堅强한 毅力으로 책임심이 강하고 實行에 勇하야 광복사업에 공훈이 많은 그 이를 要한다. 우리는 이러한 精明强幹한 중심인물을 영수로 하고 그의 영도에 절대복종하여 精誠團結되는 데서만 우리의 독립은 완성될 것이다.

 한국국민당이 바라는 영수는 이론이나 호언만 하는 사람이 아니라, 책임심이 강하고 실행을 앞세우며 독립운동에 공훈이 많은 이를 필요로 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사람을 영수로 삼고, 그의 명령에 절대복종하고 단결하자는 것이었다.

 독립운동전선에서 일어나고 있는 임시정부에 대한 비판에 반론을 제기하는 글들도 있다. 무정부주의 계열과 좌익진영에서 임시정부가 국토 · 인민 · 주권의 3요소를 갖추지 못하였다거나 독립 후에도 정식정부가 될 수 없다는 논의들이 일어나고 있었다. 제2호에 실린 「南華通訊을 일고서 」라는 글은, 남화통신이란 잡지에서 실린 임시정부를 비방하는 글에 대해 조목조목 반론을 제기한 것이다.

 1930년 중반 이후 독립운동전선에 주요한 문제로 떠오른 것은 人民陣線 문제였다. 1935년 코민테른 제7차대회에서 파시즘에 반대하는 자유주의자들까지 널리 포괄하는 반파쇼 인민진선전술이 채택되었다. 이후 식민지 국가들에 인민진선이 형성되었고, 이것이 한국의 독립운동전선에도 주요 논란거리로 대두되고 있었다. 「日本無産大衆과 握手는 不可能 」(제4호), 「人民陣線構成에 對한 我見 」(제8호), 「民族聯合戰線의 先決問題 」(제10호) 등이 이와 관련한 글들이다.

 『한민』은 임시정부나 한국국민당과 관련된 내용 뿐만 아니라, 독립운동 관련 소식을 비롯하여 다양한 성격의 많은 글들을 싣고 있다. 독립운동 관련 소식은 임시정부가 활동하고 있던 중국대륙을 비롯하여 만주와 미주지역에 대한 새로운 내용들도 많아, 독립운동사를 연구하는 데 있어 귀중한 자료가 된다. 그리고 3 · 1절기념 · 건국절 등 기념일 관련 기사들은 임시정부가 정부로 역할하고 있다는 것을 반증하는 자료라 할 수 있다. 또 임시정부가 수립기념일 행사를 하고 있었다는 사실과 그 기념일은 4월 11일에 거행하고 있다는 사실도 알 수 있다. 안중근 · 이봉창 · 윤봉길의사의 기념과 관련된 글들 중에는 의거의 과정과 실상이 소상하게 서술되어 있어, 기존에 알려진 내용들을 보완할 수 있기도 하다. 그리고 ‘來稿’의 글들을 통해서는 한국국민당이 추구하는 이념과 노선, 당시 독립운동전선에서 일어나고 있던 주요 논쟁이 무엇이었는지를 파악할 수 있다.

한시준(단국대학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