百濟의 무례함을 책망. 백제는 辰斯王을 죽여 사죄하고 阿花가 즉위 ( 272년 (음) )

(3년) 이 해001001 이 해이 해는 壬辰年이다. 그러나 百濟의 阿花(莘)王이 즉위한 해는 392년 壬辰年이므로, 『日本書紀』 紀年을 2巡 수정하면 『三國史記』의 기사와 일치하게 된다.닫기 百濟의 辰斯王이 왕위에 있으면서 貴國(日本)의 天皇에게 예의를 잃었으므로,002002 百濟의 辰斯王이 ~ 예의를 잃었으므로‘貴國에 예의를 잃었다’는 표현은 應神紀 8년조 注文을 통하여도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百濟가 日本의 對韓政策에 따르지 않을 때 많이 사용하는 말이다. 이 기사의 경우는 百濟의 對高句麗정책과 관련이 있다고 보여진다. 즉 당시 辰斯王은 高句麗의 南下政策에 대하여 적극적으로 대처하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왕이 죽던 해인 辰斯王 8년 7월에는 『三國史記』 百濟本紀에 “高句麗王德談(廣開土王) 帥兵四萬 來攻北鄙 陷石峴等十餘城 王聞德談能用兵 不得出拒 漢水北諸部落 多沒焉”이라 되어 있는 바와 같이, 高句麗 廣開土王에게 漢水 以北의 諸城을 빼앗기기도 하였다.닫기紀角宿禰·羽田矢代宿禰·石川宿禰·菟木宿禰를 파견하여 그 무례함을 책망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百濟國에서는 辰斯王을 죽여 사죄하였다.003003 이로 말미암아 ~ 사죄하였다辰斯王의 죽음에 대하여 『三國史記』 百濟本紀 辰斯王 8년조에는 “王田於狗原 經旬不返 十一月 薨於狗原行宮”이라고 되어 있다. 이 문장의 표현형식으로 미루어 辰斯王이 불시에 고의적으로 죽임을 당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는데, 『日本書紀』에 보이는 이 기록은 그 진상을 전하는 것이라 보여진다. 辰斯王의 즉위에 대하여는 『三國史記』 百濟本紀에 “太子(阿花)少 故叔父辰斯卽位”라고 되어 있고, 『日本書紀』 神功皇后條에 “王子阿花年少 叔父辰斯奪立爲王”이라고 되어 있어서, 즉위에 이르기까지 조카 阿花와의 사이에 갈등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따라서 辰斯王의 죽음은 이와 같은 왕위계승상의 문제 및 당시 百濟의 對高句麗정책과 그에 따른 日本의 대응 등과 크게 관련이 있을 것으로 추측된다.닫기紀角宿禰 등은 阿花를 왕으로 세우고004004 阿花를 왕으로 세우고阿花王에 대하여 『三國史記』 百濟本紀에는, “阿莘王或云 阿芳枕流王之元子 ····· 王薨時年少 故叔父辰斯繼位 八年薨 卽位”라고 되어 있고, 『三國遺事』 王曆에는, “第十七阿莘王 一作河芳 辰斯子 壬辰立 治十五年”이라고 되어 있어, 약간의 차이를 보이고 있다. 阿花와 阿莘·阿芳·河芳을 비교해 보면, 花와 芳은 뜻이 통하고, 音 또한 비슷하다. 그러나 莘은 花와 음이나 뜻이 통하지 않기 때문에, 아마도 莘은 華의 誤字가 아닐까 한다. 따라서 阿花 또는 阿華라 하는 것이 옳다고 하겠다. 阿花王의 즉위에 이르는 사정은 辰斯王의 즉위 및 죽음과 관련하여 이미 설명한 바 있다. 阿花王의 재위 15년 동안에는 중국에 조공사신을 보낸 기사가 보이지 않는다. 『三國史記』 百濟本紀에는 同王代에 高句麗와 해마다 전쟁이 계속되었고, 倭와의 교섭도 여러모로 행해졌음을 기록하고 있다.닫기 돌아왔다.

註 001
이 해 : 이 해는 壬辰年이다. 그러나 百濟의 阿花(莘)王이 즉위한 해는 392년 壬辰年이므로, 『日本書紀』 紀年을 2巡 수정하면 『三國史記』의 기사와 일치하게 된다.
註 002
百濟의 辰斯王이 ~ 예의를 잃었으므로 : ‘貴國에 예의를 잃었다’는 표현은 應神紀 8년조 注文을 통하여도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百濟가 日本의 對韓政策에 따르지 않을 때 많이 사용하는 말이다. 이 기사의 경우는 百濟의 對高句麗정책과 관련이 있다고 보여진다. 즉 당시 辰斯王은 高句麗의 南下政策에 대하여 적극적으로 대처하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왕이 죽던 해인 辰斯王 8년 7월에는 『三國史記』 百濟本紀에 “高句麗王德談(廣開土王) 帥兵四萬 來攻北鄙 陷石峴等十餘城 王聞德談能用兵 不得出拒 漢水北諸部落 多沒焉”이라 되어 있는 바와 같이, 高句麗 廣開土王에게 漢水 以北의 諸城을 빼앗기기도 하였다.
註 003
이로 말미암아 ~ 사죄하였다 : 辰斯王의 죽음에 대하여 『三國史記』 百濟本紀 辰斯王 8년조에는 “王田於狗原 經旬不返 十一月 薨於狗原行宮”이라고 되어 있다. 이 문장의 표현형식으로 미루어 辰斯王이 불시에 고의적으로 죽임을 당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는데, 『日本書紀』에 보이는 이 기록은 그 진상을 전하는 것이라 보여진다. 辰斯王의 즉위에 대하여는 『三國史記』 百濟本紀에 “太子(阿花)少 故叔父辰斯卽位”라고 되어 있고, 『日本書紀』 神功皇后條에 “王子阿花年少 叔父辰斯奪立爲王”이라고 되어 있어서, 즉위에 이르기까지 조카 阿花와의 사이에 갈등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따라서 辰斯王의 죽음은 이와 같은 왕위계승상의 문제 및 당시 百濟의 對高句麗정책과 그에 따른 日本의 대응 등과 크게 관련이 있을 것으로 추측된다.
註 004
阿花를 왕으로 세우고 : 阿花王에 대하여 『三國史記』 百濟本紀에는, “阿莘王或云 阿芳枕流王之元子 ····· 王薨時年少 故叔父辰斯繼位 八年薨 卽位”라고 되어 있고, 『三國遺事』 王曆에는, “第十七阿莘王 一作河芳 辰斯子 壬辰立 治十五年”이라고 되어 있어, 약간의 차이를 보이고 있다. 阿花와 阿莘·阿芳·河芳을 비교해 보면, 花와 芳은 뜻이 통하고, 音 또한 비슷하다. 그러나 莘은 花와 음이나 뜻이 통하지 않기 때문에, 아마도 莘은 華의 誤字가 아닐까 한다. 따라서 阿花 또는 阿華라 하는 것이 옳다고 하겠다. 阿花王의 즉위에 이르는 사정은 辰斯王의 즉위 및 죽음과 관련하여 이미 설명한 바 있다. 阿花王의 재위 15년 동안에는 중국에 조공사신을 보낸 기사가 보이지 않는다. 『三國史記』 百濟本紀에는 同王代에 高句麗와 해마다 전쟁이 계속되었고, 倭와의 교섭도 여러모로 행해졌음을 기록하고 있다.
국가명
百濟
주제분류
정치>왕실>국왕>신상
정치>왕실>국왕>즉위·책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