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제

해 제

Ⅰ. 국민대표회의 발기와 준비과정

국민대표회의는 상해에서 1923년 1월부터 6월에 이르는 장기간에 걸쳐 국내외 각 지역과 독립운동단체 대표 125명이 참여한 가운데 개최된 독립운동역사상 최대의 유일무이한 회의였다. 그 이전은 물론 독립운동과정이나 1945년 8월 16일 이후의 해방공간에서도 그리고 남북에 분단정권들이 들어선 이후에는 더욱이 전민족차원에서 한반도와 해외 각지의 민족대표들이 모였던 적은 없다. 국민대표회의가 파열로 귀결되었지만 그 역사적 의미는 당시의 독립운동과정에서는 물론 민족사적 입장에서도 끊임없이 새롭게 재평가될 필요가 있다. 여기에서는 국민대표회의가 개최된 배경, 개최준비 과정과 대표회의 진행과 결과를 연대기적으로 정리하고자 한다.

1920년 여름 이후 일본이 3 · 1운동 이후 고조된 항일독립운동을 잠재우기 위한 행동에 나섰다. 특히 1919년 가을 이후 소규모 규모로 국내진격작전을 되풀이하며 한중국경지대를 위협하고 있던 서북간도의 무장독립군에 대한 공격에 나섰다. 1920년 6월의 봉오동전투, 10월의 청산리전투에서의 승전에도 불구하고 무기고갈과 근거지 상실로 인하여 서북간도의 항일독립군들은 근거지를 떠나 러시아연해주지역으로 이동할 수밖에 없었다. 1920년 가을 일본군이 자행한 경신참변 당시에 서북간도의 한인동포들은 속수무책으로 일본의 만행을 당할 수밖에 없었다. ‘독립운동의 실패’로 평가되는 이 사태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대책을 세우지 못한 상해의 임시정부에 비판이 임정내부에서는 물론 상해, 북경, 서북간도, 러시아 연해주 등의 독립운동세력과 한인동포들사이에 임시정부에 대한 불만과 비판의 목소리가 높아 지는 등 임정개혁의 여론이 비등하였다.

북경에서는 1920년 9월 박용만, 신채호, 신숙 등 15명이 북경에서 군사통일촉성회를 조직하고 남북만주로 대표를 파견하여 군사통일회의 개최를 추진하였다. 이는 1920년 봄 이후 서북간도 일대에서 독립군에 대한 공격을 시작한 일본군에 맞서 항일무장단체들을 통일하는데 그 목적이 있었다. 군사통일촉성회는 이후 북경을 중심으로 반임정세력의 결집이 조직적으로 시작되었다는데 그 의미가 있다.

수립 이래 내외의 고조된 비판에 직면하여 1920년말 최대의 정치적 위기에 처하게 된 임시 대통령 이승만이 미국으로부터 상해로 오게 되었다. 1921년 초 대통령이 최초로 참석한 수차례의 국무원회의에서 국무총리 이동휘가 이승만의 대미위임통치청원에 대한 해명과 근본적인 임정개혁을 요구하였으나 안창호와 기호출신 총장들의 반대로 무산되었고 1921년 1월 24일 국무총리직을 사임하였다. 같은 날 국무원 비서장 오영선, 법무차장 안병찬이 동시에 사임하게 되면서 임정은 통합정부로서의 위상이 급격히 약화되었다.

얼마후인 1921년 2월 국민대표회 소집이 처음으로 제창 · 발기되었다. 북경과 상해에서 임시정부의 존재에 대한 문제제기가 본격화되고 있는 상황에서 박은식, 원세훈, 최동오, 안병찬, 유례균, 왕삼덕, 김창숙 등 15명이 「我同胞에게 告함」을 반포하여 ‘국민대표회’의 소집을 제창하였다. 이들은 국민대표회의 목적이 “전국민의 의사에 의하여 통일적인 穩固한 政局을 기도하고” “群策과 群力을 複合하여 독립운동의 最良한 방침을 수립”하는데 있다고 천명하였다.

이들은 “北系方面의 人士는 대국의 분열을 통탄하여 통일을 조직하는 단체를 출현”시키고 “상해일대의 인사는 此를 고려하여 개혁의 議 를 唱導하고 있다”고 하였는데, 이들의 국민대표회 소집 제창은 당시 북경과 상해에서 일어나고 있던 임정에 대한 해산 또는 개혁요구의 움직임과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말해준다. 이들은 국민을 대표하여 정부를 감독하는 기관인 임시의정원이 이를 수습할 능력이 없다고 결론짓고 민의에 의해서만이 “근본적 대개혁으로써 통일의 再造를 계획하고 정국의 完組를 모모하여 독립운동의 신국면을 타개”할 수 있다고 선언하였다.

북경에서는 군사통일촉진회가 주도한 군사통일회의가 1921년 4월 17일부터 6월 22일까지 국내외 10개 단체대표 20명이 참가한 가운데 개최되었다. 이 회의에서 대미위임통치 청원자를 성토하기로 결의하고, 상해의 임시정부와 임시의정원을 부인하고 1919년 4월 23일 국내 국민대회에서 조직 · 발표된 ‘대조선공화국임시정부의 계통’을 계승하여 새롭게 정부를 조직하기로 하였다. 이를 위하여 군사통일회의는 조속한 시일내에 국민대표회를 소집할 것을 결의하였다. 이 결의에 입각하여 군사통일회의가 1921년 4월 27일자로 임시의정원에 「통첩」을 전달하였고, 5월 같은 내용이 담긴 「선언서」와 대미위임통치청원자인 임시대통령 이승만과 이를 방치한 전대한국민회중앙총회장 안창호를 규탄하는 「聲討文」을 내외에 공포하였다. 북경의 유학생회 역시 같은 취지의 「聲討文」를 발표하였다.

4월에 들어와 임시정부의 주요각원들인 유동열(참모총장겸 총사령관, 4월 15일), 남형우(교통총장, 4월 25일), 김규식(학무총장, 4월 29일), 안창호(노동국총판, 5월 12일)가 연이어 사임하게 되면서 임정은 붕괴위기에 직면했다. 또한 5월 6일 무장독립군의 유력한 근거지의 하나인 서간도 額穆縣에서는 서로군정서, 한족회의 주요간부들인 여준, 이탁, 김동삼, 곽문, 이진산 등이 임시정부개조의 필요성과 위임통치청원자(이승만)의 퇴거를 요구하였다.

국민대표회 소집운동이 대중적으로 확산되기 시작한 계기는 상해에서 개최된 두 차례의 연설회였다. 5월 12일 상해 재류 동포 400여명이 참가한 가운데 개최된 첫 연설회에서 여운형과 안창호가 연이어 나서서 국민대표회 소집의 필요성을 제창하였다. 특히 안창호는 독립운동의 “통일을 이루기 위하여 중앙에 集力함과 공론을 세우는 두 가지 방법을 실행키 위하야” “각 지방 각 단체의 대표자들이 한 번 크게 모이게 함이 가장 필요”하다고 주장하였다. 안창호는 특히 연설회를 마치며 국민대표회 찬성 여부를 묻고 절대다수의 동의를 얻어냈다.

2번째로 개최된 연설회에서 안창호의 연설이 끝난 후 참석자 300여명의 동의를 얻어 國民代表會期成會 조직을 촉진하기 위한 조직위원 20명을 선출하였다. 여기에는 여운형, 김규식, 안창호, 남형우, 윤현진, 김만겸, 원세훈 등 상해지역의 주요한 독립운동가들이 포함되었다. 마침내 1921년 6월 6일 상해 국민대표회 기성회 총회가 열려 「國民代表會期成會 簡章」을 의결하고 전권위원 30명은 기존의 조직위원 20명에 박은식 등 10명을 새로이 추가로 선출하였다.

상해측 기성회는 북경측과 긴밀히 연락하였다. 북경에 가있던 상해기성회의 김규식과 북경 군사통일회의의 박용만은 안창호를 북경으로 초청하여 국민대표회 소집문제를 협의하였다. 그리하여 상해의 국민대표회기성회에 이어 이후 북경, 천진, 하와이, 남경, 미주 다뉴바 등지에서도 국민대표회 촉성회 또는 국민대표회 기성회가 차례로 조직되었다. 특히 북경에서는 교민대회를 열고 국민대표회주비촉성회를 조직하고 15명의 위원을 선출하였으며, 군사통일회의에서도 이에 찬성의사를 표시하였다. 天津에서도 교민들이 공동회의를 열고 국민대표회 촉성을 위한 위원 5인을 선출하였다.

1921년 8월 상해, 북경, 천진의 대표들이 긴밀히 협의하여 國民代表會籌備會를 조직하였는데, 상해 기성회위원 30명, 북경교민회 15명, 북경군사통일회 5명, 천진교민회 5명 등 총 55명으로 구성하였고 남경교민회에서도 위원을 선출하여 주비회에 참여하기로 하였다. 주비회는 집무위원을 선출하여 회의를 열고 회의지점, 회의기일, 대표자격 등에 관한 진행방침을 결정하였다. 대회를 상해에서 11월 상순에 개최하기로 결정하고, 대표들은 지역대표와 단체대표로 구분되었다. 그리하여 국내는 13도, 각계(농업계, 공업계, 상업계, 언론계, 청년계, 학계), 종교(천도교, 기독교, 불교, 천주교, 대종교, 유림)로 나누고, 외지는 중령, 노령, 미국과 멕시코, 특별구역으로 북경, 천진, 상해, 남경, 일본으로 하였고, 단체대표는 7월 1일 이전에 성립된 단체로 독립운동을 목적으로 한 단체에 한하였다.

그러나 국민대표회주비회는 계획대로 활동을 추진할 수 없었다. 대회 개최예정일인 11월에 워싱톤회의가 개최될 예정이었고, 이에 대항하여 소비에트러시아에서는 원동민족혁명단체대표회(‘극동인민대회’)가 준비되고 있었다. 임시정부가 워싱톤회의에 대표단을 파견하고자 했고, 국민대표회주비회에 참여하고 있었던 김규식, 여운형, 나용균 등이 원동민족혁명단체대표회에 참여하기 위하여 러시아로 떠났다. 임시정부에 대한 기본입장이 반영된 民國年號와 紀元年號 논쟁 역시 주비회의 활동을 지연시킨 요인이었다. 국민대표회 소집에 필요한 자금 문제 역시 대회 개최를 어렵게 하였다. 당초 천도교측의 자금을 기대하기도 했으나 실현되지 않았다.

결국 임정특사로 모스크바에 파견되었던 한형권이 소비에트정부로부터 20만루블 자금을 소지하고 1921년 11월 21일 상해에 도착하게 되면서 국민대표회주비회 활동이 활성화되었다. 그리고 워싱톤회의에 이어 원동민족혁명단체대표회이 종결되면서 국민대표회 소집운동이 재개될 수 있는 여건이 조성되었다. 특히 모스크바 대회에 참가한 대표들은 국민대표회의 개최를 결의하고, 국민대표회 개최자금 지원 등 소비에트당국 및 코민테른과 협상하기 위한 ‘조선대표단’ 외교대표단(사절단)[단장 김규식, 서기 한명세, 위원 김시현 · 최창식]을 구성하였다. 1922년 3월경 모스크바 대회 참여 대표들이 상해로 대거 귀환하게 되면서 국민대표회 개최운동이 다시 활기를 띠었다.

이와 동시에 상해에서는 이들 조선대표단과 기맥을 통하고 있던 국민의회계열의 원세훈과 윤해가 『獨立新聞』 1922년 3월 1일자 기고문을 통해 국민대표회 개최의 필요성을 주장하고 나섰다. 안창호 역시 1922년 4월 6일에 개최된 연설회에서 국민의 誠力과 物力을 중앙에 집중할 필요를 제기하고 집중을 위한 중앙기관의 조직을 위해 국민대표회를 소집하는 것임을 강조하였다.

한편 4월 16일 임시의정원에서는 4월 3일에 제출되었으나 며칠째 논란중에 있던, 국민대표회의 조속한 개최를 찬성하자는 천세헌 등 102명이 제출한 인민청원안이 통과되었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오랫동안 활동을 중단하고 있던 상해기성회가 1922년 4월 22일 총회를 개최하고 경과보고를 한 후 결원된 위원들을 보강하였다.

한형권의 자금 덕분으로 활동을 재개한 국민대표회주비회는 상해에서 국민대표회 소집에 관한 일체 사항을 준비하는 것을 목적으로 규정한 국민대표회주비위원회 장정을 정하고 새로이 국민대표회주비위원회를 구성하였다. 이 주비위원회는 총 12명의 위원을 두었는데 상해기성회(7명)의 남형우, 원세훈, 송병조, 김철, 서병호, 나용균, 이탁, 군사통일회의(3명)의 강구우, 남공선, 신숙, 천진기성회(1명)의 김위택, 동녕현 기성회(1명)의 최대갑으로 구성하였다. 이들 주비위원회는 1922년 5월 10일 「國民代表會籌備委員會 宣言(書)」을 발표하였다.

주비위원회의 이 「선언(서)」은 “시세의 추향과 민중의 요구에 응하여 과거의 모든 분규 착잡한 문제를 해결하고 미래의 완전 확실한 방침을 수립하여 우리의 독립운동이 다시 통일적, 조직적으로 진행되게 할 양대 안건 하에서 국민대표회 소집사항을 주비할 책임을 부담하고 성립되었다”고 그 활동목표를 제시하였다. 주비위원회 선언서는 기원연호와 민국연호를 병기하였는데, 임시정부에 대한 대립된 두 입장이 타협된 것이다.

주비위원회는 1921년 8월에 결정한 대표선정에 관한 사항을 다시 논의하여 이를 수정하여 『獨立新聞』 1922년 6월 3일자에 발표하였다. 대표를 선거할 구역, 단체. 인원수를 재조정하고, 대표는 지방과 단체로 나누었다. 지방은 본국 13도(각2명), 중령 10개지역(각1명), 노령 5개지역(각1명), 미주 · 멕시코 3개지역(각1명), 특별구역으로 북경 · 천진, 상해남경, 일본 각 1명을 배정하였다. 단체는 보통단체와 특별단체로 나누어 보통단체는 직접독립운동을 목적으로 한 단체, 종교단체, 노동단체, 교육단체, 청년단체로 회원 200명 이상은 1명, 1만명 이상 은 2명으로 하였다. 특별단체의 경우 무장단체는 50명 이상은 1명, 500명이상은 2명으로 하였다. 대회 소환의 지점과 개회일자는 별도 통지할 예정이었다. 대표들은 대표회에서 공인할만한 확실한 신임장을 휴대해야 하고, 현하 시국의 정돈과 장래방침의 수립에 관한 의안제출, 해당 지방에 대한 상황보고를 준비하도록 했다. 이후 주비위원회는 러시아, 국내, 일본, 만주 등지로 대회참가 대표들을 초치하기 위한 13명의 특파원들을 파견하였다.

당초 1922년 9월 1일에 개최할 예정이었지만 다시 10월 15일로 연기되었다. 1922년 8월 국민대표회주비위원회는 위원장 남형우 명의로 대표회에 관한 「注意書」를 발표하고 이를 각지에 배부하였다. 주비위원회는 교통과 통신의 불편으로 진행이 지체되고 있으나 10월 15일에는 대회를 개최할 예정임을 밝히고 그에 따른 주의사항을 통보하였다.

1922년 9월 상순 이래 각지에서 대표들이 상해로 집결하기 시작하였으나 대표들이 충분히 모이지 않아 당초 예정했던 10월 15일에는 개최되지 못하였고 12월 20일로 다시 연기되었다. 개회일을 또 다시 연기한 것은 교통의 불편 때문이었다. 대회가 개최되지 못한 또 다른 원인은 1922년 10월말 베르흐네우진스크에서 개최된 고려공산당 연합대회였다. 당시 이 대회에는 128명의 대표가 참여하였고, 특히 상해파 고려공산당의 경우 국내대표들은 국민대표회의에 참석대표 자격을 갖고 있어 이들의 상해 도착을 기다려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이러한 사정으로 12월 하순에도 대표들이 다 오지 못하여 당초 예정한 12월 20일에 개최되지 못하여 또 한 차례 연기하였고 전체 대표들이 올 때까지는 예비회의를 개최하기로 하였다. 12월 19일에는 주비회위원들이 도착한 대표들을 大東旅舍로 초청하여 만찬을 가졌으며, 12월 22일에는 주비회위원들과 54명의 대표들이 간담회를 가졌다. 12월 하순에 이르러 60명에 가까운 대표들이 도착하여 12월 23일부터 28일까지 수차례의 예비회의를 가졌다. 특히 12월 27일 삼일당에서 개최한 예비회의에서는 대표들이 중론을 모아 1월 3일에 정식회의를 개최하기로 결정하였다.

Ⅱ.국민대표회의의 진행과 결말

1. 국민대표회의 개막과 정식임원 선출

1923년 1월 3일 마침내 역사적인 국민대표회의가 정식으로 개최되었다. 1923년 1월 3일부터 1월 29일 사이에 본격적인 의사를 진행할 본회의를 준비하기 위한 임시회의가 15차례 개최되었다. 1923년 1월 3일(제1차회의) 62명의 대표들이 참가한 가운데 주비위원장 남형우가 대회가 성립되었다는 취지를 선포하였다. 대표들만으로 정식개회를 하고 임시주석을 선임하고 정식개회한 후 대표자격을 심사하고 정식임원을 선정한 후에 성대한 개회식을 갖고 본회의에 들어가기로 결정하였다.

임시의장으로 안창호가 선출되었고, 안창호는 서기로 유선장과 배천택을 지명하였다. 임시의장 안창호가 “지금 이 시간에 조선민족의 대표회가 열립니다”라고 선포하고 일동이 일어나 “국민대표회 만세”를 삼창함으로써 국민대표회가 정식으로 개시되었다. 이날 자격심사위원 5명(오창환, 유선장, 허동규, 강구우, 김동삼)과 회의규정기초위원 5명(윤해, 신숙, 장건상, 오창환, 박건병)을 선출하였다.

자격심사와 회의규정기초를 위해 5일을 휴회한 후인 1월 9일에 제2일차 회의가 개최되었다. 회의록에 기원연호가 사용된데 대하여, 주비위원회에서 紀元과 民國 두 年號를 병기한 전례를 따르자는 주장이 제기되어 논란이 되었으나 연호문제를 정식일정에 포함할 것인가 여부는 정식선출될 간부에게 일임하기로 하였다.

보다 큰 논란은 자격심사 보고에서 시작되었다. 위원인 오창환이 준비한 임시심사규정에 따라 68명의 심사결과를 밝혔는데, 대표자격심사규정을 통과시킨 후 59명은 자격이 인정되었고, 9명은 보류되었다. 수속상 흠결과 기타 의문점이 있는 의결대상 9명에 포함된 안창호에 대하여 박건병과 강구우는 미주국민회대표로 위임통치청원에 관련혐의가 있다며 이의를 제기하여 자격승인이 보류되었다. 안창호가 1월 10일 임시의장 사면과 퇴석통고서를 제출하여 안창호의 자격문제를 둘러싸고 토론이 진행되었고, 11일에 대표자격이 인정되고 안창호의 임시의장사면서와 퇴석통고서도 반려되었다.

안창호가 1월 16일(제7차회의)에 다시 출석하여 임시의장에 복귀하였다. 1월 17일에는 회의규정안 기초위원인 윤해가 1월 11일에 제출한 회의규정안에 대한 축조토론을 계속한 후 전체 규정안을 통과시켰다.

1월 18일(제9차회의)에 회의규정에 따라 의장에 김동삼, 부의장에 윤해와 안창호가 선출되었고, 1월 19일(제10차회의)에 비서장에 배천택, 비서에 김우희, 오창환, 박완을 선출하였다. 1월 22일(제12차회의)에서는 정식으로 대표자격 심사위원 5명(이청천, 정신, 정광호, 김갑, 박종근)을 선출하고 순국제현 추도회를 본회의 정식개회 1일전에 거행하기로 하였다. 회의에서는 특히 3인까지 방청이 허락된 『독립신문』 사원이 작성한 회의기사를 비서과 기록과 대조한 후 『獨立新聞』에 게재하기로 하였고, 그 외 대표 5인 이상의 보증을 받은 사람에 한하여 방청을 허가하는 안을 통과하였다(1인은 3인까지만 보증).

1월 23일(제13차회의)에서는 의정기초위원 5인(신숙, 김철, 이진산, 원세훈, 유선장)을 선거하였다. 이날 이후 3일간은 개막식 준비와 순국제현의 추도회로 휴회하였다.

1월 29일(제15차회의) 그동안 고려공산당연합문제와 관련하여 별도의 대표로 인정할 것인가 여부로 논란이 되었던 상해파 고려공산당 대표로 파견된 현정건, 왕삼덕은 상해파 고려공산당이 독립한 기관임을 확증하여 대표로 인정되었다. 議程起草委員의 보고를 듣고 토의에 부쳤다.

1월 30일에는 국민대표회의 주최로 약 90명의 대표들과 일반동포들이 참여한 가운데 순국제현의 추도회가 삼일당에서 개최되었다. 의장 김동삼의 식사에 이어 신숙의 추도문 낭독, 김순애, 정학수의 추도가 병창에 이어 남형우, 윤해, 손정도, 박응칠 등이 추도사를 하였다.

2. 국민대표회의의 정식 개막과 정식회의 개시

정식임원 선출, 자격심사규정, 회의규정, 의정안 등이 확정되자 마침내 1월 31일 오후 2시부터 공동조계 慕爾堂에서 대표 88명이 참석한 가운데 정식의 개막식이 거행되었는데 이 날 회의에는 일반동포에게 참관이 허락되었다. 국민대표회 주비위원장 남형우가 국민대표회의의 소집 동기와 취지를 말하고 주비 후 2년 만에 개최된 사실과 향후 회의에 대한 희망을 피력하였다. 의장 김동삼의 주재로 국기에 대한 경례와 부의장 윤해의 독립선언서 낭독, 3 · 1독립가 합창, 각지로부터의 축전 낭독이 있었다. 의장 김동삼의 개막사에 이어 신숙, 강석훈, 안창호, 김마리아 등의 연설이 끝난 후 기념촬영을 하고 만세 삼창을 하고 폐회하였다. 저녁에는 오후 7시부터 상해 교민단장 도인권이 발기한 대표자들을 위한 환영회가 삼일예배당에서 개최되었다.

2월 2일 회의(제16차회의)부터 시작된 회의는 공동조계 침례당에서 개최되었다. 임시의정원 의원 7명이 대표로 참가하기 시작하였다. 1월 29일에 보고된 의정기초위원의 보고를 듣고 토론후 전부 통과시켰다. 통과된 의정은 다음과 같다.

1. 선언 및 선언

2. 보고(서면으로)(ㄱ.국민대표회주비회 경과사정보고, ㄴ.각 지방 및 단체의 사정보고)

3. 시국문제  4. 독립운동대방침(ㄱ.군사, ㄴ.재정, ㄷ.외교)

5. 생계문제  6. 교육문제  7. 노동문제  8. 국호 및 연호  9. 헌법

10. 과거문제(ㄱ.위임통치청원사건, ㄴ.자유시사변, ㄷ.40만원 사건, ㄹ.虎林 密山 사건 ㅁ.寬甸統義府사건 ㅂ.기타 사건),

11. 기관조직  12. 신사건  13. 선포

통과된 의정안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의안 8항에 국호 및 연호 그리고 9항에 헌법이 들어 있는 점인데 이는 임시정부 개조가 아닌 새로운 중앙기관의 건설을 목표로 한 창조파의 입장을 관철할 수 있는 확실한 근거가 되었다.

2월 3일(제17차회의)에서는 분과배정의 위임을 맡은 위원의 보고에 의하여 8분과를 6분과 2위원회로 수정하여 통과시켰다. 6개분과:군사분과, 재정분과, 외교분과, 생계분과, 교육분과, 노동분과. 2개 위원회:헌법기초위원회, 과거문제조사위원회

선서 및 선언문을 기초할 위원으로 정광호와 박건병, 이민창 3씨를 선출하였다. 이날 회의부터 분과와 위원회 위원 선출을 시작하여 2월 6일(제19차회의)에 마쳤는데 각 분과와 위원회의 위원수는 7명으로 하였다.

2월 7일(제20차회의)에서는 선서 및 선언문 기초위원이 기초안을 제출하였는데 검토를 위해 대표들에게 배포되었다.

2월 8일(제21차회의) 선서 및 선언문 수정위원으로 이진산, 김상덕, 김갑이 선출되었다. 선서및 선언문 초안에 합의를 이루지 못하자 이 문제를 조정하기 위하여 2월 9일은 휴회까지 하였다. 논란이 계속되어 시일을 끌었는데 이후에 분립하게 되는 개조파와 창조파가 각자의 입장을 선서와 선언서에 반영하려 한 때문이었다.

대외적으로 발표할 선서는 2월 14일(제25차회의)에 통과되었고, 선언문은 2월 19일(제26차회의)에 채택되었다. 2월 20일(제27차회의) 선서 및 선언식 거행절차가 결정되었고, 주비회 사무를 대표회의에서 인계수행하기로 하였다. 2월 21일에는 선서 및 선언식을 거행하였는데, 비서장이 선서문을 낭독하고 출석한 98명의 대표들이 서명하였다. 신병 또는 사고로 출석하지 못한 대표들을 추후에 서명하기로 하였다.

2월 22일(제28차회의) 간부들이 제출한 예산안이 제출되었는데 대회일정을 총 45일로 총지예산은 8천원(大洋)이었다[대표 120명 사숙비 5,400원, 새로이 도착한 대표 2월 薪水費 600원, 회의장경비 600원, 서기 및 경호원 薪水費 250원, 간부사무실비 100원, 3 · 1절경축비 50원, 준비금 1,000원]. 이는 한형권이 8천원을 지원하기로 약속한데 따른 예산이었다. 주비위원회 위원장 남형우를 대신하여 신숙이 주비회의 경과를 보고하였다. 2월 23일(제29차회의)부터 3월 3일(제33차회의)까지 각 지방과 단체의 서면보고(낭독)가 진행되었다. 이날 추가로 임시의정원 의원 4명이 대표로 인준되었다.

3월 5일(제34차회의)부터 6일(제35차회의), 8일(제36차회의), 9일(제37차회의) 4일에 걸쳐 시국문제에 대한 토론이 시작되었다. 3월 7일에는 휴회를 하였는데 그 이유는 대표회의 간부에서 시국문제를 계속할 것인가 또는 독립운동 대방침을 정한 후에 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매듭짓기 위한 간부회의를 갖기 위함이었다. 같은 날 시국문제의 원만한 해결을 위하여 대표회의 간부의 주최로 상해임시정부 인사들과 대동여사에서 회의를 하였다. 이는 대표 다수가 시국문제에서 상해임정문제를 완전히 해결하고 넘어가기를 원했기 때문이었다.

3. 개조론과 창조론의 대두

3월 9일(제37차회의)의 시국문제 토론에서 윤자영(신이진) 등 18명이 연서로 제출된 제의안을 비서장이 낭독하였다. 3개항으로 된 이 제의안은 다음과 같다.

(1) 본 국민대표회의는 우리 독립운동으로써 세계피압민족의 해방운동과 동일한 전선을 作하기로 함.

(2) 본 국민대표회의는 우리 운동을 血戰에 主重하야 조직적으로 진행할 일.

(3) 본 국민대표회의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조직, 헌법, 제도 及 기타 일체를 실제운동에 적합하도록 개조할 일.

이 가운데 제2항의 경우는 대표들간에 이의가 없는 것이나, 제1항의 경우 구미열강과의 외교관계를 어떻게 할 것인가의 미묘한 문제가 있었다. 이보다 심각한 것은 제3항이 임시정부 개조론의 입장을 반영한 것으로 임시정부 계통론(법통론)의 입장이었다. 이 제안은 임시정부를 부인하고 새로운 독립운동의 중앙기관을 건설하려는 창조파의 거센 반방를 불러 불러일으켰다. 그리하여 대표회의 간부 일부(창조파)가 시국문제에 대한 汎論을 정지하고 제안에 대한 토론을 시작하자는 방안을 제기하여 간부회의 개최를 위해 3월 10일은 휴회하였다.

그리하여 3월 12일(제38차회의) 회의에서는 시국문제에 대한 汎論을 정지하고 제출된 의안에 대하여 토론하기로 결정하였다. 3월 12일(제38차회의) 김우희가 제의안을 제출하였는데, 이는 윤자영 등이 제출한 개조론(제1의안)에 맞서 제출한 것으로, 제2항에 “과거 5년간에 조직된 각 기관 및 각 단체는 그 명칭의 고하와 시설의 廣狹을 물론하고 일절 폐지하야 본회의에서 우리운동에 적합한 헌법으로 통일 기치 하에 일신 조직할 일”이라고 임시정부를 대신하여 새로운 중앙기관을 조직한다는 것이었다.

윤자영 등이 제출한 제1의안을 상정.토의하였는데 1개항씩 분리.토론하여 의결하기로 하였다. 3월 13일(제39차회의) 유시언 등 19명의 제의안(제3의안. 철저한 독립정신하에 민주공화의 國是를 확인하여 국민의 의사를 집중하기를 결의함)과 박건병 등 44명의 제의안(제4의안. 血戰主義를 수립하야 폭력의 수단과 급진의 보조로서 독립운동을 진행하기로 함)이 제출되었다.

윤자영 등의 제의안(제1안) 가운데 제 2항을 “우리의 독립운동으로써 혈전을 主重하야 조직적 계획 하에서 급진적 步調로써 진행할 일”로 수정하여 통과시켰다. 이어 의장 김동삼이 윤자영 등의 제의안 가운데 제3항(임시정부 개조안)에 대한 토론이 있을 것임을 선포하자 원세훈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무엇을 개조한다 하는 본안은 헌법기초라는 항목을 넣은 본회의 의정에 위반이 됨”이라고 하여 의안상정을 반대하였다. 이후 토론이 진행되다가 결론을 내지 못하고 정회하였다. 이날 회의는 105명이 참가하여 최대 다수의 대표가 참석했는데 임정개조론의 통과를 둘러싼 양파 대표들이 대거 참석한 탓이었다.

이어 3월 14일, 15일, 16일, 20일에 계속된 회의에서도 제1제의안 3항(임시정부 개조론)의 상정에 대한 반대론이 지속되었다. 이로부터 회의는 임시정부를 개조하려는 대표들(개조파)과 이를 반대하려는 대표들(창조파)로 나누어져 논쟁이 지속되었다.

마침내 3월 21일(제44차회의) 회의에서 김창환 등 12명의 군인구락부 소속 대표들이 시국문제에 대한 긴급제의를 하였다. 그 내용은 ‘본 국민대표회의는 과거 분립적 독립운동기관은 금후(1월 3일) 존재를 일체 불허하는 동시에, 連하야 상해임시정부도 과거는 認하고 금후의 존재는 부인하고 오직 실제 독립운동에 적합한 통일적 최고기관을 공고히 조직하기로 결의함’이었다. 창조론과 같은 맥락의 제의였다.

의장 김동삼이 제1제의안 제3항을 상정하여 제안자에게 설명하도록 했으나 회의장이 소란해져 정회되고 말았다. 이후 며칠동안 개회하지 못하였고 타협을 위해 3월 28일부터 4월 10일까지 10여차례의 비공식회의를 열었으나 양측간에 임정개조안에 대한 논전이 있었다.

4월 11일(제45차회의)에 재개된 회의에서 여운형 등 5명이 시국문제에 관해 제의한 바(제5의안) 그 내용은 “본국민대표회의는 내외 각 독립운동단체를 통합하야 一大獨立黨을 조직하기로 결의함”이라는 대독립당 조직안이었다. 개조, 창조 양파의 대하고 있던 상황에서 나온 제3의 방안이었다.

이날 회의에서 임시정부개조안으로 촉발된 개조파와 창조파의 대립을 잠정적으로 미루고자 대표회의 간부들이 요구한 “시국문제에 관한 일체 미진 사건은 본 회의의사 순서 중 노동문제가 종료할 때까지 보류하기로 결의함”이라는 제안을 통과시켰다. 이는 비공식회의의 결과 나온 일시적인 타협안이었다. 대표회의 전체의정 가운데 시국문제에서 임시정부 개조안을 둘러싼 쟁점을 미루어두고 독립운동대방침(군사, 재정, 외교), 생계문제, 교육문제, 노동문제를 처리하고 이후 국호 및 연호, 헌법, 과거문제, 기관조직, 신사건, 선포 등의 예민한 문제를 다루자는 취지였다.

4월 15일까지는 양방의 소통을 위해 휴회하였고 4월 16일(제46차회의)에 회의를 재개하였다. 대표회의 간부로부터 4월 하반기의 임시예산표가 제출되어 통과되었다(총 2,715원:4월하반기 대표 121명 유숙비 1,815원 大洋, 회의장소비 200명, 간부사무실비 100원, 임시비 600원). 이날부터 각 분과와 위원회의 보고가 계속되었다.

5월 10일까지(제60차회의) 회의에서 군사, 재정, 외교, 생계, 교육, 노동 등 각 분과에서 제출된 안이 토론되고 통과되었다. 5월 3일(제59차회의) 군인 구락부원 김세혁, 이청천 등 12인이 성명서를 장내에 배포하였다. 그 내용은 이미 이들이 3월 21일 시국문제에 관한 긴급제의로 제안한 것과 같은 것으로 실행방법에서 이에 찬동하는 이들과 더불어 최후까지 적극 진행하고 이에 “반하야 편견을 고집하는 이와는 동석함을 불허하기로 함”이라고 하여 개조파의 분노를 불러 일으켰다. 이 성명서에 서명한 자는 김세혁(경천), 이청천, 홍진우, 배천택, 채영, 김창환, 안무, 김중훈, 채군선, 최준형, 신일헌, 임병극 등이었다.

5월 11일(제61차회의) 의정 가운데 독립운동대방침 이하 각 분과 의안이 종료됨을 선포하고 시국문제를 다시 토론할 것을 선포하였다. 제안된 안은 모두 4개로 윤자영(신인진) 등의 임시정부 개조안, 김우희 등의 신기관 건설안, 박건병 등의 國是 확립안, 여운형 등의 신독립당 조직안이었다. 이 가운데 신숙이 제안자를 대표하여 박건병 등의 제의안을 취소하였다.

4. 개조파 대표들의 탈퇴와 대표회의의 파열

5월 12일(제62차회의) 개조파 31명의 대표들이 출석하지 않고 제출한 휴회청원이 있었으나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 상황에서 정인교가 긴급제안으로 하여 시국문제는 이미 결정한 양안(윤자영 등이 제안하여 수정통과된 제1항, 제2항)으로 종결하고 기타 제안중 제안자 또는 찬성자로부터 취소한 것 이외의 모든 제안을 일절 기각하기로 하였다. 이는 사실상 윤자영 등이 제안한 임정개조안의 폐기를 의미하는 제안이었다.

이에 호응하여 김우희의 신기관 건설안은 동의자 오창환이, 여운형 등의 신독립당 조직안은 여인빈이 취소하였다. 정인교의 긴급제안은 다음 회의에서 처리하기로 하였다. 대치된 상황을 타개하고자 5월 14일 간부의 주선으로 양파 조화협의회가 개최되었으나 성과가 없었다.

5월 15일(제63차회의) 부의장 안창호가 사회를 보는 가운데 비서가 의장 김동삼, 비서장 배천택, 헌법기초위원 이진산 등 사면청원서와 소속단체인 서간도군정서 및 한족회의 대표소환 통고서를 낭독하였다. 이후 차점자를 승임하기로 결정하고 의장에 윤해, 부의장에 신숙, 비서장에 오창환이 선출되었다. 이로써 창조파 대표들이 대표회의 간부진을 공식적으로 전면 장악하게 되었다.

이어 5월 12일 회의에서 제기된 정인교의 긴급제의에 대하여 오영선, 백남준, 서보라, 선우혁, 윤자영, 조상섭, 김상한, 윤경일 등이 격렬한 반대론을 제기하여 회의가 정회되었다. 이들은 “이는 대표의 제안권을 유린함이오, 또한 시국문제를 더 토론치 말자 함은 이는 분규의 문제를 바로 해결치 아니하야 2개의 정부를 산출하자 함이므로 이들의 긴급 제의는 당연히 수리치 못할 것”이라고 하였다. 이후 개조파가 회의에 불참하게 되면서 대회의 파열이 현실화되고 말았다.

개조파의 국민대표회의 탈퇴는 5월 16일(제64차회의) 회의에서 10명의 개조파 대표들(조상벽, 서영완, 윤자영, 배홍길, 선우혁, 문시환, 백남준, 오의순, 김상덕, 조상섭, 송병조)이 탈퇴를 성명하고 퇴장함으로써 시작되었다. 5월 17일은 간부에서 개조파의 양해를 구하기 위해서 휴회하였다.

마침내 5월 18일(제65차회의) 신임 의장 윤해가 사회를 보게 된 회의에서 앞서 탈퇴 · 성명한 10명을 포함한 41명의 대표들이 회의를 부인하는 통고문을 보내왔다. 그 취지는 “통일의 유일방침인 개조안이 기각되고 국호, 연호를 새로 정하면 이는 일민족에 兩個 국가를 형성하야 可恐의 화근을 植하는 것이니 이 현상으로는 회의를 더 진행할 수 업다”였다. 이에 대하여 의장 윤해와 비서장 오창환의 명의로 “오해를 일소하고 내일회의부터 출석하심을 간절히 권고”하는 권고문을 보내기로 하였다.

5. 창조파 단독에 의한 새로운 중앙기관 국민위원회 창설

5월 19일(제66차회의) 개조파의 반발과 대회탈퇴를 불러왔던 정인교의 긴급제의가 가결되고 의정순서에 따라 국호문제에 대한 제의를 받아 국호를 ‘韓’으로 하자는 안이 제출되었다. 5월 19일 밤 임시정부 국무총리 노백린이 국민대표회의 의장 윤해를 南洋旅社에 초청하여 임시정부와 국민대표회의가 ‘經事合致할 뜻’을 언명하였고, 이후 20, 21, 22일은 휴회하고 창조파측이 개조파의 참가를 교섭하였다. 이와 동시에 5월 23일 노백린과 윤해의 비밀회의, 5월 24일 윤해 · 신숙 · 김우희와 노백린의 협의 등 2차례의 협상이 있었으나 성과를 보지 못하였다. 이어 국민대표회의 진행측(창조파)와 국민대표회의 탈퇴파(개조파)간에 5월 31일에는 의장의 주도로, 6월 1일에는 이른바 중립파(상해파 고려공산당) 7인의 요구로 두 차례에 결쳐 타합회의가 열렸으나 결실을 맺지 못하였다. 이들 7인의 ‘중립파(박춘근, 임원, 김정하, 우탁, 박애, 최성필, 박응칠)의 주선으로 정부측, 퇴석 대표측, 회의진행 대표측에서 각기 3인씩의 대표를 선출하야 삼방연합회의를 열고자 하였으나 임정측이 이미 입장을 정하였고 이를 공포할 것이므로 삼방회의가 필요없다고 하여 성사되지 못하였다.

6월 2일 회의(제71차회의)에 45명이 연서한 제2차 통고문, 그리고 부의장 안창호의 통고문이 접수되었다. 개조파의 제2차 통고문은 “소수 대표의 편파적 회의는 국민대회의로 認치 않노라” 하였고, 안창호는 “비공식회의로써 양방의 원만한 타협을 구함은 가하되 일부의 대표만이 그냥 정식회의를 진행하야 국호, 연호, 헌법 등을 作定함은 불가하다”고 하였다. 이로써 대표회의는 최종적인 파국을 맞았다.

이날 회의에서 총 47명의 대표가 출석한 가운데 국호를 ‘韓’으로 연호는 ‘紀元’을 쓰기로 가결하였다. 6월 4일 노백린의 초청으로 국민대표회의 잔류 측인 윤해와 신숙 그리고 개조파 간부들이 임시정부 사무실에서 회담하였으나 논쟁으로 끝나고 말았다.

6월 5일(제72차회의)에서 헌법기초위원의 보고가 있었고 수정위원 10명을 선출하였고, 기관조직 인선전형위원 9명을 선출하였다. 이날 임시정부사무실에서 다시 삼방회의가 개최되어 노백린이 정부의 제안을 제출하였으나 개조파와 창조파 모두 반대하였다. 이에 창조파의 윤해가 마지막 타협안으로 3개항으로 된 헌법회의안을 제출하였으나 합의되지 않아 실현되지 못했다.

6월 6일(제73차) 회의에서는 헌법에 대한 토론이 있었다. 이날 임시정부 내무총장 김구 명의로 “국민대표회가 6월 3일 연호 및 국호를 따로 정하는 것은 민국에 대한 모반”이라고 하면서 “6월 2일 이후의 일체 불법행위의 철폐를 명하고 대표회 자체의 즉각 해산을 명한다”고 했다. 임시정부는 국무총리 노백린, 내무총장 김구, 외무총장 조소앙, 법무총장 홍진, 재무총장 이시영 명의의 국무원 포고문을 발표하였다. 포고문은 “소수가 불법 개회를 하여 국호나 연호를 제멋대로 변경”하여 “국내에 나라를 세운 정부 위에 정부를 중첩하는 반역을 범한 것”이라고 창조파의 신기관 건설을 공격하였다.

결국 국민대표회의 잔류파(창조파)는 39명이 참석한 가운데 6월 7일(제74일차회의) 회의를 개최하였다. 이날 우탁 등 6명과 장기영이 서면으로 탈퇴를 성명하였다. 회의는 과거문제위원회의 보고 후 국민위원회에서 査辨키로 하고 국민위원 33명, 국무위원 5명 가운데 4명(내무 신숙, 외무 김규식, 군무 이청천, 재무 윤덕보), 그리고 고문 31명을 선출하고 폐회하였다. 개조를 주장하던 57인은 성명서를 내고 윤해, 신숙 등 소수인의 행한 일이 부당함을 성명하고 아울러 그들이 퇴출하던 사실의 전말을 표명하였다.

6. 국민대표회의후의 창조파와 개조파의 활동

1923년 1월초부터 6월초에 걸쳐 상해에서 개최된 국민대표회의를 통하여 전체 국민들의 역량을 집중시킬 수 있는 중앙기관의 수립과 독립운동의 방략을 확립하고자 했던 국내외 각 지역과 단체 대표들은 크게 개조파와 창조파의 분열로 분열되고 말았다.

이처럼 대규모의 ‘국민대회’는 전무후무한 국민적 모임으로 평가할 수 있지만 통일과 단결을 이루지 못하고 분열과 파쟁으로 귀결되어 이후 독립운동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고 말았다. 양파는 서로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가운데 임시정부 옹호세력에게 공격의 빌미를 주고 말았다. 이후 창조, 개조 양파는 각자의 노선을 실현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우선 창조파의 국민위원회는 상해임시정부와 같은 ‘정부적 기능’을 상정하여 조직된 것이었다. 국무위원 등 창조파의 주요인물들은 1923년 8월 30일 블라디보스토크로 이동하고, 국민위원회에 대한 코민테른의 승인을 받아 블라디보스토크에 본부를 두고 정부행세를 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창조파는 코민테른의 승인을 얻는데 실패하게 되고, 마침내 1924년 2월 15일 국민위원회 회원들이 블라디보스토크로부터 퇴거명령을 받고 만주지역으로 이동하였다.

국민대표회의 파열 후 개조파는 임시정부의 개조작업에 착수하였다. 이들은 임시의정원에 대거 참여하여 임시대통령 이승만에 대한 유고안을 통과시킨데(1924.6.16) 이어 마침내 박은식을 국무총리로 하는 개조파 내각을 성립시키는데 성공하였다(1924.12.17). 이어 임시의정원은 임시대통령 이승만에 대한 면직(탄핵)을 통과시키고 박은식을 제2대 임시대통령으로 선출한 후 대한민국임시헌법을 공포하였다. 이로써 국민대표회의에서 임정개조를 추진했던 개조파는 임시임시정부 개조작업을 마무리하였다.

峯生이란 애국지사가 국민대표회의의 개회를 앞둔 1922년 12월 25일에 짓고 국민대표회의 개회중인 1923년 2월 7일자 『獨立新聞』에 게재된 국민대표회의 축하가에 담긴 열망은 실현되지 못하고 말았다.

1

이천만의 각오로 열린 이 모듬

반만년 역사상에 처음 일이라

쌓였던 감정과 묵은 허물을

동정의 손을 잡아 다 없이 하라

2

오날부터 나가는 우리 앞길은

튼튼한 신궤도에 화목스럽게

잃었던 조국과 너의 자유를

어서 급히 찿음도 이에 있도다

Ⅲ. 국민대표회의 관련 자료집간행의 의미와 수록자료들

독립운동사상 최대의 집회로 평가할 수 있는 국민대표회의는 상해에서 1923년 1월부터 6월에 이르는 장기간에 걸쳐 국내외 지역과 단체 대표 125명이 참여한 가운데 개최되었다. 그동안 국민대표회의에 대한 연구는 상해에서 발간된 『獨立新聞』을 비롯한 국내신문자료와 일본관헌자료들을 중심으로 연구가 되어왔다. 소련붕괴 이후 러시아공문서관에 소장되어왔던 국민대표회의 관련자료들이 국내학자들에 의해 활용되기 시작하여, 국민대표회의의 소집과 전개과정, 향후 귀결과 관련하여 코민테른(국제공산당)측과 한인공산주의자들의 입장이 밝혀지기 시작하였다. 일본외무성 소장 자료들을 비롯한 일본관헌자료들에서도 새로운 문건들이 활용되어졌다. 이로써 국민대표회의에 대한 보다 객관적이며 전체적인 시각에서의 연구가 가능한 단계에 와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볼 때에 이번에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 편찬작업의 일환으로 간행되는 국민대표회의 관련 자료집이 간행됨으로써 이 분야 연구에 크게 기여할 것으로 기대한다.

국민대표회의 관련자료집은 편의상 두 권으로 편집하였다. 제1권(별책5권)에는 국내에서 입수한 국한문자료들과 러시아공문서에서 입수한 자료들을 수록하였다. 제2권(별책6권)에는 일본관헌자료들을 수록하였다.

일찍이 1968년 국사편찬위원회에서 『韓國獨立運動史 資料 2 (臨政篇 Ⅱ)』의 五장 ‘국민대표회의 관계자료’에 관련기사들을 탈초 · 수록한 자료집을 선구적으로 간행한 바 있다(1983년 중판). 같은 자료집 제3권(『韓國獨立運動史 資料 3 (臨政篇 Ⅲ)』의 八장에도 『獨立新聞』, 『東亞日報』와 일본관헌자료가 수록되어 있다. 이번 자료집에는 이들 자료집에 대부분 포함된 『獨立新聞』 게재 기사들을 기본자료로 삼고, 일본관헌의 첩보자료들을 대거 보완하였으며, 『東亞日報』 외에 『朝鮮日報』와 『新韓民報』 등 국내외의 신문에 게재된 관련기사들을 발굴 · 수록하였다.

그 외에 2000년도에 간행된 『島山安昌浩全集』(도산안창호선생전집편찬위원회, 2000) 제6권 (대한민국임시정부. 유일당운동)과 1998년에 간행된 『梨花莊 所藏 雩南李承晩 文書:東文篇』(중앙일보사 · 연세대학교 현대한국학연구소, 1998) 제8권(대한민국임시정부 관련문서 3) 등에 수록되어 있는 국민대표회의 관련자료들을 보강하였다. 특히 『島山安昌浩全集』에는 종래에 간행된 자료집들에 수록된 국민대표회의에 관한자료들이 총망라되어 있다. 그러나 『島山安昌浩全集』에는 앞서 간행된 국사편찬위원회의 『韓國獨立運動史 資料 2(臨政篇 Ⅱ)』에 수록된 일부 자료들이 누락되어 있다.

이번 자료집의 가장 큰 특징은 러시아문서보관소에 소장된 자료들을 대거 포함하였다는 점이다. 이들 자료들은 코민테른(제3국제공산당)의 각 기관과 책임자들에게 또는 이들간에 주고받은 보고서 내지는 편지들이 대부분이다. 이들 자료는 대부분 러시아 모스크바 소재 러시아국립사회정치사문서보관소(RGA SPI, 구코민테른문서보관소)에 소장된 문서들이다.

최근 러시아 모스크바의 박보리스(B.D. Pak)의 SSSR. Komintern i Koreiskoe Osvoboditel’noe Dvizhenie, 1918~1925:Ocherki, Dokumenty, Materialy(소련, 코민테른과 한국해방운동, 1918~1925;개괄, 문헌, 자료)(Moskva, Rossiskaia Akademiia Nauk Institut Vostokovedeniia, 2006)에 상당수의 관련자료들이 수록되어 있다. 일부 자료는 러시아국립사회정치사문서보관소에 소장되어 있는 같은 내용의 문서로 국내에 입수되어 있으나, 러시아외교문서보관소에 소장되어있는 자료들이다. 이어 러시아측의 키릴 쉬리냐(Kirill Shirinia)와 일본의 와다 하루끼, 미즈노 나오끼, 유효종 등 역사학자들이 편찬으로 2007년도에 간행된 VKP(b), Komintern i Koreia, 1918~1941(전러공산당(볼), 코민테른과 조선, 1918~1941) 1918~1941), Moskva;Rosspen, 2007)에 수록되어 있는 국민대표회의에 관한 자료들도 수록하였다.

1. 신문기사 및 국한문자료

국민대표회의 소집은 임시정부에 참여하지 않고 외부에서 반대하던 세력(인물)들이 주도하였다. 노령의 대한국민의회와 함께 임시정부를 근본적으로 부정하던 대표적 단체는 북경의 군사통일회의이다. 1921년 4월 27일자로 박용만, 신숙, 강구우, 박건병 등 10개단체 17명의 연서로 임시의정원에 보내는 「通牒」(자료1)은 임시정부와 임시의정원을 불승인한다는 입장과 그에 따라 1919년 4월 23일 국내의 국민대회에서 조직 · 발표된 ‘대조선공화국’ 임시정부의 계통을 계승하야 새로운 임시정부를 조직할 것을 천명하였다. 1921년 5월에 국내외에 공포된 「軍事統一會議 宣言書」(자료9)는 「通牒」의 내용을 국내외에 공포한 것이며, 같은 군사통일회의 명의의 「大朝鮮共和國 聲討文」(자료10)은 미국에 대한 위임통치청원을 제출한 이승만을 성토하는 문건이며, 「北京留學生會 聲討文」(자료11) 역시 대미위임통치청원의 주역인 이승만과 정한경을 공격하는 문건이다. 북경 군사통일회의가 발표한 이들 문건은 국민대표회의 소집운동의 한 축을 형성하게 되는 북경의 반임정세력의 입장을 천명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이후 국민대표회의에서 창조파를 구성하게 되는 핵심단체가 임시정부 부인의 이유와 근거를 천명하였는 점에 그 의미가 있다.

5월 12일과 19일 두 차례에 걸쳐 상해 재류 동포들이 개최한 연설회는 안창호와 여운형을 연사로 나섰는데 국민대표회 소집운동이 대중적 차원에서 시작되는 계기가 되었다. 『獨立新聞』 1921년 5월 14일자에 게재된 여운형의 「우리 獨立運動의 過去 現在及 將來」와 5월 21일과 5월 31일 2회에 걸쳐 연재된 안창호의 연설 「獨立運動의 進行策과 時局問題의 解決」(자료3, 자료8)은 임시정부에 참여한 바 있는 대중적인 두 지도자 여운형과 안창호가 국민대표회 소집을 제창하는 각자의 입장을 잘 보여주고 있다. 특히 안창호의 연설은 임시정부와 임시의정원을 더욱 충실한 민족적 통일기관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임시정부 개조의 입장이 잘 드러나 있다. 두 차례의 연설회는 상해재류 동포들이 호응하여 상해 국민대표회 기성회를 조직하는 출발점이 되었다는데 큰 의미가 있다.

국민대표회의주비회는 대표회의를 1921년 후반기에 개최할 계획을 세웠지만 워싱톤회의, 원동민족혁명단체대표회의(극동인민대회, 극동노력자대회) 등의 개최와 자금문제 등으로 실행되지 못하고 1922년 상반기에 가서야 활동을 재개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국민대표회의 소집을 발기한 이래 주비회를 중심으로 가장 활발하게 국민대표회의 소집을 추진하던 상해 재류 인사들은 1922년 4월 6일 연설회를 개최하고 국민대표회 소집운동을 재개하였다. 이날 안창호는 그동안의 국민대표회의 소집과 관련한 제반 오해들에 대해 해명하면서 재차 소집의 당위성과 목표를 제시하였다. 『獨立新聞』 1922년 4월 15일자에 게재된 「안창호선생의 연설」은 1922년 4월 당시 국민대표회의 소집을 다시 재개하고자 하는 안창호의 입장이 잘 반영되어 있다(자료16). 1921년 5월의 연설에서 드러났던 안창호의 입장과 비교하면 1년의 과정에서 어떠한 문제들이 제기되었는가를 짚어볼 수 있다.

주비위원회가 국민대표회 소집에 필요한 동포들의 의연을 촉구하는 문건이 1922년 6월에 주비위원 일동 명의로 반포한 「謹告」이다. 이 「謹告」는 대표회 소집비용을 각 지역별로 배정하는 등의 방법을 취했지만 성과를 보지 못했다고 하면서 동포들의 자발적인 기부를 촉구하는 내용인데 『獨立新聞』(1922년 7월 1일자)에 게재되었다(자료21).

3회에 걸쳐 『獨立新聞』(1922년 8월 1일, 12일, 22일자)에 연재된 「국민대표회의에 대하여」(자료27)는 국민대표회주비회 성립 1주년을 기념하여 게재된 것으로 짐작되는데 국민대표회의와 관련된 제반논의들에 대한 입장이 잘 정리되어 있다. 이 사설은 국민대표회의의 정신, 국민대표회의 제창의 동기, 국민대표회의주비회 성립 이래의 경과에 대한 논란, 국민대표의 책임, 국민대표회의에 대한 우리들의 희망조건 등의 순서로 된 매우 긴 사설이다.

이 사설에서 특히 주목해야 할 것은 그동안 사용되어온 ‘국민대표회’라는 명칭 대신에 ‘국민대표회의’라고 써야 한다고 주장한 점이다. 즉, “국민대표회의는 자유의사로 집합한 회의요, 일정한 어느 법인격 하에 분립한 기관이 아니라, 다시 말하자면 국민대표회의는 ‘회의’요 ‘의회’가 아니라. 소이로 국민대표회의의 성질은 국민전체에 관한 제 문제를 토의하기 위하야 모이는 일시적 회합이오, ‘결사’도 아니며 ‘기관’도 아니라”라는 것이다. 대표선거에 관한 문제제기 외에 이 사설의 필자가 지적한 사항들은 국민대표회의 진행에서 크게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국민대표회’ 대신에 ‘국민대표회의’란 명칭이 일반화된 것이 그 예라 할 것이다.

이 사설의 필자는 또한 국민대표회 소집이 지체된 원인을 기관문제와 관련된 연호 문제, 상해중심주의 두 가지를 지적하였다. 주목되는 점은 이 사설의 필자가 주비회에서 발표한 대표선거절차에 대한 문제제기이다. 독립운동에 관한 논의를 하면서 기성국가에서나 적당한 지역대표를 설정하고 독립운동에 헌신적인 단체만으로 제한하지 않은 문제점을 지적하였다. 아울러 사설의 필자는 국민대표회의에서는 윤치호가 작성한 ‘의회통용규칙’에 얽매여 비효율적, 비생산적인 회의를 하지 말 것으로 경고하였다.

개편된 국민대표회주비위원회는 앞서 1921년 『獨立新聞』에 보도한 바 대표선정에 관한 사항을 다시 수정 · 보완하였다. 이는 『獨立新聞』 1922년 6월 3일자에 게재되었다(자료19). 이를 구체적으로 보면, 국민대표회의는 1922년 10월 15일에 개최될 것이고 개막일로부터 1개월에 의정을 마칠 것이라는 점을 밝히고 있다. 이러한 조건을 충족하기 위한 대표선발, 대표인적상황 통보, 주비회 소재지인 상해로의 도착일정 등에 관한 주의사항을 밝혔다. 1922년 8월 주비위원회 위원장 남형우 명의로 된 이 「注意書」는 일본외무성자료인 「國民代表會에 관한 件」에 번역 · 첨부되어 있다(제2권 자료19).

국문자료 가운데 주목되는 문건은 1923년 1월 1일자로 이상재, 최남선, 오세창, 한용운, 박영효, 강매 등이 대한민국 5년 1월 1일자로 ‘해외 한인 각 단체’에게 돌린 「해외 단톄에 경고하 글(警告海外各團體書)」(자료57)이다. 순한문과 순한글의 두 종류로 작성된 이 글은 4개항을 요구사항을 제시하면서 제4항에서 “이왕 성립된 정부를 옹호하야 망녕되이 요동하지 말지라”며 임시정부 옹호의 입장을 천명하였다.

1923년 1월 3일 개회된 국민대표회의는 6월 7일까지 총 74차례의 회의를 가졌다. 이 가운데 임원선출, 대표의 자격심사규정과 회의규정 마련, 대표 자격심사 등을 위한 회의 15차례(1월 3일~부터 1월 29일)에 이어 1월 31일 개막식 이후 6월 7일까지 본격적인 회의가 진행되었다. 본격적인 회의는 의장 김동삼이 사퇴하고 창조파의 윤해가 정식의장으로서 회의를 주재하게 되고 개조파 대표들이 회의에서 탈퇴하는 5월 16일을 분기점으로 이후는 창조파의 단독회의로 되었다.

국민대표회의 회의록은 『獨立新聞』에 「國民代表會議記事」라는 제목으로 9회에 걸쳐 게재되었다(1923년 1월 24일자, 1월 31일자, 2월 7일자, 3월 1일자, 3월 7일자, 3월 14일자, 4월 4일자, 5월 2일자, 6월 13일자)(자료77, 자료95, 자료106, 자료111, 자료118,자료 127, 자료141, 자료160). 그리하여 이 기사에는 창조파가 의장, 부의장, 비서장을 장악하고, 개조파 10명이 탈퇴성명을 내고 퇴장하여 창조파만의 단독회의가 되는 5월 16일부터 6월 7일까지는 누락되어 있다. 5월 16일 이후의 회의에 대하여는 『獨立新聞』 1923년 6월 13일자에 게재된 기사 「代表會議의 破裂 眞相」(자료159)에 정리되어 있다. 국민대표회의의 결정에 따라 『獨立新聞』 사원 3명에게 국민대표회의 방청이 허용되었고, 『獨立新聞』 사원이 작성한 회의기사를 비서의 기록과 대조한 후 『獨立新聞』에 게재하기로 하였다. 「國民代表會議記事」는 이렇게 작성된 것이다. 국민대표회의 비서의 기록과 대조하여 작성한 것인만큼 정확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외에 국민대표회의에서 채택하거나 결의한 자격심사규정, 선서, 선언문 등이 『獨立新聞』에 게재되었다.

吳昌煥이 국민대표회의 직후인 1923년 7월에 작성한 「國民代表會議의 경과 사정 (제1일 회의~제74일 회의)」(러시아문서관자료27)이다. 3 · 1운동 당시 대한국민의회 독립선언서에 서기로 서명했던 오창환은 국민대표회의 초기에 대표자격심사위원, 회의규정기초위원, 비서로 활동하다 5월 15일부터 비서장으로 활약하게 되는 창조파의 핵심인물이다. 정식의 회의록은 창조파가 조직한 국민위원회에서 인쇄 · 발표할 예정이었다. 「國民代表會議의 경과 사정」은 회의 종결시 회의록을 책임진 비서장으로서 오창환 본인이 작성한 회의록 원본을 참조하고 자신의 「手記」를 바탕으로 작성한 것이다. 따라서 정식 회의록이라 할 수 없다. 오창환이 국민위원회에서 간행할 회의록에서 다루지 못할 ‘당시의 암투경과의 세밀한 정황을 동료대표들의 전언과 자신의 수기를 기초로 작성한 것이 「國民代表會議의 경과 사정」인 것이다. 「國民代表會議의 경과 사정」의 본문에는 회의의 공식과정을 정리하여 놓았고, 오창환이 수기에 기초하여 정리한 암투의 세밀한 정황은 ‘부론’으로 첨부하여 놓았다.

정식 회의록이 아닌 만큼 「國民代表會議記事」에서 기술된 내용이 누락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시국문제에 관한 대표들의 발언이 생략되어 있다. 「國民代表會議의 경과 사정」은 회의 이면에서 이루어지고 있던 개조파와 창조파의 전략과 인물들에 관해 기록하고 있는 만큼 공식 회의에서 드러나지 않은 회의안건과 토론의 배경, 개조파와 창조파의 의도 등을 알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창조파 핵심인물이 작성한 문건으로서 개조파에 대한 편견과 악의적인 기술이 없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國民代表會議의 경과 사정」은 「國民代表會議記事」에 없는 회의내용들이 기록되어 있고 매회의에 참석한 대표수가 빠짐없이 기록되어 있다. 「國民代表會議記事」에는 참석대표수가 회의초기에는 잘 기록되어 있으나 대표회의 후반에는 대부분 누락되어 있다. 이 회의참석 대표수의 경우 두 기록간에 차이가 있는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臨時政府의 對俄 外交와 國民代表會議의 顚末」(자료171)은 『카톨릭청년』 1948년 8 · 9월 합병호에 게재된 韓馨權의 수기이다. 한형권은 1920년 1월 임시정부 국무원회의에서 여운형, 안공근과 함께 소비에트러시아 파견대사로 선정되어 4월말경 상해를 떠나 모스크바에서 한인사회당 코민테른 파견대표 박진순의 협조를 받아 소비에트정부로부터 200만루블(금) 지원 약속을 받고 그 가운데 40만루블(금)을 받아낸 인물이다. 이후 한형권은 소비에트정부로부터 20만루블을 추가로 받아내어 그 가운데 64,975원을 國民代表會議측에 전달하였다.

「臨時政府의 對俄 外交와 國民代表會議의 顚末」는 한형권이 직접 작성한 문건으로 임시정부특사로 파견될 당시의 국내외적 상황, 모스크바로의 여정과정, 레닌 등 소비에트정부 당국자와의 외교담판, 국민대표회의의 개최배경과 경과, 회의 종결후의 상황 등을 기록하고 있는 점에서 국민대표회의에 관한 매우 귀중한 자료라 할 수 있다.

한형권이 『카톨릭청년』에 자신의 수기를 기고한 2개월 후, 『三千里』(6호, 1948년 10월 1일자)에 「革命家의 回想錄:레-닌과 談判-獨立資金 20억원 獲得」(자료170)은 게재되었는데 이는 기자가 한형권을 취재하여 정리한 것이다. 기자가 소개한 바에 따르면, 한형권은 함북 온성출신으로 현재 63세로 권업회 부회장, 권업신문 사장, 신대한일보 간부, 장춘의 東北韓報 사장을 지냈다.

「革命家의 回想錄:레-닌과 談判-獨立資金 20억원 獲得」는 한형권이 직접 작성한 「臨時政府의 對俄 外交와 國民代表會議의 顚末」에 비하여 두 배 정도로 분량이 많다. 수기에서 기록한 주제들을 다루고 있고 내용상 겹치지만 보다 구체적이고 자세하다. 아마도 기자가 질문을 통해 구체적인 내용을 보완했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예를 들어 국민대표회의에 지출한 자금에 대한 언급이 그렇다. 앞의 수기에서 없는 내용은 국민대표회의 종결 후 천도교의 崔東羲(호 素月)의 대소련, 제3국제공산당 외교를 도와주려고 했던 일 그리고 몸소 겪은 바 재만동포의 비참한 형편에 대한 회상 부분이다.

국민대표회의 비용은 한형권이 소비에트정부로부터 받아온 26만루블에서 전적으로 지출되었다. 『倍達公論』(제2호, 1923년 10월 1일자)(자료86)에 그 지출내역이 소개되어 있다. 기사에 “韓馨權의 二十六萬元 條件이 近間 그 計算書가 發表되얏는대” 한 것으로 보아 국민대표회의가 폐회된 후 자신에게 임시정부를 비롯하여(1923년 6월 6일자 임시정부 국무원 포고문. 별책6권 일본관헌자료 자료66 참조) 내외의 비판에 대한 해명 차원에서 발표한 것으로 보여진다. ‘국민대표회의에 준 것’에 해당하는 금액은 6,4975루블이다(자료 86). 『倍達公論』에 발표된 한형권의 계산서는 관동청 경무국이 작성한 기밀문서 「공산 선전비 지출용도의 계산서」(關機高收 第16923號. 1923.11.13)(별책6권 일본관헌자료 자료74)에 번역 · 첨부되어 있다. 이는 약 1개월전에 간행된 『倍達公論』의 기사내용과 완전히 일치한다. 국민대표회 주비위원장 남형우의 결산보고, 그리고 주비회 업무가 대회집행부로 넘어간 이후 새로이 신청하고 한형권이 지출약속했다고 하는 금액 등을 종합하면 한형권의 계산서 내역이 정확한 것으로 보여진다.

2. 러시아문서관 자료

국민대표회의 개최비용은 임시정부 특사 한형권이 소비에트정부로부터 수령한 자금에서 지출되었다. 한형권의 모스크바 파견에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 인물이 알렉세이 포타포프(Aleksei Potapov) 장군이다. 1903년부터 러일전쟁 발발 시까지 서울 주재 러시아공사관 무관으로 근무한 바 있는 포타포프는 러시아2월혁명 당시 친위대를 동원하여 로마노프왕조의 붕괴에 기여하였고 이후 러시아 백위파 콜챠크에 의하여 축출되어 일본으로 망명하였으나 일본정부에서 치안에 위험한 인물로 추방하여 1919년 12월 상해로 오게 되었다. 포타포프는 상해에서 한인독립운동조직의 주요인물들을 만났다. 포타포프의 약력은 『獨立新聞』(1920년 3월 1일자)에 자세히 소개되어 있는데, 이 자료집에 수록된 「한국에 관한 포타포프의 약식」(1920년 12월 12일자. 자료8)에도 포타포프 자신이 간략한 자기 소개를 하여놓았다.

「한국에 관한 포타포프의 약식」은 한국 그리고 한국독립운동가들과의 인연을 설명해놓고 있다. 특히 대한민국임시정부와 대한국민의회의 성립과 활동을 비롯하여, 자신이 상해 임시정부를 비롯한 다양한 한인조직들의 활동에 참여한 사실을 언급하고 있다. 아울러 포타포프는 자신이 한인혁명가들에게 파리강화회의나 국제연맹 그리고 연합국들에 거는 희망이 무익함을 지적하면서 소비에트정부와의 관계 수립을 주장하고 임시정부에 행동계획과 정책프로그램을 제시하였음을 강조하였다. 주목할 만한 것은 포타포프가 당시 불화상태에 있던 임시정부와 대한국민의회의간에 화해를 중재하였고, 자신이 참여한 가운데 양측의 요원들이 협정문에 서명하였다는 것이다. 상해의 임시정부와 한인조직들의 중요인물들의 합의에 의하여 한형권을 임시정부의 파견하기로 결정하였다는 것이다. 포타포프는 자신의 보고서를 한형권을 통해서 소비에트정부에 발송했다고 하였다.

포타포프는 중국을 떠나 모스크바에 도착한 후 1920년 11월 25일자로 소비에트정부 외무인민위원회에 상해에서 자신이 수령한 문서와 자료의 목록과 함께 간략한 설명을 첨부하였다(「포타포프가 1920년 11월 25일자로 외무인민위원회에 제출한 한국문서들」(자료7). 이들 문서들이 「대한민국 상해임시정부 국무총리 이동휘가 포타포프에게 발송한 1920년 1월 20일자 서신」(자료1), 「문창범이 포타포프에게 보낸 협조문(날짜 미상」(자료2), 「문창범, 한형권, 장건상이 포타포프에게 보낸 협조문(1920.1.20)」(자료3), 「레닌의 편지에 대한 이동휘의 답장(1920.5.24)」(자료4)이다. 자료 1과 4는 러시아어로, 자료 2 · 3은 영어로 작성되어 있다.

흥미를 끄는 내용은 임시정부와 대한국민의회간에 화해가 이루어지고 협정문이 작성되었다는 포타포프의 언급내용인데 자료 3에서 나타나고 있는 바 ‘대한국민의회 의장’ 문창범, ‘대한민국임시정부 한군부 외무총장 장건상’, 그리고 한형권이 대한국민의회 의원 명의로 공동.서명하고 있다는 점이다. 한형권이 임시정부 국무총리 이동휘의 주도로 임시정부에 의해서 대소비에트정부 파견 임정특사로 임명된 점(대한국민의회와의 공동대표가 아닌), 장건상이 곧 이어 외무차장직을 사퇴하게 되는 점 등에서 포타포프가 언급한 바 임정과 국민의회간의 협정은 공식화되지 못하였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추후 치밀한 검토가 필요한 부분이다.

「레닌의 편지에 대한 이동휘의 답장(1920.5.24)」(자료4)에서 이동휘는 “본인은 귀하의 전신(電信)과 귀하의 원동지역 대표의 동봉한 서한에 대해 심심한 감사를 표합니다”라고 하였다. 이로부터 우리는 레닌이 임시정부 앞으로 된 전문을 작성하여 이르쿠츠크에 체재하고 있던 소비에트정부의 전권위원에게 발송하였고, 이 전권위원이 다시 레닌의 전문에 근거하여 별도의 공식서한을 작성한 후 전문과 동봉하여 임시정부측의 이동휘에게 전달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한인군사교육을 위해 한인청년 생도들의 임시파견을 요청한 문서(1920.5.29)」(자료9)는 임정대표 한형권이 소비에트정부 외무인민위원회 전권위원인 얀손에게 보낸 서한이다. 한형권은 한인들의 요청으로 1919년 12월 러시아 시베리아혁명위원회가 시베리아 소비에트 육군사관학교에 한인사관과정을 개설한 사실을 지적하고 이들이 졸업할 경우 베르흐네우진스크 주재 한인중대에 배치하여 주도록 시베리아혁명위원회에 청원해 줄 것을 요청하고 있다.

한형권이 소비에트정부 외무인민위원회에 제출한 「동아시아(한 · 중 · 일)의 정치적 상황에 관한 한형권의 보고(1920.6.28」(자료6)는 한국어 원문을 러시아어로 번역한 것인데, 동아시아 3국(중국, 일본, 한국)의 정치적 상황과 혁명운동을 설명하고 소비에트정부가 중국의 혁명운동을 지원할 것을 촉구하는 한편, 한인사회당이 제3국제공산당(코민테른)과 긴밀한 관계를 갖길 원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동아시아의 일반적 상황’이라는 제목이 붙은 이 문건은 한인사회당이 상해 임시정부에 참여하게 된 운동적 상황과 논리, 그리고 임시정부내에서 한인사회당의 영향력이 크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한형권이 1920년초 대한국민의회 의원 명의를 갖고 대한국민의회 의장 문창범, 임시정부 외무차장 장건상과 협정문을 맺었던 상황과 달리 한인사회당의 입장을 옹호하고 있는 점이 주목된다.

「서울 주차 러시아총영사 류투스의 보고(Ia. Liutsh)가 도쿄경주재 러시아대사 끄루뻰스키(V. N. Krypenskii)에의 보고(1921.1.26)」(자료9)는 1920년 6월 평북지방에 본부를 두고 조직된 항일단체 自衛團이 임시정부를 위해 기부금을 모았지만 지도자 이충웅이 체포된 소식을 전하고 있다. 「도쿄경주재 러시아대사 끄루뻰스키(V. N. Krypenskii)에의 보고(1921.3.22)」(자료10)은 국내외 독립운동 상황을 보고한 것으로 서울에서의 새로운 신정부 수립계획, 만주독립군 부대와 지도자들의 동향, 미국에서의 서재필을 중심으로 한 독립축하 집회, 상해의 임시정부 지지 활동 등을 소개하고 있다.

임시정부 전권대표 명의로 한형권이 소비에트정부 외무인민위원회에 제출한 보고서 「러시아사회주의공화국 외무인민위원회에게((1921.8.2)」(자료11)는 대한국민의회 의장 문창범과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의 핵심인물인 남만춘, 김철훈, 이성 등의 반혁명적 경력과 활동을 지적하고 이들이 한인사회당 간부들(박애, 계봉우, 장도정, 김진, 김규면 등)을 탄압,하고, 자유시참변을 야기한 사실을 비판하고 있는 문건이다. 그리하여 이 문건은 1921년 5월 별도의 고려공산당을 창립한 상해파와 이르쿠츠크파가 자유시참변(1921년 6월)이후 코민테른의 승인을 얻기 위해 치열하게 경쟁하고 상황에서 한형권이 모스크바에서 상해파를 대변하여 적극적인 외교활동을 전개하고 있던 사실을 잘 보여준다.

1921년 중반 임시대통령 이승만은 이동휘가 파견했던 임정특사 한형권을 소환하고 새로이 외무차관겸 총장대리에 임명된 이희경(李喜儆)과 안공근(安恭根)을 모스크바로 파견하였다. 그리하여 원동민족혁명단체대표회(극동노력자대회, 극동인민대회)가 개최되고 있던 1922년초에는 고려공산당연합간부를 대표하는 상해파의 이동휘와 홍도, 원동민족혁명단체대표회의 조선대표단 집행부(교섭단, 외교사절단)인 김규식, 한명세, 김시현, 최창식 그리고 새로운 임정대표로 파견된 이희경과 안공근의 세 그룹이 소비에트정부와 코민테른을 상대로 경쟁적인 외교활동을 전개하게 되는 것이다.

「대한민국 전권대표 이희경이 러시아연방사회주의공화국 외무인민위원회 위원장 치체린에게 발송한 서한(1921.9.26)」(자료12)은 임시정부 전권대표 이희경이 독일 베를린에서 소비에트정부 외무인민위원장 치체린에게 보낸 서한이다. 이희경은 자신이 임시정부에 의하여 파견된 대표로서 그동안 임정대표로 활동해온 한형권의 직권남용을 추적하라는 명령을 받고 왔음을 천명하였다. 이희경의 서한은 베르린 체재중의 소비에트 대표를 통해 발송되었으며, 베를린에서 한형권을 만난 사실을 적시하고 있다.

상해에 있는 김인감이 이희경(제원), 안공근(신암)에게 보낸 서한(자료14)에는 1921년 11월말의 상해 상황에 관한 새로운 사실들이 적혀 있다. 한형권, 고창일, 윤해가 상해에 도착한 사실, 이희경이 임시정부 국무원앞으로 발송한 서한에 근거하여 경무국에서 김립을 체포할 수 있는 방안을 마련했으나 실행이 간단치 않다는 점, 한형권이 국무원에 보고했으나 의심스럽다는 점, 고려공산당의 지도자들과 연락을 하고 있으며, 혜원 동지를 통해 코민테른 비밀요원에게 임시정부와 코민테른의 협의와 이희경과 안공근에 대한 협력을 부탁한 사실, 원동민족혁명단체대표회에 참가할 조선대표들이 11월 17일, 28일 상해를 출발한 사실, 그리고 대표들은 여운형, 김규식, 최창식, 현순, 나용군, 정광호, 조동호, 김상덕 등 수십명이라는 사실, 중국 만주리에서 중국 사절단과 조선사절단이 체포되었다는 소식, ‘기아상태에 처해 있는’ 북경파의 임정반대 목소리가 없어졌다는 점, 임시정부 간부들의 급료를 받지 못하고 있는 상황 등을 전하고 있다. 이 서한은 이희경과 안공근이 모스크바에 도착하지 못한 때문에 모스크바의 이동휘 주소로 전달되어 이동휘, 홍도, 박애가 이 편지를 상해에 있는 한형권에게 재발송하고자 치타의 계봉우에게 발송하였다.

모스크바에 도착한 이희경이 1922년 3월 22일 외무인민위원장 치체린의 접견을 요청한 서한이 「대한민국 특별전권 이희경이 러시아연방사회주의공화국 외무인민위원장 치체린에게 보내는 서한(1922년 3월 22일)」(자료17)이다. 이희경은 치체린 접견시에 간략한 성명서를 제출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에 관한 사실과 새로이 사절단을 파견된 제반 상황 등 한형권과 관련된 사실들을 밝힐 것이라며 치체린과의 접견을 신청하였다.

치체린과의 접견을 이루어지 않은 것으로 보여진다. 그리하여 소비에트정부측에서는 안공근을 불러 구두보고를 받았다. 소비에트정부 관계자가 안공근의 구두보고를 정리한 것이 「상해 한국임시혁명정부 관련 문제에 관한 안(공근)동지의 4월 29일자 구두 보고(1922.5.18)」(자료18)이다. 안공근의 구두보고는 1922년 4월 29일에 진행되었고 5월 18일에 문건이 정리되었다. 안공근의 보고는 러시아어원문으로 25페이지 달하는 매우 방대한 분량의 것으로 그 목적은 임시정부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하기 위하여 임시정부의 활동과 목표를 밝히고 임시정부가 소비에트정부와 협력할 의도가 있음을 전달하는데 있었다. 그리하여 이 문건에는 임시정부에 관계했거나 관계하고 있는 중심인물들은 물론 한국독립운동의 상황이나 단체와 중요인물들에 대한 정보와 평가가 포함되어 있다. 그리하여 임정 전권대표 이희경과 자신에 대한 소개를 비롯하여 임시정부를 탈퇴한 인물로 각기 고려공산당과 조선대표단을 이끌고 있던 이동휘와 김규식을 매우 비판적으로 평가하는데 상당부분을 할애하고 있다. 또한 한형권과 모스크바 자금의 문제점을 누누이 강조하고 있어 모스크바에서 전개된 독립운동세력 3파간의 외교적 경쟁이 매우 치열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안공근의 편견이 없지 않은 문건이나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사실들이 매우 구체적으로 서술되고 있어 매우 값진 자료라 할 수 있다.

안공근의 구두보고는 한국 혁명운동의 발생-대한민국상해임시정부의 당면과제에 대한 설명, 혁명 정당의 분열, 개별적 인성, 임시정부 활동의 전반적 성격, 임시정부가 정보를 제공한 동기, 대한국민의회와 이르쿠츠크에 있는 한인여단에 관한 상세정보, 최근의 전망과 임시정부의 해외활동, 한국친우회, 총결론으로 구분되어 있다. 문건의 마지막에 안공근은 임시정부를 대변하여 네 가지 질문을 제시하고 이에 대한 답변이 만족하게 될 경우 임시정부가 극동지역에서 수행할 활동계획을 제출하겠다며 끝맺고 있다.

ㄱ. 소비에트 정부는 민족주의, 공산주의 또는 사회주의 운동 중 한국에서 어떤 운동에 대한 지지를 바람직하다고 보는가.

ㄴ. 소비에트 정부는 한국의 혁명을 지지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ㄷ. 만약 준비가 되어 있다면 공산당이나 민족주의 정당 중 무엇을 통해서 지원을 제공할 의도인가.

ㄹ. 소비에트 정부는 대한민국상해임시정부의 사절단에 대해 어떤 관점을 견지하고 있는가. 그리고 향후 그 사절단을 어떻게 대할 것인가.

안공근은 이후 1922년 5월에 적어도 한차례 이상의 추가보고를 한 것으로 보인다. 이 추가보고 내용을 정리한 문건이 「한국임시혁명정부 사절단의 차석 안(공근) 동무가 임시정부의 활동문제와 관련하여 금년5월에 행한 추가 구두 보고의 총괄/개괄 요약/(1922.5.31)」(자료19)이다. 안공근은 이 보고에서 이전의 안공근의 구두보고를 정리한 바를 보충하고 있다. 즉, 이전 보고에서 소개한 바 있는 미국과 영국의 한국친우회에 관한 보충사항, 그리고 이에 더하여 중국의 한중호조사 등을 추가로 소개하고 있다. 특히 이전보고에 이어서 이동휘와 김규식에 대한 비판적인 사실을 추가하고 있으며, 이승만의 인적 배경과 정치적 성장과정에 이어 미국의 위임통치청원을 제출하게 된 과정을 대한 사실을 소개하고 있는 점이 흥미를 끈다. 끝으로 안공근은 ‘명백한 조건하에서 코민테른과의 협력에 동의할 수도 있을 것’임을 밝혔다.

전임대표 한형권의 활동상 문제에 대한 근거를 확보하고 소비에트러시아와 또는 코민테른과의 협력을 모색했던 이희경과 안공근은 “한국과 러시아 양국 정부 간의 긴장된 관계로 인하여 귀국 정부 내에서 자신에게 부여된 직분을 계속해서 수행할 수 없는, 곤란한 상황에 처해 있어” 귀환할 수 밖에 없다는 뜻을 밝힌 1922년 6월 6일자 러시아 외무인민위원장 치체린에게 보내는 통첩을 남기고 있다. 이희경은 이 통첩에서 한형권의 신임장을 반환해줄 것을 요청하는 것으로 끝을 맺고 있다. 이 문건이 「대한민국 상해임시정부의 특별전권대사가 소비에트러시아 외무인민위원회의 치체린에게 발송한 통첩(1922.6.6)」이다(자료20).

1921년 5월 고려공산당(상해파)를 창립하고 국제공산당 파견대표로 선정된 이동휘와 박진순은 모스크바에 도착한 직후 소비에트정부 외무인민위원회에 보고서를 제출하였다(자료13). 이 보고서의 목적은 한인사회당이 소비에트정부로부터 수령한 자금의 지출내역를 밝히는데 있다. 그리하여 한인사회당의 코민테른 파견대표 박진순, 박애, 이한영이 수령한 1차 자금 400만루블(지폐) 그리고 박진순과 임정파견대표 한형권이 수령한 2차 자금 40만루블(금)의 운송과정과 지출, 그리고 1921년 6울 현재의 잔액을 구체적으로 보고하고 있다. 이동휘와 박진순의 이 보고서는 한인사회당의 모스크바 자금에 대한 공식보고서라는데 그 의미가 있다. 이 보고서에서 이동휘와 박진순은 임시정부가 이승만과 안창호의 친미파에 의하여 장악되어 한인사회당의 입장을 반영할 수 없게 되어 1921년 1월 마침내 임정과 결별하게 되고 이후 국민대표회 소집에 나서게 되었다고 설명하고 있다.

한인사회당 당원으로서 임정특사의 직함을 갖고 모스크바에 파견되어 1차자금 40만루블(금)을 수령하여 한인사회당측에 전달하였던 한형권은 적어도 1921년 8월까지 한인사회당과 상해파 고려공산당을 위해 활동하였다. 그러나 이후 추가로 20만루블을 수령하게 되고, 고창일과 함께 1921년 11월말 상해에 도착하게 되면서 국민대표회주비회에 자금을 지원하게 된다. 한형권의 목적은 국민대표회의 소집을 통한 민족혁명 중앙기관을 창립하는데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동휘, 홍도, 박애 등 고려공산당 간부들은 한형권에게 서신을 보내 상해파의 입장을 전달하고자 하였다. 이 서신이 「이동휘, 홍도, 박애가 한형권에게 발송한 서신(1922.3.?)」(자료15)인데 김립이 피살된 사실이 밝혀져 있고, 임시정부에서 이희경과 안공근에게 보낸 서신(자료14)을 동봉하고 있다. 이동휘 등은 한형권에게 “민족대회의 소집 및 코민테른과의 관계수립에 모든 노력을 기울여야만 할 것”이라고 하면서, 상해파의 입장은 “당대회 이후 민족대회를 소집하는 것”임을 밝히고 있다. 이동휘등은 코민테른 집행위 원동부의 지지를 받는 이르쿠츠크파는 ‘극동인민대표회’ 조선대표단과 최고기관을 조직하고 이를 통해 모든 민족단체들을 통합하고자 한다고 비판하고 있다. 이 문건은 1922년 상반기에 민족혁명의 중앙기관 설립을 둘러싼 상해파와 이르쿠츠크파의 대립된 입장이 드러나 있다는 점에서 의미있는 자료라 할 것이다.

서신 「바보와 밀양 전(1922.3.12)」(자료16)은 모스크바의 이동휘, 박애, 홍도가 치타의 계봉우와 박밀양에게 보낸 서한으로 1922년 3월의 상황과 당시 상해파의 입장을 잘 보여주고 있는 문건이다. 원동민족혁명단체대표회(극동인민대회) 조선대표단이 외교대표단(교섭단)을 구성하였는데 구성원은 김규식, 한명세, 김시현, 최창식이며, 공산당중앙위의 승인을 받지 못한 상태에서 사파로프의 지원을 받아 한형권으로부터 자금을 몰수하기 위하여 이희경, 안공근의 지원하에 외무인민위원회를 상대로 협상을 진행하고 있다는 사실을 적시하고 있다. 이 서신에서 이동휘 등은 자신들의 입장이 ‘선당대회 후민족대회 개최’임을 밝히고 당대회는 1922년 6월 1일 치타에서 개최될 예정이라는 사실을 전하고 있다.

「코민테른 집행위원회에 보고한 고려공산당 연합중앙간부 위원 한명세와 안병찬의 보고서」(자료21)는 국민대표회의 소집문제에 관한 고려공산당 양파의 노선차이를 잘 보여주는 문건이다. 이 보고서에서 고려공산당 연합중앙간부의 이르쿠츠크파측 위원인 한명세와 안병찬은 국민대표회의는 고려공산당중앙간부와 극동인민대회 조선대표단이 합동으로 발기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에 비하여 상해파 고려공산당은 조선대표단 외교대표단(교섭단) 4명중 2명의 교체를 선결조건으로 제시하였고, 통합공산당을 창립한 후에 국민대표회의를 개최해야 한다는 입장을 취했다.

상해에서 개최된 국민대표회의에서 한인공산주의자들은 상해파와 이르쿠츠크파가 단일한 공산주의자 프랙션을 형성하지 못하고 각각 민족주의자들과 결합하여 개조파와 창조파를 형성하였다. 「상해에서 개최된 국민대표회의에 한인 공산주의자들에게 행한 호소」(자료22)는 꼬르뷰로(고려중앙국)의 국민대표회의에서 한인공산주의자들에 대한 일종의 지침을 내린 것으로 보이친스키, 이동휘, 한명세 세 위원의 명의로 되어 있다. 이들은 국민대표회의에 참가하고 있는 공산주의자들이 분파를 주도하고 있고 지방과 동향 등에 따라 다양한 민족주의자들과 연합하고 있는 사실에 경고를 보내면서 공산주의분파들을 통일시키고 모든 혁명적그룹들의 통일을 실현할 것을 촉구하였다.

「국민대표회의에 관한 간략한 정보(1923.3.10)」(자료22)는 국민대표회의에 참석하고 있는 김정하가 꼬르뷰로(고려중앙국)의 이동휘와 한명세에 보내는 보고서로서 참가대표들을 상해 임시정부에 대한 태도에 따라 4개 그룹으로, 지도기관에 관한 입장에서 3개 그룹으로 나누어진다고 파악하고 그 구성원들의 분포를 소개하고 있다. 김정하는 3월 9일 윤자영 등이 제출한 임시정부개조안에 찬성하고 있음을 밝히고 있는 점이 주목된다.

꼬르뷰로(고려중앙국)의 회의록은 국민대표회의에 대한 꼬르뷰로의 입장과 대책을 알 수 있는 문건이다. 「국제공산당 동양부 꼬르뷰로 제8차-제15차 의사록」(자료25) 제8차회의(1923년 4월 2일)에서는 국민대표회의에 참석하고 있는 공산주의자들과 민족주의 그룹에 보낼 단일혁명전선의 형성에 관한 호소문을 채택하였다. 보이친스키, 이동휘, 한명세, 이영선이 참석한 이 회의에서 국민대표회의에 대해 평가하면서 공산주의자들이 75명으로 통일되었다면 35명의 민족주의자들에 비하여 절대다수를 차지했을 것이라고 비판하고 있다. 또한 이 회의에서는 임시정부 대신에 새로운 형태의 조직이 불가피하다는 좌파[창조파, 공산주의자 18명, 민족주의자 22명)의 노선이 옳다고 결론내렸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임시정부의 개조를 지지한 중도파(개조파 공산주의자 35명, 민족주의자 35명)은 전술적 실수를 범했다고 평가하고 있다.

제10차회의(1923년 5월 5일)에서는 한명세와 이동휘가 국민대표회의에 참석하기 위하여 상해로 출발하기로 결정하였다. 이들의 출장이 ‘합목적적이며 시의적절하고 특히 공산주의자들이 국민대표회의의 다수를 점하고 있다는 점’이 고려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제11차회의(1923년 7월 10일)에서는 국민대표회의에서 민족적 중심의 창설을 지지한 대표 70명이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하게 될 때 이후의 전술적 입장을 표명하기로 하였다. 아울러 회의는 정확한 정보를 확보하기 위하여 고려중앙국 위원인 장건상과 윤자영을 즉시 소환하기로 결정하였다.

제12차회의(1923년 7월 4일)에서는 이동휘, 한명세, 코민테른 집행위 원동지역 대표 카우프만이 참석하였는데, 국민대표회의에 참석했던 오창환, 박원세, 이충모의 보고서를 확인한 후 대회에 대한 평가를 내렸다. 즉, 대회는 첫째, 조선의 모든 민족 혁명적 요소들을 실질적으로 통일시켜야 한다는 소집 당시의 그런 기대에 도달하지 못하였다. 둘째 6개월 동안 개조파와 창조파로 나뉘어 분파투쟁만 자행했다. 셋째 대회 분열의 본질적인 원인은 공산주의자들간의 이견으로 통일된 프랙션을 형성하지 못한데서 비롯되었다. 좌파(창조파, 공산주의자 23명, 민족주의자 35명)는 새로운 형태의 조직이 불가피하다고 옳게 파악하였지만 조직과정에서 민족혁명당의 토대를 만들어주어야 한다는 과업을 달성하지 못했다. 넷째 중도파(개조파, 공산주의 29명, 민족주의자 10명)는 임정개조라는 전술적 실수를 범했다. 공산주의자들은 고려중앙국의 명령에 불복하고 당규율을 여겼다. 중도파(개조파)를 이끈 윤자영은 공산주의자들의 통일된 프랙션을 성립시킨다는 임무를 지키지 않고 오히려 분파투쟁을 심화시킨 장본인이라고 비판하였다.

이러한 평가는 기본적으로 고려중앙국이 창조파인 오창환 등의 보고를 중시한데 따른 것으로 창조파가 다수를 차지했고 옳은 노선에 서있다는 입장을 갖고 있는 한명세의 의견이 반영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한명세의 입장은 그가 꼬르뷰로 副長 보이친스키에게 보낸 서한에 잘 나타나 있다. (「보이친스키에게 보낸 한명세의 서한(1923년 7월 4일)」(자료26) 즉, 한명세는 창조파와 개조파가 분열된 사실을 언급하면서 60명의 대표들(공산주의자 25명, 민족주의자 35명)이 새로운 중심을 창조한데 반하여, 40명의 대표들(공산주의자 29명, 민족주의자 15명 정도)이 고려중앙국 위원 윤자영을 수장으로 하여 임정개조를 지지했다고 하면서 대회를 탈퇴한데 대하여 비판하였다. 한명세는 창조파가 조직한 국민위원회의 집행위원 김규식, 김응섭, 신숙, 윤덕보 등을 우호적으로 소개하고 있다. 한명세는 또한 국민위원회는 정부의 구조와 차이가 없어 인민혁명당 건설 노선에 따라 조직적 구조를 변경하려는 전술을 유지해야 하지만 이들 집행위원을 보유한 상태에서 이들을 중심으로 민족문제를 해결해 나가야 한다고 우호적 입장을 보여주고 있다.

「국제공산당 집행위원회 고려중앙국(꼬르뷰로)에(1923.3.13」(자료24)는 꼬르뷰로(국제공산당 원동부 고려중앙국)에서 국민대표회의에 파견한 김만겸이 제출한 보고서로 1923년 2월 24일에 상해에 도착한 이후의 활동, 통일된 공산주의자 프랙션을 성립시키기 위한 노력, 대표들의 분파, 상해파와 이르쿠츠크파 공산주의자들의 성향과 동향을 분석한 공산주의세력 내부 문건이다.

이 문건에서 주목을 끄는 것은 3월 6일에 상해파측, 이르쿠츠크파측, 김만겸이 참여하는 첫 번째 삼인방 회의에서 마링이 제시한바 단일한 공산주의자 프랙션(분파)의 형성원칙을 현재 상황에서 적용할 수 없으며, “어느 그룹에 속하든 관계없이 고려중앙국이 제시한 강령을 따르고 있는 모든 그룹들과 인사들로 집단을 형성”하고 “민족중심의 조직과 관련된 모든 중요한 문제들에 있어서 우리와 견해를 공유하는 민족주의자들과 함께 선언문을 먼저 발표”하자는 것으로 결정지었다는 것이다. 이후 3월 9일의 국민대표회의에서 윤자영 등 개조파 그룹이 임정개조안을 제의하게 되자, 3월 10일의 회의에서 마링과 김만겸은 윤자영 동지를 제외한 상태로 민족당 위원회의 형태로 민족중심의 조직을 위한 캠페인을 벌이고 이의 지도권을 마링에게 이양하고 마링은 이르쿠츠크파 장건상과 접촉하기로 결정하였다는 것이다. 마링이 주도한 안은 결국 창조파의 노선이 되었다. 김만겸의 보고에서 알 수 있는 것은 국민대표회의 결렬이 이미 공산주의자들 내부에서 시작되었고, 3월 9일 윤자영등의 개조안 제출이 대표회의의 분기점이었음을 알 수 있다.

「꼬르뷰로(고려중앙국)에 보내는 보이친스키 서신(1923.8.7)」(자료28)은 보이친스키가 꼬르뷰로에 국민위원회의 대표격인 김규식을 블라디보스톡으로 초청하여 민족당을 위해 조선 내에서의 선전 및 국민위원회의 조직적 형태에 관하여 합의해보자고 제안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國際共産黨 高麗部와 韓國國民委員會 代表들의 합의한 의사록(1923.10.10」(자료31)에는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에서 1923년 10월 10일 꼬르뷰로측(파인베르르, 김만겸, 이동휘)과 국민위원회측(김규식, 윤해, 신숙, 이청천, 원세훈)이 회의를 갖고 김규식과 파인베르그가 준비한 혁명적 민족당의 강령과 프로그램, 당조직 방식에 관한 초안을 토의 채택한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양측은 각자의 기관에서 이 초안에 대한 인준을 받고 국민위원들은 혁명적 민족당 성립에 필요한 순서에 착수하기로 결의하였다. 국민위원회측에게 국제공산당의 노선인 민족혁명당 조직이 관철된 회의라 할 수 있다.

이동휘가 국제공산당 집행위원회에 보낸 서한이 「國際共産黨 遠東部 高麗中央局 위원 李東輝, 國際共産黨 집행부에게(1923.11.17)」이다(자료33). 이동휘는 원동고려국(꼬르뷰로, 고려중앙국) 성립이래 보이친스키와 한명세가 일관되게 파당적으로 활동해온 사실을 적시하며 비판하고 있다. 일본인 공산주의자 카타야마 센(片山潛)을 고려하여 일본어로 썼지만 러시아어본도 있다. 이동휘는 국민대표회의가 개조, 창조, 중립의 3파로 분열된 사실, 창조파가 “단지 명의뿐인 국민위원회를 조직했으면서도 블라디보스토크에 와서는 2천만 민중의 대표이며 조선혁명의 대표기관이라고 자칭했다”고 비판했다. 이동휘는 국민위원회가 종전의 ‘국민의회의 후신’이라고 비판하며 파인부르그와 국민의회의 일원이었던 한명세가 이를 옹호하며 이들이 국민혁명기관을 설치하는데 참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고 비판했다. 꼬르뷰로(고려중앙국)의 국민위원회에 대한 일방적 지원방침은 국민의회 일원이었던 한명세의 주선임이 분명하다고 지적하고 있다.

「조선 민족운동의 통일을 위하여」(자료31)는 꼬르뷰로(고려중앙국)가 1923년 10월 10일 국민위원회측과의 회의(제1권 자료31 참조)에서 결정된 사항을 실행에 옮기기 위한 조처로 작성된 문건이다. 그리하여 이 문건에서 꼬르뷰로는 민족혁명 단체에게 민족적 혁명당으로서의 한국독립당의 조직의 필요성을 제기하고 있는데 한국독립당의 강령과 프로그램을 첨부하여 놓았다.

「국민대표회의에서의 ‘개조파’와 ‘창조파’ 분열의 원인과 그 결과(1923.11.24)」(자료34)는 국민대표회의에서 창조파의 지도자로 활약한 윤해와 국민위원회 국무위원으로 활동한 김규식이 창조파의 입장에서 국민대표회의가 분열된 과정과 원인에 대하여 정리한 문건이다.

「국제공산당 동양부 꼬르뷰로 제22차 의사록(1923.12.8)」(자료35)는 꼬르뷰로 위원인 이동휘와 한명세간에 국민대표회의에서 만들어진 국민위원회에 대한 평가가 어떻게 다른지를 명백하게 보여주는 문건이다. 대화형식으로 된 이 회의록을 보면 이 회의에서 한명세는 민족혁명당(국민위원회 총회의 즉각적인 소집을 주창했고. 이동휘와 전우(정재달)은 반대했다. 카타야마 센과 파인베르그 등은 한명세의 입장을 지지했다.

「第三國際共産黨全權委員 片山 同志 殿(1923.12.13)」(자료36)은 이동휘가 카타야마에게 보낸 일본어로 된 서한이다. 국민대표회의와 창조파가 조직한 국민위원회에 대한 이동휘의 주장이 명쾌하게 정리되어 있는 문건이다. 이동휘는 창조파가 국민대표회의가 파열된 기회를 이용하여 “대회의 美名을 竊取”하여 국민위원회를 산출하였다고 하면서 이는 종래 임시정부와 대치하며 必死戰을 한 대한국민의회의 계통적 후신”이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일반여론인 창조파를 성토하면서 동시에 개조파까지 동일하게 질책하게 되었다고 분석하였다. 이동휘는 국민위원회의 중요인물인 윤해, 원세훈, 신숙, 오창환, 김규식 등에 대하여 구체적인 인물평을 곁들여 비판적으로 소개하고 있다.

「조선 민족운동 문제에 관한 테제들(1924.2.12)」(자료38)는 보이친스키가 작성한 초안으로서 국민위원회에 대한 긍정적 입장이 드러나 있다. 즉 보이친스키는 국민대표회의와 국민위원회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상해 국민대표회의 그리고 본 대회에 의해 분리되어 나와, 조선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국민위원회’라고 불리는 기관은 조선 내에 있는 민족그룹들와 조직들이 통일로 향하는 과정에서 달성한 업적 중 하나로 고려되어야만 한다.”

본 해제작성에는 조철행 박사의 학위논문 「국민대표회 전후 민족운동 최고기관 조직론 연구」(고려대학교 대학원 사학과, 2010년 12월)이 크게 도움이 되었다. 특히 자료집 편찬과정에서 도움을 준 조철행 박사에 감사한다.

반병률(한국외대 사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