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29) 한국국민당(김구파)  

29) 한국국민당(김구파)

 1. 개황

 한국국민당은 昭和 10년 11월 김구가 金元鳳 파의 한국민족혁명당에 대항하여 조직한 것으로, 昭和 11년 7월 이전의 특무대를 대신할 한국국민당청년단을 조직하고, 당 기관지 『韓靑』(昭和 11년 8월 창간호 발간) 및 각종 기념일 등에 격문, 기타 인쇄물을 발행하고, 이봉창, 윤봉길사건을 유일한 재료로 삼아 맹주의 흉폭주의를 받들어 대관 암살, 帝國施政의 파괴 테러행동을 선동 선전하여서 혁명의식의 앙양과 당의 세력 확장에 힘쓰고 있지만 하는 일마다 民革에 압도되었다. 그런데 그 후 김구 파 安禹生이 민혁의 세력 범위인 廣東에서 민혁 지부의 붕괴에 활약한 결과 올해 2월 초순 본 당 및 가정부를 지지하는 ‘한국청년전위단’의 조직에 성공하여 한때 쇠미한 廣東 지방에 그 세력을 만회하였다. 그리고 올해 7월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중국 측으로부터 다액의 자금 원조를 받아 그 활동이 갑자기 활발해져서 아래에 기재하는 바와 같이 불령공작에 광분하는 외에, 조직 방면에서도 상당히 확장을 가져와 9월에는 앞에서 기재한 한국청년전위단을 한국국민당청년단에 해소시키고 다시 별항과 같이 반 김원봉 파를 규합하고 본 당을 중심으로 ‘한국광복운동단체연합회’를 조직하여 김원봉 파에 대항하기에 이르렀다.

 2. 중일전쟁에 대한 책동 상황

 김구 파는 김원봉 파처럼 그 활동이 표면적으로 화려하지 않지만, 전부터 蔣介石으로부터 “시기가 도래하면 100만 元까지는 지출할 것이다”는 내밀한 약속이 있었기 때문에 이번에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절호의 기회가 도래했다고 하여 만주사변 당시 감히 행했던 不逞 不軌를 다시 감행하려고 安恭根과 함께 이의 입수에 분주하는 한편 다음과 같은 각종 불령공작에 광분하고 있다.

(1) 7월 3일경 한국국민당 대표 김구는 南京에서 비밀리에 蔣介石에 초대되어 “이번의 북중국사건은 극력 불확대의 방침으로 노력 중이지만 주위의 상황은 어쩌면 어쩔 수 없이 확대되게 될 지도 모르므로 그 때에는 제군의 활동에 기대하는 바가 많다. 다만 현재는 화평적 수단을 강구하고 있어서 이에 대처할 수 있는 의견을 기술하여 제출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며칠 뒤 김구 등은 이 대책을 연구하여 상술하는 동시에 경비의 증액을 요구하였으므로 쾌히 채택되었다고 한다.

(2) 7월 중순 김구 파 한국국민당은 부하 청년 몇 명을 華北에 파견하는 동시에 첨예분자의 결집을 도모하고 安恭根은 몰래 上海 거주 조선인 등에 대해 ‘시국 공작상 필요에 대해 희생적 決死 청년을 되도록 다수 획득하도록 알선하기 바란다’고 의뢰하였다고 한다.

(3) 7월 21일 김구 파는 ‘엄중한 時機와 일반의 주의’라는 제목 하에 ‘이번이야말로 우리들도 독립전쟁을 개시하여 雪憤復國의 시기가 도래하려고 하므로 일반 동포는 이에 응할 준비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라는 주의를 촉구하고, 또 동일자로 임시정부국무위원 연서의 동일 취지의 포고문을 발표하였다.

(4) 7월 31일 입수한 첩보에 따르면, 김구는 한국국민당원 金英浩 이하 6명을 華北에 파견하여 北平시장 秦德純의 보호 하에 中韓互助社의 부활 및 일본 측의 군사, 기타 일반정보의 수집에 힘쓰게 하였다. 또 이들은 ‘한족항일동지회집행위원회’의 명의로 ‘華北 거주 동포에게 고하는 글’(일본 타도를 강조한 것)을 작성, 살포한 모양이다. 또 조선군이 북중국에 출동하였음을 탐지하고 이를 기회로 조선 주요 도시의 폭동화, 대관 암살 등의 후방 교란을 꾀하고자 南京정부에 응원을 요구하고 다수의 불령조선인을 조선 내에 잠입시키려고 이미 일부 선발대 약간 명을 파견하였다고 한다.

(5) 8월 25일 김구 일당의 참모격인 안공근은 중국 측의 각 신문기자 십수 명을 上海의 모 요릿집에 초청하여 한국국민당의 종래 활동상황을 과대하게 퍼뜨리고 현재에도 그 활동은 하등 소극화한 것이 아님을 강조하였다. 또 지금이야말로 특히 중한 양 민족이 전 능력을 발휘하여 합작하고 최후까지 일본에 저항하여 중한 민족의 해방, 자결을 위해 투쟁해야 하는 시기라고 주장하며 참석자의 동정을 구하였다.

(6) 김구는 8월 말 安敬根, 嚴恒燮 등을 따라 上海에 잠입, 중국 측의 軍政 각 방면을 두루 방문하였다. 특히 프랑스 공부국 정치차장 러시아인 엠랴노프와 장시간 회견하였으며, 3일 간 체재한 뒤 엄항섭을 동반하고 南京으로 퇴거한 사실이 있다. 그 당시의 언동에 따르면, 현재 南京에서는 김구 파, 김원봉 파의 구별 없이 시국이 시국인 만큼 전부 합동하여 함께 중한합작의 구체적 방책을 연구 중이라고 한다. 또 조선인 청년 군관학교 졸업생 및 그 예비교육을 마친 자는 전부 南京에 소환하여 대기시키고 있는데 그 수가 약 100명이며 중국 당국의 비밀명령에 의해 어느 기회를 이용하여 가장 유효하게 사역시키기 위해서이다.

(7) 한국국민당의 중진 安恭根, 朴昌世, 金弘月은 8월 하순 부하 몇 명을 거느리고 上海에 잠입하여 친일적 중국인, 조선인의 암살을 기도하는 한편, 중국 측 便衣隊 본부 및 중국 각 항일신문사 등에 출입 연락하여 중한연합의 책동에 광분하였다. 또 8월 재미대한인국민회 외 5단체 및 조선혁명당, 한국독립당의 8단체와 연명하여 ‘韓國광복운동단체의 중일 戰局에 대한 선언’을 발표하였다.

(8) 9월 9일 鎭江에 잠입 대기 중인 김구는 심복의 동지인 무정부주의자 柳子明을 鄭華岩에게 보내어 “서로 과거 일체를 잊고 주의, 주장을 초월하여 이 기회에 악수하자. 나는 이번에 자금도 생겼고 기계(권총, 기타 흉기의 뜻)도 입수했다. 김원봉 일당 약간 명을 제외하고 나머지 광복운동자는 전부 의사소통을 보았다. 이번 기회에 옛날처럼 사이좋게 일을 하고 싶다.

속히 협의하고 싶으니 와 달라”는 친필 편지를 보내어 대동단결을 종용하였다.

(9) 9월 29일 김구의 어머니 郭樂園은 손자 金仁을 데리고 몰래 상해에 와서 프랑스조계 貝勒路 新天祥里 20호 안공근의 집에 피난하였다. 또 이로부터 김인은 한국국민당청년단 上海특구기관지로서 『戰鼓』의 발행을 기도하고 같은 달 11일자 창간호를 출간하였다.

(10) 10월 12일 사변 이래 上海에서 책동 중인 한국국민당(본부를 南京에 두고 조사, 행동, 특무, 교통, 연락 등의 각 부를 설치) 당원 등은 上海 프랑스조계 高山路 부근에 지부를 두고 상점을 가장하여 사람 눈을 가리고 있다. 그 아지트의 책임자는 조 아무개, 이 아무개(그 후의 조사에 의해 趙尙燮과 羅愚의 두 사람에 해당함)라 하며, 부하 약 10명을 통솔하고 있다. 본 당은 항일역량의 확대 발전에 노력하여 이미 南京정부 군사위원회 특무대(藍衣社) 領袖 戴笠(장개석의 심복)과 연락하고 있다. 上海 지부도 역시 藍衣社 上海지사와 연락하고 있다. 특히 조사부원은 虹口, 楊樹浦, 吳淞, 江漢羅店, 楊行, 劉行의 각 戰區에 들어가 일본군의 진용, 편성, 실력 등을 조사하고 무기, 탄약, 식량, 비행기, 대포의 저장소 등을 보고하고 있는데, 중국군 비행기가 야간 출동하여 성적을 거둔 것은 전부 이에 기인하는 것이라고 들었다.

(11) 10월 13일 한국국민당 당원이며 황해도 출신 고 盧伯麟의 조카 盧亞敬 즉 盧泰俊 당25세는 上海 江灣鎭 방면에서 중국 中央軍 某師 기관총대장으로서 이적행위 중 다리 부위에 부당을 입고 후송되어 프랑스조계 내 중국홍십자병원에 입원하였는데 최근 치유 퇴원하고 다시 전선으로 간 사실이 있다.

(12) 上海 南市 지역의 함락이 목전에 다가오자 종래 프랑스조계 南支 방면에 소굴을 이루고 있던 불령선인들은 대공황을 초래하여 김구의 어머니 郭樂園은 안공근을 따라 10월 30일 자동차로 南京으로 달아났다.

(13) 김구 일파는 중국 측이 참패함에 따라 자금이 두절되었기 때문에 당의 세력이 갑자기 쇠퇴하여 극력 이의 만회책에 분주 중인데 12월 중순 이들 일당은 上海 부근 모처에 집합하여 당재건 및 장래의 투쟁목표에 대해 협의한 결과 결사대 3대를 조직하여 제1분대 만주국, 제2분대 조선, 제3분대를 일본에 파견하기로 결정하였다. 이들 파견 분자는 각기 분담 구역 내에서 중용 관공서의 폭파 및 대관의 암살 등을 결행하고 치안을 교란시키며 나아가서는 이를 동양 혁명에까지 유치하여 이로써 조선독립의 목적을 달성하려고 기도한 모양이다.

(14) 한국국민당, 동 당 청년단, 조선혁명당 등의 당원들은 皇軍의 추격이 급해졌으므로 어쩔 수 없이 가족과 함께 10월 하순부터 속속 오지로 향해 도망을 개시하였다. 또 사변 발발과 동시에 적극적 공작 지도의 임무를 띠고 上海에 잠입하여 새 당원 모집 및 암살과 기타의 테러공작에 분주한 중이었던 金東宇 즉 盧鐘均, 安志靑 또는 安東滿 즉 安載煥은 각 방면으로부터 자금을 염출하여 부하 당원을 먼저 도주시키고 잔무처리 종료와 동시에 일대 테러사건을 감행한 다음 도주하려는 계획 중인데 12월 28일 上海제국영사관에서 검거되었다.

▪ 金正明 編, 『朝鮮獨立運動 Ⅱ』 595~59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