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제

해 제

1. 대한민국임시정부와 사진자료

사진은 근대 이후의 역사자료로, 전통시대의 문헌이나 실물자료가 보여주지 못하는 실제적이고 다양한 모습을 확인시켜준다. 예컨대 외국인들이 남긴 개항 이후의 사진자료들은 19세기 후반 이후 한국사회의 다양한 모습을 직접 보여주고 있다. 대한민국임시정부와 관련된 사진자료들도 적지 않다. 물론 시기에 따라 그 분량의 차이가 없지 않으나, 임시정부의 다양한 활동과 관여한 인물, 그리고 그들의 생활을 알려주는 중요한 자료임에 틀림없다. 그러한 점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사진자료집이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을 총정리하는 의미를 지닐 수 있으리라 생각된다. 이 사진자료집에는 부분적으로 잘 알려지지 않았던 사진들도 포함되기는 하였으나, 대개는 널리 알려진 것들이다. 최근 근대사회나 독립운동에 관련된 사진자료집들이 적지 않게 출간되었는데, 그러한 사진자료집을 통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와 관련된 사진들도 많이 공개되었다. 그러한 면에서 이 사진자료집은 그것들을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중심으로 다시 정리하는 작업으로 이해하면 될 것이다.

이 사진자료집은 수록 사진을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설립되어 환국할 때까지의 시기로 국한시켰다. 잘 알듯이 1919년 4월 상해 프랑스조계에서 수립된 임시정부는 그해 9월 통합정부로 확대되어 1932년 4월 윤봉길 의거로 항주로 이동할 때까지 만 13년을 상해에 위치하였다. 그리고 항주에서 진강으로 이동하였다가, 1937년 중일전쟁의 발발 이후 장사를 거쳐 광주로 옮긴 뒤, 유주와 기강에 잠시 머물렀다. 1940년 5월 중국의 전시수도였던 중경에 정착할 때까지 임시정부는 만 8년을 전선의 추이에 따라 중국 대륙을 이동하였던 것이다. 중경에 정착한 임시정부는 한국광복군을 조직하고 대일전선에 적극 참여하며, 임시정부의 국제적 승인을 위하여 진력하였다. 따라서 사진자료집은 상해시기(1919-1932)·이동시기(1932-1940)·중경시기(1940-1945)로 시기를 구분을 하여 관련 사진들을 정리하였다. 내용은 대체로 정부활동과 해외(외교)활동, 군사활동, 외곽단체, 생활을 기본으로 하고, 정당이나 정부문서 등을 포함시켰다. 또 시기에 따라 한인애국단이나 한국광복군 등을 별도로 다루었다.

사진자료를 편집하며 몇 가지 원칙을 정하였다. 그 하나는 당대의 사진을 수록한다는 것이다. 신문이나 잡지, 문건 등은 후대에 촬영한 사진을 포함시켰지만, 그렇지 않은 부분은 모두 당대의 사진들이다. 그러한 이유에서 임시정부의 청사나 임시정부 활동과 관련된 장소로 알려진 몇 곳의 오늘날 모습을 담은 사진과 같은 경우는 수록하지 않았다. 개인사진도 가급적 제외하고자 하였다. 임시정부의 각원이나 임시의정원 의장, 한국광복군총사령부 지휘부 등의 개인사진과, 생활에 관련된 경우 가족이나 단체사진 등은 수록하였다. 사실 임시정부와 광복군 등 독립운동에 관여한 인물 전체의 사진을 따로 정리할 기회가 있어야겠지만, 이번 사진자료집에서는 지도급 인사들의 사진을 수록하는데 그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사진의 내용이 불명확하거나 논란의 여지가 있는 경우도 제외하였다.

수록된 사진의 상당부분은 독립기념관 소장의 자료들이다. 연세대학교 현대한국학연구소와 백범김구선생기념사업협회, 도산안창호선생기념사업회가 소장한 자료들도 협조를 받았으며, 국사편찬위원회 소장의 자료도 활용하였다. 또 사진의 수집에서 편집에 이르기까지 국사편찬위원회의 권구훈 사료연구위원과 백범학술원의 홍소연 자료실장의 도움이 컸음을 밝혀둔다.

2. 상해시기(1919-1932)

대한민국임시정부가 1919년 4월에 중국 상해에서 수립될 수 있었던 가장 중요한 배경에는 국내에서 거족적으로 전개된 3·1운동에 있었다. 그리고 이를 전후하여 3·1 독립선언서를 비롯하여 여러 지역과 단체에서 독립선언서가 배포되었다. 또 여러 지역에서 임시정부를 조직하였는데, 그 가운데 상해의 대한민국임시정부와 노령국민의회, 그리고 한성정부가 1919년 9월 통합정부로 발전하였다. 정부수립과 관련하여 3·1운동의 시위사진을 비롯하여 독립선언서류 등을 수록하였다. 그리고 임시정부의 헌법인 ‘대한민국임시헌장’(1919. 4)과 개정헌법인 ‘대한민국임시헌법’(1919. 9), ‘대한민국임시약헌’(1927. 4)을 통하여 민주공화제를 채택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정체를 확인할 수 있다. 수립 당시의 임시정부는 국무총리제를 채택하였으나, 통합정부가 되면서 대통령제를 선택하였다. 1925년 3월 임시의정원에서 임시대통령 이승만을 탄핵하고, 헌법을 개정하여 국무령제를 채택하였다. 국무령제가 원활하게 운영되지 못하자, 1927년 4월 국무위원제로 개헌하게 되는데, ‘대한민국임시약헌’이 바로 그러한 내용을 담고 있다.

임시정부가 상해에 위치하였던 것은 그곳이 동양의 국제도시로 외교·선전활동에 유리하였고, 일본세력이 미치지 않으며 망명객들에게 우호적인 프랑스조계가 있었기 때문이다. 1932년 4월 윤봉길의거로 임시정부가 항주로 옮겨가기까지, 프랑스조계 공무국에서는 한국독립운동자들에게 많은 협조와 편의를 제공하였다. 상해에서 임시정부는 10여 차례 옮겼지만, 당시 청사 사진으로 남아있는 것은 양옥 2층에 태극기가 게양된 초기 사진 1장뿐이다. 사실 1920년대 초부터 재정난에 봉착하고 프랑스조계에 대한 일본의 압력으로 임시정부는 청사를 제대로 유지하기 힘들었다. 현재 상해에 남아 있는 마당로 보경리 4호의 중국식 연립주택 형태의 청사는 1926년부터 윤봉길의거로 항주로 이동하던 1932년까지 사용되었지만, 당시의 사진은 없다.

정부활동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은 정부가 발행하는 관보였다. 임시정부에서는 공식적인 관보로 『대한민국임시정부공보』를 발행하여, 정부의 소식을 전달하였다. 법령의 공포나 관원의 임면 등 정부 공무에 관련된 사항들을 게재하는 공보가 처음 발간된 것은 1919년 9월 3일자였다. 초기에는 서임급사령·중요사항·특별사항·중요통신·인사 등으로 구성되었으며, 대한민국임시헌법이나 대한민국임시관제 등의 법률은 공보 호외 또는 공보에 반포되었다. 공보는 호외를 제외하고 1944년 12월 20일자까지 총 84호가 발행되었다. 공보 제1호를 수록하였다. 1919년 9월 통합정부로 개편되기 이전의 중요한 문건으로 지적할 수 있는 것은 임시의정원 의장 이동녕 명의로 국무총리에 선출된 이승만에게 보낸 임명장(1919. 4.11)과, 임시의정원 의장 손정도 명의의 「우리 소식을 동포에게 고함」(1919. 7.24)이라는 선언서이다.

상해시기 임시정부에 관여한 인사들이 적지 않았지만, 이 사진자료집에는 1919년 9월 통일정부의 첫 각원들의 인물사진을 수록하였다. 임시대통령 이승만과 국무총리 이동휘, 이동녕·박용만·노백린·이시영·신규식·김규식·문창범·안창호가 그들이다. 그리고 1925년 이승만의 탄핵 이후 임시대통령을 맡았던 박은식과, 국무령 체제에서 국무령에 선임되었던 이상룡·양기탁(미취임)·홍진·김구도 포함시켰다. 안창호도 국무령에 선임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임시의정원 의장은 전체시기를 망라하여 이 부분에 인물사진을 수록하였다.

상해시기 초기에는 임시정부가 국외뿐 아니라 국내와도 연계되어 그 활동영역이 넓었고, 『독립신문』의 간행을 비롯한 선전활동도 적극적이었다. 상해시기 임시정부와 관련된 사진 또한 시기적으로 1919년과 1920년대 전반기에 많이 남아 있다. 임시의정원 기념사진을 비롯하여, 임시정부 국무원의 요인들이나 정부 직원, 임시사료편찬위원회 위원 등 단체 기념사진도 이 시기에 집중된다. 임시정부의 신년축하식(1920, 1921)·3·1 독립선언 기념식(1920, 1921), 이승만대통령환영회 등과 같이 임시정부나 교민단의 공식행사 사진 역시 상해시기 초기 임시정부의 활동과 관계인사들을 확인할 수 있는 사진자료이다. 이 사진자료집에 수록된 단체사진 중에서 상당수의 인명이 확인되는 경우에, 일부 사진은 인명을 밝히는 작업을 병행하였으나 잘못 알려진 경우도 없지 않을 것이다.

임시정부가 생산한 문서가 초기에는 상당수 남아 있다. 잘 알려진 대로 윤봉길의거 직후 임시정부의 공식문서들이 일제에 압수되어, 일제가 『조선민족운동연감』으로 정리하였다. 이 문서의 행방은 현재도 알려지지 않고 있지만, 대통령 이승만에게 보낸 문서와, 1920년 12월 이승만이 상해에 도착하여 보고받은 문서가 이른바 이화장문서로 현재 연세대학교 현대한국학연구소에 소장되어 있다. 그리고 조소앙이 소장한 ‘소앙문서’나 한국연구원을 비롯한 일부 기관에 이 당시 법령집이나 회의록이 보관되어 있다. 따라서 「국무원 포고 제1·3호」·「임시정부연통제관련법령집」「임시정부의정원기사록」·「군무부 포고 제1호」·「국무원 제 258호 총리 이동휘 대통령 보고」·「임시대통령 함 제5호」·「관동대지진 한인학살에 대한 외무총장의 항의문」(1923.9.10)·「재외동포에게(이승만, 1924.6)」 등의 정부문서는 바로 그러한 여러 기관에 소장된 것들이다. 정부문서의 사례를 보기 위하여 몇 건의 문서를 소개하였다.

1930년 전후 임시정부의 현황은 매우 저조하였다. 정부문서 역시 1920년대 중반까지 쉽게 발견되지만, 그 이후의 문건은 현재 잘 나타나지 않는다. 정부개조문제를 다룬 1923년의 국민대표회의나 1925년 이승만대통령의 탄핵 이후 임시정부의 위상과 활동은 정부수립 초기에 비하면 약화되어 있었고, 이후 전개된 유일당운동 등은 정부가 주도한 것이 아니었다. 1930년 임시정부의 「3·1절 기념선언」의 반포나, 『동삼성한교문제』의 발간은 그러한 형편에서 당면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노력이었다.

임시정부 수립 직후부터 일제의 한국침략 사실을 국제연맹에 제출하기 위하여 『한일관계사료집』의 편찬을 맡은 임시사료편찬위원회를 조직하였다. 그 편찬위원들의 기념사진과 『한일관계사료집』의 표지 및 그 모두 부분을 사진으로 담았다. 그리고 그 작업과정에서 수집한 자료를 이용하여 김병조의 『한국독립운동사』와 박은식의 『한국독립운동지혈사』가 출간될 수 있었다. 무엇보다도 임시정부의 선전활동은 『독립신문』의 간행이었다. 국한문으로 간행된 이 신문은 1922년 7월부터는 중국인들을 대상으로 중문판도 간행되었는데, 2년 동안에 40호 정도 발간되었던 것 같다. 국한문판과 중문판은 독자층의 차이로 그 내용이 같지는 않았다. 『독립신문』은 초기 주 3회를 발간하였지만, 1920년 중반 이후에는 주 2회 발행하였으나, 이후 정간도 적지 않다가, 점차 주 1, 2회 또는 1923년 이후에는 월 1회의 발간도 쉽지 않았다. 1926년에는 순간으로 발행되기도 하였으나, 결국 그해 11월까지 총 198호를 발간한 뒤 폐간하고 말았다.

임시정부의 재정확보를 위한 방안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독립공채의 발행이었다. 국내와 미주를 대상으로 공채는 다양한 액수로 발행되었다. 미주 발행의 공채를 보면 앞면에는 영어로, 뒷면에는 국문과 한문으로 작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집정관총재 이승만과 특파주차구미위원장 김규식의 명의로 발행되었다. 하와이국민회와 주차구미위원부에서 발행한 공채 영수증도 남아 있다. 특기할 문건은 임시정부 외무총장 명의로 발행된 여행증서, 즉 여권이다. 여행증서의 앞면은 국한문으로, 뒷면은 영어·프랑스어·러시아로 되어 있었다. 1920년 4월에 발행된 이 여권은 제14호였는데, 미국 유학생들에게 발급되었던 것이다.

상해시기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해외외교활동으로는 파리위원부와 구미위원부를 들 수 있다. 초기 임시정부가 외교 중심의 방략을 추진하였기 때문에, 무장투쟁을 주장하던 독립운동 세력과 간극이 있었던 사실도 잘 알려져 있다. 파리위원부는 제1차 세계대전 종전 직후 개최된 파리강화회의에 한국독립을 요구하기 위하여 조직된 기관이었다. 임시정부 수립 이전에 신한청년당의 대표로 파리에 도착한 김규식을 위원장으로 조직된 파리위원부는 강화회의에 한국독립을 호소하며 각국 대표단에 독립요구서 등을 제출하였으며, 프랑스어로 ‘통신전’과 『자유한국』을 발행하여 한국인들의 독립의지와, 일제의 한국침략과 잔혹한 압제를 세계에 알렸다. 그러한 활동은 1920년 12월 국한문으로 간행한 『구주의 우리 사업』에 정리되어 있다. 파리강화회의가 종료된 뒤 김규식이 도미하여 구미위원장을 맡게 되자, 파리위원부는 이관용·황기환 등이 주도하였다.

3·1운동의 소식이 미주에 알려지자 이승만·서재필 등 한인 지도자들은 1919년 4월 14일부터 16일까지 필라델피아의 리틀극장에서 한인회의를 개최하고 한국통신부를 설치하였다. 한인회의에 참석한 대표들과 시위 사진들이 남아 있다. 구미위원부는 이승만이 1919년 8월 한성임시정부 집정관 총재 자격으로 구미외교를 전담할 목적으로 설립한 기관으로, 김규식·현순·서재필 등이 위원장을 맡았다. 이승만과 김규식, 또 구미위원부 직원, 건물, 서재필의 위원장 임명장 등 관련 사진들이 적지 않다. 구미위원부에서는 워싱턴군축회의를 대비한 외교활동에도 진력하였다. 그리고 임시정부 내무부령에 의한 하와이 교포의 인구조사가 이루어졌음을 알려주는 인구조사표가 보인다.

임시정부의 군사활동으로 먼저 지적할 것은 미국 캘리포니아주 윌로우스에 설립된 한인비행사양성소이다. 1920년 2월 임시정부 군무총장 노백린 등이 김종림의 협조로 비행기를 구입하여, 6명의 한인 교관 등이 20여 명에게 비행훈련을 시켰다. 임시정부에서는 이들 중 2명을 육군비행병 소위로 임관하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1921년 비행사양성소는 폐교되었던 것 같다. 임시정부에서는 군무부를 설치하고 육군임시군제와 임시군사주비단, 임시육군무관학교 등에 관련된 법령을 공포하여, 복국을 준비하였다. 북간도의 대한북로군정서는 임시정부 휘하의 군단으로 사관연성소를 두고 있었다. 김좌진이 연성소장으로 1920년 9월 289명의 제1회 졸업생을 배출하였는데, 그 졸업증과 졸업식 사진이 확인된다. 이 직후 청산리전투에 참여한 북로군정서의 승리기념 사진이 널리 알려져 있다. 1923년 남만주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 육군주만참의부가 조직되었다.

임시정부의 외곽단체로 상해에 교민단이 한인행사를 주관하고 독립운동을 후원하는 자치단체로 활동하고 있었다. 3·1절이나 개천절 등의 행사를 주관하였으며, 임시정부에서는 임시교민단 관련법령을 제정하였던 것이다. 대한적십자회도 활동하였는데, 간호원도 양성하였다. 또 이승만을 고문으로 추대한 통지서가 보존되어 있다. 1922년 상해에서 조직된 한국노병회는 군인양성과 독립군자금을 확보를 목적으로 김구 등이 주도한 독립운동단체였다. 임시정부경제후원회는 1926년 7월 임시정부의 재정을 지원할 목적으로 창립된 단체였다. 안창호는 그해 7월 8일 삼일당에서 ‘우리 혁명운동과 임시정부 문제에 대하여’라는 연설을 하면서, 재정난에 봉착한 임시정부의 지원을 제창하였던 것이다. 이에 따라 교민단에 사무소를 둔 임시정부경제후원회가 결성되었으며, 안창호가 위원장을 맡았다. 마당로 보경리의 임시정부 청사는 임시정부경제후원회 지원으로 마련하였다고 알려져 있다. 『한국노병회회헌』과 『임시정부후원회일람』이 남아 있다.

인성학교는 교민단에서 운영하던 한인학교였다. 1917년 2월 상해의 한인 기독교도들에 의하여 상해한인기독소학교로 개교한 인성학교는 초등·중등교육기관으로 교민단의 공립학교로, 국어와 역사를 교육하던 민족교육의 산실이었다. 1932년 상해사변으로 일제가 상해를 점령한 뒤, 1935년 11월 인성학교는 교문을 닫았다가 해방 뒤에 재개교하였다. 인성학교 학생과 교사, 졸업증 등이 확인된다.

상해시기 임시정부 관여자들의 생활과 관련된 사진들도 더러 찾을 수 있다. 우선 당대에 쓰인 일기나 회고록이 찾아진다. 안창호가 1920년 1월부터 8월까지, 1921년 1·2월에 쓴 일기가 보존되어 임시정부 초기의 많은 사안과 인물들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다. 『백범일지』 상권은 김구가 1929년 보경리 임시정부 청사에서, 하권은 1942년 중경 오사야항 임시정부 청사에서 쓴 것이다. 상권은 상해시기를 마지막 부분에 소략하게 다룰 뿐이지만, 상해시기에 집필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결혼식 사진도 보인다. 엄항섭과 연미당의 결혼식 사진이 그것이다. 김구의 가족사진도 있다. 김구와 최준례, 아들 김인이 어느 사진관에서 찍은 평화로운 모습이다. 하지만 임시정부 경무국장으로 일하고 내무총장이던 김구의 아내 최준례는 둘째 아들 김신을 낳은 뒤 계단에서 낙상하여 결국 1924년 1월 1일 일본조계의 홍구폐병원에서 사망하였다. 김구는 아내의 마지막을 보지 못하고, 프랑스조계의 병원을 떠날 때 이별할 수밖에 없었다. 최준례의 묘비 앞에선 김구 가족의 사진도 찾을 수 있다.

안태국은 국내에서 신민회에 관여하였고, 안명근사건과 105인사건으로 일제의 악형을 당한 지사였다. 1920년 상해에 왔다가 별세하였는데, 그 장례식에는 임시정부 요인들과 많은 상해 교민들이 참석하였다. 장례식 행렬과 참석자들을 찍은 파노라마 사진이 남아 있어, 당시 상해 교민사회의 한 모습을 짐작케 한다. 윤현진은 임시정부의 재무차장으로 임시정부의 어려운 재정문제의 해결에 애쓴 바 있던 30의 청년이었다. 1921년 9월 그의 장례식과 묘비 사진이 보인다. 1922년 7월 김가진의 장례식 광경도 여러 장의 사진으로 남아 있다. 그는 한말 대신 등을 역임하고 일제에게 남작 작위를 받았지만, 1919년 3·1운동 후 상해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에 앞장섰던 원로였다. 1930년 5월에는 이탁의 장례식이 있었다. 신민회 출신으로 만주에서 무장투쟁을 전개하기도 하고, 국민대표회의에 참여하기도 한 안창호의 측근이던 그가 상해에서 사망하였다. 이들 애국지사의 장례는 임시정부와 교민단에서 주관하여 대체로 외국인묘지에 매장하였던 것 같다. 그리고 임시정부 요인들의 가족과 아이들이 찍은 사진도 있다. 언제, 어디서 찍은 사진인지 명확하지 않지만, 대체로 상해시기로 짐작되어서 수록하였다.

한인애국단 관련 사진을 따로 묶었다. 침체해 가던 독립운동에 기폭제 역할을 한 한인애국단에 관해서는 잘 알려져 있으므로 깊은 설명은 하지 않고자 한다. 우선 이봉창·윤봉길 의거를 중심으로 두 분들의 선서문을 실었다. 그리고 태극기 앞에서 선서문을 가슴에 달고 수류탄, 또는 수류탄과 권총을 든 이봉창·윤봉길 의사의 사진들이다. 그리고 이 의거를 보도한 신문기사들도 함께 실었다. 태극기 앞에 선 유상근과 최흥식, 한인애국단원과 김구, 그리고 그 활동을 기록한 『도왜실기』의 표지도 빼지 않았다.

3. 이동시기(1932-1940)

1932년 4월 29일 상해 홍구공원에서의 윤봉길 의거로 대한민국임시정부는 14년 상해시대를 마감하고 이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임시정부는 항주와 진강으로 이동하였다가, 1937년 중일전쟁의 발발로 전선이 확대되자 장사-광주-유주-기강으로 옮겨 다녔다. 1940년 5월 중국의 전시수도인 중경에 정착하기까지 임시정부는 8년에 가까운 이동시기를 거쳤던 것이다.

임시정부 요인들은 상해를 떠나 항주로 향하였지만, 김구는 상해와 항주의 중간지점인 가흥에 정착하였다. 1935년 7월 민족혁명당이 결성되면서 임시정부 해체론이 제기되자, 임시정부 옹호를 내세운 일부세력들이 1935년 11월 한국국민당을 창당하였다. 김구는 한국국민당이 창당될 때까지 임시정부의 직임을 맡지 않고 있었다. 이동시기의 임시정부와 관련된 사진들은 다른 시기에 비하여 적다. 정당활동과 관련하여 성명서나 기관지의 간행은 두드러지지만, 개인이나 가족, 단체사진은 많지 않다. 다만 가흥에서 임시정부 요인들이 찍은 사진은 여럿 발견된다. 아마도 1935년 11월 초 항주에 있던 임시정부 옹호세력이 가흥에 와 남호의 배 위에서 의정원 회의를 개최하고 국무위원을 보선하였다는 때에 찍은 사진이라고 생각된다. 따라서 이동시기 정부요인으로는 한국국민당이 주도한 시기의 국무위원들을 중심으로 정리하였다.

정부활동으로 언급할 수 있는 것은 내무장의 포고(1936. 8)와 임시정부국무위원의 포고문(1937. 8.20)이 있다. 『대한민국임시정부공보』도 1934년과 1936년에 발간된 것을 수록하였다. 이동시기에도 3·1절 기념대회는 개최하였는데, 19주년(1938년) 기념대회는 장사에서 임시정부의 주관으로 이루어졌다. 그에 비하여 20주년(1939년) 기념대회는 중경에 거주하는 한인들이 주도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임시정부는 이때 아직 기강에 도착하지 못하였을 때였다. 1938년 3월 10일 국내에서 안창호가 별세하였다. 임시정부에서는 3월 20일자로 공보 호외를 발행하여, 국무위원 전원의 명의로 추도사를 발표하였다. 국무위원 차리석은 『한국혁명영수 안창호선생사십년 혁명분투사략』을 집필하여 출간하였다. 임시정부가 중경에 정착하기 직전인 1940년 3월 13일, 독립운동의 대원로인 이동녕이 별세하였다. 임시정부 수립부터 20여 년 동안 그는 의정원 의장, 내무총장, 국무총리, 국무위원회 주석 등을 맡아 임시정부를 대표하며 이끌어왔다. 3월 17일 기강에서 그의 장례식을 마치고 찍은 사진에는 이동 중이던 임시정부의 어려운 모습이 드러나 있다.

이동시기 임시정부의 문서들을 몇 건 소개하였다. 이동시기 항주, 가흥, 남경, 기강에서 개최된 임시의정원 회의록들이다. 특히 1939년 10월 기강에서 개최된 제31회 회의록의 정무보고에는 ‘판공처 이전에 관한 건’이 포함되었는데, 진강에서 장사, 장사에서 광동, 광동에서 사천으로의 이전 내용을 밝히고 있다. 김구가 1935년 5월 19일자로 작성한 「임시의정원 제공에게 고함」은 대당조직, 즉 민족혁명당의 결성에 앞서 임시정부 해체론이 제기되는 것에 대하여 비판한 문건으로, 김구의 임시정부 복귀를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1936년도 세입세출 결산서, 군사위원회규정(1937. 7.15), 임시정부시정방침대강(1937), 임시정부정무보고(1937) 등은 이동시기 임시정부의 활동을 보여주는 문건이다.

「여러분 선생께」(1938.6.20)는 이른바 남목청사건으로 생사의 위기에 놓였던 김구가 퇴원한 뒤에 동지들에게 보낸 서한이다. 이 사건은 1938년 5월 7일 장사의 남목청에서 한국국민당·한국독립당·조선혁명당의 통합을 논의하는 회의장에 조선혁명당의 이운한이 돌입하여 권총을 발사하여 김구·현익철·유동열이 중상, 이청천이 경상을 입었다. 현익철은 입원 즉시 사망하였다. 김구는 이 편지에서 3당통합과 전민족의 단결을 강조하고 있었다. 1939년 5월 김구와 김원봉의 공동명의로 발표된 「동지동포 제군들의게 보내는 공개신」은 우파세력의 한국광복운동단체연합회와 좌파세력의 조선민족전선연맹으로 나뉜 한국독립운동 진영이 반일 민족통일전선 결성을 위하여 노력한 결과였다. 이는 1920년대부터 전개된 민족유일당 결성운동을 잇는 것이며, 중일전쟁 발발 이후 계속된 독립운동 진영 내 좌우합작 움직임을 반영한 것이었다. 이 공개통신에서 양대세력의 대표자인 김구와 김원봉은 기존의 모든 조직을 해체하고 통일된 단일당을 수립하자고 제안하였다. 1939년 8월 기강에서 광복진선과 민족전선에 속한 7개 정당·단체 대표대회가 개최되어 단일당 결성을 논의하였던 것도 그러한 움직임을 배경으로 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회의는 통일방안과 최고기구 문제를 두고 의견이 대립되어 결렬되고 말았다.

이동시기 임시정부는 1935년 민족혁명당이 결성되기 이전에는 한국독립당이, 이후 1940년 통합된 한국독립당이 결성되기 이전까지는 한국국민당이 주도하고 있었다. 한국독립당은 1930년 1월 결성되었는데, 이봉창의거 직후 당 명의로 발표한 선언문이 남아 있다. 선전활동에도 진력하였던 한국독립당은 기관지로 주간 『상해신문』을 발행하다가, 임시정부가 항주로 이동하면서 한국독립당 역시 항주로 이동하여 1934년 1월부터 『진광』을 간행하였다. 『진광』은 국한문판과 중문판의 두 종류가 발간되었다. 그리고 한국독립당 광동지부에서는 『한성』이라는 기관지를 발간한 바 있었다. 1932년 9월 1일자로 발표한 「토최린서」는 민족대표의 한 명이던 최린이 중추원 참의에 취임하여 일제의 주구로 전락하였음을 비난하여, 일제 식민통치의 실상을 알리며 항일민족의식을 고취시키고자 한 것이었다.

민족혁명당은 결성 전부터 임시정부 해체를 주장하였는데, 「해소선언」은 혁명단체의 통일을 이루기 위하여 대당으로 민족혁명당을 조직하기 위하여 조선혁명당·조선의열단·한국독립당·신한독립당 등이 해소한다는 선언이었다. 1935년 7월에 결성된 민족혁명당은 곧 한국독립당이 탈퇴하는 등의 움직임이 있었지만, 1936년부터 기관지로 『민족혁명』을 발행하고, 1937년에는 『앞길』이라는 주간지도 발간하였다. 한국국민당은 민족혁명당에 참여하지 않은 한국독립당 계열의 임시정부 옹호세력이 1935년 11월에 결성한 정당이었으며, 임시정부를 주도하였다. 1938년 9월 광동주재 인도의료위원회 임원들과 엄항섭 등 한국국민당 간부들이 함께 찍은 사진이 있는데, 한국국민당이 전개한 국제교류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 특히 임시정부와 한국국민당이 광주로 이동하던 시기였음이 주목된다. 1936년 3월부터 기관지로 『한민』을 발행하였고, 그해 7월에 결성된 한국국민당 청년단에서는 8월 『한청』을 창간하였다. 1937년 8월 우파세력은 한국광복운동단체연합회를, 같은 해 12월 좌파세력은 조선민족전선연맹을 결성하였다. 『한민』은 호외를 발행하여 한국광복운동단체연합회 선언을 실었고, 조선민족전선연맹은 1938년 4월 『조선민족전선』이라는 기관지를 발행하였다.

이동시기 군사활동으로는 조선의용대와 한국청년전지공작대를 들 수 있다. 1938년 10월 한구에서 조직된 조선의용대는 조선민족전선연맹 산하의 군사조직이었고, 1938년 말 유주에서 조직된 한국광복진선청년공작대는 한국광복운동단체연합회의 군사조직이었다. 후자는 임시정부 산하의 청년들이 중심이었는데, 상당수가 1939년 4월 유주를 떠나 10월 중경에서 조직된 한국청년전지공작대에 참여하였다. 조선의용대에서는 『조선의용대통신』(『조선의용대』로 개제)를, 한국청년전지공작대에서는 『한국청년』을 기관지로 발행한 바 있다.

이동시기의 해외활동은 미주가 중심일 수밖에 없다. 미주에는 대한인국민회와 동지회가 병립하고 있었는데, 동지회는 이승만을 지지하는 세력이었다. 이승만은 1933년 초 국제연맹 본부가 있는 스위스 제네바에서 임시정부 승인 등을 위한 외교활동을 전개하였다. 일본의 만주침략을 규탄하는 국제회의가 국제연맹에서 개최되었던 것이다. 그는 임시정부의 특명전권수석대표의 직함을 지니고 있었다. 미주에서는 어려운 임시정부의 재정을 지원하는 활동을 오래 맡았으며, 한국독립당의 지부도 설립되었다. 또 대한여자애국단과 같은 여성애국단체도 활동하였다. 샌프란시스코에서 발행되던 대한인국민회의 기관지 『신한민보』는 1930년대 후반 한인들이 많이 거주하는 로스앤젤레스로 옮겨 발행되었다. 하와이 동지회에서는 『태평양잡지』를 간행하다가 『태평양주보』로 개제하였다. 『국민보』 역시 하와이에서 간행되던 주간신문이었다.

가흥의 수륜사창은 김구가 윤봉길의거 뒤에 중국인 저보성의 도움을 받아 피난해 있던 곳이다. 가흥에 피신한 임시정부 요인과 가족들이 중국인들과 찍은 사진도 있고, 또 항주의 서호에서 찍은 사진도 남아 있다. 1935년 11월 상해의 인성학교는 일제의 압박을 피해 폐교를 결정하였는데, 그 기념사진도 남아 있다. 해방 뒤에 인성학교는 다시 문을 열었다. 가족사진으로 몇 장을 뽑았다. 김구가 모친 곽낙원, 아들들과 함께 하였고, 김의한과 정정화 가족, 양우조와 최선화의 사진이 있다. 김구 회갑을 맞아 한국국민당청년단이 드린 축하깃발도 보인다. 국무위원 송병조의 회갑을 맞아 진강에서 임시정부 요인들이 함게 한 모습도 보이고, 장사에서 3·1절 기념식을 마치고 아이들과 함께 한 사진도 있다. 김구 모친 곽낙원의 장례식은 1939년 4월 중경에서 있었다. 이동하고 있던 임시정부나 미주한인의 생활이라고 생로병사를 벗어날 수는 없었다.

4. 중경시기(1940-1945)

1940년 중경에 정착한 대한민국임시정부는 대일전선에 적극 참여하며, 좌우합작의 정부를 구성하고 광복의 준비를 해나가게 된다. 먼저 5월 한국국민당·한국독립당·조선혁명당의 통합으로 한국독립당이 창립되었으며, 한국독립당은 정부의 국군인 한국광복군의 조직을 준비하였다. 1940년 9월 한국광복군이 성립되었으며, 아울러 10월 정부수반을 최고통수권을 가진 주석으로 하는 헌법개정이 있었다. 1944년 4월에는 주석·부주석제로 개헌하는데, 좌우합작 정부를 구성한 결과였다.

중경시기 임시정부의 정부활동으로 두 차례의 개헌과 함께, 1941년 11월 ‘대한민국건국강령’의 공포를 지적할 수 있다. 건국강령은 삼균주의를 기반으로 한 건국방안으로, 정치·경제·교육의 균등과 독립·민주·균치를 내세우고 있었다. 1941년 12월 일제가 태평양전쟁을 일으키자, 임시정부에서는 즉각 ‘대일선전성명서’를 발표하여 대일항쟁을 확고히 밝혔다. 1945년 2월 독일에 대한 ‘대덕선전포고문’도 포고한 바 있었다. 『대한민국임시정부공보』 역시 계속 발간되어 임시정부의 활동을 밝히고 각종 법령을 공포하였다.

1942년 5월 한국광복군에 조선의용대가 편입되고, 8월 임시의정원 의원선거규정이 개정된 것은 좌우합작이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1942년 10월 25일 개최된 제34회 임시의정원 회의는 바로 좌우세력이 함께 한 다당제 의회의 모습을 알려준다. 1943년 3월 1일 한국독립선언 24주년 기념식에 참석한 중국정부의 요인들과 외국인들이 방명록이 남아 있다. 그해 5월 10일 중경에서는 한국각혁명단체연합으로 재중국자유한인대회가 개최되어, 한국의 완전독립을 결의하였다. 이 대회에서 연설하는 홍진과, 김규식 등 참석자들의 모습을 담은 사진이 남아 있다. 그 선언문도 수록하였다.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생산한 문서로 의정원 의원들의 의정원 소집요구서와, 각 부처의 공작보고서 또는 정무보고서를 예시하였다. 임시정부는 중경에서도 3곳을 옮겼는데, 마지막 청사가 연화지에 위치하였다. 초병이 서있는 연화지 청사의 정문 위에는 국문과 한문, 그리고 영문으로 대한민국임시정부를 표기하고 있었다.

중경시기 임시정부는 1944년 4월의 개헌으로 국무위원과 행정부서를 증원, 증설하였다. 주석에는 한국독립당의 김구가, 부주석에는 민족혁명당의 김규식이 선임되었다. 국무위원은 한국독립당 8명, 민족혁명당 4명, 조선민족해방동맹과 무정부주의자연맹 각 1명 등 14명이 선임되었고, 7개 행정부서에도 좌파계열의 인사들이 참여하였다. 임시정부 요인들의 인물사진은 이때와 이후의 국무위원과 행정부서장을 역임하는 인사들을 중심으로 하여, 가나다순으로 정리하였다. 송병조와 홍진은 중경시기 임시의정원 의장이었으므로 추가하였다. 그리고 이원순을 주미외교위원부 위원으로, 박영준을 재무부 이재과장으로 임명하는 임시정부의 임명장을 실었다.

『독립신문』 중문판이 중경에서 1943년 6월 1일자로 창간되었는데, 해방될 때까지 모두 7호가 발행되었다. 그리고 임시정부의 배지와, 임시정부의 문서에서 국새로 찍은 부분을 확대하였다. 3·1절 23주년기념으로 임시정부선전위원회가 펴낸 50쪽 분량의 중문 선전책자의 표지를 수록하였는데, 독립선언서와 기념사, 임시정부 약사, 건국강령 등이 포함되어 있는 서적이다. 외무부장 명의로 발행된 이충모의 여권(호조)이 남아 있다. 내무부 소속의 경위대에 관한 사진도 수록하였다.

임시정부는 중국과 미국을 상대로 승인을 받기 위한 지속적인 노력을 하였다. 그와 관련된 문서가 적지 않은데, 중국정부에서 이에 대한 논의가 있었음을 보여주는 문서와, 임시정부에서 미국 대통령에게 보낸 문서를 자료집에 포함시켰다.

중경시기는 정당활동이 활발하였다. 특히 다당제의 의정원과 정부가 구성되면서 각 정당들은 의정원에서 정책대결을 벌이는 등 정당정치가 전개되었던 것이다. 한국독립당은 1940년 5월 ‘창립선언’에서 정치·경제·교육의 균등을 기초로 한 신민주국을 건설하겠다는 것을 밝히고 있었다. 한국독립당의 제1기 중앙집행위원들의 기념사진, 당헌과 당규를 함께 모은 소책자, 차리석이 작성한 『한국독립당 당의와 이론체계 초안』 등을 소개하였다. 한국국민당 선전부에서 1940년 3월 창간한 『한민』 중문판은 제2호(1940. 4)부터 한민월간사로 그 발행처를 바꾸었다. 1940년 5월 한국독립당의 창립과 관련되었는데, 이후 실제로는 한국독립당 선전부에서 『한민』을 간행하였다. 한국독립당 주중경대표판사처가 한민월간사였고, 국문으로 간행하던 『한민』은 한국독립당 선전부 발행으로 표기되었기 때문이다. 중문의 이 잡지는 현재 1941년 6월에 발간된 제5호까지 남아 있다. 이후 1944년 3월부터 한국독립당 선전부에서는 『독립평론』을 국한문으로 발행하였다. 민족혁명당에서는 『앞길』을 계속 간행하면서, 『우리통신』도 간행하였다. 조선민족해방동맹에서는 『신조선』을 기관지로 발행하고 있었다.

한국광복군의 설립계획은 한국독립당 명의로 1940년 5월 중국 군사위원회 장개석 위원장에게 제출되어, 5월 하순 비준되었다. 한국광복군 설립은 임시정부가 주관하여, 1940년 9월 17일 중경의 가릉빈관에서 한국광복군총사령부성립전례식을 거행하였다. 성립전례식에 관련된 사진은 여러 장이 남아있는데, 김구·조소앙·유치·이청천 등이 관련 식사를 하는 모습, 한중요인들의 기념사진 등이 그것이다. 특히 이 전례식에 참석한 방명첩에 보이는 중국국민당 인사들의 면면이 눈길을 끈다. 한국독립당 선전부에서 발행한 『한민』 제23호는 특집으로 전례식을 보도하였으며, 미국에서도 기념식을 거행한 바 있었다. 총사령관에는 이청천이, 참모장에는 이범석이 임명되었다. 그러나 한국광복군을 중국 군사위원회의 통제하에 두려는 중국의 이른바 ‘9개준승’을 수용하지 않을 수 없어, 한국광복군의 중요보직에 중국군이 보임되기도 하였다. 1944년 9월 ‘9개준승’이 취소된 뒤, 1945년 4월 ‘원조한국광복군판법’이 체결되었고, 5월에 김홍일이 참모장에 임명되기에 이르렀다.

한국광복군이 성립된 뒤, 1940년 11월 총사령부는 서안으로 이전하였는데, 이미 임시정부에서는 광복군 창설 이전인 1939년 11월 군사특파단을 서안에 파견하고 있었다. 병력확보가 시급한 과제였던 한국광복군은 서안을 중심으로 적극적인 모병활동을 전개하였다. 서안의 한국광복군총사령부 관계자들의 단체사진이 보인다. 또한 한국광복군은 창설 초기 병력확보를 위하여 군무부 산하에 4개의 징모분처를 설치하였다. 제3 징모분처는 강서성 상요지역에서 모병활동을 하였는데, 1941년 3월 파견요원들을 환송하였음을 알 수 있다. 한국광복군 총사령관 이청천과 중국인 부관 왕계현, 제3지대장 김학규가 함께 찍은 사진과 1943년 한국광복군 성립 3주년기념식의 모습을 보여주는 사진도 보인다. 현재 한국광복군의 배지와 모자, 완장 등이 복제되어 있다. 그리고 한국광복군총사령부 정훈처에서는 『광복』을 발간하였으며, 광복군의 훈련교재들도 남아 있다.

서안에는 한국청년전지공작대가 활동하고 있었다. 1940년 11월 그 창립 1주년을 기념한 바 있던 한국청년전지공작대는 1941년 1월 1일 한국광복군 제5지대로 편입되었다. 무정부주의 계열의 청년들이 주도하던 전지공작대는 성공적인 초모활동으로 대원들을 확장하였고, 제34 집단군 중앙군 전시간부훈련단 내에 한국청년훈련반을 특설하여 초모된 대원들의 군사훈련을 실시하고 있었다.

1942년 5월 조선의용대가 한국광복군 제1지대로 개편되었고, 조선의용대 총대장 김원봉은 한국광복군 부사령 겸 제1지대장으로 임명되었다. 조선의용대에서는 『조선의용대』를 발간하였으며, 1942년 7월 한국광복군으로 개편을 알리는 ‘조선의용대개편선언’을 발표하였다. 따라서 한국광복군 제1지대는 조선의용대가 개편된 것이었고, 지대본부는 중경에, 그리고 지대는 호북성 노하구와 절강성 금화 등에서 활동하였다. 기존의 광복군 지대들은 제2지대로 통합·편성되어 서안에 위치하였다. 총사령부 참모장이던 이범석이 지대장을 맡았다. 제3지대는 1945년 6월에 안휘성 부양에서 성립되는데, 징모 제6분처가 발전되어 성립된 지대로 김학규가 지대장을 맡았다. 징모 제6분처는 초모공작과 일본군에서 탈출한 한적사병의 증가로 대원의 수가 늘었던 것이다. 특히 그들은 임천에 있던 중국군 중앙육군군관학교 제10분교에 한국광복군훈련반을 설치하여 훈련을 받았다. 한국광복군의 훈련광경을 보여주는 사진자료들이 적지 않다. 특히 광복군을 홍보하기 위하여 찍은 것도 없지 않았던 것 같다. 훈련모습의 일부가 미국에 보내졌기 때문이다.

한국광복군이 ‘9개준승’에 따라 중국 군사위원회의 지휘를 받게 된 뒤, 임시정부에서는 이 조치의 취소를 위하여 여러 차례에 걸쳐 중국정부와 교섭하였다. 임시의정원에서도 이 문제를 여러 차례 논의하였다. 그와 관련된 문건들이 남아 있다. 그러한 교섭이 진행 중이던 시기에 영국군이 인도·버마전선에 광복군의 파견을 요청해 와, 인면전구공작대가 파견되기에 이르렀다. 인면전구공작대 파견에 관한 문건과, 공작대원들이 영국군과 함께 한 단체사진도 볼 수 있다. 이후 미국 OSS와 광복군의 공동군사작전이 전개되었다. 광복군을 국내에 파견하고자 한 이 계획은 ‘독수리작전’이라고 불렸는데, 제2지대가 참여하였으며, 그에 관련된 문건은 매우 많이 남아 있다. 제3지대 역시 OSS훈련을 받았다. OSS훈련은 서안에서 진행되었는데, 1945년 8월 7일 임시정부 주석 김구와 OSS 총책임자 도노반 소장이 서안에서 회담까지 마쳤으나, 일제의 무조건 항복으로 실행되지 못하였다. 8월 18일 이범석 등 국내정진대가 서안을 출발하여 여의도비행장에 도착하였으나, 일제의 협상 불응으로 서안으로 돌아왔다.

중경시기 해외·외교활동은 미국에서 재미한족연합위원회와 주미외교위원부를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미주에서는 1941년 4월 하와이에서 해외한족대회가 개최되어 재미한인의 단결과 임시정부 지지를 내세운 재미한족연합위원회가 조직되고, 그 안에 외교위원부를 두어 이승만을 책임자로 삼았다. 재미한족연합위원회에서는 1942년 재미한인국방경위대를 결성하고, 8월 29일 국치기념일에 로스앤젤레스 시청에 태극기 게양식을 거행해 한국의 독립의지를 만방에 알리는 등 여러 활동을 전개하였고, 임시정부에 지원금을 보냈다. 그러나 주미외교위원부 개조문제로 이승만과 갈등을 보인 재미한족연합위원회는 임시정부가 이승만을 지지하자, 임시정부 반대로 돌아서기까지 하였다.

주미외교위원부 위원장 이승만과 그 임명장, 『주미외교위원부통신』 등 주미외교위원부 관련 자료와, 해외한족연합위원회 관련 자료들을 찾을 수 있다. 1942년 3월 주미외교위원부 주최로 워싱턴에서 한인자유대회가 열렸다. 또 이승만의 주도로 대한민국임시정부 승인후원회, 주미위원부 협찬회, 국제연합 창립총회 한국대표단 등이 만들어졌다. 재미한인의 노력으로 미국정부에서 1944년 11월 태극기 우표를 발행하기도 하였다. 임시정부에서는 중국이나 미국 이외에도 소련과 프랑스 등의 국가와도 외교관계를 유지하기 위한 노력을 지속적으로 보이고 있었다.

중경시기 사진자료가 찾아지는 임시정부의 외곽단체로는 한국혁명여성동맹과 대한애국부인회 정도이다. 1942년 10월에 창립된 중한문화협회는 중국과 한국의 우호와 유대의 증진을 위하여 한중 인사들이 조직한 것이었다. 이사장은 손과, 부이사장은 김규식이 맡았다. 자료집에 표지를 수록한 『중한문화』는 1945년 8월 1일자로 중한문화협회 성도분회에서 발간한 것이었다. 해방 이후 같은 제호로 상해에서 유수인이 주관한 잡지도 있으나, 해방 이전 중한문화협회에서 간행한 것은 이것이 유일한 것 같다. 임시정부가 중국에 위치하였기 때문에, 임시정부를 지원한 중국인들이 적지 않았다. 특히 중국정부가 임시정부를 지원하기 시작한 것은 윤봉길의거 이후이고, 중일전쟁 발발 이후 본격적으로 지원하였다. 그중 몇 인사를 든다면 군사위원장 장개석과, 손문의 아들로 입법원장이던 손과, 국민당 조직부장 진과부와 주가화, 국민당 비서장 오철성 등을 꼽을 수 있다. 그리고 천주교 우빈 주교도 임시정부를 지원하였다.

중경시기의 생활을 알 수 있는 사진을 몇 장 수록하였다. 임시정부 관여자들의 가족을 보여주는 것으로 3·1유치원의 추계개학 사진이 있다. 차리석과 조완구의 회갑과, 송병조와 차리석의 장례식이 있었다. 특히 차리석은 해방 직후에 중경에서 별세하여 고대하던 환국을 하지 못하였다. 차리석과 이동녕의 유해는 1948년 9월 국내에 옮겨져 효창원에 모셔진다. 임시정부 주석 김구가 1941년 3월 16일 미주의 안창호 미망인인 안혜련에게 보낸 태극기가 남아 있다. 벨기에 출신의 메우사 신부에게 전달을 부탁한 이 태극기는 1942년 3월에 이혜련에게 전달되었다. 이러한 내용을 『신한민보』는 1942년 3월 19일자에 「고 안도산 부인께 드린 태극기」라는 기사에서 소개하였다. 이때의 개인기록으로 양우조·최선화 부부가 딸 제시의 성장을 적은 육아일기, 오사야항 임시정부 청사에서 기록한 『백범일지』 하권, 그리고 조소앙의 비망록이 찾아진다.

1945년 8월 15일 해방이 되었다. 대한민국임시정부가 27년 중국의 각지를 떠돌며 기다리던 해방이었다. 임시정부에서는 9월 3일자로 「국내외 동포에게 고함」을 발표하고, ‘임시정부당면정책’을 밝혔다. 임시정부의 환국문제는 개인자격으로 귀국하라는 미군정청과 시일을 끌다가, 결국 11월 개인자격으로 환국하지 않을 수 없었다. 11월 3일 환국을 기념한 사진을 연화지 청사에서 찍었고, 환국을 기념하여 서명록도 만들었다. 11월 4일 중국국민당이 임시정부 송별연을 마련하였다. 장개석·송미령 부부와 임시정부 요인들이 참석한 연회가 있었던 것이다. 11월 5일 임시정부 요인들은 상해에 도착하여 동포들의 환영을 받았다. 그러나 고국을 밟게 되는 것은 11월 23일이었다. 12월 19일 오전 11시 추위에도 불구하고 서울운동장에서 임시정부의 개선을 축하하는 환국봉영회가 15만 군중이 운집하여 개최되었다. 좌도 우도 없이 모두 27년 동안 중국에서 험난한 독립투쟁을 해 온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개선을 환영하였던 것이다.

최 기 영(서강대학교 사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