任那가 毛野臣의 횡포를 고함. 百濟와 新羅의 毛野臣 공격 ( 530년 09월(음) )

(24년, 530) 가을 9월 임나의 사신이 “毛野臣이 드디어 久斯牟羅에서 집을 짓고 2년어떤 책에 3년이라고 한 것은 가고 온 해를 센 것이다을 머물며 다스리기를 게을리 하였습니다. 이에 일본인과 임나인이 자식 때문에 자주 다투었으나 해결하기 어려웠고 처음부터 판결할 수도 없었습니다. 毛野臣은 즐겨 誓湯001001 誓湯일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기 위하여 沐浴齊戒하고 神에게 맹서한 후 손을 熱湯에 집어 넣게 하여 나쁜 짓을 한 자는 그 손이 짓무르도록 함으로써 판결을 내리는 고대 재판의 한 방법이다.닫기을 설치해 놓고 ‘진실된 사람은 문드러지지 않을 것이고 거짓된 사람은 반드시 문드러질 것이다’라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탕에 던져져 데어 죽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또 吉備의 韓子 那多利·斯布利大日本人이 蕃女를 취하여 낳은 자식을 韓子라 한다를 죽이고 人民을 괴롭혔으며 끝내 화해시키지 못하였습니다”라 아뢰었다. 이에 천황이 그 행실을 듣고 사람을 보내어 불러 들였으나 오려고 하지 않았다. 도리어 河內母樹馬飼首御狩로 하여금 서울에 나아가 “臣은 王命을 이루지 못하였는데 서울로 되돌아간다면 힘써 갔다가 헛되이 돌아가는 것이 되니 부끄러워 편안할 수 없습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폐하께서는 國命을 이루고 조정에 들어가 謝罪할 때까지 기다려 주십시요”라 아뢰게 하였다. 使者를 보낸 후 다시 스스로 꾀하기를 “그 調吉士002002 調吉士이름은 不明인데 近江毛野臣을 소환하는 조정의 使臣이었다. 調吉士는 백제에서 歸化한 씨족으로 보고 있으며 欽明天皇 23년 7월 是月조에 調吉士伊企儺의 이름이 보인다.닫기는 또한 皇華의 使者이니 만약 나보다 먼저 돌아가서 사실대로 아뢰면 나의 罪過는 반드시 무겁게 될 것이다”라 하였다. 이에 調吉士를 보내어 무리를 거느리고 伊斯枳牟羅城003003 伊斯枳牟羅城어느 곳인지 분명하지 않다.닫기을 지키게 했다. 이에 阿利斯等은 (毛野臣이) 사소한 일만 일삼고 맡은 바 임무에 힘쓰지 않는 것을 알고 歸朝할 것을 자주 권했으나 오히려 돌아가지 않았다. 이 때문에 (阿利斯等은 毛野臣의) 행적을 다 알아서 배반하려는 마음이 생겼으므로 久禮斯己母004004 久禮斯己母다른 곳에 보이지 않는다.닫기를 보내어 신라에 가서 請兵하고 奴須久利005005 奴須久利다른 곳에 보이지 않는다.닫기를 백제에 보내어 청병했다. 毛野臣이 百濟兵이 온다는 것을 듣고 背評006006 背評어디를 가리키는지 자세하지 않으나 熊川으로 비정하는 견해가 있으며 23년 4월 是月조에서 신라가 빼앗았다고 한 4村 가운데 하나인 背伐과 같은 곳인지도 모르겠다.닫기背評은 지명인데 또한 能備己富里라고도 한다에서 맞아 토벌했는데 부상하거나 죽은 자가 반이었다. 백제는 奴須久利를 붙잡아 형틀을 채우고 쇠사슬로 묶어놓고 신라와 함께 성을 에워쌌다. 阿利斯等을 책망하며 꾸짖기를 “毛野臣을 내줄 수 있겠는가”라 하였다. 毛野臣은 城에 의지하여 스스로 굳게 지켰으므로 사로잡을 수 없었다. 이에 두 나라는 편리한 곳을 찾아 한 달을 머물다가 성을 쌓고 돌아갔는데 久禮牟羅城007007 久禮牟羅城경북 達城郡 서쪽의 玄風 琵瑟山 일대로 보는 견해가 있고, 久斯牟羅를 지금의 昌原으로 比定하고 久禮牟羅城의 築城 주체는 백제였으므로 창원에서 咸安 사이의 어느 곳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닫기이라 한다. 돌아올 때 길목의 騰利枳牟羅·布那牟羅·牟雌枳牟羅·阿夫羅·久知波多枳의 다섯 성008008 다섯 城騰利枳牟羅 등 5성을 함락시킨 주체에 관해서는 이 기사를 앞의 23년 3월조에 보이는 3城과 5城의 공략사건과 같은 것으로 취급하여 그 주체를 신라로 보는 견해가 있고, 두 기사를 별개의 것으로 보고 여기서의 주체를 백제로 보는 설이 있다. 5성의 위치에 관해서는 대구에서 昌寧에 걸치는 지역으로 보기도 하고 창원 북부지역으로부터 靈山, 密陽 일대까지 이르는 지역으로 보는 경우도 있다. 阿夫羅는 경북 서남부의 玄風 방면, 久知波多枳는 達城郡 求智面 城山洞이 아닐까 추정하는 견해도 있다.닫기을 쳐부수었다.

註 001
誓湯 : 일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기 위하여 沐浴齊戒하고 神에게 맹서한 후 손을 熱湯에 집어 넣게 하여 나쁜 짓을 한 자는 그 손이 짓무르도록 함으로써 판결을 내리는 고대 재판의 한 방법이다.
註 002
調吉士 : 이름은 不明인데 近江毛野臣을 소환하는 조정의 使臣이었다. 調吉士는 백제에서 歸化한 씨족으로 보고 있으며 欽明天皇 23년 7월 是月조에 調吉士伊企儺의 이름이 보인다.
註 003
伊斯枳牟羅城 : 어느 곳인지 분명하지 않다.
註 004
久禮斯己母 : 다른 곳에 보이지 않는다.
註 005
奴須久利 : 다른 곳에 보이지 않는다.
註 006
背評 : 어디를 가리키는지 자세하지 않으나 熊川으로 비정하는 견해가 있으며 23년 4월 是月조에서 신라가 빼앗았다고 한 4村 가운데 하나인 背伐과 같은 곳인지도 모르겠다.
註 007
久禮牟羅城 : 경북 達城郡 서쪽의 玄風 琵瑟山 일대로 보는 견해가 있고, 久斯牟羅를 지금의 昌原으로 比定하고 久禮牟羅城의 築城 주체는 백제였으므로 창원에서 咸安 사이의 어느 곳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註 008
다섯 城 : 騰利枳牟羅 등 5성을 함락시킨 주체에 관해서는 이 기사를 앞의 23년 3월조에 보이는 3城과 5城의 공략사건과 같은 것으로 취급하여 그 주체를 신라로 보는 견해가 있고, 두 기사를 별개의 것으로 보고 여기서의 주체를 백제로 보는 설이 있다. 5성의 위치에 관해서는 대구에서 昌寧에 걸치는 지역으로 보기도 하고 창원 북부지역으로부터 靈山, 密陽 일대까지 이르는 지역으로 보는 경우도 있다. 阿夫羅는 경북 서남부의 玄風 방면, 久知波多枳는 達城郡 求智面 城山洞이 아닐까 추정하는 견해도 있다.
국가명
加耶
新羅
百濟

주제분류
정치>군사>전쟁>전투유형