百濟의 來朝[直支를 보내 우호를 다짐] ( 277년 03월(음) )

8년 봄 3월 百濟人이 來朝하였다『百濟記』에는, “阿花王이 왕위에 있으면서 貴國에 예의를 갖추지 않았으므로001001 阿花王이 ~ 갖추지 않았으므로‘예의를 갖추지 않았다(無禮於貴國)’고 한 것은 앞서 살펴본 辰斯王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高句麗에 대한 굴종을 말하는 것으로 이 해된다. 高句麗의 공격에 대하여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던 辰斯王을 제거하고 즉위한 阿花王은 당연히 高句麗에 대하여 강경책을 취하였다. 『三國史記』 百濟本紀 阿莘王 2년 가을 8월 기사에, “王謂武曰 關彌城者 我北鄙之襟要也 今爲高句麗所有 此寡人之所痛惜 而卿之所宜用心而雪恥也 遂謀將兵一萬 伐高句麗南鄙 ···· ”라 되어 있는 것을 통하여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즉위 직후부터 阿花王은 高句麗에 빼앗긴 漢水 以北의 諸城을 되찾기 위하여 北進을 개시하였다. 그리하여 同王 3년과 4년에 계속적으로 高句麗와의 전투가 벌어졌다. 그러나 「廣開土王碑文」의 丙申年(396) 기사에 의하면, 阿花王 5년 고구려의 廣開土王은 대규모로 南進하여 百濟의 王都를 공략하고 百濟王을 臣伏시켰다고 하였는데, ‘無禮於貴國’이라는 표현은 바로 이와 같은 상황과 관련이 깊으며, 이 때문에 百濟는 王子 直支를 日本에 보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닫기 (日本이) 우리의 枕彌多禮 및 峴南·支侵·谷那·東韓의 땅002002 峴南·支侵·谷那·東韓의 땅4개를 각각 별개의 지역으로 보는 설이 있고, ‘峴南·支侵·谷那 등 東韓의 땅’이라고 하여, ‘東韓의 땅’이 위의 세 곳을 총칭한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후자는 應神天皇 16년 是歲條 分注에, “東韓者 甘羅城·高難城·爾林城是也”라고 되어 있는 것을 취한 해석이다. 즉 峴南을 甘羅에, 支侵爾林에, 그리고 谷那를 高難에 비정한 것이다. 그 각각이 구체적으로 어디를 가리키는지 잘 알 수 없지만, 대체로 峴南은 全北방면이 아닐까 추정되며, 支侵은 忠淸南道 洪城·大興 부근, 谷那는 全羅南道 谷城일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닫기을 빼앗았다. 이에 왕자 直支003003 直支『三國史記』에는 腆支, 『宋書』에는 映이라고 쓰여 있다. 直支를 日本에 보낸 사실은 『三國史記』 百濟本紀 阿莘王 6년 5월조에도, “王與倭國結好 以太子腆支爲質”이라 기록되어 있어, 『日本書紀』의 기사와 일치한다. 그는 阿花王이 죽은 뒤에 百濟에 돌아와 왕위를 계승하였다(應神天皇 16년 是歲條 참조).닫기를 天朝(일본조정)에 보내어 先王의 우호를 닦게 하였다”고 되어 있다.

註 001
阿花王이 ~ 갖추지 않았으므로 : ‘예의를 갖추지 않았다(無禮於貴國)’고 한 것은 앞서 살펴본 辰斯王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高句麗에 대한 굴종을 말하는 것으로 이 해된다. 高句麗의 공격에 대하여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던 辰斯王을 제거하고 즉위한 阿花王은 당연히 高句麗에 대하여 강경책을 취하였다. 『三國史記』 百濟本紀 阿莘王 2년 가을 8월 기사에, “王謂武曰 關彌城者 我北鄙之襟要也 今爲高句麗所有 此寡人之所痛惜 而卿之所宜用心而雪恥也 遂謀將兵一萬 伐高句麗南鄙 ···· ”라 되어 있는 것을 통하여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즉위 직후부터 阿花王은 高句麗에 빼앗긴 漢水 以北의 諸城을 되찾기 위하여 北進을 개시하였다. 그리하여 同王 3년과 4년에 계속적으로 高句麗와의 전투가 벌어졌다. 그러나 「廣開土王碑文」의 丙申年(396) 기사에 의하면, 阿花王 5년 고구려의 廣開土王은 대규모로 南進하여 百濟의 王都를 공략하고 百濟王을 臣伏시켰다고 하였는데, ‘無禮於貴國’이라는 표현은 바로 이와 같은 상황과 관련이 깊으며, 이 때문에 百濟는 王子 直支를 日本에 보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註 002
峴南·支侵·谷那·東韓의 땅 : 4개를 각각 별개의 지역으로 보는 설이 있고, ‘峴南·支侵·谷那 등 東韓의 땅’이라고 하여, ‘東韓의 땅’이 위의 세 곳을 총칭한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후자는 應神天皇 16년 是歲條 分注에, “東韓者 甘羅城·高難城·爾林城是也”라고 되어 있는 것을 취한 해석이다. 즉 峴南을 甘羅에, 支侵爾林에, 그리고 谷那를 高難에 비정한 것이다. 그 각각이 구체적으로 어디를 가리키는지 잘 알 수 없지만, 대체로 峴南은 全北방면이 아닐까 추정되며, 支侵은 忠淸南道 洪城·大興 부근, 谷那는 全羅南道 谷城일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註 003
直支 : 『三國史記』에는 腆支, 『宋書』에는 映이라고 쓰여 있다. 直支를 日本에 보낸 사실은 『三國史記』 百濟本紀 阿莘王 6년 5월조에도, “王與倭國結好 以太子腆支爲質”이라 기록되어 있어, 『日本書紀』의 기사와 일치한다. 그는 阿花王이 죽은 뒤에 百濟에 돌아와 왕위를 계승하였다(應神天皇 16년 是歲條 참조).
국가명
百濟
주제분류
정치>외교>사신>파견·영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