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101. 한국인 징병  

101. 한국인 징병

  셀던 메니피(Seldon Menefee)

 일본의 공식 선전가들은 한국인들이 “철저하게 일본의 통치에 복종”한다는 말을 할 때 혹은 한국인들은 “일본의 정부가 취한 어떠한 조치들에 대해서도 완전한 지지를 보낸다”는 등의 말을 할 때를 제외하고는 한국에 대해서 거의 언급을 하지 않는다.

 그러나 검열 속에서도 간혹 주목할 만한 사건들이 드러나게 마련이다. 최근 전쟁정보처에서 제공한 해외방송정보국(FCC Foreign Broadcast Intelligence Service)의 일본 국내방송에 대한 모니터에 따르면 일본이 이제 한국인들에게 징병의 의무를 부과할 계획을 세우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징병은 1944년까지는 실시되지 않을 것이며, 징병이 이루어지기 전에 6개월간의 ‘징병준비 훈련’이 실시될 것이라고 한다. 이 계획은 1943년 8월 현재 17세에서 21세에 이르는 청년들을 상대로 집행될 것이라 한다.

 ▶ 훈련의 중요성

 훈련과정은 ‘한국 청년들이 제국군대의 일원으로써 적합하도록 기본소양을 기르는 데에’ 초점을 맞출 것으로 보인다. 그 진정한 목적은 일본군으로 입대할 한국인들을 정치적으로 무해한 존재로 만드는 데에 있는 것이 명백하다.

 이와 관련하여 워싱턴의 한국측 출처의 보고서에 따르면 ‘중국사변[China incident, 중일전쟁]’ 초기에 3천여 명의 한국인들이 자발적으로 군대에 지원했다고 한다. 조심스러운 선별작업을 거쳐 그들 중 500명이 선택되어 일본군 입대가 허용되었다. 그러나 그 이듬해에 그 중 절반이 일본인 상관을 살해한 죄로 군사재판소에 서게 되었다고 한다.

 이 보고서는 ‘아시아를 위한 전투’의 저자 에드가 스노우(Edgar Snow)의 최근 발언과는 충돌된다. 에드가 스노우는 2십만 명의 한국인들이 이미 훈련을 마치고 일본군에 복무하고 있으며 그들 중 일부는 이미 남부전선에 투입되어있다고 언급한 바 있다. 연합군이 남태평양 전선에서 마주친 한국인들은 보고에 따르면 일본인들에 의해 뉴기니아로 이송된 단지 소수의 노동자들 뿐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국인들은 중국전선에서 활동 중에 있지만 그곳의 한국인들은 일본인 정복자들 편에 서 있지 않다. 지난 9월 한국 부대가 광둥지역에서 일본군에 심각한 타격을 입힌 것으로 보고되었다. 이들은 한국의 독립군의 일부로 관측되는데 이 부대는 현재 충칭의 한국군의 일부가 되어 있다.

 도합 35,000에 달하는 한국인들이 중국에서 일본을 상대로 싸우고 있다. 이들 대부분은 게릴라 전사들이며 만주와 북중국의 비정규군으로 구성되어 있다.

 2천 3백만의 한국인들이 차가운 분노로 자신들을 억압하는 일본을 경멸하고 있다. 이들은 타협하지 않는다. 거의 1년 쯤 전에, 1936년 이래로 총독을 지내고 있는 미나미 지로 장군이 고이소 장군으로 교체되었는데, 고이소는 극단적인 민족주의 그룹에 속한다. 고이소는 1938년 소련의 장고봉(Changkufeng) 공격 당시 일본군을 지휘했던 인물로서 그 이후 직위에서 물러났다. 고이소는 일본의 히믈러(Himmler)로 불리우는 다나카를 대동하고 왔는데, 그가 한국의 헌병책임자를 맡게 되었다.

 ▶ 폭력적인 저항의 증가

 한국인들에 대한 철저한 통제에도 불구하고 폭력적인 봉기가 증가하고 있다. 한반도의 남쪽 끝에 떨어져 있는 제주도에서 한국인 노동자들이 일본의 공군기지를 파괴하는 일이 3월달에 발생했다. 3개월 뒤 영국의 방송에 따르면 1,000명의 일본인과 2,000명의 한국인이 일본의 탱크, 배, 그리고 비행기가 파괴된 전투장에서 살해당했다고 보도했다.

 일본 본토에는 백만 이상의 한국인들이 있는데 이들 중 많은 수가 전쟁관련 산업체에서 일하고 있다. 지하의 한국인 소식통에 따르면 많은 한국인들이 의열단이나 여타 다른 반일결사단체로 조직되어 있으며, 일본 정부와 공무원에 대항하는 많은 폭력적 행동을 수행해 오고 있다고 한다. 전쟁이 일본본토에 미칠 경우 이러한 한국인들이 내부에서 제5열을 형성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한국인들은 일본의 침략행위에 의한 최초의 희생양이었다. 38년간의 혹독한 탄압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저항이 존재한다는 사실에 대해서 사람들은 거의 알지 못하고 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1919년 이래 중국 내에 존재해 왔으며 워싱턴에도 이승만 박사를 대표로 하는 주미외교위원부를 두고 있다. 이 박사는 2백만에 달하는 중국내 한국인들이 적절하게 무기를 제공받고 지원받는다면 그들은 일본과의 투쟁에서 비교할 수 없는 중요성을 갖게 될 것이라고 설명한다.

· 『The Washington Post』, 1943년 1월 14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