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한민』 제9호(1936. 11. 30)  

『한민』 제9호(1936. 11. 30)

建國紀元節後 感言

 一

 망국노의 탈을 쓴채 젹의 말굽 밑에서 또다시 건국기원졀을 맞은 우리는 뜨거운 눈물이 아직도 피묻은 옷깃을 젃일 뿐이다. 이웃나라 중국은 이꼴을 당하지 아니하랴고 이제는 젼국이 일치하야 젹에게 달겨든다. 그러나 강한 젹과 싸호는 그들은 도로혀 생기가 발발하다. 나라 없이 잘사는 방법을 신발명한 아라사도 이제는 그 실패를 자인하고서 ‘조국을 사랑하라. 력사를 알라’ 하면서 고함을 친다. 슬프다 27해 동안을 망국의 한을 품고 쓰라린 맛을 가추본 우리로서 만일 사람의 맘이 있다면 나라가 없어야 잘 살 수 있다는 잠고대를 또 할가보냐 한국 두 글자를 원수같이 역이며 태극국기까지 넉마 속에 묻어버릴가 보냐.

 二

 도라보건대 우리나라를 세운 이도 찬란케 꾸민 이도 망케한 이도 다 우리의 조상이다. 그러나 앞으로 나라를 다시 세우며 다시 찬란케 꾸밀 이는 오직 우리 뿐이오, 세상에 나오는 그 순간붙어 망국노의 탈을 뒤집어쓴 우리 쳥년들이다. 우리가 나라에서 받은 은헤는 비록 적었다 할지라도 우리가 나라에 갚을 것은 가장 많다. 우리는 큰 짐을 질머졌으니 어느 겨를에 지나간 이들의 공과인들 론란할 수 있으랴. 또 그것이나 론란한들 무슨 리익이 있으랴. 셜령 그들의 허물을 밝힌다 하드라도 빼앗긴 나라가 제 스스로 돌아올 수 없을 것이며 그들의 공노를 찬양한다 하야도 웃음이 나올 수도 없다. 우리는 다만 더러운 망국노의 탈을 벗기 위하야 목숨이 붙어 있는 최후 일각까지 원수와 사생을 결단할 것 뿐이다.

 三

 망국노의 탈을 벗으랴면 그 탈을 쓰게된 원인붙어 알어야 겠다. 물론 그 원인은 한 두 가지가 아닐 것이나 ‘남을 높이고 나를 업수히 역이며 남의 것은 까닭없이 놓아하고 내것은 덮어놓고 내버렸다’는 한 말로써 젼체를 대표할 수 있다. 보라 요순은 츄앙하여도 한 배검은 알지도 못하며 신지의 문짜는 한문이 아닌 까닭에 자취도 없어지고 리순신의 쳘갑션은 당껏이 아닌 까닭에 그대로 삭어버리고 세종대왕의 한글은 지체가 낮어서 암글이 되고 말었다. 이 결과는 나라까지 망하게 하였나니 이러한 례는 부지기 쳔기만이다. 말이 이에 이르매 일우장탄을 금할 수 없다. 한 나라의 망함이 어찌 우연하랴. 새 나라를 세울 큰 짐을 질머진 우리는 건국기원졀을 맞을 때에 먼저 이따위 비렬한 사샹붙어 퇴치하자. ‘나를 알며 내 졍신을 직히자’는 것을 더욱 굳게 결심하자. 우리는 조상들의 력사를 중국 문헌(文獻)에서 찾어냈지만은 우리의 자손은 우리의 력사를 아라사나 일본의 문헌에서 찾게 되지 아니하도록 만들어 주기를 결심하자.

自今處處에 逢敗만 하는 日本의 對華侵略

 만주를 먹고 열하를 차지하고 찰하얼륙현을 배앗고 북평 쳔진을 깔고 앉고 산시녕하 감숙 등 제셩에 소위 특무기관을 셜하여 중국 셔북의 복심지까지 손길을 뻗은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은 가위 일범순풍의 행운을 맛나 거침없이 승승장구하였다. 얌체 없고 간교한 그 놈들은 이에 만족지 아니하고 일변으로 남중국에 군사시셜을 확대 강화하며 경제침략을 젹극 진행하면서 중국 중앙졍부와 광동 강셔 사이에 내란이 확대되야 중국 상하가 눈코 뜰새가 없게 되기를 엿보아 중국을 통으로 삼키기로 하였다. 그러나 뜻밖에 량광의 반란은 도로혀 중국의 통일을 촉셩하는 동시에 중국 민중의 애국심을 고조로 격앙케 하야 이제는 중국 상하가 더 참을 수 없다는 듯이 일제히 일본과 생사를 결하자고 일어나니 이것이 왜젹이 제가 제 손으로 파놓은 함졍에 떨어지는 첫거름을 개시함이오, 양같든 중국 졍부에서 사자의 소리를 치는 큰 원인이다. 중국 졍부도 사람의 졍부인 이상 어찌 달게 젹인에게 굴복만 하였겠느냐. 다만 국내에는 각파의 군웅할거(群雄割據)젹 야심이 발동을 하는 동시에 공산당이 대부대젹으로 반란을 이르켰으며 국외로는 튼튼한 후원자를 못 얻었든 까딹에 국민의 불만을 받어가면서 참어온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젼국이 통일 되였으며 공산당의 기식도 엄엄하고 뒤에서 영 · 미 · 아 등 제국도 질거 응원함으로 군기와 군수품을 사드리기에 걱졍이 없으매 매 국민졍부에서도 단연한 결심을 내리여 쳘져히 왜젹에게 반항하는 것이다. 지금 내몽고지방에서 진행되고 있는 젼쟁은 외면으로 보아서 내란이나 실지에는 중일젼쟁의 도화션에 완젼히 불이 붙은 것이니 우리 한인으로서는 이것을 결단코 남의 일같이 생각하지 못할 것이다.

 근일에 세상을 놀래게 한 일 · 독 · 의 등의 동맹은 물론 없는 것만은 못하나 졀대로 중국을 해할 수 없나니 이는 이것이 있기 때문에 영 · 법 · 미 · 아의 공동진션이 급급히 촉셩되는 동시에 세게젼쟁의 폭발은 갓가워지며 세게젼쟁의 승리를 위하야 이상의 강국은 중국을 젹극으로 후원하게 될 것이 분명한 까닭이다. 듣는 바에 의하면 중아에는 공산당문제로 확실히 악수를 못하였다 하나 두 나라가 젹을 같이하고 있는 이상 졀박한 시기에 림하면 피차간 자신의 리익을 위하야 무조건 합작을 실현할 것이며 영 · 미도 까닭없이 중국을 돕는 것이 아니오, 대일관계의 리해충돌로 제 자신을 위하야 돕는 것인 즉 이것도 중국에서 교묘히만 리용하면 제2의 필리핀이나 인도될 염녀가 없는 것이다.

 이와 같이 모든 형세가 중국에 유리하고 일본에 악렬하게 젼개가 되매 일본은 창황 망조하야 션발 제인의 책을 세우고 중국을 졍개젹으로 공갈하기 위하야 재래에 행하든 지방젹 외교방법은 졍지하고 중앙졍부로 덤비기 시작하였다. 이 신졍책의 제1션에 나선자는 소위 강경외교 즉 군벌의 입에 맛는 외교를 잘하기로 저의 국내에 물망이 있는 쳔월이다. 이놈은 지난 9월 12일에 상해를 떠나 남경으로 향하였다. 이놈이 떠날 때에 왜군부칙은 외교불셩공이면 사불환(死不還)하라고 격려하였으며 그놈은 군령장에 다짐을 두었다. 그러나 지금에 와서는 제2의 장본(藏本)이가 되지 아니치 못하게 되였으니 실로 쾌재 쾌재 참 포복졀도할 일이다. 더욱 가소할 것은 그 놈이 상해를 떠나든 날에 왜 신문기자를 보고 ‘남경 졍부를 식히어서 배일단체는 쳘져히 취제할 수 있지만은 중국인의 항일심리는 소멸하기가 극난하다’고 한 것이다. 쳔월이가 남경에 도착한 후 9월 16일붙어 11월까지에 중국 외교당국과 범 칠팔차의 회견을 하였으나 아모 소득이 없었다. 나종에는 별수단을 다써서 제가 제출한 조건을 물건 흥졍하듯이 제스스로 깍것다 올렸다 하며 또 거간군을 놓듯이 소위 칙면 교셥이라는 것을 행하야 위협도 하고 애걸도 하야 필사의 노력을 해보았다. 그러할수록 중국의 태도는 더욱 강경하게만 나가도 일본 놈은 더욱 체면만 잃었다. 그 중에도 제일 창피한 것은 쳔월이놈이 제3차의 회견을 마추고 역시 아모 소득이 없으매 그때는 광동에 있는 장개셕씨와 남경에서 회견하겠다고 장외교부장을 공갈하였다. 그러나 이 개방구에 누가 코웃음이나 쳣으랴. 그런즉 그 다음에는 장개셕씨와 회견할 일자를 확졍 답복하라고 요구하며 만일 즉석 답복이 없으면 이 회견실을 떠나지 아니하겠다 하고 의자에 아조 붙어 앉었었다. 장외교부장은 미안하나 밧버서 초때할 수 없다 하고 나가면서 그 놈만 그 방에 남겨두었다. 중국 사람이 행여나 무서워 할가하고 염체 없이 시험해 본 노릇이 뜻빢에 이리되매 그놈은 어찌할 도리가 없어서 그대로 인형같이 앉었었는데 어느 때인지 외교부 하인이 사무시간이 지나서 문을 닿겠으니 나가달라고 하는 바람에 그놈은 앙심을 품고 돌아갔다 하는 거진말 같고도 참말인 사실이다. 이일이 있은 뒤에 왜 졍부는 쳔월을 소환하려 하였으나 그러면 저의의 약졈을 더욱 폭로하게 되겠음으로 별개생로(別開生路)한 것이 근일에 세상의 신경을 예민케 하는 유원젼쟁이다.

그러나 유원젼쟁에도 왜놈이 또 실패하야 그 놈들의 유원에 가장 중요한 군사 중심지인 홍껄루를 본월 18일 새벽에, 백령묘를 24일 밤에 각각 중국 군대에게 여지없이 함락을 당하였다. 이 결과는 중국인의 애국심을 더욱 공고히 하며 왜젹의 간을 더욱 서늘하게 하니 처처 봉패하는 왜젹은 오직 말로는 향할 뿐이다.

敵의 蠻兇과 少女의 犧牲

 왜놈이 중국에 위엄을 보이기 위하야 금년 10月 26日붙어 11月 4日까지 쳔진과 북경에서 소위 대련습을 하였는대 남에 지방을 무인지경같이 횡행하는 통에 건물과 곡식이 모다 쑥밭이 되여다. 11月 3日은 왜군이 한층 더 보아라 한듯이 탱크차를 몰고 북경성을 통과하였는대 그날 아츰 동방중학 부속소학교에 단니는 11세된 녀학생이 이것을 보고 그 어린마음에도 하도분개하여 ‘타도 일본제국주의’라고 소리를 질넜다. 왜놈은 이 소리에 성이나서 그 어린 녀학생을 탱크차 밑에 집어넣어서 참혹하게도 죽였으니 이 얼마나 잔인하고 악독한 일인가. 요새만 같해도 중국 사람이 여간 떠들지 안었을 터이나 그때까지는 침묵을 직히노라고 신문에 게제도 못하고 다만 북평신보(北平新報)에 ‘1個 赤子가 怒吼하다가 血祭를 드렷다’는 일편의 단평을 게제하였을 뿐이다.

台灣의 獨立運動

 대만에서 채 · 모 등 다수 인사가 비밀결사를 조직하고 무력으로써 반란을 닐으켜 왜 총독부를 젼복하고 일본의 통치에서 버서나 독립하기 위하야 만반게획을 세우고 실행하려 할즈음에 사실이 발각되어 재작년 가을에 400여명이 잪이서 3년간이나 옥중고생을 하다가 그중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이 15명만 기소하야 공판에 붗이고 그 외에는 다 보석하였는대 그동안 신문기사를 일절 금지하였다가 최근에야 해금되어 세상에 발표되였다. 이 일을 주동한 이들이 일즉 모방에 향하야 무기와 재졍의 원조를 청하였다 한다.

臨時議政院 會議經過

 신구의원이 다수히 출석하여 각 항의 안을 순죠로 처리하다

 우리 림시의정원에서는 11月 10日 모지에서 비밀리에 개회하야 회의를 무사히 맟우었는대 이번에는 우리의 선배 여러분과 우리 운동게의 중진인 여러 인사가 의원에 보결당선되여 출석하였음으로 크게 성황을 일우운데다가 현하 시국이 더욱 긴장한 이만치 금후 우리의 운동방략에 대하야 중요한 토의가 있었으며 이번이 국무위원의 개선기임으로 국무위원을 다시 선거하였는대 당선된 인물에 있어서는 별로 변동이 없었다 한다.

韓國國民黨大會經過

 각지의 당원이 다수히 출석하여 대성황리에 회의를 무사히 진행

 한국국민당에서는 11月 6日 모지에서 당원대회를 소집하야 각지 당원이 다수히 출석하야 대성황으로 회의를 징행하였는대 각항 중요한 안건이 많이 상정되여 순죠로 처리된 중에 우리 운동전선에 대한 대방략을 결성한 것은 더욱 주목되는 바이다. 이 대회에서 토의된 안건이 다 실행되는 날이면 우리 운동선상에는 대발젼이 있을 것이 기대되는대 일반 당원과 간부에서 오는 1년 간에 맹렬히 활동하야 대성적을 내기로 결심하였다 한다.

臨時政府의 今後 活動

 기정방침에 의하야 적극 진행하여 우리의 운동을 크게 진전식히기로 우리 림시정부에서는 이번에 다시 국무위원으로 뽑힌 이들이 거듧 결심하고 용기를 다하야 의회에서와 국무회의에서 결정된 방안에 의지하야 적극 진행하야 우리의 운동을 크게 진졍식히기로 한다는대 여기에는 전체 국민의 합치와 원조를 요하게 됨으로 정부에 당국한 이들은 무엇보담도 동포들의 두터운 협력이 있기를 바란다 하고 그 중에도 군사상 인재가 림시정부로 많이 집중되기를 희망한다 한다.

建國紀元節紀念

 이 달 16일이 음력으로 10월 3일 즉 우리의 건국기원졀임으로 이날을 기렴하기 위하야 림시정부와 한국국민당과 동 청년단에서 각각 기렴문을 인쇄 배부한 외에 당졍기관에서 장엄한 기렴식을 행하고 민족혁명당에서도 기렴문을 인쇄 배부하였으며 모지의 한교회에서는 교민이 모여서 기렴식을 거행하였다 한다.

金恩濟氏 恩公慘死

 비행기 타고 젼방으로 나가다가 기게에 고장이 생겨 무참히 별세

 모국 항공대의 항공원으로 있던 김은제씨는 지난 10月 29日 모지에서 비행기를 타고 젼방으로 나가다가 비행기에 고장이 생겨 떠러져 무참히 세상을 떠낫는대 그는 본래 평북 정주출생으로 일즉 모국에 와서 그 나라에 입적하고 그 나라 사람으로 행세하면서 군관학교와 항공학교를 필업하고 다년간 항공대원으로 항공에 종사하다가 그만 28세를 일기로 하야 생명을 맟우웟음으로 그를 위하야 애석히 넉이지 않는 이 없는 바이다. 그의 탓던 비행기에서 불까지 나서 그의 신체까지 불에 탓다하니 더욱 참혹한 일이며 그의 시체는 그의 인연지인 모지에 운반하여다가 장사하려한다 한다.

崇實崇義 等 3學校 廢止

 적 신사참배문제로 선교회가 자행페지

 평양의 숭실젼문학교 동 중학교와 숭의녀중학교에서 소위 적 신사참배문제로 인하야 교장이 갈닌 이후 왜 당국의 태도는 그냥 강경하고 교인 측의 반대는 그냥 맹렬하야 학교 때문에 선교사업에 동요가 생길 것을 념려하고 그 3학교의 설림경영자인 미국 북장로회총회에서는 지난 가을에 회의를 열고 많이 토론한 결과 마츰내 그 3학교를 자행 페지하야 교육사업에서는 손을 떼고 선교사업에만 주중하기로 하였다는대 그 학교출신의 인사들은 학교가 페지 않되도록 운동하였으나 효과가 없게 되였다 한다. 학교사업을 못할지언정 적에게 굴복지언정 적에게 굴복지 않는 것은 장한 일이나 오랜 력사를 가지고 교육게에 중진이 되여 있든 세 큰 학교가 페지되는 것은 크게 불행한 동시에 국내의 인심이 적에게 대하야 반발적 기세로 나아가는 것은 우리 운동선상에 일종 좋은 경향이라고 볼 수 있다.

東亞 · 中央 兩 新聞, 停刊後 所聞

 올림픽대회 마라손경주에 우등한 손기정군의 가슴에 붗인 왜놈의 국기를 글거버리고 그 사진을 신문에 게재한 사건으로 인하야 동아일보는 8月 28日에 정간되고 중앙일보는 9月 5日에 자행 휴간하는 동시에 동아일보 사원 10사람이 경기도 적 경찰부에 잪여가 29日 간의 구류를 당하고 사장이하 주필과 편집국장들이 불려가서 심문을 당하였는대 적 당국에서는 신문의 게속을 졸연히 허락지 않을 심사를 가지고 난처한 죠건을 실행식히려 하는바 그 죠건은 신문기사의 체재를 크게 변갱하야 일본의 동화정책에 부합되는 언론만을 기재하고 신문사의 간부인물을 변갱하되 주필은 일본인으로 하라는 것이라 한다.

 신문이 정간되는 동안에 손해가 불소하야 매삭 만여 원의 손해가 있음으로 중앙일보사는 설혹 왜 당국의 허락이 있더라도 게속 경영하기가 어렵겠다고 한다.

李溟玉氏 確定判決

 민국 6년과 2년도에 국내에서 독립운동에 참가하야 열렬히 운동하는 중 적견을 살해까지 한 사건으로 작년 3月 26日 상해에서 잪여나간 상해에서는 해주 적 지방법원에서 징역 15년의 판결을 받고 평양 적 복심법원에 공소하야 13년으로 된 것을 역시 불복하고 경성 적 고등법원에 상고하였더니 상고 기각이 되여 종시 징역 13년으로 확정 판결이 되여 부득이 복역하게 된 바 그의 가족은 상해에서 간곤한 생활을 하고 있다 한다.

上海我敎育機關 幼稚園廢止

 상해에서 다년간 우리의 교휵사업으로 경영하여오던 인성학교가 왜놈의 제재로 인하야 작년 가을 종시 페지가 된 이후 그래도 우리의 자녀교휵을 아조 않이할 수 없다 하야 우리 기독교회에서 유치원을 설립하고 어린이들을 교휵하기로 하여 성적이 대단히 량호하던 바 상해 법조게 당국에서 일본사람의 간섭이 두렵다는 리유로 이것까지도 못하리라 하야 금년 9月 말일에 마츰내 페지가 되고 말었는대 페지될 당시에 아희들 수효가 40여명이나 되였다 한다. 불란서 놈들이 왜놈의 비위를 마추어 어린아희들 교휵까지도 못하게 하야 비인도적 야만행사를 하는 것은 가통한 일이어니와 상해 교민들이 그래도 교휵을 않이할 수 없다는 생각에서 이번에는 학부형들의 자동적 교양기관으로 하야 이학기까지는 맟으고 다시 형편을 보려한다 하니 우리는 어린 자녀를 교양할 수도 없게 되는 정세이다.

到處에 不良輩

 국내와 원동방면에는 각 종류의 사람도 많고 또 왜놈과 접촉할 기회와 유혹이 많은 때문에 왜놈의 개노릇을 하는 무리가 많은 것도 용서할 수 없거던 하물며 못처럼 고국을 떠나 먼 나라에 가서 단순한 생활을 하며 또는 왜놈과 접촉할 기회도 많지 않은 무리 중에 왜놈의 개노릇을 하는 자가 있음은 천만 뜻밖이오, 더욱 통탄할 일이다. 미주에 거류하는 한인 중에도 왜놈을 갓가이 하는 불량배가 있다 함을 물었거니와 하와이에도 이런 무리가 있다 하니 가통한 일이다. 그런자 중에는 모 단체의 중요 간부로 있던 자도 있고 모 교회의 중요직임을 가졋던 자도 있고 모 군대에 오래동안 종사하던 자도 있는대 그들도 배달의 피를 갖였거던 개과자신하여 장공속죄(將功贖罪)하면 이어니와 그러치 않으면 용서가 없을 것이다.

爲國의 熱誠

 군인양성을 위하야 미화 100불을 기부

 하와이에 있는 대한부인회 회장 황마리아씨로붙어 김구선생에게 미화 100불을 보내면서 이것을 군인양성에 써 달나고 부탁하였다는대 이는 조국을 사랑하는 일편단심에서 나온 것이니 그 성의를 탄복지 않는 이가 없다 한다.

韓國國民黨에서 綏遠軍에 祝電

 한국국민당에서는 지금 수원에서 일본이 조종하는 만몽군으로 더부러 용감히 싸서 승전한 부작의(傅作義) 이하 장령에게 젼보를 발하야 그들의 용기를 칭찬하고 아울러 우리도 맛당히 같은 젼션에 서서 함께 사홀 것을 표시하였다 한다.

人民陣戰에 對한 中國의 制裁策

 중국에서도 민간에서 외래 풍죠를 따라서 공상당 책동하에 제창되는 인민진선을 찬동하야 상해를 중심으로하야 그 기세가 자못 높았섰든바 당국에서 일시는 관망젹 태도를 취하였으나 최근 중앙정부로서도 항일정책을 세우고 방금 유원에서 전쟁을 진행하고 있음으로 이제는 제삼파나 제삼국의 간섭이나 책동을 용납할 수 없기 때문에 인민진선에 대한 엄정한 제지책을 쓰기로 결정하고 위선 상해를 위시하야 이 운동의 중요분자 10여인을 체포하고 게속하야 대검거를 하랴 함으로 이에 관련된 사람들이 모다 피신하였다 한다.

 이로써 보건대 중국에서 대내해서와 대외하야 정책이 확실히 세워진 것을 가히 알 수 있다.

 感荷義捐

 하와이에서 하의 제씨로붙어 우리 ‘한민사’에 의연금을 보내주신데 대하야 본사 동인들은 감사함을 마지 않나이다.

 김상호 선생 5元 졍호영 선생 5元 김수성 선생 2元 박근실 선생 2元

 젼록영 선생 2元 졍준영 선생 2元 리주션 선생 1元 5角 우졍조 선생 1元

 리경서 선생 1元 김영수 선생 1元 오정실 선생 1元 림일관 선생 1元

 방창렵 선생 5角

宏宏烈烈하든 光州學生運動의 回顧

 ‘대한독립만세 타도 일본제국주의’를 목젹한 학생운동이 지금으로붙어 7년전 10月 30日에 광주에서 처음으로 발단이 되자 그 불떵이는 즉각에 번개같이 전국 각지에 뛰고 말엇다. 이것이 이른바 광주학생운동이니 그 엄밀한 조직과 긔민한 활동은 실로 우리 혁명사상의 신긔록이 될만하였다. 이 운동은 그 이듬해 1月까지 연장된 바 이에 참가한 지방이 남북에 50여처이며 그 동원 총수가 수만이였다. 광주에서 시위운동에 참가한 학생만이 1,000인데 시민 3만이 이에 가세하였다. 경성은 졍치와 교육의 중심지인 만콤 시위운동의 규모가 컸으니 그해 12月 5日에 시작하야 이듬해 1월 중순까지 거의 날마다 게속하였으며 학생들의 열열한 옹호와 젼 민중의 졀박한 요구에 의하야 권동진 · 한용운 · 홍명희 · 손재긔 · 조병옥 · 주요한 · 리원혁 · 허헌 · 리관용 · 김무삼 등 각게 선배 제씨가 민중대회를 열고 3 · 1선언에 의한 독립자주하는 대한국민의 자격으로 왜젹에게 반항하며 만쳔하에 태극기를 휘날니랴다가 불행히 젹에게 포로가 되야 각각 1년 내외의 쳘창생활을 하였다.

 이 렬렬한 피의 기록을 이날 이때에 우리-그 중에도 쳥년학생 제군이 다시 한 번 읽어보는 것이 가장 필요할 것이다. 그러나 지면관게로 여기에는 다만 그 투쟁이 일어나든 동기와 개전초의 광주 젼기(戰記)만 간략히 쓸 수 밖에 없으니 실로 큰 유감이다.

 

 1. 동기

 민국 11년 10月 30일 오후 6시에 라주에서 기차로 통학하는 광주녀자고등보통학교 학생 박기옥(18) 양이 라주졍거장에 내려서 집으로 돌아가랴고 졍거쟝 밖으로 나오랴할 즈음에 한 차를 타고 오든 라주에서 광주로 통학하는 광주 왜 중학교 학생 젼중 · 복젼 · 말길 3놈이 무단히 박양의 가는 길을 막고 희롱을 하였다. 박양은 천연스럽게 딴길로 걸어서 이 돈견을 피하였으나 그놈들은 졈졈 더 무레히 구는 까닭에 박양과 동행하든 그의 동생 준채군(16)은 그놈들의 비행을 엄책하였다. 그러나 그놈들은 한인을 업수히 역이는 생각으로 감히 젹반하장의 행악을 하게 되니 이에 기차에서 내린 학생은 량대진영으로 짝 갈니여 민족젼쟁을 개시하게 되였으며 보이지 아니하는 애국애족의 맘 조수는 왜젹이 교통을 단절하기에 사력을 다함에도 불구하고 무선전의 젼파와 같이 공중을 통하야 ‘SOS’(무급신호)를 발하매 각쳐에서 혁명의 봉화를 마조들게 되고 계다가 왜 관헌은 야만의 행동으로써 그 불에 기름을 부어서 그 불꽃이 더욱 맹렬하여진바 그 행동은 대게 이러하였다.

 첫재, 현장에 잇든 왜 순사는 왜 학생만 보호하는 동시에 도로혀 한인 학생을 함부로 구타한 것

 둘재, 사건발생 제2일에 기차 속에서 한 왜 학생군의 젼쟁이 또 개시된 바 차장은 한국 학생만 구타하고 승차표까지 빼았어 간 것

 셋재, 개젼 제2일에 왜 광주중학 유도교사가 ‘일인이 조선 놈에게 맞어서는 안 된다. 조선 놈은 때려죽여도 살인도 없다’고 고함을 치면서 왜 학생을 령솔하고 한국 학생을 습격한 것

 넷재, 광주 왜 경찰은 불시에 경종을 란타하여 젼 시경찰과 소방대원과 재향군인을 총출동하고 검사까지 현장에 출동하야 한국 학생만 다수를 포박하고 저의 학생은 눈가림으로 두어 명만 체포한 것

 다섯재, 그 후에도 검사는 한국 학생만 게속젹으로 검거하고 왜 학생은 이믜 검거한 놈까지 석방한 것

 2. 젼기

 제1역 박기옥양 사건이 발생한 후 일반 학생계의 배일감졍은 일치격앙하야 보복할 기회만 였보든 차에 마침 11月 3日에 광주 우편국 앞에서 한국 학생 7명과 왜 학생 20여명 간에 젼초젼이 개시 되였다. 왜 학생은 품에 품엇든 단도로써 한국 학생을 함부로 찔으랴 할 때에 그 부근에 있든 사범학교 농업학교 고등보통학교의 한국 학생 200여명이 현장에 달녀오고 광주 중학에서도 왜 학생 130여명이 달녀와서 각각 저의 편을 응원하야 일대 격전을 경과한 바 예리한 단도에 다수한 부상자를 내였으나 한국 학생은 그래도 조곰도 굽히지 안이하고 양잠용 기구로써 끝까지 용감히 싸왔다. 이때에 한국 여학생들은 붕대와 약품을 가지고 쳥년용사에게서 솟아나오는 한국의 피를 깨끘하게 진정식혔으며 왜 녀학생들은 돌을 주어서 저의 남학생에게 주었다.

 맹렬한 젼투가 끝나자 한국 학생은 오렬의 장사진을 3만의 시민과 함께 전시일주의 대 시위행렬을 거행하면서 ‘대한독립만세’를 높히 부르니 침묵하든 광주는 바야흐로 완전한 젼시상태에 들어가고 왜군경도 등등한 그의 기를 억압치 못하였다.

 제2역 제1역을 치룬 후에 왜적은 크게 공황하야 즉시 6일간 휴학하기를 각 학교에 명령하였다. 제7일에 다시 개학한 후 고등보통학교 학생 400여명은 비밀게획에 의하야 11월 12일 조회시간에 일제 괭이와 몽둥이를 들고 사범학생 200명과 농고학생 80명과 서로 호응하야 오렬행진으로 전시일주의 대시위운동을 제2차로 거행하면서 ‘용감히 싸우자, 학생 대중아’하는 등 4 · 5종의 격문을 산포하고 대한독립만세를 불럿다. 왜놈은 광주젼시에 게임령을 반포하고 타처에서 다수한 경찰이 와서 무력으로 압박하기를 시험하였으나 필사적 결심에 나온 학생군의 혁명기세가 어찌 장엄하였든지 당시에는 감히 하수하지도 못하였다.

 그러나 그들이 각각 자기 학교로 돌아감을 기다리여 놈들이 학교 문안에서 일시에 검거한 수효가 280명이였다. 이날에 녀자고등보통학교 학생들도 예정게획에 의하야 시위행렬에 참가코저 하였으나 경찰과 교수의 제지로 인하야 교문을 나오지 못하게 되매 그대로 땅에 주저앉어 방성통곡을 하고 ‘대한독립만세’만 힘껏 부른 후 당장에 매인이 50젼식을 내여 젹의 감옥에서 신음하는 동지들을 응원하기로 하였다. 이것이 당시 당지의 정형이다.

朴奇玉과 徐寶桂에 對하야

 特히 學生 諸君에게 訴함

 지난 10월 26일로붙어 10일 동안에 흉폭한 일본 군은 북평 쳔진 간에서 명색 없는 대연습을 거행한 바 소과에 무분잔멸이였다. 본월 3일에는 저의 가상하였던 북평성을 함락한다고 놈들은 살기등등하게 셩문을 뚫고 들어갔다. 이날에 북평은 하늘도 흐리었으며 거리마다 음냉한 기운이 떠돌았는데 각 학교 문에는 조기를 달고 그 안에서 학생들은 통곡을 하였다. 이때에 4억만의 어린 령혼-신흥 중국의 순진한 쳔사가 나타났으니 그는 11세의 소녀 서보계 양이었다. 그는 미처서 날뛰는 금수의 떼가 탱크차를 몰고가는 것을 보고 약한 목소리로 목이 터저라 하고 ‘타도 일본제국주의’를 불렀다. 이것을 본 왜 군관은 가련한 이 처녀를 탱크 차바퀴 밑에 장사해 버렸다. 이것이 놈들의 소위 신셩한 황군의 동양평화를 유지함이었으며 이것이 셔보계양의 열렬한 애국심에 대한 보답이였다. 그러나 어리석은 왜놈들은 죽은 셔보계 이 졍신이 남경에서 쳔월(川越)을 물니치고 백령묘(百靈廟)에서 왜군을 도륚할 것을 꿈에도 생각지 못하였으리라.

 서보계양의 의기를 숭배하는 우리의 머리는 7년젼(민 11년, 셔 1929년) 10월 31일로 돌라가지 않니할 수 없으며 광복 한국의 순진하고 어린 령혼 박기옥양과 밋 그 당시에 굉굉렬렬하든 젼국 학생의 애국운동을 련상하지 아니할 수 없다. 물론 지난 수십 년 동안과 이 붓을 잡은 이 순간에도 얼마나 많은 셔보계양이 우리 국내에서 생기는지 보지 않드라도 녁녁히 알 수 있지마는 이러한 피의 세레를 받고 년마된 한국 혼은 3 · 1운동이 있어서 젼국젹으로 위엄을 발휘하였고 박기옥양 문제를 도화션으로 한 광주학생운동에 있어서 또 한 번 위엄을 발휘하였다.

 현대의 형명운동에는 매양 학생이 그 젼위부대가 되나니 우리나라에 있어서는 더욱 그러하다. 이는 그들이 일반 민중에 비하야 지식층에 있음으로 내외졍세를 잘 관찰할 줄 알 뿐 아니라 감응셩이 예민하며 또 청년기에 있음으로 션매에 비하야 투쟁셩이 강렬한 까닭이다. 이것은 우리의 혁명사가 증명하는 바, 엄밀한 조직과 기민한 활동이 3 · 1운동 이상이라고 할만한 광주학생운동이 시종 학생의 령도하에서 진젼된 것만 보아도 더말할 여지가 없다. 그 당시 그들의 위대한 졍신과 강렬한 투쟁과 활발한 용기는 듣는 자로 하야금 옷깃을 가다듬게 하지 아니할 수 없다.

 청년학생 제군 그대들은 삼현만의 명맥이다. 배달의 구성(救星)이다. 이제 세계의 풍운은 급박하며 중일젼쟁의 도화션에는 불이 붙었다. 이때에 그대들은 셔보계양의 죽엄에 대하야 어떠한 늣낌을 가지고 있느냐 중국 학생들의 애국운동은 어떻게 보느냐. 조국에 대하야는 무엇을 준비하고 있느냐. 다시 한 번 걸어 나온 길을 돌라보자.

空中의 勇士

天 翼

 이번 이스바니아국 내란에 있어서 정부군과 반정부군의 젼쟁은 실로 맹렬하였다. 하로는 반정부파니 국민군이 여듧대의 비행기로써 경성 마드릳을 습격할 때에 정부군측의 5 비행사는 5대의 비기를 각각 타고 올나가 대항하였다. 이 5용사가 적군의 비행기를 2대나 쏘와 떠러쳤으나 마츰내 즁과부젹되어 그 중 1대가 본대와의 련락을 잃고 따로 떠러져 적기의 포위를 당하고 적기로붙어서는 탄알이 비빨치듯 쏘다졌다. 이 찰나를 당하야 도져히 거당할 수 없음을 깨다른 그는 쏜살같이 적기를 충격하야 적기로 더부러 함께 부서지고 말었다. 이 얼마나 용장한 일인가.

 우리는 이 위대한 공줏 옹사의 정신을 본받자. 그리고 제 자신이 공중의 용사가 되기를 결심하자 그 중에도 기성한 우리의 공중전사는 모다 최후 결심을 갖일 때가 왓다. 무장동지-그 중에도 공중용사들에게는 중대한 임무가 따로 있음을 각오해야 된다. 중국의 해방이 성공되는 날이라야 우리의 해방도 갓가워질 것이니 오늘 및여 날뛰여 대륙을 침략하는 왜놈을 대항하기 위하야 닐어나 싸호는 중국군대의 동맹군의 립장에서 용감히 싸워서 용사의 임무를 리행하라. 그리하야 우리 민족의 투쟁적 정신과 용장한 본색을 드러내라. 피압박민족의 해방젼쟁은 유원에서 벌서 시작되였으니 우리의 포부를 실현할 때가 이때인가 한다. 우리는 결사적 각오를 갖이고 맛당히 제1선에 서야한다. 그리하야 군인으로서의 정신을 철저히 발휘하야 민족의 영예를 드러내자.

 열렬한 혁명의식이 있는 무장 등지들은 일즉이 각오한 바이 있을 것은 물론이어니와 시기가 시기인 만큼 감히 일언으로 격려하노니 그 당돌함을 넓게 용서하소서.

[社告]

 본지를 사량하야 분젼사무를 성의로 보아주시고 또 귀햔 글과 좋은 소식을 보내주시는 여러분에게 본사 동인은 감사함을 마지 안습니다. 앞으로도 더욱 그리하여 주시기를 바람니다.

韓民社

倍達의 建國記略

完璧

 10月 3일이 우리 한배께서 개천건국(開天建國)하신 우리 배달국민의 큰 기념할 날임은 누구나 다 알 것이나 우리는 더욱이 이날에서 지나간 여러 자최를 다시금 한 번 생각하며 익히어 가질 것이라 한다. 그리하야 짜른 지면을 가지고서 대강이나마 적어보랴고 한다.

 어떤 나라이고 민족이고 그 비로슨 것이 그 터가 되고 그 뿌리가 되여가는 것이니만큼 그 사랑스럽고 흠쭉함이 한량이 없는 것이니 만일 여기에서 그 깊은 의미를 잊어버리고 종작없이 남에게 휘둘리어 지내기만 하면 무엇보다도 살어나갈 길을 못 찾는다. 그러기에 다 각각 자기네의 남다른 특슈셩(特殊性)이 늘 그들의 서 있는 그것을 튼튼케 하여주나니 통트러 말하자면 저를 잘 아는 이는 없서지는 것 뿐이다. 지금으로붙어 4,393年 前이다.

 그때의 우리 동방사람은 9겨례가 한떼 한떼식 살어있섰다. 그러나 그날 호인 겨레도 어떤 별다른 씨들은 안이다. 원시시대의 모든 생활에서 구차이 갈니어 지었든 것 뿐이다. 후세의 한토(漢土) 사람들은 자기네의 버릇으로 구이(九夷)라고 하였다. 이들은 순전한 원시생활을 하였으니 의 · 식 · 주 · 행(衣食住行)의 하나도 원시적이 안인게 없었다. 이때는 반드시 위대한 인물의 나옴을 기다릴 때이며 또 응당 나기도 할 때이었다. 이에 우리 한배께서 하늘이 내이신 거륵하신 덕과 슬기와 힘을 가지시고 이 초매한 터에 태어낫었으니 그 거느리신 사람의 무리가 3천덩이라 한다. 이로붙어 원시적 살림을 떠나 문명한 살림을 잡어 들었으니 그때를 일홈하야 신시시때(神市時代)라고 하나니 이때에 이루어진 일은 이러하다.

 먼저 신(神)의 길을 열어놓아 그들의 정신적 믿붐의 량식을 주어 그들의 살음을 뜻있게 인도하여 주섰으니 이것이 우리 족속의 굳은 터요, 삶에 기동이었다. 그리하야 보본추원(報本追遠)의 아름다온 마음들을 세워 늘어가는 우리 족속의 존립(存立)의 졍신젹 긔초를 더욱 북도두었다.

 그 다음으로는 교화에 본때를 세우섰으니 이는 곳 5가지 주장이다. 곡식 · 목숨 · 앞음 · 형벌 · 악이다. 이 벼리[綱] 아래 여러 코가 달려 있었으니 난호아 말하면 나무여름이나 따먹어 주림을 면하든 것을 낟알을 심어 배를 불리게 하었으며 풀잎사귀나 따서 가리든 것을 길삼을 하야 몸에 옷을 걸게 하였으며 나무가지 우에 시렁을 매거나 땅에 굴을 파서 쉬든 것을 집을 지어 살게 하였으며 풀어헻인 머리털을 거두어 간촐하게 따케 하였으며 사내와 계집의 분간을 알게 하였으며 아버지와 어머니며 남편과 안해이며 형제자매의 차래를 가지어서 위하고 앳기고 받들고 귀여할 줄 알게 하였으며 사나운 중생을 몰아내며 거츨은 땅을 갈어 살터전이 생기게 하였다. 또 단을 고아 한 울을 위하며 셩을 싸어 외젹을 막어가며 즐검을 바탕삼고 노래로 피를 골러 기운이 어질게 하며 활을 쏘아 힘기르니 사람마다 용맹하여 인간에 살어가는 모든 일을 가추어서 가진 것이 366가지이었다. 이 동안이 125해이니 이 기간을 신시시대라 하는바 신시라 하는 것은 이때 그들이 한배검께 마음으로 즐기며 몸으로 기뻐하야 한배검 앞에 도라와서 그 교화를 받는 것이 마치 장꾼들이 저자에 모여드는 것 같었다 하야 이름한 것이다.

 그때에 이 겨레들은 너무나 기쁘고 빛스러워 모도들 밧드러 그이들의 임자가 되여달라고 임검자리에 올녀 모시였으니 이때는 검나리신후 125년인 무진 10월 3일이다. 이로붙어 배달나라가 세워지며 한 나라가 환하게 열리었다. 안으로는 비서갑(匪西岬) 성모께서도 오시며 부루 · 부소 · 부우 · 부여(夫婁 · 夫蘇 · 夫虞 · 夫餘) 네분의 아들님이 각각 맡으신 구실을 힘쓰니 루는 외교를 잘하시는 중 흙 그릇을 잘 만드시며, 소는 의약에 밝이 병을 물리치며, 우는 산양질에 용하야 몹슬 즘생을 다 쫓아내고, 여는 음악에 능하며 례를 맡어 주선이 능란하고 신하에 팽우는 홍슈를 잘 뽑아 사람살이를 평안게 하고 고시는 농사를 갈으처 낟알을 심어 먹게 하고 신지는 글자를 맡어 모든 것을 적었으며 그밖 여러 상장(上長)들은 맡은 갈피를 잘 다스려 나아갔다. 이때 우리나라의 가진 흙덩이는 늘힌뫼(白頭山)를 가운데로 해서 동은 창해(지금 강원도 바다), 남은 남해(全南), 서는 란주(灤州 지금 冀東이라는 땅이다), 북은 딸딸해협(아령 연해 주꼴나엡쓰크)에 이르렀으니 동서가 4,000리나 되고 남북이 6,000여리가 되었다. 이 한배가 나라 임검으로 계시는 93년 동안에 산에서 들로 서울을 3번이나 옴기섰으니 곳 백두산 평양 장장들이다. 한배께서는 한을과 검과 천궁과 세계와 진리의 5가지를 말슴하야 끼처주섰으며 도라가시는 길을 밝히 보이샤 검의 참이심을 알니었다. 마리산에 뫃은 단이며 그 세 아들님의 싸으신재가 지금까지 그 자최를 력력히 보이고 있다.

 우에 적은 것은 가장 즁요한 것만 추려 쓴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것만 가지고라도 한 번 생각해보자. 5천년의 긴 자최 가강 처음이요, 더욱 거륵한 빛이 얼마나 자랑스러우며 보배로운가. 그를 터하야 추세 자손들의 위대하고 거륵한 자최들이 얼마나 많으며 놀나웠나. 그런데 오늘 우리들은 무엇이 되였나, 한 모퉁이 한 조각 땅도 직혀 오지 못하고 헤매이며 우는 눈물을 어찌하면 걷어볼가. 배달씨들아 한배의 검에서 나고 자란 한 나라 사람들아 그 거륵하든 그 땅이 비린 피와 즘생의 똥에 더러워짐으로 한 줌 흙과 한 방울물이 옛 냄새를 피우랴고 버둥지치며 애쓰는 줄을 아느냐 모르느냐.

 아! 우리 한 나라 사람들아 너에게는 아모것도 귀한 게 없다. 너의 앞에는 더러운 죽업뿐일다. 개끗하게 뜻있게 살어보자. 이 살음을 얻음에는 우리 한배검께서 물려주신 이땅 이 자최를 참스러이 색이여 가지라. 그리하는 때는 그 찬란하고 거륵한 자최를 찾어 갖게 되는 것에 이 목숨도 중하지만 이 자최가 더욱 중한 것을 목숨으로 깨다러진다. 사람마다 이것을 깨닷는 그 날이 우리의 살음이 오는 날임을 엄숙하게 정성스럽게 두렵게 다시 한 번 느껴보자.

中日外交談判 中의 暴日의 要求는 무엇인가

 중일외교는 이제 혼수상태에 빠젔다. 이로써 금번 천월과 장군씨 간의 교섭은 일단락을 고하였다고 볼 수 있다. 즉졉으로 리해관계를 가지고 있는 우리로서 그 긴장하든 중일외교를 젼면젹으로 검토함은 필요 중에도 필요한 일이다. 그러나 이에서는 지면관게로 일본의 요구가 무엇이었든지만 간략히 적을 수밖게 없는바 그 내용은 이러하다.

(1) 일 · 만(日 · 滿) 세력과 중국 간에 완충구역을 설정하기 위하야 하북 산동 · 산서 · 찰합이 · 유원 등 5성을 합하야 자치정부를 세워서 정치 · 재정 · 군사와 직임 임면을 자위행사케 하고 중앙정부는 宗主權의 명의만 부류할 것

(2) 항일운동을 철저히 금지하기 위하야 국민당과 항일단체를 취체하며 교과서를 개정하야 항일에 대한 재료를 삭제할 것

(3) 중일의 교통문제를 해결하되 그 중에도 항공에 대한 합작문제를 더욱 필요로 하야 상해 복강에 항공선을 설정할 것

(4) 9 · 18 만주사변 이후 중국에서 일화에 대하야 증세한 것을 근본상으로 개정하야 일본문화를 우대할 것

(5) 중일 간에 공동방공(共同防共)협정을 체결하야 중국 전국의 공산당을 방어하되 장래 아일젼쟁이 발생할 때에는 중국이 성의로써 일본을 도울 것을 담보할 것

(6) 중국 졍부는 진량하야 일본 군사고문을 빙청할 것

(7) 중국에서 활동하는 한국 독립운동자를 체포 인도할 것

 이상 망국적 7개죠의 조약체결요구에 대하야 중국에서 듣지 않을 뿐 않이라 중국에서 아래와 같은 5개죠의 대안을 제출하였다.

(1) 당고협정(화북침략 성공의 죠약)과 송호협정(상해전쟁 후에 체결한 것)을 취소할 것

(2) 기동자치정부(은여경을 식혀서 설립한 것)를 취소할 것

(3) 화북 각 성에서 일본군과 만동군을 철퇴할 것

(4) 일화 밀수입을 금지할 것

(5) 화북의 쳔공에 일본 비행기가 날지 못할 것

 이와 같은 맛불질로 하등의 결과를 얻지 못한 일본은 다시 아래와 같은 죠건을 더 첨부하여 제출하였다 한다.

(1) 내외 몽고와 공산군대 간에 완충지대를 설졍하기 위하야 산서 유원 혹 령하 등 두 성에 일본군대의 주둔을 허락할 것

(2) 내몽고를 만주국에 합병할 각종 게책의 실현을 허락할 것

(3) 일본의 동의가 없이는 어느 나라 어떤 상인과도 게약을 체결하지 못할 것

 처음에도 일본의 요구를 거절한 중국 정부가 가일층 가혹한 것을 접수할 리가 만무한 일이다. 이에 일본은 더욱 애가타서 소위 칙면교섭도 해보고 기술상 양보도 해보랴고 하얐다. 그러나 그것도 다 물거품이 되고 말었다. 이제붙어는 전쟁을 개시할 것밖에 없는데 그것도 겁나는 데가 많아 아직 대규모로 개젼을 하지 못하고 위선 첫 시험으로 유원에서 불질을 해본 것이 또 참패를 당하게 되였다. 앞으로의 일본은 또 무슨 짓을 하려는지 지금 세상의 주목을 끌고 있다.

 그런데 기술상 양보라는 것은 무엇인가. 이에 대하야는 다음 호에 자세히 보고하랴 하거니와 일언이폐지하면 손임수로써 올개미를 씨우랴든 것이다.

共軍의 禍害

 장백현을 근거로 하야 공산당으로 조직한 소위 동북 인민혁명군은 이주동포의 재물을 략탈하며 사람을 붓잡어가며 인명을 살해함으로 해지방이 거의 적지가 되여 사람이 붙어 살수가 없다는대 그중에도 김일성이 령솔한 부하가 명수도 4 · 500명에 달하고 또 활동이 그 중 제일 많다 한다. 그들은 촌리로 단니면서 곡식과 재물은 있는대로 빼앗고 그래도 조곰만 불만하면 집을 불살으고 사람을 잡아다가 죽이기도 하는대 금년 1년 동안에 그들이 동포의 촌락을 습격한 회수가 428회요, 피해자의 수호는 2,204명이며, 10월 한 달 동안에만 잪여가서 인명의 손해 받은 것이 204명이라 한다. 일본 군대는 이들로 벌하기 위하야 적극 행동을 취한다 하니 손해 받는 자는 가련한 한인 뿐이다.

▪ 『한민』 제9호, 1936년 11월 30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