任那와 百濟의 대립 ( 487년 (음) )

이 해 紀生磐宿禰가 任那를 점거하고 高麗와 교통하였으며, 서쪽에서 장차 三韓의 왕노릇하려고 官府를 정비하고 스스로 神聖이라고 칭하였다. 任那의 左魯·那奇他甲背 등이 계책을 써서 百濟의 適莫爾解爾林001001 爾林爾林城인데, 지금의 충청남도 大興(옛 이름 任城郡)에 해당한다는 설도 있고 전라북도 金堤郡 利城(옛 이름 乃利阿)에 비정되기도 한다. 細註에서 고려의 땅이라 한 것은 고구려 전성기의 판도로 보아도 무리일 듯하다. 한편 고구려 광개토왕 영락 6년(396)의 정벌 때 수군이 남한강 상류로 진출하여 충주지역을 차지하고 國原城을 두어 소백산맥 이남으로 진출하였다는 견해도 있다(李道學, 「永樂 6年 廣開土王의 南征과 國原城』, 『孫寶基博士停年紀念 韓國史學論叢』,知識産業社, 1988).닫기에서 죽이고爾林은 高麗의 땅이다帶山城002002 帶山城지금의 전라북도 井邑郡 泰仁面이 신라시대에 帶山縣이었으므로(『三國史記』 권 37, 地理志) 이 곳으로 비정되고 있다.닫기을 쌓아 동쪽 길을 막고 지켰으며, 군량을 운반하는 나루를 끊어 군대를 굶주려 고생하도록 하였다. 百濟의 왕이 크게 화가 나, 領軍003003 領軍백제의 軍政에서 동서남북과 중앙 5方에 있었던 領軍으로 추정하기도 하지만 자세하지 않다.닫기古爾解·內頭004004 內頭백제의 1품관직인 6佐平 중 하나인 內頭佐平으로, 재정관계 업무를 담당하였다. 『三國史記』에 의하면 내두좌평을 고이왕 27년(260) 설치했다고 하나, 사비 천도 이후에 좌평제도가 완비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닫기莫古解005005 莫古解백제 근초고왕 24년(369)에 고구려 고국원왕이 침입하자 태자와 함께 출전하여 격퇴한 장군의 이름이 막고해인데, 약 120여 년간의 연대 차이가 있으므로 동일인물이라고 보기는 어려울 듯하다.닫기 등을 보내 무리를 거느리고 帶山城에 나아가 공격하게 하였다. 이에 生磐宿禰는 군대를 내보내 맞아 쳤는데 膽力이 더욱 왕성하여 향하는 곳마다 모두 깨뜨리니 한 사람이 백 사람을 감당할 정도였다. (그러나) 얼마 후 군대의 힘이 다하니 일이 이루어지지 못할 것을 알고 任那로부터 돌아왔다. 이로 말미암아 百濟國이 左魯·那奇他甲背 등 300여 인을 죽였다.

註 001
爾林 : 爾林城인데, 지금의 충청남도 大興(옛 이름 任城郡)에 해당한다는 설도 있고 전라북도 金堤郡 利城(옛 이름 乃利阿)에 비정되기도 한다. 細註에서 고려의 땅이라 한 것은 고구려 전성기의 판도로 보아도 무리일 듯하다. 한편 고구려 광개토왕 영락 6년(396)의 정벌 때 수군이 남한강 상류로 진출하여 충주지역을 차지하고 國原城을 두어 소백산맥 이남으로 진출하였다는 견해도 있다(李道學, 「永樂 6年 廣開土王의 南征과 國原城』, 『孫寶基博士停年紀念 韓國史學論叢』,知識産業社, 1988).
註 002
帶山城 : 지금의 전라북도 井邑郡 泰仁面이 신라시대에 帶山縣이었으므로(『三國史記』 권 37, 地理志) 이 곳으로 비정되고 있다.
註 003
領軍 : 백제의 軍政에서 동서남북과 중앙 5方에 있었던 領軍으로 추정하기도 하지만 자세하지 않다.
註 004
內頭 : 백제의 1품관직인 6佐平 중 하나인 內頭佐平으로, 재정관계 업무를 담당하였다. 『三國史記』에 의하면 내두좌평을 고이왕 27년(260) 설치했다고 하나, 사비 천도 이후에 좌평제도가 완비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註 005
莫古解 : 백제 근초고왕 24년(369)에 고구려 고국원왕이 침입하자 태자와 함께 출전하여 격퇴한 장군의 이름이 막고해인데, 약 120여 년간의 연대 차이가 있으므로 동일인물이라고 보기는 어려울 듯하다.
국가명
加耶
高句麗
三韓
百濟
주제분류
정치>군사>전쟁>전투유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