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165. 피로 물들인 조선의 독립운동, 전쟁과 함께 치열화, 앞길에 여전히 수많은 파란  

165. 피로 물들인 조선의 독립운동, 전쟁과 함께 치열화, 앞길에 여전히 수많은 파란

 조선의 본격적인 민족혁명운동은 이십 수년간 수많은 고난을 거쳐 이번 전쟁 종결과 함께 카이로선언에 입각하여 독립국가로서 출발하게 되었다. 그러나 현재는 미 · 소에 의해 남북 분할 점령되어 군정 하에 있어서 아직 독립국가로서의 형태와 자유를 취득하지 못했다. 그 조선의 완전한 독립을 획득할 수 있을 때까지 허다한 곡절이 있는 것은 필연적이며 향후의 추이를 주시할 만하다. 이를 보기 위해서 중요한 조선의 혁명운동이 어떤 성격을 가지고 있었는가 하는 것이다-그것을 지금 역사적으로 구명해보자.

 4천 년 역사를 가진 조선민족은 1910년 8월의 일한병합 이전 이미 1897년경부터 민족운동이 발흥하였고 특히 동학당과 같은 동학파 및 의병파에 의해 첫걸음을 내딛었다. 同 파도 종교적인 성격을 가지고 봉건세력의 구축이나 사회 개선을 주로 한 것에 지나지 않았지만 뒤에 동학파의 흐름인 천도교는 1919년 3월 1일의 독립만세사건의 주역을 맡았다.

 ▶ 上海에 임시정부 수립

 이 만세사건에 앞서 일한병합은 독립운동의 온상을 만들었다. 병합을 불평으로 생각한 자는 혹은 미국에, 혹은 間島, 연해주로 달아났고 그들은 조선 내지와 연락하며 운동을 서서히 전개했다. 그 동안 한반도 내에서는 천도교에 의거한 종교단체가 농민으로 이루어진 신자 300만을 획득하고 교육기관을 설치하거나 혹은 잡지를 발행하여 사회사업을 행하는 한편 혁명운동의 꿋꿋한 발걸음을 계속했다. 1919년 1월 파리에서 열린 평화회의에서 미국 대통령 윌슨에 의해 약소민족의 ‘민족자결주의’가 제창되자 해외 망명자 400명은 上海의 프랑스조계에 모여 대한국임시정부를 조직하고 천도교와 연락을 취했다. 이 上海임시정부의 행동은 일단 제쳐놓고 순서상 독립혁명의 큰 에포크가 되었던 만세사건(3 · 1운동이라고도 한다)의 개략을 살펴보자.

 이것은 1919년 1월 하순 조선 내의 동지인 천도교주 손병희, 보성고등학교장 崔麟 및 중앙학교장 宋鎭禹 등이 규합하여 천도교, 기독교 양 교도를 합동시켜 운동의 주력을 형성하고 손 교주 등을 조선민족대표자로서 조선 독립을 선언, 그 선언서를 전 조선에 인쇄, 배포하여 시위운동을 하는 한편, 일본의 귀족원, 중의원 양원, 총독 및 평화회의에 열석한 각국의 위원에 대해 독립에 관한 의견서를 제출, 또 직접운동으로서 같은 해 3월 1일 오후 2시 이태왕의 국장에 열석한 민중을 이용하여 창덕궁, 총독부, 미국영사관 등의 앞에서 독립만세를 부르짖어 결국 관헌과 충돌, 유혈을 본 사건이다. 이 사건 이래 조선인의 독립사상은 빼서는 안 되는 것이 되었다.

 ▶ 日韓의 이반을 획책하다

 앞에서 기술한 上海임시정부는 이 만세사건에 자극을 받아 활발하게 독립신문을 발행하고 또 샌프란시스코에서도 『新韓民報』에 격려문을 게재하는 등 만세사건과 함께 임시정부의 이름이 조선 내의 사람들에게 강하게 각인된 것이다. 임시정부는 계속해서 제1차 임원을 선발하여 국무총리에 이승만을 천거하고 기타 내무, 외무, 법무, 재무, 군무, 교통의 각 총장을 임명하였는데 소련 방면에서 집합한 총리대리 이동휘 일파에 의한 내부적 투쟁과 이 총리의 미국행에 따른 제2차, 제3차의 개선이 행해졌다. 이 내부적 투쟁은 이른바 테러에 의해 조선인 관리를 전율시켜 총독부의 시정을 방해하려는 무단파와, 교육에 의해 日韓을 이반시키고 미국에 의뢰하여 독립을 도모하려는 문치파의 대립에 의해 내부 다툼은 더욱더 격화하였는데 결국 무단파가 압도적 세력을 차지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 임시정부의 문란으로 청년들은 실망하여 혹은 미국으로 달아나고, 무단파는 吉林 방면으로 가서 군정부를 조직하여 친미파의 이승만, 여운형(임시정부 제2차 임원의 노농청년단장)과 결별하고 소련 과격파와 통하여 국경방면을 침입하려고 기도하는 한편, 친미파는 어디까지나 한반도민을 도와 독립운동을 계속하려고 하였지만 점차 고초을 겪고 임시정부는 上海에서부터 重慶으로, 다시 오지로 옮겼다.

 이 사이에 마르크스주의의 바람이 조선 내에 휘몰아쳐 좌파 단체의 민흥회, 정우회, 전진회가 신간회에 통일되어 사회주의 운동과 함께 민족주의 운동을 일으켰고 또 1920년대 중반의 학생소요사건과 더불어 민족자립, 해방의 외침은 전 조선에 펼쳐졌다.

 ▶ 謀略牒報團 조직

 만주사변에서부터 지나사변, 대동아전쟁에 들어오면 독립운동이 더욱 치열해졌는데 이 운동을 맡았던 국외, 국내 및 각 파의 주요인물을 거론하고 그것을 중심으로 그 후 혁명운동의 흐름을 살펴보자.

  대륙 내

 ▶ 金九(또는 金玖) 씨

 上海임시정부 시대 北滿에 신민회를 설립하여 임시정부를 위해 활동하고 있었는데 임시정부의 내적 투쟁에 의해 사방으로 흩어지는 가운데 아직 대륙에 남아있는 잔당을 이끌고 한국독립당 및 한국광복군을 조직했다. 南京에서 조선군관학교를 열고 있던 金元鳳 씨는 청장년으로 이루어진 조선의용대를 가지고 서로 蔣介石 씨에 대해 정치상의 실권 투쟁을 하고 있었는데 김원봉 씨의 의용대 주력이 中共派의 武亭 씨에게 넘어가는 동시에 1937년 가을 蔣介石 씨의 권유도 있어서 양 파는 합동했다. 그 밖에 한인청년동맹과 함께 군대를 가진 李靑天 上將도 이에 가담하여 3자 합동으로 1942년 김원봉 씨는 임시정부의 陸相이 되고 또 작년 1944년 4월 重慶에서 개최된 조선의회에서 김구 씨는 임시정부의 주석에 추천된 것으로 重慶派의 제일인자이다.

 ▶ 武亭 씨(중국공산당파)

 김원봉 파의 주력을 획득하여 華北에 조선독립동맹을 결성, 그 의용대는 中共 제18 집단군(八路軍)의 지휘 하에 들어가고 이어서 그는 조선인의 華北靑年聯合 분회장이 되어 중공의 □□당 분회를 도와 항일 모략과 독립운동에 활발한 움직임을 보였으며 만주의 김일성 씨와 손을 잡으려 하였다. 또 西安의 조선인 포로로 이루어진 조선독립군사령부나 重慶에 있던 일본 내지의 공장 파괴를 목적으로 한 모략첩보단 등 중국 대륙의 독립운동과도 기맥을 통했다.

 ▶ 金日成 씨

 일본의 육군사관학교 출신. 만주에서 ‘김일성 軍’을 조직하여 만주사변에서 일본군과 싸워 일약 조선 반도민의 인기를 획득하였고 이동휘 씨의 세력 실추 후 친소파의 제일인이 되었다. 중공은 그를 이용하여 만주 방면의 지반 획득을 위해 그에게 북만성위원, 東北抗日聯 제3路軍 제10 지대장 및 정치위원의 지위를 주었고 이번 소련의 북조선 진주와 함께 평양에 들어온 모양이다.

  미국 내

 ▶ 李承晩 씨

 上海임시정부 설립의 입역자로 제3차 정부 개혁 때는 대통령에 추천되었고 임시정부의 세력이 쇠퇴하고 나서부터는 미국에 머물면서 재미거류민에 의해 조직된 대한인국민회, 대한인구국회, 대한인동지회 및 한인단합회의 네 단체로부터 독립혁명자금을 받았다. 또 동시에 재미국 학생들을 규합하여 미국정부, 국회, 언론계에 호소하였는데, 결국 카이로선언에 의해 독립의 기초가 주어지자 모든 기회를 포착하여 재미 임시정부의 공적 지위 승인에 목표를 두고 올해 1월의 태평양조사회 제9차 회의을 비롯하여 2월 뉴욕시에서 개최된 전후경제연구국 주최 아시아재건문제회의에 대표를 보냈다. 또 샌프란시스코회의에서는 소집을 요구하였지만 이것이 거부되었다. 이승만 씨는 최근까지 서남태평양의 섬에 진출했다고 전해지는데 8월 27일에는 重慶에서 김구 씨와 요담을 했다고 보도되었다.

  조선 내

 ▶ 呂運亨 씨

 上海임시정부 3차 임원에는 노동청년단장에 천거된 문치파로, 처음에는 공산주의를 신봉했지만 전향, 신문 사업에 관계하였고 또 최근 건국동맹의 수령이 되었으며 이번 전쟁 종결 후 재빨리 조선건국준비위원회를 구성했다. 같은 건국동맹의 유력자로 安在鴻 씨가 있다. 안 씨는 최근 여 씨와 분리하여 세력이 확대되고 있다.

 ▶ 송진우 씨

 만세사건 때는 천도교주 손병희 씨와 함께 사건의 장본인이 되었다. 출옥 후 동아일보를 창간하고 언론계의 중진이 되었는데, 1939년 폐간되고부터는 조선 내에서 총독정치에 대해서 철저하게 반대를 내걸고 또 지식계급 및 기독교 신자에게 지지를 받아 여운형 씨와는 대조적인 부르주아민주주의자로서 이번의 독립운동에 대해 “독립정부의 중심은 重慶에 근거하여 반일운동을 속행해온 김구 씨 일파가 차지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라고 성명하였다. 이렇게 김구, 송진우, 이승만 씨의 각 파는 점차 표면화되었다.

 ▶ 총독부 정치에 반성

 이상은 조선민족 혁명운동의 주류에 놓인 중심인물이지만 조선의 완전 독립까지에는 이들 정권 회득에 힘쓴 인물에 의해 수많은 파란을 일으킬 것이며, 트루먼 대통령의 말처럼 “자유로운 독립국가로서의 건설은 조선인의 책임이며 조선의 경제 및 정치생활에 대한 일본의 통치를 전면적으로 불식하기 위해서는 당연히 시간과 인내를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과거의 조선민족혁명운동사를 바라보며 조선의 향후 발걸음을 주시하는 동시에 일한병합 후 일본이 취한 총독부의 對鮮 정치에 깊은 반성과 비판을 잊어서는 안 된다.

· 『朝日新聞』(東京版), 1945년 10월 3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