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제

해 제

Ⅰ. 개 관

이 자료집은 대한민국임시정부 관련 영어 · 프랑스어 · 러시아어 등 서양문 서한을 선별한 것으로 임시정부 주요 인사들이 공적 업무와 관련해 주고받은 서한들이다. 서한이 서양문이라는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이는 주로 미국(본토 · 하와이), 프랑스, 중국, 러시아 등에서 활동하던 임시정부 인사들이 주로 외교활동과 관련하여 주고받은 서한들이다. 임시정부는 1919년부터 1945년까지 26년간 한국독립을 위한 투쟁을 벌여왔는데, 그중 가장 중요한 것이 대일 독립전쟁과 임시정부에 대한 국제적 승인이었다. 임시정부의 외교에는 한국독립에 대한 국제적 지원 획득, 구체적으로 임시정부의 승인, 한국독립에 대한 국제적 지지 · 동정, 무장투쟁에 대한 지원 등이 포함되었다.

임시정부의 활동은 제1차 세계대전과 제2차 세계대전 시기에 최고점에 달한 바 있다. 세계사적 대격변과 정세의 변화를 계기로 한국독립의 결정적 시기가 도래했다는 정세관이 형성되고, 국내외 한국인들의 독립운동열이 제고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국제 정세 하에서 임시정부의 외교 · 군사활동이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임시정부는 1차 대전 전후 질서를 재편하는 파리강화회의와 워싱턴 군축회의에서 2차례의 외교를 시도했다. 파리통신부와 구미위원부가 프랑스를 중심으로 한 유럽외교와 미국외교를 이끌었다. 이후 정세가 변화하자 러시아에 주목하는 대러시아외교가 임시정부 차원에서 시도되었다. 또한 극동피압박민족대회와 국민대표회의는 러시아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었다. 임시정부의 외교활동은 1930년대 만주사변 · 중일전쟁을 거치면서 점차 재점화되기 시작했고, 1941년 태평양전쟁을 계기로 활성화되었다. 임정 외무부를 중심으로, 재미한족연합회 · 주미외교위원부(주미외교위원회) 등이 임정의 연합국 승인외교 · 무기대여 외교를 시도했다.

임시정부와 관계가 있는 주요 외교사안은 1919년 프랑스 파리강화회의와 유럽에서의 외교, 1920년 스위스 루체른의 만국사회당대회, 1921~1922년 미국 워싱턴디씨의 워싱턴 군축회의(태평양회의), 1922년 모스크바의 극동피압박민족대회, 1940년대 연합국의 임정 승인외교와 미국의 무기대여법(Lend-Lease)에 따른 무장지원 획득, 재미한족연합회의 중경특파단, 1945년 샌프란시스코회의에서 임정승인 외교 등이다. 이 자료집에 선별 · 수록된 서양문 서한들의 주요 주제가 이에 해당한다. 서한의 주요 작성자들은 이승만, 김규식, 조소앙, 김구, 엄항섭, 정한경, 황기환, 이희경, 안공근, 김원봉, 백일규, 전경무, 김호, 한시대, 한길수 등이며, 주요 외교관련 기관들은 임시정부, 파리위원부, 구미위원부, 재미한족연합위원회, 주미외교위원부(주미외교위원회) 등이다.

이 자료집에서 다루는 시기적 범위는 임시정부가 수립된 1919년부터 1945년 광복될 때까지인데, 1919~1920년대 초반의 시기가 질과 양의 면에서 가장 중요하며, 그 다음이 1940년대이다. 1930년대는 임시정부가 이동시기였으며, 외교사안이 크게 부각되지 않던 시점이었으므로 자료가 소략한 것으로 생각된다. 1919~1922년까지의 자료들은 임시정부 초대대통령이었던 우남 이승만자료가 주종을 이루며, 1941~1945년까지의 자료들은 독립기념관 안창호 · 국민회콜렉션이 주종을 이루고 있다.

Ⅱ. 시기별 주요 내용

1. 1920년대

▪ 파리강화회의

제1차대전이 종결되고 1919년 파리에서 강화회의가 개최된다는 일정이 확정되자, 미국과 중국의 한인들은 파리강화회의에 대표를 파견하려 시도했다. 미주 대한인국민회는 이승만 · 민찬호 · 정한경을 대표로 선정했고, 이들은 파리행 여권을 구하려 시도하는 한편 외교청원운동을 시작했다. 중국 상해의 한인들은 신한청년당을 결성하고 김규식을 파리강화회의에 파견했다. 김규식은 1919년 2월 1일 상해를 떠나 3월 13일 파리에 도착하였다.

자료집에 수록된 첫 번 째 자료는 1918년 11월 25일 대한인국민회 대표 이승만 · 민찬호 · 정한경이 우드로 윌슨(Woodrow Wilson) 미국대통령에게 보낸 서한이다. 아직 하와이에서 건너오지 않은 이승만 대신 정한경이 주도한 이 서한에서 이들은 파리강화회의에서 한국의 민족자결에 대해 거중조정을 해달라고 청원했다. 정한경은 1918년 12월 10일 미상원에, 이승만은 1919년 2월 25일 윌슨 대통령과 파리강화회의에 동일한 서한을 발송했다. 이승만 등은 파리행 여권교섭을 했으나 일본외무성의 반대와 미국무부의 여권발행 거부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이승만은 윌슨 · 클레망소에게 편지를 보내 김규식이 임시정부의 외무총장으로 임명되었으며, 파리에 파견되었다고 알렸다(1919. 4. 30). 샌프란시스코 국민회는 1919년 4월 상해의 현순에게 4천 달러, 파리의 김규식에게 1천 달러를 송금해 초기 외교활동의 자금을 제공했다.

파리에 도착한 김규식은 블라베(Blavet)라는 시인부부의 집에 사무실을 차리고 타이피스트 · 통역을 구하여 1919년 4월 파리위원부를 설치했다. 여기에 선전홍보를 위해 통신국(Bureau d’Information Coréen)을 병설하였다. 파리위원부에는 5월 초에는 상해에서 온 김탕(金湯)이, 스위스 취리히대학(Zurich University)에 재학 중인 이관용(李灌鎔)이 5월 18일 동참했고, 6월 3일 제1차 대전에 참전했던 미군 지원병 황기환(黃玘煥)이 독일에서 찾아왔다. 또한 6월에는 조소앙, 7월초에는 여운홍이 상해에서 파리에 도착했으며, 이후 연해주에서 국민의회 대표로 윤해와 고창일이 합류했다.

김규식은 임시정부 수립 이전 파리에 도착했으므로, 초기 파리강화회의와 열강 대표들에게 보낸 공함에서 신한청년당 대표라고 표기했다. 이후 초기 상해임시정부 외무부장에 선임된 이후 임시정부 대표 명의로 활동했다. 통신국은 4월 10일자로 통신전(通信箋, Circulaire) 제1호를 등사물로 출간했다. 통신전 1호는 김규식의 자(字)이자 중국여권 이름인 진중원(金仲文)으로 되어 있으며, 이후는 김탕이 서명을 했다(이정식, 59~60;강만길 · 심지연, 54). 김규식은 상해 신한청년당, 재미 대한인국민회,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대표자 명의로 「한국 국민과 한국의 요구 일본으로부터의 해방과 한국의 독립국가 재건을 위해(‘The Claim of the Korean People and Nation-Petition’ and ‘Memorandum,’ April 1919)」라는 청원서(Petition)와 비망록(Memorandum)을 영어와 프랑스어로 작성했고, 이를 5월 6일과 5월 12일 강화회의 의장 클레망소에게 제출한 바 있다. 여기에 수록된 청원서 및 비망록은 김규식이 1919년 5월 10일 보낸 영문 문서로 파리강화회의 미국대표단원이었던 블리스(Tasker H. Bliss) 문서철에 수록된 것이다. 청원서는 모두 20개 항목으로 되어 있는데, 이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한국 민족은 4,200년 독립국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2. 한국이 주권국가라는 사실은 일본 · 미국 · 영국 등이 조약으로 인정했다.

3. 한국의 주권은 이들 조약으로 인정된 것뿐 아니라 국제적으로 인정을 받은 것이어서, 어느 한 나라가 한국을 단독으로 처리할 수 없다.

4. 일본은 사기 · 무력으로 병합조약을 강요하고 한국의 독립을 침범했다.

5. 이러한 주권 침범에 대해 한국 민족은 끊임없이 항의를 하였고, 현재도 하고 있다.

6. 일본 통치의 폭압으로 인해, 이러한 한국 민족의 항의는 끊임없이 갱신 · 강화되고 있다.

7. 한국의 교육과 사상은 일본이 통제 · 억압하고 있다.

8. 한국의 재산은 일본이 강력하게 통제하고 있다.

9. 한국에서의 기독교 포교를 일본정부가 방해하고 있다.

10. 일본이 한국에서 시행하였다는 개혁은 형무소 내에서의 개혁과 마찬가지로 대부분 한국인을 희생하면서 일본인을 위한 것이다.

11. 일본은 폭리의 획득자로서 한국을 지배 · 통치하고 있다.

12. 한국 민족의 이익뿐만 아니라 영국 · 미국 · 프랑스의 이익을 위해서도 한국의 독립은 긴요하다.

13. 일본은 한국에서의 구미 각국의 무역통상을 제거하고 있다.

14. 일본의 극동 대륙에서 팽창 침략은 영국 · 미국 · 프랑스의 이익과 충돌한다.

15. 일본의 대륙정책은 한국에서 시작해 만주와 중국으로 끊임없이 그 대상을 옮겨가고 있다.

16. 한국 국민의 일본 통치에 대한 항의는 3 · 1운동으로 실증되었다.

17. 한국대표단은 한국 내에서 벌어지는 운동의 진전상황에 대한 많은 보고를 받고 있다.

18.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

19. 3 · 1운동은 한국 전역으로 확대되고 있으며, 일본은 잔악한 방법으로 보복 혹은 진압하고 있다.

20. 한국국민은 1910년 8월 22일의 한국병합조약은 무효라고 선언한다. (이정식, 60~61)

비망록은 23개 사항을 지적하고 있는데, 이는 다음과 같다. 1.한국의 요구 2.한국 민족의 4200년의 역사 3.한국의 독립 4.‘자유의 거래’ 5.프로이센과 일본 6.한국의 보호국화 7.한국 병합 8.일본화와 프로이센화 9.한국 토지소유자들에 대한 착취 10.한국어와 한국 역사의 금지 11.한국의 교육 ‘통제’ 12.한국의 부 ‘통제’ 13.한국의 식칼 14.기독교에 대한 일본의 적대감 15.‘거대한 성채’로서의 한국 16.아시아에서 앵글로-색슨의 과업 17.일본의 전시(展示) 행정 정책 18.세계에 반하는 일본 19.일본의 대륙 정책 20.시행중인 정책 21.프랑스에 대한 위협(시모노세키 조약, 수치스러운 삼국 간섭) 22.태평양 지배(세계정복 정책) 23.‘영원한 갈보’로서의 일본인(운남시로부터 울란바토르까지), 부록1 병합조약, 부록2 105인사건. 여기서 김규식은 일본이 5~6인 가족에 식칼 1개를 허용할 정도로 극단적 통제를 하고 있으며, 일본인이 존재하는 모든 곳에 갈보집과 매춘이 횡행한다는 점을 지적할 정도로 일본의 폭력적 압제를 비판했다.

미주의 이승만은 상해의 현순이 보낸 전보에 기초해 대한민주국 국무경(국무총리) 혹은 초기 상해임시정부 국무총리로 활동했다. 이후 이승만은 1919년 5월말 한성정부 문건을 입수한 이후 대통령의 명의로 6월 12~18일 미국무장관 · 대통령, 영국 · 이탈리아 · 일본 국왕, 영국 수상 · 프랑스 대통령 등에게 한성정부의 수립사실을 통보했다. 이승만은 3 · 1운동과 13도 대표회의, 4월 23일의 국민대표대회에서 자신이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고 알렸다. 이승만은 김규식에게도 파리강화회의 대표 선임사실을 통보(6. 15)했다. 상해 · 워싱턴 · 파리간의 혼란스럽던 상황은 1919년 7월에 가서야 정리되었다.

파리강화회의는 6월 28일 일단락되었고, 김규식은 8월 9일 여운홍 · 김탕을 대동하고 미국으로 향했다. 이후 파리위원부는 1921년 7월까지 서기장 황기환의 헌신적 노력에 의해 유지 · 운영되었다. 황기환은 맥켄지(F. A. McKenzie), 그레브스(J. N. Graves) 등과 협력해 1920년 10월 영국 런던에서 한국친우회를 결성했고, 1921년 6월에는 프랑스 파리에서 한국친우회를 결성했다. 황기환은 1921년 7월 미국으로 귀환했으며, 11월 하와이를 방문했다(1921. 11. 29). 황기환은 1923년 뉴욕에서 사망했다.

파리위원부와 관련하여 런던에서 학업 중이던 장택상, 한국의 귀족으로 파리 · 런던에 체류했던 오체린(Ocherrin), 맥켄지 등이 등장한다. 오체린은 1919년 11월 27일 런던에서 간행되는 『스트레이트타임즈(The Straits Times)』에 파리강화회의 한국대표로 등장했으며, 1920년 2월 24일 주영일본대사관 보고에는 프린스 오체린 해진(Prince Ocherrin Haijin)이란 이름으로 나타난다.

▪ 만국사회당대회

조소앙은 임시정부 국무총리 비서장 · 의정원 의원 출신으로 신한청년당에 의해 김규식의 파리강화회의 외교활동 지원과 만국사회당대회 참석을 목적으로 1919년 5월 상해를 출발했고, 영국 · 프랑스 · 소비에트러시아를 방문하고 1921년 12월 상해로 돌아왔다. 이 기간 중 조소앙은 이관용과 함께 1919년 8월 스위스 루체른에서 개최된 만국사회당대회에 참석했다. 만국사회당, 즉 제2인터내셔날은 한국독립을 승인하였는데, 이 과정에 대한 설명은 황기환이 김규식에게 보낸 서한들에 잘 드러나 있다. 그런데 조소앙 · 이관용 사이에 갈등이 있었다. 이관용은 일본을 특정하기 보다는 외국의 지배라는 용어를 사용했고, 현지 언론과 인터뷰에서 “한국의 사회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면, 일본 · 중국 · 기타 나라의 지배는 개의치 않는다”고 발언했다는 것이다.

조소앙은 제2차 인터내셔날과의 관계를 계기로 1920년 4월 영국 하원 활동, 1920년 네덜란드 제2국제사회당 집행임원회 출석, 1920~21년 레닌그라드 · 모스크바를 방문했다. 조소앙은 이살음이 미국에서 주도한 노동사회개진당의 후원을 받았다. 한편 조소앙과 함께 루체른에 갔던 이관용은 파리로 귀환하지 않아, 파리위원부에서 논란이 발생했고, 결국 파리위원부를 사직하고 학업을 위해 스위스로 돌아갔다. 이관용은 1920년 1월 스위스 제네바 국제적십자총회에 참가해 한국의 입장을 설명했고, 1920년 10월 이탈리아 밀라노의 국제연맹 사회단체연합회 제4차대회에 파리위원부를 대표해 윤해와 함께 ‘국제연맹 한국위원회’로 파견되기도 했다.

▪ 구미위원부 활동

김규식은 워싱턴에 도착한 이후 초대 구미위원부 위원장에 임명(1919. 8)되었고, 이후 1920년 10월까지 미국에서 활동했다. 구미위원부의 활동과 관련해서는 이승만, 김규식, 황기환, 돌프 등이 주고받은 서신들이 수록되었다. 김규식은 만20개월 동안 구미위원부 위원장으로 근무했고, 현순은 이승만의 상해 체류기간(1920. 12~1921. 5) 동안 임시위원장을 맡았다.

구미위원부 관련 서신들은 다양한 선전활동, 자금, 인적 관계 등을 다루고 있다. 집정관총재 이승만의 사설기관으로 출발한 구미위원부의 활동은 대미외교, 구체적으로는 한국독립의 정당성 호소 · 청원, 선전활동, 자금 모집, 우호 조직 건설 등의 활동에 두어져 있었다. 구미위원부는 1919년 이래 1948년까지 이승만의 강력한 통제 하에 놓여져 있었다. 초기 구미위원부 위원이었던 송헌주는 하와이 한인사회 모금활동을 둘러싸고 이승만과의 갈등 끝에 해임되었고, 이는 김규식이 구미위원부 위원장을 사임하는 한 원인이 되었다.

1919~1920년간 구미위원부 관련 서신들은 주로 김규식을 중심으로 왕래한 것들이다. 김규식이 황기환에게 보낸 편지(1920. 6. 25)에 따르면 파리사무소와 런던사무소의 운영이 어려워지고 있는 상황이 드러난다. 맥켄지와 윌리엄스가 1920년 6~8월까지 런던을 지켰다. 1920년 중반 김규식 · 이승만 간의 편지에는 자금문제 · 인사문제(송헌주 · 현순) 등이 집중적으로 거론되었다. 이승만은 워싱턴-하와이-상해로 이동 중이었고, 김규식이 워싱턴을 중심으로 모금활동을 벌였다. 김규식은 구미위원부를 사임하고 과격파와도 함께 일해볼 생각이라고 밝혔다(1920. 8. 7). 김규식은 1920년 1월부터 이미 극동으로 건너갈 계획이었으나, 병환으로 불가능했다(1920. 8. 7).

김규식은 “대의를 먼저 생각했고, 이를 위해 내 인생의 황금기와 내가 가진 모든 것을 희생했습니다. 나의 가정, 일, 이해관계를 포기했으며, 내 아내와 아들보다도 내 마음과 가슴 속에서 우리의 커다란 대의가 가장 우선이자 가장 중요한 자리를 차지했습니다. 나는 하나님 앞에서 떳떳합니다”라고 했다(1920. 9. 30). 상해로 돌아간 김규식은 대통령으로 상해를 방문한 이승만의 저녁 초대에 쉽게 응하지 않았다(1921. 3. 15, 4. 18)

상해에서 이승만의 비밀통신원으로 활약했던 안현경과 3 · 1운동을 미주에 알렸던 현순은 1920년 8월 25일 워싱턴에 도착했다(1920. 8. 27). 황기환은 파리에서 활동하며 진행경과를 계속 구미위원부 위원장 김규식에게 보고(1919. 8. 18, 8. 20, 8. 23, 8. 25, 8. 28, 8. 31, 9. 1, 9. 2, 9. 6, 1920. 8. 10, 9. 3)했다.

현순이 구미위원부 임시위원장이 된 현순은 임시정부에게 「미국 내 정치상황 개관(General Survey of the Political Situation in America)」을 발송(1920. 12. 14)했는데, 여기서 구미위원부가 “정식 인가된 공관”과 같은 대접과 예우를 받았다고 썼다. 현순은 이후 런던 · 필라델피아 통신부를 폐쇄하고 워싱턴에 구미‘위원부’가 아닌 ‘공사관’을 설립하는 방안을 추진(1921. 3. 15)해 이승만과 갈등을 빚었고, 결국 해임되었다.

▪ 워싱턴 군축회의

윌슨 대통령이 대통령선거 유세 중 사망한 후 공화당의 워렌 하딩(Warren G. Harding)이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서재필자서전에 따르면 그는 1921년 1월 대통령당선자이던 하딩을 만나 한국 독립을 호소했고, 동정적이고 우호적인 답변을 들었다. 1921년 7월 하딩이 워싱턴 군축회의를 개최한다는 보도가 있자 구미위원부는 여기에 큰 기대를 걸었다. 서재필은 하딩 대통령에게 편지를 보내(1921. 9. 24) 워싱턴 회의에 한국인들이 “대표가 아닌 청원자”로 참석하고 싶다고 호소했다. 이어 워싱턴 군축회의 한국대표단은 미국대표단에게 편지(1921. 10. 1)를 보내 한국이 호소할 수 있는 기회를 달라고 요청했다. 한국대표단은 대표장 이승만, 대표 서재필, 서기 정한경, 고문 돌프(Fred A. Dolph)로 구성되었다.

한국대표단은 모두 세 차례에 걸쳐 한국대표의 참가를 요청하는 청원서를 준비했으나, 청원서를 공식적으로 접수하지 못하고 간사에게 사적으로 전달할 수밖에 없었다(1922. 2. 20). 국내에서 52개 단체 · 조직 대표들이 서명한 「韓國人民致太平洋會議」 역시 공식적으로 접수되지 않았고, 1921년 11월 12일 개막한 워싱턴 회의는 1922년 2월 6일 폐막되었다. 전력을 기울였던 워싱턴 회의가 성과없이 끝나자 서재필과 정한경은 구미위원부를 떠났고, 구미위원부는 사실상 침체에 들어갔다. 구미위원부는 월예산을 200불로 축소했지만, 그마저 용이치 않았다(1922. 11. 18, 11. 24).

파리강화회의 · 워싱턴 회의에 기대를 걸었던 외교노선이 실패하자 그 여파는 임시정부에 직접적으로 미쳤다. 임시정부와 독립운동의 진로를 둘러싸고 국민대표회의가 개최되었고, 임시정부의 역량은 창조파 · 개조파 · 유지파로 분열되었다. 구미위원부는 1925년 3월 임시정부에 의해 해산되었고, 이승만은 탄핵 · 면직되었다.

▪ 대소 외교와 레닌자금

임시정부는 1920년 1월 22일 국무회의에서 러시아에 여운형 · 안공근을 외교원으로 파견하기로 결정했으며, 국무총리 이동휘는 한형권을 밀사로 파견한 후 임정 외교원으로 추후 승인을 얻었다. 이 가운데서 한형권이 먼저 1920년 5월말경 모스크바에 도착했다. 한형권은 첫째 소련이 임시정부를 승인할 것, 둘째 2백만 멕시코 달러 차관을 제공할 것, 셋째 대일전에 공동대처할 것, 넷째 한국군 사관학교를 개설해줄 것 등 4가지 조건을 제시하고 레닌과 면담한 후 2차례에 걸쳐 소위 ‘레닌자금’ 60만 루블을 수령했다. 한형권은 1차로 1920년 9월 모스크바에서 금괴 40만 루블을 받아 베르흐네우진스크에서 김립에게 전달했고, 2차는 임정의 내부분열 타개를 조건으로 1921년 9월 23일 독일 베를린에서 20만 루블을 수령해 고창일과 함께 상해로 가지고 왔다. 40만 루블은 김립 12만, 한형권 6만, 박진순 22만 루블로 분배되었다. 한형권은 1923년 6월 10일 상해에서 20만 루블 사용처에 대한 지출보고서를 작성해 러시아정부에 보고했다(조철행, 87~104). 한형권이 수령한 60만 루블의 성격과 용처를 둘러싸고 상해에서는 대파란이 발생했다. 임시정부측은 이 자금이 임시‘정부’에 지원된 것이라 판단한 반면, 이동휘 등은 이것이 ‘고려공산당’ 자금이라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한편 1920년 5월 이승만은 독자적으로 대소교섭을 시작해 임정대사를 파견할 계획을 수립했다. 특사로 지명된 사람은 이희경(李喜儆)이었는데, 임정은 안창호 · 이동휘가 사임한 후인 1921년 5월에 이르러서야 한형권을 소환하는 대신 이희경과 안공근을 모스크바에 파견했다(이애숙, 22~23). 이희경 · 안공근은 7월 프랑스에 도착하였고, 8월 독일 베를린에 도착했다. 이희경은 병으로 수개월간 고통을 받았다. 이들은 베를린 소련대표부와 연락을 취했지만, 모스크바의 이동휘 · 박진순, 베를린의 한형권 · 고창일의 방해공작으로 반년간 ‘감금’되는 우여곡절을 거쳤다. 이들은 1921년 12월에야 베를린에서 러시아 외무부의 허가를 받았고, 1922년 1월 14일 베를린 한인학생에게 돈을 빌려 1월 19일 모스크바에 도착했다. 모스크바에서 개막(1922. 1. 21)된 극동민족대회 3일 전이었다. 모스크바에 도착한 이들은 1920년 파견된 임정대표(한형권), 1922년 극동민족대회 조선대표단과 마주쳤고, 대소 외교 주도권을 둘러싸고 상해파 고려공산당,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측과 3파전을 벌여야 했다. 이 자료집에 수록된 임정대표단 이희경 · 안공근의 편지들은 1922년 모스크바에서 벌어진 대소외교, 60만 루블, 한국대표단 3개 파의 외교전 등이 생생하게 드러나 있다. 이 편지들은 다음과 같이 구성되어 있다.

· [번역A] 이희경 → 이시영(재무총장) (1922. 3. 8)

· [번역B] 이희경 → 신익희(국무원 비서) (1922. 3. 9)

· [번역C] 안공근 → 오영선(전 국무원 비서장) (1922. 3. 8)

· [번역D] 이희경 → 신규식(국무총리 대리 · 외무총장 대리) (1922. 3. 13)

· [번역E] 안공근 → 오영선(전 국무원 비서장) (1922. 3. 22)

· [번역F] 이희경 → 이유필(재무총장) (1922. 3. 25)

· [번역G] 이희경 → 신익희 (1922. 3. 12)

· 이희경 · 안공근 서한에 대한 세부 내용 요약

이 가운데 [번역D]가 임정에 보내는 공식 보고서와 [번역F] 춘산 이유필에게 보내는 보고서가 가장 상세하다. 이들은 한형권 · 김립 · 고창일의 체포와 자금 회수를 강력하게 주장했으며, 극동민족대회에 참석한 김규식 · 최창식 등 임정 전 각료에 대해 비판적 견해를 피력했다. 이희경은 ‘양심없는 인물’ ‘중상모략’ ‘사악한 인물’ ‘극단적’ ‘수치스러운 행동’ ‘불명예’ ‘치욕’ 등의 단어를 사용했다. 임정대표를 지구 반바퀴를 돌아 8개월 만에 모스크바에 도착했지만, 모스크바가 제공한 거액의 자금은 다른 ‘임정대표’ 손에 ‘탈취’된 상태였고, 임정의 대표성과 권위는 위협받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1922년 1월 21일부터 모스크바에서는 워싱턴 회의에 맞서는 극동피압박민족대회가 개최되었다. 한국대표단 144명 가운데는 구미위원부 위원장을 지낸 김규식, 현순, 초기 상해임시정부 외무차장을 지낸 여운형 등 임정 주요 인사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후 상해에서는 국민대표회의가 본격적으로 전개되었고, 레닌이 한형권에게 건넨 20만 루블 중 일부가 회의 자금으로 유입되었다.

이 자료집에는 한형권이 모스크바에 제출한 자금사용 내역서 2건이 수록되어 있다.

· 한형권, 「1920년 11월 10일 박진순으로부터 받은 금액에 대한 지출보고서」(1923. 6. 2).

· 한형권, 「소련 외교인민위원부 지불명령서에 의해 1921년 9월 23일 내가 수령한 금액에 대한 지출보고서」(1923. 6. 10).

한형권이 1923년 상해에서 작성한 이 문건들을 통해 한형권이 모스크바에서 받은 60만 루블 중 그를 통해 사용된 일부 자금의 용처가 밝혀졌다.

2. 1930년대

▪ 안창호 체포 관련

1930년대 임시정부는 윤봉길 · 이봉창 의거로 해외동포들의 독립열을 자극했으며, 중국정부의 원조와 연대를 획득하게 되었다. 그러나 1932년 이래 임시정부는 일제의 추적을 피해 긴 이동의 시대에 접어들었다. 이런 연유로 1930년대 임시정부의 외교활동은 축소되었고, 관련 영문서신들 역시 많이 생산되지 않았다. 1932년 안창호 체포와 관련된 몇 건의 서한들이 있다. 1932년 윤봉길 의거(1932. 4. 29) 당일 안창호는 이유필의 자택에서 프랑스경찰에 체포되어 일본영사관에 넘겨졌다. 이와 관련해 임시정부는 “도산(島山) 위해 미국 율사(律士:변호사) 정했소. 적극 후원하시오”라는 전보를 국민회에 발송(1932. 5. 9)했고, 교민단장 이유필은 안창호가 중국 국적을 보유했으나 불법 체포되었다는 내용의 항의서한을 프랑스공사 · 미국공사에게 발송(1932. 5. 11)했다.

▪ 만주사변과 국제연맹

1931년 만주사변이 발발한 이후 국제연맹은 리튼조사단(The Lytton Commission)을 파견했고, 만주문제는 세계사적 관심사가 되었다. 이승만은 1933년 1월초 국제연맹 본부가 있는 스위스 제네바로 건너갔다. 임시정부 국무회의는 그에게 ‘특명전권수석대표’의 직함을 부여했다. 이승만은 제네바에서 만주한인 문제와 일본의 한국지배에 관해 국제사회에 호소했다. 이승만은 국제연맹 사무총장 드럼몬드(Eric Drummond)(1933. 3. 20, 5. 5), 아일랜드 자유국의 발레라(De Valera) 대통령(1933. 3. 20)에게 편지를 보냈다. 이승만은 임시정부 대통령 명의를 사용(1933. 5. 5)했다.

▪ 중한민중동맹

만주사변 직후 1932년 11월 10일 중국 상해에서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韓國對日戰線統一同盟)이 조직되었다. 김규식 등이 발기한 통일동맹은 중국 내 독립운동단체의 연합을 위한 협의체로 활동하다 민족혁명당이 결성됨에 따라 1934년 7월 발전적으로 해체하였다. 통일동맹은 중국 항일단체인 동북의용군후원회(東北義勇軍後援會)와 제휴해 중한민중대동맹(中韓民衆大同盟)을 조직한 바 있다. 1933년 김규식은 미주로 건너가 뉴욕 · 하와이 등을 방문하면서 재미한인의 독립운동 지지 및 재미 중국화교와의 연대 등을 모색하는 과정에서 중한민중대동맹이 미주 한인사회에 소개되었다. 김규식은 하와이에 들러 1933년 7월 호놀룰루 Fort Shafter의 미군 정보당국과 회견했는데, 회견을 주선했던 것은 하와이의 한길수였다. 한길수는 이용직목사와 함께 두 사람의 이름을 합성한 W. K. Lyhan(William Lee Yongchik & Kenneth Haan)이라는 별호를 만들고 이 이름 하에 리포트를 만들었다. 이용직목사는 3 · 1운동 직후 구미위원부 일을 보았으며, 1929년 이래 이승만이 설립한 호놀룰루 한인기독교회 목사로 활동하다 이승만과 갈등으로 파면된 인물이다. 그후 김현구 · 김원용 · 정두옥 등과 함께 하와이 내 反이승만 활동의 대표주자가 되었다.

자료집에는 중국 상해로 돌아간 김규식이 리한(Lyhan), 즉 이용직 · 한길수에게 보내는 편지가 포함되었다. 김규식이 보낸 편지(1933. 9. 20)에 따르면 하와이에서 800불의 자금을 가져와 중한민중동맹에 보냈다고 기록하고 있다. 특히 김규식은 리한이 자신의 부재 시 미국에서 중한민중동맹을 대신할 것이라는 일종의 신임장을 부여(1933. 7. 21)하기도 했다. 김규식은 한중서(韓中書)라는 가명으로 리한에게 보낸 편지(1934. 6. 11)에서 임정에 한길수를 주하(駐夏)외교특파원, 즉 하와이주재 외교특파원으로 임명해줄 것을 요청한 사실을 밝히고 있다. 한길수는 이후 자신이 중한민중동맹의 미주 대표라고 자임하며 1940년대까지 활발한 활동을 벌였다. 이미 1935년 김규식은 한길수가 자신이 준 신임장을 다른 목적에 써서는 안된다는 편지(1935. 6. 1)를 보낼 정도로 한길수의 행동과 동기에 의문을 가지게 되었다. 이후 한길수는 1941년 재미한족연합회에 의해 미국 국방봉사원으로 임명되었으며, 일본군의 진주만 기습을 예언해 일약 언론의 총아가 되었다. 그러나 한길수는 이승만과 대립하며 재미한인 사회의 분열의 일단을 제공했다. 한미협회는 한길수와 1942년 하반기 격렬한 비난을 주고 받았으며, 결국 재미한족연합회는 한길수를 면직시켰다. 나아가 김구는 이승만에게 보낸 편지(1943. 2. 15)에서, 김규식의 말을 인용해 한길수가 대표로 자처하고 있는 중한민중동맹은 해체된 상태로 더이상 존재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3. 1940년대

▪ 재미한족연합회 · 주미외교위원부

임시정부는 오랜 이동기를 끝내고 1940년 중경에 정착했고, 1941년 태평양전쟁이 발발했다. 임시정부는 만주사변 · 중일전쟁 등을 통해 한중연대를 이루었고, 이제 한미연대를 통해 임정의 국제적 승인과 무장투쟁을 본격적으로 전개할 시기가 도래했다고 판단했다.

태평양전쟁의 발발직전 재미한인들은 해외한족대표대회(1941. 4. 19~5. 1)를 열고 미주 한인들을 망라한 재미한족연합위원회를 조직했다. 재미한족연합회는 대미외교를 위해 외교위원부 조직을 임시정부에 청원했고, 임시정부 국무회의는 이를 ‘주미외교위원부’로 선포(1941. 6. 4)했다. 이승만이 주미외교위원부 위원장에 임명되었으며, 이는 1940년대 대미외교의 중심이 되었다.

김구주석은 이미 루즈벨트 대통령에게 공한을 보내(1941. 2. 25) 임시정부의 승인, 주중 미국외교단의 임정 지원, 전후 국제회담에 임정 참가 등을 호소한 바 있다. 주미외교위원부 설립 직후 김구는 루즈벨트 대통령에게(1941. 6. 6), 조소앙은 헐 국무장관(1941. 6. 6)에게 서한을 보내 이승만이 주미외교위원부 위원장으로 임명 사실을 알리며 1882년 조미조약에 따라 ‘거중조정’을 해달라고 요청했다.

태평양전쟁이 발발(1941. 12. 7)하자 임시정부의 대미외교는 본격화되었다. 조소앙 외교부장은 루즈벨트 대통령에게 보낸 서한(1941. 12. 10)에서 한국의 대일전 참가를 요청했고, 이승만은 헐 국무장관에게 국제연합의 선언을 지지한다고 알렸다(1942. 2. 2). 태평양전 발발 직후 미국은 대일전을 위해 한국에 대한 관심과 정책적 고려를 본격화하기 시작했다. 주미외교위원부의 대미외교도 본격적으로 가동되었다. 한미협회의 해리스(Frederick Brown Harris)목사는 스팀슨(Henry L. Stimson) 전쟁부장관에게 편지를 보내 이승만을 선전하며 임시정부의 승인을 촉구했다(1942. 2. 4, 3. 6). 이승만은 루즈벨트 대통령(1943. 5. 15, 12. 9), 그루 국무차관(1945. 2. 5), 스테티니어스 국무장관(1945. 3. 8) 등에게 여러 차례 편지를 보냈다.

임시정부 · 주미외교위원부의 가장 중요한 대미외교활동은 첫째 임시정부에 대한 미국정부의 승인, 둘째 무기대여법(Lend Lease)에 따른 무장지원, 셋째 한국독립운동에 대한 우호조직 조직, 넷째 한국독립운동에 대한 선전활동 등이었다.

▪ 주미외교위원부 개조

1942년 중반부터 주미외교위원부는 재미한족연합회와 갈등을 빚게 되었다. 핵심쟁점은 (1)주미외교위원부의 위원 확대, (2)한미협회와의 관계 단절, (3)중경특파원 문제 등이었다. 미주한인사회에서 재정 · 인사권을 둘러싼 갈등이었다. 1942년 12월 이래 내연하기 시작한 갈등은 1943년초 최고조에 달했다.

재미한족연합회는 이승만에게 주미외교위원부의 위원 확대와 운영 공개를 요구했다. 그렇지만 이승만이 김호 · 전경무에게 보내는 편지(1942. 11. 28)에서 재미한족연합회는 사설 조직이고, 주미외교위원부는 임시정부의 공식적 대변인으로 공사관 · 대사관이라고 밝혔다. 이승만은 주미외교위원부 위원 확대를 거부했고, 이후 양측의 논쟁은 격렬하게 전개되었다.

한미협회는 이승만이 조직한 사설 자문기구로, 크롬웰 · 윌리엄스 등 미국인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승만은 김호에게 보내는 편지(1942. 8. 14)에서 미국무부가 한길수 핑계를 대며 임정 승인을 지연했기에 “미국무부와의 우호적 협의”가 3월 중순 끝났고, 이후 한미협회가 임정 승인을 맡게 되었다고 밝혔다. 한미협회는 헐 국무장관에게 편지(1942. 5. 5)를 보내, 임시정부를 승인할 때까지 한국인들의 투쟁을 중단시키고 있다고 주장했고, 헐 국무장관은 한미협회에 보내는 편지(1942. 5. 20)에서 승인을 빌미로 국가적 투쟁을 중단하는 것은 이해할 수 없다고 비판했다. 한미협회는 이에 대해 임정승인이 먼저라고 답장(1942. 6. 3)했지만, 미국무장관과 격렬한 비난서한을 주고받는 것이 임정 승인에 도움이 될 수 없었다. 특히 한미협회는 국무부가 임정을 승인하지 않기 때문에 더이상의 의견교환이 시간낭비라고 밝힘으로써, 1943년 초반 재미한인사회에서 ‘국교중단논쟁’이 일어났다.

중경특파원은 재미한족연합회가 김호 · 전경무 2명의 대표를 선정(1942. 5. 4)해 임정과 연합회 간의 연락을 시도함으로써 시작되었다. 1942~45년까지 재미한족연합회는 적극적으로 중경에 가서 임시정부의 실상을 파악하고 구체적인 연락관계를 취하는 한편 군사적 · 외교적 도움을 제공하려고 시도했다. 그렇지만 이승만은 자신의 영역을 침범 당했다고 생각해 반대했고, 임시정부는 애매한 태도를 취했다. 재미한족연합회는 김구에게 전보(1942. 12. 28)를 보내, 중국 비자 발급이 지연되는 이유를 문의했다. 한시대 · 이원순 · 김원용은 김구에게 전보(1943. 5. 7)를 보내 중경특파단에 대한 중국정부의 비자발급에 도움을 요청했다. 엄항섭은 외교라인을 통해 교섭한 결과 중국 외무부가 비자 발급을 약속했다고 미주에 전보(1943. 7. 9)를 보냈지만, 재미한족연합회는 중경특파단이 11개월 동안 허송세월을 하고 있으며 조소앙 외교부장에게 항의(1943. 7. 25)했다. 김구는 전경무 · 김호의 비자발급에 계속 노력 중이라고 밝혔지만(1943. 11. 15), 중국의 협조를 얻지 못함으로써 중경특파단의 파견은 사실상 무산되었다.

이에 따라 양측의 갈등은 첨예하게 되었다. 이승만추종세력은 1943년 민중대회를 개최했고, 재미한족연합회측은 이승만의 면직을 임시정부에 청원했다. 1943년 중반 양측은 임정에 전문 · 서한을 보내 각자의 입장을 내세우며 날카롭게 대립했다. 갈등 끝에 결국 이승만의 동지회는 재미한족연합회를 탈퇴(1943. 12. 23), 연합회는 독자적인 워싱턴사무소를 설립(1944. 6. 5)하고 김원용 · 전경무를 상주시켰다. 이승만은 협찬회 조직을 제안(1944. 5. 24)해 임정과 별개의 독자적 노선을 취하기 시작했다.

재미한족연합회는 독자적인 워싱턴사무소를 설립한 직후인 1944년 6~7월간 임시정부에 여러 차례 편지를 보내 이승만에 대해 비판했다. 한시대는 김구 · 김규식 · 김원봉 · 한국독립당에 각각 전보(1944. 7. 24)를 보내 임정이 재미한족연합회와 이승만 중 양자택일을 해야 하며 이승만해임을 주장했다.

미주사회의 분열에 당면한 임시정부는 주미외교위원부를 주미외교위원회로 개조하며, 재미한인단체 7/10 이상 참석, 참석자 3/4 결정으로 위원부를 개조하면 이를 추인하겠다고 지시(1944. 8. 12)했다. 이에 따라 1944년 10월말 주미외교위원부 개조를 위한 전체대표회가 개최되었지만, 이승만 진영은 불참했다. 김원용을 위원장, 한시대를 부위원장으로 하는 새로운 위원 15명이 선출되었지만, 임시정부는 이를 승인하지 않고 이승만을 위원장으로 하는 주미외교위원회 인선을 공표(1944. 11. 21)했다. 중경 임시정부는 재미한인단체의 주류적 의견보다는 미주에서 이승만의 위치가 가장 중요하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임정 지시에 복종할 것인가 독자노선을 채택할 것인가를 둘러싸고 재미한인사회는 재차 분열되었다.

▪ 샌프란시스코 회의

1945년 5월 국제연합을 창설하기 위한 샌프란시스코 회담은 임시정부가 추진한 승인외교의 중요 무대였다. 임시정부는 조소앙 등 대표를 파견하려 했지만 미국의 비자발급 거부로 성사되지 못했고, 대신 이승만을 위원장으로 하는 한국대표단을 파견했다. 1944년 이래 주미외교위원부 개조를 둘러싸고 대립했던 재미한족연합회와 동지회 세력을 망라한 대표단은 이 회담에서 임시정부 승인, 한국의 연합국 자격 승인, 회담 방청 등을 위해 노력했다. 특히 얄타회담(1945. 2) 이래 소련 점령 하의 폴란드에서 연합국이 승인했던 망명정부 대신 소련이 지지하는 공산정부가 수립된 데 대한 임시정부의 우려가 컸고, 샌프란시스코 회담은 소련을 포함한 대연합국 외교의 주요 무대였다. 샌프란시스코 회담에서 이승만은 얄타밀약설, 즉 얄타회담에서 미국이 한국에 대한 지배권을 소련에게 이양하는 밀약을 체결했다고 주장했다. 이승만은 미국 · 소련(1945. 3. 28) · 영국에게 공식서한을 보내 이 문제를 제기했고, 미국무부의 공식 부인(1945. 3. 28, 5. 17)에도 불구하고 얄타밀약설을 지속함으로써, 미국 · 소련을 경악케 했고, 임시정부에게도 정치적 타격을 주었다. 태평양전쟁 이래 임시정부와 이승만은 소련이 시베리아에 한인공산군 2개 사단을 양성해 한반도를 적화시킬 것이라는 주장을 계속한 바 있다. 이승만에 따르면 이미 1943년 2월 16일 미국무부장관에게 이를 경고했으며(1945. 6. 5), 그루 국무차관(1945. 2. 5), 트루만 대통령(1945. 6. 5)에게도 재차 이 문제를 제기한 바 있다.

샌프란시스코평화회담을 계기로 한 이승만의 얄타밀약설 주장에 대해 미국무부는 임시정부 불승인 정책의 공표로 대응했다. 미국무부 극동국장 대리 록하트(Frank P. Lockhart)는 임시정부가 한국에 대한 행정권을 가진 바 없고, 전체 한인들의 대표성이 없으며, 망명한인들의 부분적 지지를 받고 있으며, 전후 한국인들의 정치적 선택권을 제약하기 때문에 미국은 임시정부를 공인하지 않는다고 통보(1945. 6. 5)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승만은 트루만 대통령에게 재차 얄타밀약 부정 성명을 요구(1945. 7. 18)했다.

이승만은 일본패전이 확정되자, 연합4대 강국 수뇌에게 축하전보(1945. 8. 15)를 보냈는데, 스탈린에게는 ‘소비에트연방의 변치 않는 호의’를 칭송했고, 트루만 대통령에게는 공동신탁통치에 반대하며 자신의 조기 귀국을 청원했고, 애틀리 수상에게는 한국이 폴란드의 재판이 되지 않도록 ‘명목상 독립의 가면 하에 (강대국 장기판의) 졸(pawn)’로 만들려는 시도를 중단해줄 것을, 장개석에게는 신탁통치 계획 중단을 트루만에게 조언해달라고 요구했다.

▪ 중경소식

1942년 4월 15일 중국군사위원회는 조선의용대의 광복군 편입을 결정했다. 이에 따라 조선의용대는 광복군 제1지대가 되었고, 김원봉은 광복군 부사령관이 되었다. 미주에는 조선의용대 미주후원회가 있었는데, 김원봉은 이들에게 편지를 보내 의용군과 임정은 무관하다고 주장(1942. 6. 18)했고, 재미한족연합회는 김구에게 곧바로 사실 여부를 문의(1942. 6. 18)했다. 중경의 좌우합작은 군대통합 · 정부개조 · 의정원개조 · 헌법개조로 이어졌는데, 중경의 대립은 미주에도 영향을 미쳤던 것이다.

한편 임시정부는 광복군과 프랑스임시정부가 임시정부와 ‘실질적 관계 수립’하라는 지령을 임시정부에 대한 사실상 승인으로 받아들였고(1945. 2. 26), 이는 임시정부가 같은 망명정부로부터 첫 번째 획득한 승인으로 기록되었다.

Ⅲ. 자료의 출처

이 자료집은 출처는 다음과 같다. 1919~1920년대의 파리강화회의 · 파리위원부 · 구미위원부 등의 자료는 대부분 연세대 현대한국학연구소에 소장된 우남이승만문서에서 선별한 것이다. 파리강화회의와 관련해서 몇 건의 문서들은 미 국회도서관(Library of Congress) 소장 문서철에서 나온 것들이다. 미국대통령이었던 우드로 윌슨문서(Woodrow Wilson Paper), 미국대표단원이었던 타스커 블리스 문서(The Papers of Tasker H. Bliss), 공화당계 외교관 출신이던 헨리 화이트문서(The Papers of Henry White) 등에서 일부를 선별했다.

1922년 임정의 대소외교 관련 문서들은 러시아국립사회정치사문서보관소(РГАСПИ) Фомд 495, Опись 135, Дело 67에 소장된 것들로 성균관대 임경석교수가 제공한 것이다. 1930년대 중한민중동맹단 관련 자료는 독립기념관 소장 한길수콜렉션에서 선별한 것이다. 또한 1940년대 주미외교위원부 · 재미한족연합회 관련자료는 독립기념관 소장 안창호 · 국민회콜렉션에서 나온 것들이다. 이 외에 몇 건은 『백범김구전집』에서 선별한 것이다.

【참고문헌】

Korean Delegation, ‘The Claim of the Korean People and Nation-Petition’ and ‘Memorandum,’ April 1919, Tasker H. Bliss Papers, Library of Congress, Washington, Container 312.

이정식, 1984 『김규식의 생애』 신구문화사 59~60쪽

방선주, 1998 「韓吉洙와 李承晩」 연세대학교 국제대학원 부설 현대한국학연구소 제2차 국제학술회의 『이승만의 독립운동과 대한민국 건국』

이애숙, 1999 「상해 임시정부 참여세력의 대소(對蘇)교섭」 『역사와현실』 제32권

우사연구회 엮음, 강만길 · 심지연 지음, 2000 『항일독립투쟁과 좌우합작』 한울

최기영, 2007 「해제」 『대한민국임시정부 자료집 21:파리위원부』 국사편찬위원회

고정휴, 2007 「상해임시정부의 초기 재정운영과 차관교섭」 『한국사학보』 제29호

고정휴, 2010 「해제」 『대한민국임시정부 자료집 24:대유럽외교Ⅱ』 국사편찬위원회

최기영, 2008 「해제」 『대한민국임시정부 자료집 23:대유럽외교Ⅰ』 국사편찬위원회

조철행, 2010 『국민대표회의 전후 민족운동 최고기관 조직론 연구』 고려대 박사학위논문

정병준(이화여대 사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